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가 김택영의 중국 망명
조선의 문장가이며 뛰어난 역사가인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은 자는 위린(玉林), 호는 창강(昌江), 소부성(少蕪生), 운산소부당(雲山少蕪堂)의 스승으로 불리고 말년에는 창매성(昌梅盛)으로도 불렸다. 그는 1893년 東京을 방문하여 유학생 박유굉의 묘를 참배하고 글을 지어 추모했다.
김택영(金澤榮)(사진;바이두백과)
김택영은 編史局에서 오래 근무하며 조선의 亡國 과정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두 달 전에 황현(黃玹, 1855~1910)에게 글로 보답하겠다(文章報國)는 편지를 보내고 망명길에 올랐다. 김택영은 상하이에서 장젠(張謇, 1853~1926), 岩福, 鄭曉舒를 만났다. 장젠(張謇)은 1894년 42세에 進士가 되어 翰林院修撰이 되었지만, 淸日甲午戰爭에서 청이 일본제국에 무기력하게 패배하는 것을 보고 實業救國을 생각하고 湖廣總督 張之洞(1837~1909)에게 방직업을 건의하여 지원금을 받았다. 그는 영국의 최신 방직기를 도입하여 일거리를 만들고 최초로 주식제를 실시하여 막대한 부를 쌓았다.
장젠(張謇)은 상하이 강 너머 위치한 난퉁시의 현대화를 이끈 정치인, 교육가, 실업가로 중국 방직업의 개척자로 조선의 독립을 강력하게 지지한 인물이다.
김택영은 친우(親友) 장젠이 마련한 난퉁(南通) 집에 머물며 조선 문학사와 역사를 정리했다. 1908년 《韓國金滄江集選》을 南通에서 간행했는데, 이 책은 중국 후배 문인 李湞(1877~1929)이 중국인 독자를 대상으로 창강의 작품을 選한 것이다. 난퉁사람들은 浪山에 묻힌 망명객을 조선의 굴원으로 불렀다.
채용신 작 '황현 초상' 95.0x66.0cm(사진:국가유산청)
매천 황현(黃玹, 1855~1910)은 1905년 일본제국이 군사력을 앞세워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통분을 금치 못했다. 그는 김택영과 함께 국권 회복 투쟁을 하기 위해 망명을 시도하다 실패하였다. 1910년 8월 일본제국이 조선을 병탄하자, 구례군 자택에서 절명시 4수를 남기고 다량의 아편을 먹고 음독 자결했다. 고종의 어진을 그렸던 화가 石芝 채용신(채용신(蔡龍臣, 1850~1941)은 선비 황현의 사진을 구해 초상화를 그렸다. 황현 초상화는 2006년 12월 보물 1494호로 지정되었다.
박유굉 타루비(墮淚碑)(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유굉의 후배 유학생들이 1900년 4월 타루비(墮淚碑)라는 글을 새겨 비석을 건립했다.
1874년에 건립된 아오야마 공동묘지(靑山靈園)는 1926년에 일본 최초의 공동묘지로 현재는 도쿄도에서 관리한다, 이 묘원에는 근대사와 관련 있는 인물이 많다.
김옥균 묘비는 한동안 돌보는 이 없이 방치되고 관리비를 전혀 내지 않아 도쿄도는 무연고 묘소 정리절차를 밟아 강제 이장 절차에 들어가려고 했다. 이런 사실이 일본 신문에 크게 보도되어 사회문제가 되었다. 2005년 주일한국대사관은 한국 정부가 묘지 사용료를 대신 내겠다고 도쿄도에 밝혀 존치 유지하게 되었다.
미국에 도착한 보빙사(사진:위키백과)
조선은 1883년에는 보빙사를 미국에 파견했다. 유길준은 보빙사를 수행한 후 미국에 남아서 유학 생활을 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조선에는 개혁을 희망하는 김홍집 내각이 들어섰다. 김홍집 내각은 1894년 11월에 부임한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가 관비유학생 프로젝트를 내놓으며 협조 의사를 표명해 이를 수락했다.
고종은 주변국의 국제적인 흐름과 교육 현황을 보고 받고 나라의 인재를 키우려고 조바심을 냈다. 내각은 1895년 2월 2일 ‘교육에 관한 조칙’을 반포했다. 관비 유학생 시험에 1,000명이 지원해 100명을 선발했다. 김홍집 내각은 각료들의 추천을 받고 막대한 교육 예산을 마련하기 위하여 골몰해 3차례에 걸쳐 151명을 일본에 파견했다. 관비 유학생은 1895년 4월 2일 내부대신 박영효 배웅을 받으며 1차로 일본으로 출발해 4월 7일 도쿄에 도착했다. 그리고 한 달 뒤 2차로 선발된 유학생 26명이 일본에 도착했다.
유학생들은 모두 후쿠자와 유키치가 운영하던 게이오의숙에 입학하여 유치부부터 시작하여 일본어를 초보부터 차근차근 배웠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군주에게 보답하고 국민에게 베풀어 동아시아의 존안(尊安)을 도모하라.”라고 유학생을 격려했다. 관비 유학생에 대한 연구는 권석종이 1962년에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김기주 등 많은 학자의 선행 논문이 있다. 관비 유학생들은 일본에 도착해 대조선인 일본 유학생 친목회를 결성하고 1896년 1월 6일 주일 조선공사관에 모여 사진을 찍었다.
일본 관비 유학생 조선인친목회(사진:증산도)
조선에서는 1895년 10월 일본 자객이 왕궁을 무단으로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해 민심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경복궁을 몰래 빠져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며 친러 내각을 수립하고 을미사적과 법부대신 장박을 역적으로 선포하고 체포 및 처단을 명령한다.
친러 정권은 의병과 보부상 수천 명을 동원했다. 이때 일본제국은 일군 군인을 앞세워 호위하였다. 영의정과 초대총리대신을 지낸 정무 능력이 뛰어난 김홍집(金弘集, 1842~1896)과 정병하(鄭秉夏, 1849~1896)는 고종을 뵈러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하다 군중에게 붙잡혀 광화문 앞으로 끌려가 보부상(褓負商)에게 봉변을 당하고 매를 맞고 사지가 찢겼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乙未事變과 甲午改革의 핵심인 단발령, 신분제 폐지, 과부 재가 허용, 왕실 재정 분리, 청나라 사대 금지 등 일련의 급진적인 개혁 정치에 반발하여 불같이 들고 일어나 폭동을 일으켰다.
탁지부대신 어윤중은 폭동을 피하려고 용인으로 피신하다 원한을 산 사람들에게 피살되었다. 이 일로 세상의 모든 것이 변했다. 조선 내각에서 보내주는 학비가 지원과 중단을 반복하여 관비 유학생을 더 힘들고 지치게 하고 일부 유학생은 조선으로 송환되었다. 관비 유학생은 보통과에 진학하여 6개월에서 1년 반에 걸쳐 교육을 받았는데 중간에 탈락자가 많이 생겨 70명이 졸업하였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