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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비앙카 페르티카호 수채화 그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차(茶)와 잡화를 잔뜩 싣고 러시아 아무르해협 정착촌으로 항해하던 영국 상선 바바라 테일러호는 1878년(고종 15) 9월 21일 돛이 날아갈 정도로 강력한 태풍을 맞아 가까운 섬으로 배를 피항하다 지형을 자세히 몰라 바닷가 해안에 좌초했다. 테일러 선장은 배가 안전하게 피항했다고 생각했으나 센 파도에 밀려 배가 바위 위를 올라타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섬 주민들은 12명의 선원을 육지에 피신하도록 도와주고 돌담으로 둘러싸인 작은 오두막에 묵을 곳을 제공하고 함부로 오두막을 떠나지 말라고 알려주었다. 며칠 후, 높은 관리가 도착하여 배를 조사한 후, 화물 인양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인양을 마친 후, 테일러 산장과 두 명의 중국 선원은 제주도의 행정 중심지 관아로 이동했다. 관아로 갈 때 군인들은 높은 기(旗)를 휘날리고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며 음악 소리를 냈다. 그들은 약 100명의 군인의 호위를 받았다. 거리가 멀어 피곤했지만, 높은 산과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을 보고 평온을 찾았다. 일행이 다른 마을에 도착하면 그 마을 사람들은 빠르게 새로운 말을 제공해 주었다.
며칠간의 이동 끝에 테일러 선장은 제주성의 관문을 통과했다. 여기서 난파된 일본 정크선 선원 5명을 만나 그들과 합류했다. 난파된 배의 생존자들이 제주성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구경하려고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창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거리에 줄지어 서 있는 가운데, 선장은 곧바로 제주 관아로 호송되어 조랑말에서 내렸다. 한 사람이 다가와 제주 목사에게 인사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약 10걸음 정도 몸을 반쯤 숙인 채 걷도록 한 다음에 세 번 절을 한 후, 10걸음 더 걷으라고 교육받았다. 선장은 아전이 시키는 대로 잘 외워 그대로 했다.
영국 상선 테일러 선장은 제주 목사를 만나 나가사키 출항과 좌초 이유를 설명하고는 도움을 주면 출항지인 나가사키로 다시 건너가겠다고 말했다. 배를 구해 구조를 요청하러 가겠으니 꼭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제주 목사는 선장이 하는 말을 자세히 듣고 이를 쾌히 승낙했다. 며칠 후 테일러 선장은 중국인 선원 한 명을 데리고 바닷가로 가서 일본 정크선 중 가장 항해에 적합한 배를 골랐다. 며칠 후 중국 선원 2명과 일본 선원 5명을 데리고 나가사키로 출항했다. 영국인 선원 2명과 중국인 선원 7명은 그대로 두고 떠났다. 테일러 선장은 8일간의 힘겨운 항해 끝에 동쪽에 있는 고도열도를 지나 나가사키 항구에 도착했다.
사고난 선원들이 항구에 얼굴을 보이자, 신문기자들이 갑자기 나타나 난파된 선원들에게 계속 질문을 퍼붓었다. 기자들은 선원들의 말을 그대로 적지 않고 왜곡하여 과장된 기사를 크게 실었다. 일본 관보도 “미개척 섬에서 선원들이 비참하게 감금되었다.”라고 거친 표현의 글을 올렸다. 테일러 선장은 제주도 사람들이 우리 선원들을 극진하게 아주 친절하게 대해주었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음날 세관 관리가 찾아와 테일러 선장에게 입항세를 요구했다. 선장은 지금 이 사태는 재난임을 거듭 말했다. 세관원은 막무가내로 세금을 요구해 선장은 할 수 없이 관리에게 세금을 주었다. 관리는 출항할 때도 역시 세금을 징수했다.
S.S. 하콘 아델스텐(Hakon Adelsten)(사진:베르겐대학교 도서관)
영국 상선 테일러 선장은 대영제국 공사관에 긴급 구조를 요청했다. 영국 해군은 군함 H.M.S, 에게레이호를 좌초 지역으로 급히 출동시켰다. 제주도 해상에 도착한 구조 군함은 나가사키 영국 해군 사령관에게 제주도에 난파된 상선의 화물의 양이 너무 많아 도저히 군함에 실을 수가 없다고 통보했다. 이에 해군 장교는 구조 인양 작업팀을 다시 조직하고, 906톤급 노르웨이계 미국 증기선 S.S. 하콘 아델스텐(Hakon Adelsten)호를 급히 용선하고 선장에게 특별 임무를 부탁했다. 용선한 증기선은 원래 노르웨이 서남부 베르겐 항구에서 뉴욕으로 향하는 이민자들을 수송하던 배였다. 옛 사진을 찾아보니 1873년 4월 24일 베르겐 항구 출항 당시 사진작가 크누드 크누센이 이민자들을 태우려고 준비하는 하콘 아델스텐호를 촬영한 사진이 노르웨이 베르겐대학교 도서관에 있었다.
하콘 아델스텐호에는 영국인 외교관과 책임자, 통역가 다케다, 화물 인양을 도울 인부 20명, 벨 뷰 호텔의 41세 이탈리아인 소유주 니콜라 카를로 나폴레오네 만치니가 승선했다. 호텔 주인은 이탈리아 선적 비앙카 페르티카 호의 운명을 몰라 구조대에 동행했다.
무시무시한 태풍이 지나간 지 거의 한 달 후인 1878년 10월 22일, 구조선 하콘 아델스텐 호는 제주도에 도착했다. 대영제국 외교관은 남아있던 바바라 테일러 호의 영국인 2명의 선원을 만나 격려를 해주었다. 그런데 그때 조선 관리가 외국인 1명을 보여주었다. 그 사람은 힘든 시련에서 조금 회복된 이탈리아 젊은 20대의 선원 산토리였다. 호텔 주인 만치니는 놀라서 선원들의 아픔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고 생존자들을 위해 이탈리아 음식을 만들어 대접했다. 바닷가 섬 주민들의 도움으로 인양 작업을 마무리하는데 약 일주일이 걸렸다. 난파선 생존자, 구조대원, 섬 주민들 관계는 매우 좋아 선물이 교환되었다. 유럽인들은 우산을 선물하고, 섬 주민들은 해산물과 살아있는 돼지 두 마리, 전통주를 선물했다, 배 위에서는 주민들을 초청해 작은 선상 파티가 열렸다.
제주도 원주민(사진:네프컬렉션)
섬 주민들은 배를 둘러보고 다과를 먹으며 마냥 즐거워했다. 관리들은 처음 보는 독한 술(gin)을 물 없이 마셨다. 선원들은 섬 사람들이 치오타(chiotah), 치오타라고 하자, 따라서 이 말을 배워 함께 따라서 했다. 서로 맞장구치며 같이 제주 토속주를 마셨다. 이별 행사는 곧 축제 분위기로 변했다. Hakon Adelston호 선원들도 어울려 주민들을 즐겁게 하려고 악기를 연주했다. 섬 주민들은 장구랑 다른 악기를 가져와 같이 연주하고 노래하며 화답했다. 선원들은 관리가 어린 소녀들을 데리고 왔다는 소식에 무척 기뻐했다. 예전에는 나이 들고 매력 없는 여자들만 봤는데, 이번에는 긴 머리를 땋고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멀리서 걸어오고 있어 세 명의 젊은 여성이 걸어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잠시 후, 긴 머리를 한 여인들이 배에 오르기 시작하자, 선원들은 여인들을 구경하려고 몰려 나왔다. 그런데 선원들은 수염이 없는 어린 소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놀라움과 실망에 빠져 말없이 서로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들은 긴 머리를 한 소년들을 생전 처음 보았다.
배의 선원들은 대영제국 상선 바바라 테일러 호에서 가져올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배에 실었다. 심지어 돛이나 나무, 장식품 등을 모조리 뜯어 옮겼다. 마침내 배의 모든 물건 수습이 완료되자, 하콘 아델스톤 호는 곧바로 바로 출항했다. 그런데 파도가 너무 심해 큰 바다로 나가지 못하고 하루를 해변에서 더 머물렀다.
하콘 아델슈타인(Hakon Adelstein) 증기선(사진:위키피디아)
노르웨이 선적 증기선은 다음날 제주도에 생존한 선원들과 이탈리아 선원, 일본인 등을 태우고 항해하여 나가사키 항에 입항했다. 배는 입항할 때 여러 번 기적을 울렸다. 항구에는 마중을 나온 사람이 많았다. 영국인 선장은 제주민의 호의에 무한한 존경을 일본 기자들에게 거듭 말하며, 원주민들의 선원들에 대한 학대를 적극적으로 부인했다.
이탈리아 선원 산토리는 기자들에게 “강력한 태풍이 제주도 인근에서 지나가면서 비앙카 페르티카호를 덮치고 최소한 세 척의 선박 이상, 일본 정크선 두 척과 선원 12명을 태운 352톤급 영국 스쿠너 바바라 테일러호를 휩쓸었다.”라고 말했다.
나가사키에 살아 돌아온 중국과 일본 선원들도 기자들과 인터뷰를 여러 번 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한 달간 제주 주민들에게 받았던 처우를 매우 극찬했다. “폭풍에 힘들어했던 선원들을 구조한 제주 주민들은 처음부터 이방인들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매우 친절했다. 만일 허가를 받는다면 기꺼이 다시 방문해 섬을 탐험하고 싶다.”라고 강조해서 말했다.
비앙카 페르티카호의 침몰 소식은 한참 후에 이탈리아 제노바 회사에 전해졌다. 선원 1명이 겨우 살았다고 보고했다. 슬픈 소식을 접한 많은 제노바 사람들은 항해하다 죽은 선원들을 위해 추모 미사를 올렸다. 이후 오랜 기간 비앙카 페르티카호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탈리아 범선 비앙카 페르티카 수채화(The Bianca Pertica)(사진;Museo Marinaro)
이탈리아 리구리아 해변에 카모글리라는 작은 어촌 마을이 있다. Camogli는 이탈리아어로 casa(집) + mogli(아내)란 뜻이다. 바닷가 마을이라 어부들이 고기 잡으러 바다로 나가면 집에서 살림하던 부인이 남편을 그리워하며 기다린다는 뜻이다. 부인들은 남편을 기다리다 심심해지면 배를 타고 오는 사랑하는 남편이 멀리서도 자기 집을 잘 알아볼 수 있도록 화려한 색으로 벽에 칠을 해 여러 집이 따라 했다.
이 작고 아름다운 어촌을 찾아가려면, 제노바에서 해변가 도로를 따라 자동차로 40분 정도 가는데, 놀랍게도 이곳 해양박물관에 Korea(朝鮮)가 언급된 수채화가 있어 해양박물관과 카모글리 해군 선장 및 엔지니어 협회의 자료를 조사하였다.
이탈리아 북부 해안에 숨겨진 비경 속에 작은 카모글리는 모든 것이 海洋과 관련되어 있고, 바다에서 평생을 일한 선원의 빛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이 어촌에서는 선원 모두가 영웅이며, 항해에서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증명한 서사시(敍事詩)의 일부라고 여겼다.
카모글리 출신으로 '세일링 3부작'의 저자인 조 보노 페라리는 카모글리 시민들을 설득하여 1937년 시립 해양박물관 건립을 추진했다. 그리고 당시 해군 선장 및 엔지니어 협회는 카모글리 시장에게 아틸리오 베르톨로토 선장을 해양박물관 초대 박물관장으로 추천하였다.
해양박물관 설립자 지오 보노 페라리(사진;Museo Marinaro)
수채화는 피날레 리구리아(Finale Liguria) 출신 토마소 페르티카(Tommaso Pertica) 선주가 항해 중인 "비앙카 페르티카(BIANCA PERTICA)"를 묘사한 수채화로 이 그림은 1970년 아틸리오 베르톨로토(Attilio Bertolotto) 박물관장이 박물관을 현재 자리로 옮긴 이후 창고에 보관된 작품 속에서 우연히 발견하였다.
어촌 마을 카모글리 전경(사진:Expedia)
조 보노 페라리 해양박물관 설립자는 가파른 절벽 위에 외롭게 위태로운 마을이 어떻게 주변의 강력한 힘을 가진 도시들 사이에서 오랜 세월 동안 항해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해양박물관을 건립하였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