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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 강의 자료 요약김영환교수의 지식창고 2025.12.06. 01:36 (2025.12.06. 01:18)

동양고전 아카데미 406강 강의자료 요약(2025.12.04.)

 
司馬遷《史記》 原文 강독, 부수적으로 (1)唐詩〈望月懷遠〉과 작자 張九齡 및 주요 단어( 懷遠, 情人, 遙夜, 長夜, 竟夕, 終宵, 一整夜, 盈手, 寢夢, 佳期.... 등)에 대해서 설명 ; (2)民의 甲骨文과 《說文解字》에서의 문자학적 의미 설명 ; (3)시각장애인에 대한 다양한 어휘와 百姓에 대한 다양한 어휘(草菅人命, 草芥, 民草, 丘民, 兆民......)에 관하여 설명 ; (4)夏商周 始祖 誕生 神話(夏禹-修己-流星 ; 商契-簡狄-玄鳥 ; 周棄-姜嫄-巨人)에 대하여 설명 ; (5)《書經》〈周官〉에 의거하여 周代 3公, 3孤, 冢宰, 6卿의 職分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 ; (6)《孟子》〈盡心下〉「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의 설명 ; 《史記》〈項羽本紀〉「鴻門宴」의 내용 독해 및 太牢, 小牢와, 閑居, 燕居, 宴居의 차이와 明代 戶籍(軍,民,匠,灶)에 대하여 설명 ; (7)趙,武寧王과 趙造의 守舊와 改革에 대한 논쟁과 秦,商鞅과 甘龍의 守舊와 改革 논쟁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하였습니다.
동양고전 아카데미 406강 강의자료 요약(2025.12.04.)
 
2025년 12월 4일 서울시 50+센터 중부캠퍼스(마포구 공덕동)
 
 
 
 
1. 당시제목 : 망월회원
2. 작자 : 장구령(張九齡)( 678~740)
당나라의 시인 장구령은 당나라 현종(玄宗) 시대의 마지막 명재상 (名宰相)으로 불리는 정치가이자, 당나라 시의 전성기인 성당(盛唐) 시기를 대표하는 시인 중 한 명입니다. 그는 뛰어난 문학적 재능뿐만 아니라, 강직한 성품과 선견지명을 가진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주요 생애와 특징
• 출신 : 당나라 소주 곡강(지금의 광둥성) 사람으로, 당시 정치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 지방 출신이 재상(총리 격)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 별칭 : 곡강 출신이라 '장곡강(張曲江)'* 이라고도 불립니다.
• 성품 : 성격이 매우 온화하면서도 강직했습니다. 황제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는 충신이었으며, 아부보다는 원칙을 중요시했습니다.
 
2. 정치가로서의 면모 : "마지막 명재상"
장구령은 당나라의 황금기인 '개원(開元)의 치'를 이끈 주역 중 한 명입니다.
• 안녹산의 난 예언 : 그는 훗날 당나라를 파국으로 몰고 간 안녹산을 처음 보고, 그가 반란을 일으킬 상(相)임을 간파했습니다. 현종에게 안녹산을 처형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으나, 현종은 이를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훗날 그의 예언대로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게 됩니다.
• 이임보와의 대립 : 간신으로 유명한 이임보(李林甫)와 대립했습니다. 현종이 말년에 정치를 소홀히 하고 이임보의 말을 듣기 시작하면서, 꼿꼿한 성품의 장구령은 결국 조정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그가 파직된 후 당나라는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기에, 역사는 그를 '당나라의 마지막 어진 재상'으로 평가합니다.
 
3. 시인으로서의 장구령
그의 시풍은 청담(淸淡)하고 고아(高雅)한 것이 특징입니다.
• 시풍 : 화려한 기교보다는 맑고 깨끗하며, 깊은 정서를 담백하게 표현했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화려한 궁중 문학(궁체)에서 벗어나, 한나라와 위나라 시대의 고풍스러운 시풍을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 감우(感遇) : 자신의 정치적 좌절과 이상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연작시 《감우(感遇)》 12수가 유명합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을 향기로운 풀이나 고고한 소나무에 비유하며 절개를 노래했습니다.
 
* 剩餘 = 嬴(영, 망구월녀범) = 赢(영)
 
 

 
김영환교수의 동양고전아카데미 제348강(2024,04,25) 강의 교안
* 《論語》〈里仁〉
4-18. 事父母幾諫,見志不從,又敬不違,勞而不怨
 
 
* 《史記》〈周本紀〉4-023
1. 民 - 甲骨文, (▣)
원래는 날카로운 무기로 전쟁 포로의 한쪽 눈을 찔러 맹인(瞎子, 盲人, 瞽者, 瞽瞍(남자), 失明, 眇, 矇(몽,맹), 瞍(수), 眢(완,원) ; 시각장애인, 장님, 봉사, 소경)으로 만든 후 노예로 부림
 
《說文解字》「民, 衆氓(맹)也; méng, 古代稱百姓, 特指外地遷來的百姓, 즉 외부에서 온 백성, 또는 외지로 떠도는 백성, 流氓 = 깡패의 뜻도 있음)
 
* 백성을 의미하는 단어
黎, 黎民, 黔首, 黎烝, 衆, 衆民, 衆庶, 百姓, 人民, 庶民, 國人(國民), 平民, 黑髮之人, 草芥 = 草菅人命
 
 
(1) (일반적인)사람,
《左傳》成公十三年, 「民受天地之中以生」
사람은 하늘과 땅의 기운을 받아서 태어난다.
 
* 中 = 中和之氣
* 和 (龢)
1. [ hé ] and, 평화롭다.
2. [ hè ] 따라하다, 추종하다
3. 북경사투리였으나 지금 안 스임, 대만에서 사용
4. [ hú ] (마작이나 트럼프의 패가) 오르다
5. [ huó ] 반죽하다
6. [ huò ] 배합하다 혼합하다.
 
* (龢) 피리약+
1) 음식 간이 맞다 (調和)
2) 음악의 律韻和
3) 人和
4) 처세에서 和而不同
 
《詩經》〈大雅〉「厥初生民, 時維姜嫄」
그 처음에 사람이 태어 났는데 그 때는 강원이었다.
 
* 후직의 신비로운 탄생 이야기 (生民)
《시경》 '생민'에 기록된 후직의 탄생 일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신성한 감응과 잉태
• 강원의 소원 : 후직의 어머니인 강원은 자식이 없음을 걱정하여 정결하게 제사를 지내 자식 없는 부정을 없애고자 했습니다.
• 상제의 발자국 : 그녀가 길을 가다가 상제(上帝)의 엄지발가락 자국을 밟았는데, 그 순간 마음이 기뻐지고 감응하여 자리를 피하지 못하고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 잉태 : 이 신비한 감응으로 인해 곧바로 아기를 잉태하게 되었고, 이분이 바로 후직입니다.
 
2. 순조로운 출산
• 열 달이 차서 아이를 낳았는데, 첫 출산 임에도 불구하고 양이 새끼를 낳듯이 쉽고 순조로웠습니다.
• 산모가 찢어지거나 터지는 재난이나 폐해도 없이 편안하게 아기를 낳았다고 찬양합니다.
 
3. 세 번의 기적적인 보호
탄생 직후, 강원은 이 아기가 신이한 아이라고 생각했는지 혹은 불길하다고 생각했는지 아기를 버리지만, 천지신명의 보호로 살아납니다.
 
버린 장소 : 신성한 보호
좁은 골목 : 소와 양들이 아기를 밟지 않고 피해가며 젖을 먹여 보호했습니다.
넓은 숲 속 : 나무를 베는 사람이 때마침 숲의 나무를 다 베어 버려서 아기가 다치지 않았습니다.
찬 얼음 위 : 새가 날아와 아기 위에 날개로 덮어주고 깔아주어 추위로부터 보호했습니다.
 
새가 날아가자 후직은 크게 울음을 터뜨렸는데, 그 소리가 길에까지 들릴 정도로 컸다고 합니다.
 
- 후직의 성장과 업적
• 후직은 자라면서 지혜롭고 영민 했으며, 스스로 기어 다니고 음식을 먹을 줄 알게 되자 곧 농사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 후직은 다양한 곡식(콩, 벼, 삼, 보리, 오이 등)을 심었는데, 모두 풍성하게 자라나게 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농경을 백성에게 가르친 인물로 추앙 받게 되었고, 나중에 요 임금에 의해 농사 관직(后稷)에 임명되어 주나라 발전의 근간을 마련했습니다.
• 이처럼 후직의 탄생 담은 천제의 힘을 빌어 태어난다는 감정형(感精型) 신화의 특징을 지니며, 주나라 왕실의 권위를 신성하게 확립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 하 왕조 시조, 우(禹)의 탄생 이야기 요약
1. 아버지와 조상
• 아버지 : 곤(鯀) (전설적인 오제 중 한 명인 전욱(顓頊)의 손자)
• 어머니 : 수위(脩己)
 
2. 신비로운 잉태 (감정 신화)
• 우의 어머니인 수위가 도산(塗山)의 낭비산(朗臂山) 또는 구석산(鉤石山)에서 유성(流星,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감응하여 우를 잉태했다고 합니다.
• 이러한 '유성의 감응'을 통해 우는 신성한 기운을 받아 태어났다고 전해집니다.
 
3. 출생과 이름
• 출생지 : 당시 서융(西戎) 지역의 석뉴(石紐) (현재 사천성 문천 또는 안휘성 회원 등 여러 설이 있음)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집니다.
• 이름 : 성은 사(姒), 이름은 문명(文命)입니다.
 
4. 중요한 배경 : 아버지 곤의 실패
우의 탄생 이야기보다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우의 업적의 배경입니다.
• 우의 아버지 곤은 요(堯) 임금 시대의 대홍수를 막기 위해 9년 동안 치수 사업을 맡았으나, 물을 막는 '壅塞(옹색, 막기)' 방식만 고집하다가 실패하고 순(舜) 임금에 의해 추방당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 아버지의 치수 실패 후, 우가 순 임금에게 발탁되어 치수 사업을 맡게 되며, 13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물길을 파는 '疎導(소도, 길 터주기)' 방식으로 홍수를 다스리는 대업적을 이루게 됩니다.
요약하자면, 우 임금은 어머니가 유성을 보고 감응하여 잉태되었으며, 아버지 곤의 치수 실패를 극복하고 구주(九州)를 다스리는 치수 사업을 성공시켜 하 왕조를 창건하게 된 인물입니다.
 
* 상(商) 왕조 시조 계(契)의 탄생 신화 요약
상(商, 또는 은) 왕조의 시조는 계(契)이며, 그의 탄생 이야기는 난생 신화(卵生神話, 알에서 태어나는 이야기)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주로 《시경(詩經)》의 현조(玄鳥) 편과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배경 인물
• 시조 : 계(契) (성 : 자/子, 이름 : 계/契)
• 어머니 : 간적(簡狄) (제곡/帝嚳의 둘째 부인)
 
2. 난생 신화의 내용
• 신성한 제사 : 계의 어머니인 간적은 다른 두 여인과 함께 제사를 지내고 목욕을 하기 위해 현구(玄丘) 강가에 갔습니다.
• 현조의 등장 : 이때, 현조(玄鳥, 검은 새, 주로 제비) 한 마리가 날아와 알을 떨어뜨렸습니다.
• 간적의 감응 : 간적은 그 알을 집어 삼켰습니다.
• 신비한 잉태 : 알을 삼킨 간적은 곧바로 임신을 하게 되었고, 이분이 바로 계입니다.
 
3. '현조'의 의미
• 이 신화에서 현조(검은 제비)는 상제(上帝, 천제)의 사자로 여겨지며, 상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하늘의 신과 연결하여 왕조의 권위를 신성하게 세우기 위한 장치입니다.
• 《시경》의 현조 편에 나오는 구절인 "天命玄鳥 降而生商(천명현조 강이생상)"은 "하늘이 검은 새에게 명하여 내려와 상나라를 낳게 했다"는 뜻으로, 계의 탄생이 하늘의 명령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4. 계의 업적
• 계는 성인이 된 후, 요(堯) 임금이나 순(舜) 임금을 섬겼으며, 우(禹) 임금의 치수 사업을 도운 공로를 인정받아 상(商) 땅에 봉해지게 됩니다.
• 이후 계의 후손들이 나라를 일으켜 상(은) 왕조를 세우게 됩니다.
요약 : 상나라 시조 계는 어머니 간적이 검은 새(현조)가 떨어뜨린 알을 삼켜 신비롭게 잉태되어 태어났습니다.
 
 
《書經》〈周官〉「立太師、太傅、太保, 兹惟三公。論道經邦, 燮理陰陽。官不必備, 惟其人。少師、少傅、少保,曰三孤。貳公弘化, 寅亮天地, 弼予一人。冢宰掌邦治, 統百官, 均四海。司徒掌邦教, 敷五典, 憂兆民。宗伯掌邦禮, 治神人, 和上下。司馬掌邦政, 統六師, 平邦国。司寇掌邦禁, 詰奸慝, 刑暴亂。司空掌邦土, 居 四民, 時地利。六卿分職, 各率其属, 以倡九牧, 阜成兆民」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를 두니, 이들이 바로 삼공(三公)이다.
치국의 도(道)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하며, 음양(陰陽)을 조화롭게 하며 관직은 반드시 모두 갖출 필요는 없고, 오직 그 직무를 수행할 만한 사람[才德 있는 인물]이 있으면 둔다.
소사(少師), 소부(少傅), 소보(少保)를 삼고(三孤)라 부른다.
삼공을 보좌하여 교화를 널리 펼치며, 천지(天地)의 이치를 공경히 밝히고, 나(임금) 한 사람을 돕는다.
 
 
* 육경(六卿)의 임무
총재(冢宰) 掌邦治, 統百官, 均四海。
- 나라의 다스림을 주관하고, 모든 관료를 통솔하며, 온 천하를 고르게 다스린다. (행정 총괄)
사도(司徒) 掌邦教, 敷五典, 憂兆民。
- 나라의 교육[교화]을 주관하고, 오륜(五典)을 널리 펼치며, 모든 백성을 염려한다. (교육 및 민생)
종백(宗伯) 掌邦禮, 治神人, 和上下。
- 나라의 예(禮)를 주관하고, 신(神)과 사람의 관계를 다스리며, 위아래(군신과 백성)를 화목하게 한다. (제사 및 의례)
사마(司馬) 掌邦政, 統六師, 平邦国。
- 나라의 정사(政事)를 주관하고, 여섯 군대[六師]를 통솔하며, 나라들을 평정한다. (군사 및 국방)
사구(司寇) 掌邦禁, 詰奸慝, 刑暴亂。
- 나라의 법과 금령을 주관하고, 간사하고 악한 무리를 규탄하며, 포악한 난을 형벌로 다스린다. (사법 및 치안)
사공(司空) 掌邦土, 居四民, 時地利。
- 나라의 토지[국토]를 주관하고, 백성들[四民]을 거주하게 하며, 때에 맞게 땅의 이로움[地利]을 이용하게 한다. (토목 및 건설)
 
육경은 직분을 나누어 맡고, 각각 그 소속된 관료들을 거느리고, 이로써 구주(九牧, 전국 각지의 제후)에게 모범을 보여, 모든 백성[兆民]을 풍요롭게[阜成] 만든다.
 
* 宗周 ~제사 중심, 六師 (1師 =12,500명)
成周 ~ 행정 중심, 八師, 주공이 총 사령관 (군사 예악 주관)
* 民衆各其居所
 
 
* 손빈 병법(孫臏兵法)의 월전(月戰) 편
 
天時地利人和三者不得 雖勝有殃
천시 지리 인화이 세가지를 얻지 못하면 비록 승리해도 재앙이 있다.
 
이 구절은 손빈 병법에서 전쟁의 성공을 결정짓는 세 가지 핵심 요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단지 군사적인 승리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평화와 안정까지 고려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漢書》〈食貨志上〉「糴甚貴傷民, 甚賤傷農。民傷則離散, 農傷則国貧」
곡식값이 너무 비싸면 백성[民]이 손해를 보고, 곡식 값이 너무 싸면 농민[農]이 손해를 본다.
백성이 손해를 보면 흩어져 떠나고, 농민이 손해를 보면 나라가 가난해진다.
 
 
(2) 백성,
《孟子》〈盡心下〉「孟子曰:不信仁賢,則國空虛;無禮義,則上下亂;無政事,則財用不足。孟
어진 이[仁賢]를 믿지 않으면 나라가 인재가 없게 된다. 예의(禮義)가 없으면 위아래가 어지러워 지며, 제대로 된 정사(政事)가 없으면 나라의 재정[재용(財用)]이 부족해진다.
 
子曰:不仁而得國者,有之矣;不仁而得天下者,未之有也。
인(仁)하지 못하고도 한 나라[國]를 얻은 자는 있었지만, 인(仁)하지 못하고도 천하를 얻은 자는 아직까지 없었다.
 
孟子曰: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是故得乎丘民而爲天子, 得乎天子爲諸侯, 得乎諸侯爲大夫. 諸侯危社稷, 則變置。犠牲既成, 粢盛既絜, 祭祀以時, 然而旱乾水溢, 則變置社稷。
백성[民]이 가장 귀하고, 사직(社稷, 국가)이 그 다음이며, 임금[君]은 가장 가볍다. 이러한 까닭에, 백성[丘民]의 마음을 얻어야 천자(天子)가 될 수 있 고, 천자의 인정을 받아야 제후(諸侯)가 될 수 있으며, 제후의 인정을 받아야 대부(大夫)가 될 수 있다. 제후가 사직(국가)을 위태롭게 하면, (천자는) 그를 바꾸어 다른 사람을 세운다. 생(犠牲) 제물은 이미 갖추었고, 제사 음식[粢 盛]도 깨끗하며, 제사를 때에 맞추어 지냈는데도,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넘친 다면, (백성이 살 수 있도록) 그 사직(社稷)을 바꾸어 버릴 수 있다.
 
 
* 犧 (희) - 희생 희
이 글자는 '문채 있는 희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중국에서 제사에 쓰이던 동물 중 털의 빛깔이 순수(단일 색)하고 뿔이 없는 소를 특별히 '희(犧)'라고 불렀습니다.
원래 의미 : 문채(털의 무늬나 빛깔)가 아름답고 흠이 없는 제사용 소를 의미했습니다. 제사에 바칠 만큼 귀하고 완벽한 상태의 짐승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太牢 (태뢰)와 少牢 (소뢰)는 고대 중국의 제례(祭禮)에서 사용되던 희생(犧牲), 즉 제물(祭物)의 종류와 규모를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이 명칭은 제사의 격(格)과 중요도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太牢 - 소 (牛) + 양 (羊) + 돼지 (豕)
천자 (天子)의 대규모 제사
少牢 - 양 (羊) + 돼지 (豕)
제후 (諸侯)의 일반적인 제사
 
孟子曰:聖人,百世之師也,伯夷、柳下惠是也。故聞伯夷之風者,頑夫廉,懦夫有立志;聞柳下惠之風者,薄夫敦,鄙夫寬。奮乎百世之上,百世之下聞者莫不興起也。非聖人而能若是乎? 而况于親炙之者乎?」
성인(聖人)은 백 대(百世)를 이어지는 스승이니, 백이(伯夷)와 유하혜(柳下惠)가 바로 그들이다. 그러므로 백이의 풍모를 들은 사람은, 옹졸하고 고집 센 사내[頑夫]도 청렴 해지고, 겁쟁이[懦夫]도 굳게 설 뜻[立志]을 가지게 된다.
유하혜의 풍모를 들은 사람은, 경박한 사내[薄夫]도 독실 해지고, 속이 좁은 사내[鄙夫]도 너그러워진다.
(성인들은) 백 세대(백 년)보다도 오래전에 분발하여 일어났지만, 백 세대 뒤에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도 분발하여 일어나지 않는 이가 없다. 성인이 아니고서야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직접 그 성인을 가까이 모시고 가르침을 받은 사람에게는 어떻겠는가?
 
《史記》〈項羽本紀〉「(鴻門宴)沛公軍霸上, 未得與項羽相見。......吾入關, 秋毫不敢有所近, 籍吏民, 封府庫, 而待將軍, 所以遣將守關者, 備他盗之出入與非常也。日夜望將軍至, 豈敢反乎! 願伯具言臣之不敢倍德也。項伯許諾, 謂沛公曰..旦日不可不蚤自來謝項王! 沛公曰..諾。于是項伯復夜去, 至軍中, 具以沛公言報項王, 因言曰..沛公不先破關中, 公豈敢入乎? 今人有大功而擊之, 不義也。不如因善遇之。項王許諾」
패공(沛公, 유방)은 패상(霸上)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아직 항우와 만나지는 못했다.
내가 관중(關中)에 들어왔을 때, 털끝만큼[秋毫]도 감히 사사로이 가까이하거나 손대지 않고, 관리와 백성들의 명부를 정리하고, 창고[府庫]를 봉인하고서, 장군(항우)을 기다렸습니다.
내가 장수[將]를 보내 관문을 지키게 한 것은, 다른 도적들이 출입하는 것과 만일의 사태[非常]를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밤낮으로 장군께서 오시기를 기다렸는데, 어찌 감히 배반(反)할 마음을 품었겠습니까! 원하건대 (항)백(伯)께서는 신(臣)이 감히 (항우) 장군의 덕을 배반할 뜻이 없었다는 것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십시오."
항백이 (유방의 부탁을) 승낙하고, 패공에게 일러 말했다. "내일 아침 일찍 스스로 와서 항왕(項王, 항우)에게 사죄해야 합니다!" 패공이 대답했다. "예[諾]."
이에 항백은 다시 그날 밤 돌아가서, (항우의) 군대에 도착하여, 패공의 말을 모두 항왕에게 보고했다. 이어서 간언하여 말했다. "패공이 먼저 관중을 깨뜨리지 않았다면, 공(항우)께서 어찌 감히 (지금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겠습니까? 이제 남이 큰 공을 세웠는데도 그를 공격하는 것은 의롭지[不義] 않습니다. 차라리 이 기회에 잘 대우하는 것[善遇之]만 못합니다."
항왕(항우)이 이를 승낙했다.
 
《淮南子》〈主術訓〉「食者, 民之本也;民者, 國之本也;國者, 君之本也」
먹는 것[食, 곧 식량]은 백성[民]의 근본(根本)이다.
백성은 나라[國]의 근본이다.
나라는 임금[君]의 근본이다.
 
《易經》〈繫辭下〉「上古結繩而治, 後世聖人易之以書契, 百官以治, 萬民以察, 蓋取諸夬繫模型」
상고(上古) 시대에는 새끼줄을 묶어[結繩] 다스렸으나, 후세의 성인(聖人)이 그것을 바꾸어 글자와 부호[書契]로써 다스리니, 모든 관료[百官]가 이로써 다스려지고, 모든 백성[萬民]이 이로써 (기록을) 살피게 되었으며, 대개 이것은 쾌괘(夬卦)에서 취한 것이다.
 
 
* 쾌괘 -
1. 괘의 구성과 명칭
상괘 (上卦) 태 (兌, 연못)
- 상괘의 성질은 기쁨 또는 파괴/결핍을 의미합니다.
하괘 (下卦) 건 (乾, 하늘)
- 하괘의 성질은 강건함 또는 하늘을 의미합니다.
괘명 (卦名) 쾌 (夬, Kuai)
- 결단할 쾌, 터놓을 쾌
 
2. 괘의 상(象)과 의미
쾌괘는 다섯 개의 강한 양효(—)가 아래에서 위로 모여 있고, 맨 위에 유일한 음효(— —) 하나만 존재하는 형태입니다.
• 강한 결단 : 다섯 양효가 모여 하나의 음효를 밀어내고 결단하는 형상입니다. 이는 세력이 약한 악(음효)을 강한 선(양효)으로 단호하게 제거해야 할 때를 상징합니다.
• 소통과 해소 : 위에는 연못(兌), 아래는 하늘(乾)인데, 하늘 아래에 연못이 있는 모습은 물이 넘실거리며 결단하고 흘러나가는 형상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이는 막힌 것을 터서 소통시키고 해소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군자의 도 : 군자가 소인(음효)을 결단하여 물리치려 할 때를 나타냅니다. 이때는 강한 마음으로 하되, 상괘가 연못(兌, 기쁨/파괴)인 만큼 과격하게 휩쓸려서는 안 되며 덕(德)으로 부드럽게 설득하며 마지막 결단을 내릴 때를 기다려야 함을 경계합니다.
 
3. 주요 효사 (爻辭)
쾌괘는 결단을 내려야 하는 시기이므로, 신중함과 경계를 강조하는 효사 들이 많습니다.
• 초구(初九) (첫 번째 양효) : "강한 발이 앞서 나간다"는 뜻으로, 결단은 조급하게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경계가 담겨 있습니다.
• 구사(九四) (네 번째 양효) : "엉덩이에 살이 없다"는 뜻으로, 앉아 있을 자리가 불안정하거나 확신이 없어 경솔하게 움직일까 봐 걱정하는 모습을 상징합니다.
• 상육(上六) (맨 위 음효) : "소리가 나지 않고 끝내 흉하다"는 뜻으로, 이미 결단을 당한 소인이 반드시 패배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요약하자면, 쾌괘는 악(惡)이나 방해물을 결단하여 제거해야 할 때이지만, 그 결단을 내리는 과정에서 성급 함이나 과격함을 경계하고 신중하게 처리해야 함을 가르치는 괘입니다.
 
 
(3) 상고시대의 신하(관직 있는 관리),
《易經》〈繫辭下〉「陽, 一君而二民, 君子之道也。陰, 二君而一民, 小人之道也」
양(陽)은 한 군주가 두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니, 군자(君子)의 도(道)이다. 음(陰)은 두 군주가 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니, 소인(小人)의 도(道)이다."
 
(4) 민심(민속),
《商君書》〈更法〉「聖人不易民而教者, 知者不變法而治。因民而教, 不勞而功成」
성인(聖人)은 백성을 바꾸지 않고 가르친다고 하지만, 지자(知者)는 법을 바꾸지 않고 다스린다고 한다. [그러나] 백성의 습속에 따라 가르치면, 노력하지 않고도 공을 이룬다."
 
 
*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의 호복기사(胡服騎射) 설명
호복기사(胡服騎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이 강력한 국가 건설을 위해 추진한 혁신적인 군사 개혁 정책입니다.
이는 당시 중국의 전통적인 관습을 깨고 북방 민족의 복장과 전술을 도입한 매우 과감한 조치였습니다.
 
1. 배경 : 조 나라의 상황
• 시기 : 기원전 307년 (전국시대 중기)
• 지리적 위치 : 조 나라는 북쪽으로 흉노(匈奴)를 비롯한 북방 유목 민족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습니다.
• 당면 과제:
o 북방 유목 민족의 잦은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처해야 했습니다.
o 강력한 경쟁국인 진(秦)나라, 초(楚)나라 등에 맞서기 위해 군사력을 강화해야 했습니다.
• 기존 군사 전술 : 당시 중원(中原) 국가들은 주로 전차(戰車)를 이용한 전투 방식에 의존했습니다. 전차는 평지에서 위력적이었으나, 북방의 험준한 지형과 기동성이 뛰어난 유목 기병(騎兵)에게는 매우 불리했습니다.
 
2. 🛡️ 개혁 내용 : 호복기사 (胡服騎射)
胡服 (호복) 오랑캐 옷
한족(漢族)의 길고 통이 넓은 긴 옷(長袍) 대신, 북방 유목민들이 입던 짧은 상의와 바지(袴) 형태의 옷을 착용합니다.
騎射 (기사) 말 타며 활 쏘기
전차 위주의 전투 방식에서 벗어나, 말을 타면서 활을 쏘는 (궁기병, 弓騎兵) 전술을 도입하고 훈련시킵니다.
 
도입의 필요성
1. 기동성 확보 : 한족의 긴 옷은 말에 올라타거나 전투를 할 때 거추장스러웠습니다. 짧은 상의와 바지는 기동성과 활동성을 극대화하여 신속한 작전 수행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2. 유목민 대처 : 유목민의 강점은 기병의 기동력이었습니다. 이에 맞서기 위해서는 똑같이 기병 중심의 전술을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었습니다.
 
3. 무령왕의 결단과 반대
• 반대 : 조 나라 귀족들과 보수 세력은 '호복'이 야만적인 복장이라며 전통과 예의(禮儀)에 어긋난다고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특히 무령왕의 숙부인 공자(公子) 성(成) 등이 심하게 반발했습니다.
• 무령왕의 설득 : 무령왕은 "나라를 강하게 하는 데 유익하다면 옛 제도를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를 펴며, 직접 공자 성을 찾아가 설득하는 등 강력한 의지로 개혁을 밀어붙였습니다.
 
4. 결과와 영향
• 군사력 강화 : 호복기사 도입 후 조 나라 군대는 최강의 기병 전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북방 유목민과의 전투에서 압승을 거두고, 영토를 크게 확장했습니다.
• 전국 7웅 중 강국 부상 : 조 나라는 진나라, 초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으로 급부상했으며, 특히 이목(李牧)과 같은 명장이 이끈 조 나라 기병은 전국시대 최강의 육군 중 하나로 평가받았습니다.
• 혁신의 상징 : 호복기사는 기존의 전통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실리(實利)와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위해 외국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과감하게 수용하고 개혁한 사례로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호복기사(胡服騎射)는 조 나라 무령왕이 나라의 생존과 강화를 위해 전통을 깨고 북방 유목민의 복장(호복)과 기마 전술(기사)을 도입한,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군사개혁이었습니다.
 
 
* 진나라 상앙(商鞅)이 실시한 변법(變法)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진(秦)나라를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탈바꿈시킨 혁신적인 개혁이었으며, 이를 반대한 보수파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감룡(甘龍)이었습니다.
 
1. 상앙의 변법 실시 (기원전 359년경)
상앙의 변법은 부국강병(富國強兵)을 목표로, 법가(法家) 사상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적 개혁 정책이었습니다. 당시 진 효공(秦孝公)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진행되었습니다.
 
- 주요 개혁 내용
• 연좌제 및 십오제(什伍制) : 백성을 5호(五戶) 또는 10호(十戶) 단위로 묶어 연대 책임을 지게 했습니다. 이는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범죄를 상호 감시하게 했습니다.
• 토지 개혁 및 세금 제도:
o 경계 폐지 : 토지의 경계를 허물고 사적인 토지 소유를 인정하여 농업 생산력을 장려했습니다.
o 공정한 세금 : 농사를 열심히 짓거나 군공(軍功)을 세운 사람에게는 혜택을 주고, 놀고먹는 사람은 노비로 삼는 등 철저한 실적주의를 적용했습니다.
• 신분 제도 개혁:
o 세습 특권 폐지 : 종실(왕족)이나 귀족이라도 군공이 없으면 작위(爵位)와 봉록(俸祿)을 누릴 수 없도록 했습니다.
o 군공에 따른 작위 수여 : 오직 전쟁에서의 공로만을 신분 상승의 유일한 통로로 삼아 군대의 사기를 높였습니다.
• 도량형 통일 : 통일된 도량형(度量衡)을 사용하여 상업 질서를 확립하고 중앙의 통제를 강화했습니다.
 
2. 보수파의 반대와 감룡(甘龍)
상앙의 변법이 발표되자, 진나라의 오래된 전통과 기득권을 대변하는 귀족 및 보수 세력은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이 반대파의 중심 인물이 바로 감룡이었습니다.
 
- 감룡의 반대 논리
감룡의 반대는 주로 '옛것을 지키는 것(循古)''예법(禮法)'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나왔습니다. 이는 《상군서(商君書)》와 《사기(史記)》 등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옛것을 본받아 백성을 편안하게 해야 한다' (循古而安民):
o 감룡은 "법이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라며, 전통적으로 내려온 제도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o 급격한 개혁은 백성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보았습니다.
• '새로운 법은 어지러움을 낳는다':
o 변법이 전통과 예법을 무시하고 오직 법과 형벌에만 의존하는 것을 비판했습니다. 즉, 인륜(人倫)과 예의(禮義)를 바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유가적(儒家的)인 관점에 가까웠습니다.
 
- 상앙의 반박 (법가 사상)
감룡의 반대에 대해 상앙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며 자신의 개혁 정당성을 피력했습니다.
• '성인(聖人)은 만민을 교화할 때 한 가지 방법을 고집하지 않는다' (聖人治國不法古):
o 시대의 변화에 따라 통치 방식과 법 제도 역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o "나라를 이롭게 하는 데 전념하는 자는 옛것을 본받을 필요가 없다"는 논리로, 오직 국가의 실익(實益)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했습니다.
 
3. 개혁의 관철과 결과
결과적으로 진 효공은 상앙의 주장을 전적으로 수용하여 변법을 강행했습니다.
• 감룡을 비롯한 반대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상앙은 강력한 법 집행을 통해 개혁을 성공적으로 정착시켰습니다.
• 이후 진나라는 강력한 군국주의(軍國主義) 체제를 확립하여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군사력이 급상승했으며, 이는 훗날 진시황의 통일을 위한 초석이 되었습니다.
상앙의 변법은 낡은 제도를 타파하고 새로운 시대를 연 중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개혁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士農工商(四民),
《管子》〈小匡〉「士農工商四民者, 國之石(柱石)民也,不可使雜處,雜處則其言哤,其事亂。是故聖王之處士必于閑燕,處農必就田野,處工必就官府,處商必就市井」
사(士)·농(農)·공(工)·상(商) 네 부류의 백성들은 나라의 주춧돌이 되는 백성(石民)이니, 이들이 섞여 살게 해서는 안 된다. 섞여 살면 그들의 말이 어지러워지고(哤), 그들의 일(職事)이 혼란해진다.
그러므로 성왕(聖王)은 선비(士)를 거처하게 할 때에는 반드시 한적하고 고요한 곳에 두었고, 농민(農)을 거처하게 할 때에는 반드시 밭과 들에 가까이 두었으며, 장인(工)을 거처하게 할 때에는 반드시 관청(官府) 가까이에 두었고, 상인(商)을 거처하게 할 때에는 반드시 시장(市井) 가까이에 두었다."
 
 
(2025.12.04. 주정봉 강의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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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