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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6.02.05. 14:01 (2026.02.05. 13:59)

고종 밀명 받은 김옥균, 1880년 수구파 모르게 일본제국 조사시찰단 조직...도일 비용은 재산 처분해 2만 엔 충당

 
일본제국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부산 태종대 영도등대 위에 있는 ‘명예 해기사 전당’을 참배하며 조선말 관비유학생인 양무공 신순성(愼順晟, 1878~1944) 선장을 처음 만났다. 조선의 관비유학생에 뽑힌 사람과 개화 시기의 해운업 상황이 궁금하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으로 재직했던 羅愛子 선생이 발표한 〈조선 개항기(1876~1904) 민간해운업〉 논문을 읽었다.
일본제국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부산 태종대 영도등대 위에 있는 ‘명예 해기사 전당’을 참배하며 조선말 관비유학생인 양무공 신순성(愼順晟, 1878~1944) 선장을 처음 만났다. 조선의 관비유학생에 뽑힌 사람과 개화 시기의 해운업 상황이 궁금하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으로 재직했던 羅愛子 선생이 발표한 〈조선 개항기(1876~1904) 민간해운업〉 논문을 읽었다.
 
논문에는 1883년 이후 설립된 商會社 중 무역과 운수업에 종사한 회사 목록과 설립자, 연안을 운항한 기선 및 서양형 범선, 운임 등을 도표로 자세하게 설명해 우리나라 해운업의 태동 역사를 공부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영도등대 앞에 지나가는 배를 바라보면서 바다를 통해 일본과 왕래했던 개화파 인물과 조선을 위협했던 해양세력의 침탈 역사를 다시 되돌아보게 되었다.
 
부산 태종대 영도등대(사진;궁인창)
 
1874년(고종 11) 6월 24일 청나라는 조선에 밀서를 보냈다. 고종이 받은 밀서는 “일본제국이 臺灣에 출병할 병력으로 곧 조선을 침공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제국과 국교 교섭을 조속히 재개했으면 한다.”라는 권고였다. 1875년 9월 20일 일본 군함 운양호(雲揚號)가 강화도와 영종도를 불법 침입해 22명의 일본군이 해로를 탐지하며 초지진에 침입하였다. 이에 방어에 나선 조선 수비대는 정당방위로 보트에 대포 사격을 하였다. 일본군은 무기를 약탈하고 영종진에서 민간인 학살과 약탈, 방화를 자행하고 철수하였다.
 
일본제국은 강화도 초지진 守兵의 발포를 유도한 후 이를 빌미로 1876년 음력 2월 3일(陽 2월 27일) 조선과 朝日修好條規(江華島條約)를 체결했다. 조약 12조에는 부산, 원산, 제물포 항구를 개항하며, 해안측량권 허용과 영사재판권을 인정하고, 곡물의 유출과 일본 화폐의 유통을 모두 허용했다. 조선은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해외에 문호를 개방하여 서양의 지식과 문물이 조선에 밀물처럼 밀려와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반면 조선은 수신사를 보내고 의식 있는 사람들은 신학과 사진술, 그림 등 신문물을 배우려고 마카오나 마닐라의 피낭, 중국 상하이, 미국 등을 방문해 새로운 세계를 처음 경험했다.
 
일본 에도막부는 1860년 60명의 사절을 미국에 파견하고, 1862년에는 38명의 사절단을 유럽에 파견해 여러 나라를 순방 시찰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5년 동안에는 1,000명의 유학생을 관비로 교육했다. 청나라는 1872년 미국에 유학생 120명을 파견했다가 유학생이 서양 물에 너무 빠졌다고 판단하여 10년 후인 1881년 유학생을 모두 소환했다.
 
조선은 1876년 김기수가 수신사(修信使) 76명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했다. 그러나 고종은 김기수 수신사로부터 만족한 보고를 받지 못했다. 1879년 7월 리홍장(李鴻章, 1926~1945)이 서양 여러 나라와 수교하며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하라고 조선에 권고하여 조선은 외교 방향과 개화 정책이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1880년 5월에 제2차 수신사로 김홍집이 이조연(李祖淵, 1843~1884), 강위(姜瑋, 1820~1884), 尹雄烈 등 58명의 수행원을 이끌고 도일하여 주일청국공사 하여장, 참사관 황준헌과 6차례 면담을 통해 조선의 향후 외교진로에 대해 논의하였다.
 
조선은 1880년 12월에 개화를 담당할 추진 기구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대규모 사찰단 파견을 결정하였다. 그러자 이를 반대하는 척사세력들이 상소를 올리며 김홍집을 공박했다. 조선 조정은 1881년에 청에 김윤식을 영선사(領選使)로 명하여 學徒 25명 및 工匠 13명을 선정하여 69명이 청나라 군기제조를 학습하러 갔다. 처음에 영선사 파견 이야기가 나온 것은 1879년 8월에 領中樞府事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청에 가는 헌서재자관(憲書齎咨官) 이용숙(李容肅, 1818~?) 편에 신식 무기의 수입이나 견학을 타진하자,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1823~1901)이 조선에서 공식적인 요청이 있으면, 텐진에 있는 기기국(機器局)에서 무기제조법을 학습하고 군사 훈련도 가능하다는 회답을 주었다.
 
청나라 양무운동(사진:위키백과)
 
이홍장은 아편전쟁 패배 후 서양 기계의 도입 및 기술을 주도하며 ‘중국 정신은 그대로 두고 서양의 기술만 받아들인다’라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을 주장하며 洋務運動을 1861년부터 1894년까지 적극적으로 주도하며 근대 병기를 갖춘 육군과 해군을 조직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1880년 4월 회의를 거쳐 11월에 변원규(卞元圭)를 파견해 영선사 파견과 무기제조법 학습을 공식 요청하였다.
 
북양대신 이홍장은 광서제(光緖帝)의 재가를 얻어 그해 9월 구체적인 세목을 정하였다. 「대조선의제기연병각조(代朝鮮擬製器練兵各條)」이란 세목을 바탕으로 「조선국원변래학제조조련장정(朝鮮國員弁來學製造操練章程)」 4조가 결정되었다. 이 각조와 장정에서는 조선 정부에서 요구한 무기제조의 학습뿐만 아니라 40명의 군인을 유학시키는 문제와 조선군 3만 명의 무장에 필요한 각종 무기가 22만 1400냥으로 계산되었다.
 
청과의 교섭이 11월 1일 조선 정부에 알려져 유학생 파견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12월에 이르러 허원식(許元栻), 이준선(李駿善) 등이 시폐소(時弊疏)를 올려 맹렬하게 반대하였다. 그들은 기예북학(技藝北學)의 부당성과 더불어 외적을 불러들이는 결과가 된다는 것과 재정 문제의 곤란성을 강조하였다. 고종은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881년 2월 통리기무아문에 명해 유학생 파견의 제 문제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영선사 김윤식(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통리기무아문에서는 칭호를 영선사(領選使)라 하고 우선 공도(工徒)를 파견해 무기제조법의 학습만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영선사로 지명된 조용호가 갑자기 병사하여 順天府使 김윤식이 대신 임명되었다. 고종은 김윤식에게 연미(聯美) 문제를 사전 협의하는 비밀 임무를 맡겼다. 당시 청나라가 허락한 유학생의 수는 38명으로 중인 신분 20명을 학도(學徒)라 했고, 천인 신분 18명을 공장(工匠)이라 하였다. 영선사 일행은 관원 · 통사(通事) · 수종(隨從) 등 모두 69명이 정식 인원이며, 유학생의 수종도 14명이 있었다. 영선사 일행은 동년 9월 26일 출발해 10월 26일에 압록강을 건너 책문(柵門)에 도착해 김윤식은 일행의 행동규범과 벌칙을 작성해 「영선행중절목(領選行中節目)」 15조를 공포했다. 일행이 북경에 당도한 것은 11월 17일로 김윤식은 이홍장과 회담하기 위해 보정부(保定府)로 가고 유학생 일행은 30일에 톈진기기국에 도착하였다. 김윤식이 12월 1일까지 세 차례에 걸친 이홍장과의 회담을 마치고 12월 6일 톈진에 도착했다. 이때 청 위원들이 유학생의 능력을 쉽사리 판단하기 어려워 분창(分廠)이 지연되어 학도 4명과 공장 1명이 수사학당(水師學堂)과 수뢰학당(水雷學堂)에 입당했다.
 
다음 해인 1882년 1월 8일에 기기국의 동남 양국이 문을 열어 유학생의 분창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2월 초까지도 완전한 분창이 실시되지 않아 2월 11일을 기준으로 보면 28명(학도 12명, 공장 16)만이 학습에 종사했다. 유학생의 학습은 화약, 탄약의 제조법을 비롯해 전기, 화학, 제도(製圖), 제련, 기초, 기계학, 외국어의 학습도 포함되었다. 공장들이 학습한 것은 제련, 기계조작법, 기계모형의 제조 등 실험적인 분야가 중심이었다.
 
유학생의 학습은 남국(南局)의 경우 전기창(電氣廠)의 안준(安浚), 상운(尙澐), 화도창(畫圖廠)의 안욱상(安昱相), 조태원(趙台源) 등이 학업에 정진해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런데 재정의 결핍이 문제로 경비는 본국 정부에서 정기적으로 송달된 것이 아니라 북경에 있는 관호전장(官號錢莊)인 화풍국(和豐局)에서 차용하기로 하였다. 톈진 화유국(華裕局)에서 고평은(庫平銀) 1만 냥을 차용해 일시 경비에 충당했으나 부족해 재정적 곤궁 상태에 있어 유학생의 조기 철수를 검토하게 되었다.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소식이 6월 15일 전해져 학습은 중단되고 유학생들은 귀국할 처지에 빠졌다. 김윤식은 학도 2명을 대동하고 7월 7일 귀국했다. 톈진에 잔류한 유학생은 15명이었다. 김윤식은 9월 24일에 청나라에 가서 잔류 유학생의 귀국 문제와 본국 설창을 위한 무기구입 문제를 이홍장과 협의해 약 5,000냥 상당의 소수기기를 구입하였다. 김윤식은 10월 16일 유학생을 인솔해 톈진을 출발하여 엔타이(煙臺)를 거쳐 11월 1일 인천항에 도착하였다. 영선사는 당초 목적을 완전하게 수행하지 못했지만, 1883년 3월 삼청동 북창(北倉)에 기기창(機器廠)을 창건하였다.
 
1880년 촬영 김옥균(사진;동북아역사재단)
 
고종은 청에 영선사를 보낸 이후 일본에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을 파견하기로 정하였다. 고종은 조선의 개화에 반대하는 보수파의 눈을 속이기 위해 1881년 1월과 2월 사이에 12명의 조사(朝士)에게 동래부 暗行御史라는 직책을 임명하여 각각 “일본인의 조정 논의와 시세 형편, 풍속, 인물, 외국과의 수교, 협상 등의 대략을 염탐하라.”라는 특별 밀명을 내렸다. 과거에는 근대화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이 많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이란 표현을 줄곧 사용했으나, 한국사 용어 수정안에 따라 조사시찰단이란 용어로 통일되었다.
 
김옥균은 고종의 밀명을 받아 1880년 12월 수구파 모르게 일본제국 조사시찰단을 조직해 일본의 개화 실태를 파악하러 1881년 음력 4월 10일 도일했다. 이때 도일 비용은 김옥균이 자신의 생가와 양가 재산과 토지를 모두 처분하고 후원금을 보태 총 2만 엔을 모았다.
 
김홍집이 파견을 주도한 조사시찰단은 12반 64명으로 구성하여 부산진성 영가대(永嘉臺) 망루에서 해신제를 지냈다.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은 4개월간 일본 주요 도시를 방문해 각 성의 시설과 세관, 조폐, 제사, 양잠, 교육, 민속 등을 고루 조사하고 유력 인사들과의 대화 내용을 기록해 관찰기를 고종에게 보고했다.
 
일본제국 조사시찰단(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조사(朝士)는 조정에서 벼슬하는 관리라는 명칭으로 12명이 담당했다. 수행원과 통사를 모두 자세하게 적은 것은 연구자가 일본제국 조사시찰단의 참여한 인물과 역할이 후대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趙準永:참판-문부성, 수행원 李鳳植, 徐相直, 통사 文順錫, 하인 崔允伊.
朴定陽:참판-내무성, 농상성, 수행원 王濟膺, 李商在, 통사 金洛俊, 하인 李秀(壽)吉).
閔種黙:승지-외무성, 閔載厚, 수행원 朴會植, 통사 金福奎, 하인 李正(貞)吉.
魚允中:교리-대장성, 兪吉濬, 수행원 柳定秀, 尹致昊, 金亮漢, 통사 黃天彧, 하인 金永根,
嚴世永:승지-사법성, 嚴錫周, 수행원 崔成大, 통사 徐文斗, 하인 朴春鳳(奉).
姜文馨:승지-공부성, 수행원 姜晉馨, 邊宅浩, 통사 金順伊, 하인 劉福(卜)伊.
洪英植:참의-육군, 체신, 수행원 高永喜, 咸洛基, 全洛雲, 통사 白福周, 하인 鄭用(龍)石(錫).
李 永:승지-세관, 수행원 李弼永, 閔建鎬, 통사 林基(箕)弘, 하인 金五文.
趙秉稷:승지-세관, 수행원 安宗洙, 兪箕煥, 통사 金基(箕)文(李章浩), 하인 林錫奎.
李元會:부사-군사, 수행원 宋憲斌, 沈宜永, 통사 李壽萬, 하인 金鴻達, 李順吉.
沈相學: 외무성 조사, 수행원 兪鎭泰, 李鍾彬, 통사 金永得(正植), 하인 尹相龍(商容).
金鏞元: 汽船 運航 조사, 수행원 孫鵬九, 통사 金大弘)
 
 
조사시찰단은 조선에 돌아와 분야별로 보고서를 만들어 고종에게 제출했다. 현재 어윤중의 隨聞錄, 從政年表, 박정양의 從宦日記, 이헌영의 日槎集略ㆍ隨錄ㆍ東遊錄 등 朝士들의 기록과, 수행원 姜晉馨의 日東錄, 宋憲斌의 東京日記, 安宗洙의 農政新編, 閔建鎬의 東行日錄 등이 남아있다.
 
강문형 승지는 일본의 군사, 교육, 행정, 공장을 시찰했는데 수행원으로 친족(親族)인 강진형(1836~ ?)과 함께 도일했다. 강진형은 45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51세로 관직은 오위장(五衛將)으로 낮았지만, 시문에 아주 능했다. 강진형은 일본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수행원 중에서 유일하게 양산 통도사 청류동천 이름바위에 이름이 새겨져 있고, 많은 고위 관료들과 친분을 쌓을 만큼 인품과 학문을 겸비했다.
 
현재 영축산 통도사 청류동천에는 1,800여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강진형은 1881년 1월부터 고향에 돌아온 8월 1일까지 7개월간의 노정과 일본에서 만난 사람, 견문 내용을 자세히 《日東錄》에 남겼다. 강진형은 일본에서 귀국하여 몇 년 후 사망하여 강진형의 형인 石荷山人이 동생의 유고(遺稿)를 모아 11년 후인 1892년 편찬하였다. 강진형의 사행 경로는 1881년 1월 28일 한성을 출발, 2월 29일 동래부, 안내이마루(安寧丸) 승선, 나가사키, 고베, 오사카, 교토, 요코하마. 4월 27일 도쿄. 돌아오는 길은 요코하마에서 나고야마루 승선, 7월 18일 고베, 나가사키, 부산(윤 7월 2일)을 거쳐 8월 1일 집에 돌이왔다.
 
수행원 강진형이 남긴 《日東錄》은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으며, 해당 연구는 세종대 이효정 교수가 2019년 《한국민족문화》 73권에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강진형은 일본의 근대 문물, 군사, 교육, 행정, 공장을 시찰할 때 임무에 성실하게 임하고 문견록(聞見錄)을 작성하여 일반적인 보고서와 다르게 효율성을 높여 통리기무아문이 개편될 때 활용되도록 하였다.
 
일본제국 조사시찰 단원들이 일본에서 얻은 식견은 바로 조선의 제도개편에 기반을 마련하여 정책 반영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 참조 지식지도
▣ 다큐먼트
▣ 참조 정보 (쪽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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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