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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5.06.23. 15:51 (2025.06.23. 15:51)

【열하일기 8】수-당과 치열한 전쟁 수행 지역...김구,유상근 최흥식 한인애국단원 지휘해 잠입 중 발각

 
五二四 다롄 기차역 폭발사건
고구려 비사성을 지나가며 고구려가 수, 당과 치열하게 전쟁을 수행했던 당시를 회상하였다. 버스는 허강시와 다롄시를 잇는 G11(1,390km) 鶴大高速道路에 접어들어 오전에 방문한 뤼순 감옥박물관에서 나온 ‘다롄 기차역 폭발 미수 사건(五二四大连未遂爆炸案)’ 원문 기록을 읽었다.
【열하일기 8】수-당과 치열한 전쟁 수행 지역...김구,유상근 최흥식 한인애국단원 지휘해 잠입 중 발각
五二四 다롄 기차역 폭발사건
 
 
고구려 비사성을 지나가며 고구려가 수, 당과 치열하게 전쟁을 수행했던 당시를 회상하였다. 버스는 허강시와 다롄시를 잇는 G11(1,390km) 鶴大高速道路에 접어들어 오전에 방문한 뤼순 감옥박물관에서 나온 ‘다롄 기차역 폭발 미수 사건(五二四大连未遂爆炸案)’ 원문 기록을 읽었다.
 
뤼순 바이위산(白玉山) 관광지 서부, 룽허 하구의 합류 지점에는 독특한 모양의 러시아식 목조 건축물이 있다. 밀짚모자 모양의 타원형 첨탑에 깃털 모양의 작은 기와가 가득 매달려 있으며, 정교한 세부 조각은 이국적인 멋을 담고 있다. 러시아 스타일의 흰 벽과 녹색 창문이 독특하며, 이곳은 동북 철도 연선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유럽식 건축물 뤼순 기차역이다. 역 내에는 국내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유럽식 플랫폼이 있으며, 시적이고 그림 같은 정취가 가득하다.
 
 
▲ 다롄 기차역(사진:트립어드바이저)
 
 
1898년, 제정 러시아는 여단을 강제로 임대하여 군항 확장과 철도 부설을 시작했다. 뤼순 기차역 위치를 조사할 때 태양구에 건설하려고 하였으나, 군사 운송의 필요를 위해 바닷가로 선정하여 남만 철도 지선의 종착역으로 1903년 7월 14일에 운영을 시작했다. 1904년 러일전쟁 기간에 철도 운송이 중단되었으나, 1905년에 다시 개통되었다.
 
1907년 뤼순선은 협궤에서 표준궤로 변경되었다. 일본이 항복한 후, 소련군은 역을 다시 인수하여 중·소련 진영을 실행하였고, 1952년 12월에야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이 역을 인수했다. 뤼순 기차역은 건축사 연구에서 가치가 있어 1985년에 시급 문화재 보호 단위로 지정되었다.
 
일본제국은 1932년 이 사전을 “524 다롄 미수 폭발 사건(五二四大连未遂爆炸案)”이라고 규정했다. 폭발 사건 기획자는 한반도 출신 반일 독립운동 조직인 한인애국단의 지도자 김구로 본명은 김창수이다. 그는 조선 근대 역사 속의 동학당 농민 봉기에 참여한 적이 있다. 김구는 1919년 비밀리에 중국으로 건너가 1945년 70세의 나이로 귀국할 때까지 가정을 버리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며 험난한 과정을 거쳐 상하이와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조직하였다. 그는 자기의 이름을 백범(白凡)으로 바꾸었다.
 
 
【원문】
1932年大连火车站爆炸案曾被日本殖民当局称谓“五二四大连未遂爆炸案”。他的策划者是来自朝鲜半岛的反日独立运动组织——韩人爱国团的领导者金九先生。金九,原名金昌洙。早年曾参加过朝鲜近代历史中的“东学党”农民起义。1919年他秘密来到中国,直到1945年70岁时返回韩国,其间不乏舍家救国,冒死奋斗,艰险曲折之经历,先后于上海、重庆组建流亡中的大韩民国临时政府,并将自己的名字改为“白凡”。
 
 
▲ 다롄 기차역사진:트립어드바이저)
 
 
1931년 9·18 만주사변 이후, 중국 동북 3성의 함락은 한반도의 항일 독립투쟁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들고, 활동을 크게 제한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은 필승의 신념을 가지고 기세를 재정비하여 일본 침략자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기로 계획을 세웠다.
 
 
▲ 이봉창(사진:WONDIA)
 
 
김구 선생은 치밀한 계획을 준비하여 이봉창을 일본 도쿄에 비밀리에 파견했다. 파견 목적은 1932년 1월 8일 도쿄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일왕(昭和天皇)을 사쿠라다 문 (桜田門事件) 앞에서 폭탄으로 암살하기 위해서였다. 이봉창은 두 번째 마차에 일왕이 탄 것으로 생각하고 마미(麻尾) 수류탄 1개를 투척했다. 그러나 일왕 히로히토는 첫 번째 마차에 탑승해 위기를 모면했다.
 
이 사건은 조선과 중국에 항일 의식을 고취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이봉창은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도야타마형무소(豊多摩刑務所)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았다. 다음 해 독립투사 이봉창은 9월 16일 도쿄 대심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32년 10월 10일 동경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31세로 순국하였다.
 
 
▲ 상하이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사진:위키백과)
 
 
1932년 4월 29일, 김구는 윤봉길에게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 축하 행사인 천장절(天長節)과 제1차 상하이사변 승리 기념 대회에 일본인을 위장하여 참석하라고 지시했다. 윤봉길은 기미가요 1절이 끝날 무렵 주석단에서 5m 떨어진 지점까지 밀고 들어가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해군 중장 노무라(野村吉三郎), 육군 중장 우에다(植田謙吉), 주상하이 민단 행정위원장 가와바타 사다츠구(河端貞次)의 발밑에 물병 폭탄을 던져 폭탄이 바로 폭발했다.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204개의 파편을 맞아 12번 수술을 받고 요양하다 5월 26일 사망했다. 일본군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는 중상을 당하고, 노무라 중장은 오른쪽 눈을 상실했다. 민단 행정위원장 가와바타는 4월 30일에 사망했다.
 
주중 일본 공사 시게미쓰 마모르(1887~~1957)는 다리를 다쳐 10kg의 의족을 달고 생활하다 1945년 9월 2일 외무대신으로 미 해군 미주리 함정에서 맥아더 장군에게 일왕을 대신하여 항복문서에 서명하였다. 이 의거가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상하이 4·29 홍커우공원 폭발 투척 사건이다.
 
 
▲ 윤봉길의 의거현장 기념비(사진:위키백과)
 
 
1932년 국제연맹(이하 국련) 리튼(Lytton) 조사단은 일본의 만주 침략에 대한 조사를 위해 상하이를 방문해 3월 22일부터 26일까지 활동했다. 조사단은 경성을 방문하여 한인 애국단과 같은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했다. 국련 조사단이 다롄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정보가 한인 애국단에게 알려지면서, 한인 애국단은 이 기회를 이용해 일본제국 지휘관을 폭사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영국인 리튼이 이끄는 국련조사단이 선양 9.18사변 류탸오후 현지답사를 마치고 5월 하순 기차를 타고 다롄에 도착할 때 일본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本庄 繁, 1876~1945)), 만철 총재 우치다 야스야, 관동청 장관 야마오카 만노스케(山岡萬之助) 등 일본제국 군정 요원들이 역에 마중 나온다는 소식을 김구는 신문을 통해 알았다. 김구는 이것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오른팔로 여기며 소중히 여겼던 애국단의 주축인 유상근과 최흥식을 상하이에서 다롄으로 잠입시켜 비밀리에 폭발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유상근(1910~ )은 강원도 통천군 출신으로 일본제국 침략자의 노역이 싫어 14세 때 온 가족이 중국 길림 연길로 이주하였다. 청년은 19세에 집을 떠나 하얼빈과 다롄을 전전하다가 상하이에서 김구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생각이 트여 애국단에 가입하였다. 이후 김구 선생과 함께 민족의 독립 사업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자신의 원대한 뜻을 실천하기로 다짐했다.
 
 
▲ 유상근(자료:《도왜실기(屠倭實記)》
 
 
최흥식(崔興植)은 1910년 경성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그는 부유하고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으나, 후에 양친이 일찍 돌아가 매우 곤궁한 지경에 빠졌다. 그는 큰 뜻을 품고 의지가 굳건하며 매우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3,000만 동포를 도탄에서 구하기로 결심하고, 21세 때 배를 타고 다롄에서 상하이로 건너가 구국의 길을 찾았다. 하루는 김구가 유상근, 최흥식 두 사람에게 임무를 자세히 설명했다. 두 사람은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목표를 확실하게 정해 따로 움직였다.
 
한국독립당를 연구한 독립기념관 학예실장 조범래 박사는 “한인애국단은 1920년대 초 이후 계속된 임시정부의 대내외 곤경을 타개하고, 일제가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자행한 만보산 사건과 일본제국 군대에 의해 자행된 9․18사변(만주사변) 등으로 침체된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임시정부 국무회의를 거쳐 결성된 특무부대였다.”라고 논문에서 주장했다.
 
 
▲ 최흥식(崔興植)(자료:《도왜실기(屠倭實記)》
 
 
최흥식은 4월 1일 상하이에서 다롄으로 온 후, 일본 당국의 뤼순, 다롄에서의 군사 방어 상황을 세심하게 조사하고 선양, 창춘, 하얼빈 등지를 몰래 방문하여 기회를 모색했다. 그러나 기회가 오지 않아 다롄으로 돌아가 준비를 서두르며 리튼 국련 조사단의 도착을 기다렸다. 4일 다롄으로 건너간 유상근은 다롄 얼위마치의 만철(滿鐵) 직원 숙소인 한국인 방에 은거하며 사태의 변화를 기다렸다.
 
김구는 이성원과 이성발 형제를 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먼저 잉커우에 도착한 후 다롄으로 이동하도록 밀파했다. 두 사람은 폭발에 사용된 주전자 폭탄과 권총을 유상근에게 건네주었다. 유상근이 다롄에 도착한 후, 그들은 최흥식과 함께 여러 차례 기차역을 방문하여 폭발을 계획하고 실행할 구체적인 위치와 진퇴 경로를 찾았다. 그들은 만철에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을 통해 국련 조사단 일행이 5월 26일 19시 40분에 다롄역에 도착할 것을 알게 되어 예정대로 거사하기로 다짐했다. 동시에 그들은 기회를 놓칠 것을 고려하여, 거사 시간을 5월 30일 오전 9시 30분에 국제연맹 조사단이 대련을 떠날 때로 변경했다. 두 사람은 사건 발생 후 제 때에 빠져나오지 못할 경우, 소지하고 있던 권총으로 자살하여 일본 침략자의 포로가 되지 않기로 합의했다.
 
 
▲ 상하이 도착 리튼 조사단(사진:위키백과)
 
 
두 사람은 계획이 주도면밀하고 만사가 순조롭다고 생각하고 다롄우체국에서 상하이에 있는 김구 선생에게 암호 전보를 보냈다. 그런데 이 전보 내용의 글자가 이상함을 발견한 전보국 고등교육과 형사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일본 형사는 전문을 보낸 곳의 다롄경찰서로 전보를 보내 정찰을 진행했다. 일본군 경찰서는 상하이의 수신 주소에서 이것이 한국의 반일 독립운동 조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연락 지점임을 발견하고 상하이에 여러 명의 한인 애국단원이 잠복하여 비밀스러운 활동을 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당국은 크게 불안해하고 공포가 극에 달해 시 전역에 대해 대대적인 수색과 체포를 시작했다. 5월 24일 동틀 무렵, 당시 북대산통 5호의 한국인 김정순이 연 가게 안에서 최흥식은 일본 경찰과 헌병에 의해 체포되었고, 다음날 유상근, 이성원, 이성발 세 사람은 차례로 적의 마수에 걸려 유상근에게 숨겨져 있던 폭탄과 권총을 함께 압수당했다. 경찰은 유상근 최흥식 등 4명이 체포되자 이들을 뤼순 감옥으로 압송해 고문했다.
 
고문 앞에서 유상근과 최흥식 두 사람은 침착한 표정으로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최흥식은 "이번 계획의 실패에 대해 조금 아쉬울 뿐 개인적으로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한인애국단의 동지들은 이미 각지에 밀집해 있으며, 그들은 자신의 생사를 떠나 오로지 일본의 야심 거물들을 소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결코 이런 계획의 실행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유상근, 최흥식은 또 왜 다롄에서 폭파를 선택했느냐는 질문에 “다롄에서 거사하려는 것은 국제연맹 조사단의 코앞에서 동아시아 평화를 파괴하는 악마들에게 엄중한 응징을 가함으로써 조선 민족이 일본의 침략에도 굴하지 않았다는 것을 국제여론이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으며, 일본의 침략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중국 인민과 함께 하고 있다."라고 강변했다.
 
 
▲ 김구 著 《도왜실기(屠倭實記)》(사진:통문관)
 
 
김구(1876~1949) 선생은 한인애국단의 활동을 기술한 《도왜실기(屠倭實記)》를 출간했다. 이 책에는 그가 계획한 독립투쟁을 위한 모든 과정, 보도 사진을 105쪽의 책에 소상하게 담았다. 책을 읽으면서 놀란 것은 머리말(引言) 끝에 ‘대한민국 14년 12월 상순 김구’라고 당당하게 밝힌 부분이다. 조선왕조가 일본제국에 강제병합한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9월 11일 수립한 이후 김구는 당당하게 연호를 大韓民國으로 줄곧 사용했다.
 
 
▲ 이봉창 선언문(자료:《도왜실기(屠倭實記)》
 
 
《도왜실기(屠倭實記)》책은 서울역사박물관이나 인터넷에서 PDF파일로 볼 수 있다.
 
《金九先生小傳》, 《東京炸案之真相》, 《虹口炸案之真相》, 《大連炸案之真相》, 《蠻倭鐵蹄下之中韓苦景》 等5篇文章。附錄:《虹口案後之白色恐怖》, 《虹口案後之外人輿論》
 
유상근은 1932년 5월 24일 아옥요에서 체포되어 다롄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는 다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여순형무소로 이관된 뒤 1945년 8월 14일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無後先烈) 제단에 위패를 세웠다. 국가보훈부는 2018년 12월 이달의 독립투쟁가로 선정했다.
 
최흥식은 다롄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여순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다, 199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국가보훈부는 2022년 6월 이달의 독립투쟁가로 선정했다.
 
 
▲ 한인애국단 김구(사진:독립기념관)
 
 
천안 독립기념관에 한인애국단의 조직과 항일 독립투쟁에 관한 책자나 문서가 전시되어 있고 1975년 설립된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無後先烈) 제단에 위패를 모셨다. 무후선열(無後先烈) 제단은 독립투쟁에 앞장섰지만, 후손이 없거나 유해가 확인되지 않은 선열 유관순, 홍범도, 박열, 김익상, 김규식, 이상설, 이준, 이위종, 조소앙, 오동진. 엄항섭, 나석주, 등 134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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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