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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정보 수집가담항설의지식창고 2025.05.20. 13:08 (2025.05.20. 12:54)

고려중윤하산성공인보신도비문(高麗中允夏山成公仁輔神道碑文)

 
자사자(子思子)는 말하기를 “중후한 땅에는 태산이 실려 있고 깊은 바다에는 교룡이 살고 있으니 이는 수없이 쌓이고 쌓인 뒤에야 큰 것을 이룬 것이다.” 하였다. 우리 시조 중윤공(始祖 中允公)은 고려 말엽에 일어나시어 높은 덕행(德行)과 쌓인 인공(仁功)이 마치 지구처럼 중후하고 바다처럼 깊었는데도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고려중윤하산성공인보신도비문 (高麗中允夏山成公仁輔神道碑文)
 
 
자사자(子思子)1)는 말하기를 “중후한 땅에는 태산이 실려 있고 깊은 바다에는 교룡이 살고 있으니 이는 수없이 쌓이고 쌓인 뒤에야 큰 것을 이룬 것이다.” 하였다. 우리 시조 중윤공(始祖 中允公)은 고려 말엽에 일어나시어 높은 덕행(德行)과 쌓인 인공(仁功)이 마치 지구처럼 중후하고 바다처럼 깊었는데도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하늘은 묵묵히 우리 성씨(成氏)가 처음 일어날 때를 도우사 이 해좌(亥坐)의 명당(明堂)을 내려주시어 성대하게 길러내어 이처럼 수많은 도덕가(道德家)와 경대부(卿大夫)가 배출되었으니 자사(子思)의 말씀이야말로 백세(百世)를 지나도 의심할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公)의 아들 휘 송국(諱 松國)은 벼슬이 정승(政丞)이며 사행(事行)이 효행록(孝行錄)에 자세히 기록되었고 물계서원(勿溪書院)의 주향(主享)2)이다. 현손 휘 여완(玄孫 諱 汝完)은 호(號)가 이헌(怡軒)이며 벼슬은 첨서밀직(僉署密直)3)이다.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검교(檢校)에 임명되었으나 취임(就任)하지 않고 향리(鄕里)로 들어와 절의(節義)를 지켰으며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고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휘 준득(諱 準得)은 호가 동고(東皐)이며 벼슬은 상서(尙書)인데 불교를 배척하였고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휘 유득(諱 有得)은 벼슬이 영의정(領議政)4)이며 오래 동안 한림원에 있었으나 사행(事行)과 혜전(惠展)은 모두 문헌(文獻)이 없어 증거 할 수 없다.
 
오대손(五代孫)에 휘 기(諱 紀)는 호(號)가 죽곡(竹谷)이며 벼슬은 판서(判書)이다. 공의 후손에 망학정(望鶴亭)이 있으니 휘(諱)는 덕룡(德龍)이며 의로운 일을 행하여 유명하였고 참의(參議)의 증직(贈職)을 받았다. 휘 석린(諱 石璘)은 호(號)가 독곡(獨谷)이며 학식(學識)이 고금을 통하였고 벼슬은 좌의정(左議政)5)이며 시호(諡號)는 문경(文景)이고 태종묘(太宗廟)에 배향(配享)6)되었다. 휘 석용(諱 石瑢)은 호(號)가 회곡(檜谷)이며 벼슬은 대제학(大提學)이었는데 충성을 다하여 국사(國事)를 돌보았으며 시호(諡號)는 문숙(文肅)이다. 휘 사제(諱 思齊)는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이고 여러 왕조에 걸쳐 문형(文衡)을 맡았었는데 고려(高麗)가 망하게 되자 부인으로 하여금 아들을 데리고 창녕(昌寧)으로 돌아가게 한 다음 동지들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세상을 마치니 조정(朝廷)에서는 그의 절개를 가상히 여겨 제단(祭壇)을 설치하고 사제(賜祭)하였으며 시호(諡號)를 정절(貞節)이라 하였고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공의 아들은 휘(諱)가 두(杜)인데 부친의 유훈(遺訓)을 받들어 국가에서 여러 번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취임(就任)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두(杜)라한 것도 문을 닫고 절의를 지킨다는 뜻을 표시한 것이다. 휘 갑신(諱 甲臣)은 벼슬이 평리(評理)이며 공의 후손에 모암(慕庵)이 있으니 휘 입(諱 立)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육대손(六代孫)에 휘 사달(諱 士達)은 호(號)가 이암(易庵)이며 호종공신(扈從功臣)에 참여되었고 벼슬은 대제학(大提學)이며 시호(諡號)는 문효(文孝)이다.
 
칠대손(七代孫)에 휘 승(諱 勝)은 벼슬이 도총관(都摠管)이었는데 병자화(丙子禍)에 아들과 함께 죽었다. 이름이 육신전(六臣傳)에 실려 있으며 병조판서(兵曹判書)7)에 증직(贈職)되고 시호(諡號)는 충숙(忠肅)이며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휘 희(諱 熺)는 호(號)가 인재(仁齋)인데 병자화(丙子禍)에 여러 번 엄한 국문을 받았으며 감형되어 숨어살았으나 마침내 충분(忠憤)을 못이겨 세상을 떠났다.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증직(贈職)되고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휘 봉조(諱 奉祖)는 벼슬이 좌의정(左議政)이었고 좌리공신(佐理功臣)이며 시호(諡號)는 양정(襄靖)이다.
 
팔대손(八代孫)에 휘 삼문(諱 三問)은 호(號)가 매죽당(梅竹堂)이며 벼슬은 승지(承旨)였는데 세조(世祖)가 선위(禪位)를 받자 박공 팽년(朴公 彭年) 등 5명(五名)과 함께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화(禍)를 당했다. 사실(事實)이 육신전(六臣傳)에 나타나 있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고 시호(諡號)는 충문(忠文)이며 단종묘(端宗廟)에 배식(配食)​8)​되었고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휘 담수(諱 聃壽)는 호(號)가 문두(文斗)이며 침낭(寢郞)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취임(就任)하지 않았다. 병자화(丙子禍)에 김시습(金時習) 등 5명(五名)과 함께 충절(忠節)을 지켜 행동은 달라도 마음이 같으니 세상에서 생육신(生六臣)이라 칭한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정숙(靖肅)이고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휘 임(諱 任)은 호(號)가 안재(安齋)인데 문장(文章)이 뛰어나고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주가 풍부하였다. 벼슬은 이조판서(吏曹判書)이며 문형(文衡)9)을 받았고 시호(諡號)는 문안(文安)이다. 휘 현(諱 俔)은 호(號)가 허백당(虛白堂)이며 벼슬은 예조판서(禮曹判書)였고 문형(文衡)을 받았었는데 뒤에 갑자사화(甲子士禍)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가 중종(中宗) 때에 복관(復官)되고 사제(賜祭)하였으며 시호(諡號)는 문대(文戴)이다. 휘 준(諱 俊)은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나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처형(處刑)되었는데 죽을 때에도 태연하였다. 중종(中宗) 때에 공의 충직(忠直)을 포창하여 복관(復官)시키고 예장(禮葬)하였으며 시호(諡號)는 명숙(明肅)이다. 휘 건(諱 健)은 이름이 하산인물지(夏山人物誌)에 실려 있는데 벼슬은 좌참찬(左參贊)이며 시호(諡號)는 문헤(文惠)이다.
 
구대손(九代孫)에 휘 세창(諱 世昌)은 호(號)가 둔재(遯齋)인데 한선당 김굉필 선생(寒暄堂 金宏弼 先生)에게 수업하여 학식(學識)이 뛰어났다. 벼슬이 좌의정(左議政)이었는데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유배된 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선조(宣祖) 때에 복관(復官)되었으며 시호(諡號)는 문장(文莊)이다.
 
십대손(十代孫)에 휘 제원(諱 悌元)은 호(號)가 동주(東洲)인데 15세(十五歲)에 성인(聖人)의 학문에 뜻을 두어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고 한결같이 실천을 주장하였다. 벼슬은 현감(縣監)이었는데 별세하자 많은 선비들이 재물을 거출하여 장례(葬禮)를 모셨으며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휘 운(諱 運)은 호(號)가 대곡(大谷)인데 성리학(性理學)에 조예(造詣)가 깊었으며 학문이 풍부하였으나 형(兄)이 화를 당하자 출세할 뜻이 없었다. 벼슬은 사재감정(司宰監正)이었는데 별세하자 조정에서는 부의를 내리고 사제(賜祭)하였으며 관(官)에서 장례(葬禮)를 맡았고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휘 수침(諱 守琛)은 호(號)가 청송(聽松)이다. 퇴계선생(退溪先生)은 공(公)의 묘갈명(墓碣銘)에서 “학문은 넓고도 요약하였으며 지조(志操)는 깊고도 곧았다.” 하였다. 부모상을 당하여 효성을 극진히 하였으며 현감(縣監)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취임(就任)하지 않았다. 우의정(右議政)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고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휘 수종(諱 守琮)은 인품이 매우 높았으며 부모상에 예를 다하였다. 정암선생(靜庵先生)은 한번보고 교의(交誼)를 맺었으며 선비를 논할 적에는 공을 첫 번째로 꼽았다. 시호(諡號)는 절효(節孝)이며 물게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휘 희안(諱 希顔)은 연산군(燕山君)의 난정(亂政)을 바로잡아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었으며 벼슬은 영의정(領議政)이었고 시호(諡號)는 충정(忠定)이며 중종묘정(中宗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십일대손(十一代孫)에 휘 윤해(諱 允諧)는 호(號)가 판곡(板谷)인데 어릴 때에도 말이 적고 침착하여 노성(老成)한 사람 같았으며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으로 학업의 근본을 삼았다. 현감(縣監)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취임(就任)하지 않았으며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휘 혼(諱 渾)은 호(號)가 우계(牛溪)인데 가정의 학문을 이어받아 일찍 도를 깨달았으니 정암(靜庵:趙光祖)의 적전(嫡傳:정통에서 정통으로 이어감) 고정(考亭:朱子)을 법받았다. 벼슬은 좌참찬(左參贊)이며 좌의정(左議政)에 증직(贈職)되었고 시호(諡號)는 문간(文簡)이다.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휘 수경(諱 守慶)은 벼슬이 판관(判官)으로 젊어서부터 충용(忠勇)이 뛰어났었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진양성(晋陽城)이 함락되자 김시민(金時敏)등과 함께 순절(殉節)하였다.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贈職)되고 물게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십이대손(十二代孫)에 휘 문준(諱 文濬)은 호(號)가 창랑(滄浪)인데 어려서부터 가정교훈을 받아 조에(造詣)가 깊었다. 벼슬은 현감(縣監)이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고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휘 남(諱 灠)은 호(號)가 청죽(聽竹)인데 율곡선생(栗谷先生)에게 수업하여 학문이 번잡하지 않았고 행동이 침잠(沉潛)하였다. 벼슬은 현감(縣監)이었는데 별세할 때에는 유훈(遺訓)을 남겼으며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십사대손(十四代孫)에 휘 여신(諱 汝信)은 호(號)가 부사(浮査)인데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남명선생(南冥先生:曺植)이 경의(敬義)에 대한말씀을 해주니 평생토록 명심하여 지켰다. 불상(佛像)을 부수고 불경(佛經)의 판본을 불살라 유도(儒道)를 매우 엄정하게 보호하였고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휘 안의(諱 安義)는 호(號)가 부용당(芙蓉堂)인데 벼슬은 승지(承旨)였다. 한강선생(寒岡先生:鄭述)은 공을 수제자(首弟子)로 삼아 배우는 생도들을 권장(勸獎)하게 하였다. 난리를 만나 공을 세우고 골을 잘 다스린 공적이 있었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으며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아! 십삼파(十三派)의 문중(門中)이 번성(繁盛)하여 기록하기 어렵기에 오직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분(配享分)과 고려(高麗)와 이조(李朝)의 정승(政丞)이나 문학(文學) 또는 충절(忠節)이 뛰어난 분을 골라 간결(簡潔)하고 정직(正直)하게 순서에 따라 상하(上下)의 여덟 개 종파(宗派)를 기록하였으니 이는 격식(格式)밖의 일이며 묻혀있는 선행(善行)과 나타나지 않은 미덕(美德)을 모두 기록하지 못했으니 이것은 참으로 영원한 한(恨)이된다. 그러나 이것은 사세(事勢)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돌아보건대 불초(不肖)한 내가 벼슬길에 오래 얽매었고 또한 거리가 멀어 맥산(麥山)과 우항(牛項) 두 산소를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하여 항상 성심(誠心)이 적은 한(恨)이 간절했었다. 그런데 다행히 지난해 임금에게 선발되어 영남의 관찰사(觀察使)가 되니 창녕(昌寧)은 바로 소속된 고을이었다. 이에 공무(公務)의 여가(餘暇)에 산소를 찾아뵈니 평생소원이 이룩되었다. 우리 성씨(成氏)가 대대로 번성하였으니 이는 중윤공(中允公)에서부터 배태(胚胎)되었으나 사공(事功)을 나타낸 것이 없으니 크나큰 결례(缺禮)였다. 이 때문에 신도비(神道碑)를 건립(建立)하자는 의논(議論)이 나오자 제종(諸宗)들은 모두 “아직까지 못했던 일을 이제 해야 한다.” 하니 참으로 여러 의견과 합하였다. 즉시 일을 착수한 다음 마음을 다하여 공사(工事)를 감독(監督)해서 일년이 채 못 되어 끝마쳤다.
 
今上 高宗 四十二年(1905年) 四月 日
二十一代孫 本道觀察使 岐運​11)은 삼가 지음
後學 菢山 郭沺은 삼가 原文과 頭篆을 씀
 

 
註1 : 子思子는 孔子의 손자로 이름은 伋이며 字는 子思이다. 子思 아래에 있는 子는 스승을 존칭하는 것이다.
註2 : 主享은 勿溪書院에서 侍中公(諱松國)을 제일 위 어른으로 모시고 祭享 한다는 말
註3 : 고려사 태조실록 기축대보에 의하면 怡軒公(諱汝完)은 僉書密直으로 계시다가 고려 우왕4년(1378년) 10월 政堂文學商議에 오르고 공양왕 때에 昌寧府院君에 封해 졌으며 李太祖가 檢校門下侍中 昌城府院君을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註4 : 諱有得은 기축대보에 의하면 政丞으로 해야 옳다. 고려시대에는 領議政이 아니고 政丞으로 되어 있었다.
註5 : 獨谷公(諱石璘)은 태종15년 10월 28일領議政府事에 제수되었었다.
註6 : 독곡공이 太宗廟에 配享되었다는 것은 잘못된 기록이다.
註7 : 충숙공(忠肅公)은 1784년(정조 8)에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되었다.
註8 : 매죽헌(梅竹軒)이 단종묘에 배식된 것이 아니고, 1791년(정조 15)에 장릉(莊陵)의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올랐다.
註9 : 安齋公(諱任)이 文衡을 받았다고 하였으나 잘못된 기록이다.
註10 : 시조공(始祖公)의 직함(職銜)이 원문(原文)에는 中尹戶長인데 中允戶長으로 수정하였다.
註11 : 成岐運 / 字 鳳瑞, 1847(顯宗13년) ~1924 壽78세, 檜谷公派, 조선말기의 文臣, 忠南 公州出身 高宗17년(1880) 增廣 문과 병과에 급제 1884년 駐淸商務書記官 1885년4월 弘文館 修撰 1889년 刑曹參議 左副承旨 한성소윤 등을 역임 1890년 9월 仁川府使 兼 監理 1900년11월 駐箚日本全權公使 1902년 12월 철도원 총재 1904년 이후 경상남도 충청북도 경기도관찰사 1906년11월 농상공부대신 1907년 6월 중추원부의장 1908년 掌禮院卿
 
【출처】 네이버 블로그 昌寧成氏 (작성자 아산)
 
 

 
高麗 中尹 夏山 成公仁輔 神道碑文(原文)
 
子思子 曰地之厚而華嶽載焉(자사자 왈지지후이화악재언)。 海之深而蛟龍生焉(해지심이교룡생언)。 以其積累而後 能成其大也(이기적루이후 능성기대야)。 惟我肇租中尹公 起於高麗叔世 淵德醇行積功累仁 有如地負海涵 而無得以稱焉(유아조조중윤공 기어고려숙세 연덕군행적공누인 유여지부해함 이무득이칭언)。 維天冥佑權興之時錫茲枕亥之 佳城氤氳亭毒以致碩德巨卿之如許盛大(가성인온정독이치석덕거경지여서성대) 思聖之言其非俟百世不惑者歟(사성지언기비사백세불감자여)。 公之子諱松國 官政丞 事行詳載孝行錄 主享勿溪書院(공지자휘송국 관정승 사행상재효행록 주향물계서원)。 玄孫 諱汝完 號怡軒 官簽書密直 我 朝拜檢校不受歸鄉里 諡文靖 享勿院(현손 휘여완 호이헌 관첨서밀직 아 조배검교불수귀향리 시문정 향물원)。 諱準得 號東臯 官尙書陳疏斥佛享勿院(휘준득 호동고 관상서 진소척불 향물원)。 諱有得 官領議政 久居詞垣 事行惠典皆杞宋無徵(휘유득 관영의정 구거사원 사행혜전개기송무징)
 
五代孫(오대손) 諱紀 號竹谷 官判書 公之後孫有望鶴亭 諱德龍 行義有名 贈參議 諱(휘기 호죽곡 관판서 공지후손유망학정 휘덕용 행의유명 증참의)。 諱石璘 號獨谷 學通古今 官左議政 諡文景 配侑 太宗廟(휘석린 호독곡 학통고금 관좌의정 시문경 배유 태종묘)。 諱石瑢 號檜谷 官大提學 盡心奉職 諡文肅(휘석용 호회곡 관대제학 진심봉직 시문숙)。 諱思齊 官直提學 世典文衡 麗運 旣訖使 夫人率子歸昌寧 與同志入杜門以終 朝廷嘉其節 設壇賜祭 諡貞節 享勿院(휘사제 관직제학 세전문형 여운 기흘사 부인솔자귀창녕 여동지입두문이종 조정가기절 설단사제 시정절 향물원)。 子諱杜 奉承先訓 屢徵不就 諱以杜示其社 門守義(자휘두 봉승선훈 루징불취 휘이두시기사 문수의)。 諱甲臣 官評理 公之後孫有慕庵 諱立 手亂倡義(휘갑신 관평리 공지후손유모암 휘입 수란창의)
 
六代孫(육대손) 諱士達 號易庵 參扈從勳 官大提學 諡文孝(휘사달 호이암 참호종훈 관대제학 시문효)
 
七代孫(칠대손) 諱勝 官都摠 丙子禍與子同死 名參六臣傳 贈兵判 諡忠肅 享勿院(휘승 관도총 병자화여자동사 명참육신전 증병판 시충숙 향물원)。 諱熺 號仁齋 丙禍屢被嚴鞫 蒙宥邃居 竟以忠墳沒 贈禮判 享勿院(휘희 호인재 병화누피엄국 몽유수거 경이충분몰 증예판 향물원)。 諱奉祖 官在議政 策左理勳 諡襄靖(휘봉조 관좌의정 책좌리훈 시양정)
 
八代孫(팔대손) 諱三問 號梅竹堂 官承旨 光廟受禪 與朴公彭年 五人謀復上王 事覺緊被禍 事 現六臣傳 贈吏判 諡忠文 配侑 端宗廟 享勿院(휘삼문 호매죽당 관승지 광묘수선 여박공팽년 오인모복상왕 사각피화 사 현육신전 증이판 시충문 배유 단종묘 향물원)。 諱 聃毒 號文斗 拜寢郎不就 丙禍與金時習五人 心同迹異 世稱生六臣 贈吏判 諡靖肅 享勿院(휘담독 호문두 배침랑불취 병화여김시습오인 심동적이 세칭생육신 증이판 시정숙 향물원)。 諱任 號安齋 文章超卓 蔚有經濟之才 官吏判 典文衡 諡文安(휘임 호안재 문장초탁 울유경제지재 관이판 전문형 시문안)。 諱俔 號虛白堂 官禮判 典文衡 追被甲子禍 中廟復官賜祭 諡文戴(휘현 호허백당 관예판 전문형 추피갑자화 중묘복관사제 시문대)。 諱俊 官領議政 甲子被禍 臨死從容 中廟 褒公忠直復官禮葬 諡明肅(휘준 관영의정 갑자피화 임사종용 중묘 포공충직복관예장 시명숙)。 諱健 名載夏山人物誌 官左參贊 諡文惠(휘건 명재하산인물지 관좌참찬 시문혜)
 
九代孫(구대손) 諱世昌 號遯齋 受業于寒暄先生 學識超邁 官左議政 乙巳被禍 竄辛于謫所 宣廟復官 諡文莊(휘세창 호둔재 수업우한훤선생 학식초매 관좌의정 을사피화 찬졸우적소 선묘복관 시문장)
 
十代孫(십대손) 諱悌元 號東洲 年十五志于聖人 探索性理 一主力行 官縣監 卒後多士 賻財殯葬 享勿院(휘제원 호동주 년십오지우성인 탐색성리 일주力行 관현감 졸후다사 부재빈장 향물원)。 諱運 號大谷 沈涵性理 學問充養 自兄遭禍 無意於世 官司宰監正 及卒賜祭賻官費事 享勿院(휘운 호대곡 침함성리 학문충양 자형조화 무의어세 관사재감정 급졸사제부관비사 향물원)。 諱守琛 號聽松 退陶先生曰 博約其學 幽貞其操 居喪至孝 拜縣監不就 贈右議政 諡文貞 享勿院(휘수침 호청송 퇴도선생왈 박약기학 유정기조 거상지효 배현감불취 증우의정 시문정 향물원)。 諱守琮 品格甚高 居喪盡禮 靜庵先生 一見定交 論士以公爲首 諡節孝 享勿院(휘수종 품격심고 거상진례 정암선생 일견정교 논사이공위수 시절효 향물원)。 諱希顏 燕山政亂 決策靖國 官領議政 諡忠定 配侑 中宗廟(휘희안 연산정란 결책정국 관영의정 시충정 배유 중종묘)
 
十一代孫(십일대손) 諱允諧 號板谷 兒時沉默 有老成禮 學以毋自欺為本 拜縣監不就 享勿院(휘윤해 호판곡 아시침묵 유노성례 학이무자기위본 배현감불취 향물원)。 諱渾 號牛溪 學承家庭 聞道甚早 靜庵嫡傳 考亭模範 官左參贊 贈左議政 諡文簡 從祀文廟 享勿院(휘혼 호우계 학승가정 문도심조 정암적전 고정모범 관좌참찬 증좌의정 시문간 종사문묘 향물원)。 諱守慶 官判官 少許忠勇 龍蛇之亂 晋陽城陷 與金時敏等殉節 贈兵判 享勿院(휘수경 관판관 소허충용 용사지란 진양성함 여김시민등순절 증병판 향물원)
 
十二代孫(십이대손) 諱文濬 號滄浪 幼被庭訓 造詣極至 官縣監 贈吏判 享勿院(휘문준 호창랑 유피정훈 조예극지 관현감 증이판 향물원)。 諱灠 號聽竹 早從栗谷先生 為學簡易 用下沉潛 官縣監 卒遺訓書 享勿院(휘람 호청죽 조종율곡선생 위학간이 용하침잠 관현감 졸유훈서 향물원)
 
十四代孫(십사대손) 諱汝信號浮查 中進士 南冥先生 說與敬義 終身佩服 毀佛火板 衛道甚正 享勿院(휘여신호부사 중진사 남명선생 설여경의 종신패복 훼불화판 위도심정 향물원)。 諱安義 號芙蓉堂 官承旨 寒岡先生 使之秉拂 勸獎來學 丁亂効勛 治郡有績 贈吏判 享勿院(휘안의 호부용당 관승지 한강선생 사지병불 권장내학 정란효훈 치군유적 증이판 향물원)。 嗚呼 十三派 門類寔繁 混錯難記 而惟以勿溪院享 前我朝 首揆文學節惠 為簡正之論 從次進錄上下宗派八列 此格外之議 而幽光潛德 未之幷載 此實悠悠之恨 然勢所然也(오호 십삼파 문류식번 혼착난기 이유이물계원향 전아조 수규문학절혜 위간정지논 종차진록상하종파팔열 차격외지의 이유광잠덕 미지병재 차실유유지한 연세소연야)。 顧余不肖 久淹宦道居 又遠甚 麥牛兩阡 曾無履露之感 而常切誠薄之 恨矣(고여불초 구엄환도거 우원심 맥우양천 증무이로지감 이상절성박지 한의)。 何幸去年 猥被聖簡 袛命南藩 昌寧即管色 乃於公餘 獲拜佳城 平生志願始遂矣 我成聯世阜藩 有胚胎乎中尹公 而事功無著 大是欠典 神道碑之論由是發焉 則諸宗咸曰 今擧未之事 誠與衆意會也(하행거년 외피성간 저명남번 창녕즉관색 내어공여 획배가성 평생지원시수의 아성연세부번 유배태호중윤공 이사공무저 대시흠전 신도비지론유시발언 칙제종함왈 금거미지사 성여중의회야)。 卽日就事 盡心董工 不期年而告訖(즉일취사 진심동공 불기년이고흘)
 
上之 四十二年乙巳 四月
二十一代孫本道觀察使岐運謹撰
後學 苞山 郭沺 謹書幷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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