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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승 이동인과 홍월초
조선말 개화기에 중요한 인물로 승려 이동인(李東仁, 琪仁, 西明, 1849~1881?)이 있다. 승려 이동인의 법명은 기인(琪仁), 천호(淺湖)로 양산 通度寺에서 출가하여 奉元寺에서 5~6년 동안 주석했다. 승려 천호(淺湖)는 한성에 상경하여 1877년 봉원사와 화계사 삼성암에서 오세창, 우대치, 오경석, 서재필 등을 만나 교류하며 불교 혁신과 조선 개화를 논의했다.
당시 일본제국은 조선에 진출하려고 1876년 2월 조선과 맺은 조약 朝日修好條規에 의거해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며 일본 불교 승려를 적극 활용하려고 노력했다. 당시 조선은 승려들의 활동이 대폭 위축되고 사회적 신분이 낮았다.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지했다. 이에 조선 포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일본 승려들은 많은 어려움에 봉착했다. 일본 일련종(日蓮宗) 승려 사노젠라이(佐野前勵, 1859~1912)는 김홍집 내각 총리대신에게 글을 올려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 해체를 간청하여 김홍집 총리가 제안을 받아들여 1885년 고종의 윤허를 받아 270년 만에 승려가 도성 안을 자유롭게 출입하게 되었다.
서울 도봉산 수유리 화계사에는 주지 김월해(金越海), 이동인, 탁정식(卓挺埴, ?~1884), 차홍식(車弘植), 홍월초 등 뛰어난 개화파 승려가 많았다. 승려들은 조선 후기 불교를 개혁하려고 애썼다. 이동인은 김옥균과 박영효와 자주 접촉하고 그들의 말에 따라 1879년 8월 부산 본원사 오쿠무라 승려의 알선으로 일본 화물선을 타고 9월에 밀항했다, 이동인은 교토의 정토진종 히사혼가지(東本願寺)를 방문하여 교리를 배우고 정식 절차를 밟아 1880년 4월 5일 득도식을 거쳐 일본 사찰 승적을 취득했다. 東本願寺의 法統은 親鸞聖人으로 念佛을 중요시한다. 이동인은 장기적인 일본 체류의 편의성을 위해 법명을 朝野東仁, 朝野覺遲, 朝野學治, 淺野東仁, 朝野繼胤, 光明大師 등으로 사용했다. 동본원사는 일본 막부의 후원 속에 성장한 사찰로 조선통신사도 이 사찰에서 머물러 연구자는 교토에 가면 항상 사찰 주변 호텔에 방을 정했다. 이동인은 동본원사에서 머문 지 10개월 만인 1880년 4월 6일 도쿄 아사쿠사(淺草) 별원으로 건너가 일본 朝野의 유력 정치인을 만나 상호교류했다.
승려 이동인에 대한 연구는 1970년 이용희가 동본원사에서 오쿠무라 엔신(奧村圓心)이 기록한 《朝鮮國布敎日誌》를 발굴하면서 시작되었다. 동본원사의 조선 진출은 당시 내무내신 오쿠보 토시마치(大久保利通, 1830~1878)와 외무대신 데라지마 무네요리(寺島宗則, 1832~1893)가 본원사의 관장인 21대 法主 엄여상인(嚴如上人, 1817~1894)에게 선신을 보내어 두 명의 법사를 보내 부산 別院을 건설하라고 요청한 때문이다. 이에 오쿠무라는 부산으로 건너왔고 1877년부터 1897년까지 20년간 포교일지를 기록했다. 이동인은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된 김홍집 일행을 만나 안내하였다.
영국 외교관 어니스트 메이슨 사토(Ernest M. Satow)(사진:위키피디아)
승려 이동인은 1880년 5월 12일 주일 영국공사 2등 서기관 사토를 찾아가 영국과의 수교방안을 모색했다. 사토는 이동인에게 조선어 선생을 부탁하여 이동인은 수락하였다. 사토는 자기 일지에 만남과 대화 기록을 남기고 상관인 고베 주재 영국공사 윌리엄 애스턴(W.G.Aston)에게 보냈다. 영국 외교관 애스턴은 초대 주한 총영사를 역임하며 갑신정변 때 우정국에 초대되어 현장을 목격했다. 사토는 1862년에 일본에 도착해 1883년까지 주일 영국공사를 지냈다. 이동인이 조선에 돌아온 것은 1880년 9월 28일로 원산으로 귀국하였다. 이동인은 한성에 올라와 김홍집을 만났다.
김홍집은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을 소개했다.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조카로 개화에 일찍 눈을 뜬 인물이었다. 이동인은 고종을 알현하게 되어 영국 외교관 사토와의 대화에서 들은 내용과 유럽 근대문물 사진, 외국의 실정을 파악해 모두 보고했다. 이동인은 성냥 등 개화기 물건을 조선에 많이 소개했다. 1880년 11월 5일 이동인은 승려 무불과 함께 천성함을 타고 원산에서 출항해 11월 15일 일본 도쿄에 도착했다. 11월 19일 이동인은 유대치와 함께 청국공사 하여장을 찾아가 청나라의 도움을 요청하며 조미수호조약 조약문 초안을 작성하였다.
이동인은 12월 1일 사토를 만나고 12월 18일 부산으로 귀국하였다. 그때 승려 이동인의 활동이 대원군에게 알려져 유대치는 이동인에게 위협적인 사람들이 있으니 피하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이동인인 이를 무시하고 동래부사를 찾아갔다. 동래부사는 수상한 점이 있다고 의심해 이동인을 밀항 죄로 부산 감영에 투옥하였다, 1877년 개화사상을 지도하던 박규수가 사망하자 그 역할은 모두 유대치가 하였다.
유대치는 본명이 유홍기로 대치는 호다. 그는 청계천에서 의원을 경영하는 醫官으로 白衣政丞이란 별명처럼 어려운 이들을 돌보며 재야에서 활동하며 개화사상을 깊게 선양했다. 유대치는 이동인이 갇혔다는 소식에 놀라 부산으로 내려가 백방으로 노력해 옥에 갇힌 이동인을 꺼내 주었다. 이동인은 12월 27일 한성으로 출발해 궁에서 고종을 알현하고 지난 일을 모두 상세히 보고했다. 고종은 승려 이동인을 1881년 2월 25일 통리기무아문 참모관에 임명하고 최신 군함과 무기를 구매하는 밀명을 내렸다. 그런데 이동인이 1881년 3월 9일 李元會(1827~ ?)와 함께 일본에 가려고 하다 갑자기 종적이 사라졌다. 의문의 행방불명이 되었다.
서재필은 승려 이동인을 회고하면서 “그가 가지고 온 책이 무척 많아 3~4개월 절에 들려 보았지만, 너무 위험해 동대문 밖 永導寺에서 책을 보고 다시 봉원사에 들려서 완독하는데 1년이나 걸렸다, 이 책들을 통해 세계의 대세를 알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東京道立大學에 수장된 〈東仁聞書〉에는 이동인이 하나부사 공사와 가진 회담 기록이 있는데, 이광린 선생이 한국에 처음 소개하였다.
〈근대 화계사의 역사와 위상〉 논문을 발표한 한상길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는 “화계사가 근대불교의 빗장을 시작을 연 개화도량(開化道場)이다.”라고 주장했다. 시중에 퍼져있는 승려 이동인의 사진은 본인 사진이 아니고 1930년대 다른 승려의 모습이라고 2023년 발간한 《대각사상》 제38집에서 오류를 잡았다.
조선어학회 발간 잡지 《한글》(사진:한국민족대백과사전)
개화기 때 화계사는 신촌 봉원사로 더불어 젊은 학자들이 많이 찾았다. 봉원사는 1908년 8월 31일 주시경, 김정진 등이 창립한 국어연구학회가 우리말과 글의 연구와 발전을 위해 모인 곳으로 절에서 많은 지원을 하였다.
홍월초(洪月初, 1858~1934)는 1858년 6월 12일 한성에서 태어나 洪秉玉의 아들로 태어나 이름이 重燮, 巨淵이었다. 15세에 1872년 양주 천마산 부도암에서 출가하여 幻翁喚眞 문하에서 수학했다. 1892년(고종 29) 12월 35세 나이에 南漢山城八道摠攝에 임명되고 1893년 북한총섭이 되었지만 1894년 갑오경장 때 승군제도가 폐지되었다. 1900년에 수국사를 중창하고 화계사에 주석하며 1902년 동대문 밖 창신동에 원흥사를 창건하였다.
원흥사(사진:위키백과)
김경집 동국대 교수는 대각사상연구원에서 발간한 대각사상 제3집(2000년) 〈日帝下의 佛敎革新運動 硏究〉 논문에서 元興寺 창건 및 불교계의 새로운 변화와 흐름을 상세하게 기술했다. 대한제국은 불교를 제도권으로 끌어들이려고 창신동에 원흥사를 허락하고 寺社管理署를 두어 전국의 사찰과 승려를 관리하도록 조치하였다. 원래 寺社管理署는 궁내부 소속으로 전국의 산림과 城堡, 사찰을 관장했으나 얼마 후 폐지되어 사찰들은 자력으로 운영을 꾀하게 된다. 1904년 원흥사가 문을 닫게 되어 모든 佛具를 봉선사로 옮기고 그 자리에 명진학교를 건립하였다.
불교근대화 초석을 마련하기 1906년 奉元寺의 李寶潭과 협의하여 불교연구회를 조직하고 4월 10일 元興寺에 근대식 불교고등교육기관인 명진학교 설립을 결의하였다. 학교 경영은 불교연구회가 맡고 재정은 전국 사찰에서 담당하기로 하여 5월 8일 개교하였다. 초대 교장은 월초이었다. 월초는 화계사에 머물며 개혁파 인사들과 한글학자를 후원했다. 1933년 한글맞춤법 통일안이 화계사에서 탄생했다. 월초는 1906년 봉선사 교종판사가 된 후 1926년까지 주지를 20년이나 재임하다 1934년 입적하였다.
선각자 월초(사진:불교닷컴)
월초의 法脈은 봉선사 조실과 동국역경원장을 이어받은 耘虛(1914~1980), 月雲(1929~2023) 대강백으로 이어졌다. 1981년 군대 시절에 봉선사에 인사차 들렸다가 월운 큰 스님이 18살에 고향을 떠나 화방사에 출가하여 오늘날까지 고향 땅을 한 번도 보지 못해 아쉽다고 말씀해, 7일 후 25사단 전방 관측소인 상승 OP 전망대에 모셔 고향을 바라보게 해드렸다. 큰 스님의 고향은 경기도 장단군 진동면 용산리로 되어있으나 그곳은 외가이고, 1970년대 북한군이 비무장지대에 파놓은 제1땅굴 근처라고 말씀하시며 풀이 우거진 광활한 벌판과 고랑포를 30분간 서서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군대 시절 월운 큰 스님을 모셔 자주 법문을 청하고 감악산과 임진강 주변을 자주 방문했다. 지나간 그 시절이 돌아올 수는 없지만, 노스님과 대화하며 걸었던 그 길이 항상 그립다.
임진강 주상적리 적벽(사진:궁인창)
고랑포는 고호(皐湖) 8경이라 하여 경치가 매우 빼어난 곳이다. 8경 중 조대모월(釣臺暮月)은 임진강 바위 위에 비치는 깊은 밤의 고운 달빛을 말하며, 지탄어화(芝灘漁火)는 자지포 여울에서 밤에 고기를 잡는 어선의 거물거리는 등불이고, 미성초월(嵋城初月)은 紫微星 호로고루 성 위로 떠오르는 초승달을 표현한 말이다. 괘암만하(掛岩晩霞)는 고랑포 동쪽 고야위(큰 바위)에 비친 저녁노을이다. 평사낙안(平沙落雁)은 고랑포의 건너편 장좌리의 넓은 모래 벌판에 열을 지어 내려앉은 기러기 떼를 말하며, 석포귀범(石浦歸凡)은 장남면 반정리의 돌거리에서 고랑포 선창으로 돌아오는 돛단배이다. 적벽단풍(赤壁丹楓)은 임진강 장단 석벽 좌우로 비단처럼 펼쳐지는 가을 단풍의 절경을 뜻한다. 나릉낙조(羅陵落照)는 신라 경순왕릉 위에 비치는 낙조이다.
1981년 임진강에 대홍수가 나서 강이 범람해 강가에 밭이 잠기고 다리가 잠겨 교통이 모두 끊어졌다. 강물이 가득한 임진강에 60만 년 전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현무암 주상절리 적벽(赤壁)은 정말 장관이었다. 겸재 정선이 그린 임진강이 그림으로 남아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