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 사기 385강 강의자료 요약 (2025.5.22)
2025년 5월 22일 강의 장면 - 서울시 50+센터 중부캠퍼스(마포구 공덕동)
1. 唐詩 300首
1) 당시 제목: “검객” 2) 당시 중국어 발음 尋 隱 者 不 遇 - 賈 島 松 | 下 | 問 | 童 | 子 | sōng | xià | wèn | tóng | zǐ | 言 | 師 | 採 | 藥 | 去 | yán | shī | cǎi | yào | qù | 只 | 在 | 此 | 山 | 中 | zhǐ | zài | cǐ | shān | zhōng | 雲 | 深 | 不 | 知 | 處 | yún | shēn | bù | zhī | chù |
3) 작자: 가도(賈島) 385강 자료 참조
김영환교수의 동양고전아카데미 제334강(2023,12,14) 강의 교안
*《史記》〈周本紀〉 注釋 1. 豊 - 甲骨文, 원래는 제사용 그릇에 물건(玉, 식물의 싹)이 가득 담겨있는 모양, 점차 풍족, 크다(대)의 의미, 豐은 고자 ; 封(丰)과도 통용하는데, 封은 원래는 토지 경계에 표시로 심는 초목 ; 첫째, 풍(feng)으로 읽으면, 豐과 동일, 둘째, 예(li)로 읽으면, 제사 때 사용하는 그릇(古代祭祀用의 禮器) 《說文解字》〈豊部〉「行禮之器也」 예를 행하는 그릇이다.
1) 많다 2) 멋진 용모
3) 초목 무성한, 《戰國策》〈趙策〉「甘露降, 風雨時至, 農夫登, 年穀豊盈, 衆人喜之」 단비가 내리고 비바람이 때 맞추어 오니 농부가 논 밭에 나가고, 해마다 곡식이 풍성히 자라니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좋아 한다.
4) 周나라 수도 명칭, 《尙書》〈武成〉「王來自商,至于豊」 무왕이 상나라에서 와서 수도 풍에 이르렀다.
5) 크다, 《後漢書》〈胡廣傳〉「是以臣竭其忠,君豊其寵。擧不失德,下忘其死」 이로 인해서 신하인 나는 충성을 다했고, 임금은 나에게 총애를 크게 베풀어 주셨고, 내가 천거한인물들도 덕을 잃지 않았고, 신하들도 자신의 죽음을 돌보지 않았다.
* 호광(胡廣) (서기 91~172) 호광은 자가 백시(伯始)이며, 후한 중기를 대표하는 관료였다. 남군 화용(南郡 華容) 출신으로 태어난 그는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중앙 관계로 진출하였다.
- 관료로서의 성취 호광은 안제(安帝) 시대에 "천하제일"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승진의 길을 걸었다. 그는 5경(卿), 7상(相), 3공(公) 등 최고위 관직을 두루 거쳤다. 특히 주목할 점은 그가 여섯 황제(安帝~靈帝)를 섬기며 31년간 재상 자리를 지켰다는 것이다. 이는 후한 역사상 매우 드문 기록으로, 그의 정치적 생존력과 능력을 보여준다.
- 성품과 정치 철학 호광은 온화하고 신중하며 겸손하고 검소한 성품으로 유명하였다. "천하중용유호광(天下中庸有胡廣)", 즉 "천하의 중용은 호광에게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중용과 타협의 정치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만 가지 일이 풀리지 않으면 호광에게 물어라"고 할 정도로 그의 능력을 인정하였다.
- 평가와 비판 호광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이다. 생전에는 뛰어난 능력과 중용의 정치로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강직하게 직언하는 풍모(謇直之風)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후세에는 더욱 비판적인 시각이 나타났는데, 권력자에게 영합하여 자기 보전만을 추구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 사후의 영예 호광은 사후에 "문공후(文恭侯)"에 봉해졌으며, 후한 말기 명신의 한 사람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의 삶은 중국 역사상 관료 정치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로 여겨진다.
- 호광(胡廣)의 중용과 리더십 후한 중기, 남국 화용의 촌로(村吏) 출신 호광(胡廣)은 학문을 애호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었으나 효행과 재능이 알려져 안제 때(漢安帝, 재위 107–125)에 명현(孝廉)으로 천거되었고, 문장에도 밝아 “조정에서 최고”라는 평을 들었다. 대사농, 사도 등 실무 관직을 거치는 동안 그는 늘 중용(中庸)의 덕목을 가슴에 품었다. 황제가 여색과 측근 환관의 유혹에 빠져도, 혹은 왕조를 흔들려는 야심가가 권력을 휘두를 때마다, 호광은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때로는 비굴하리만큼 조심스레 처신했다. 조정 회의가 끝난 저녁, 술잔 너머로 권력층의 속내를 살펴야 했던 호광은 언제나 신중했다. 그는 경솔히 돌출 행동을 취했다가 정권의 눈 밖에 날 위기에 처하는 대신, 한 걸음 물러나 중도의 길을 택했다. 예컨대 147년, 양기(梁冀) 일당이 어린 황제(애제)를 독살하고 자신들이 선택한 황후의 사촌 유지를 즉위 시키려 하자, 당시 호광은 고명(高名)의 예(禮)를 중시하며 양기에게 굴복했다. 이 회의에는 사도(司徒) 이고(李固)와 사공(司空) 조개(趙戒)가 청년 유지(劉蒜)를 옹립할 것을 주장했으나, 호광은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결국 이공과 두교(杜喬)는 양기 일파의 사주로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 직후 호광은 태사(太師)로 승진했지만, 그는 조용히 벼슬을 내려놓기도 했다. 권력의 황금을 탐하지 않고 중도를 지키는 법을 택했다.
1. 삼공 시절의 중용 실천과 당고·이고 사건 황제가 바뀌고 안팎의 권력 구도가 잦아들 무렵, 호광은 삼공(三公)에 잇달아 발탁되었다. 우선 159년 양기 정권이 멸망하자, 환제(桓帝)는 호광을 다시 대사농에서 시작하여 순차적으로 사도, 태사, 태위에 올려 국정을 맡겼다. 그러나 태위로 있을 때 암흑과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 166년, 당고의 옥(黨錮之禍)이라 불리는 대규모 유학자 탄압이 일어났다. 당시 환관들이 부패를 일삼자 낙양의 유생과 선비들이 분노한 것이다. 호광의 관점에서 이 일련의 사태는 단지 힘겨루기에 불과했다. 설령 백성들이 굶주린다 호소해도 그는 “조상님께서 그렇게 하길 원했다”는 답을 되풀이했다. 스승과 같은 예법과 관례를 앞세워 선비들의 문제제기를 얼버무린 결과, 사람들은 호광을 비웃는 속담을 남겼다. “아무 일이나 모를 땐 博始(호광의 자)를 물어라. 중용(中庸)이란 바로 胡公에게 있으니.” 말하자면 “만사(萬事) 모를 땐 박시에게 물어라, 권력의 끈은 호공(胡公)이 쥐고 있다”는 우스갯소리다. 비판적인 시각에서는 이를 두고 그가 권세에 아부하며 대세에 편승하는 기회주의자라 했으나, 호광 본인은 다만 “위태로운 정국에서 책임을 걸고 목숨을 걸 순 없다”고 생각했다. 한편 168년 환제가 죽고 영제가 즉위한 직후, 외척(외가친척)과 환관 양쪽에서 숙청 전쟁이 벌어졌다. 외척 도무(竇武)·진번(陳蕃) 일파가 환관에게 제거되자, 젊은 영제(靈帝)는 사후에 호광을 태부(太傅)로 삼아 상서령을 겸임 시켰다. 이는 호광이 권력 다툼에서 일견 중립의 조정자 역할을 인정받았다는 뜻이었다. 그가 여섯 번이나 낙마했지만 번번이 다시 등용된 것은, 실상 누구든 그를 지목해 책임을 묻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주변에선 “胡公이 열심히 일해서 간사함을 키웠다”는 냉소도 있었지만, 호광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철저히 실제 행정과 조정(調停)을 통한 국정 안정이었다.
2. 중용은 기회주의인가 실용주의인가? 역사가는 호광을 두고 “권력층에 아부하며 조율하는 중용의 화신”이라 평했다. 실제로 그는 겉으로는 온화한 말투로 만민을 달랬고, 자신이 견지한 원칙은 “舌以柔存(혀는 부드러워야 살아남는다)”라는 오래된 격언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선택과 망설임 이면에는 정치 생존의 냉혹한 계산도 엿보인다. 예를 들어 146년 선제(宣帝) 시절 양기가 새 황제 즉위를 주도할 때, 호광이 청년 유지 대신 양기의 사촌을 지지하지 않은 건 양기와 정면 충돌을 피하려는 전략이었다. 또 166년 당고 사건에서 굶주림을 호소한 백성에게 조상 뜻 운운으로 얼버무린 것도, 굶주림 그 자체를 해결할 생각보다 당시 위태로운 왕조의 틀이 무너지지 않도록 애쓴 결과였다. 따라서 호광의 정치행보를 판단할 때, 그저 무원칙한 기회주의자로만 단정할 수 없다. 그는 오히려 제국의 유지와 질서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판단하였고, 개인의 곧은 기개보다는 체제의 안정을 더 우선했다. 필요할 때는 환관 편에 서기도, 때로는 외척의 권위에 협력하기도 했다. 다만 언제나 “중용(中庸)”의 미덕을 내세웠기에, 누가 보더라도 치우침이 없고 공평해 보인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당시로서는 일종의 실용주의적 신중 함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군신(君臣)과 환관 간의 극심한 갈등을 그대로 두었다는 점에서는 도덕적 책임을 회피한 측면이 있다. 결국 호광은 개인 생존과 국가 안정, 도덕적 명분 사이에서 최대한 균형을 잡으려 한 인물이었다.
3. 현대 리더십에의 함의 호광의 생애는 오늘날에도 흥미로운 시사점을 준다. 첫째, 정치·조직의 혼란기 속에서 리더는 어떻게 생존책과 책임을 조율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위기에 직면했을 때, 호광은 늘 말보다 조율과 중재를 택했다. 이는 리더가 명확한 입장 피력보다도 우선 적대 세력 간 긴장을 완화하고, 조직의 큰 흐름을 지키는 데 집중했음을 뜻한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동시에 대의(大義)를 외면했다는 비판도 부른다. 결과적으로 그는 “죽더라도 거짓된 입장 표명은 하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목숨은 부지했지만, 그로 인해 어려움에 처한 부하들에게 적극적인 해결책을 내주지 못했다.
둘째, 호광은 협상과 조율 중심의 리더십이란 무엇인지 실례를 보여준다. 그는 대내외 각 축이 대립할 때마다 중간에 서서 이해관계를 조율하며 상황을 관리했다. 강한 개혁이나 혁신보다는 기존 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점진적 개선을 선호했다. 현대 정치·행정·기업 조직에서도, 다양한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이런 협상형 리더십이 필요할 수 있다. 물론 모든 갈등 상황에 중도적 입장이 해답인 것은 아니지만, 호광의 사례는 강경책 대신 타협의 여지를 찾는 리더십이 위기를 어느 정도 완충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셋째, 호광의 태도는 개인의 도덕성 대 조직 내 실용적 판단 사이의 균형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개인적 정직과 의분(義憤)을 억누르고 체제 유지에 부합하는 실용적 선택을 해왔다. 현대 조직에서 흔히 요구되는 덕목은 때로 보편적 윤리보다 조직의 목표 달성을 위한 현실적 판단일 수 있다. 호광은 도덕적 요구와 실리적 판단 사이에서 철저히 타협을 선택했다. 이것은 오늘날 리더에게도 마찬가지 질문을 던진다. 즉, “한 나라나 조직을 책임지는 위치라면, 개인의 양심과 정의보다 시스템의 지속 가능성을 더 중시해야 하는가?”라는 고민이다. 이처럼 호광은 리더에게 도덕적 원칙과 조직 이익의 충돌에서 중용(中庸)을 이루려 노력한 사례로 볼 수 있으며, 그 균형점을 찾아가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로 남는다.
결국 호광은 학문적 이상과 현실 정치 사이의 딜레마를 극도로 체득한 인물이었다. 그의 삶은 때로 비판을 받았으나, 공교롭게도 그의 중용적 덕목과 실용주의적 처세가 고대 중국 정치사의 격동기를 넘기는 데 역할을 하였다. 현대의 정치·행정·조직 리더십에서도, 위기 속에서 책임감과 생존 전략, 원칙과 타협의 균형을 고민해야 하는 점은 호광의 이야기가 던지는 교훈이라 할 수 있다.
- 참고자료: 『후한서』胡廣傳, Wikipedia Emperor Huan of Han, Hong Kong Legislative Council
* 中庸= 大中至正= 允執厥中
* 호광이 벼슬한 것을 5경7상3공이라고 하는데 그 명칭은 다음과 같습니다. 1. 5卿 1) 대사마(大司馬): 군사적 책임을 지는 고위 관직 2) 대사도(大司徒): 정치적 책임을 지는 고위 관직 3) 대사공(大司空): 재정 및 행정 책임을 지는 고위 관직 4) 대부(大夫): 고위 귀족 또는 관료 5) 상서(尚書): 정부의 행정 관리를 담당하는 직책
2. 7相 1) 상서(尚書): 정부의 행정 관리를 담당하는 직책 2) 태사(太史): 역사 기록을 담당하는 관직 3) 태부(太傅): 황제의 교육을 담당하는 직책 4) 태위(太尉): 군사적 책임을 지는 고위 관직 5) 대부(大夫): 고위 귀족 또는 관료 6) 장사(長史): 승상(丞相) 및 태위(太尉)의 속관으로, 그들의 업무를 보조하는 역할 7) 광록훈(光祿勳): 황실과 궁중 제관의 감시 및 통솔을 담당하는 직책
3. 3公 ~황제 다음의 명예직입니다. 1) 사마(司馬) 2) 사도(大司徒) 3) 사공(司空)
6) 대량의, 《荀子》〈君道〉「上好貪利, 則臣下百吏乘是而後豊取刻與, 以無度取于民」 임금이 이익을 탐하기 좋아하면 그러면 신하와 수많은 관료들이 이 기회를 틈타, 그런 이후에 많이 착취하고 적게(刻)주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서 백성들로부터 착취하는데 한계가 없게 된다.
7) 증가하다, 강대하다. 《左傳》哀公元年「今吳不如過,而越大于少康,或將豊之,不亦難乎?」 지금 오나라는 과나라에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월나라는 하 나라를 중흥하게 만든 제6대왕 소강왕보다 세력이 더 크다, 만약(或) 장차 월나라가 세력이 증가하면 어렵지 않겠는가?
《後漢書》〈班固傳〉「樹中天之華闕,豊冠山之朱堂」 하늘에 닿을 듯한 화려한 궁궐과 산 꼭대기(冠上)에 붉은 색 궁궐을 많이 세웠다(樹).
8) 충족하다, 《國語》〈晉語一〉「義以生利,利以豊民」 의로움으로 백성의 이익을 만들어 주고, 이익으로서 백성을 풍족하게 해 준다.
蔡邕, 〈釋誨〉「天隆其祐,主豊其祿」 하늘이 그 보살핌을 풍성히 해주고, 임금도 그 복록이 충족하게 되었다.
* 김영환교수님의 학문 계보
* 동양고전아카데미의 소개
* 김영환교수님의 호에 대한 설명
김영환교수의 동양고전아카데미 제335강(2023,12,21) 강의 교안
* 논어 공부 방법 1단계 ~ 문장을 읽고 해석한다. 2단계 ~ 숨은 뜻을 찾아낸다 3단계 ~ 다른 해석과 비교 분석한 후 나의 해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論語》〈里仁〉
4-07.子曰:人之過也,各于其黨。觀過,斯知仁矣。 사람의 잘못은 각각 그가 속한 유형(군자와 소인의 유형)에 따라 다르다. 잘못을 상세히 관찰하면, 그 사람의 인덕을 알 수 있다.
* 주석 1) 過 - 잘못; 2) 各 - 각각 3) 黨 - 유형, 종류(孔安國, 皇侃은 類别, 즉 군자와 소인부류), 집단 4) 觀 - 상세히 관찰하다(황새雚-3長(부리, 목, 다리)+見)
* 장경조훼(長頸鳥喙) ~ 황새관상
장경조훼(長頸鳥喙)는 "긴 목에 새의 부리"라는 뜻으로, 사람의 외모가 길고 뾰족한 입을 가진 경우를 나타냅니다. 이는 일반적으로 교활하고 음험한 성격을 가진 사람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 역사적 배경 이 표현은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유래하며, 범려가 월왕 구천에게 보낸 편지에서 등장합니다. 범려는 구천의 성격을 간파하고, 그가 어려움은 함께할 수 있지만 즐거움은 함께할 수 없는 인물임을 경고했습니다.
- 주요 구절 • 가여공환난(可與共患難): "어려움은 함께할 수 있다"는 의미로, 구천이 힘든 상황에서는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 불가공여락(不可與共樂): "즐거움은 함께할 수 없다"는 의미로, 구천이 성공이나 즐거움을 누릴 때는 신하들과 함께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 결론 장경조훼는 단순히 외모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사람의 성격과 관계의 복잡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범려의 경고는 구천의 성격을 잘 보여주며, 역사적 맥락에서 권력과 신뢰의 문제를 깊이 있게 탐구하게 합니다. 이러한 고사성어는 오늘날에도 인간관계에서의 신뢰와 배신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5) 斯-其, 此, 則,就 6) 仁:仁德(錢穆은 仁德의 유무), 人(楊伯峻), 爲人(사람 됨), 인식하다(人通認) ; 君子와 小人 감별 〈子路〉和而不同(同而不和) ~ (군자는)조화를 이루고 뇌동 하지 않는다. (소인은) 뇌동하고 조화 못함. 〈爲政〉周而不比(比而不周) ~ (군자는)친밀하나 편애하지 않는다. (소인은) 편애하고 친밀하지 못함. 〈衛靈公〉群而不黨(黨而不群) ~ (군자는)무리를 지으나 파벌을 안 만든다.
*《道德經》 17章에서 말하는 지도자의 4종류 「太上, 下知有之,其次親之譽之,其次畏之,其次侮之. 信不足,案有不信」 최고의 지도자는 백성이 그 사람이 있는 줄은 안다. 그 다음 통치자는 백성들이 친밀하게 여기고 명예롭게 여긴다. 그 다음은 백성들이 두려워한다. 그 다음은 백성들이 모욕한다(돌아서서 업신여긴다). 믿음이 부족 하면 그래서(案) 믿지 않는 불신이 있게 된다.
注釋 1) 太上 - 최고의 통치자(최상의 정치) 2) 下 - 백성 3) 之 - 통치자 4) 親 - 친근 5) 譽 - 찬양 6) 畏 - 두려워함 7) 侮 - 돌아서서 업신여기다. 8) 信 - 통치자에 대한 믿음 9) 案 - 按과 통용, 첫째, 그래서, 그러면, 于是,那么 ; 둘째, 下의 의미(백성)도 있다.
*《史記》〈周本紀〉 注釋 1.周 - 갑골문, 원래는 일정 범위 토지에 곡식을 촘촘히 심은 모양 《說文解字》「周,密也。从用、口」 뜻은 조밀하게, 글자는 용자, 구자를 따른다.
1) 엄밀, 긴밀, 《左傳》昭公四年「其藏之也周,其用之遍」 그 보관(숨겨 놓은 것)이 촘촘하고 그 사용은 널리(두루) 사용한다.
杜预 注..「周,密也」 주는 촘촘함이다(密)이다.
2) 조밀, 촘촘, 비밀 《左傳》襄公二十六年「具車徒以受地必周」 전차와 보병을 준비해서 그 영토를 접수할 때 반드시 비밀리에 주도 면밀하게 해야 한다.
杜預 注.「密也」 ~ 주는 밀이다.
*1 乘
* 1戎車는 말4마리가 끄는 전차를 1乘이라하고 100명으로 구성 (戰車 탑승 3인과 보병 25명, 예비병 72명으로 구성) 병거에는 호위병인 車右(左射, 右矛) 2명, 마부에 해당하는 어자(御者) 1명 등 3명이 탔다. 모두 갑사(甲士)의 신분이었다
* 천자는 萬乘之國, 제후는 千乘之國, 경, 대부는 百乘之家 * 춘추시대 초기의 지휘체계는 《주례(周禮)》에 나와 있듯이 전차부대를 기준으로 크게 군(軍), 사(師), 여(旅), 졸(卒), 양(兩), 오(伍) 등의 6단계로 구성되었다. 오는 5명, 양은 15명, 졸은 60명, 여는 600명, 사는 3,000명, 군은 9,000 명이다. 지휘 체계가 1승의 일대(一隊)를 기준으로 25승을 정편(正偏), 100승을 일사(一師), 300승을 일군(一軍)으로 삼게 되었다.
3) 친밀, 《論語》〈堯曰〉「曰:予小子履,敢用玄牡,敢昭告于皇皇后帝:有罪不敢赦。帝臣不蔽,簡在帝心。朕躬有罪,無以萬方;萬方有罪,罪在朕躬。周有大賚,善人是富。雖有周親,不如仁人,百姓有過,在予一人」
* 희생(犧牲)의 의미 희(犧) ~毛色 純 생(牲) ~통째로 1마리
* 짐(朕) 1. 진시황 이전 ~ 나 , 자기 2. 진시황 이후 ~ 황제 전칭
4) 忠信, 《穀梁傳》成公十七年「公不周乎伐鄭也」 공이 정나라를 정벌하는 데에 충성스러움도 믿음도 없다.
5) 굳건히, 오로지, 柳宗元, 〈送元秀才下第東歸序〉「周乎志者,窮躓不能變其操」 오로지 뜻이 있으면 실패해도 그 지조를 변할 수 없다
* 원수재는 원유이다 ~ 당나라 때 바둑 고수이다. - 원유의 바둑 실력과 업적 • 바둑의 대가: 원유는 당나라의 바둑 고수 중 한 명으로, 그의 실력은 당대의 다른 고수들과 비교할 때도 손색이 없었습니다. 그는 바둑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 바둑 이론: 원유는 바둑의 이론과 전략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기보는 후에 많은 바둑 선수들에게 연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바둑을 단순한 게임이 아닌, 깊은 철학과 전략이 담긴 예술로 보았습니다. • 문화적 영향: 원유는 당나라의 문화와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바둑 실력은 당시 귀족 사회에서도 큰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는 바둑을 통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당나라 바둑의 발전
- 당나라 시대는 바둑이 크게 발전한 시기로, 많은 고수들이 등장했습니다. 특히, 당나라의 황제들은 바둑을 사랑하여 많은 바둑 고수들을 궁중에 초대하여 대국을 즐겼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원유와 같은 고수들이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2025.5.22 강의 요약자: 주정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