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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6.02.08. 12:34 (2026.02.08. 12:34)

윤관 후손으로 일본 유학해 기관사로 근무... 태국환 승선, 1등 기관사 근무 중 미군 포로 2천명 수송해

 
선각자 삼주 윤상송
삼주(三洲) 윤상송(尹常松, 1916~1994)은 1916년 8월 15일 함북 회령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회령은 인구가 약 1만 명 되는 두만강의 국경도시로 농산품과 임산물의 집산지로 명성을 날려 무역상들의 출입이 잦았다. 나운규 감독이 영화 아리랑을 회령에서 촬영해 호평을 받았고. 인기 배우 이순재(1934~ )의 고향이기도 하다. 윤상송의 할아버지 尹時薰은 회령 鄕校의 책임자였고, 외할아버지 申彦鳳은 금융조합의 이사였다. 아버지는 항상 윤관장군의 후손임을 자랑했다.
선각자 삼주 윤상송
 
 
삼주(三洲) 윤상송(尹常松, 1916~1994)은 1916년 8월 15일 함북 회령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회령은 인구가 약 1만 명 되는 두만강의 국경도시로 농산품과 임산물의 집산지로 명성을 날려 무역상들의 출입이 잦았다. 나운규 감독이 영화 아리랑을 회령에서 촬영해 호평을 받았고. 인기 배우 이순재(1934~ )의 고향이기도 하다. 윤상송의 할아버지 尹時薰은 회령 鄕校의 책임자였고, 외할아버지 申彦鳳은 금융조합의 이사였다. 아버지는 항상 윤관장군의 후손임을 자랑했다.
 
삼주(三洲) 윤상송(尹常松)(사진:한국해기사협회)
 
1929년 2월 말 13세 소년 윤상송은 어두컴컴한 저녁 오후 6시 50분에 회령역에서 회령보통학교 졸업생 14명과 함께 경성행 기차를 타려고 기다렸다. 이날 날씨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매서워 수은주가 영하 30도까지 내려갔다. 어린 학생들은 얼굴과 볼이 모두 빨갛게 얼었지만 새로운 세계로 나간다는 부푼 가슴에 추운 줄도 모르고 상급학교에 시험에 관해 이야기했다. 기차가 도착해 소년들이 차례대로 계단을 오르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상송의 목덜미를 강하게 낚아챘다. 이에 상송이 너무나 놀라 뒤를 돌아보니 술에 취한 아버지였다. 소년은 말없이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걸어갔다. 그날 저녁에 아버지와 큰 형이 대판 싸움을 벌였다. 어머니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큰 형은 어린 동생을 상급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큰 소리로 말했다. 예비소집에 불참했지만, 꼭 시험은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 날 아침 식구들이 모두 늦잠을 자는 통에 새벽 6시 첫 기차를 놓치고 9시 기차를 타고 경성역에 도착해 삼촌 댁으로 가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경성고등보통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했다.
 
북한 회령시(사진:강동완)
 
상송의 아버지는 산골에서 태어났지만,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1908년에 보성전문 법과에 입학해 제2회 졸업생으로 1910년에 졸업하였다. 고등교육을 받은 아버지는 나라를 잃어버린 땅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져있다가 28세에 고향에 돌아와 일생을 술로 살았다. 아버지가 어렵게 직업을 얻어 회령읍 사동에 살면서 형들이 학교에 가게 되었다. 당시 회령은 물이 귀해 어린 상송은 매일같이 3km 떨어진 두만강에서 물을 길어왔다. 집에 큰 독이 없어 매일같이 두만강에 갔다. 강이 꽁꽁 언 겨울날에는 곡괭이를 메고 가서 얼음을 깨고 물을 길었다. 이후 아버지는 무산에서 장사를 시작하여 상송은 무산초등학교 6학년 편입했다. 상송이 입학한 함북 경성고등보통학교는 공립으로 수재들이 많이 모였다. 4학년 때는 광주학생사건과 관련되어 전국적으로 항의 시위가 있어 4학년 때 참여하였다가 무기정학을 받았다. 다행히 정학은 한 달 후 해제되었다.
 
경성고등보통학교(사진;궁인창)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진로를 고민하다 청진에 있는 북선우선주식회사에 근무하는 큰 형을 만나러 갔다. 큰형은 배의 선장실을 구경시켜 주고 살롱에서 점심을 먹게 해 주었다. 이때 상송은 처음으로 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자기의 진로를 육지에서 바다로 전환했다.
 
1935년에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고등상선학교(東京商船學校) 기관과에 지원했으나 시험에 떨어졌다. 그러나 다시 공부하고 도전해 합격했다.
 
윤상송은 학교 입학식 날 늦잠을 자다 지각하여 늦게 학교에 갔다. 그때 이용운(李龍雲, 1914~1987, 제4대 해군참모총장) 선배가 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꾸중하고는 담당 교관과 학생에게 인계하며 잘 부탁한다고 말해 학교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용운은 윤상송이 입학한 지 6개월 후 졸업해 학교를 떠났다.
 
여름철 방학은 무척 길어 고향 청진을 다녀왔지만, 겨울방학은 2주라 친구들의 하숙집을 전전했다. 학비는 전액 관비라 개인적인 용돈은 집에서 매달 15원을 받아 풍족했다. 기관과는 실습을 중요시하여 단조, 기계분해, 가스용접, Chipping, 제도, 공작 등을 배웠다. 학생들은 모두 운동을 하게 되어있어 축구부를 지원했는데 미숙했다. 유도를 배우려고 지원했으나 떨어져 포기했을 때 이용운 선배가 이를 지켜보고 지원에 나서 유도부에 들어갔다. 유도 기초부터 배웠다. 졸업할 때 미후에 사범이 유도 3단 수료증을 주었다.
 
이용운(李龍雲)(사진;궁인창)
 
윤상송은 요코스카 해군포술학교에서 포술 실습을 하고, 취미로는 사교춤을 배워 춤의 도사가 되어 항해할 때면 칭찬을 들었다. 1년간의 세계 일주 항해실습을 마치고 졸업시험을 치러 1차에 합격해 1940년 12월 도쿄고등상선학교 기관과를 졸업했다. 학교에서는 일본우선에 배정해 입사절차를 밟기 위해 일본우선 회사를 방문하다 우연히 7층에 있는 조선우선 명패를 보고 조선우선을 찾아갔다. 그는 회사 입사를 학교가 정해준 일본우선에 가지 않고 조선우선을 선택하고는 담당 교수에게 조선우선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는 편지를 썼다. 고향 청진으로 돌아왔다가 쉬고 나서 1941년 3월에 조선우선에 입사하여 2,600톤의 安州丸 3등 기관사로 근무했다. 태평양전쟁 중에는 남방에 취항한 태국환에 승선해 1등 기관사로 근무하며 사이판, 세부, 타이완 기륭항, 가요슝(高雄市), 카타르 카나르 항을 방문하고 미군 포로 2,000명을 일본에 해상수송하기도 하였다. 또한 평양환을 인수하러 일본 우라가와를 방문하고 돌아와 부산지점에서 선박 감독 일을 담당했다. 광복 직전에는 일본이 전시통제의 목적으로, 한반도 안의 모든 기범선(機帆船)을 통합하여 운항하기 위하여 만든 조선선박통제회사 원산지점으로 전출되어 제3석으로 근무하였다. 태창환의 기관장이 되었다. 1945년 4월에 갑종기관장 면허를 취득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갑종기관장 면허 제1호가 되었다. 1945년 6월에 용정에 있는 전기영씨 딸 순혜와 결혼하였다.
 
조선을 떠나는 일본군(사진;궁인창)
 
해방 후 서울에는 미군이 상륙하고, 북한 지역에는 소련군이 들어와 혼란이 거듭되었다. 미군사령부는 1945년 9월 12일 아널드 소장을 군정장관에 임명하고 헌병사령관 쉬크 준장을 경무국장에 임명해 총독부 경무국을 그대로 인수했다. 미군정경찰 창립식이 1945년 10월 21일 거행되었다. 원산에 있던 윤상송은 서울에 사무로 다녀올 일이 있어 금강산을 구경하고 임진강을 건너 서울에 들어와 회사를 방문하니 퇴직금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매일 흥청망청 돈을 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때 우연히 회사 본사 지하실에서 보관된 선박 도면을 보고 관심이 있어 해운을 재건하자면 이 도면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서울에 정착할 마음을 굳히고 원산으로 되돌아갔다. 윤삼송은 삼팔선을 넘어 서울로 갈 결심하고 임신한 아내를 설득하여 길을 떠났다. 그런데 임진강을 지키는 소련군 병사가 많아 도강이 쉽지 않았다. 돈을 건네도 안돼 도강하다 아내가 물에 빠져 실패하고 강둑에서 불을 쬐는데, 한 청년이 가냘픈 여자를 강물에 빠트리면 어떡하냐고 나무라며 자기 집 장례행렬에 껴서 넘어가라고 몰래 알려주어 임진강을 무사히 넘었다, 임진강을 무사히 넘은 상송은 기차를 타고 청량리에 도착해 몸에 몰래 숨겨 두었던 일본 화폐 200엔을 꺼내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가 결심하게 된 것은 사돈 오기욱(吳基旭)과 원산 출신인 김동일(金東一)이 서울에 기반을 잡고 있고 그들이 몇 달간은 생계를 책임져 주겠다고 호기롭게 약속해 주었기 때문이다. 청량리에서 전차를 타고 처음 도착한 곳이 청파동에 있는 조선우선 가사이(葛西) 감독 댁이었다. 윤상송이 혼란 속의 서울에 자리를 잡기는 하였으나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1946년 6월에 민규식(閔奎植)을 위원장으로 하는 해운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 단체는 해운기업의 경영을 목표로 한 단체가 아니라, 무너져 버린 해운질서를 재건하기 위한 새로운 해운 행정을 모색하는 단체로서 미군정에 협조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하였다. 당시 해운에 관심을 가진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조선우선주식회사의 경영권을 차지하고자 해운건설연맹(海運建設聯盟)과 조선해원동맹(朝鮮海員同盟)을 발족했다.
 
해운건설연맹은 포항에서 오사카쇼센(大阪商船)의 대리점과 항만운송업, 연안화물선을 운항하고 있던 김용주(金龍周, 1905~1985)가 1945년 8월 25일 서울에서 해운경영에 참여했던 인사와 해기사의 일부를 모아 결성한 단체로 인천에서 삼신기선(森信汽船)을 경영한 김종섭(金鍾變)과 육상근무 해기사 출신인 석두옥(石斗鈺), 권태춘(權泰春) 등이 참여하였다.
 
김용주(金龍周)(사진;궁인창)
 
조선해원동맹은 현장에서 승진하여 기관장이 된 정환근(鄭桓根) 씨가 주선하여 설립된 단체로 고급 해기원을 규합하여 해운건설에 필요한 일을 강구해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대표 정환근은 집안의 일로 갑자기 귀향하는 바람에 도쿄상선의 유항렬(劉恒烈)이 대표위원으로 추대되어 해기사들이 모두 조선해원동맹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해원동맹은 간판만 있을 뿐 제대로 된 조직을 전혀 갖추지 못하였다. 대표위원으로 추대된 대선배 유항렬도 행정 능력이나 운영 능력을 갖추지 못해 조선우선 사무실에 나와 시간만 보냈다.
 
해방 후 서울에는 석탄이 고갈상태에 있었다. 미군정은 해운건설연맹에 대하여 조선우선의 선박을 이용하여 삼척의 석탄을 운송해 오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김용주는 미군정 해사고문 넬슨과 해사부장 이동근(李東根)을 만나 협의한 끝에 위원장에 김용주, 관리위원에 강일성(姜日成), 김철호(金喆浩, 기아산업 창설자), 설경동(薛卿東, 대한전선 설립자), 김종선, 권태춘 등 6인으로 구성된 조선우선관리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선우선을 인수하였다.
 
당시 조선우선의 선박은 부산호(1,631톤) 1척으로 인천항 선거에 계류 중이었다. 이 배로 삼척항에서 석탄을 운송해 오려면 수리가 급했다. 조선우선관리위원회는 선원들의 급여도 지급할 수 없어 선박 수리는 어려웠다. 배 수리 비용에 약 200만 원의 막대한 자금이 예상되어 권태춘을 제외한 관리위원 5명이 나누어 공동 충당하기로 결의하였지만, 아무도 응하지 않았다. 결국에 김용주가 나서 자신이 소유한 부동산을 처분하여 200만 원의 자금을 마련하였다. 조선우선관리위원회는 해산되고 미군정청은 김용주를 조선우선의 사장으로 임명하였다.
 
사장 김용주는 신속하게 전무이사에 박경직(朴慶植), 상무이사 석두옥과 한개(韓介), 선박부장에 윤상송을 임명하였다. 김 사장이 윤상송을 임명한 것은 젊은 해기사로 통솔력과 친화력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윤상송은 광복 이후 조선우선 입사 제1호였다.
 
당시 일본의 정규 상선학교 출신 해기사로는 도쿄상선 항해과 출신의 유항렬(劉恒烈, 1918년 졸업), 유춘성(柳春成, 1927년 졸업), 황부길(黃富古, 1935년 졸업), 이용운(李龍雲) 등과 기관과 출신으로는 이시영(李時亨, 1936년 졸업)과 1939년에 졸업한 윤상송이 있었다. 그리고 고베상선 향해과 출신의 이재송(李哉松, 1937년 졸업)과 성철득(成鐵得, 1940년 졸업)이 있었다. 1895년에 도쿄상선에 입학한 신순성(横順履), 한만원(韓萬源), 박종서(朴宗緒) 등이 있었다고 들었으나 선배들을 만날 기회는 없었다.
 
오당 황부길은 일본 도쿄고등상선학교를 졸업하고 15년간의 해상근무를 통해 선진 국가의 해운정책에 대한 견문을 높이고, 광복된 조국에 돌아와 황무지인 한국해운을 개척하려고 초대 해운국장으로 취임하여 해군과 세관으로부터 선원사무와 항만관리업무를 인수하여 해운행정을 일원화시켰고, 선복확충, 항로개척, 해기사양성, 항로표지시설복구 등 최적의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여 한국해운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1949년 봄 교통부 황부길(1905~1995) 해운국장은 국영 선박의 불하를 대한민국 정부에 건의하였고, 허정 교통부장관은 김용주 사장을 만나 국영 선박의 인수를 제의하였다. 제의를 받은 김용주 사장은 임원들의 의견을 들어 두 기관을 하나로 합쳐 운영하는 새로운 국책회사 설립을 역으로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교통부는 대한해운공사법을 입안하여 1949년 5월 26일 국회에 상정하고 이 법안은 9월 20일 일부 개정 의결되어, 10월 8일 공포되었다.
 
선박부장 윤상송은 해운공사의 설립을 앞두고 현황을 파악하려고 부영선박의 선장과 사무장을 집합시켰다. 그러나 교통부 소속 선원이 조선우선 부산지점장의 명령을 쉽게 듣지 않았다. 윤상송은 조선우선의 중역회의에 참석하여, 몇 달 뒤에 같이 일하게 될 선원들에 대한 노임 지급을 제의하여 관철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선원들에게 새로운 회사 설립에 대한 지시를 전달하고 각서를 제출받았다.
 
대한해운공사 부산지점(사진;궁인창)
 
1949년 12월부터 대한해운공사의 이름으로 교통부에서 직영하던 선박에 승선하던 선원 인수에 착수하였다. 이때 문제점은 부영선박에 승선하고 있던 많은 선원이 자격을 갖추지 못한 비정상적인 선원이었다. 자격을 갖추지 못한 선원을 능력까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애매한 상황으로 무자격 선원을 해고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윤상송은 과거는 일체 불문에 부치기로 하고 정확한 사실을 신고하도록 행정 조치하고 선원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부영선박 선원을 대한해운공사로 수용하였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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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 정보 (쪽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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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