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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5.04.02. 16:35 (2025.04.02. 16:31)

힐트만 교수, 운주사 계곡 불상과 탑은 미륵 강림 용화세계를 꿈꾸는 민중 염원 담겨

 
미륵―한국의 성스러운 돌들 / 한국을 처음 방문한 독일 조각가 요헨 힐트만(Jochen Hiltmann, 1935~ )은 화순 운주사 천불천탑에 관해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하고 사진 1백여 장을 《미륵―한국의 성스러운 돌들(Miruk- Die heiligen Steine Koreas, 227쪽)》 이란 책에 수록하여 1987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출간했다.
힐트만 교수, 운주사 계곡 불상과 탑은 미륵 강림 용화세계를 꿈꾸는 민중 염원 담겨
미륵―한국의 성스러운 돌들
 
 
한국을 처음 방문한 독일 조각가 요헨 힐트만(Jochen Hiltmann, 1935~ )은 화순 운주사 천불천탑에 관해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하고 사진 1백여 장을 《미륵―한국의 성스러운 돌들(Miruk- Die heiligen Steine Koreas, 227쪽)》 이란 책에 수록하여 1987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출간했다.
 
힐트만 교수는 운주사 만산 계곡의 불상과 탑에 미륵의 강림을 통해 펼쳐질 용화세계(龍華世界)를 꿈꾸는 민중들의 소박한 염원이 담겨있다고 새롭게 해석하고 《미륵・운주사 천불천탑의 용화세계》를 독일어로 다시 출간했다.
 
 
▲ 《미륵―한국의 성스러운 돌들》(사진:Jochen Hiltmann)
 
 
요헨 힐트만 교수는 ‘雲住’와 ‘運舟’를 결합하여 언급하면서 운주사를 움직임이 고요하게 머무름의 절 ‘움직이는 배의 절’로 인식하였다. 출판사 학고재는 1997년에 독일에서 발간한 책을 한국어로 번역 출판하며 저자를 국내에 초청했다.
 
저자는 서울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와 광주에서 개최된 천불천탑 사진전에서 자신의 소감을 사실대로 밝혔다. “조각난 논 옆에 군데군데 불상과 탑들이 세워져 있고 바로 그 옆에서 농부들이 일하고 있는 운주사 옆 만산 계곡의 정경을 처음 대하고 저는 충격과 감동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일상적인 생활과 예술과 신앙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대학에서 은퇴한 후에도 꾸준하게 조각 작품을 만들어 판매했다. 필자가 옥션에 나온 17점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조각가의 작품이 화순 운주사에서 받은 영감이 많이 스며있는 것을 느꼈다. 특히 철로 만든 작품은 운주사 돌과 비슷하게 연상되어 호감이 갔다.
 
 
▲ 요헨 힐트만 조각가의 2010년 작품 ‘Bol’(사진:Auction, 재료: 철)
 
 
조각가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슈프렌〉 지에 한국 굿, 씻김굿, 당산나무 등 한국의 문화를 자주 소개했다. 1995년에는 한국인의 죽음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독일연방공화국(Bundesrepublik Deutschland, BRD, 서독)은 1960~1970년대에 한국 경제가 어려울 때 도움을 많이 준 서방 국가이다. 당시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79달러로 한국은행 보유 외환 총액이 2,000만 불도 되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선진국에 상업차관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당시 서독은 대한민국과 1961년 12월 차관 교섭을 타결하여 1962년에 3,000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받기로 했다. 이런 도움으로 한국은 1964년 11월 30일에 1억 달러 수출을 처음 달성했다.
 
 
▲ 제1회 수출의 날(1964년 12월 5일) 아치(사진:연합뉴스)
 
 
박정희 대통령 내외는 1964년 12월 6일 오전에 세종로 예총회관 준공식에 참석한 후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서독을 국빈 방문하기 위해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비행장에는 서독이 제공한 민간항공기 루프트한자 649편이 도착해 오후 1시 40분 이륙해 한국을 떠났다. 서독으로 가는 비행기는 급유를 위해 홍콩, 방콕, 뉴델리, 카라치, 카이로, 로마,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28시간 만에 12월 7일 오전 8시 40분 독일 수도 쾰론 · 본 공항에 도착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공항에서 뤼브케 대통령, 에르하르트 총리, 게르슈텐 마이어 하원의장, 각료 및 각국 외교관의 환영을 받았다. 12월 8일 아침에는 ‘독일 부흥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르하르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였다. 서독 총리는 박 대통령에게 고속도로 건설과 제철공장 건설, 일본과의 수교 등을 논의하며 한국의 빠른 경제 발전을 기원했다.
 
당시 독일어 통역은 백영훈(白永勳, 1930~2023) 박사가 담당했다. 백영훈은 전북 김제 월촌면에서 태어나 고려대 상대와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55년 국비유학생으로 선정되어 1956년에 독일에 유학했다. 그는 1958년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여 29세에 중앙대 상대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1962년 뉘른베르크 에를랑겐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1964년에 백영훈은 군대에 강제 징집되어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독일에서 통역자를 찾던 신응균 주 서독대사는 독일에 마땅한 인재가 없자 국내에 있는 백영훈을 찾아내고 대통령에게 발탁을 요청했다.
 
그는 논산훈련소 훈련병으로 있다가 정래혁 상공부 장관의 특별보좌관이 되어 11월 말 서독에 도착했다. 그는 유학 시절에 안면이 있는 경제학 교수와 친구, 경제 관료를 찾아가 장관 면담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무도 부탁에 응해주지 않았다.
 
그는 할 수 없이 대학 시절 은사를 찾아가 재무장관을 만나게 해달라고 정식으로 도움을 청했다. 은사는 도와줄 수가 없다고 냉정하게 거절했다. 백영훈은 매일 아침 은사 집을 찾아가 사모님을 기다리며 가끔 눈을 마주치면 눈물로 간곡하게 호소했다. 일주일이 지나 은사가 “차관과의 약속을 잡았다.”라고 반가운 소식을 주었다.
 
 
▲ 함보른(Hamborn) 탄광 광부 환영, 박 대통령 연설(1964.12.10.) (사진:이현표, 중앙포토)
 
 
박 대통령은 본에서의 3박 4일간의 공식 일정을 마치고, 12월 10일 광부들이 일하는 뒤스부르크시 공회당에서 함보른(Hamborn)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들과 간호사를 만났다. 환영 식장에는 독일에서 일하는 광부 240명과 20~30여 명의 간호사가 모였다.
 
대통령이 식장에 입장해 광부 악대가 애국가를 연주했다. 대통령이 연설을 시작하자 행사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여 눈물바다가 되었다. 박 대통령은 국산 파고다 담배를 들고 가서 광부들에게 선물로 주고 광부 사택을 방문했다.
 
당시 5년 정도 먼저 왔단 일본 광부들은 1,000m 지하 막장에서 힘들게 석탄을 캔 것이 아니라 갱도에서 전기 배선 일을 주로 담당했다. 파독 광부 1진도 독일에 도착한 후 10달 동안 막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상에서 빗자루 들고 탄가루 청소하는 일을 하다가 막장에 들어가 석탄을 캐기 시작했다.
 
12월 11일 한국 통상사절단은 루투거 베스트리커 차관을 만나고, 12일 장관을 만나 1억 5,000만 마르크(3,000만 달러) 상업차관에 합의했다. 통상사절단은 한국에 귀국하고 백영훈 특별보좌관은 실무를 맡아 독일에 남았다. 그런데 최종 관문으로 은행의 지급보증 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 1964년 12월 서독 공항 귀국 환송(사진:문화관광부)
 
 
백영훈 박사는 독일의 여러 은행을 방문하여 실무자를 만나 한국의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고 설득했지만, 담당자는 한국이 빈곤해 국가공신력이 없다고 난색을 표명했다. 경제 상업차관이 어려움에 봉착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대학교 친구들에게 알려졌다. 이때 서독 노동부의 과장으로 있던 학창 시절 친구가 독일 법령집과 두꺼운 서류 뭉치를 들고 나타나 특별한 제안을 했다. “지금 서독은 탄광에서 일할 광부가 모자란다. 한국에서 한 5,000명 정도 보내줄 수 있겠나? 간호조무사도 약 2,000명 정도 필요하다. 이렇게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줄 수만 있다면 이 사람들 급여를 담보로 각서를 쓰고 돈을 빌릴 수 있다.”라고 상상하기 어려운 묘책을 말해주었다.
 
백영훈은 신응균 주독 대사를 만나 상업차관 보증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신 대사는 본국 외무부에 긴급 전문을 타진했다. 며칠 후 해외개발공사는 파독 광부 모집을 전국에 공고했다.
 
 
▲ 독일 함보른 탄광(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국 간호사는 1960년대 독일 병원에서 근무하는 한국 의사들에 의해 몇 명씩 초청받아 서독에 갔다. 1966년에는 정부 차원에서 28명의 간호사가 선발되어 독일에 갔다. 당시 서독은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었지만, 노동력이 부족하여 광산, 병원 등 힘든 일자리는 기피해 독일 경제에 악영향을 주었다.
 
한국과 서독은 1962년 3월 15일 한독경제협력의정서를 체결하고 경제협력을 강화했다. 광부는 1963년 12월 21일 1진 123명이 파견되기 시작하여 1977년까지 7,936명이 독일에 갔다. 광부 협정에 상응하는 간호사의 독일 파견 공식협정은 1976년 7월 26일에 비로소 체결되어 1976년 12월 31일까지 약 12,000명이 진출했다.
 
 
▲ 간호사 독일어 실무 수업(사진;UPI,1966년 4월)
 
 
전후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배상으로 5만 톤급 컨테이너선을 5척을 건조해 외국에 보내야 했다. 당시 함부르크 호발트 조선소는 직원이 1만 명이 넘는 대형 조선소였지만, 배를 만들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외국인 노동자 고용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호발트 조선소는 함부르크에서 일하는 한국의 광부와 간호사의 헌신적인 근무 태도에 감동하여 한국인 기술노동자의 채용을 의논하고, 한국 정부에 공식 요청했다.
 
 
▲ 한국 간호사(사진:외교부)
 
 
한국의 해외개발공사는 공업고등학교 졸업자 중에 실력이 있는 사람을 우선 선발했다. 이때 기계, 용접, 배관 실기시험과 필기시험은 독일 엔지니어의 실기와 도면 심사를 거쳐 합격시켰다. 신청자 중에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정말 많았다.
 
당시 박 대통령은 공군 소령 출신으로 국산 자동차 ‘시발자동차’ 회사에서 공장장을 지내고 상공부 화학과장으로 있던 오원철(吳源哲, 1928~2019)을 대통령 경제2 수석비서관으로 발탁하여 경제개발정책,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 방위산업 건설, 율곡사업, 국산 무기 개발 계획, 행정수도 건설 등을 총괄하게 하였다. 그리고 대통령은 기능 인력의 해외 송출 및 유출을 강력하게 막았다.
 
 
▲ 호발트조선소(HDW)(사진:WIKIMEDIA)
 
 
조선 기술자로 선정된 합격자들은 회사에 사표를 내고 출국 날짜만 기다리다 정부에서 출국을 막자, 청와대 앞에서 농성하여 1971년 11월 7일 조선 기술자 1진이 출발하고, 1972년까지 3차례에 걸쳐 300명이 함부르크 호발트조선소(HDW)에 가서 배를 만들었다.
 
한국에서 온 기술자들은 유고슬라비아, 튀르키예 등에서 온 외국 기술자와 같이 일했지만, 눈치가 빠르고 부지런해 20만 톤급 컨테이너선, 잠수함, 해상크레인, 시추선, 특수용접으로 독일인과 함께 일하며 선체 조립의 세부적인 선진 조선 기술을 모두 습득했다. 한국의 조선 기술자가 참여하여 만든 배는 영국의 까다로운 검사를 모두 통과하고, 독일인의 극찬과 인정을 받았다.
 
 
▲ 호발트조선소의 작업복과 안전모(사진:한국이민사박물관)
 
 
조선 기술자들은 돈을 더 벌고 싶은 욕심에 쉬는 날도 없이 일했다. 휴가 때는 농촌이나 소기업 공장에서 노동해 돈을 벌었다. 향수병이 심해 중간에 귀국하거나, 외국으로 도망간 사람도 있었다.
 
3년 근무 계약이 종료되자 기술자들은 귀국하여 한국의 현대중공업과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해 조선 기술을 보급하고 경쟁력이 강한 배를 수출했다. 필자는 서독에 다녀온 근로자들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조선 강국으로 성장하게끔 만든 진정한 산업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광부와 간호사가 국내로 보낸 송금액은 1965년부터 1975년까지 총 1억 1천만 달러로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견인차가 되었다. 조선 기술자의 송금은 한국 경제의 성장을 촉진하고, 산업 발전과 사회 변화를 이끄는데 크게 작용하고 가게 저축과 소비 구조를 변화시켰다.
 
 
▲ 파독 조선 기술자 50주년 기념식(사진:독일 교포신문)
 
 
독일 조선소에서 작업 능력이 특별히 뛰어난 기술자들은 조선소의 특별 요청으로 노동 허가 및 체류 허가가 나와 45명이 함부르크나 칼 지역에 남았다. 재취업한 조선 기술자는 회사의 특별 배려로 한국 왕복 항공권과 휴가비를 받고 6주간 달콤한 휴가를 즐겼다.
 
이때 형성된 서독 교민 사회는 서유럽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컸다. 조선 기술자들은 1976년 4월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동호회를 창설하고 조국과 인연을 계속 이어왔다. 1983년 10월에 조선소 근로자들의 감원으로 일부 기술자가 떠나 현재 20가구만 남았다.
 
2022년 6월 11일 ‘파독 조선 기술자 50주년 기념식’이 함부르크 하우스에서 개최되어 정기홍 주함부르크 총영사를 비롯하여 한인 단체 관계자 등 교민 150명이 참석하여 독일 조선 기술자들의 숨은 헌신과 노력을 격려했다.
 
인천 월미도에 있는 한국이민사박물관 전시실에는 당시 조선 기술자들이 기증한 사진과 297점의 관련 자료가 전시되고 있다. 한국이민사박물관은 2016년 기술자들이 독일 조선소에서 사용한 공구, 작업복, 안전모 등을 기증한 기술자 21명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 한국이민사박물관 전경(사진:한국이민사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은 2016년에 미국 하와이, 독일 등 해외동포 생활 문화를 조사했다. 독일의 조선 기술자 10명을 면담해 그중 4명의 생애 이야기를 실은 독일 함부르크 《한인들의 삶과 문화》 조사보고서를 2017년 10월에 발간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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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