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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5.07.04. 17:46 (2025.07.04. 17:46)

【열하일기 17】바이센 교수, ‘왕래 잦았던 조대수 패방 등장 인물 12점 중 3점은 조선 사신과 깊은 관련’ 주장

 
中, 정조 때 있었던 '원훈초석' 그대로... 조대수 패방과 이흘(李忔)
흥성고성을 방문하고 조씨 형제 패방에 대해 본격적으로 자료들을 보기 시작했다. 선양대학교 바이센 교수는 2023년 9월에 발표한 논문 〈랴오닝성 조대수 석패방의 석각 인물 그림 고찰〉에서 “조대수는 조선 사신과 왕래가 잦았고, 패방에 등장하는 인물 12명 중 최소 3점은 조선 사신과 깊은 관련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열하일기 17】바이센 교수, ‘왕래 잦았던 조대수 패방 등장 인물 12점 중 3점은 조선 사신과 깊은 관련’ 주장
中, 정조 때 있었던 '원훈초석' 그대로... 조대수 패방과 이흘(李忔)
 
 
흥성고성을 방문하고 조씨 형제 패방에 대해 본격적으로 자료들을 보기 시작했다. 선양대학교 바이센 교수는 2023년 9월에 발표한 논문 〈랴오닝성 조대수 석패방의 석각 인물 그림 고찰〉에서 “조대수는 조선 사신과 왕래가 잦았고, 패방에 등장하는 인물 12명 중 최소 3점은 조선 사신과 깊은 관련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 조씨 형제 패방(사진:궁인창)
 
 
민속학자 이윤선 교수와 박석룡 대원과 함께 걸어가다 조대락 패방을 바라보니 조선의 실학자로 박학다식한 이덕무가 기록한 《청장권전서》 제66권 입연기상(入燕記上)에 나오는 ‘원훈초석’이 그대로 있어 무척이나 놀랐다. 이때가 정조 2년 3월의 기록이다.
 
 
▲ 원훈초석(사진:궁인창)
 
 
정조 2년 4월 3일의 이덕무 기록을 그대로 옮겨 적는다.
 
 
“3일(임술)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32리를 가 연산역(連山驛)에서 점심을 먹고, 38리를 가 영원주(寧遠州)에서 유숙했다.
 
○ 고교보(高橋堡)에서 12리쯤 가자 남쪽으로 큰 바다가 보였다. 검은 파도가 출렁거렸고 배 돛이 까마득히 보였다. 섬이 있고 그 섬에는 5개의 봉우리가 있었는데 전횡도(田橫島)라고 전해온다. 황해도(黃海道) 백령도(白翎島)에서 이 섬이 바라보인다고 하나 믿을 수 없다.
 
여기서 연산역까지는 12리이다. 길 왼편에 장춘교(長春橋)가 있고 홍예문 3개가 들판 가운데 서 있었다. 시내가 말라 다리를 오랫동안 폐기한 채 통행하지 않고 있었다. 여기서 영원성까지는 5~6리쯤 된다. 길 남쪽에 노아적(弩兒赤)의 구혈대(歐血臺)가 있다. 산의 높이는 우리나라의 기봉(岐峯)보다 조금 낮았다. 북쪽에 있는 대(臺)는 낮고 넓었고, 남쪽에 있는 대는 높고 좁았다. 좁은 것은 연대(煙臺)이다. 산 아래 길 옆에는 영녕사(永寧寺)가 있다. 영원성에 들어가니 외성문(外城門)은 춘화문(春和門)이고 내성문은 동녕문(東寧門)이다. 성첩은 무너졌으나 마을은 조밀했다. 남쪽 큰길 중간 지점에 조씨(祖氏)의 패루(牌樓) 3칸이 있는데, 대체로 북진(北鎭)의 석문(石門)과 같았으나 높이와 크기, 조각 등은 훨씬 더 나아서 귀인의 솜씨 같았다. 서까래와 들보, 처마 등은 모두 석재를 썼고 나무는 하나도 쓰지 않았다. 위에는 옥음(玉音)이란 두 글자를 새겼고, 중간에는 원훈초석(元勳初錫)이란 네 글자를 새겼고, 후면에는 등단준열(登壇駿烈)이란 네 글자를 새겼고, 그 아래에다 횡서(橫書)로 고증영록대부(誥贈榮祿大夫) …… 조진(祖鎭)이라 새겼다. 다음도 위와 같이 횡서했고, 끝에 조인(祖仁)이라 썼으며, 그다음에 또한 위와 같이 횡서하고, 끝에 조승교(祖承敎)라 썼다. 그다음에는 특서영록대부(特署榮祿大夫) …… 대락(大樂)이라 썼다.
 
양쪽 기둥 안팎에는 각각 연구(聯句)가 있는데 전련(前聯)만 기록한다.
 
松檟如新慶善培於四世
琳琅有赫賁永譽于千秋
 
소나무 싱싱하니 사대를 배양해 온 경사이고
옥구슬 찬란히 빛나니 천추에 빛날 명예로다
 
남쪽으로 수십 보 거리에 또 패루(牌樓)가 있다. 석재와 제도가 대락의 패루만은 못했다. 4대의 벼슬을 전과 같이 열서(列書)했는데, 이는 조대수(祖大壽)가 세운 것이다. 조인의 아들은 승훈(承訓)이고, 승훈의 아들은 대수이다. 대수와 대락은 재종(再從) 형제간이다. 확청(廓淸)한 공적을 횡서하고, 남면에는 충정담지(忠貞膽智)라 쓰고 아래층 안팎에는 사세원융소보(四世元戎小保)라 썼다. 이어 남성문(南城門)으로 나왔는데 문 이름은 영청(永淸)이다. 대개 푸른 하늘처럼 길이 번창하라는 예언인 것 같다.”
 
 
이덕무는 이대락의 패방를 보고 써있는 한문을 자세하게 기록했지만, 이대수 패루에 있는 조선 사신 이흘(李忔) 그림은 알지 못한 것 같았다.
 
 
▲ 박성룡 소방관, 이대락 패방(사진:궁인창)
 
 
선양대학교 바이센 교수가 발표한 논문에 의하면 “조대수 석패방은 외관이 목조처럼 보이지만, 석제로 만들어 4기둥(四柱) 3칸 5층식이다. 지붕은 단첨무전정(单檐庑殿顶, 홑처마 지붕)인 건물이다. 평면 일자형이고 네 개의 기둥이 있고 명간(明間) 1개와 별실(次間) 2개로 나누어져 있다. 석패방의 그림은 조대수의 일생과 깊은 연관이 있다. 석패방의 전체적인 조형은 아름답고, 작대(雀替), 방(枋), 주 기둥(主柱), 과주(瓜柱), 첨루(檐楼)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별실의 재료는 명간과 거의 동일하며, 차간의 재료는 아래에서 위로 봤을 때, 협간석(夹杆石), 변주(边柱), 작대(雀替), 방(枋), 첨루(檐楼)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 방은 또다시 미방(楣枋)과 횡방(横枋)으로 나눌 수 있는데, 조대수 석패방에는 미방(즉 밑에 층의 첫 번째 횡방의 부량(副梁), 탁량(托梁))이 3개 있다. 북쪽 2층 횡방에 있는 석각 3점은 조대수가 조선 사신을 접견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기록에 따르면 조대수는 조선 사신과 왕래가 잦았다. 명나라 때 조선 사신의 사행길은 비교적 고정적이어서 압록강 동쪽의 의주(義州)에서 출발하여 중국으로 들어와 요동을 거쳐 요서주랑(遼西走廊)으로 들어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 길에서 조대수는 숭정 2년(1629)에 명나라 조천사(朝天寺)로 가던 사신 이흘(李忔 )을 만나 교제했다.”라고 주장한다.
 
패방 북서쪽에는 조대수가 ‘잉어약룡문(登龍門)’의 이야기를 빌어 원숭환(元崇煥) 장군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는 내용이 남아 있다. 조대수 석패방의 인물 그림은 조대수의 일대기를 서사적인 기법으로 그려냈다.
 
 
▲ 조대수(사진:바이두백과)
 
 
조씨 형제는 요동 도독을 세습하고, 명나라 숭정 때 총병 관외에서 원숭환의 부장이었다. 숭정 원년(천총 2년, 1628년) 7월 25일, 장기간의 식량 및 임금 체불로 인해 닝위안 군란이 발생하여 닝청 13개 대대가 모두 혼란에 빠졌지만, 조대락 1개 대대는 전혀 요동이 없었다. 숭정 3년(천총 4년) 5월 9일, 손승종은 군대를 이끌고 조가파, 장홍모 등과 함께 난주를 공격했다. 이후 조관과 함께 농민 봉기를 진압하자, 루샹셩은 "원벌 병사는 조대락과 조관이 요정을 통솔하는 것이 가장 강력하고, 도적을 가장 많이 죽였다."라고 말했다.
 
손득공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웠고, 후금을 내리려는 의지가 있었으며, 홍승주를 따라 출관하였고, 송금은 전쟁에서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다. 숭정 15년(1642년), 홍타이지가 조대수의 항복을 바라며 조대락을 풀어 금주로 보냈지만, 조대락은 청초에 죽었다. 조대락의 정공패방은 명 숭정 11년(1638년)에 건설되었고, 황토색 돌로 만들어졌다.
 
 
▲ 흥성고성 남문길 이윤선 교수(사진:궁인창)
 
 
조선 사신 이흘(李忔, 1568~1630)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상중(尙中), 호는 설정(雪汀)·오계(梧溪)이다. 그는 이은신(李殷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흥(李興)이고, 아버지는 부사과 이천일(李天一)이며, 어머니는 남양 홍씨(南陽洪氏)로 홍염(洪濂)의 딸이다. 그는 1589년(선조 2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91년(선조 24)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학유가 되고, 다음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주서로 왕비를 해주에 호종하였다. 1594년(선조 27) 홍문관에 등용되고 이듬해 승문원정자, 저작, 박사 등을 거쳐 전적에 올랐다. 1597년(선조 30)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지평, 문학을 거쳐 공조정랑이 되었다. 왜적이 다시 조선을 침략하자 조정은 중국어에 능통해 명장(明將) 진우충(陳愚衷)과 함께 울산에서 왜적을 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뒤 전라도도사로 춘추관 기주관을 겸하고, 다시 형조정랑이 되었고 보령 현령에 임명되었으나 친상(親喪)을 당해 부임하지 못했다. 1606년(선조 39) 황해도 도사를 거쳐 배천군수 때에 관에서 봄에 백성들에게 관곡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10배를 거두어들이는 악습을 폐지하였다. 그는 1614년(광해군 6) 장단 부사를 지내고, 1621년(광해군 13) 종부시정(宗簿寺正)을 거쳐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 후에 지제교가 되었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왕을 강화에 호종하였다. 1629년(인조 7) 사은사가 되어 동지사(冬至使) 윤안국(尹安國, 1569~1629), 서장관 정지우(鄭之羽) 등과 함께 배를 타고 명나라에 가다가 풍랑을 만났다. 윤안국은 바다에서 익사(渰死)하고, 사신 이흘만 간신히 살아 베이징에 도착해 하표(賀表: 조선에서 올리는 축하의 글)와 변무주문(辨誣奏文: 명나라에서 오해하는 일을 바로잡도록 변론하는 글)을 전달한 뒤 조선 사신의 숙소인 옥하관(玉河館)에서 지내다 사행길에서 얻은 병으로 인해 쓸쓸하게 타향에서 죽었다. 조선 조정은 이흘을 좌찬성에 추증하였다. 시호는 충장(忠章)이며, 저서로는 《觀周日錄》, 《浯溪文集》 등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22권 인조 8년 2월 6일(1630년, 명 숭정 3년) 기록에 “진하사(進賀使) 이흘이 원 독수(袁督帥)의 군문(軍門)에 도착하여 동지사 윤안국이 익사했다고 치계(馳啓)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일이 놀랍고 참혹하기 그지없다, 해조(該曹; 관할 부서)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거행케 하라.”고 하였다.
 
 
【원문】○ 進賀使李忔到袁督師軍門馳啓云: "冬至使尹安國渰死。" 上下敎曰: "事極驚慘, 令該曹擧行恤典。" 禮曹請追贈官爵, 上從之。
 
 
베이징의 옥하관 자리는 현재 중국인민법원 건물이 건립되어 있다. 조선에서 옥하관이라는 글이 최초로 기록한 문헌은 1463년 문신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 사관 수문관인 교위(校尉) 卜以齡에게 준 시의 병서(幷序)에 처음 등장하여 사신들이 관습적으로 사용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기사에 북경 회동관(會同館)이란 명칭이 11번 나온다. 베이징 조선 사신의 숙소 이름의 다른 표현으로는 四夷館, 會同四驛館, 四驛館, 烏蠻館 이란 명칭도 꾸준히 사용되었다.
 
 
▲ 베이징 고려 명칭(자료:박현규)
 
 
순천향대 중어중문학과 박현규 교수는 청나라 건륭제 때 만든 건륭경성전도(乾隆京城全圖)를 확인하고 300여 권의 연행록을 뒤졌다. 방학 때마다 베이징을 여러 번 답사해 명·청 시대 조선 사절이 베이징에서 머무른 관사인 조선관 11곳의 위치를 고증하고 2012년 12월 14일 중국사학회 학술발표회에서 논문 〈명·청시대 북경 조선사관 고찰〉을 발표했다. 조선 사신들이 1905년까지 묵었고 고종 말기 조선 공관으로 활용된 옥하교관(玉河橋館)은 지금의 베이징시 공안국 자리였다. 베이징에 고려(高麗)라는 지명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은 고구려가 멸망해 당 태종이 많은 고려인을 강제 이주시키고, 원과 청을 거쳐 조선인이 팔기군에 편입되어 정착했기 때문이다.
 
 
▲ 건륭경사전도(乾隆京師全圖)(사진:歷史地圖网)
 
 
《경사전도》는 건륭 15년(1750)에 완성되었다. 1935년 베이징 고궁박물원 문헌관은 청나라 내무부 제작처 지도방에서 《경사전도》를 발견했다. 이 그림은 경사(北京, 베이징) 시내를 범위로 하여 도시 건축물을 자세히 그렸다. 현재 미국 하버드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지도 원본 그림은 이름이 없고 접이식 책자이며 상하 17열이며 각 줄은 좌, 우, 중 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51권이다. 합성 지도는 높이 14.1m, 너비 13.5m, 비율 1:650이다. 1940년 7월, 일본 ‘흥아원 화북연락부 정무국 조사소’는 이 그림을 축소 출판했다. 비율은 1:2600으로 변경되어 《건륭제 경성전도》라는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해설 및 색인을 첨부하여 17권으로 제본 합했다. 같은 해, 고궁박물원은 《청나라 내무부 장경성 전도》라는 이름으로 2400:1에 따라 복사한 것을 낱장 사본으로 삼아 《배열도》를 첨부했다. 《건륭제 경사전도》는 정교하게 그려져 있으며, 사실 청나라 초기의 가장 크고 지도사에서 하나의 기적으로, 베이징 도시 발전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
 
此《京师全图》完成于乾隆十五年(1750)。1935年北京故宫博物院文献馆发现于清内务府造办处舆图房。该图以京师(今北京)城区为范围,详细绘制城市建筑物。美国哈佛大学图书馆也有收藏。该地图为清乾隆时期绘制,大概的年份为(1736-1795年)。
 
原图无名称,系折装册页式本,上下十七排,每排由左、右、中三册组合,共五十一册。合成之图高14.l米,宽13.5米,其比例为1:650。1940年7月,日本“兴亚院华北连络部政务局调查所”曾将该图缩印出版,比例改为1:2600 ,以《乾隆京城全图》为名。订成17本,附解说及索引。
 
同年,故宫博物院亦以《清内务府藏京城全图》为名,依2400:1,影印为散页函装,附《排列图》。这幅《乾隆京城全图》绘法精详,实为清初之最,也是地图史上的一个奇迹,研究北京城市发展史不可多得的宝贵资料。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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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