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7년 울산 상인-어부 12명 시마네현 표착...마쓰에역사관, 초상화 전시회 개최 조선 표류민 초상화 전시회
17~18세기에 한반도를 횡단하는 태풍이 자주 발생하면서 금강산과 설악산을 비롯하여 동해안의 여러 사찰과 마을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태풍이 지나가면서 엄청난 폭우를 동반하여 계곡에 홍수가 발생해 하류 쪽 마을들은 모두 사라졌다. 특히 마을 입구에 서 있던 장승들도 급류를 타고 바다로 흘러 두둥실 멀리 떠다녔다. 일부 장승은 동한해류를 따라 바다 위를 떠돌다 일본 서쪽에 있는 야마가타현, 니가타현, 시마네현 바닷가에 표착(漂着)했다.
▲ 동한해류 흐름도(출처:국립해양조사원)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90권 선조 38년(1605) 음력 8월 8일 경술 3번째 날 기록을 보면 강릉 부사 김홍미(金弘微)가 강원도 감사 한덕원(韓德遠)에게 강릉 지역의 피해 상황을 보고한 내용이 실려있다.
강원도 감사 한덕원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강릉 부사 김홍미의 첩정(牒呈: 공문서를 윗사람에게 올림)에 이달 19일부터 20일까지 폭우가 억수같이 내리고 태풍(大風)이 심하게 불어 사람이 서 있지 못하고 지붕의 기와가 모두 날아갔으며, 모래가 날리고 나무가 뽑혔으며, 낮인데도 어두컴컴하였다. 수전의 올벼와 늦벼는 이삭이 모두 패였다가 모두 떨어졌으며 논밭의 곡식도 모두 손상되었다. 이는 근고에 없던 변으로 가을에 추수할 전망이 없어졌다. 대개 대관령(大關嶺)으로부터 계곡을 지나 해변에 이르기까지 50여 리에 남대천(南大川)이라고 하는 시내가 있는데 방수천 가에 나무를 심고 둑을 튼튼하게 쌓아 제방이 몹시 견고하였다. 그런데 요란한 굉음소리와 함께 산을 무너트리고 바다를 뒤집을 형세로 두 물줄기가 양쪽에서 덮쳐, 계곡 사이에 살던 관노비 1백여가가 물난리를 만나 사람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고 나무 위로 피했지만,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한꺼번에 모두 떠내려갔다. 당시 사람들은 온 가족이 옷으로 묵어 죽었다. 곡하는 소리가 하늘까지 울려 퍼져 보고 듣지 못할 지경이었다. 내가 친히 남쪽 성에 가서 통곡하고 돌아왔다. 대관령 아래서부터 해변에 이르기까지 원래 있던 전지(田地)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흰모래(白沙)만 가득히 널려 있으며 익사(溺死)한 우마(牛馬)가 부지기수다. 백성들이 살아갈 길이 없어 몹시 참혹하니 비상한 재변이다.” 하였습니다.
【원문】 其間門官奴婢百餘家等, 卒然遇之, 左右大漲, 環匝洶湧, 許多人物罔知所措, 各各聚集家上, 或升木, 木拔家破, 一時漂流, 各自披髮, 妻子同生一族, 同結衣帶以死。 號哭之聲, 干雲徹霄, 耳不忍聞, 目不忍見。 府使親到南城, 大慟而還。 自府下坪田畓, 幷千餘石地埋沙, 大小民家, 盡數漂沒, 人無所依接。 自大嶺山下以至海邊, 膴膴原田, 惟見白沙瀰漫, 牛馬溺死, 亦不知其數。 民無生道, 極爲慘酷, 變異非常事。
인제(麟蹄), 양양(襄陽), 고성(高城), 금성(金城), 간성(杆城), 삼척(三陟), 회양(淮陽) 등의 고을도 마찬가지로 재변을 입었는데 도로가 끊겨 아직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였는데 예조(禮曹)에 계하(啓下: 왕의 지시 내용을 적어 다시 내림)하였다.
▲ 김현준 박사전공(사진:UST-한국건설기술연구원(KICT) 스쿨)
한국건설기술연구원(KICT) 김현준 박사 전공은 수문학(水文學)으로 물의 순환을 주로 연구하며 가뭄이 얼마나 지속할지, 지하수는 얼마나 사용할 수 있는지, 홍수는 얼마나 커지고 하천이 범람하게 될지를 연구하였다.
김 박사는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재해를 모두 조사하여 《조선시대 자연재해사》를 저술하였다. 책에는 조선시대의 큰비는 283건, 큰물난리 177건이 발생하고, 서울 부근은 1400년대 이후 홍수가 172건이나 발생했다고 적었다.
조선의 태풍 기록은 177개나 되는데, 명종(1545~1567) 때는 29회의 태풍 기록이 있고 가뭄이 들어 태풍 기록이 없는 국왕도 있었다.
▲ 범선 코리아나 호(사진:궁인창)
필자는 범선 코리아나(선장 정채호) 호를 타고 동해(東海)를 10여 년 항해하면서 극심한 바람과 황천 항해를 경험해 바람과 표류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2019년에는 일본 돗토리박물관, 이즈모박물관, 마쓰에 향토자료관 등을 방문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고문헌을 조사했다.
태풍으로 인해 일본에 표착한 것은 배, 어민, 무관, 승려, 생활 도구, 장승 등 정말 다양했다. 고문헌에는 바람을 구풍(颶風), 광풍(狂風), 맹풍(盲風) 등으로도 표현하는데, 구풍은 회오리치면서 북상하는 급격한 바람으로 열대지방에서 발생하는 저기압을 말하며, 재해(災害)와 관련하여 풍황(風蝗)과 풍제(風災)로 표현하기도 한다.
▲ 일본 돗토리박물관(사진:궁인창)
일본에 표착한 표류민 가운데 1675년 무과에 급제한 이지항(李志恒)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남한산성 수어청에서 근무하다 부친상을 당해 직위를 반납하고 고향 동래에 내려갔다.
3년 상을 지내고 1696년(숙종 22) 4월 13일 강원도 원주로 가려고 부산포에서 배를 얻어 탔는데, 경상도 영해부(寧海府, 盈德)을 지나다 횡풍(가로부는 바람)을 만나 배의 미목(尾木)이 부러지고 부서졌다. 배가 여러 날 표류하여 일본 북부의 에조지(홋카이도)에 도착했다. 8명의 표류민은 아이누족을 만나 손짓, 발짓하며 서로의 생각을 소통하였다.
▲ 아이누족(사진:위키피디아)
다행히 함께 배에 오른 김백선이 일본어를 잘 알아 소통에 어려움이 없었다. 일본 관아에서 이지함은 한시(漢詩)를 많이 지었다. 그가 쓴 한시는 《漂流朝鮮人李先達呈辭》에 실려 있다. 선달은 벼슬을 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표류민들은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11개월이 지나 다음 해 3월 5일에 부산포로 돌아왔다.
이지항은 관아에서 조사받으며 공술 기록 《표주록(瓢舟錄)》을 남겼다. 이지함은 숙종 46년(1720)에 한성의 치안 업무를 담당하는 종 6품 부사과(副司果)에 임명되었다.
조선 승려 법성(法性)은 1654년 봄에 경주 천태산에서 조성한 16 나한상을 경주 장진포로 이운하였다. 배를 출항하여 하동 쌍계사로 항해하다 태풍을 만나 북해롤 표류하여 흑룡해로 갔다가 2년 반 만에 조선에 돌아왔다. 법성이 김수증에게 이를 말해 김수증은 이를 채록하여 《곡운집》에 실었다.
1819년 1월 강원도 영해 상선 안의기 선장의 배는 항해 중 표류하여 동해를 건너 일본 돗토리현 아카사키(赤崎) 근해에 표착했다. 일본 아카사키 연안 순시선은 배에 탄 조선인 12명을 확인하고 돗토리번으로 데려가 그들은 4개월간 머물다 나가사키를 거쳐 9개월 만에 조선에 돌아왔다. 일본 돗토리현청 자료에는 1767년 장발 어민 4명과 1838년 울산 소금 장수 5명 등 3건의 조선 표류민 기록이 남아 있다.
▲ 가타야마 요시히로(片山善博) 교수(출처:大正大學)
가타야마 요시히로(片山善博, 1951~ )는 오카야마현에서 태어나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74년 일본 총무성에 들어갔다. 그는 돗토리현청에 파견되어 총무과장으로 근무하다 1991년 표류조선인 지도를 처음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는 일본 돗토리현에 다녀간 안 선장 일행이 출항했던 울진군 평해읍과 기성면 등지를 방문하여 후손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1994년에는 강원도와 돗토리현이 자매도시로 결연하도록 앞장서고 1998년 12월에 퇴임했다. 1999년 4월에 민선 돗토리현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15대 돗토리현의 지사가 되고 요나고 공항에 직항 노선 개설을 성사시켰다.
그는 개혁파 지사로 주민에게 인기가 좋아 2003년 치러진 제16대 돗토리현지사 선거에서는 무투표 당선이 되었다. 2010년 칸 나오토 내각에서 일본 총무대신을 역임하고 현재 도쿄 다이쇼대학(大正大學) 지역창생학부 공공정책학과 특임교수로 지방분권 개혁, 지지체의 자립, 주민의 정치 참가들을 연구하고 있다.
필자는 2019년 2월 11일에 일본 시마네현 마쓰에역사관(松江歷史館)을 처음 방문했다. 이날은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돗토리역에서 첫 기차를 타고 안용복이 머물렀던 호산지를 방문하고 이즈모 지역으로 이동해 이즈마타이샤, 이즈모 등대 등을 구경하고 오후 4시경에 마쓰에 역사관에 도착했다. 마쓰에역사관에는 볼거리가 정말 많아 오랜 시간 구경했다. 2024년 4월에 친구들과 함께 마쓰에성을 구경하고 휴관을 알면서도 전시관을 알려주려고 찾아가 마당에 전시된 작품과 도구를 설명했다.
▲ 일본 돗토리현 요나고성 해넘이(사진:궁인창, 2024년 4월 28일 촬영)
일본 역사 지리학회는 헤세이 16년(2004) 7월 2일부터 7월 5일까지 제47회 대회를 시마네현 마쓰에시 시마네현민회관에서 ‘종교문화의 역사지리학’이란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는 학자를 비롯하여 많은 시민이 참여하였다. 한 시민이 집에서 보관하던 〈오키국 지도 그림(隱岐國繪圖)〉과 8명의 〈조선 표류민 그림〉을 역사 지리학회 관계자에게 보여주어 이케하시 타츠오 회장과 마쓰에 현립도서관 우치다 후미예 씨 등이 감정한 결과 분세이(문정, 文政) 10년(1827)에 작성한 것임이 밝혀졌다.
▲ 2004년 일본 신문 기사(사진:松江歷史館)
작품 소장자는 레이와 5년(令和 5, 2023년)에 그림을 마쓰에역사관(松江歷史館)에 기증하여 마쓰에역사관은 2025년 1월 28일부터 3월 30일까지 〈조선표착민초상화〉 전시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 마쓰에역사관(松江歷史館) 전경(사진:JNTO)
향토사학자 스기하라 씨가 조선인 초상화를 조사하려고 기록이 남아 있는 나가사키현에 조회한 결과 “1827년 2월 중순에 조선 울산에 사는 상인과 어부 12명이 배에 승선해 부산으로 가서 세금을 쌀로 납입하고 울산으로 돌아오다가 폭풍우를 만나 배가 표류해 1827년 3월 8일 시마네현 오키군 카이시마치 아마조(海士町)마을에 12명이 표착하게 되었다.”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 조선 표류민 표류 과정(사진:松江歷史館)
표류민은 마쓰에현, 나가시키현, 대마도를 거쳐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에도시대 일본 오키섬에 조선인의 표착 기록은 15건 기록이 남아 있지만, 평민의 초상화를 그린 것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 〈조선표착민초상화〉 전시회(사진:松江歷史館)
초상화는 종이 1장에 1명씩 개인적 특징을 파악하고 이름, 연령, 신장을 그대로 기록했다. 그림에는 인물의 특징이 자세하고, 옷이 상하가 나누어진 흰색 옷을 입고 있다.
▲ 〈조선표착민초상화〉 전시회(사진:松江歷史館)
필자가 그림을 상세하게 들여다보니 그림 위쪽에는 표류민 성명 張家, 朴家, 尹家, 鄭家, 陳家, 韓家, 朱(周)家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배의 선장은 朴家로 제일 나이가 많아 66세, 키가 5척 2촌(약 157cm)이며 옷의 깃이 다른 사람보다 두껍게 되어 있고 바다를 멀리 응시하며 아주 노련하게 묘사되었다. 50세 1명은 尹家로 키가 172cm로 다른 사람보다 컸다. 46세 1명, 젊은 20대의 평균 키는 153~165cm 정도였다.
▲ 〈조선표착민초상화〉 전시회(사진:松江歷史館)
그림은 종이에 검은 먹(墨)과 붉은 주(朱)의 2개의 색을 사용해서 표류민을 잘 묘사했다. 학자들은 조선 표류민 입술이나 볼에 붉은 색을 칠한 초상화 그림은 표류민을 귀국시키기 위해 당시 관리가 직접 그린 것 같다고 설명하였다. 조선표류민 12명 중 그림이 없는 4명의 초상화가 분명히 더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 〈조선표착민초상화〉 전시회(사진:松江歷史館)
〈조선표착민초상화〉는 시마네현에서 발견된 두 번째 조선인 그림으로 덕천막부(德川幕府)는 조선과 원만하게 국교를 유지하고 있어 각 번(番)에 표착선이 도착하면 정중히 구조하여 조선 표착민을 나가사키로 보내고 쓰시마번 통역이 표착한 이유 등을 상세히 듣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