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촨성 아미산에 '표류 장승' 시비 세워...설악산 아미산 장승 태풍 유실, 일본 표착 밝혀 반전 동해 바다를 건너간 장승 2
일본 제국(日本帝國, 日帝, 1868.1.3~1947.5.2)은 1867년 메이지유신 이후 부국강병과 식산흥업(殖産興業)을 목표로 기치를 내걸고 천황제에 근거한 근대국가를 확립하고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을 공포하였다.
일제는 근대화 정책을 추진해 성공하자 대륙을 넘보기 시작해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타이완을 식민지로 차지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남사할린을 할양받고 오호츠크해, 베링해의 어업권을 양도받고, 장춘 이남의 철도 부설권을 할양받았다.
일제의 욕심은 끝이 없어 1910년에 조선을 병탄하고, 1914년에는 사이판을 합병하였다. 만주에서 천연자원을 확보해 병참기지로 이용할 목적으로 1918년 9월 18일 펑톈 교위의 류타오후에서 남만주 철도를 폭파하였다. 일본 관동군은 군사행동을 개시해 만주사변을 일으켜 여러 지역을 점령하고 1932년 3월에 괴뢰정권 만주국을 세웠다.
이후 일제는 선전포고 없이 중일전쟁을 발발해 1937년 12월 난징에서 6주간에 걸쳐 20만 명의 중국 사람을 학살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홍콩, 미얀마, 필리핀 등을 점령하고 여러 나라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 태평양전쟁(사진:위키백과)
유엔은 1971년에 중국을 대표하는 나라가 타이완이 아니라 중국임을 결의해 일본은 타이완과 단교하고 1972년에 수교하였다.
일본 정부는 1982년 7월에 1983년 4월부터 사용될 일본 초·중·고교 역사 교과서에 한국의 고대사, 근대사, 현대사 들을 모두 왜곡 기술하였다. 예를 들면 침략을 ‘진출’로, 외교권 박탈을 ‘접수’로 독립운동 탄압을 ‘치안 유지 도모’, 식민 지배를 통합‘으로, 언어 말살 정책을 ‘공용어 사용’으로 교묘하게 말을 바꾸며 과거 침략사를 모두 부정하며 왜곡했다.
한국 언론과 일본 언론은 일본 정부의 처사를 크게 비판하였다. 역사 왜곡 문제는 한일 외교 문제로 크게 비화하였다. 한국 정부는 독립기념관 건축을 위해 1982년 8월 31일부터 국민 성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천안에 기공한 독립기념관은 1986년 8월 15일에 개관하려고 했으나 전기공사 화재로 8월 4일 화재가 발생하여 해를 넘겨 1987년 8월 15일에 개관하였다.
▲ 난징대학살 중국피해자 동포기념관(사진:江东门纪念馆)
일본 자민당은 우익의 지지를 받고 국민 무관심 속에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을 강행했다. 이에 중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대하여 역사 왜곡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중지를 요청했다. 그러나 아무런 외교적 후속 조치가 없어, 중국 국무원은 1985년 8월 15일 대학살 유적지 및 매장지에 ‘난징대학살 중국피해자 동포기념관’을 건립했다.
중국은 중일전쟁 발발 50주년을 상징하여 1987년 7월 7일에 ‘중국 인민 항일 전쟁기념관’을 개관했다. 이 기념관에는 ‘조선반도 독립운동 지원 특별전시관’이 설치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 이전 활동과 광복군의 창설과 훈련, 윤봉길의 일본 육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 암살, 동북항일연합군에 대한 지원 내용을 전시하고 있다.
▲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특별전시관(사진:신화망)
중국 정부는 과거 역사에 대한 사과와 반성이 없는 일본 정부의 태도를 더 이상 방관하고 묵과할 수 없어 2014년 2월 27일, 제1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제7차 회의에서 12월 13일을 난징대학살 희생자 국가추모일로 제정했다. 현재 중국에는 항일전쟁과 일본군의 악랄한 범행을 폭로하는 기념관이 100개나 건립되어 ‘치욕의 날’을 기억하고 있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와 국무원은 난징에서 2024년 12월 13일에 난징대학살 희생자 국가공식 추모 행사를 거행하였다. 지도자들은 추모사에서 “우리가 국가 추모제를 개최하는 것은 역사를 기억하고 과거를 잊지 않으며 평화를 소중히 여기고 미래를 개척하겠다는 확고한 입장을 선언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 2024년 12월 13일 난징대학살 희생자 국가 공식 추모행사(사진:신화사)
동해에 면한 일본 니가타현 가시와자키시(柏崎市) 사람들은 중국 아미산하교(娥眉山下橋) 글씨가 써진 나무 기둥이 조선에서 동해를 건너온 것이 아니라 6,000km나 떨어진 멀고 먼 중국 쓰촨성 아미산(峨眉山, 3,099m)에서 일본 해안까지 흘러왔다고 믿으며 중국과의 활발한 관광 교류를 간절히 희망했다.
▲ 니가타현 가시와자키시(柏崎市)(출처:Wikiwand)
야나기다 세이야마 교수는 일중우호한시협회(日中友好漢詩協會) 회장을 맡고 있어 柏崎市 고향 사람들이 중국과 우호 관계를 돈독하게 맺으려고 할 때 에도시대 일본 승려 료관의 한시를 중국 아미산 청음각(淸音閣, 청인거, 710m) 주변에 세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야나기다 세이야마 교수는 중국 자오푸추(조박초, 趙樸初, 1907~2000) 중국불교협회 회장에게 일본에 있는 아미산하교 장승의 글씨를 설명하고 료관(良寬)의 시비를 제작하여 중국 쓰촨성 아미산에 세우고 싶다고 요청해 1990년 8월에 세웠다.
▲ 료관의 〈제아미산대교항(題峨眉山大橋抗)〉 중국 시비(詩碑)(사진:樂山市)
자오푸추(趙樸初) 거사(居士)는 집안이 대단히 부유했다. 그는 21세에 불교에 몸을 담아 70년을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하며 불교 연구에 매진했다. 그는 문화혁명 당시 중국 주요 사찰과 불교 유적을 파괴로부터 수호(守護)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거사는 중국 불교의 불씨를 보존하여 금지되었던 불교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였고, 한중일 3국 불교 연대를 이끌어 중국 불교 중흥을 하였다. 거사는 임종 시에 “내 안구와 장기를 기증하고, 시신을 병원에 해부 연구용으로 제공하며 일체 장례식을 치르지 말라.”라고 유언하고 94세로 떠났다.
▲ 〈無盡意 意無盡〉 조박초 서거 20주년(출처:大菩文化)
아미산 청음각은 아미산 안에 있는 8개 사원 중의 하나로 당나라 희종(僖宗) 4년(877)에 혜통선사(慧通禪師)가 건립했을 때는 집운각(集雲閣)이었으나 청나라 때 중건하면서 청음각으로 고쳤다.
아미산은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미인의 눈썹같이 아름답게 보인다고 하여 아미산(蛾眉山, 峨嵋山) 등으로 표기하나 원래 아미산(峨眉山)이 맞다. 이 산은 중국 무협 9대 문파 중의 하나인 ‘아미파’의 본거지이기도 하며, 1996년 유네스코 세계 복합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산에는 26개의 사찰과 도교 사원, 5,000종의 식물과 2,300종의 동물이 서식한다.
▲ 청음여경(淸音如境)(출처:ems517.com)
한보광은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1990년 동국대 선학과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는 야나기다 세이야마 교수가 보여준 장승이 조선 장승이라는 사실을 일본 학계와 불교계에 바르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자료를 수집해 연구했다.
그는 1995년 일본인도학불교학회에서 발표한 《娥眉山下橋木柱と韓國の長栍について》라는 논문에서 “1825년 일본 니가타 해변의 아미산하교(峨眉山下橋) 장승은 중국에서 온 것이 아니라 조선의 설악산 아미산 장승이 태풍으로 유실되어 표류한 장승이며, 조선에는 110개의 아미산 이름이 존재한다.”라고 주장했다.
2013년 정토학회에서 발간한 《정토학연구》 제19집에 〈보현보살 사상과 한국 아미산 장승 신앙의 승합〉이란 논문을 발표하며 청나라 오겸(吳謙)이 저술한 《의종금감(醫宗金鑑)》을 통해 고대 아미산 신앙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 오겸(吳謙)이 저술한 《의종금감(醫宗金鑑)》(사진:開放博物館)
《의종금감》은 총 90권 분량의 방대한 전문적인 종합 의서로 대표 저자가 오겸이다. 오겸은 건륭제 재위 연간인 1736년 태의원판(太醫院判)이 되었으며, 1740년에 건륭제는 오겸에게 황실이 비장하고 있는 책과 명의들의 책을 모두 참고하여 회족(回族) 출신으로 어의(御醫)인 유유탁(劉裕鐸, 1686~1757)과 함께 책을 편찬하라고 명하고는 총수관(總修官)에 임명하였다.
어의 유유탁은 황실에서 20여 년간 봉사했으며 의술이 뛰어나 옹정제의 신임을 받았던 인물로 두 사람은 힘을 합쳐 1742년(건륭 7)에 의서를 완성하여 황제에게 바쳤다.
《의종금감(醫宗金鑑)》에 의하면 북송 진종(眞倧) 때에 승상인 왕단(王旦, 958~1017)의 외동아들이 천연두에 걸렸다. 왕단은 재상 재임 기간에 과거제를 정착시키며 구준(寇準), 이적(李迪), 왕증(王曾), 장사손(張士遜), 여이간(呂夷簡) 등 많은 인재를 후원하고 추천 승진시킨 사람으로 명재상으로 명망이 높았다. 그런데 승상의 귀한 아들이 아미산 신인(神人) 두신(痘神)의 설법(說法)을 듣고 병이 바로 나았다고 하여 소문이 나는 바람에 아미산은 천연두를 치료하는 신앙의 성지가 되었다.
아미산 신인은 천모선랑, 삼교선녀(三橋仙女) 등으로 불렸는데, 그녀는 아미산 다리 입구에서 살았기 때문에 천연두 귀신이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신인은 보현보살의 화현(化現)으로 천연두를 방지하는 방두신(防痘神)으로 신봉되어 아미산 보현보살 신앙이 조선에 전해져 장승과 습합(習合)되었다.
▲ 청 화가 나빙(羅聘)이 그린 박제가(출처:추사박물관)
이 의학서는 1790년에 청나라에 간 조선 사신 박제가(1750~1805) 등을 통해 조선에 전해졌다. 1798년 다산 정약용이 두창(천연두 바이러스)과 마진(痲疹, 홍역)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책 《마과회통(麻科會通)》을 저술할 때도 청나라 《의종금감》의 내용을 활용했다.
과천 추사박물관에는 청나라에서 활동했던 시인이며 양주팔괴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나빙(羅聘, 1733~1799)이 그린 초정 박제가의 그림과 매화도가 전시되어 있다.
나빙은 한산습득도(寒山拾得圖)를 잘 그렸는데 유득공에게는 난초를 그려주고 박제가에게는 이별 선물로 매화를 주었다. 나빙은 그림을 팔러 베이징에 왔다가 사랑하는 부인 방완의(方婉儀, 號 白蓮, 1732~1779)의 부음을 전해 듣고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슬픔을 갖고 있었다. 18세에 나빙에게 시집온 방완의는 여성 화가로 섬세하고 생동감 넘치는 꽃과 새 화조화(花鳥畵)를 잘 그렸다.
▲ 방완의 화조화(花鳥畵)(사진:바이두백과)
서예가 옹방강(1733~1818)은 화가 방완의가 48세 젊은 나이에 죽은 것을 추모하며 묘비명을 지었다, “만권의 매화꽃과 한 권의 백련은 그 그림도 禪하고 詩도 仙합니다, 내 글은 얼음과 눈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 돌과 함께 영원히 전해집니다.”
【원문】
婉仪善画梅、兰、菊、竹、石,罗聘称其有出尘想,惟不苟作。平望张子,藏其夫妇合画册子,中有《涉江采芙蓉》图,澹冶清妙,乃出其手。所用小印,曰“两峰之妻”。卒年四十八,翁方纲为其作墓志铭曰:“万卷梅花,一卷白莲,其画也禅,其诗也仙;吾文冰雪兮,与此石俱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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