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르트 선단, 남연군 묘 도굴 실패 일파만파 ...삽교천 방조제 완공으로 뱃길 끊겨 역사에서 사라진 예산군 구만포
흥선대원군의 부친 남연군(南延君, 1788~1836) 묘를 도굴하기로 계획한 상인 오페르트와 페롱 신부 일행은 청나라 상하이 무역항을 출항해 일본 나가사키 항에서 모든 도구를 챙겼다.
1868년 4월 16일(양력 5월 8일) 새벽에 일본 나가사키 항에서 680톤급 차이나(China) 호와 그레타(Greta) 호 배 두 척에 선원 140명을 태우고 출항하여 양력 1868년 5월 9일 오전 10시 충청도 홍주군 행담도(行擔島)에 정박했다. 다음날 5월 10일에 작은 배 그레타 호로 바꿔 타고 삽교천을 거슬러 올라가 오전 11시에 구만포(九萬浦)에 상륙했다.
▲ 구만포(九萬浦) 지형도 (사진:구글지도)
덕산현 구만포는 청나라 상인들의 사업 거점으로 중국 비단, 잡화 등이 들어오고, 완도에서 새우젓 배가 들어와 내륙으로 유통되는 내륙 포구였다. 고려 때는 삽교천 주변에 60포가 있었는데 구만포는 수심이 깊어 비방곶면 돈곤리의 돈곶포(頓串浦, 戎陣)와 함께 가장 영향력 있는 포구로 큰 배들이 많이 들어왔다.
구만포란 이름은 내포평야에서 생산한 벼 구만 섬과 소금을 실어 날라 붙은 이름으로 1979년 삽교천 방조제가 완공되면서 뱃길이 끊어지고 오랜 역사와 명성이 사라졌다.
▲ 구만포(사진:예산시, 김춘도 1956년 촬영)
조선 선교사인 프랑스 페롱(S. Feron, 權 스타니슬라오, 1827~ ) 신부와 병졸 100명은 사람들에게 아라사인이라고 사칭하고 30리를 걸어서 덕산(德山)에 도착해 정오에 관아를 습격했다. 오후 5시 30분경에 남연군(南延君) 묘에 도착하고 인근에 있는 농가에 들어가 곡괭이 등을 약탈해 묘를 파헤쳤다. 당시 덕산 군수 이종신(李鍾信)은 아전, 가동(伽洞) 주민들과 합세하여 도적에게 달려들었으나 소총으로 무장한 폭도들에게 대적할 수가 없었다. 도굴범들은 땅을 아무리 파도 묘광이 회로 단단해 뚫지를 못했다.
페롱 신부는 남연군 묘에서 시신을 탈취해 조선 조정에 통상을 요구하고 천주교 신앙 자유를 요구하려던 계획이 완전히 실패한 것을 깨닫고는 해가 떠오르자 오전 6시경에 철수를 결정해 신속하게 후퇴해 구만포에 정박한 그레타 호에 승선했다. 그들은 서해의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썰물 시간을 놓치면 배가 빠져나가지 못할까 걱정되어 무척 두려워했다. 다행히 물때가 잘 맞아 차이나 호가 있는 행담도에 도착했다.
오페르트 선단은 서해를 북상하다 인천부 영종도에 닻을 내렸다. 해안을 지키던 하급 무관과 군졸은 수상한 이양선이 나타나자 신속하게 배에 접근하여 상황을 살폈다. 오페르트는 계급이 낮은 무관과 대화하다 프랑스 제독 알리망(Allemagne)의 명의로 조정에 올리는 교섭 내용을 전했다. 무관은 즉시 영종진 첨사에게 보고했다. 영종진 첨사는 5월 12일 흥선대원군에게 통상교섭 서한을 전했다. 조선 조정은 5월 13일에 덕산 사건을 처음 보고 받고 충격에 빠졌다.
▲ 남연군묘(사진;디지털예산문화대전)
영종진 신효철 첨사는 삼 일째 되는 날 오페르트에게 답장을 보냈다. 편지 내용은 도굴 만행을 규탄하고 양이(洋夷)하고는 성기(聲氣)가 서로 통하지 않아 도로 문서를 되돌려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배의 함장이 성벽 밑에서 풀을 뜯는 소를 발견하고는 갑자기 소를 사고 싶다고 해 흥정을 하였다. 그때 성벽 가까운 곳에서 동시에 총성이 일어나 성벽 아래 있던 2명의 마닐라 선원이 죽고 유럽인 1명이 총상을 입어 선장은 배를 상하이로 돌렸다.
필자는 당시 조선의 정황을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5권 음력 4월 26일 자 기록을 살펴보았다. 영종진(永宗鎭) 첨사(僉使) 신효철(申孝哲)은 양이(洋夷) 추적을 왕에게 보고하면서 “양이가 영종진 내에 상륙하여 총검을 들고 난동을 부려 교전하여 몇 놈을 죽이자, 적들의 배가 물러갔다.”
【출전】 議政府啓: "卽接永宗僉使申孝哲狀啓謄報, 則‘洋夷先次殲獲幾漢, 而彼船仍爲少退’云。
남연군 묘 도굴 사건은 청나라 상하이에 금방 소문이 나고 큰 소란이 벌어졌다. 상하이 영자신문 《노스 차이나 데일리 뉴스》는 1868년 5월 22일 자 기사에서 「도굴을 목적으로 한 어설픈 원정(amateur resurrectio, ary expedition)」이라는 제목 아래에 로마 가톨릭 사제의 복장을 한 어느 첩자가 조선에 가서 권력자의 유해를 찾으려 했다는 내용을 크게 실었다.
1868년 6월 22일(양력) 벨로나 대리공사 후임으로 1867년 5월에 주청(駐淸) 프랑스 공사로 부임한 랄르망(Lallemand) 공사는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려고 르모니에 신부에게 대외비 서한을 보냈다. 르모니에 신부는 랄르망 공사에게 서한을 보내 “조선에서 천주교와 신부들을 더 혐오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고 신자들을 더욱 박해하는 빌미를 줄 것이다.”라고 적었다. 르모니에 신부는 기사가 실린 영자 신문과 보고서를 파리 지도자에게 발송했다.
영종진을 잘 수호한 신효철 첨사는 1869년에 인천부사(仁川府使)가 되고 1870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남연군 이구(李球, 1788~1836)의 묘는 경기도 연천군 남송정(楠松亭)에 있었다. 소설이나 야사(野史)에 의하면 파락호(破落戶)로 지내던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어렵게 살면서도 가슴속에는 항상 야심을 품고 살았다.
하루는 잘 아는 지관을 찾아가 슬픈 목소리로 신세 한탄을 하였다. 그러자 지관 정만인이 지나가는 말로 “충청도 가야산(678m)에 2대에 걸쳐 왕이 나오는 명당자리가 있다.(二代天子之地)”라고 알려주었다.
이하응은 바로 집을 팔아 돈을 만들어 사람을 사서 헌종 6년(1840)에 명당 터에 있는 사찰 가야사(伽倻寺) 주지에게 돈을 전달하고 밤에 몰래 불태우고 금탑을 훼손하게 하였다. 그리고 충청감사를 찾아가 집안에서 가장 소중하게 전해 내려오는 중국 단계(端溪) 벼루를 선물하며 가야사 승려들을 내쫓고 화재를 눈감아 달라고 부탁했다.
몇 년이 지나 이하응은 선친 묘를 500여 리 떨어진 덕산으로 이장하려고 귀후서(歸厚署)에서 만든 ‘남은들상여’를 구해 1848년 여러 마을을 거쳐 덕산으로 운구하였다. 상여는 마지막으로 상여를 메었던 남은들(현재 덕산면 광천리) 주민들에게 하사했다. 남은들 주민들은 상여를 귀하게 여겨 보호각을 지어 잘 보호했다.
▲ 남은들상여(출처:예산군)
2005년 12월 남은들 상여 머리 장식이 도난당했다. 저녁에 TV에 크게 보도되자 범인들은 장식을 고속도로 신탄진휴게소에서 버리고 도주하다 경찰에 검거되었다. 이에 놀란 예산군은 남은들 상여 진품을 2006년 3월에 국립고궁박물관으로 보내고, 2012년 9월 인간문화재 배순화 매듭장과 1명의 인간문화재가 1년 걸려 복제품을 제작해서는 상가리 상여각에 보존하고 남연군묘를 찾는 관광객에게 선보이고 있다.
아이가 없어 고민하던 이하응은 1852년에 차남 명복을 얻었다. 나이 어린 명복은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수렴청정하던 신정왕후(1809~1890, 趙大妃)가 흥선군의 둘째 아들 12세 명복을 양자로 입적하여 1864년에 조선 제26대 국왕으로 등극하게 했다. 이하응은 살아있는 대원군이 되었다.
▲ 신정왕후 조씨(사진:위키백과)
애국지사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은 《매천야록》에 남연군 묘에 대한 이장 기록을 소상하게 기록했다. 일부 내용은 소설과는 많이 다르다. 가야산과 내포 지역을 연구하며 《내포에 핀 연꽃 가야산의 절터들》을 펴낸 김기석은 이하응이 불 지른 사찰은 가야사가 아닌 묘암사라고 주장한다.
김기석은 조선시대 예헌(例軒) 이철환이 1753년 나이 32살 때 인천 소래포구를 출발하여 가야산 일대 불교 유적지를 4개월간 유람하고 남긴 《상산삼매(象山三昧)》 유기(遊記)를 근거로 가야사는 이미 폐사되고, 주변에 가야사를 모칭하는 절이 있었다고 말한다.
▲ 매천(梅泉) 황현(黃玹)(사진:국립중앙박물관)
필자는 수덕사를 방문할 때 동행한 일행에게 남연군의 묘를 소개했다. 서울에서 승용차로 출발하면 정오에 덕산에 도착한다. 일행들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호소해 유명한 한정식집 덕산 불고기집으로 향했다. 든든하게 맛 좋은 불고기를 먹고 나서 차를 타고 20여 분 산속 도로를 따라 쭉 들어가면 남전마을 회관이 보인다. 차를 세워 놓고 800m 걸어가면 남연군 묘가 보인다.
국가유산청은 2013년에 가야사지 발굴 조사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확인했다. 폐사된 가야사는 산내 99개의 암자가 있을 정도로 규모가 엄청나고, 고려 나옹화상이 세운 금탑이 있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였다. 당시에는 천년고찰 수덕사가 말사로 있었다.
백제에서는 최고 높은 산을 상왕산(象王山)이라 불렀다. 불교학자 고영섭은 가야(伽耶)라는 말은 범어 가야(Kaya, Gaya)에서 유래하였는데 가야는 상(象) 즉 코끼리를 뜻하며,소라고도 번역되어 가야산을 우두산(牛頭山)이라고도 불렀다고 2017년 《한국불교사연구》 제12권에 기고한 〈‘가야’’(Gayā) 명칭의 어원(語源)과 가야불교의 시원(始原)〉 논문에서 밝혔다.
▲ 예산 가야사지 발굴 현장(사진:예산시)
평지를 걸어 작은 둔덕에 오르면 멀리 가야산이 보이고 석문봉(656m)과 옥양봉(621m)이 보인다. 두 산에서 흘러내린 곳의 명당 터는 사방이 암반(巖盤)이었다. 대원군은 서양 세력이 부친 묘를 도굴하려고 시도한 것을 보고 서양과의 무역 통상을 부정적으로 여겼다.
남연군 도굴 사건은 국제 문제로 번져 미국인 모험가 젠킨스 목사는 미국인에게 고발당해 재판정에 섰다. 그는 법정에서 항해 목적을 진술했다. 재판부는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처리했다. 패롱 신부는 마르세유를 거쳐 프랑스 파리로 돌아갔다.
페롱 신부는 조선으로 다시 가려고 했으나 조선 선교사 칼레, 마르티노, 리샤르 신부 등이 페롱 신부의 무모한 행동으로 조선의 신자들 박해가 가중되었다고 반대해 1869년 제6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된 리델 주교는 싱가포르에서 조선에 가려고 대기 중인 페롱 신부에게 조선 입국이 불가능하다고 통보했다. 페롱 신부는 1870년에 인도 퐁디셰리 지방으로 전출되어 1903년까지 활동하였다.
▲ 미국 군함 세난도어 호(사진:나무위키)
조선 조정에서는 1866년 7월에 제네럴 셔면호 침입사건, 9월에 프랑스 군대가 강화에 침입해 일어난 병인양요, 1868년 4월 목조 중기함 미 군함 세넌도어 호가 조선을 침범하여 셔먼호 생존 선원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다 대포를 마구 쏘며 무력 시위하다 돌아간 일, 덕산 남연군 묘 도굴 사건이 모두 조선의 내부 공모자가 가담한 것이라고 여겨 조선 팔도의 감영에서 천주교인을 색출하기 위한 작업이 무섭게 벌어져 많은 사람이 체포되어 박해를 받았다. 비열하기 짝이 없는 덕산 도굴 사건은 상하이 선교사들이 3년간 주교 받은 서한을 통해 당시의 진상이 낱낱이 밝혀졌다.
1877년 12월 6일 리델 주교가 파리 외방전교회 수장이었던 델페슈(Prosper-Bernard Delpech, 1827~1909) 고해 신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페롱 신부는 도굴 사건 당시 상해의 교우들이 사건에 가담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강제로 그들을 배에 태웠고 하선할 때도 권총 소지를 강요하고 이를 거부하자 소총 개머리판으로 교우들을 마구 때리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여성 교우들은 순교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첩이나 노비로 팔려 가고 박해는 5년간 지속되었다. 증오심이 격화된 대원군은 항구 곳곳에 척화비를 세웠다.”라고 적었다. 델페슈 신부는 1867년부터 35년 동안 외방전교회 수장을 맡았다.
▲ 우에노 히코마(上野彦馬)(사진:위키피디아)
우에노 히코마(上野彦馬, 1838~1904)는 일본 최초의 사진작가로 나가사키 풍경을 많이 촬영했다. 그는 시마즈 가문 부유한 ‘우에노 슌노스케’의 아들로 태어나 중국 고전을 공부하다, 가업을 위해 나가사키 의학전습소에 입학해 당시 네덜란드 교관이었던 ‘요하네스 폼페’에게 사말학(화학)과 사진술을 배워 우에노 사진관을 열었다. 그리고 스위스 사진가 피에르 로시에(1829~1890)가 1859년부터 1860년까지 일본에 머물다 나가사키에 왔을 때 습식 콜로디온 과정 사진을 배웠다.
영국인 사진가 펠리체 베아토(Felix Beato, 1832~1909)는 아편전쟁을 촬영하고 영국인 화가 겸 만화가인 찰스 워그먼(1832~1891)의 초청으로 1863년 일본에 도착해 21년간 요코하마에 살면서 일본의 여러 도시를 여행했다. 그는 4번 나가사키를 방문해 많은 사진을 남겼다. 사진가 베아토는 미국 함선에 초빙되어 신미양요에 관련된 사진을 모두 촬영했다.
필자는 당시 나가사키 항구의 주변 상황을 추측해 볼 때, 오페르트가 기획한 조선 원정에서 누군가 조선을 촬영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 메이지(明治) 7년(1876년) 나가사키 항구(사진:Hideto kimura)
상인 오페르트는 독일로 돌아가 함부르크에서 영사재판을 받고 잠시 수감 생활을 하였다. 그는 1880년 런던과 뉴욕에서 《금단의 나라 조선, A Forbidden Land: Voyages to the Corea》 책을 발간했다. 독일어판은 1886년에 발행했는데, 조선을 “중국과 일본 중간에 위치하며 아직 개방이 안 된 문명화되지 않은 국가”로 적었다.
▲ 오페르트 著 《금단의 나라 조선》(사진:위키피디아)
범선 코리아나 호 정채호 선장은 20여 년간 여수에서 나가사키까지 항해하여 나가사키 범선 축제에 참가하여 한일 친선 교류를 하였다. 필자는 범선 축제에 여러 차례 참가하였는데, 나가사키에 거주하는 기무라(82세) 선생님의 안내로 원폭기념관, 나가사키 역사박물관, 전쟁유적지를 탐방했다. 새벽에는 메가네바시(眼鏡橋)까지 걸어가고 흥복사를 참배하고, 히코마가 사용했던 모형 사진기를 만져보았다. 가메야마샤추 유적지 근처 시민공원에는 사카모토 료마(1836~1867)의 동상이 있는데 료마는 나가사키 항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사카모토 료마 동상(사진:나가사키관광국)
한국 사진의 날은 〈98 사진영상의 해 조직위원회(위원장 林應植)〉가 한국 사진의 역사를 기리고 현대예술에 기여하고 있는 사진예술 및 사진문화의 공로와 위상을 대내외에 널리 알린다는 취지로 1998년 4월 15일로 선포하였다.
동아일보 사진부장을 지낸 최인진 사진역사연구소장은 조선 26대 임금 고종이 1884년 3월 10일과 13일에 미국 외교관 퍼시벌 로웰의 카메라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고 주장한다. 최인진은 이런 사실을 윤치호가 1883년 1월부터 1943년 10월까지 60년간 저술한 《윤치호 일기》에서 찾아냈다.
일본은 사진이 전래한 6월 1일을 기념하여 1951년부터 ‘일본 사진의 날’로 정해 다양한 기념사진전을 개최하고 있다. 일본 나가사키대학 부속도서관 소장품 〈막부 말기, 메이지 시대의 일본 고사진 컬렉션〉에는 19세기의 많은 고사진(古寫眞)이 DB(데이터베이스)화 되어 있어 조사하려고 한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