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15】요서 지역 조씨 가족 4대, 랴오닝지역 진압 업적 칭송위해 2개 패방 설치 흥성고성 조씨 석패방
흥성고성 북쪽의 위원문과 서쪽의 영녕문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성황묘를 방문하려다 거리가 멀어 포기하고 남쪽 길 보행거리를 걸었다. 남쪽 길은 동쪽 춘화문 거리 점포와는 다르게 상점이 문을 열고 관광객을 반갑게 맞이했다. 내부가 넓은 음식점도 꽤 많았다. 교자와 냉면을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중국 음식점을 방문하면 요리(料理)라는 글자가 없다. 벽에는 차이(菜, 채소), 미도(味道)라는 한자가 있다. 중국에서 요리(料理)는 ‘개인의 일(業務)을 처리(處理)하다’라는 뜻이다.
▲ 음식점 안내문(사진:궁인창)
우리가 사용하는 요리(料理)라는 글자는 19세기 말에 일본인이 만든 신조어(新造語)로 중국 음식점과 방송에서는 《中国味道》라는 글자와 미식(美食)이라는 한자를 사용한다. 식재료 전문 도서관을 표방하는 가락몰도서관에서 빌려온 책 《중국의 맛·맛 박물관》, 《중국의 맛·맛 찾기》의 한자 표기는 《中国味道·味道博物馆》 《中国味道·寻味》이다.
현재 중국의 음식은 2000년대 음식과는 완전히 맛이 다르고 메뉴 이름도 완전히 달라졌다. 슈퍼마켓의 음식 재료를 구경하면서 변화를 보았다. 중국은 경제개방 이후에 예전부터 전해오던 정통요리가 대부분 사라지고, 코로나 이후에는 고급음식점이 문을 닫았다. 사람들은 아침 식사를 음식점에서 배달해 먹거나 누룽지탕을 주로 먹는다. 집에서는 볶음요리 하나만 해서 간단히 밥을 먹는다. 간장이 대량 생산되면서 조미료는 된장에서 간장으로 바뀌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 홍콩 요리가 대륙에 상륙하여 식생활과 식습관이 완전히 달라지고 조리법이 변해 맛이 달라졌다. 중국 정통요리점의 메뉴나 관광지 음식점 간판을 보면서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 조씨 석패방(사진:궁인창)
흥성고성 남문 쪽의 길거리(南大街, 延輝街)는 도로 공사가 일찍 끝나 길이 깨끗했다. 멀리서 걸어오는 중국 단체 관광객이 보였다. 고덕 지도를 열어 서 있는 곳의 위치를 파악하며 주변을 살폈다. 대수(祖大壽) 석패방과 돌로 만든 사자상이 웅장해 일행에게 패방의 유래를 설명했다. 85m 떨어진 곳에 암석을 조각한 패방이 하나 더 있었다.
▲ 민속학자 이윤선(사진:궁인창)
조대수 석패방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주유검(朱由检, 明思宗, 숭정제, 1628-1644年)이 당시 요서 지역을 조씨 가족이 4대를 거쳐 랴오닝 지역을 진압한 업적을 칭송하기 위해 숭정 4년 영원성(寧遠城) 남문(南門)과 종고루(鐘鼓樓) 사이의 연휘거리(延輝街) 안에 건립한 공덕패방(功德牌坊)이다. 두 개의 패방은 사촌 동생 조대락(祖大樂)의 석패방과 함께 조씨석방(祖氏石坊)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남쪽에 있는 것이 조대수 정공석패방(祖大壽 旌功石牌坊)이고, 북쪽에 있는 것을 조대락 정공석패방(祖大樂 旌功石牌坊)이다. 패방은 솜씨가 좋은 장인이 목조 구조를 모방하여 네 기둥 세 칸의 오층식으로 돌 조각과 글씨가 매우 아름답다. 구조가 아주 치밀하고 기세가 드높아 하늘을 찌를 듯하다.
▲ 옷가게(사진:궁인창)
석패방을 구경하는데 단체 관광객이 연휘문을 지나 들어왔다. 그들은 상점의 물건을 구경하며 흥정했다. 흥성고성 점포에는 현대적인 미용실이나 의상실은 보이지 않고 모자나 옷을 파는 가게만 있었다. 모자를 마네킹 위에 올려놓고 전시했다. 점포가 상하이 같은 대도시와 다르게 아주 순박했다.
▲ 석패방 글씨(사진:궁인창)
두도패방(頭道牌坊)은 흥성고성 동쪽에 있는 문루 이름이다. 이 문루는 명나라 선덕 5년(1430)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만든 목조 건축물이다. 관광객은 석패방에 새겨진 그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나갔다.
필자는 선양대학교 바이씬 교수가 발표한 논문 〈조대수 석패방의 석각 인물 그림 고찰〉을 통해 두 패방의 상세한 그림 내용과 조선 사신 이야기를 처음 접하고 놀랬다. 놀랜 것은 두 가지로 조대수의 아버지 조승훈과 조선 사신의 그림이었다.
▲ 조대수(祖大壽)(사진:바이두백과)
조대수(祖大壽, 1579~1656)의 본명은 천수(天壽)이고, 자는 복우(复宇)로 명말 청초의 명장인 부총병 조승훈(祖承训)의 아들이자 오삼계의 외삼촌으로 태어났다. 당시 총병은 장세작으로 조승훈 부총병은 만력 10년(1582)에 명나라 요양 부총병이 되고 좌군도독에 올랐다.
조승훈은 백성을 사랑해 재해를 입은 사찰과 성황당을 여러 차례 자금을 기부하여 수리했다. 만력 13년(1585)에 각화도(菊花岛)에 있는 조양사가 심하게 파괴된 것을 보고 자신의 재산으로 기부해 그 사찰을 중수했다. 그는 흥성(興城) 주변의 하천이 범람하여 수해를 입고 용왕묘가 훼손되자 용왕묘를 수리하고 지역 주민들을 동원해 강둑을 보수하여 수십 년 동안 재해를 당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는 몽골과 만주 부족의 준동에 대비하여 선양에 주둔하며 주변 부족의 동태를 항상 주시했다.
▲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사진:바이두백과)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자, 명나라 조정은 이를 조기에 해결하려고 군사 책임자로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등용한다. 송응창은 조선의 위태함을 알고 조승훈 부총병에게 선발대로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 조선에 침략한 일본군을 저지하라고 명한다. 조선에 파병된 조승훈 부총병은 선조를 만나 자주 대화하며 조일전쟁(壬辰倭亂)의 형세와 격퇴를 협의했다. 조승훈은 선조의 부탁을 받아들여 소속 부대가 미쳐 도착하지 않고 전열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평양성에 들어갔다가 일본 군대의 매복 작전에 걸려 군사 절반을 잃는 패배를 당하고 급히 압록강을 건너 요양으로 후퇴했다.
▲ 祖承训率兵图(사진:快懂百科)
당시 부총병은 막강한 명나라 군대가 들어와 이에 놀란 일본군이 일부 후퇴했다는 첩보를 그대로 믿고 있다가 크게 낭패를 보았다. 전쟁에는 항상 변수가 있는데 노련한 지휘관이 첩보를 안이하게 생각하고 공격을 결정하여 병력을 잃은 것이다.
▲ 평양성(사진;나무위키)
조승훈 부총병은 일본 군대의 전력이 생각보다 강력하고 조총을 소지하고 있으며 지휘관의 전술 운용 능력과 군사력이 만만치 않음을 명나라 총사령관인 경략 송응창에게 바로 보고했다. 긴급 보고를 접한 경략 송응창은 이여송(李如松, 1549~1598) 장군에게 5만 병력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에 급히 파병하도록 명령하고 군대를 긴급 파병했다.
▲ 이여송(李如松, 1549~1598)(사진:바이두백과)
선조 임금은 다시 조선에 건너온 부총병 조승훈에게 예를 갖추어 ‘총병’이라고 부르며 존경했다. 조승훈은 만력 25년(1597) 12월부터 다음 해 1월까지 치러진 울산 전투에도 참여하고 요양으로 돌아갔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