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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6.02.08. 12:41 (2026.02.08. 12:41)

최초 최신 디젤엔진 장착 선박 2척 인수하러 스웨덴 도착...한국 항해 중 선박기술 습득해 고급 선원 양성

 
윤상송의 海運 報國
1949년 12월 20일 오후 2시 서울 소공동 대한상공회의소 제1 회의실에서 ‘대한해운공사 창립총회’가 열려 우리나라 최초의 국책회사가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이날의 총회는 신규 회사의 정식 업무 개시일을 1950년 1월 1일로 잡고 새 정관을 채택한 뒤, 초대 사장에 김용주, 부사장에 박경직(朴慶稙), 이사에 홍성하(洪性夏), 석두옥(石斗鈺), 권석신(權石臣), 김종섭(金鍾變), 김영택(金永澤), 윤상송(尹常松), 김인형(金仁炯), 조헌영(趙憲泳), 한개(韓介), 김정식(金廷植), 감사에 송인환(宋仁煥), 이재순(李載淳), 나우순(羅羽淳)을 각각 선임하였다.
윤상송의 海運 報國
 
 
1949년 12월 20일 오후 2시 서울 소공동 대한상공회의소 제1 회의실에서 ‘대한해운공사 창립총회’가 열려 우리나라 최초의 국책회사가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이날의 총회는 신규 회사의 정식 업무 개시일을 1950년 1월 1일로 잡고 새 정관을 채택한 뒤, 초대 사장에 김용주, 부사장에 박경직(朴慶稙), 이사에 홍성하(洪性夏), 석두옥(石斗鈺), 권석신(權石臣), 김종섭(金鍾變), 김영택(金永澤), 윤상송(尹常松), 김인형(金仁炯), 조헌영(趙憲泳), 한개(韓介), 김정식(金廷植), 감사에 송인환(宋仁煥), 이재순(李載淳), 나우순(羅羽淳)을 각각 선임하였다.
 
당시 대한해운공사는 조선총독부의 국책회사로 세워진 조선우선(주)이 모태로 김용주가 자기 소유의 조선우선 주식 지분을 출연하고 정부의 출자를 받아 대한해운공사를 설립하였다. 이 회사는 1980년에는 대한선주로 사명을 변경하였다. 34세의 윤삼송은 선박담당 상무이사로 승진 선임되었는데, 당시 운항하는 선박이 5, 6척에 지나지 않았으나 교통부가 운영하던 20여 척의 선단을 인수하여 2,000여 명의 선원을 통괄하게 되었다. 대한해운공사는 초기에 선박 운영에 있어 선원 간에 알력이 자주 빚어져 이를 해소하기 위해 혼승(混乗)을 실시하였다. 진해상선을 졸업한 지석남 기관장의 폭넓은 지원과 협조로 선내질서를 빠르게 확립했다.
 
대한해운공사 창립총회(사진:eusu)
 
당시 조선우선(주)은 미군정청과 교섭하여 미국 정부로부터 1,800톤급 볼틱형 선박 6척과 약 560톤급의 FS형 선박 6척을 대여받아 점차 기반을 굳혀 나아갈 수 있었다. 한편 미 군정청은 당장 시급한 발전용 석탄의 수송을 연합군 사령부 측에 요청하였다. 이 요청에 응하여 2차선으로 입항한 선박이 구 조선우선 소속의 김천(金泉)호였다.
 
김천호는 총톤수 3,082톤, 전장 96미터, 출력 2,037마력, 최대속력 13.66노트에 삼연식(三連式) 왕복기관 1기를 장착한 선박으로, 1937년 2월에 하리마(播磨)조선소에서 진수할 때는 매우 우수한 선박이었다. 김천호는 군용으로 징발되어 남방 전선의 군수품 운송에 투입되었다가 라바울 해역에서 화물창 1번과 2번 중앙부에 미군 어뢰를 맞아 대파되었으나, 선원들이 응급 처치하여 자력으로 일본 가나가와현 도쿄만 요코스카항에 입항하여 입거(入渠) 수리를 마쳤다. 그러나 김천호는 일본군의 계속되는 패배로 다시 전선에 배선되지 않은 채 일본에서 종전을 맞았다.
 
김천호가 부산항에 입항하자 구 조선우선 소속이라는 이유로 한국인 선원들이 인도를 요구하였다. 물론 일본인 선장과 선원들은 인도를 거부하고 하선하지 않았지만, 석탄 하역을 끝낸 뒤에 출항이 정지되었다. 그러다가 1945년 11월 28일 한국 선원들의 요청을 받은 미 고문관 켈프(Kelp) 대위가 일본인 선원을 강제고 하선시키고 접수하였다. 이후 김천호는 삼척에서 석탄 소송을 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1주일 지난 1950년 7월 1일 진해통제부 사령관은 26척에 이르는 해운공사의 미국 대여 선박 26척 가운데 엘에스티 (LST, Tank Landing Ship)형 선박 9척과 에프에스(FS)형 선박 10척 그리고 유조선 1척 등 20척을 징발하였다. 그리고 대여 선박 가운데 볼틱형 6척은 위험을 피하여 일본으로 철수시켰다.
 
1950년 7월 20일 대한민국 목포경비부는 대한해운공사 소속 김천호와 울산호를 징발하여 정부미 8만 가마를 목포에서 부산으로 운송하였다. 이는 이미 광주를 점령하고 있던 북한 인민군의 일부가 목포로 향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우리나라 주요 정부 물자와 군수품을 더 안전한 곳으로 후송하려는 조치였다. 이 작전이 종료된 것은 1950년 7월 23일이었다.
 
같은 날 오후 6시에 대한해운공사는 해군본부로부터 선박을 일단 해상으로 이동하여 다음 명령에 따르라는 지시에 따라, 해군 징발선인 단양호(선장 이재송)에 병력을 승선시켜 해상으로 이동하여 전세를 관망하도록 하였다. 해양대학생 120명이 실습 승선 중이던 단양호(선장 이재송)는 인천항에서 양하를 마치고 귀항 도중 군산 앞바다에서 선박과 인력이 군에 징발되어 향후 해군본부의 지시에 따른다는 무전 연락을 받았다. 당시 단양호는 해군 작전명령에 따라 급선회하여 옹진반도의 철수 병력을 인천항까지 수송하고 나서 부평에 있던 육군창고의 군수물자를 군산항까지 수송하였다. 인천항에서 출항 시 갑문 개폐 직원이 모두 사라져 학생들이 직접 손으로 작동하여 탈출하였다. 7월 24일, 북한군이 순천까지 진입해 오자 해군은 조치원호와 안동호 등 8척의 선박을 여수로 파견하여 아군의 해상철수를 수행하고 정부 물자와 군수물자를 선적했다.
 
대한해운공사 선박 가운데 징발선 20척을 제외한 나머지 선박 10여 척은 민수물자 수송에 참여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들 선박은 교동부 해운국에 설치된 전시운송 사무소에 의하여 통제되었다. 1.4 후퇴 때에 정부는 전쟁 초의 경험을 살려, 후퇴하는 지역에서는 징발선 엘에스티와 에프에스 등의 수송선에 철수하는 국군을 승선시키고, 남은 공간에 피난민들을 실었다. 전쟁 중에 제주도에 육군 제1훈련소가 설치되고 많은 부대가 제주도에 집결되어, 대한해운공사 소속의 징발선은 훈련병을 비롯한 각종 보급 물품을 제주도로 수송하였다.
 
그리고 서해안에서 피난민 대열이 계속 이어져 진남포와 인천항에서 피난민을 승선시켜 부산이나 거제도까지 수송했다.
 
1951년 9월부터 12월까지 한일회담 선박분과위원회 회의가 개최되어 윤상송은 부위원으로 일본을 방문해 24차례 회의에 참석했다. 한국 측 위원장은 양유찬 대사의 명을 받아 법무부 법무국장이던 홍진기(洪璡基, 1917~1986)가 임명되고 교통부 해운국장 황부길, 해운국 감리과장 문덕주, 지철근(통상부 수산국 어로과장), 한규영(주일대표부 삼등서기관) 등이 위원으로 외무부 정무국 제2과 진필식, 윤상송(대한해운공사 상무이사), 정화일(대양수산회사 총무부장) 등이 부위원으로 참석했다.
 
한편 일본 측은 외무사무관 겸 배상청 차장이던 가와사키 이치로(河崎一郎)가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구니야스 세이치(国安誠一, 운수성 해운조정부장), 가메야마 노부로(亀山信郎, 운수성 해운국 총무과장), 가와게 이치로(河毛一郎, 운수성 해운국 정기선과장), 고야마 겡이치(小山健一, 배상청 특수재산정리위원회 위원장), 요코야마 마사오미(横山正臣, 대장성 관리과장), 마키노 세이치(牧野誠一, 대장성 제2 국유재산과장) 등이 위원으로 참석했으며, 핫도리 고로(服部五郎, 배상청 총무과장), 도미오카 노부가즈(富岡延一, 운수성 선박국 등록측교과[登錄測交課]), 후쿠이 시게타카 (福井重孝, 운수성 해운조정부 특수재산과) 등이 부위원으로 참석했다.
 
【출처】“선박분과위원회 경과 중간보고에 관한 건”, 『회의록(1)』, 1278-1279.
 
【논문】 남기정, 〈한일 선박반환 교섭에 관한 연구 : 1차 회담 선박분과위원회 교섭을 중심으로〉, 일본연구 43호, 2010.
 
김용주는 1951년 8월 주일공사를 마치고 귀국하여 자신의 재산을 헌납하여 만든 해운공사 사장에 복귀했다가 1952년 5월에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후임 사장은 내무부 장관과 체신부 장관을 역임한 이순용(李淳溶)씨가 취임하였다. 김용주는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초대 주일공사로 부임하며 대한해운공사 사장을 겸임했지만, 실제 경영에는 관여하지 못했다.
 
윤상송은 1949년에 있었던 앵도호의 북한 억류 및 킴볼 스미스(Kinbol Smith)호의 월북과 1952년 4월에 미군이 저지른 마약 밀수 사건 등에 대한 책임 문제로 김용주 사장이 경질되었다고 어림잡아 짐작했었는데 실상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해운력 발전을 위해 애쓰던 중 경무대(景武臺) 공보담당이며 영부인 비서인 프랑스인 비노꼬의 조언과 샌프란시스코 초대 영사 및 1대 총영사로 있던 주영한(朱榮翰, 1894~ ?)의 알선으로 최신 디젤 엔진 배 2척을 구입하도록 결정했다. 당시 경무대는 이 선박들을 척당 120만 불에 구입해 조선우선이 인수해 운명하도록 김용주 사장에게 지시하였다. 김용주 사장은 당시 이런 배들이 일본에 자주 왕래해 한 척당 70만 불 정도에 구입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정부 제안을 거부해 대통령은 이에 인사조치를 단행하였다.
 
1952년 어느 날 손원일(孫元-) 해군참모종장이 윤 상무를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린체스카 여사로부터 배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군에서 사용할 배가 아니다. 해운공사에서 인수하는 게 좋겠다.”라는 제안이었다. 윤상송은 본인 단독으로 결정할 사항이 아니라 생각되어 회사로 돌아와 사장에게 보고하고 중역 회의를 거쳐 그 결과를 경무대에 보고하였다. 당시 이 배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도입하는 디젤기관을 장착한 대형 선박으로 국민의 시선이 집중되어 만약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라는 것이 해운공사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대한해운공사는 출범 직후부터 외국으로부터 대형 선박의 도입을 추진하였으나, 선박을 도입할 만한 자금 능력도 없었고, 유휴 선대를 많이 갖고 있던 미국이 정책적으로 한국에 선박 판매를 허가하지 않아 실현하지 못했다. 이런 사정으로 사장과 중역들은 선장이라도 외국인 선원을 승선시키자고 주장하였지만, 윤 상무는 한국 선원의 기술을 신뢰하고, 우리나라 배에는 한국 선원들이 승선해 운항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인수책임자가 될 것을 신청하여 최종 승인을 받았다.
 
그는 선박을 인수하여 부산까지 회항하는 동안 우리 해기사들에게 기술을 전수하기로 다짐하고 이관용(李寬容, 해양대학 기관과 1기), 최만정 기관사와 전기사 정문환(鄭文煥), 통역 겸 경리로 김행오(金行五) 네 사람을 인솔하고 스웨덴으로 출발했다. 여권 발급이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3일 만에 여권을 발급받았다. 해기사 면허 증명서는 영어로 된 면허 양식이 전혀 없어 양식을 신규 작성하여 인쇄하였다. 이때 만든 서류가 현재 사용되고 있는 영문 면허장의 효시가 되었다.
 
SAS(사진:위키피디아)
 
디젤기관 선박 인수단은 도쿄에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3국의 합동 항공사인 SAS(Scandinavian Airlines System)의 항공기로 갈아타고, 스위스의 제네바(Geneve)에 도착한 뒤 선주에게 연락하였다. 그들은 코펜하겐(Copenhagen)에서 소형 비행기로 갈아타고 약 30분간 비행하여 스웨덴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최남단에 있는 항구도시 드렐레보르그(Trelleborg) 비행장에 내렸다. 트렐레보르그는 고대 바이킹 시대의 고대 요새가 있는 도시로 과학기술이 발전한 활기찬 도시였다.
 
윤상송 일행은 자동차로 40분 간쯤 달려 아담한 항구에 도착하여 선주 대리점 대표를 만나 인수하기 전에 선박을 검사하고 재고품을 조사하려고 하였다. 선주는 당신들이 무슨 자격으로 배를 검사하려고 하느냐 항의하였다. 인수책임자인 윤상송은 선박 인도 절차에 관한 전권 신임장을 제시하였다. 선사는 배는 이미 한국행 준비를 완료하고 당신들의 도착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곧바로 승선하여 곧 출항하라고 일방적으로 말하였다. 윤상송은 수백만 달러나 되는 선박을 아무런 검토도 하지 않고 인수할 수 없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동석했던 수출입국 관리관이 한국 측의 주장을 인정하여, 스웨덴 체재를 며칠간 연장하는 비자를 발급해 주었다.
 
드렐레보리(Trelleborg) 항구(사진:ETO)
 
일행은 다음 기항지인 프랑스 북부의 덩케르크(Dunkerque) 항구에서 합류하기로 약속하고 본선을 먼저 출항시켰다. 덩케르크 시는 철도와 운하망이 모이는 교통의 요지로 프랑스 북부의 최대 무역항이다. 선박대리점 측은 본선의 상태가 매우 훌륭하나, 각종 의장품 및 비품 등은 선가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재고가 없다고 통보했다. 이에 윤상송은 스웨덴 출입국관리청의 관계관과 프랑스 주재 공사의 주선으로 스톡홀름(Stockholm)에 가서 선주 대표를 만나 본선의 상태와 재고품의 내용을 파악한 뒤, 덩케르크로 가서 본선에 승선하여 먼저 승선한 인수 팀과 합류하였다. 이로써 인도 임무에 따른 모든 절차를 마쳤다.
 
당시 디젤엔진의 기술을 이관용, 최만정 기관사와 전기사 정문환(鄭文煥)에게 습득시키는 문제는 미완성으로 남았지만, 다행히 이 선박의 전 선주가 영어로 된 기관 취급방법에 대한 텍스트를 비치해 긴 항해 중에 텍스트를 읽으며 선원들을 가르쳤다. 당시 스웨덴 선장은 중요하고 필요한 실습에 대한 요구를 거부하며 사고가 일어나면 책임질 수 없다고 말했다.
 
윤상송은 한국 선원의 기술 습득하는 능력을 믿고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기로 선장과 약속했다. 그런데 항해를 앞두고 1952년 5월 7일부터 거제도 제76포로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공산 포로들이 폭동을 일으켜, 6월 10일 무력으로 진압된 거제도 포로폭동사건이 외국신문에 보도되는 바람에, 본선에 승선하고 있던 외국인 선원들은 부산이 거제도와 가깝다는 이유로 하선을 고집했다. 윤상송은 외국인 선원들을 잘 설득하여 출국 3개월 만에 부산항에 입항하였다.
 
대한해운공사 본사에서는 5,000톤급 선박의 부산 입항을 환영하기 위해 정확한 입항일과 시간을 체크하고 배의 상태에 대하여 교신했다. 입항 예정일 전날에는 폭풍이 발생하여 입항을 하루 늦추었다. 입항식에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참석하고 장택상(張澤相) 총리가 대통령을 수행하여 선박 내의 최신 시설을 참관하였다. 이번에 도입한 디젤 선박은 한국에 처음으로 도입한 미국의 전시표준선의 하나인 시마비(CIMAVI) 형의 선박으로 선박명이 로사 소오멘이며, 한국 도착 후 마산호로 개명되었다.
 
시마비(CIMAVI) 형의 선박(사진:윤상송)
 
1952년 10월 9일에 제3대 정운수(鄭雲樹, 1903~1986) 사장이 취임하여 이사가 전원 사임하여 윤상송도 상무직을 사임하였다. 그가 회사에서 퇴직할 무렵 부산항에서 미군의 항만 운송에 종사하던 일본 선박을 한국 선박으로 대체 임무를 맡은 조선운송(한국운수주식회사의 전신)의 임봉순(林鳳淳) 사장이 신설되는 선박부 중역으로 취임해 줄 것을 윤상송과 한개 씨에게 권유했지만, 윤상송은 개인적인 이유를 들어 사양했다. 현재의 CJ대한통운은 1930년에 설립된 조선미곡창고가 해방 후 1962년 한국운수주식회사를 합병하여 대한통운으로 상호를 변경한 후 2013년 CJ그룹에 인수되면서 CJ GLS와 통합하여 현재의 CJ대한통운이 되었다.
 
당시 한국에서 외국 선사의 총대리점 역할을 맡은 에버렛기선(Everett Steamship)이 애경유지(愛敬油脂)의 방계인 동남해운과 이안공사(怡安公司)로 하여금 각 1척의 선박을 투입해 인천과 도쿄 간에 정기항로를 개설하였다. 이 정기항로는 우리나라를 기점으로 한 최초의 정기항로로 윤상송은 1954년 1월부터 1959년 5월까지 이안공사의 고문과 동남해운의 부사장이 되어 한일 간 정기항로 개설에 참여하였다.
 
1954년 4월 20일에 사단법인 대한선주협회가 창립되었다. 당시 회원사는 대한해운공사, 극동해운, 태창산업, 근해상선, 제일상선, 영풍해운, 풍한산업, 조선상선, 동남해운, 미진산업, 대한석탄공사 등 11개사로 선복량은 82,000G/T 정도였다.
 
동남해운 중역들은 고급 선원으로 미국인, 필리핀인으로 충당할 것을 거듭 권유하였지만, 윤상송은 고집스럽게 한국 선원의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음을 강조하고 한일 정기항로 선장에 양원석(梁元錫)을 기용했다. 이후 김성오(金聲五) 등 전 선원이 우수한 기량을 발휘하여 6개월 후에는 좋은 평판을 받았다. 회사 간부들은 해운경영 등의 실무를 제대로 알기 위해 해운 용어 공부에 열중했다. 이후 이안공사(怡安公司)가 서울에서 부산 간 천일정기화물운송이라는 기업을 경영하는 박남규(朴南奎) 사장에게 매각됨으로써, 동남해운과 이안공사가 운항하던 한일 간 정기항로가 폐쇄되어 윤상송은 1959년 5월 동남해운 부사장직에서 퇴임하였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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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