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구 학예관, 국립박물관 수장고 유물 목록 조사... 최남선 아들 소장된 매입 사실 확인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
소재구 국립중앙박물관 유물관리부 학예연구관은 연구심이 남달라 퇴근 시간이 지나서도 밤늦게까지 남아 박물관 수장고에 있는 유물을 들여다보고 목록을 조사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은 대한제국 순종 황제가 1909년 지은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에서 시작하여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이왕가박물관, 송석하 선생이 지은 남산 국립민족박물관의 소장품을 모두 합친 것으로 1946년에 덕수궁 석조전 건물에서 처음 개관하였다.
박물관 수장고에는 한국전쟁과 박물관의 잦은 이사로 정확한 출처를 알 수 없는 유물 14,000점이 남아있어 학예연구관은 항상 늦도록 수장고 소장품을 조사했다.
▲ 김정호(金正浩) 대동여지도, 조선 철종 12(1861) 종이에 목판 인쇄 30.5×20.0cm 절첩(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재구 학예연구관은 1995년 10월 2일 보존 처리 대상 목제품을 선정하기 위해 수장고의 유물을 살펴보다가 고산자 김정호(1804~1866 추정) 선생이 1861년 직접 제작한 대동여지도 원본 목판본이 보존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11판의 목판을 다시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유물카드에는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의 아들 최한웅(崔漢雄)이 소장하고 있는 것을 1923년에 조선총독부박물관이 매입하여 이후 대동여지도 목판 대금청구서와 60원 지출결의서를 찾아냈다. 목판은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옮기고, 경주박물관을 거쳐 1970년대 초에 다시 서울로 이관되어 새로운 번호를 달고 1989년에 실사확인조사도 받은 것을 모두 확인했다.
당시 국사편찬위원회는 한국역사문화지리학회에 의뢰하여〈전국의 고지도 목록〉 작성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때 이우형(李祐炯, 1934~2001), 성남해(成南海) 고지도 전문가는 박물관으로부터 고지도 열람 허가를 받고 1995년 8월 말부터 3개월간 매주 1회씩 고지도를 조사했다. 전문가의 고지도 조사가 거의 마무리되어 갈 무렵에 소재구 학예연구관은 “저기요! 박물관 소장품 중에 아주 흥미로운 목판본이 있는데 진위(眞僞)를 판단해 주십시오?”하고 정식으로 제의했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대동여지도 목판본(사진;국립중앙박물관)
고지도 전문가는 예의가 바르고 눈썰미가 있어 보이는 학예사가 하는 말에 박물관의 목판본을 모두 살펴보면서도 회의 날짜를 11월 22일로 정했다. 며칠 후 박물관 수장가를 방문한 고지도 전문가는 학예연구관이 보여주는 목판 11장을 쳐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대원군에 의해서 불태워졌다는 대동여지도 목판 원본이 눈앞에 확연히 나타난 것이다. 고지도 전문가는 이 목판이 대동여지도 총 126도엽 중 5분에 1에 해당되며, 숭실대박물관에 있는 김양선이 기증한 목판 1매와 같다고 보았다. 1차 검토한 결과 국립중앙박물관 측은 사안이 중대하여 12월 8일 확대 실견 모임을 하기로 하고 비공개로 처리했다.
1995년 12월 8일에 이찬(서울대 지리학과 명예교수), 양보경(서울대 규장각), 이상태 박사(국사편찬위원회), 이우형(한국역사문화지리학회), 성남해(한국역사문화지리학회) 고지도 전문가 5명이 참석하여 확대 실견 모임을 하였다. 모임에 참석한 고지도 전문가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특히 다른 대동여지도와 정밀 대조하기로 정하고 이 내용을 비공개 진행하기로 정했다. 그러나 참석자 중 한 분이 특정 신문사에 기사를 제보하는 바람에 12월 11일 자 조간신문에 특종 처리되어 국립중앙박물관은 아침부터 박물관을 담당하는 신문사 기자로부터 심한 항의를 받았다.
조사팀은 숭실대 목판과 서울대 규장각 초간본과의 정밀 작업을 진행하고 판독하여 대조를 거쳐 고지도 전문가는 박물관에 있는 목판을 대동여지도 진품으로 확정하였다. 조사팀은 대동여지도 목판은 수령 100년 정도의 피나무로 제작되고 가로 43cm, 세로 32cm, 두께 1.5cm이며 각각의 목판에는 남북으로 120리, 동서로 160리에 해당하는 공간의 지리정보가 조각되어 있다고 언론에 발표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대동여지도 목판은 2008년 12월 22일 보물 제1581로 지정되었다. 소재구 학예사는 평생을 바쳐 대동여지도를 연구한 이우형 선생의 꼼꼼한 정리와 자문에 감사 인사를 드렸다.
이우형은 1934년 광주에서 태어나 은행원인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1947년 3월 아현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953년 용산고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정외과에 입학했다가 1954년 1월에 육군에 입대해 1957년 10월에 제대했다. 군에서 제대한 후 방송국에서 프리랜서 성우로 활동하다 1958년 한국일보에 입사해 문화부 기자를 하면서 동료들을 모아 산수회 산악회를 조직했다. 1962년 친구와 설악산을 오르다 친구가 일본제 등산 수첩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 등산 지도를 만들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1967년에 등산백과사전인 등산 수첩을 국내에서 처음 펴내고 1969년 6월 등산잡지《山水》를 창간했다. 산수 한자는 목수(木壽) 신영훈(申榮勳, 1935~2020) 선생이 신라시대 명필 김생(金生, 711~791)의 행서 글씨로 알려진 경북 봉화군 태자사(太子寺) 낭공대사탑비(郞空大師塔碑, 823~916)에서 글자를 집자(集字)해서 이우형에게 전했다.
▲ 1969년 창간호 산악잡지 《등산》과 《산수》(사진:김병준)
신영훈은 개성에서 부농이며 가구점을 경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6살 때 아버지가 2층 한옥을 지었는데 도편수가 고모부로 목공 연장 심부름을 하면서 재미를 느꼈다. 1955년에 덕수궁 박물관에서 8개월간 자원봉사로 일제강점기 유물카드를 한글로 기록하는 일을 하면서 최순우, 황수영, 전형필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957년에 군에 입대하여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근무하게 되었을 때 살아 있는 문화재로 불리는 1927년에 동경미술학교 동양화과에 입학해 2년간 수학한 임천(林泉, 1908~1965) 선생을 만나 고건축과 단청을 배우게 된다. 그는 1962년 국보 1호 숭례문 해체 수리 작업을 하면서 성장하여 문화재 전문위원이 되었다.
▲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사진;국립중앙박물관)
낭공대사탑비는 비신이 2m로 고려 광종 5년(984)에 건립되었다. 사찰이 폐사된 후 조선 중종 4년(1509)에 영천군수 이항(李沆)이 영주 휴천리 동헌의 자민루(字民樓)로 옮겼다가 1918년에 경복궁 근정전 회랑으로 비신만 옮겨졌다.
낭공대사탑비는 2015년 4월 22일 보물 제1877호로 지정되었다. 낭공대사는 신라 효공왕 대 승려로 가야산 해인사에서 공부하다 871년 당나라에 유학한 후 고국에 돌아와 석남산사의 주지로 있다 입적했다, 이에 경명왕은 낭공대사라 시호하고 백월서운이라 탑명을 내렸다.
김생은 8세기 후반에 활동한 인물로《삼국사기》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는데, 80세가 넘어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전해오며, 고려 문인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서 김생의 글씨를 ‘신품제일’로 제일 높게 평가했다. 신품사현(神品四賢)은 김생, 유신, 탄연, 최우이다.
▲ 신산자(新山子) 이우형(사진:최선웅)
이우현은 1972년 2월에 서울시산악연맹 산악조난구조대 초대 대장을 맡았다. 1980년 1월 17에 불법지도 제작 배포 협의로 소환되어 중부경찰서에 갔다가 구속되었다. 언론계와 문화계에서는 연일 구명운동을 하여 2월 4일 풀려났다, 당시는 민간인이 관광 지도를 제작하려면 측량법에 따라 지도를 제작한 후 국립지리원에의 측량성과 사용승인을 미리 받아야 하는데 이런 절차를 몰랐다.
1980년 인사동 고서점에서 자료를 찾다가《산경표》를 발굴했다. 1983년 도서출판 광우당을 설립했다. 하루는 지리학과 졸업생들이 찾아와 대동여지도를 아직껏 못 보았다고 지도를 보여달라고 간청하여 큰 충격을 받고는 곧장 대동여지도 연구에 나섰다. 그는 대동여지도를 보유한 여러 기관을 방문했지만, 본인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촬영할 수가 없었다.
이우형은 대동여지도를 못 구해 가슴이 답답하던 차에 인사동 통문관에 팔려고 나온 대동여지도 원본 소식을 들었다. 그는 통문관 산기(山氣) 이겸노(李謙魯, 1909~2006) 대표를 바로 찾아갔다. 이겸노는 평남 용강 출신으로 태어난 지 1년 만에 아버지가 숨져 어머니와 함께 어렵게 살았다. 그는 4년제 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16세 되던 봄에 일본에 간다고 집을 나와 기차로 부산까지 왔으나 일경이 저지해 관부연락선을 타지 못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차비가 떨어져 거리를 방황하다가 걸어서 10일 만에 평양에 도착해 다행스럽게 장국밥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돈을 모아 서울에 와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그런데 길에서 서점에서 일하는 동창생 이태식을 만나 친구의 소개로 정동에 있는 선문옥(選文屋)에 점원으로 채용되어 일을 하나씩 배웠다. 이렇게 10년간 일하다 26세인 1934년 3월에 인사동 수도약국 자리에 구멍가게 책방인 금향당 서점을 개업해 20년을 보냈다.
▲ 인사동 통문관(사진:이겸로)
해방 직후인 1945년에 가게 이름을 통문관으로 바꾸고, 1967년에 5층 사옥을 지었다. 고유섭, 이희승, 최순우 등 국학자들이 통문관에서 자료를 구했다. 이겸노는 《월인석보》, 《월인천강지곡》, 《독립신문》 등을 발견해 국립중앙도서관으로 보냈다.
이겸노는 고서 전문가이며 서지학자로 고객이 맡긴 지도 원본이 훼손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걱정되어 이우형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우형은 매일 통문관 주인을 끈질기게 찾아가 촬영 취지를 설명하며 대동여지도를 보여달라고 간청하여 이겸노는 대동여지도 원본을 빌려주었다.
▲ 통문관 고서(사진:김언호)
이우형은 원본을 제판용 카메라로 찍어 다른 판본과 대조하며 원도 복원에 매달려 1985년 12월 20일 대동여지도를 복간했다. 그는 대동여지도 100부를 제작하여 그동안 신세 진 사람에게 선물하고 일부는 판매했다. 어렵게 제작한 대동여지도는 세로 7m, 가로 4m 크기로 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산악인에게 백두대간을 널리 알리고 고산자 김정호를 전파하고 30여 종의 지도를 창작했다.
그는 1987년에 교학사의 제의로 교과서 지리부도 제작을 맡아 새로운 기술을 고안하여 검인정에 합격했다. 1993년에 신촌 봉원사에서 고산자 김정호 제사를 지내고 1997년에도 고산자 제사를 모셨다. 그는 평생을 산악인으로 살며 산악지도를 보급하고, 국정교과서에 잘못 수록된 “김정호는 대원군 때 옥사하고, 판목이 모두 폐기가 되었다.”라는 잘못된 기록을 바로잡았다.
▲ 이우형이 복원한 《대동여지도》(사진;국립중앙박물관)
고산자 김정호의 뒤를 이어 우리 강산 연구에 매진하던 신산자(新山子) 이우형도 60세가 되자, 병마(病魔)가 찾아와 2001년 4월 28일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고인을 추모해 이우형기념사업회를 만들었다.
▲ 일본에서 환수한 《대동여지도》(사진:국가유산청)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2022년 7월에 일본의 한 고서점이 《대동여지도》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자료 검토와 전문가 평가 등을 거쳐 고서점의 판매 의사를 재차 확인한 뒤 복권기금으로 지도를 환수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2023년 3월에 《대동여지도》를 일반에 처음 공개했다. 이로써 《대동여지도》는 국내외에 38점의 판본이 있음을 확인했다. 이번에 선보인 지도는 목록 1첩과 지도 22첩을 포함해 모두 23첩의 완질 지도첩으로 각 첩은 30×20cm 크기이며, 전체를 펼치면 약 6.7×4m에 이른다.
새로운 《대동여지도》는 1864년에 제작된 목판본(갑자본)에 《동여도》에 실린 정보를 필사해 추가하고 채색해 지명이 7,000개 더 많은 18,000개가 실려 있고 상세한 교통로와 백두산정계비, 울릉도로 향하는 배의 출항지, 군사시설 등이 상세하게 적혀있어 조선왕조의 지리정보 연구 범위가 더 확장되게 되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