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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나다의 Christ of the Abyss
근대 유람선의 역사는 1833년 이탈리아에서 건조된 프란체스코 1호로 시작되었다. 그랜드 투어(Grand Tour)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는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이 합병되면서 탄생한 양시칠리아 왕국(The Kingdom of the Two Sicilies)의 깃발을 게양한 프란체스코 1세 호를 타고 새로운 크루즈 여행을 즐겼다.
1831년에 나폴리 왕국 카스텔람마레 디 스타비아 야드(Castellammare di Stabia's yards, 1782년 건립) 조선소에서 건조된 프란체스코 1세 호는 120마력의 엔진을 장착해 배의 속도가 빨라졌다. 호화로운 여객선은 1833년 6월 초 나폴리 항에서 출항할 때 유럽에서 온 귀족, 왕족들이 크루즈에 탑승해 3개월간 타오르미나(Taormina, 시칠리아) 카타니아(Catania), 시라쿠사(Syracuse, 시칠리아), 몰타(Malta), 코르푸(Corfu, 그리스), 파트라스(Patras, 그리스), 델포이(Delphi), 자킨토스(Zakynthos, 그리스), 아테네(Athens), 스미르나(Izmir, 튀르키예 이즈미르),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까지 항해했다. 선사는 승객들에게 다양한 투어를 제공해 호응이 좋았다.
영국 해운회사 P&O는 1844년 최초로 여객 크루즈 서비스를 도입하며, 사우샘프턴에서 출발하여 지브롤터, 몰타, 아테네 등의 목적지로 가는 해상 투어를 시작하여 현대적인 크루즈 여행을 만들었다. P&O 크루즈는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플 등의 목적지로 가는 왕복 크루즈를 도입하고, 더 크고 호화로운 선박을 주문해 1880년에 건조된 최초의 강철 상부 구조를 갖춘 선박인 SS 라벤나호와 1889년에 건조된 SS 발레타호가 진수되었다.
100년이 지나 1938년 12월, 프랑스 마르세유의 메사지리 마리팀(Messageries Maritime) 회사는 여객선 함대에 새로운 선박을 위해 호화 유람선을 발주했다. 당시 프랑스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간의 여객 수송을 목적으로 호화롭고 빠른 선박이 필요했다. 사이공 강 항구에서 기동하기에 적합한 크기를 갖춘 배를 주문하였다. 이 선박의 용골은 1939년 6월 15일,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와 툴롱 사이 라 시오타에 위치한 소시에테 프로방칼 드 건설 나발(Société Provencale de Construction Navale, La Ciotat) 조선소 161호 선체에 놓였다. 1939년 9월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선박 건조가 중단되었고, 1940년 12월 프랑스가 패배한 후에 공사가 재개되었다. 1944년 6월 8일에 완성되지 않은 선체를 비시 정부는 대통령을 기리는 마레찰 페탱(MARÉCHAL PÉTAIN)이라는 이름으로 독일 크릭스마리네의 명령에 따라 진수되었다. 그러나 1944년 8월 프랑스 남부에서 후퇴하는 동안 독일군이 카롱트 운하에 선박을 침몰시켰다. 침몰한 페탱 원수호 선체는 1946년 5월 인양되어 툴롱으로 예인되었다가 1946년 라 시오타 조선소로 돌아와 마르세유의 메사지리 마리팀(Messageries Maritimes)에서 크루즈 선박으로 개조되어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로 개칭되었다.
세련되게 부활한 배는 22노트의 속력을 낼 수 있는 3축 슐처 디젤 엔진을 탑재하고 총중량: 17,321톤, 북위 9,500도, 적재 중량: 5,536톤. 호출부호: FNNW였다. 선박 내부 인테리어는 베트남의 아름다운 사이공 만트라에서 영감을 받은 디자인을 채택했다. 특별히 제작된 도자기와 열대 식물로 장식된 최고급 카페, 호두나무 패널로 마감된 흡연실, 베란다 카페, 돔형 다이닝 살롱을 갖추었다. 지중해에서 시운전(試運轉)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1949년 7월 선사에 인수하였다.
병원선(사진:ShipSpotting.com)
라 마르세예즈 호의 첫 항해는 1949년 8월 18일 마르세유에서 요코하마까지로 정원은 1등석 344명, 2등석 74명, 3등석 318명, 총 736명의 승객이 탄 당대 가장 인상적인 크루즈 여객선 중 하나로 명성을 떨쳤다. 1953년 3월 2일, 요코하마를 출항하던 중 노르웨이 화물선 헤르멜린호와 충돌했지만, 손상이 적어 항해를 계속했다. 1954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함락된 후, 선박 회사는 승객이 적어 아시아 항해를 중단했다, 이후 선박은 베이루트와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는 무역선으로 이용되었다.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군이 이집트 시나이반도를 침공하면서 전쟁이 벌어진 ‘수에즈 위기(제2차 중동전쟁)’ 때는 병원선으로 활용되고, 알제리로 향하는 병력 수송선으로 사용되었다.
1957년 2월 24일, 라 마르세예즈호는 파나마의 AROSA LINE Inc.에 매각되었다. 회사는 배의 이름을 ‘아로사 스카이(AROSA SKY)’로 변경했다. 배는 마르세유에서 3개월간의 수리를 거쳐 이코노미석을 완전히 없애고 1등석 202명과 2등석 1,03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배로 재탄생되어 공식 번호: 3148MF. 호출부호: HOSM를 부여받았다.
1957년 5월 10일 아로사 스카이(AROSA SKY) 호는 마르세유를 출발하여 르아브르와 브레머하펜으로 향하는 크루즈를 시작해 5월 16일에 도착했다. 클레멘스 브로링 선장의 지휘 아래 다음 날, 사우샘프턴과 핼리팩스를 거쳐 뉴욕으로 향하는 처녀 대서양 횡단 항해에 나섰다. 승객 중에는 헝가리에서 온 난민과 이민자가 많았다. 배는 5월 24일에 핼리팩스에 도착한 후 5월 26일에 뉴욕으로 향했다. 아로사 스카이는 브레머하펜과 뉴욕을 잇는 데뷔 항해를 큰 호응 속에 시작했다. 1957년 10회의 대서양 횡단 항해를 계획하고, 겨울철에는 뉴욕에서 카리브해까지 크루즈를 탈 고객을 모집하던 중에 배의 소유권은 파나마의 Compañia Internacional Transportadora S.A.로 변경되었다. 1957~58년의 전반적인 여객 수송량은 예상보다 저조했다. 1957년에는 아시아 독감이 대유행하여 많은 여행객이 피해를 입었다. 8월 15일 밤, AROSA SKY호는 승객 중 약 200명의 독감 확진자를 태우고 검역소에서 뉴욕에 도착했다. 당시 독감이 극성해 1957년 말 뉴욕에서 브레머하펜으로 가는 배 승객은 아주 적은 85명이었다. 1958년 1월 8일, 카리브해 크루즈 중 노스캐롤라이나주 윌밍턴에 입항하던 중 심각한 화재가 발생해 1등석 객실 여러 개가 파괴되었다.
2년 만에 아로사 라인은 재정난에 빠졌고, 1958년 선박은 이탈리아 가족 회사인 제노바의 지아코모 코스타 푸 안드레아(Giacomo Costa fu Andrea)에 매각되었다.
MV 비앙카 C호. 제노바, 1959년(사진;위키피디아)
1958년 11월 8일 선박은 이탈리아 제노바에 입항하여 코스타 선사 소유주의 딸 이름을 따서 비앙카 C(BIANCA C)로 개명하였다. 비앙카 C호는 이탈리아 제노바의 칸티에리 나발리 리우니티 델 티레노(Cantieri Navali Riuniti del Tirreno) 조선소에서 수리되어 전장 181m, 폭 23m, 총톤수는 17,321톤에서 18,427톤으로 증가, 공식 번호: 3149, 호출부호: ICRW를 배당받았다. 코스타 선사는 두 번째 선박을 이탈리아 나폴리와 베네수엘라 라 과이라(La Guaira) 항구 도시를 잇는 정기 항로를 개설하고 1959년 4월 2일에 항해를 시작했다.
새로운 항해는 카리브해에 있는 여러 항구를 들리고 그레나다가 귀국 항로의 마지막 정박지였다. 이후 18개월 동안 MV 비앙카 C호는 항해도 잘해 명성도 높고 승객도 많았다.
1961년 10월 12일 MV 비앙카 C호는 이탈리아 나폴리 항구를 떠났다. 항해는 매우 순조로워 열흘 만에 배는 영연방 그레나다의 수도인 세인트 조지스(Saint George's) 항구 앞에 정박하였다. MV 비앙카 C호는 10월 22일 일요일 이른 아침 항해를 준비하다 선박의 주 보일러실 엔진룸에서 폭발이 일어나 현장에서 승무원 1명이 죽고 8명이 부상당하고 화재가 발생했다. 선교에 있던 비앙카 C호 프란시스코 크레바코(Francisco Crevaco) 선장은 화재가 발생하자, 승객과 300여 명의 승무원에게 긴급 대피 명령을 내렸다.
배의 폭발음은 너무 세서 인근 세인트 조지 주민들을 잠에서 깨울 만큼 컸다. 배의 화재 소식을 접한 섬 주민들은 상황을 재빨리 파악하고 모든 선박을 동원하여 구조 활동을 전개했다. 그날 마을 동쪽 요트 클럽에서는 딩기 경주가 열려 많은 사람이 경적을 듣고 여객선 승객 구조에 나섰다. 호화 요트부터 작은 어선까지 모두 승객 구조에 힘썼다. 불길은 배의 후미 부분으로 빠르게 번졌지만, 승무원들의 신속한 대응과 항구에 있던 섬 주민들의 협조로 전체 탑승객 673명 중 672명을 2시간 만에 구조하였다. 당시 해상 소방장비는 너무나 열악하고 부족해 배의 불을 끌 수가 없었다. 심하게 화상을 입은 승무원 12명이 치료를 위해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고, 치료받던 항해사 로디차 나팔레가 사망했다. 승객들이 피신한 비앙카 C호는 텅 비어 배에 칠한 페인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선체가 불에 탔다.
여객선 비앙카(Bianca) C호 화재(사진:Tripadvisor)
당시 푸에르토리코에 머물던 영국 호위함 "HMS 런던데리호는 화재 소식을 듣고 바로 현장으로 출동했다. 이틀 만인 10월 24일 사고 현장에 도착한 군함은 여객선이 정박한 곳에서 침몰하면, 세인트 조지 항구의 기능을 방해하기 때문에 멀리 예인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HMS 런던데리호 군함의 승무원들은 불타는 배에 올라타 예인선을 연결한 후, 닻줄을 끊고 예인선을 고정하는 데 성공해 포인트 살린스 반대편 얕은 곳에 정박시키거나 항로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감행하였다. 배를 6km 정도 예인하던 중 화재로 인한 극심한 열기에 방향타가 걸려 예인선의 줄이 끊어지면서 유람선은 심하게 우현으로 기울었다. 승무원들은 필사적으로 침몰을 막으려고 다른 예인선을 연결하려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배는 50m 수심에 가라앉았다. 1970년대 초에 트리니다드 해난 구조 회사가 비앙카 C호 프로펠러를 인양해 황동은 고철로 팔았다. 현재 침몰한 비앙카 C호는 평평한 모래 바닥 위에 똑바로 세워진 채로 남아 있다.
비앙카 C호 화재 당시 그레나다 섬 주민 5,000명의 주민이 모두 헌신적으로 구조원이 되어 다친 환자를 병원으로 이송하고, 잠자리와 휴식처를 만들고, 음식을 만들어 유람선 승객들에게 무료로 제공했다.
이탈리아 제노바 코스타 라인은 그레나다 국민의 헌신적인 봉사에 감사하여 조각가 귀도 갈레티에게 청동상 Christ of the Abyss을 의뢰해 제작하여 그레나다에 조각상을 기증했다. 현재 그레나다 세인트 조지스 항구 산책로에 Christ of the Abyss가 서 있다.
그레나다 Christ of the Abyss(사진:Tripadvisor)
카리브해에는 13개 독립국이 있으며 7,000여 개의 섬이 있다. 독립국 그레나다는 카리브해 화산섬으로 향신료가 유명하며 인구가 약 110,000명이다. 동카리브해 중앙은행(ECB) 통계 자료에 따르면 그레나다에는 1년에 크루즈선 여행객이 약 50만 명 정도 방문한다. 그레나다 여행 코스에는 매력적인 그랜드 안스 해변, 10m 높이의 안더스 폭포, 열대 식물과 새들을 즐기는 트래킹, 화산 칼데라 호수와 열대 우림이 울창한 그랜드 에탕 국립공원, 초콜릿 공장, 1785년에 세워진 럼 증류소 공장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세 번째 Christ of the Abyss는 미국 플로리다주 키스 국립 해양 보호구역(John Pennekamp Coral Reef State Park)의 키 라르고 드라이 록스 암초에 설치되었다. 미국 플로리다주 심연(深淵)의 그리스도 조각상은 이탈리아의 유명 다이버인 에지디오 크레시의 의뢰로 제작되어 1961년에 미국수중협회에 기증해, 1965년 8월 25일에 미국 상원의원 스페사드 홀랜드의 지원을 받아 수중에 설치했다,
Christ of the Abyss, Florida, U.S.A. 2017 촬영(사진:Chris Makowski)
다이버들이 마이애미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존 펜캠프 산호초 주립공원을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는 파도가 없어 잔잔하고, 아름다운 40여 종의 산호와 650여 종의 다양한 물고기가 있어 즐겁게 다이빙을 하며 바위 산호, 바닷가재, 거북이 가오리를 구경할 수 있어 좋아한다. 주변 바다에서 난파선을 구경하고 악마의 소굴(Devil's Den) 등 다양한 다이빙 수중 환경을 즐길 수 있다. 그레이트 플로리다 리프는 미국 본토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대륙붕 경계 장벽 산호초이다. 마이애미 석회암 노출은 플로리다 남동부 대륙붕을 따라 기반암의 형태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현상은 침수된 암석화된 고해안선, 산호초 사이의 모래 통로, 고해양 찰과면의 형성에 기여하여 폭은 약 4마일(6~7km), 솔저 키 바로 동쪽의 파위 록스에서 마퀘사스 키 바로 남쪽까지 20m(66피트) 깊이의 등고선을 따라 270km(146해리, 168마일) 길이의 큰 장벽 산호초 사슬로 알려진 FRT의 형성을 촉진했다. 이곳에 6,000개가 넘는 개별 산호초를 포함하며 플로리다 해역에는 500종이 넘는 해양 어류와 포유류, 45종이 넘는 석산호와 35종이 넘는 팔산호가 서식하고 있다. 플로리다 코랄 리프 주립공원은 모든 레벨의 다이버에게 매력적인 곳으로 수중 음악 페스티벌과 같은 행사를 통해 수중 환경 보호와 산호초 보호의 중요성을 알리고, 해양 복원 활동 참여를 독려하기도 한다.
플로리다 리프(사진:위키피디아)
이탈리아 조각가 갈레티(Guido Galletti)가 제작하고 주조한 Christ of the Abyss 석고상 원본은 이탈리아 중부 아드리아해 해변 마을 마리나 디 라벤나에는 국립수중박물관(MAS)에 전시되어 있다. 수중박물관은 1998년에 역사 다이빙협회에 의해 개관되어 다섯 개의 주제 섹션과 수중 활동 애호가들을 위한 도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탈리아 해군의 ‘마리나 밀리타레’ 전용 홀에는 갈레아치 회사에서 제작한 견고한 잠수복이 전시되어 있고, ‘Cristo delli Abissi(심연의 그리스도)’에게 헌정된 홀에서는 다이빙 애호가들에게 인기 있는 조각가 갈레티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이탈리아 국립수중박물관(MAS)(사진:Ravenna Tourism)
이 글을 쓰면서 우리나라 해상에서도 오래전부터 크고 작은 어선, 조운선, 화물선, 함정이 바다에서 기상악화와 풍랑, 해상충돌, 전쟁, 원인을 알 수 없는 재난으로 구조를 받지 못하고 바다에 침몰해 과거 해상사고를 조사했다.
• 조선왕조 태종 3년(1403년) 5월 5일 조운선 34척 침몰, 태종 14년(1414년) 조운선 66척이 서해 안행량(安行梁)에서 침몰하여 47,000석의 곡물이 유실되고 수백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 조선 선조 30년(1597년) 7월 16일 정유재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 수군지휘부와 조선 수군 7,000여 명은 경계 소홀과 기상악화가 겹친 가운데 칠천량(漆川梁)에 정박하다, 기만전술에 능한 일본 해군 군함 1,000척의 새벽 기습 공격으로 거제도 칠천량 해전에서 괴멸당했다.
• 1949년 10월 5일 인천에서 강화도로 가던 평해호가 물치도 부근에서 침몰 70명 사망.
• 1953년 1월 9일 여수항에서 출항하여 부산으로 가던 창경호가 부산 사하구 다대포 해상에서 침몰하여 승객 236명이 사망하였다.
• 1953년 1월 25일 서천 앞바다에서 한국미곡창고주식회사 행운호가 침몰하여 100명 사망.
• 1963년 1월 18일 연호(燕號)는 목포에서 출항하여 전남 영암군 가지도 해상에서 돌풍으로 승객 140명 사망하였다.
• 1967년 1월 19일 해군 호위 초계함 당포함(해군 56함)은 동해안 북방한계선에서 어민 보호 중 북한 인민군 해안포 포격으로 침몰하여 군인 11명 순직하였다.
• 1967년 1월 14일 한일호(140톤) 여객선이 여수에서 출항해 부산항으로 가다 21시 54분경 가덕도 해상에서 진해로 가던 해군 구축함 충남함(1900톤)과 충돌하여 93명이 사망했다.
• 1967년 9월 15일 북태평양 얄류산 열도에서 조업하던 삼양수산 원양어선 2척 심한 풍랑으로 선원 29명 사망.
• 1970년 12월 14일 여수 상백도 해상에서 남영호 침몰하여 승객 326명 사망.
• 1974년 2월 22일 경남 통영 해군 예인정 YTL 30호는 훈련병 159명 사망.
• 1974년 6월 28일 거진 해상에서 해경 경비정 863호는 북한 함정 3척의 공격을 받고 26명이 사망하였다. 속초해전 영웅(실종자 18명)은 차갑고 어두운 바다에 그대로 잠들어 있다. 나라에서는 현충일을 앞두고 매년 “대한민국이 오늘의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의 생명까지 바쳐가면서 나라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셨던 많은 분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숭고한 뜻이 영원히 기억되고 보답받는 나라를 만들겠다.”라고 유가족에게 말했지만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 1993년 4월 아르헨티나 포클랜드 제도 근해 오징어잡이 어선 세레쿤다 3호는 강풍으로 선원 10명 사망,
• 1993년 10월 10일 전북 부안군 위도 해상에서 돌풍으로 서해훼리호 침몰 승객 292명 사망,
• 2006년 12월 20일 아르헨티나 연안 원양어선 인성 207호는 강풍으로 4명 사망, 2명 실종,
• 제주도 남쪽 160마일 해상에서 한진해운 소속 마드라스호와 라이베리아 국적의 화물선 탐피아호가 충돌 탐피아호 선원 27명 실종.
• 2014년 4월 16일 진도 관매도 해상에서 세월호가 침몰하여 승객 304명 사망), 2014년 러시아 베링해역 원양어선 제501 오룡호는 기상악화와 풍랑으로 선원 52명 사망,
• 2025년 2월 9일 여수 삼산면 하백도 해상에서 기상악화와 풍랑으로 제22 서경호 선원 4명 사망, 6명 실종 등 많은 해상사고가 있었다.
해상사고를 조사하며 바다(海洋)에서 불의의 기상악화와 풍랑으로, 조업하다, 여객선을 타고 가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한 추모일 제정이 별도로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94년 11월 유엔해양법협약이 발효되어 각국은 바다의 중요성을 고취하기 위한 ‘바다의 날’을 제정하였다.
이탈리아 리구리아주 카모글리 사람들은 “바다의 모든 선원이 영웅으로 추앙받았고, 모든 사람은 바다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라고 말한다. 대한민국은 해양국가로 오래전부터 무역을 통해 나라가 성장하고 발전했다. 바다에서 선박 사고로 죽은 선원, 군인, 민간인이 너무나 많아 ‘해양순직자 기념일(Maritime Martyrs' Memorial Day)’을 제안한다.
대한민국 제6공화국의 아홉 번째 정부인 국민주권정부는 바다에서 불의의 사고로 죽은 희생자 국민을 위한 국가기념일(國家記念日) 제정과 추모비 건립을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