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 사기 390강 강의자료 요약 (2025.7.3)
2025년 7월 3일 강의 장면 - 서울시 50+센터 중부캠퍼스(마포구 공덕동)
1. 唐詩 300首
1) 당시 제목: “등락유원” 2) 당시 중국어 발음
登 樂 遊 原 - 李 商 隱 向 | 晚 | 意 | 不 | 適 | xiàng | wǎn | yì | bú | shì | 驅 | 車 | 登 | 古 | 原 | qū | chē | dēng | gǔ | yuán | 夕 | 陽 | 無 | 限 | 好 | xī | yáng | wú | xiàn | hǎo | 只 | 是 | 近 | 黃 | 昏 | zhǐ | shì | jìn | huáng | hūn |
3) 작자: 이상은(李商隱, 812년 또는 813년 ~ 858년) 이상은은 당나라 말기의 저명한 시인으로, 자는 의산(義山), 호는 옥계생(玉谿生)입니다. 그는 현재의 하남성 심양시(沁陽) 출신으로, 아버지 이사는 당나라의 종실 출신이었으나, 그의 어린 시절에는 가난한 지방 관료로 생활했습니다. 이상은은 10세에 아버지를 잃고, 이후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문학적 업적 이상은은 당나라의 대표적인 시인 중 한 명으로, 특히 애정 시에서 독보적인 경지를 이룬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시는 화려하고 상징적이며,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는 '무제(無題)'라는 제목의 시를 많이 남겼으며, 이는 그의 애정 시에서 특히 두드러집니다. 이러한 시들은 대개 불륜이나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회상으로, 애수와 우아함이 잘 어우러져 있습니다.
이상은은 또한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었으나, 당나라의 정치적 파벌 싸움인 '우이당쟁(牛李黨爭)'에 휘말리면서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정치적 불운으로 인해 생애의 대부분을 고달프게 보냈습니다. 그의 시는 이러한 개인적 고통과 사회적 비판을 담고 있어, 그가 겪은 감정의 깊이를 잘 드러냅니다.
문학적 영향 이상은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시는 '작은 이백과 두목'으로 불리며, 당나라 시인들 중에서도 특히 젊은 세대에게 사랑받았습니다. 그의 독특한 시풍은 후대 시인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고, 그의 작품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습니다.
이상은은 4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시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며, 중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김영환교수의 동양고전아카데미 제337강(2024,01,04) 강의 교안
*《論語》〈里仁〉
4-08. 子曰朝聞道,夕死可矣。
1. 袁世凱(7言絶句) 〈安重根 挽〉 平生營事只今畢,死地圖生非丈夫。身在三韓名萬國,生無百歲死千秋。
2. 孫中山(7言絶句) 〈贊 安重根〉 功蓋三韓名萬國,生無百歲死千秋。弱國罪人强國相,縱然易地亦藤侯。
3. 梁啓超의 1,000자 7言律詩 〈秋風斷藤曲〉의 일부분 ...黄沙卷地風怒號,黑龍江外雪如刀。流血五步大事畢,狂笑一聲山月高。......
* 《史記》〈周本紀〉 注釋
1. 官 - 甲骨文, 원래는 임시 주둔 병영
《說文解字》「官,吏事君也,从宀,从𠂤,𠂤猶衆也。此與師同意」
(1) 집, 《論語》〈子張〉「夫子之墻數仞,不得其門而入,不見宗廟之美: 百官之富」
(2) 관청 《管子》〈權修〉「土地博大,野不可以無吏,百姓殷衆,官不可以無長」
(3) 국가 《資治通鑑》魏明帝景初二年「彼知官備已固,利不可得,深入則非力所及,淺入則勞而無獲」 "손권은 국가의 방비가 이미 튼튼하다는 것을 알고, 전쟁에 승리해 봐야 얻을 게 없고, 소규모 군대로 깊이 들어가면(深入) 힘이 이르는 바가 아니고(그렇게 할 수 없다), 대규모 군대로 들어가면 (淺入) 수고만 하고 얻는 것이 없을 것을 알았다."
* 앞뒤구절 帝问于护军将军蒋济曰:“孙权其救辽东乎?” 济曰:“彼知官备已固,利不可得,深入则非力所及,浅入则劳而无获;权虽子弟在危,犹将不动,况异域之人,兼以往者之辱乎!"
《자치통감》(資治通鑑)은 북송의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대표적인 편년체 통사로, 중국 역사 서술의 전범을 이룬 명저이다. 총 294권, 300여만 자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전국시대 주나라 위열왕 23년(기원전 403년)부터 오대시기 후주 세종 현덕 6년(959년)까지 약 1362년에 걸친 중국 역사를 연대순으로 기술하였다. 특히 《자치통감》은 정사뿐만 아니라 각종 잡사, 개인 저술 등 총 322종에 달하는 방대한 사료를 인용하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대단히 높다.
이 책은 춘추전국, 진한, 위진 남북조, 수당, 오대 십국 등 중국의 대혼란기 정국을 일관된 서술 체계로 정리하였다. 특히 오대 십국 시대에 대한 서술이 충실한데, 오 대란 당말 이후 중원 지역에 존속했던 다섯 왕조, 즉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를 말하며, 십 국은 같은 시기 중원 이외의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열 개의 정권을 일컫는다. 대표적으로 전촉, 후촉, 남오, 남당, 오월, 민국, 남초, 남한, 형남, 북한 등이 있다. 이 중 십 국 중 일부는 송나라 초기에 이르러 병합되기도 하였다.
《자치통감》의 방대한 서술을 보다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한 요약본으로는 남송시대 강지(江贄)가 편찬한 《소미통감절요》(少微通鑑節要)가 있다. 이 책은 《자치통감》의 내용을 간추린 것으로, 사마광의 원전보다는 간결하지만 핵심을 유지하여 교육용이나 입문용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또한 남송의 주희(朱熹)는 《자치통감》의 내용과 구성에 일부 오류가 있다고 보고 이를 교정·보완하여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편찬하였다. 그는 기존 294권의 내용을 대폭 축소하여 59권으로 재구성하였고, 서술 방식도 주희 특유의 도의론적 관점에서 정리하였다. 이 강목은 단순한 사료 정리가 아니라 도덕적 판단과 정치적 평가를 덧붙여, 성리학적 사관이 반영된 역사 저술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주희의 영향력으로 인해 후대에는 《자치통감강목》이 오히려 원전보다 더 큰 교육적·정치적 영향력을 끼쳤다.
청대에 이르러 《자치통감》의 시대 범위를 더욱 확장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 대표적인 저술이 필원(畢沅)과 장학성(章學誠), 소진함(邵晉涵) 등이 함께 작업한 《속자치통감》(續資治通鑑)이다. 이 책은 송 태조 건륭 원년(960년)부터 원 순제 지정 28년(1368년)까지, 약 409년에 걸친 송·요·금·원 4개 왕조의 역사를 편년체 형식으로 정리하였다. 《자치통감》의 체재와 필법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정사뿐 아니라 다양한 문헌을 활용하여 후속 시대에 대한 사료적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였다.
《자치통감》과 그 관련 저술들은 단순한 역사 기술을 넘어서 정치적 교훈서로도 읽혔으며, 군왕이나 대신, 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유학적 가치관에 입각한 역사 해석과 제왕학적 통찰은 동아시아 전통 정치사상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쳐왔다.
<資治通鑑> 과 기타 관련서 1. <資治通鑑> 司馬光, 編年體 通史, 300여만 자. 기록은 전국시대 周나라 威烈王23年(기원전 403年)부터 5代시기 後周[951年-960 年). 五代时期는 唐말기 이후 中原에 있었던 최후의 왕조 歷3帝, 享国10年→이후 北宋 통일 世宗顯德6年(959年)까 16朝 1362年의 역사: 인용한 사료 매우 풍부(正史+각종 雑史+개인 저술 등 322종 자료), 사료가치가 매우 높음
* 중국 대혼란시기(春秋戰國- 魏晉南北朝-5代10國) 1) 5代(907年~960年) -중원지역에 있던 5개 왕조, 後梁, 後唐, 後音, 後漢, 後周 2) 10國(902年~979年)·중원 이외의 10개 왕조, 前蜀, 後蜀,南吳,南唐, 吳越, 閩国, 南楚, 南漢, 荆南(南千). 北漢
6. <少微通鉴節要> 南宋, 少微先生 江贄, <資治通鑑> 의 요약본 성격
7. <資治通鑑綱目> 南宋,朱熹, <資治通鑑> 오류 교정, 보충 , 간략(294권을 59권으 로 축소), 내용은 戰國부터 五代(기원전 403年-959年)의 중국 역사.
8. <續資治通鑑> 清代 중기 筆沅+章學誠, 邵晋涵 協作 宋 太祖 建隆元年(960年)부터 元順帝 至正28年(1368年) 409年의 宋、遼 '金' 元 四朝의 역사, <資治通鑑> 의 編年休 사용.
* 권중달 교수의 업적과 노력 • 번역 시작: 1997년부터 《자치통감》을 한국어로 번역하기 시작. • 완역: 2005년 말에 200자 원고지 8만 매 분량의 《자치통감》 전294권을 완역. • 역주본 출간: 2007년 1월부터 《권중달 역주 자치통감》 31권과 해설서 《자치통감전》 1권, 총 32권 출간. • 문화공로상 수상: 2015년 6월, 대만 중화문화총회에서 《자치통감》 번역 및 중국 역사학 연구에 기여한 공로로 문화공로상 수상. • 지속적인 연구 및 집필: 《속자치통감》 번역 및 출간에 힘쓰고 있으며, 자치통감 관련 서적을 꾸준히 집필·출간하여 대중들의 역사적 시각을 제고하고자 노력. • 장학회 설립: 권 교수의 학문적 업적과 정신을 계승하고 연구를 활성화하기 위한 장학회가 2023년 3월 15일에 공식 출범. • 애장본 출간: 2022년에 27권의 번역서와 해설서 '자치통감전'을 포함한 총 28권으로 구성된 애장판을 출간. 판매 수익금은 장학기금으로 기부할 예정.
권중달 교수의 번역본의 특징 • 최초 완역: 권중달 교수의 《자치통감》 번역본은 중국어 이외의 문자로는 처음으로 완역된 것입니다. • 원문에 충실한 번역: 원전이 갖고 있는 통감필법의 정신을 최대한 살리면서 의미가 불분명한 경우에는 역주로 설명했습니다.
• 대중화를 위한 노력: o 내용과 분량을 감안하여 문단을 나누고 각 문단마다 제목을 달아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o 쉬운 용어를 사용하여 번역하고, 일반 독자들이 질려 하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기울였습니다.
• 학문적 깊이: o 각주를 달아 심도 있는 연구가 가능하도록 하였습니다. o 고증학의 대가 고힐강이 교정한 '자치통감'을 저본으로 삼았습니다.
• 온라인 소통: '통감닷컴'이라는 인터넷 누리집을 통해 대중 들과의 소통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습니다. • 장학기금 기부: 판매 수익금은 '권중달 통감학장학회' 기금으로 기부하여 후학 양성에 기여할 예정입니다.
(4) 任地, 荀悦《漢紀》〈成帝紀四〉「秋七月,有星孛于東井,時谷永爲北地太守,方之官,上使使問永所欲言」 "가을 7월, 동정(별자리 이름)에 혜성(星孛)이 떨어졌다. 당시 곡영이 북지 태수로 있었고, 황제는 그에게 사자를 보내어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 성제는 기원전 33년부터 기원전 7년까지 재위했음.
* 혜성(彗星)은 태양계의 소천체로, 주로 얼음, 먼지, 그리고 다양한 화합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혜성은 태양에 가까워질 때 표면의 물질이 기화되어 가스를 방출하며, 이로 인해 코마(혜성의 대기)와 긴 꼬리가 형성됩니다.
혜성의 구조 혜성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 혜성핵: 얼음과 먼지로 이루어진 고체 부분으로, 일반적으로 수 킬로미터에서 수십 킬로미터 크기입니다. • 코마: 혜성핵 주위에 형성되는 가스와 먼지의 구름으로, 태양의 열에 의해 기화된 물질로 구성됩니다. • 혜성꼬리: 태양의 방사선과 태양풍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는 긴 꼬리로, 태양과 반대 방향으로 뻗어 있습니다. 이 꼬리는 가스와 먼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때로는 수백만 킬로미터에 이를 수 있습니다.
혜성의 궤도 혜성은 일반적으로 타원형 궤도를 따라 태양을 공전합니다. 이 궤도는 매우 이심률이 크며, 일부 혜성은 수백 년에서 수천 년에 걸쳐 태양계를 돌고 돌아옵니다. 예를 들어, 하늘에서 가장 잘 알려진 혜성 중 하나인 할리 혜성은 약 76년 주기로 지구 근처를 지나갑니다.
혜성의 역사적 의미 역사적으로 혜성은 종종 불길한 징조로 여겨졌으며, 많은 문화에서 신화와 전설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현대 천문학에서는 혜성이 태양계의 형성과 초기 상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여겨집니다.
이처럼 혜성은 단순한 천체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우주 탐사와 과학 연구에서 중요한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 황건적의 난 (184 CE): 곡영의 재직 시기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황건적의 난입니다. 이 반란은 동한 말기 농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발생한 대규모 반란으로, 곡영이 북지 태수로 재직할 당시의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불안정을 반영합니다. 이 반란은 184년에 시작되어, 동한 왕조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정치적 혼란과 권력 다툼: 곡영이 재직하는 동안 동한 왕조 내에서 권력 다툼이 심화되었습니다. 특히, 환관과 외척 간의 갈등이 격화되었고, 이는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곡영이 북지 태수로서 지역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만들었습니다. • 지역 내 반란과 저항: 곡영의 재직 기간 동안 북지 지역에서도 작은 반란이나 저항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황건적의 난과 같은 대규모 반란과 연결되어, 지역 사회의 불만과 저항을 나타냅니다.
(5) 관직, 《續資治通鑑》宋孝宗干道二年「甲辰,上元知縣李允升坐賍,决配惠州。建康守臣王佐坐縱容出境,追两官,勒停,建昌軍居住。(知)鄂州汪澈,以濫擧降两官。提刑袁孚,以失按降一官」 "갑진년, 상원(上元)지역에서 지현(知縣) 이윤승(李允升)이 뇌물죄로 연좌되어 처벌받아 혜주(惠州)로 유배되었다. 건강(建康)성의 태수인 왕좌(王佐)는 이윤승의 출경(국외)을 방조한 죄로 삭탈관직(追)당하여 2등급 강등, 강제 정직의 처벌을 받고, 건창군(建昌軍) 부대가 주둔한 곳에 거주하게 되었다. 악주(鄂州)의 주지사 왕철(汪澈)은 사사로이 천거하여 두 계급 강등 처벌을 받았다. 감옥 담당관(提刑) 원부(袁孚)는 감찰(按)을 소홀히 한 죄로 한 계급 강등되었다."
* 지현(知縣)의 지(知)는 우두머리를 뜻합니다. (知)鄂州汪澈 ~악주(鄂州)의 주지사 왕철(汪澈)은 * 결배(决配)~유배 * 송나라 시대의 지방제도는 크게 로(路), 부(府), 주(州), **현(縣)**의 네 가지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제도는 중앙집권적 성격을 띠며, 각 지방의 행정 구역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설정되었습니다. • 로(路): 송나라의 지방 행정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행정 구역으로, 여러 주와 현을 포함합니다. 로는 중앙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으며, 각 로에는 감독관이 배치되어 지방 행정을 관리합니다. • 부(府): 부는 주와 현의 중간 단계로, 특정 지역의 행정을 담당합니다. 부의 장관은 중앙 정부에 의해 임명되며, 부 아래에는 여러 주와 현이 속해 있습니다. • 주(州): 주는 부보다 작은 행정 단위로, 여러 현을 포함합니다. 주의 장관 역시 중앙 정부에 의해 임명되며, 주는 지역의 행정과 재정을 관리합니다. • 현(縣): 현은 송나라 지방 행정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로, 각 현의 장관은 중앙 정부에 의해 임명됩니다. 현은 지역 주민의 일상적인 행정을 담당하며, 지방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송나라의 지방제도는 당나라의 군현제와 유사하지만, 지방 장관이 없는 점이 특징입니다. 이는 중앙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고, 지방의 자율성을 제한하기 위한 조치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제도는 송나라의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뒷받침하며, 지방의 행정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6) 직책, 《韓非子》〈難一〉「耕、漁與陶,非舜官也,而舜往爲之者,所以救敗也」 농사 짓고, 물고기 잡고, 그릇 제작은 순임금의 직책이 아니었지만, 순임금이 가서 이를 행한 것은 잘 못 된 것을 구해주는 것이 었다.
한비자의 사상과 그의 저서인 《한비자》는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불안정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여러 제후국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며 강대국의 세력을 확장하려 했던 시기로, 정치적 음모와 배신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배경 설명: • 전국시대의 혼란: 한비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각국의 군주들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신하를 시해하거나 아버지를 살해하는 등의 비윤리적인 행위가 자주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비자는 법치주의를 통해 국가를 안정시키고 부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 법가 사상의 발전: 한비자는 법가 사상을 집대성하며, 법과 제도를 통해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고 악하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법을 엄격히 적용하여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 개인적 비극: 한비자는 자신의 고향인 한나라에서 여러 차례 조언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진나라에 의해 모함당해 독살당하게 되며, 그의 사상은 후에 진나라의 통치 이념으로 채택됩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한비자는 자신의 사상을 정리하고 《한비자》를 집필하게 되었으며, 이는 후에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정치적 이론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7) 器官, 《孟子》〈告子上〉「耳目之官不思,而蔽于物。物交物,則引之而已矣。心之官則思,思則得之,不思則不得也」 "귀와 눈의 감각기관은 사고능력을 갖지 않지만 그러나 외물의 바깥 환경에 의해 가려진다. 바깥의 어떤 환경이 그런 환경끼리 서로 접촉해서, 그것에 이끌게 될 뿐이다. 그러나 마음의 감각기관은 사고하는 능력이 있다. 사고하는 능력이 있으면 仁과 義를 얻고, 사고 능력이 없으면 仁과 義를 얻을 수 없다."
* 순자의 "수신"에서 언급된 **"君子役物 小人役於物"**와 정자의 "心役乎外", 그리고 주자의 **"不爲外物所勝"**의 의미.
군자와 소인의 차이 순자는 "군자는 사물을 부리지만 소인은 사물에게 부림을 당한다"는 구절을 통해 군자와 소인의 본질적인 차이를 강조합니다. 군자는 자신의 의지와 판단에 따라 사물을 다루며, 외부의 물질이나 환경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반면 소인은 외부의 물질이나 상황에 의존하여 자신의 행동이 결정되며, 이는 그들이 내면의 도리나 원칙을 따르지 못하고 외부에 의해 지배당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마음의 작용 "心役乎外"는 마음이 외부의 사물에 의해 영향을 받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는 소인이 외부의 물질이나 상황에 의해 자신의 마음이 조정되고, 따라서 자신의 행동이 외부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태는 소인이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지 못하고, 외부의 유혹이나 압력에 쉽게 굴복하게 만듭니다.
주자의 해석 주자는 "不爲外物所勝"이라고 하여, 군자는 외부의 물질이나 상황에 의해 지배되지 않으며, 자신의 내면을 통해 외부의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군자가 내면의 도리를 중시하고, 외부의 물질적 유혹에 흔들리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스려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종합적 해석 이 세 가지 개념은 모두 인간의 내면과 외부 세계 간의 관계를 탐구합니다. 군자는 자신의 내면을 수양하고, 외부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으며, 사물을 자신의 의지로 다스리는 존재입니다. 반면 소인은 외부의 물질에 의해 자신의 마음과 행동이 좌우되며, 이는 결국 그들의 삶을 불안정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순자와 주자의 가르침은 내면의 수양과 외부의 유혹에 대한 경계를 강조하며, 진정한 군자가 되기 위해서는 외부의 영향을 극복하고 자신의 도리를 지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8) 관리가 되다 《禮記》〈雜記下〉「管仲死,桓公使爲之服。官于大夫者之爲之服也,自管仲始也」 "관중이 죽자, 환공은 그를 위해 상복을 입게 하였다. 대부의 직책에 있는 자들이 그를 위해 상복을 입게 한 것은 관중이 처음이었다."
이 구절은 관중의 죽음에 대한 환공의 예우와 그로 인해 대부들이 상복을 입는 관습이 시작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관중의 죽음은 대부들의 상복 착용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관중이 사망했을 때, 환공은 그를 위해 상복을 입게 하였고, 이는 대부들이 죽은 대부를 위해 상복을 착용하는 관습의 시작으로 여겨집니다. 이 관습은 관중의 죽음 이후 대부들이 자신의 상관이나 추천을 통해 임명된 인물의 죽음에 대해 상복을 입는 것을 의무화하게 되었습니다.
(9) 관리하다, 《管子》〈權修〉「審其所好惡,則其長短可知也;觀其交游,則其賢不肖可察也。二者不失,則民能可得而官也」 "그의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살펴보면 그의 장점과 단점을 알 수 있고, 그의 교류하는 것을 보면 그의 현명한지 어리석은 지를 관찰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잃지 않으면, 민능(유덕과 유재능)을 가히 얻어서 관리할 수 있다."
• 사람의 선호와 혐오를 파악하면: 개인의 장점과 단점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이해함으로써 그 사람의 성격과 능력을 평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교우 관계를 관찰하면: 그 사람의 도덕적 품성과 능력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과 교류하는지를 통해 그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두 가지 요소를 잘 파악하면,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적절한 직책에 배치할 수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즉, 사람의 본성과 교우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국가 운영과 인재 관리의 기초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고대 중국의 정치 철학에서 인재를 선발하고 관리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원칙으로 여겨졌습니다.
(10) 본받다 《禮記》〈禮運〉「其降曰命,其官于天也 "그 내려오는 것을 '명'이라 하고, 그것은 하늘을 본받는 것이다.
*《禮記》〈禮運〉의 해당 앞과 뒤의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앞 문장: "夫禮必本於太一,分而為天地,轉而為陰陽,變而為四時,列而為鬼神。" 해당 구절: "其降曰命,其官於天也。" 뒤 문장: "夫禮必本於天,動而之地,列而之事,變而從時,協於分藝。"
번역: "그러므로 예는 반드시 태일(太一)에 근본을 두어야 하며, 이를 나누어 하늘과 땅이 되고, 변화하여 음양이 되며, 사계절로 변하고, 정신으로 배열된다. 그러므로 예는 반드시 하늘에 근본을 두고, 땅에 움직이며, 각 사안에 배열되고, 시기에 따라 변화하며, 분업에 협조해야 한다."
이 구절은 예(禮)의 근본 원리와 그 작용을 설명하며, 하늘과 땅, 음양, 사계절, 정신 등과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는 하늘의 도리를 따르며, 인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1) 공유하다, 《漢書》〈蓋寬饒傳〉 引《韓氏易傳》 「五帝官天下,三王家天下,家以傳子,官以傳賢」 "오제는 천하를 공공의 것으로 여기고, 삼왕은 천하를 집안의 것으로 여긴다. 집안의 것으로 보면 자식에게 물려주고 공공의 것으로 보면 어진 사람에게 물려준다."
* 한나라 영제 때 학자 한영(韓嬰)의 저서인 『한씨역전(韓氏易傳)』에 나오는 “五帝官天下, 三王家天下, 家以傳子, 官以傳賢”이라는 구절은 고대 중국의 이상적인 통치 방식과 실제 권력 계승 방식의 변화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1. 오제(五帝)의 공천하(公天下)와 선양(禪讓) “五帝官天下, 官以傳賢”은 오제 시대에는 천하가 특정 가문의 사유물이 아니라 공공의 것(公天下)이었음을 의미합니다. ’관천하(官天下)’의 ’관(官)’은 공공의 직위, 즉 관직을 뜻하며, 이는 통치자의 지위가 사적인 소유가 아니라 공적으로 부여된 것이라는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통치자는 덕망과 능력이 있는 현명한 인물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니, 이를 ’선양(禪讓)’이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요(堯) 임금이 순(舜)에게, 순 임금이 우(禹)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을 꼽습니다. 선양은 기본적으로 피를 흘리지 않는 평화적인 권력 이양 방식이며, 가장 이상적인 정치 형태로 간주되었습니다.
선양제도에서는 혈연이 아닌 능력과 덕목이 우선시되었으며, 이는 유교적 정치 이념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특히 맹자(孟子)는 요순(堯舜)의 선양을 이상적인 정치 모델로 제시하며, 후대 유학자들이 추구해야 할 정치적 이상향으로 격상시켰습니다. 이러한 선양 사상은 단순히 과거의 전설이 아니라, 현실 정치에서 권력의 정당성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작용했습니다.
2. 삼왕(三王)의 가천하(家天下)와 세습(世襲), 방벌(放伐)
“三王家天下, 家以傳子”는 삼왕, 즉 하(夏)나라의 우(禹), 상(商)나라의 탕(湯), 주(周)나라의 무왕(武王) 시대에 이르러 천하가 특정 가문의 사적인 소유(家天下)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가천하(家天下)’의 ’가(家)’는 혈연으로 이어진 가문이나 가족을 의미하며, 이는 통치자의 지위가 세습되는 방식으로 변화했음을 나타냅니다.
가. 세습(世襲)의 등장 우 임금 이후 그의 아들 계(啟)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혈연에 의한 왕위 계승, 즉 세습 제도가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이는 이전의 선양과는 달리, 왕위가 아들에게 대물림되는 방식으로, 권력이 특정 가문에 고정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세습제도의 확립은 중국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이는 능력과 덕목보다는 혈연관계가 권력 계승의 주요 기준이 되었음을 의미하며, 이후 중국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왕조 체제의 기본 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세습제도는 권력의 안정성과 연속성을 보장하는 측면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 방벌(放伐)의 정당성 세습 제도가 정착되면서 군주가 덕을 잃고 폭정을 일삼는 경우가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타난 권력 교체 방식이 바로 방벌(放伐)입니다. 방벌은 무력(武力)이나 폭력을 통해 폭군을 축출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맹자(孟子)는 “군주가 덕을 잃으면 더 이상 군주가 아니라 평범한 필부에 불과하므로, 그를 죽이는 것은 군주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방벌의 정당성을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상나라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토벌하고,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 주왕을 토벌한 것이 대표적인 방벌의 사례입니다. 이는 기존 질서에 대한 무력적인 혁명을 의미하며, 권력의 정당성이 ’덕치(德治)’에 있음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특히 주나라는 천명(天命) 사상을 통해 방벌의 정당성을 체계화했습니다. 천명사상에 따르면, 하늘이 덕 있는 자에게 통치권을 부여하며, 군주가 덕을 잃으면 하늘이 그 명을 거두어 새로운 통치자에게 부여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이후 중국 정치사에서 왕조 교체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 중국사에서 「惠」의 의미: 제왕의 시호와 능명 분석 「惠」는 고대 중국의 시법에서 「인애·관후·온화」를 의미하며, 특히 치세가 평화롭지만 취약했던 군주에게 부여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1. 시호 「惠」의 전통적 의미 「惠」의 시호는 『逸周書·諡法解』에서 「柔質慈民曰惠」(유화한 성질로 백성을 사랑함), 「愛民好與曰惠」(백성을 사랑하고 베풀기를 좋아함)라고 정의됩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인애와 관용을 나타내는 미칭이지만, 실제 역사적 맥락에서는 암묵적인 비판적 함의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과도한 온화함이 정치적 우유부단이나 권력 상실을 초래한 경우, 「惠」는 사실상 「暗愚」를 완곡하게 표현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는 특히 西晉의 惠帝에서 현저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시호 제도에서 직접적인 비판은 피하면서도, 후세의 평가자가 군주의 실상을 암시하는 교묘한 방법으로 기능했던 것입니다.
2. 삼대의 「惠帝」: 치세와 시호의 배경 가. 西漢·惠帝(劉盈: 전195–전188년) 西漢의 惠帝 劉盈은 高祖 劉邦의 사후 어머니인 呂后가 실권을 장악하는 중에 명목상의 군주로 재위했습니다. 惠帝는 呂后에 의한 戚夫人 학살 등 잔혹한 정치적 숙청에 저항하지 못하고 깊은 무력감에 시달렸습니다. 사서에 따르면, 戚夫人의 처참한 모습을 본 惠帝는 마음에 병이 들어 정치에 관심을 잃었다고 합니다. 「惠」의 해석에서 劉盈은 확실히 백성에 대한 감세나 문화 사업을 추진하여 온화한 정치를 행했습니다. 하지만 외척에게 휘둘린 생애로 인해 「선량하지만 지도력 부족」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시호는 그의 온화한 성격을 반영함과 동시에 정치적 무력함도 암시했습니다. 漢代 초기의 복잡한 정치 상황에서 惠帝의 「惠」는 이상적인 군주상과 현실적인 정치 역학의 모순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나. 西晉·惠帝(司馬衷: 290–306년) 西晉의 惠帝 司馬衷은 중국사상 가장 무능한 황제 중 한 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何不食肉糜」(고기죽을 먹으면 되지 않나)라는 발언에 상징되는 정치적 무능함은 八王之亂으로 황권이 붕괴되고 이민족의 침입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 시기는 중국사상에서도 특히 혼란했던 시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司馬衷의 「惠」는 공식적으로는 「백성을 사랑함」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왕조 쇠퇴의 책임을 암시하는 시호였습니다. 당시 석각비문인 『辟雍碑』 등의 사료에서는 황태자의 권위 강화가 급무로 여겨진 배경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惠帝의 무능함이 널리 인식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경우의 「惠」는 직접적인 비판을 피하면서도 暗愚의 완곡한 표현으로 기능했습니다.
다. 明·惠宗(建文帝·朱允炆: 1398–1402년) 明의 惠宗 朱允炆은 太祖 朱元璋의 손자로 즉위하여 藩王 삭감을 시도했지만, 숙부인 燕王 朱棣(후의 永樂帝)의 靖難之變으로 실각했습니다. 建文帝는 행방불명이 되었고, 「惠宗」이라는 시호는 나중에 南明 정권이 추증한 것입니다. 朱允炆의 「惠」는 이상주의의 좌절을 상징합니다. 유교적 仁政을 목표로 했지만 현실적인 군략에 패배한 비극적인 군주로 평가되었습니다. 이 「惠」는 「인애」의 이념과 실각의 비극성을 합친 평가이며, 후세의 동정적인 시각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建文帝의 경우, 「惠」는 정치적 실패보다는 이상주의적인 仁政에 대한 지향을 강조하는 의미가 강해졌습니다.
라. 蜀漢·昭烈帝(劉備)의 「惠陵」: 시호와 능명의 대비 蜀漢의 昭烈帝 劉備의 경우, 시호와 능명에서 서로 다른 「惠」의 사용이 보입니다. 劉備의 시호 「昭烈」은 「昭」가 「명확한 덕」, 「烈」이 「공적의 현저함」을 의미하며, 강의한 창업 군주상을 강조합니다. 이는 劉備의 군사적 활동과 蜀漢 건국의 공적을 칭송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능명 「惠陵」의 「惠」는 인덕에 의한 통치를 이상으로 한 劉備의 이념, 즉 「민을 근본으로 한다」는 사상을 반영합니다. 시호 「昭烈」이 무용·사업을 칭송하는 데 비해, 「惠陵」은 백성에 대한 자 애를 상징하여 군주상의 이면성을 보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劉備라는 인물의 복잡한 성격과 정치적 입장을 교묘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惠」의 이중성과 역사적 맥락 제왕 시호로서의 「惠」는 겉으로는 「仁政」의 미칭이지만, 약한 군주에 대한 비판적 함의도 잠재해 있었습니다. 특히 西晉의 惠帝의 경우, 이러한 경향이 현저히 나타납니다. 정치적 무능함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꺼려지므로, 「惠」라는 미칭을 통해 암묵적으로 비판의 의도를 담는 수법이 사용되었습니다. 능명으로서의 「惠」는 순수한 德治의 찬미를 표현하고 있으며, 劉備의 惠陵이 그 전형적인 예입니다. 시호와 달리 정치적 실패의 암시는 없으며, 이상적인 군주상의 추구를 상징합니다. 이는 사후 평가에서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 경향이 있습니다.
시대적 변천을 보면, 漢代에서는 「온화」의 적극적 해석이 주류였지만, 후세에서는 권력 투쟁의 패자에게 부여되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建文帝의 예는 이러한 경향을 여실히 보여주며, 이상주의적인 仁政에 대한 지향과 정치적 실패의 비극성이 동시에 평가되고 있습니다.
「惠」는 중국 정치문화에서 인덕의 이상과 현실의 정치적 취약성의 틈새를 상징하는 어휘이며, 그 해석은 수용되는 역사적 맥락에 깊이 의존합니다. 특히 시호는 儒家 이념과 권력 역학의 타협의 산물이며, 해당 군주의 실상 이상으로 후세의 평가 의도를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잡한 의미 구조는 중국 고대의 政治思想과 역사 인식의 특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12) 공공연히 《漢書》〈陳咸傳〉「方進爲丞相,奏:咸前爲郡首,所在殘酷,毒螫加于吏民。主守盗,受所監。而官媚邪臣陳湯以求薦擧。苟得無耻,不宜處位」 방진이 승상으로 임명되었을 때, 상소를 올려 진함이 이전에 군의 수장으로서, 그곳에서 잔혹하게 행동하고, 독과 같은 해를 끼쳤고, 창고 재물을 횡령하고(主守盗), 예하 감독기관의 뇌물을 받았다(受所監)고 했습니다. 그리고 관리의 아첨과 사악한 신하인 진탕이 진함을 추천하려 하였다. 진실로 부끄러움이 없다면, 그가 관직에 있기에 적당하지 않다."
• 방진과 진함의 관계: o 방진은 당시 승상(丞相), 즉 재상으로서 매우 높은 지위에 있었습니다. o 그는 상소를 올려 진함을 탄핵했는데, 이는 방진이 진함의 상급자이거나 적어도 그를 감독하고 비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o 방진은 진함이 군수(郡守)로 재직하며 잔혹하게 백성과 관리를 괴롭히고, 공금을 횡령하며 뇌물을 받았다고 고발했습니다. 이는 방진이 진함의 부정부패를 비난하고 그를 공직에서 물러나게 하려 했음을 보여줍니다. 즉, 방진은 진함에게 매우 비판적이고 적대적인 입장이었습니다.
• 진함과 진탕의 관계: o 문장에서 진함이 "사악한 신하 진탕에게 아첨하여 천거를 구했다(官媚邪臣陳湯以求薦擧)"고 나옵니다. o 이는 진함이 자신의 이익(승진)을 위해 진탕에게 아부하고 청탁했음을 의미합니다. 진탕은 진함을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이나 영향력이 있었고, 진함은 그러한 진탕의 힘을 빌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o 동시에 진탕은 방진의 시각에서 '사악한 신하(邪臣)'로 평가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방진과 진탕의 관계: o 문장 자체에 방진과 진탕이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한 내용은 없지만, 방진이 진탕을 "사악한 신하"라고 명시적으로 표현하며 진함의 아첨 행위를 비판한 점을 통해 간접적인 관계를 추론할 수 있습니다. o 즉, 방진은 진탕의 인품이나 행동을 부정적으로 보았으며, 진함이 그런 진탕에게 아부한 것을 부도덕한 행위로 여겼습니다. 이는 방진이 진탕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앞과 뒤 문장 소개: • 앞 문장: "方進新為丞相。陳咸內懼不安。居亡何。方進奏。" (방진이 새로 총리로 임명되었고, 진함은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는 어디에 있었는가? 방진이 상소하였다.) • 뒤 문장: "咸坐免。顷之,红阳侯立举咸方正,为光禄大夫给事中,方進復奏免之。" (진함이 면직되었다. 얼마 후, 홍양후가 진함을 정직한 인물로 추천하여 광록대부로 임명하였고, 방진은 다시 상소하여 그를 면직시켰다.)
이 문장은 당시 정치적 상황과 인물 간의 갈등을 잘 보여주며, 방진의 도덕적 기준과 진탕의 부패를 대조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2025.7.3 강의 요약자: 주정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