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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정보 수집가담항설의지식창고 2025.06.12. 16:47 (2025.06.12. 16:40)

장보고 유적 소고 (張保皐 遺蹟 小考)

 
鄭泰辰 (記念物課長), MUNHWAJAE Korean Journal of Cultural Heritage Studies, 1990.
장보고 유적 소고 (張保皐 遺蹟 小考)
鄭 泰 辰
(記念物課長)
 
 
一. 머리말
 
장보고 대사(張保皐大使)는 9세기 중엽 서남해상(西南海上)을 주름잡았던 희대(稀代)의 풍운아(風雲兒)이다. 당시 중국(中國) 당(唐)을 중심(中心)으로 한 서해(西海)와 일본(日本)을 거점(據點)으로 남해(南海)에 출몰하여 신라변방(新羅邊方)의 양민(良民)을 괴롭히던 해적(海賊)을 소탕하여 바다를 평온하게 하고, 신라(新羅), 당(唐), 일본간(日本間)의 무역권(貿易權)을 장악하여 명실공(名實共)히 해상왕(海上王)·무역왕(貿易王)으로 군림(君臨)하게 된다.
 
신라인(新羅人)인 장보고(張保皐)는 젊은 시절(時節) 당(唐)에 건너가 그의 특출한 활 솜씨와 무예로 강소성(江蘇省)에 본영(本營)을 둔 당군(唐軍)의 무영군군중소장(武寧軍軍中小獎)이 된다. 이때 그의 나이 30세였다. 그 당시 중국(中國) 산동성(山東省)을 중심(中心)으로 한 동해안(東海岸)에는 신라인(新羅人)들이 많이 건너가 곳곳에서 집단생활(集團生活)을 하고 있었다. 이를 신라방(新羅坊)이라 하였으며, 큰 집단(集團)에는 부분적(部分的)인 자치권(自治權)도 주어졌던 것 같다. 장보고(張保皐)는 이들 신라인(新羅人)을 보호(保護)할 필요(必要)성을 느끼고 또한 그 당시 해적(海賊)들에 의하여 납치되어 당(唐)에서 팔리고 있는 신라변방(新羅邊方)의 양민(良民)들을 보고 이를 막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당(唐)의 군생활(軍生活)을 그만두고 신라(新羅)로 귀국(歸國)하게 된다. 신라(新羅)에 돌아온 그는 흥덕왕(興德王)을 알견(謁見)하고 사졸(士卒) 1만인(萬人)으로써 청해(淸海)에 진(鎭)을 설치(設置)하여, 서남해(西南海)의 해적(海賊)을 소탕하고 해상무역권(海上貿易權)을 독점(獨占)하게 되니 그 세력(勢力)이 점차 확대(擴大)되어 중앙(中央)에 까지 미치게 되어 결국 왕권(王權)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민애왕(閔哀王)을 살해하고 수무왕(袖武王)을 옹립하는데 결정적인 공(功)을 세운 그는 문성왕(文聖王)때에 딸의 왕비(王妃) 납비문제(納妃問題)로 조정(朝廷)과 알력이 생겨 조정에서 은밀히 파견한 염장(閻長)에 의하여 암살되고 만다.
 
큰 꿈을 품고 고국(故國)에 돌아와 큰 일을하고 그 이름을 국내외(國內外)에 떨쳤건만 모반(謀叛)이란 굴레에 씌워 최후를 마친 그는 우리 역사에 그 진가(眞價)를 평가(評價)받지 못하고 천여년(千餘年)이 흘렀다.
 
장보고(張保皐)에 관한 기록(記錄)은 우리 역사(歷史)에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단편적으로 기록(記錄)되어 있으나 중국(中國)의 당서(唐書)나 일본(日本)의 사서(史書)에 더 상세한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으며 근년(近年)에 와서 외국인(外國人) 학자(學者)들에 의한 연구(硏究) 또한 활발하다. 일본승(日本僧) 원인(圓仁)의 “입당구법순예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를 연구(硏究)한 라이샤워교수는 그의 논문(論文)에서 “중국(中國) 속의 한국인(韓國人)”이란 제목으로 한 장(章)을 할애하여 그 당시 당(唐)나라 속의 신라인(新羅人)의 생활상과 특히 장보고(張保皐)에 대하여 자세히 쓰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근년(近年)에 와서 “장보고 대사해양경영사연구회(張保皐大使海洋經營史硏究會)” 중앙대학교내(中央大學校內) “중국연구소(中國硏究所)”등 학술단체(學術團體)와 언론기관(言論機關) 등에서 중국대륙(中國大陸)에 남긴 장보고(張保皐)의 유적(遺蹟)을 실지답사(實地踏査)하고 기념시설(紀念施設)을 하는 등 연구(硏究)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 글은 필자(筆者)가 지난 5月과 10月 두차례에 걸쳐 중국산동성영성시석도진(中國山東省榮成市石島鎭)에 있는 장보고 대사(張保皐大使)의 본원지지(本願之地)인 법화원(法華院) 구지(舊地)를 답사(踏査)하고, 장보고 대사기념비(張保皐大使紀念碑) 제막식(除幕式)과 영정(影幀) 봉안식(奉安式)에 참여(參與) 한 것을 계기로 그의 생애(生涯)와 업적(業績), 중국(中國)과 한국(韓國)에 남긴 발자취를 더듬어 봄으로써 장보고 대사(張保皐大使)의 위업(偉業)을 다시 한번에 상기 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현지답사(現地踏査)는 중국(中國)의 석도진(石島鎭)의 법화원구지(法華院舊地), 장가촌(張家村), 청해진(淸海鎭), 유산포(乳山浦), 등주(登洲)등지와 한국(韓國)의 전남완도청해진(全南莞島淸海進) 옛터인 장도(將島)를 둘러 보았으나 그의 활동 무대에 비하면 극히 미미한 부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기록(記錄)으로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원인(圓仁)의 “입당구법순예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라이샤워의 “엔닌의 중국(中國) 당(唐) 여행기(旅行記)” 당(唐)나라 시인(詩人) 두목(杜牧)의 ”장보고(張保皐)·정년전(鄭年傳)“ 기타(其他) 각종논문(各種論文)들을 참고(參考)하였다.
 
중국(中國)은 고대(古代)로부터 우리나라와 지리적(地理的)으로나 문화적(文化的)으로나 정치적(政治的)으로 가장 밀접(密接)한 관계(關係)에 있는 나라이면서 근세(近世)에 와서 가장 가깝고도 먼 나라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 선조(先祖)의 발자취가 도처에 숨쉬고 있으면서도, 독립운동(獨立運動)의 산 증거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으면서도 너무 먼 곳이였다. 그러나 이제 중국(中國)의 개방화정책(開放化政策)에 따라 죽(竹)의 장막(帳幕)도 걷히고 비교적 내왕(來往)도 쉽게 되었다. 인천항(仁川港)과 중국위해항간(中國威海港間)에는 정기연락선(定期連絡船)도 지난 9月 15日부터 취항하고 주(週) 2회(回) 운항하고 있다.
 
중국정부(中國政府)에서는 산동성지방정부(山東省地方政府)에 비자 발급권까지 위임하여 중국(中國)에 도착하면 위해항(威海港) 선상(船上)에서 비자를 직접 발급하고 있다. 물론 아직 국교(國交)가 수립(樹立)되지 않은 상태여서 자유롭게 가고 올 수는 없지마는 이와 같은 추세라면 멀지 않은 장래에 이 일도 이루어지리라 본다. 산동성(山東省)에는 우리 선조(先祖)들의 발자가 너무도 많다. 고대(古代)로부터 해외(海外)로 뻗쳤던 선인(先人)들의 기상을 찾고 역사(歷史)를 재 조명해 볼 시기가 왔다고 본다. 곳곳에 신라방구지(新羅坊舊地)가 있는가 하면 지명(地名) 또한 같은 곳이 많다. 산세(山勢)도 비슷하고 농작물(農作物)도 비슷하다. 사람의 생김새도 같다.
 
중국(中國)에는 56개(個)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중 우리 한민족(韓民族)(그들이 말하는 조선족(朝鮮族))이 200만(萬)에 달하고, 10위(位)안이라고 한다. 이 숫자는 19, 20세기에 들어가 이주(移住)한 우리동포의 숫자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기록상(記錄上)에 나타나는 1200년전(年前) 신라방(新羅坊)에 거주(居住)하던 우리나라 사람이나 그 전(前)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의 유민(流民)들의 후손(後孫)이 그 곳에 뿌리내리고 살고 있지 않겠는가. 물론 지금은 중국인화(中國人化) 되었겠지 마는 그 뿌리는 우리민족일 것이다. 장가촌(張家村), 김가촌(金家村)등을 방문해서 근원(根源)을 물어 보아도 3백년이전(以前) 일은 몰은다는 것이 공통점이었다. 장보고(張保皐)의 발자취를 찾는 것은 바로 우리민족의 발자취를 찾는 일이다.
 
 
二. 장보고(張保皐)의 생애(生涯)와 업적(業績)
 
1. 장보고(張保皐)의 출생(出生)과 신분(身分)
 
“삼국사기(三國史記)” 권(券)44, 열전(列傳) 장보고(張保皐)·정년전(鄭年傳)에 의하면 “신라인(新羅人)”이나 그의 향읍(鄕邑)과 부조(父祖)는 누군지 몰은다“고 하였다. 다만 ”이 두사람은 동향(同鄕)이고 특히 정년(鄭年)은 수영(水泳)을 잘한다“고 하였으며, 뒤에 문성왕(文聖王)때 장보고(張保皐)의 딸이 차비(次妃)로 천거 되었을 때에 그가 ”해도인(海島人)“이라는 점과 신분(身分)이 낮다는 점을 들어 반대한 것 등으로 볼 때 섬 출신임을 알수 있고 후에 정년(鄭年)이 당(唐)나라에서 어렵게 지낼 때 ”고향에 돌아가 장보고(張保皐)에게 의탁하겠다“하고 완도(莞島) 청해진(淸海鎭)으로 찾아 온 점등을 종합 해 볼 때 완도출신(莞島出身)임을 짐작 할수 있다. 그의 이름 또한 여러 가지로 사용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에는 모두 “궁복(弓福)으로 표기하고 있으나”열전(列傳)에는 장보고(張保皐)라 표기하고 있으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궁파(弓巴)”로 되어 있다. 또한 원인(圓仁)의 “입당구법순예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와 “적일본후기(績日本後記)”에는 장보고(張保皐)라고 기록(記錄)되어 있다.
 
그러나 “장씨연원보감(張氏淵源寶鑑)”에 의하여, 장보고(張保皐)의 아버지 백익(伯翼)은 중국인(中國人)이었는데 신라(新羅)에 귀화(歸化)하여 현재(現在)의 완도군(莞島郡) 장좌리(長佐里)에 살면서 서기(西記)801年(애장왕(哀莊王2年)에 장보고(張保皐)를 낳았는데 소년시절에는 궁복(弓福)또는 궁파(弓巴)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한다.
 
어쨌던 장보고(張保皐)의 어린시절이나 당(唐)으로 건너가 동기(動機)와 시기(時期)등에 관하여는 분명하지가 않다. 이는 당시(當時) 신라사회(新羅社會)의 계급의식과 혼란한 사회상에 원인이 있었던 것 같다.
 
 
2. 당(唐)나라에서의 활동(活動)
 
장보고(張保皐)의 재당활동(在唐活動)에 대하여는 당(唐)나라의 이름난 시인(詩人)인 두목(頭木)이 쓴 장보고전(張保皐傳)과 일본(日本)의 도당(渡唐) 유학승(留學僧) 원인(圓仁)이 쓴 “입당구법순예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등에 의하여 알 수 있다.
 
장보고(張保皐)의 도당동기(渡唐動機)나 당(唐)에서의 처음 생활(生活)에 대하여는 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그는 당군(唐軍)에 투신(投身)하여 무녕군군중소장(武寧軍軍中小將)이 된다. 두목(杜牧)은 장보고전(張保皐傳)에서 그때 그의 나이를 30세(歲)라고 했다. 변방국(邊方國)의 도래인(渡來人)이 군장교(軍將校)까지 된데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을 듯하다. 이는 그 당시 중국내(中國內)의 장보고(張保皐) 개인(個人)의 역량이 서로 작용 하였을 듯하다. 장보고(張保皐)는 소년시절(少年時節)부터 활을 잘 쏘고 창(槍)을 잡으면 대적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또한 수영(水泳)은 바다밑으로 50리(里)를 헤엄쳐 가도 목이 막히지 않는다는 정년(鄭年)에 버금 간다고 하였으니 그 용맹함을 가히 짐작할수 있겠다.
 
이런 사람이 당군(唐軍)에 투신(投身)하여 신망(信望)을 얻었으니 이국인(異國人)이지 마는 젊은 나이에 장교(將校)가 되었을 것이다.
 
그 당시 당(唐)의 국내사정(國內事情)은 어떠했는가, 산동지방(山東地方) 일대는 고구려(高句麗) 유민출신(流民出身)인 이정기일가(李正己一家)에 의하여 재배되어 왔으며 이정기(李正己)가 죽고 그의 손자 이사도(李師道)의 대(代)의 와서는 서주랄사(徐洲剌史)의 지배(支配)에 반기를 들어 결국 당조정(唐朝廷)의 지배에서 벗어 나려하고 있었다. 결국 당(唐)에서는 무력(武力)으로 이씨일가(李氏一家)를 토벌하게 된다. 이때 장보고(張保皐)가 그 토벌군의 주력부대(主力部隊)인 서주무녕군(徐洲武寧軍)에 투신(投身)하게되어 큰 공(功)을 세워 장교(將校)로 승진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장보고(張保皐)와 같이 당(唐)에 건너간 정년(鄭年)도 뒤따라 같은 무녕군(武寧軍)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된다. 두 사람의 용맹은 신화적(神話的)인 일화를 남긴 듯 하다. 이는 당(唐)의 이름난 시인(詩人)이 장보고(張保皐)·정년전(鄭年傳)을 직접 쓴 것을 보아도 알수 있다. 두목(杜牧)은 장보고(張保皐)를 직접 본적이 없고 서주(徐洲) 인근 양주(楊洲)에서 회남도절도사(淮南道節渡使)의 막료로 근무한 것이 서기 833年부터 2년간(年間)이니 그때는 장보고(張保皐)가 이미 당(唐)을 떠나 신라(新羅)로 귀국(歸國)하여 완도(莞島)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設置)한 이후이고 장보고(張保皐)는 귀국후(歸國後)에는 한번도 당(唐)에 간 기록(記錄)이 없다. 두목(杜牧)이 전기(傳記)를 쓴 연대(年代)는 그가 양주(楊洲) 근무를 마치고 중앙(中央)(장안(長安))으로 올라가 사관(史官)으로 근무한 서기 839年 이후로 보인다. 이는 전기(傳記)외 마지막 내용이 신라신무왕(新羅神武王) 즉위 연도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두목(杜牧)은 양주(楊洲)에서 들은 장보고(張保皐)의 용맹과 귀국후(歸國後) 청해진(淸海鎭)의 활동상황(活動狀況) 신라중앙정부(新羅中央政府)까지 뻗힌 그의 역량들을 사관(史官)의 위치(位置)에 있으면서 충분히 자료를 입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동기로 인하여 전기(傳記)를 쓰게되고 또한 당(唐)의 대시인(大詩人)이며 사관(史官)을 지낸 두목(杜牧)의 글이고 보니 당서(唐書)에도 장보고전(張保皐傳)을 신라편(新羅編)에 넣게 되었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그대로 인용(引用)하여 열전(列傳)에 넣은 것으로 본다.
 
당(唐)에서의 장보고(張保皐)의 활약에 대하여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신라방(新羅坊) 관리(管理)와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 건립(建立)이다. 법화원(法華院)에 대하여는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고, 신라방(新羅坊) 현황(現況)과 법화원(法華院) 건립배경(建立背景)부터 고찰(考察)해 보기로 한다. 일본승(日本僧) 원인(圓仁)의 기록(記錄)에 의하면 그 당시 당(唐)에서 신라인(新羅人)들의 집단거주지(集團居住地)는 초주부(楚洲府), 연수현(漣水縣), 적산촌(赤山村)등 3곳을 대표적(代表的)으로 들고 있다. 당무녕군(唐武寧軍)에 있으면서 장보고(張保皐)는 많은 신라인(新羅人)들이 이국(異國)에서 고초를 겪고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해적(海賊)들에 의하여 잡혀와 노예로 매매되는 애처롭고 불쌍한 전경등을 보았을 것이다.
 
이르 구(救)할 방법도 구상해 보았을 것이다. 이 방법(方法)은 동족(同族)들이 이국(異國)에서 살 수 있는 길은 힘을 합치는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모여사는 집단생활(集團生活)이 이루어 졌을 것이고 이것이 힘이 되어 신라방(新羅坊)으로 발전(發展)했던 것이다. 모이고 뭉치는데는 정신적지주(精神的支柱)가 있어야 한다. 이는 종교(宗敎)의 힘이 가장 강하다. 이러한 일련의 사유(事由)들이 장보고(張保皐)로 하여금 법화원(法華院)이란 사찰(寺刹)을 창건(創建)케 한 동기였을 것이다. 그러면 여러곳의 신라방(新羅坊)중에 하필이면 적산촌(赤山村)에 법화원(法華院)을 건립(建立)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수 있겠지마는 다른 곳에 비하면 적산촌(赤山村)은 당(唐)나라 사람이 적은 시골이고, 이곳이 당시 신라(新羅)와 뱃길이 가까운 곳이므로 뭉쳐 단결하여 살기에 적합했던 것 같다.
 
그러나 장보고(張保皐)가 언제 당무녕군(唐武寧軍)을 그만 두고 법화원(法華院)을 창건(創建)했는지에 대하여는 기록(記錄)이 전(傳)하지 않는다. 다만 당시의 그곳 정황과 완도(莞島)청해진(淸海鎭) 설치(設置)등을 감안해 볼 때 대략 서기 820년대(年代) 초기가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했던 이사도(李師道)의 세력을 토벌한 것이 서기 819년 이고 따라서 토벌주력부대가 감군(減軍)내지는 해체(解體)된 것이 820∼821년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장보고(張保皐)는 신라인(新羅人) 보호(保護)와 해상진출(海上進出)에 투신(投身)하였을 것으로 본다. 우선 군장교(軍將校)였던 배경과 무예의 힘으로 대내적(對內的)인 힘을 키우고 해상진출(海上進出)로 재부(財富)를 축적하여 정신적(精神的)인 지주(支柱)로 사찰(寺刹)을 건립(建立)하게 된 것이다. 그곳의 안정(安定)을 찾은 장보고(張保皐)는 해적(海賊)의 완전소탕과 해상무역(海上貿易)의 큰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신라(新羅)로 귀국(歸國)하게 된다. 역시 귀국(歸國)의 연대(年代)에 대하여도 기록(記錄)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장보고(張保皐)가 법화원(法華院)을 창건(創建)하고 해상진출(海上進出)의 힘을 키워 귀국(歸國)의 기반(基盤)을 확보(確保)할 수 있는 기간(其間)과 귀국(歸國)하여 세력(勢力)을 닦아 청해진(淸海鎭)을 설치(設置) 할 수 있는 준비기간(準備期間)을 감안 할 때 적어도 828년 청해진설치(淸海鎭設置) 2∼3年 전(前)인 825年 전후(前後)롤 비정 할수 있을 것이다.
 
 
3. 귀국후(歸國後)의 행적(行蹟)
 
귀국후(歸國後)의 장보고(張保皐)의 행적(行蹟)에 대하여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記錄)되어 있으며 또한 당(唐) 두목(杜牧)의 장보고전(張保皐傳)에도 기록(記錄)되어 있으나 그 내용(內容)에 있어서는 약간씩 차이가 있다.
 
먼저 그의 행적(行蹟)중 중요(重要)한 것은 청해진(淸海鎭) 설치(設置)이다. 흥덕왕(興德王)3年 4月에 “하사월(夏四月) 청해대사궁복(淸海大使弓福) 성장씨(姓張氏) (일명보고(一名保辜) 입당서주(入堂徐洲) 위군중소장(爲軍中小將) 후귀국알왕(後歸國謁王) 이졸만인전청해(以卒萬人鎭淸海) (청해금지완도(淸海今之莞島))”라 하여 서기(西紀)828年 장보고(張保皐)의 청해진(淸海鎭) 설진(設鎭)을 명기(名記)하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 장보고(張保皐)·정년전(鄭年傳)에는 후보비환국(後保鼻還國) 알대왕왈(謁大王曰) 편중국이오인위노비(偏中國以吾人爲奴婢) 원득진청해사적불득략인서거(願得鎭淸海使賊不得掠人西去)”라 하여 청해진(淸海鎭) 설치(設置) 목적(目的)을 신라(新羅)사람들이 노비로 붙들려가는 것을 막고자 함에 뚜렷이 두고 있다. 이와같이 장보고(張保皐)의 설진목적(設鎭目的)은 국토방위(國土防衛)의 군사목적(軍事目的) 보다는 백성(百姓)을 지키는 애민사상(愛民思想)에 기초를 두고 있음이 특색이다. 그리고 진장(鎭長)의 명칭을 대사(大使)라 함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대사(大使)란 신라관제(新羅官制)에는 처음 등장하는 명칭이다.
 
당시 신라변방(新羅邊方)에는 패강진(浿江鎭), 대곡진(大谷鎭), 당성진(唐城鎭), 혈구진(穴口鎭)등이 있었으며 진장(鎭長)은 두상대감(頭上大監), 군주(軍主), 진두(鎭頭)등의 명칭을 사용하고 품계(品階)는 육두품(六頭品)으로 한정되었으나 진골(眞骨)의 신분(身分)만이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지위(地位)에 출신(出身)이 분명(分明)하지 않은 해도인(海島人)인 장보고(張保皐)에게 진장(鎭長)의 지위를 부여하자니 위인설관(爲人設官)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의 위치(位置)가 그만큼 확고부동하였기에 이러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그가 당(唐)에서 닦은 확고한 기반을 토대로 귀국(歸國)하여서도 상당한 기간 토적(討賊)과 무역(貿易)으로 부(富)와 힘을 길은 결과로 얻은 것으로 본다. 라이샤워교수는 그의 저서 “엔닌의 당 여행기”에서 장보고 대사(張保皐大使)이 직함을 ‘The commissioner"하고 번역하여 “지방장관”또는 “총독”으로 격상하고 있다. 아무튼 청해진(淸海鎭)이 설치(設置)되고부터 서남해안(西南海岸)에 출몰하던 해적(海賊)은 완전히 소탕되어 당(唐)에서의 노비매매 사건은 완전히 없어졌다. 그리고 당(唐)·신라(新羅)·일본(日本間)의 무역을 독점하여 엄청난 부(富)와 힘을 축적하여 중앙정부(中央政府)에 까지 그 영향력이 미치게 되었다.
 
다음 장보고 대사(張保皐大使)의 신라왕위쟁탈전(新羅王位爭奪戰)에 끼친 영향과 불행(不幸)한 최후(最後)에 관(關)한 일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그 당시 신라왕실(新羅王室)의 왕위(王位)다툼에 관(關)한 말기현상(末期現狀)을 알아본다. 장보고(張保皐)가 청해진(淸海鎭)을 설치(設置)하여 해상무역(海上貿易)을 독점하고 해상왕국(海上王國)을 건설(建設)하여 번영을 누리고 있을 시기(時期)에 장보고(張保皐)의 건의(建議)를 받아들여 청해진(淸海鎭)을 개설(開設)하도록 했던 흥덕왕(興德王)이 후적자(後績者)없이 갑자기 서거(逝去)한다. 서기(西紀)836年의 일이다. 신라하대(新羅下代)에 들어와서는 왕위계승권자(王位繼承權者)가 없이 왕(王)이 돌아 갔을 때에는 상대등(上大等) 자리에 있는 자(者)가 왕위(王位)를 계승하는 것이 관례(慣例)로 되어 있었으므로 흥덕왕(興德王) 사후(死後)에는 그 당시 상대등(上大等)이 있던 김균정(金均貞)이 왕위(王位)에 오르는 것이 순리(順理)였다. 그러나 왕(王)의 조카인 시중(侍中) 김명(金明)이 하손(河飡) 이홍(利弘)과 짜고 김균정(金均貞)을 죽이고 김제륭(金悌隆)을 왕(王)에 즉위시키니 43대(代) 희강왕(僖康王)이다. 한편 김균정(金均貞)의 아들 우징(祐徵)은 왕위계승(王位繼承)싸움에 패하여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장보고(張保皐)의 청해진(淸海鎭)으로 들어가 몸을 의탁한다.
 
김명(金明)의 도움으로 왕위(王位)에 오른 희강왕(僖康王)은 실권을 장악한 김명(金明)의 핍박(逼迫)으로 서기(西紀)838年 1月에 자진(自盡)케 되니 다음 왕(王)은 김명(金明)이 스스로 즉위하여 신라(新羅) 제(弟)44대(代) 민애왕(閔哀王)이다. 청해진(淸海鎭)에서 이 소식을 들은 우징(佑徵)은 장보고(張保皐)에게 복수의 응원군을 간청하게 된다. 장보고(張保皐)는 정년(鄭年)으로 하여금 군사(軍事)를 내여 우징(佑徵)을 도우게 한다. 군사(軍事)를 모아 합류한 김양(金陽)과 합세 하여 경주(慶州)로 쳐 들어가 관애왕(關哀王)을 살해하고, 우징(祐徵)이 아버지 균정(均貞)의 원수를 갚고 즉위하니 이가 신라(新羅) 제(弟)45대(代) 신무왕(神武王)이다. 서기(西紀)839年 왕위(王位)에 오른 신무왕(神武王)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왕위(王位)에 오르게 도와준 장보고(張保皐)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고 식실(食實)2천호(千戶)를 봉한다. 그러나 신무왕(神武王)은 즉위한지 6개월(個月)만인 7月에 병으로 죽게되니 그 아들인 태자(太子) 경응(慶應)이 왕위(王位)를 계승하니 바로 제(弟)46대(代) 문성왕(文聖王)이다. 우징(祐徵)의 아들인 문성왕(文聖王)은 아버지 신무왕(神武王)이 청해진(淸海鎭) 장보고 대사(張保皐大使)에게 의탁하고 있을 때, 같이 따라갔던 사람이다. 문성왕(文聖王)은 839年 8月 장보고(張保皐)청해장군(淸海將軍)으로 봉하고 의복(衣服)을 하사한다. 어려울 때에 장보고(張保皐)에게 몸을 의탁하였고 그 군사(軍事)를 빌려 왕위(王位)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이에 대한 보답이 였을 것이다.
 
그리고 845年에는 장보고(張保皐)의 딸을 차비(次妃)로 삼고자 하였으나 중신(重臣)인 김양(金陽)등 신하(臣下)들이 장보고(張保皐)가 해도인(海島人)이며 신분(身分)이 보잘 것 없다하여 극구 반대 하므로 그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딸의 납비문제(納妃問題)로 인(因)하여 모반(謀叛)을 했다 하여 무주(武洲)사람 염장(閻長)을 파견하여 장보고(張保皐)를 살해한다. 이로써 장보고(張保皐)의 바다에 대한 큰 꿈은 깨어지고 만다. 서기(西紀)851년에는 드디어 청해진(淸海鎭)을 파하고 그곳 백성을 벽골군(碧骨郡)으로 이주(移住)까지 시켜 버린다. 신라(新羅)의 해상왕국(海上王國)은 영영 자취를 감추게 된다.
 
물론 장보고(張保皐)가 자기가 큰 힘을 이용하여 의도적으로 중앙정부(中央政府)에 까지 힘을 뻗쳤는지, 주관(主觀)싸움에 능동적으로 개입했는지, 딸의 납비문제(納妃問題)가 성사(成事)되지 않자 모반(謀叛)을 했는지에 대하여는 남은 기록(記錄) 만으로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記錄)을 볼 때 모반(謀叛)을 했다는 정확한 설명이 뚜렷하지 않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거진반(據鎭叛)”이라 했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욕모난(欲謀亂)”이라 하여 약간의 견해(見解)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양쪽 모두 모반(謀叛)의 핵심적인 행동인 군사활동(軍事活動)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는 점이다. 따라서 왕위계승(王位繼承)싸움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김양(金陽)과의 세력다툼에서 제거 된 것으로도 볼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장보고(張保皐)의 사망(死亡) 년대(年代)에 대하여 잠깐 언급하기로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문성왕(文聖王)조에는 장보고(張保皐)가 서기(西紀)846年 봄에 염장(閻長)에 의하여 암살 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日本)측 기록(記錄)인 일본사(日本史)에는 841年 즉 문성왕(文聖王) 3年 11月에 죽었다고 되어 있다. 이는 일본승(日本僧) 원인(圓仁)의 일기(日記)에서 845年 7月에 청해진(淸海鎭) 병마사(兵馬使) 최훈(崔暈)이 “국난(國難)”을 당해 중국(中國) 신라방(新羅坊)에 망명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고 “국난(國難)”을 장보고(張保皐) 암살을 뜻 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845년 이전(以前)에 그가 암살 당했을 것이라는 것과 김양(金陽)의 딸을 문성왕(文聖王)의 비(妃)로 들인 것이 842年이란 점을 들어 김양(金陽)이 장보고(張保皐)를 제거하고 자기 딸을 비(妃)로 들였을 것이라고 하여 장보고(張保皐)의 사망(死亡) 연대(年代)를 841年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정사(正史)인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뚜렷한 기록(記錄)에 다르는 것이 옳다고 본다.
 
 
三. 장보고(張保皐)의 유적(遺蹟)
 
장보고 대사(張保皐大使)의 유적(遺蹟)은 태어나서 당(唐)나라로 건너가기 전인 어린시절(時節) 유적(遺蹟)가 당(唐)나라에서 보낸 청년기(靑年期) 유적(遺蹟), 그리고 다시 신라(新羅)돌아와 청해진(淸海鎭)을 설치(設置)하여 해상활동(海上活動)을 하다가 생(生)을 마친 장년기(長年期) 유적(遺蹟)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러나 도당(渡唐) 하기전의 유적(遺蹟)은 그의 출생(出生)가 성장(成長) 과정(課程)이 베일에 싸여 있어 확인(確認) 할수 없다. 다만 현재의 완도군(莞島郡) 완도읍(莞島邑) 장좌리(長佐里)에서 태어났다는 기록(記錄)이 “장씨연원보감(張氏淵源寶鑑)”가 “해암입당순예행기(海菴入唐巡禮記)”라는 서책(書冊)에 전(傳)하고 있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등 사기(史記)에는 불명(不明)이라고 했다. 따라서 여기서는 장보고 대사(張保皐大使)가 당(唐)나라에 남긴 유적(遺蹟)과 신라(新羅)에 들어와 청해진시절(淸海鎭時節)에 남긴 유적(遺蹟)을 필자(筆者)가 답사(踏査)한 곳을 중심(中心)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중국내(中國內)에 장보고(張保皐) 유적(遺蹟)
 
장보고 대사(張保皐大使)가 중국대륙(中國大陸)에 남긴 유적(遺蹟)으로 가장 뚜렷하고 또한 중요(重要)한 유적(遺蹟)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을 들 수 있다. 법화원(法華院)은 현재(現在)의 중국(中國) 행정구역(行政區域)으로 산동성(山東省) 영성시(榮成市) 석도진(石島鎭) 서차촌(西車村)에 있다. 영성시(榮成市)는 산동반도(山東半島)의 최동단(最東端)에 위치(位置)하여 우리 나라와 가장 근접(近接)한 곳이며 북위 37도에 있어 기후여건이 우리 나라에 매우 흡사한 곳이다. 시(市)의 규모(規模)는 총면적(總面積) 1,563km²에 총인구(總人口)는 75만(萬) 4천명(千名)이며 관내(管內)에 24개진(個鎭)과 1,047개 행정촌(個行政村)을 거느리고 있다. 법화원(法華院)이 있는 석도진(石島鎭)은 우리 나라 읍(邑) 정도의 작은 도시이나 어업(漁業)으로 꽤 높은 소득(所得)을 얻고 있는 곳이다. 어획고가 중국(中國)에서 2번째라고 한다. 몇 년전 까지만 해도 개방(開放)되지 않은 곳이었으나 개방(開放)후부터 급격히 성장(成長)하여 도시(都市) 전체(全體)가 활력(活力)에 넘치고 있다. 석도진(石島鎭)에 이르는 길은 금년(今年) 9月 15日부터 개통(開通)이 된 우리 나라 인천항(仁川港)과 중국(中國)과의 정기여객선(定期旅客船)의 기착지(寄着地)인 위해시(威海市)에서 육로(陸路)로 약 3시간 거리이며 북경(北京)에서 기차로는 인태(姻台)까지 16시간이 소요되는 곳이다. 또한 북경(北京)이나 상해(上海)에서 청도(靑島)를 경유하는 방법(方法)도 있다. 항공기 사정이 가장 좋은 곳이다. 청도(靑島)는 독일인(獨逸人)이 식민지로 개척하여 지금도 도시전체가 독일풍이 깃들어 있는 공업도시(工業都市)다. 청도(靑島)에서는 석도진(石島鎭)까지 육로(陸路)로 약6시간이 걸리는 거리이다.
 
법화원(法華院)은 석도진(石島鎭)시가에서 약5km 떨어진 척산(尺山)(옛이름은 붉은바위산이라하여 적산(赤山)이 였음) 의 산(山)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즉 석도(石島)에서 영성시(榮成市)로 향하는 길에서 좌측으로 산길을 오르게 된다. 큰 도로는 잘 포장되어 있으나 산(山)을 오르는 길은 비포장 도로이며 길 폭도 좁은 편이다. 갈림길에는 옛 적산(赤山)포구가 있다. 지금은 항구가 석도(石島)로 옮겨졌지마는 옛날은 이 곳이 적산포구(赤山浦口)였다 한다. 포구(浦口)는 멀리 보이는 모야도가 자연(自然)방파제 역할을 하여 좋은 항구였던 것 같다. 좁은 산(山)길을 1.5km 가량 올라가면 산(山) 중턱에 척산(尺山)을 뒤로하고 남향(南向)하여 법화원(法華院)터가 자리잡고 있다.
 
앞에는 얕은 산(山)이 있어 남산(南山)이라 하고 사지(寺址)를 중심(中心)으로 하여 꽤 넓은 주변은 배, 복숭아등 과수원(果樹園)으로 형성(形成)되어 있고 150여호의 동네가 있다. 이곳을 화과산(花果山)동네라고도 한다. 봄에는 과수(果樹)의 꽃이 볼 만 하다고 한다. 조그마한 시내가 서(西)쪽 산에서 동(東)으로 흐르고 있다. 이를 차각하(車脚河)라고 한다.
 
이곳 법화원(法華院)은 창건년대(創建年代)는 확실하지 않으나, 장보고 대사(張保皐大使)가 당(唐)나라에서 군생활(軍生活)을 그만 두고 귀국(歸國)하기 전(前)까지 수년(數年)동안에 이룩한 것으로 생각된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과 더불어 세계(世界) 3대(大) 기행문(紀行文)의 하나인 일본승(日本僧) 원인(圓仁)이 쓴 “입당구법순예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따르면 원인(圓仁)(794∼864)이 법화원(法華院)에서 객승생활(客僧生活)을 하며 많은 은혜를 입은 것이 839년부터의 일이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일본승(日本僧) 원인(圓仁)과 그가 쓴 “입당구법순예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대하여 잠깐 언급한다. 원인(圓仁)은 당시(當時) 일본(日本) 수도승(修道僧)으로서 구법(求法)을 위하여 일본국(日本國) 사신(使臣)을 따라 당(唐)나라에 입국(入國)한다. 당(唐)의 선진문물(先進文物)과 구법순예(求法巡禮)를 하던 원인(圓仁)은 사신일행(使臣一行)의 귀국선(歸國船)을 놓치게 된다. (이는 당(唐)에 더 머무르기 위하여 원인(圓仁)이 고의적으로 배를 놓쳤다는 설(說)도 있음), 배를 놓친 원인일행(圓仁一行)은 당(唐)나라 법(法)에 의하여 불법체류자가 되어 고초를 겪게된다. 이때 원인(圓仁)이 찾아간 곳이 신라방(新羅坊)에 있는 법화원(法華院)이다. 이때가 839年 6月7日의 일이다. 이날 원인(圓仁)의 일기(日記)에 의하면 “도적산동변백선(到赤山東邊洦船).......즉(卽)문등현청녕향적산촌(門燈懸淸寧鄕赤山村), 산리유사(山裏有寺), 명적산법화원(名赤山法華院), 본장보고초소건야(本張保皐初所(建也)”라하여 “화(花)”자(字)와 “보고(寶高)”의 이름자는 다르나, 법화원(法華院)의 위치(位置)와 초창자(初創者)를 뚜렷이 하고 있다. 원인(圓仁)은 이후 법화원(法華院)에 머무르면서 신라인(新羅人)의 도움으로 당(唐)의 여행허가를 얻어 847年 역시 신라인(新羅人)이 내어준 선박(船舶)으로 귀국(歸國) 할 때까지 8년여를 당(唐)나라 객지(客地)를 순예(巡禮)하면서 구도(求道)행각을 하게 된다. 이 기간동안의 모든 사실을 일기(日記)로 적어 남긴 것이 “입당구법순예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이다. 이 기록(記錄)에 의하면 법화원(法華院)의 년장전(年庄田) 수익(收益)이 백미(白米) 5백석(白石)이나 된다는 것과, 승려가 30∼40명(名)이며, 하(夏),동(冬)강설내용(講說內容)등을 소상히 알 수 있으며 강설(講說)은 신라어(新羅語)로 하고 집회인원(集會人員)이 250인(人) 또는 200인(人)이라는 구체적인 숫자까지도 밝히고 있다. 또한 이 지역(地域)의 신라방(新羅坊)은 신라인(新羅人)에 의하여 자취(自炊)되고 있었음과 그 기구(機構)와 수장(首長) 이름까지 기록하고 있다.
 
원인(圓仁)이 장보고 대사(張保皐大使)를 얼마나 흠모하고 그 은혜를 고맙게 생각했는지를 원인(圓仁)의 편지 일부분을 소개함으로써 살펴본다.
 
이 편지는 현지 신라방(新羅坊) 자치책임자(自治責任者)인 장압아(張押衙)(영(詠)를 통(通)하여 청해진장대사(淸海鎭張大使)에게 보내는 인편편지(人便片紙)이다.
 
 
......생년말지봉(生年末祗奉). 구승고풍(久僧高風), 복증흠앙(伏增欽仰), 복유(伏惟), 대사존예(大使尊禮), 동지만복(動止萬福), 즉지원인(卽地圓仁), 요몽인덕(謠蒙人德), 무임근앙(无任槿仰), 원인(圓仁), 위과구정(爲果舊情), 엄체당경(淹滯唐境), 미신다신(微身多辛), 유유대사본원지지(留遊大使本願之地), 감경지외(感慶之外), 난이유언(難以幽言),...........
 
개성오년이월십칠일(開成午年二月十七日)
일본국구법승전등법사위원인장상(日本國求法僧傳燈法師位圓仁壯上)
청해진장대사(淸海鎭張大使) 마하근공(摩下謹空)
 
 
이를 요약(要約)하면
 
“저는 아직 대사님을 뵙지는 못하였습니다 마는 고매하신 명성은 익히 듣고 있습니다 엎드려 삼사 흠양 하옵니다. 중춘지절에 삼가 대사님의 존체만복 하심을 문안 드립니다. 저는 대사님의 큰 은혜를 입어 몸들 바를 몰으겠습니다. 저의 오랜 뜻을 이루기 위하여 당에 머무르고 있는 보잘 것 없는 이 몸은 다행히 대사께서 발원하신 이곳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참으로 감격하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렇게 장대사(張大使)의 본원지지(本願之地)인 법화원(法華院)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큰 은혜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후 법화원(法華院)은 신라(新羅)에서의 장보고 대사(張保皐大使) 세력의 몰락과 청해진(淸海鎭)의 폐쇄, 또한 당(唐)의 억불정책등으로 사찰자체(寺刹自體)도 폐사가 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지난 87年 일본인(日本人)과 중국학자(中國學者)들에 의하여 법화원지(法華院址)를 기록(記錄)과 현지조사(現地調査)를 통하여 확인하게 되었고, 일본인(日本人)들에 의하여 “적산법화원지(赤山法華院址)”라는 자연석비(自然石碑)가 세워지게 되었다. 과수원(果樹園)과 농가(農家)가 들어 섰던 이 곳을 찾아 법화원구지(法華院舊址)를 확인(確認)한 것까지는 좋은 일이었으나 일본인(日本人)들 손에 의하여 세원진 비(碑)에는 엉뚱하게도 법화원(法華院)이 한 객승(客僧)에 지나지 않았던 원인(圓仁)의 유적(遺蹟)으로 둔갑해 버린 것이다. 비문(碑文)에는 창건자(創建者)인 장보고 대사(張保皐大使)에 대하여는 한마디도 없이 “원인정사적(圓仁精舍蹟)”이라고 비(碑)를 세운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를 뒤에 안 우리 나라 학자(學者)들이 중국(中國) 관계당국(關係當局)을 설득 이해 시켜 사실을 바로잡은 “장보고 대사기념비(張保皐大使紀念碑)”를 세운 것은 크게 다행한 일이다. 입비(立碑) 경위와 내용에 대하여는 뒤에 상세히 적기로 한다.
 
다음은 장보고 대사(張保皐大使)와 직접관계(直接關係)가 있거나, 관계(關係)가 있는 것으로 확정(確定)되어 답사(踏査)한 몇곳에 대하여 고찰해 본다.
 
첫째로 원인(圓仁)의 여행기(旅行記)에 나오는 유산포(乳山浦)다. 유산포(乳山浦)는 석도진(石島鎭)에서 육로(陸路)로 약 2시간 거리 (약 90km)에 있는 포구(浦口)다.
 
이곳 역시 신라방(新羅坊)이 있던 곳으로서 당시(當時) 원인(圓仁)이 귀국(歸國)하면서 타고간 배를 수리 해준 곳이기도 하다. 바다에 뻗은 산맥(山脈)이 여자가 반듯하게 누운 자세 같다고 하여 옛날부터 “유산(乳山)”이라 불려 졌고 지명(地名)도 “유산현(乳山縣)”으로 된 곳이다. 포구(浦口) 앞이 산으로 싸여 자연방파제 역할을 하여 배가 드나들기 편리했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해안(海岸)이 퇴적되어 물이 빠지면 갯벌이 드러나는 곳으로 변했다. 유산포(乳山浦)가 있는 유산진(乳山鎭)은 유산현(乳山縣)의 소재지로서 인구(人口)가 62만명이라고 한다. 생업(生業)은 반농반어(半農半漁)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에는 금년(今年) 에 뜻있는 우리 나라 대학교수(大學敎授) 몇 분이 “유산포신라인구거유지(乳山浦新羅人舊居遺址)”라는 석비(石碑)를 세워 이곳이 옛날 신라방(新羅坊) 터임을 알려주고 있다.
 
두 번째로는 석도진내(石島鎭內)에 있는 “장가촌(張家村)”을 방문한 것이다. 장가촌(張家村)은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장씨(張氏) 집성촌(集成村)이다. 마을 어귀에 “장가촌(張家村)”이라는 석비(石碑)를 세워 놓고 마을 내(內)에는 “장가촌인민위원회(張家村人民委員會)”사무실이 있다. 이곳 촌장(村長)의 설명에 의하면 마을 인구(人口) 5000호중(戶中) 장씨(張氏)가 2000호(戶)가 넘는다고 한다. 마을의 역사를 알아보니, 1,600년대(年代)에 장씨(張氏)들이 이곳에 이주(移住)하여 집단(集團)을 이루고 살았다고 하며 그 이전(以前)에 대하여는 잘 알지 못한다고 한다. 어느 곳에서 왔느냐고 물으니 이 곳에서 약 40km 떨어진 “청해위(淸海衛)”란 곳에서 왔다는 전설(傳說)이 있다고만 할 뿐 그 이상은 알지 못한다. 기록(記錄)을 찾았더니, 문서(文書)들은 문화혁명(文化革命)때 모두 없애 버렸다고 하며, 단지 족보 한벌을 땅에 묻어 보관하고 있었다하여 보여준다. 보여주는 족보는 책이 아니고 큰 두루마리 족자에 사람그림과 이름을 같이 그리고 적은 특이한 것이다.
 
족보의 제일 윗대의 휘(諱)는 “량(良)”이고 배(配)는 “이(李)”씨(氏)로 되어 있고 아래대의 자손 이름이 대대(代代)로 나열되어 있다. 각종관복(各種官服)차림의 풍속도(風俗圖)의 인물도(人物圖)도 같이 그려져 있고 태양을 그린 듯한 상징 그림도 있다.
 
이 그림족보와 촌민(村民)들의 증언만으로는 이들이 장보고 대사(張保皐大使)와 직접관련(直接關聯)이 있는 후손(後孫)이라고 단정(斷定)하기는 어렵겠다. 더 많은 연구(硏究)가 필요(必要)할 것 같다.
 
다음은 “정해진(靖海鎭)”을 찾아보기로 했다. “정해진(靖海鎭)”은 “석도진(石島鎭)”과는 척산(尺山)을 가운데 두고 서로 반대편에 있는 역사 포구(浦口)다. 거리는 약 40km, 자동차로 1시간 정도 걸린다. 비포장도로이지마는 도로면이 잘 정비되어 있어 자동차가 많이 흔들리지는 않는다.
 
이곳을 찾게된 이유는 장가촌(張家村)의 선조(先祖)가 17 세기경에 정해진(靖海鎭)에서 석도(石島)로 옮겨 살았다고 하여, 행여나 정해진(靖海鎭)에서는 장씨(張氏)에 대한 무슨 실마리가 풀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진명(鎭名) 또한 완도청해진(莞島淸海鎭)과 발음이 비슷하여 어떤 관련이 있지 않나 하는 추정도 해 본 것이다.
 
시가지(市街地) 입구(入口)에 “정해위(靖海衛)”라고 새긴 석비(石碑)가 서있다. 이 비(碑)는 1989年 이 도시(都市)를 개방(開放)한 후에 세운 것이다. 원래(原來)의 구비(舊碑)는 문화혁명(文化革命)때 없애 버렸다고 한다. 후면(後面)의 비문(碑文) 내용(內容)을 보니, “서기(西紀) 976年의 구비(舊碑)에 의하면 이 곳에 사람이 살기는 북제(北帝)때부터 이고 송조(宋朝)때는 문등현(文登縣)관할의 보암군(普庵郡)이었으나 명조(明朝) 홍무(洪武) 31年(1398年)에 왜적(倭賊)을 막기 위하여 바다의 방어를 강화하고 위(衛)를 설치(設置)하여 이름을 “정해위(靖海衛)”라 하였다고 했으며, 1735年에는 문등현(文登縣)에 병합되었다가, 1956年 영성시관할(榮成市管轄)로 되었다”라는 내용(內容)이다.
 
촌장(村長)은 설명(說明)에 의하면 이곳에는 1,058호(戶)가 살고 있으며 3면이 바다로 되어 있어 주민(住民)의 대다수는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한다. 성씨(姓氏)는 30개(個)이며 그중 장씨(張氏)가 78호(戶)로 4번째 많은 숫자이다. 장씨(張氏)에 대한 아주 옛날의 역사는 잘 알지 못하나, 1300년경에 이곳으로 이주(移住)해 왔다고 한다. 물론 원래의 거주지에 대하여도 아는바가 없었다.
 
다만 명(明)나라 때에 장씨(張氏)가 천호(千戶)의 관직(官職)을 받다 해안(海岸)을 따라 성(城)을 쌓았다고 한다. 성(城)의 흔적은 지금도 일부가 남아 확인 할 수는 없었다.
 
산동반도(山東半島) 곳곳에는 신라방구지(新羅坊舊址)가 곳곳에 흩어져 있다고 하며 한반도(韓半島)와 관계(關係)되는 전설(傳說) 어린 곳 또한 많다고 한다.
 
장보고(張保皐)와 관련된 유적(遺蹟)도 무녕군시절(武寧軍時節)의 서주(徐洲)에 전설(傳說)로 내려오는 무용담(武勇談)얽힌 곳도 많겠지 마는 모두 역사(歷史)에 묻히고 말았다. 앞으로 기록(記錄)과 답사(踏査)를 통하여 유적(遺蹟)을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필자(筆者)가 답사(踏査)한 곳 중 장보고(張保皐)와 관련이 있음직한 몇 곳 만을 소개함에 지나지 않는다.
 
 
2. 한국내(韓國內)의 장보고유적(張保皐遺蹟)
 
국내(國內)의 장보고유적(張保皐遺蹟)은 완도(莞島)가 유일무이(唯一無二)하다. 사기(史記)의 기록(記錄)에 의하면 장보고(張保皐)가 당(唐)에서 돌아와 흥덕왕(興德王)을 배알(拜謁)한 것으로 되어있어 “흥덕왕삼년조(興德王三年條)에....후귀국알왕(後歸國謁王) 이졸만인청해(以卒萬人淸海).....”적어도 한번 이상은 경주(慶州)에 갔을 것이나 이에 대하여는 알 수가 없다. 후(後)에 왕권(王權)싸움에도 직접 출진(出陣)하지 않고 정년(鄭年)등 부하장졸(部下將卒)만 보낸 것으로 보아도 좀체로 완도(莞島) 청해진(淸海鎭)을 떠나지 않은 것 같다. 도당(渡唐)하기 전 어린 시절(時節) 성장과정(成長過程)도 베일에 쌓여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여기저기는 완도(莞島) 청해진(淸海鎭) 유적(遺蹟)만을 중심(中心)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완도군(莞島郡)은 전라남도(全羅南道) 최남단(最南端)에 위치(位置)한 행정구역(行政區域)으로서 군소재지(郡所在地)가 있는 완도(莞島)와 여러 개의 섬으로 구성(構成)되어 있으며 북(北)은 장흥(長興), 강진(康津), 해남군(海南郡)과 인접(隣接)해 있고 동(東)은 고흥(高興), 여천군(麗川郡) 의 여러 섬이 있으며 서(西)는 진도군(珍島郡)과 접(接)하고 남(南)은 남해(南海)에 떠있는 제주도(濟州道)의 추자군도(楸子群島)와 대(對)하고 있다.
 
장보고(張保皐)의 청해진(淸海鎭)이 설치(設置)되어 있던 장도(將島)는 완도읍(莞島邑)에서 1.5km떨어져 있는 조그마한 섬으로서 완도(莞島) 본도(本島)와는 170m 거리에 있으나 간조시(干潮時)에는 본섬과 갯벌로 연결(連結)되어 도보로 다닐수 있으며 만조시(滿潮時)에는 수심(水深)이 1.5m∼2m 정도가 된다. 섬의 크기는 31,673평(坪)이며, 제일 높은 곳이 해발 30m 정도이다.
 
섬 동쪽 해안(海岸)은 수심(水深)이 깊고 섬으로 오르는 지형도 매우 험(險)하나 남서(南西)쪽은 수심(水深)도 얕을 뿐만 아니라 지형(地形)도 완만하여 이곳에는 수채를 설치하였다. 수채의 흔적으로 30cm∼40cm 굵기의 나무말뚝을 40cm∼50cm 간격으로 박은 목책(木柵)으 뿌리부분이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다.
 
섬 전체는 동(東)쪽이 높고 서남(西南)이 낮은 경사면으로 되어있으며 둘레는 계단상(階段狀)으로 축성(築城)된 성지(城址)가 남아있는데 성(城)은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으로 나누어 졌으며, 외성(外城)은 진흙과 잔돌을 섞어 판축(版築)하여 쌓았고, 내성(內城)은 지형(地形)에 따라 단(段)을 이루어 축성(築城)했던 것으로 확인(確認)되었고, 섬에서는 신라(新羅) 하대(下代)의 와당편(瓦當片)과 토기편(土器片)들이 산재(散在)해 있고 섬 정상부(頂上部)에는 평탄한 지형을 이루어져있고 와당편(瓦當片)이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건물지(建物址)로 추정된다. 섬 정상 중앙의 동백나무 숲 속에는 정면(正面)3간(間), 측면(側面)1개(開)의 맛배집인 조그만한 사당(祠堂)옆에 맷돌 아랫짝이 한 개 있는데 이는 중국산동성(中國山東省)의 적산법화원지(赤山法華院址)에 남아 있는 맷돌가 태식(泰式)이 같아 당시 같은 문화(文化)의 유물(唯物)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장도유적(將島遺蹟)의 역사적(歷史的), 학술적(學術的) 고증(考證)에 대하여는 이 유적(遺蹟)이 828年 청해진(淸海鎭)이 설치(設置)되어 851年 장보고세력(張保皐勢力)과 함께 폐쇄된 후 1100여년(余年)동안 폐허로 있던 관계로 유적(遺蹟)의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던 것을 그동안 학계(學界)에서 장보고(張保皐)의 활동상황을 밝히기 위해 꾸준한 조사연구(調査硏究)를 진행(進行)하여 고고학적(考古學的) 측면(側面)과 문헌사적(文獻史的) 측면(側面)의 정밀조사(情密調査) 결과(結果) 장도(將島)가 당시(唐詩) 청해진병력(淸海鎭兵力)의 주둔장소(駐屯場所)임을 확인(確認)하게 되었고 1984年 9月 1日 사적(史蹟) 제(弟) 308호(號) “장도청해진유적(將島淸海鎭遺蹟)”으로 지정(指定)되게 된 것이다.
 
장도(將島)에 근거(根據)를 둔 청해진(淸海鎭)의 역사적의의(歷史的意義)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장도(將島)를 중심(中心)으로 한 완도(莞島)일대는 고대(古代)로부터 중국(中國)·한반도(韓半島)·일본(日本)을 잇는 해상교통(海上交通)의 요충지이다. 신라말(新羅末) 중앙정권(中央正權)의 세력(勢力)이 약화되어 변방(邊方)의 수비가 허술한 틈을 타서 해적(海賊)이 출몰하여 양민(良民)을 괴롭히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지방호적(地方豪族)의 힘이 강하게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이 세력(勢力)이 바로 장보고(張保皐)의 청해진설치(淸海鎭設置)의 동기이다. 따라서 청해진(淸海鎭)은 첫째로 지방호족세력(地方豪族勢力)의 중심(中心)이 되었고 두 번째로는 해적소탕과 국방(國防)의 전초기지로 활용되었고 셋째로는 위 두 가지를 발판으로 해상무역(海上貿易)을 독점(獨占)하여 해상왕국(海上王國)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 외에도 신라(新羅)에서는 이곳을 종교적(宗敎的)으로도 큰 비중(比重)을 둔 것 같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제사지(祭祀志)에 의하면 신라(新羅)에서 전국(全國) 명산대천(名山大川)에 지내던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중(小祀中) 중사(中祀)를 지내던 한곳이 바로 이곳 청사진(靑寫眞)이라고 기록(記錄)되어 있다. “........대사(大祀) 삼산(三山)..........중사(中祀) 오악(五惡)..........사진(四鎭)......사해(四海).....사독(四瀆) 동(東) 토지하(吐只河) 남(南) 황산하(黃山河), 서(西) 웅천하(熊川河) 북(北) 한산하(漢山河), 속리산(俗離山), 추심(推心), 상조음거서(上助音居西), 조서악(鳥西岳), 북형산성(北兄山城), 청해진(淸海鎭), 소사(小祀)......”
 
한편 851년 청해진(淸海鎭)의 혁파(革罷)와 더불어 장보고(張保皐)의 유산(遺産)이 완전히 없어져 버렸을까 하는 점이다. 도자기(陶磁器) 전문가(專門家)의 최근(最近)의 연구(硏究)에 의하면 우리 나라의 도자기제조기술(陶磁器製造技術) 도입을 9세기까지 올려 보는 경향이 있다. 젊은 시절 당(唐)에서 생활했던 장보고(張保皐)가 그때 벌써 중국(中國)에서는 보편화되었던 도자기(陶磁器)를 수입했을 것이고, 나아가 그 제조기법(製造技法)도 자연적(自然的)으로 도입했을 것이란 것이다. 따라서 당시(當時) 청해진(淸海鎭)과 인접한 강진대구면(康津大口面) 일대의 청자도요지(靑瓷陶窯址)가 장보고(張保皐)와 관련이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고려시대(高麗時代) 가장 양질(良質)의 청자(靑瓷)를 생산(生産)했던 강진청자요지(靑瓷陶窯址)를 장보고(張保皐)와 관련지우기는 아직 성급한 일이기는 하나 앞으로 풀어야 할 연구과제(硏究課題)라 할 것이다.
 
 
四. 장보고 대사(張保皐大使) 기념사업(記念事業) 현황(現況)
 
젊어서는 중국대륙(中國大陸)에서 변방소국민족(邊方小國民族)의 비애를 극복하고 용맹(勇猛)을 떨치고, 장년기(長年期)에는 고국(故國)에 돌아와 양민(良民)을 보호(保護)하고 국방(國防)을 튼튼히 하고 해상무역(海上貿易)으로 국부(國富)를 다지기까지 했으나, 본의 아니게 왕권(王權)싸움에 말려 불행(不幸)하게 끝을 맺게 된 장보고 대사(張保皐大使)는 역사적(歷史的)으로 빛을 보지 못하고 유적(遺蹟)마저 황폐를 면치 못하였다.
 
최근(最近)에 와서 청해진(淸海鎭) 옛 터는 사적(史蹟)으로 지정(指定)도고, 이역만리(異域萬里) 중국(中國)에 있는 관련유적(關聯遺蹟)은 몇몇 뜻있는 학자(學者)와 인사(人士)들에 의하여 조금씩 그 빛을 발하고 있다. 먼저 중국산동성영성시석도진소재(中國山東省榮成市石島鎭所在) 적산법화원지(赤山法華院址)에 대한 기념사업(記念事業) 현황(現況)을 살펴본다. 앞에서는 언급(言及)한바와 같이 법화원지(法華院址)에 대하여는 일본인(日本人) 학자(學者)들에 의하여 먼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 나라와는 국교(國交)가 없어 출입(出入)이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부득이 한일이었다. 1988年 일인(日人)들에 의하여 이곳을 일본승(日本僧) “원인(圓仁)”의 유적(遺蹟)이란 석비(石碑)가 세워지게 되고 영성시(榮成市) 당국에 의하여 농가(農家)와 계수원(界樹園)이 였던 사지(寺址)에 작은 규모나마 사리(私利)이 복원(復元)되기에 이르렀다.
 
그 뒤 이곳을 답사한 우리 나라 학자(學者)들에 의하여 사실(事實)이 왜곡된 것을 알게된 중국당국(中國當局)은 장보고 대사(張保皐大使)의 기념비(記念碑)를 법화원경내(法華院境內)에 세울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다.
 
이에 장보고 대사해양경영사연구회(張保皐大使海洋經營史硏究會)(회장(會長):손보기박사(孫寶基博士)에서는 장보고 대사기념사업회(張保皐大使記念事業會)의 후원으로 1980年 5月 1日 법화원(法華院)에 기념비(記念碑)를 건립(建立) 제막(除幕)했다. “장보고 대사 적산 법화원기”라는 제목의 기념비는 1m 높이의 석도홍화강암(石島紅花崗岩) 받침대 위에 가로 130cm 높이 90cm의 방형(方形) 흰 대리석으로 앞면에는 한글비문, 뒷면에는 한문비문을 새겼다. 이 비문에는 장대사(張大使)의 법화원창건기(法華院創建記)를 자세히 기록하고 당시 신라인(新羅人)들이 모여 살던 신라방(新羅坊)과 그 자치기관(自治機關)에 대하여 문헌고증을 통하여 충분히 기록하였다. 또한 영성시당국(榮成市當局)에서 건립(建立)한 “중건법화원비기(重建法華院碑記)”에도 신라인(新羅人) 장보고(張保皐)의 활약상과 일본승(日本僧) 원인(圓仁)과의 관계(關係)에 대하여 명확히 기록(記錄)하고 있다.
 
법화원(法華院) 복원(復元) 규모(規模)는 대웅보전(大雄寶殿) 1동(棟)과 대웅전(大雄殿) 앞 우우(右右)에 동(東)·서제(西齊) 2동(棟)의 건물(建物) 그리고 정문(正門), 찰사(察舍) 3동(棟)으로 되어 있으며 대웅전(大雄殿)은 정면(正面) 7간(間), 측면(側面) 4간(間) 8작지붕으로 약 50평 크기이며 동(東)·서(西) 양측에 있는 건물(建物)은 정면(正面) 3간(間) 측면(側面) 2간(間) 맛배지붕으로 약 20年 크기다 이 건물(建物)은 불전(佛殿)이 아니라 서(西)쪽 건물은 기념품(紀念品) 판매소, 동(東)쪽건물은 기념관(記念館)의 성격을 띄고 있다.
 
지난 5月 법화원(法華院) 중건(重建) 및 장대사기념비(張大使記念碑) 제막식(除幕式)에 참석(參席)했을 때 이 기념관(記念館)의 중앙(中央)에 일본승(日本僧) 원인(圓仁)의 영정(影幀)이 걸려 있음을 본 장대사해양경영사연구회원(張大使海洋經營史硏究會員) 및 한국측(韓國側) 방문객(訪問客) 일동은 주객(主客)이 바뀐 데 대하여 아연해 할 수밖에 없었다.
 
즉석(卽席)에서 일행(一行)은 영성시(榮成市) 당국(當局)에 장보고 대사영정태안(張保皐大使影幀泰安)을 제의(提議)했다. 제의(提議)를 받은 영성시중건법화원공작위원장(榮成市重建法華院工作委員長)은 장대사(張大使)의 영정(影幀)을 보내오면 잘 봉안(奉安)하겠다고 쾌히 승락했다. 그리고 한국측(韓國側)에서 법화원경내(法華院境內)에 장대사기념관건립(張大使記念館建立)을 희망(希望)하면 부지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이렇게하여 장대사영정봉안(張大使影幀奉安)을 추진(推進)한 장대사기념사업회(張大使記念事業會)는 장씨대종회(張氏大宗會)에서 참여(參與)하게되어 순조롭게 진행되어 월전(月田) 장우성화백(張遇聖畵伯)의 심혈(心血)을 기울인 노고(勞苦)로 훌륭한 영정(影幀)을 제작(製作)하였다. 영정(影幀)은 장군복(獎軍服) 차림의 전신상(全身像)으로 크기는 가로 115.5cm, 세로 206.5cm (액자크기는 가로 140cm 세로 232cm)의 대작(大作)이다. 이 영정(影幀)은 10月 8日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 현장(現場)에서 한국측(韓國側)에서 중국연구소장(中國硏究所長) 김성훈교수(金成勳敎授), 장씨대종회임원(張氏大宗會任員) 10명(名), 및 필자(筆者)가 참석(參席)하고 중국축(中國側)에서는 산동성(山東省) 및 영성시(榮成市) 관계관(關係官)이 참석(參席)하여 법화원주지(法華院住持)스님 집례(執禮)로 조촐하나마 엄숙하고 경건하게 봉안(奉安)하였다. 중국당국(中國當局)의 호의(好意)로 장대사영정(張大使影幀)은 건물중앙(建物中央)에 자리잡게 되고, 각종(各種) 문헌(文獻)에 나타나는 장대사(張大使)에 관(關)한 기록(記錄)의 영인(影印)판넬도 같이 전시(展示)하여 장대사(張大使)의 위업(偉業)을 이해(理解)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게 하였다.
 
앞으로 남은 일은 중국(中國)에서 제공(提供)하기로 한 법화원내(法華院內) 부지에 장보고 대사(張保皐大使)의 기념관(紀念館)을 건립(建立)하여 그 분의 위업(偉業)을 선양(宣揚)하는 일이다. 그리고 법화원지(法華院址)에 대한 전면적(全面的)인 발굴조사(發掘調査)를 실시(實施)하여 사리(私利)의 전모를 확인 할수 있는 학술조사(學術調査)에 우리 나라 학자(學者)가 참여(參與)하게 되길 바라는 일이다. 앞으로 양국간(兩國間)에 국교(國交)가 열리고 학술교류(學術交流)가 이루어지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중의 하나일 것이다.
 
완도청해진유적(莞島淸海鎭遺蹟)에 대하여는 1989년도(年度)부터 정부예산지원(政府豫算支援)으로 유적지내(遺蹟地內)의 토지(土地)를 매입하고 발굴조사작업(發掘調査作業)에 착수(着手)했다.
 
추정법화사지(推定法華寺址)와 청해진유지(淸海鎭遺址)인 장도(將島)의 발굴조사(發掘調査)가 본격적(本格的)으로 시행(施行)되어 당시(當時) 유적(遺蹟)의 실체(實體)가 확인(確認)도면 이를 정비(整備)하고 장보고 대사(張保皐大使)의 위업선양사업(偉業宣揚事業)도 전개(展開)하여 장대사(張大使)의 원대한 해양진출의 꿈을 자라나는 청소년(靑少年)에게 심어주는 교육도장(敎育道場)으로 조성(造成)해 나가야 할 것이다.
 
 
五. 맺음말
 
이상으로 장보고 대사(張保皐大使)의 생애(生涯)와 업적(業績), 중국대륙(中國大陸)과 한반도(韓半島)에 남긴 유적(遺蹟) 및 기념사업추진(紀念事業推進)에 대하여 개관(槪觀)해 보았다. 그러나 한반도(韓半島)에 태어나서 중국대륙(中國大陸)에 떨친 그분의 용맹(勇猛)이 지나, 사해(四海)를 주름잡던 해상활동(海上活動)의 큰 업적(業績)에 비하면 지극히 일부분을 소개한데 지나지 않는다.
 
장대사(張大使)의 활동무대(活動舞臺)가 중국(中國)이 많았고 그 유적(遺蹟)을 답사(踏査)하는데는 아직까지 많은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며 기록(記錄) 또한 빈약하기 짝이 없다. 중국시인(中國詩人)이 쓴 전기(傳記)와 일본인(日本人) 구법승(求法僧)이 쓴 여행기(旅行記)가 연구자료(硏究資料)의 전부(全部)라해도 과연이 아니다. 그분의 크고 원대한 꿈은 왕권(王權)싸움에 휘말려 한창 활동할 나이에 꺾였지마는 그 염원은 연연히 이어져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에 손꼽히는 조선국가(造船國家)로 부상(浮上)하고 세계 10대(大) 무역국가(貿易國家)로 발돋움하는 원천이 되었다고 본다.
 
장보고 대사(張保皐大使)에 대한 연구(硏究)는 그 동안 연구(硏究)된 각종(各種) 자료(資料)들을 토대로 유적조사(遺蹟調査)를 통하여 그 실체(實體)를 규명해야 할 것이다. 중국법화원(中國法華院)과 완도법화사지(莞島法華寺址)의 고고학적(考古學的)인 조사비교(調査比較), 청해진(淸海鎭)터의 발굴조사(發掘調査)를 통한 그 규모와 실체확인(實體確認), 장도(將島) 갯펄의 목책(木柵)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硏究)등이 앞으로의 과제(課題)이다.
 
중국전역(中國全域)에는 장보고유적(張保皐遺蹟) 외에도 우리 민족문화(民族文化)와 깊은 관련(關聯)이 있는 문화유적(文化遺蹟)이 곳곳에 많이 산재(散在)하여 있다. 집안(集安)에 있는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장군총(將軍塚), 그 외 고구려(高句麗) 고분(古墳)등 우리의 귀중(貴重)한 문화유적(文化遺蹟)이 있는가하면 산동반도(山東半島)주변과 양자강 이남에도 백제유민(百濟流民)의 근거지와 신라방(新羅坊) 유적(遺蹟)이 곳곳에 흩어져 있음이 그 동안 관심(關心)있는 학자(學者)들의 현지조사(現地調査)결과 속속 밝혀지고 있다. 지리적(地理的)으로나 역사적(歷史的)으로 중국대륙(中國大陸)과는 옛날부터 밀접한 관계(關係)를 갖고 문화적(文化的)영향을 받아온 우리 나라는 중국문화(中國文化)를 수용하여 독창적(獨創的)인 고유문화(固有文化)를 창조(創造)하여왔으며 대륙(大陸)에 까지 우리 문화(文化)의 영향을 끼치게 하였던 것이다.
 
이제 닫혔던 죽(竹)의 장막(帳幕)도 걷히고 국교수립(國交樹立)도 눈앞에 두고 있다. 시야(視野)를 넓혀 이국(異國)에 방치된 우리 문화유적(文化遺蹟)을 찾아 가꾸어 국위를 선양하는데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參考文獻)
• 삼국사기(三國史記) (김부식저(金富軾著) 김종권역(金種權譯))
• 삼국유사(三國遺事) (일연저(一然著) 이병도역(李丙燾譯)
• 입당구법순예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원인선(圓仁選)
• ENNIN'S Travls in T'ang China (E.O.Reischau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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