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門下侍中昌寧成公松國墓碣文 (三次改竪)
창녕읍(昌寧邑) 서쪽 우항산(牛項山) 기슭 인좌(寅坐)인 묘혈(墓穴)은 고려(高麗)의 문하시중(門下侍中)인 성공(成公)의 산소(山所)인데 공(公)의 휘(諱)는 송국(松國)이다. 창녕성씨(昌寧成氏)가 중윤 호장(中允 戶長)인 휘 인보(諱 仁輔)에게서 시작되었으니 이는 바로 公의 아버지이다. 公이 지극한 효성(孝誠)으로 어버이를 섬겼었는데 중윤공(中尹公)이 타향(他鄕)인 송도(松都)에서 별세(別世)하시자 직접 시신(屍身)을 지고 천리(千里)나 되는 고향(故鄕)으로 돌아가다가 청산원(靑山院)에 이르니 해가 저물고 눈이 많이 내려 한발자국도 옮길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원(院)의 사랑에서 유숙(留宿)하게 되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범이 그 곁을 여러 번 맴돈 흔적(痕迹)이 있었다.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겨 발자국을 따라 맥산(麥山)에 이르니 발자국도 멈추고 눈이 녹았는데 넓이가 산소(山所) 한자리쯤 되었다. 그 곳을 표시(表示)해 놓았다가 이곳에 안장(安葬)하니 사람들은 지극한 효성(孝誠)의 감응(感應)이다 하였다. 사림(士林)들이 추모(追慕)하여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모셨다.
두 아들을 두었으니 공필(公弼)은 전객부령(典客副令)으로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증직(贈職)되었고 한필(漢弼)은 도첨의 문하찬성사(都僉議 門下贊成事)였다. 판도판서(版圖判書)는 세 아들을 두었으니 혜암(惠巖)은 대선사(大禪師)였고 군미(君美)는 판도총랑(版圖摠郞)이며 군부(君阜)는 중낭장(中郎將)이었다. 찬성(贊成)은 두 아들을 두었으니 군백(君百)은 광정대부 문하평리(匡靖大夫 門下評理)였고 군보(君補)는 문하평리(門下評理)였다. 총랑(摠郞)은 두 아들을 두었으니 한충(漢忠)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이었으며 여완(汝完)은 부원군(府院君)으로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다. 중낭장(中郎將)은 세 아들을 두었으니 준득(準得)은 총부상서(摠部尙書)였고 유득(有得)은 정승(政丞)이었으며 윤득(允得)은 지신사(知申事)였다. 광정대부(匡靖大夫)의 아들 이(履)는 문하시랑(門下侍郞)이었으며 평리(評理)의 아들 저(貯)는 선부전서(選部典書)였다. 한성판윤(漢城判尹)의 아들 기(紀)는 판서(判書)였고 부원군(府院君)은 네 아들을 두었으니 석린(石璘)은 영의정(領議政)으로 시호(諡號)는 문경(文景)이고 석용(石瑢)은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으로 시호(諡號)는 문숙(文肅)이며 석연(石珚)은 이조판서(禮曹判書)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되었고 시호(諡號)는 정평(靖平)이며 석번(石璠)은 낭장(郎將)이었다. 상서(尙書)는 두 아들을 두었으니 연(連)은 판서(判事)였고 준(遵)은 중서시랑(中書侍郞)이었다. 정승(政丞)의 아들 사제(思齊)는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으로 시호(諡號)는 정절(貞節)이다. 지신사(知申事)는 두 아들을 두었으니 태준(台俊)은 사인(舍人)이었고 사준(士俊)은 좌랑(佐郞)이었다. 시랑(侍郞)은 두 아들을 두었으니 갑신(甲臣)은 평리(評理)였고 을신(乙臣)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이었으며 전서(典書)의 아들 언신(彦臣)은 지림주사(知林州事)였다.
아! 근원(根源)이 깊어 파류(派流)가 길고 뿌리가 견고(堅固)하여 지엽(枝葉)이 무성하다. 대대로 훌륭한 전통(傳統)을 이어받아 끊이지 않아 정승(政丞)이 五名, 문형(文衡)이 二名, 호당(湖堂)이 五名, 장군(將軍)이 一名이었다. 종묘배향(宗廟配享)이 一名, 문묘배향(文廟配享)이 一名, 사(祠)와 원(院)에 배향(配享)된 분이 三十四名이다. 공신(功臣)에 봉(封)해지고 봉군(封君)을 받으며 시호(諡號)를 받고 정려(旌閭)를 받은 분은 다 열거(列擧)하기 어려울 정도이니 이 어찌 公이 음덕(陰德)을 쌓은 결과(結果)가 아니겠는가.
옛날 광해군 병신년(光海君 丙申年)에 후손 경상감사 진선(後孫 慶尙監司 晋善)이 처음으로 묘표(墓表)를 세웠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이지러졌으므로 건릉(健陵) 기유년(己酉年:正祖十三年)에 본향(本鄕)의 여러 자손(子孫)들이 다시 세우고 참판 덕조(參判 德朝)가 음기(陰記)를 지었다. 그러나 너무 소략(疏略)하여 모두들 다시 세웠으면 하였다. 오래 상의한 끝에 결정하여 마침내 새 비석(碑石)을 세우고 구첩(舊牒)을 의거(依據)하여 위와 같이 음기(陰記)를 쓴다.
二十四世孫 耆悳은 삼가 撰함 一九五六年 丙申 十月 세움
註 - 成耆悳 : 貞節公派 一八八四年生 碑原文에는 “二十四世孫 成耆悳 謹撰”이란 文句가 없는 것을 口傳에 依해 記錄하였다 함 註 - 原文(원문)에는 중윤호장(中尹戶長)인 휘 인보(諱 仁輔)인데, 중윤호장(中允戶長)인 휘 인보(諱 仁 輔)로 수정(修訂)하였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昌寧成氏 (작성자 아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