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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계사의 개화파 승려 無不
개화승 무불(탁정식, 卓挺埴, 無不, 西明, ?~1884)은 강원도 백담사 강사로 子는 夢聖, 법명은 覺地, 無佛이다. 원래 승려가 佛門에 들어가면 俗家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도리이다. 무불 탁정식의 아버지는 참판으로 양반가 자제로 성장했으나 무불은 벼슬길로 나가지 않고 佛門에 들었다. 당시의 족보와 조선왕조실록을 따라가며 추적하니 아버지는 병조 참판을 지낸 탁종술(卓宗述, 1790 ~ ?)로 추정이 된다.
탁종술은 나이 42세인 1831년에 식년 문과에 乙科에 급제되어 1846년에는 제주 판관으로 부임해 1848년 演武亭 북쪽에 左寅閣을 창건하고 추사의 글씨로 題扁하였다. 1858년(철종 9년)에는 兵曹參議로 승진하였다. 1870년 종2품 가선대부로 加資되었고, 漢城府 右尹에 발탁되었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7년 2월 9일 자에 “특별히 부호군(副護軍) 탁종술을 발탁하여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으로 삼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고종 9년인 1872년에 병조참판에 올랐다.
무불은 백담사에 머물다 도성에 들어오면 화계사에 주로 머물렀다. 당시 절에는 이동인이 주석하고 선각자 김옥균이 있어 이동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開化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무불은 이동인과 함께 일본을 자주 왕래했다. 1880년 11월 5일 두 번째 원산항에서 도일할 때도 이동인과 함께 가서 청국공사 何如璋을 만났다. 무불은 귀국하지 않고 고베에서 영국 영사의 한국어 교사가 되고, 東京으로 옮겨와서도 조선말을 지도했다.
세 번째 방일에는 일본조사시찰단 13명을 이끌고 일본으로 갔다. 조사시찰단이 일을 마치고 조선에 돌아갈 때 그는 東京에 머물며 동경외국어학교 교사로 취직해 당시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 사절단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각종 정보를 취합했다. 1882년 4월 김옥균이 일본에 건너오자 당시 일본의 정치 흐름을 소상하게 전해주었다.
1883년 6월 東南諸島開拓師 겸 捕鯨事로 임명된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이 일본을 방문해 차관 교섭 및 울릉도 목재 운반선을 부탁해 배를 구입해 고베항에 도착했으나 급성 폐렴으로 1884년 2월 9일 입적했다. 무불 탁정식의 업무는 동행했던 백춘배(白春培)가 바로 승계했다. 무불, 김옥균과 함께 일하던 일본인 가이 군지는 無不을 東京大 북쪽 1.5km에 위치한 1613년에 창건한 정토진종(淨土眞宗) 大谷派 신죠우지(眞淨寺)에 모셨다. 무불의 眞影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정성이 부족해 아직 찾지 못했다.
사진사 가이 군지(甲斐軍治)(사진:yahoo)
나가사키 출신 실업가 가이 군지(甲斐軍治, 1856~1908)는 1879년 부산으로 건너와 김옥균이 1882년 3월 渡日할 때 통역을 맡아 나가사끼까지 동행했다. 이후 조선에 돌아와 남산에서 사진관을 개업했다. 가이 군지는 개척사 김옥균과 조사관 백춘배의 위임을 받아 1884년부터 1885년까지 선박 임대 및 노동자 고용 등 일을 담당하였다. 그는 울릉도에서 벌목한 일본인 인무 이름, 인건비, 운임, 숙박비, 선박명, 6차례 항해일지가 항목별로 모두 수록하여 《甲斐軍治索債案件》(규26295)을 작성하였다. 이 문서는 가이 군지가 조선 내각에 대금을 청구하기 위해 상세한 내역을 꼼꼼하게 기록한 것이다.
《甲斐軍治索債案件》 〈시말서〉에는 조선 정부와 채무 정산을 위해 교섭한 내용이 적혀있다. 김옥균의 암살 이후 역적으로 몰려 그의 생시 자료는 모두 흩어졌지만, 다행히 東南諸島開拓師 자료는 현재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김옥균과 가이 군지의 묘비(사진;동북아역사재단)
울릉도 개척의 일등공신인 晩隱 이규원(1833~?)은 1881년 울릉도검찰사로 임명되어 고종 20년(1882)에 한성을 출발해 4월 29일 오전 8시 울진 구산포에서 배 3척, 포수 20명, 사공격군 85명 등을 실고 울릉도 鶴浦마을(小黃土邱尾)에 도착해 11일 동안 울릉도에 머물며 섬 전체 현황을 조사해 고종에게 조사단 구상과 현황을 낱낱이 보고하였다. 이규원은 마을 자연석 바위에 각석문을 남기고 《검찰일기》에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이규원은 울릉도 주민은 141명이 살고 있으며 일본인 78명이 거주한다고 보고했다. 조정은 울릉도 개척의 필요성을 강조해 7월 육지에서 모집한 개척민 16호 54명을 새롭게 입도하게 했다.
울릉도 감찰 보고를 받은 고종은 1883년 4월 22일 참의교섭통상사무 김옥균을 불러 東南諸島開拓師 겸 捕鯨事로 임명하였다. 김옥균은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개발자금이 필요하고 일본인들의 무분별한 울릉도 벌목을 금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예조판서 심순택이 일본 외무성에 항의 공문을 보내게 해 도항 금지 및 벌목 금지 회답을 받았다.
울릉도 검찰일기(사진:국립제주박물관)
華溪寺의 승려 車弘植은 김옥균이 1882년 화계사에서 10일 정도 머물 때 그의 권유로 개화파에 가담하여 김옥균이 동남개척사로 일본에 갈 때 炊飯作饌의 임무를 띠고 수행하여 일본에 다녀왔다. 車弘植은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 체포되어 가혹한 국문을 당하고 처형되었다. 김옥균은 갑신정변에 실패한 후 일본에 망명하여 1885년 가을에 재기를 꿈꾸며 《甲申日錄》을 집필한다.
일본제국은 1886년 조선에서 보내는 자객(지운영, 송병준, 장은규)을 이유로 들어 1886년 8월 29일 東京에서 1,000km나 떨어진 태평양 외딴 오가사와라 섬(1886.8~1888.7)에 김옥균을 보냈다. 당시 이 섬에 들어가는 것은 약 21일이 걸렸으며 배가 1년에 4번 출항했다. 김옥균이 병을 호소하여 작은 섬에서 풀려났지만, 이번에는 홋카이도(1888.8~1890.4)로 보냈다. 유배에서 풀려 도쿄로 돌아온 김옥균은 1894년에 이홍장의 양자인 이징팡(李經方, 1854~1934)의 초청으로 3월 27일 이홍장과 회담을 하기 위해 3월 23일 고베 항에서 출항해 3월 27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3월 28일 동화양행 2층 1호실에서 파리 유학생 홍종우의 총에 맞아 암살되었다.
연구자는 김옥균이 왜 상하이로 건너갔고 무슨 구상을 하였으며, 암살의 배후에는 있는 이일직(李逸稙)은 누구인지, 이중 첩자는 누구인지? 일본 경찰은 암살을 눈치챘는데도 아무런 조치를 안 한 까닭은 무엇인가? 김옥균의 암살 이후 국제 정세는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하는 의문이 있어 관련 논문을 읽고 조사하였다. 초청자 李經方은 1882년 청나라 과거에 붙어 외교관이 되었다, 그는 1886~1889년에는 런던 주재 청나라 공사관 비서로 근무했고, 1890년 9월 9일 주일공사를 임명받아, 1891년 2월~1892년 9월까지 주일 청국전권공사로 재직했다. 1895년에는 이홍장을 대신해 시모노세키조약 중일조약에 서명했고 1909년에는 런던 주재 주영 공사로 재직한 인물이다.
청나라는 김옥균의 시신을 조선 정부에 인계했다. 시신은 보름 뒤 양화진 나루터에 도착한 후 대역죄인이란 이유로 시신이 목이 잘리는 극형에 처해 팔도로 보내졌다. 김옥균을 따르던 일본인 가이 군지는 김옥균의 머리카락과 의복 일부를 몰래 수습하여 일본 교토 동본원사에서 장례를 치르고, 도쿄 진조시(眞淨寺)에 극진하게 모셨다. 1900년 3월 28일에 김옥균 묘비를 세웠다. 풍운아 김옥균과 오랜 세월 호형호제하던 가이 군지는 1908년 8월 사망해 김옥균 묘비 근처에 묻어달라 유언해 眞淨寺 김옥균 묘비 옆에 매장되었다.
김옥균과 친분이 있는 일본 정치인 도야마 미쓰루, 이누카이 쓰요시(犬養穀, 1855~1932) 등이 앞장서 1904년 아오야마 외국인 공동묘지(靑山靈園)에 추모비를 별도로 건립했다. 김옥균 묘비는 높이 3m, 폭 1m 크기의 화강암으로 묘비는 박영효가 짓고 이준용이 썼다. 처음에는 아무런 글이 없는 묵비(默碑)였으나 石碑를 세우면서 박영호가 장문의 추모사를 썼다. 그 추모사는 실은 유길준이 초한 글로 가로 19줄이나 되는 긴 글이 적혀있다.
김옥균 靑山靈園 추모비(사진:조선일보)
이누카이 쓰요시는 쇼와 4년(1929)에 立憲政友會 총재로 선출되어 임기 6년의 일본 제29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내다 암살당했다. 전 세계가 1930년대 불황으로 어려울 때 일본제국은 경제적 침체에 삐져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1930년 1월 21부터 4월 22일까지 런던 해군 군축 회담이 개최되어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은 4월 22일에 열강 해군 보조함 보유량을 제한하기로 합의하고 발효일은 1930년 10월 27로 하였다. 히로히토가 직접 서명한 군축회담 소식을 전해 들은 과격파 해군 장교들은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만주국에 근무하는 일본제국 육군 관동군은 1931년 9월 18일 류타오후에서 만철 선로를 스스로 폭파하고 이를 장쉐량 지휘의 동북군 소행이라고 발표한 후 만주 침략을 시작했다. 이 사건은 완전 조작이었는데, 일본제국은 이를 수습하지 못하고 방관했다. 1932년 5월 15일에 해군 소속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일본 제29대 내각총리대신을 암살했다. 이로 인해 일본 민주주의가 한참 후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오야마 외국인 전용묘지
아오야마 외국인 전용묘지에는 210개의 묘가 있는데 모두 선교사이고 동양인은 김옥균과 박유굉(朴裕宏, 1867~1888) 2명이다. 조선 조정은 1882년 여름 임오군란에 대한 외교 사절로 박영효를 파견했다. 이때 박유굉이 수행원으로 따라가 수신사 일행이 귀국할 때 남아 1882년 12월 게이오의숙에 입학해 일본어를 배우고 1883년 1월 군사학을 배우고자 일본 유년학교에 입학했다. 1884년 12월 4일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벌어져 관비 유학생이 행동대원으로 참여해 처형당하고, 장학금 지급 중단과 귀국령이 떨어져 관비 유학생은 마음이 복잡했다. 그는 1886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보병학과에 들어가 사관생도가 되었다. 박유굉이 계속 귀국령을 따르지 않자, 조선 조정은 박유굉의 부모를 잡아 가두었다. 이런 소식을 전해 들은 21세 생도 박유굉은 오랜 시간 갈등했다. 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모진 냉대와 모멸을 참다가 1888년 5월 사관학교 기숙사에서 권총으로 자결했다. 사람들은 그가 22세 젊은 몸으로 자살하게 된 것은 본인 때문에 가족이 처형되어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생도 박유굉의 자결 소식은 일본 전체 신문에 크게 기사화되어 큰 파문이 일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