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 범선 비앙카 페르티카호
“1878년 9월 이탈리아 비앙카 페르티카(The Bianca Pertica began)호 태풍으로 난파”
범선 비앙카 페르티카(The Bianca Pertica began, La Bianca Pertica ha avuto inizio) 호는 1867년 이탈리아 선주 토마소 패르티카가 제노바 세스트리 포넨테조선소에서 666톤 증기선으로 건조되어 1868년 진수하였다.
이탈리아 제노바 조선소 전경(사진:ItalianLiners.com)
배는 초기에 이탈리아인 이민자 300명과 화물을 싣고 이탈리아와 아르헨티나 사이를 왕복 운항했다. 당시는 해외 투자자와 이민자가 많아 배에 승객이 많았다. 아르헨티나는 1816년 7월 스페인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현재의 아르헨티나 연방은 1853년~1861년경에 형성되었다. 1869년 아르헨티나 인구는 200만 명에 못 미쳤다. 아르헨티나는 독립 후 유럽 국가와 수교하여 많은 유럽인을 초청하며 1876년 아베야네디 법을 통과시켜 이민자들이 쉽게 땅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여 이민자들의 호응을 이끌었다. 당시 남쪽 파타고니아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다. 유럽인들은 아르헨티나 정부에서 시행한 자유 통과, 토지보조금, 근로 기회를 선호해 1914년까지 약 400만 명이 이주해 1920년대는 세계 10대 부국으로 성장하고 인구는 5배로 급증했다.
1861년에 통일 국가가 된 이탈리아는 오랜 기간 수많은 전쟁을 겪어 사람들은 큰 고통을 받았다. 사회는 항상 혼란하고 경제적 어려움이 많았다. 제노아 항구에 대형 증기 여객선이 건조되기 시작해 많은 사람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1868년 범선이 진수될 무렵 이탈리아 사람들의 아르헨티나 이민 열풍은 정말 대단해 1920년까지 이탈리아인 2,270,525명이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였다. 현재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이탈리아계 후손은 전체 인구 4570만 명 중 약 62.5%로 약 3,000만 명에 달해 아르헨티나 정부는 국가 탄생에 공헌한 이탈리아 이민자들을 위해 매년 6월 3일을 ‘이탈리아 이민자의 날’로 정해 기념한다.
이탈리아인 아르헨티나 이민(사진:《Italians of Argentina》)
범선 비앙카 페르티카(The Bianca Pertica began) 호는 이민자를 연일 수송하고 난 후, 세계 일주 항해를 위해 1872년에 증기기관을 해체하고 2개의 돛대를 가진 범선으로 개조했다. 선장은 탕크레디스(Tancredis), 선원 13명은 모두 이탈리아 선원으로 구성했다. 범선은 세계 일주를 하고 홍콩에 입항했다, 이때 한 홍콩 상인의 물건을 위탁받아 태국을 거쳐 프랑스 마르세유로 상품을 운송하고, 1877년 6월이 되어 다시 홍콩으로 돌아왔다. 이후에는 홍콩과 일본의 연안 무역을 맡아 운송했다,
범선 비앙카 페르티카호의 항로를 추적하는 학자들은 유럽의 각종 선박 기록을 철저하게 조사했다. 선박이 유럽을 언제, 어디서 출발했는지, 화물이 무엇이었는지는 밝혀내려고 했지만, 알아내지 못하고 정황에 따르면 영국 웨일스에서 카디프 석탄을 배에 실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당시 메렐라 선장이 지휘하는 이탈리아 범선 에밀리오 5세는 1878년 6월 28일 영국 카디프에서 석탄을 싣고 나가사키에 도착했고 그 후 몇 달 동안 나가사키와 홍콩 사이를 왕복하며 석탄을 두 번 이상 운송했다.
永見德太郞(1890~1950)이 그린 나가사키항구(사진;나가사키미술관)
당시는 일본 해역에서 운항하는 이탈리아 선박이 거의 없어 이 두 선박이 같은 시기에 나가사키에 도착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고 추정했다. 이 선박들을 같은 회사에서 전세를 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탕크레디스 선장과 선원들은 오랜 기간 장거리 항해를 하면서 아프거나 다친 선원이 없었다. 항해 도중에 별다른 사고 없이 먼 거리를 항해하고 입항 시간도 잘 지켰다. 홍콩에서 출발한 비앙카 페르티카호는 8월 25일에 출항하여 9월 8일에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이것은 상당히 빠른 시간이었다. 전문가들은 나가사키 영자 신문에 등장하는 기록으로 보아 이 선박이 극동에 처음 온 것으로 추정했다.
나가사키 상인 탄코샤(Tankosha)가 항구에 있는 배를 돌아보고 탕크레디스(Tancredis) 선장의 기량을 확신해 더 많은 양의 석탄을 홍콩으로 운반해 줄 것을 의뢰했다. 질이 좋은 석탄은 나가사키의 가장 중요한 교역 상품으로 상당한 이익을 얻었다.
다카시마(高島) 탄광(사진;長崎の高島炭鉱)
다카시마(高島) 탄광의 역사는 1695년(겐로쿠 8년)에 히젠국 마츠우라군 에에이의 고헤이타가 高島 근처에서 석탄을 발견한 것이 시초이다. 막부 말기인 1868년에 사가번과 스코틀랜드 상인 토마스 글러버(1838~1911)가 공동출자하여 근대식으로 채굴을 시작했다. 이후 메이지 정부가 운영하다 1881년 미쓰비시가 불하받아 해저 탄광을 운영했다. 이후 탄광은 100년간 채굴하다 수요가 줄어 1986년 폐광되었다.
당시 해군과 해운 회사들이 범선에서 증기선으로 전환하고 있어 석탄이 중요한 연료였다. 나가사키 항구에는 포르투갈 상인들을 위해 1636년에 축조된 데지마가 있었다. 데지마는 1637년 12월에 시작된 가톨릭 신자들이 일으킨 시마바라의 난이 벌어졌을 때, 네덜란드 상관이 에도 막부를 지원한 공으로 1641년에 이전하여 동인도회사(VOC)의 무역 거점이 되었다. 나가사키 항구는 수심이 깊고 큰 바다에서 깊숙이 들어와 있어 태풍이나 해일에 전혀 지장이 없었다. 유럽에서 온 군함이 극동에서 활동하기에 알맞아 유럽 해군의 전진항구로 발전했다. 항구에는 유럽에서 온 선원과 중국 상인이 끊임없이 드나들고 주변에는 멋진 술집과 아름다운 여인들이 있는 사창가로 명성이 높은 이름난 요정도 있고 화교촌도 있었다. 이탈리아인이 상주하는 사람은 6~7명 정도로 운영하는 호텔은 호텔 드 가리발디와 벨뷰 호텔이었다. 벨뷰 호텔은 C.N. 만치니와 그의 아내가 운영했다. 이탈리아 상인들은 일본제국과 왕래가 적어 나가사키에 이탈리아 영사관이 없었다. 모든 행정 업무는 러시아 공사인 A.E. 올라로프스키 씨가 이탈리아 대리 영사 직책을 대신 담당했다.
The Belle Vue Hotel in Nagasaki, circa 1900s(사진:네프컬랙션)
범선 비앙카 페르티카호가 항구에 정박해 있는 동안에 영국 군함 HMS 미지호, HMS 릴리호, 독일 포함(砲艦) 알바트로스호에서 온 외국 선원들로 가득했다. 바트로스급 함선은 전장이 56.95m(186피트 10인치), 폭은 8.32m(27피트 4인치)였고, 선수 흘수는 3.62m였다. 만재 배수량은 786톤(774톤)이었다. 선체는 카벨(carvel) 구조를 사용하여 목재로 제작되고, 트랜섬(transom) 선미가 있었다. 배는 항해 시 목재가 해양 생물 부착으로부터 보호되도록 구리로 제작되어 위에 씌었다. 배의 승무원은 장교 5명과 사병 98명으로 소형 보트 4척을 탑재했다. 배의 조타는 단일 키로 제어되며 기동성도 양호하고 돛을 달고 잘 운항하였다.
나가사키 항구 역(사진:konjaku-photo.com)
1878년 9월 18일 수요일 아침, 석탄을 가득 실은 帆船 비앙카 페르티카호가 나가사키 항구를 출항하여 기분 좋게 홍콩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이날 영국 선박 607톤의 채널 퀸호와 1,291톤 증기선 시티 오브 산티아고호 두 척도 항구를 떠났다. 날씨는 항해하기에 너무나 좋았다. 하늘은 맑고 바람도 잘 불고 오랜만에 먼 바다로 나와 항해하는 선원들은 신이 났다. 동쪽에서 불어오는 초속 3.4m의 산들바람이 배의 돛을 가득 채워 범선은 고요한 바다를 활기차게 미끄러지듯 서쪽으로 항해했다.
8월과 9월은 태풍이 가장 많이 발생했고 경험이 풍부한 선장들은 이 시기에 바다를 항해할 때 감수해야 할 위험을 충분히 인지(認知)하고 있었다. 탕크레디스 선장은 거대한 폭풍이 점점 자신의 배에 다가오는 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비앙카 페르티카호는 종일 안전하게 항해했다. 항해 중 검은 구름이 계속 끼고 바람이 조금씩 거세지고 밝은 하늘이 갑자기 흐려졌다. 저녁이 다가오자 하늘이 더 어두워지고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배는 높은 파도에 휩쓸렸고, 바람은 배를 전복시킬 정도로 강력했다. 선장은 이 해역의 폭풍 강도를 자세히는 알지 못했지만, 배가 어느 정도 폭풍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배를 대피하지 않고 항로를 따라 계속 항해했다. 순간 바람이 점점 거세지는 것을 느꼈다. 돛이 울부짖는 바람에 의해 무서운 짐승처럼 아주 격렬하게 펄럭였다. 위험을 강하게 느낀 선장은 선원들에게 빨리 돛 일부를 내리라고 명령했다. 오후 9시 30분경, 유난히 강한 돌풍이 불어와 메인 돛(main-sail)의 일부를 처절하게 찢어버렸다. 돛은 휘몰아치는 바람에 심하게 펄럭이며 배에 손상을 입힐 위기에 처하자, 선원들이 돛을 고정하기 위해 앞으로 달려가는 동안 앞 돛(the fore top-sail)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고 돛대가 부러졌다. 선장은 배를 보호하기 위해 남은 돛을 모두 사용하여 동풍이 고물에 닿도록 배를 돌려 서쪽으로 항해했다. 폭풍을 피하려고 선장이 배를 돌리자, 거대한 파도가 배의 측면을 덮쳤다. 물이 갑판 아래로 쏟아져 들어와 조타에 대한 반응 속도를 느려져 배는 더욱 위험했다. 자정 무렵에 선장은 펌프를 조작하라고 말했다. 선원들은 돌아가며 밤새도록 펌프질하며 필사적으로 움직이며 남은 돛을 내렸다. 밧줄과 돛 가닥들이 공중을 휘저었다.
the riggings(사진:위키피디아)
하늘에 거대한 강이 있어 빗물이 억수같이 무섭게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물동이로 물을 내리붓듯 집중호우가 계속되고, 엄청난 파도가 갑판에서 선원들을 낚아채려고 계속 덤벼들었다. 야간 항해는 정말 힘들고 무서워 선원들은 가끔 야간 항해를 지옥의 항해라고 말한다. 밤을 무사히 넘겨 침수된 배는 펌프로 물을 빼낸 상태로 아침을 맞이했다. 해가 밝아오자 조금 위로가 되었지만, 폭풍우는 여전히 배를 거칠게 몰아쳤다. 선창의 물이 충분히 빠지자, 선장은 네 명의 선원만 남겨두고 나머지 선원들과 함께 남은 돛을 끌어올리려고 하였다. 밀려오는 파도에 배가 앞뒤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운데, 선원들은 조심스럽게 삭구(the riggings)로 가서 돛을 살피며 끌어올렸다. 선원들은 거센 파도가 몰려와 침수를 막기 위해 펌프를 계속 조작했다. 높은 곳에서 작업하는 선원은 자기의 운명을 바다에 맡기고 조심조심 움직였다. 리깅(the riggings)은 범선이나 범선의 돛대와 돛을 지지하고 제어하는 로프, 케이블, 체인 시스템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스탠딩 리깅은 슈라우드와 스테이를 포함한 돛대를 지지하는 고정 리깅이고, 러닝 리깅은 핼리어드, 브레이스, 시트, 뱅을 포함한 선박의 돛과 스파의 위치를 조정하는 리깅이다.
the riggings(사진:위키피디아)
거친 파도와 바람 때문에 선원들은 갑판 위에 발 디딜 곳이 없어 위험했다. 이때 미친 강풍이 불어왔다. 갑자기 바람이 동쪽에서 남쪽으로 바뀌면서 남은 돛이 모두 날아갔다. 돛이 없어진 배는 바람에 휘둘리게 되어 북쪽으로 표류하기 시작했다. 이때 배에 큰 파도가 몰아쳐 배가 조금씩 바닷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화물칸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하면서 석탄 조각들이 배 주위로 휩쓸려 배를 점점 위험에 빠뜨렸다. 바다에 어둠이 내리고 폭풍이 전날 밤처럼 거세지자, 선원들은 희망을 잃기 시작했다. 펌프에 모든 선원이 배치되었지만, 밤 10시경, 펌프가 작은 석탄 덩어리로 막혀 작동 불능이 되었다. 선원들의 남은 희망이 산산이 조각났다. 펌프를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선장은 갑판 아래 선원들에게 비바람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보호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태풍 속에 이 지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화물창은 벌써 2m나 물에 잠겼다. 선원들은 모두 폭풍의 흉악하고 무도한 최악의 순간을 목격했다.
선원들은 배가 절대로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폭풍은 약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해졌다. 20일 이른 아침 파도가 갑판을 덮칠 정도로 거세게 몰아쳐 배 안의 모든 목재가 흔들리고 심하게 삐걱거렸다. 난간이 부서지고 휩쓸려 나가 갑판에서 안전하게 작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배에 물이 차고 있었고, 펌프는 여전히 떠다니는 석탄으로 막혀 있었다. 선장은 떠다니는 잔해를 피하려고 펌프를 배 앞쪽으로 옮기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선원들은 선장이 이 시련을 빨리 해결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는 나중에 자녀와 손주들에게 이 위대한 항해를 이야기해 주겠다고 농담하였다. 선원들 마음속 깊은 곳에 배가 바다로 들어가 파멸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어 가시나무 떨듯 떨었지만, 겉으론 아주 태연한 척했다. 분명 내일이면 날씨가 나아지겠지 생각했다. 폭풍은 밤새 더욱 거세졌다. 그때 갑판장 파스쿠알레 첼리니(Pascuale Chelini)가 “이제 망했다.”라고 짧게 비명을 질렀다. 거칠게 하늘에다 말하자 선원들은 희망과 자신감이 모두 사라졌다. 이젠 펌프도 없어 물을 풀 수도 없어 선원들은 제각기 엄숙하게 기도하며 운명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막내 산토리는 너무나 슬퍼 울었다. 한 선원은 하늘에 도와달라고 소리치며 울부짖었다. 선장은 선원들을 조금이나마 안심시키려 애썼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해 질 무렵에 배가 해안에 도착할 것이라고 선장은 굳게 약속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구명보트(lifeboat)(사진:Royal Museums Greenwich)
탕크레디스 선장은 세찬 파도에도 굴하지 않고 용감한 척했다. 종일 파도가 거세게 배를 강타했다. 선원들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지만, 파도를 막을 수는 없었다. 화물칸은 계속 물로 채워져 배는 천천히 가라앉았다. 오후 4시 30분이 되자, 선원들은 식량과 물을 모아 배 선미로 이동해 재빨리 구명보트(lifeboat)를 풀었다. 그 순간 큰 파도가 배를 강타했다. 배 선수(船首)가 기울며 물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에 놀란 선원들은 구명보트에 올라타고 다른 선원들은 부서진 나무 조각을 움켜쥐었다. 잠시 후 선원들이 물에 계속 둥둥 떠 있었다.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선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파도가 높아 거친 파도에 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구조를 요청하는 비명이 바람에 묻혀 사라졌다. 산토리는 배가 침몰하기 직전에 다행히 구명보트에 손이 닿아 얼떨결에 올라탔다. 참 운이 좋았다. 큰 파도가 배를 덮치면서 배는 갑자기 끄르륵하며 격렬하게 이상한 소리를 냈다. 선원들은 배가 침몰할 것을 미리 알았지만, 그렇게 빨리 침몰할 줄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항해사와 선원들이 선장에게 구명보트에 오르라고 요청했지만, 선장은 자식같이 사랑한 선원의 말을 듣지 않고 배와 운명을 함께 하려는 듯 말없이 거친 바다를 응시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