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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5.03.13. 19:22 (2025.03.13. 19:22)

독일로 간 문화재 1만여점... 상인, 선교사에 의해 헐값에 대량 반출

 
독일 베를린민족학박물관의 조선 장승 / 독일 ‘베를린민족학박물관 훔볼트 포룸’에는 조선 인천부(仁川府) 조동면(鳥洞面) 담방리(淡方里) 별리고개(別離峴, 星峴) 장승백이(長僧店)에 있던 장승 대후(大堠)가 전시되어 있다. 훔볼트 포럼은 인류 역사, 예술, 문화에 전념한 프로이센 학자 빌헬름과 알렉산더 폰 훔볼트를 기리기 위해 명명된 곳이다.
독일로 간 문화재 1만여점... 상인, 선교사에 의해 헐값에 대량 반출
독일 베를린민족학박물관의 조선 장승
 
 
독일 ‘베를린민족학박물관 훔볼트 포룸’에는 조선 인천부(仁川府) 조동면(鳥洞面) 담방리(淡方里) 별리고개(別離峴, 星峴) 장승백이(長僧店)에 있던 장승 대후(大堠)가 전시되어 있다. 훔볼트 포럼은 인류 역사, 예술, 문화에 전념한 프로이센 학자 빌헬름과 알렉산더 폰 훔볼트를 기리기 위해 명명된 곳이다.
 
후(堠)는 우리말로 이정표(里程標)를 뜻하며, 별리고개는 현재 인천 남동구 만수동 장승배기이다. 장승에는 “서쪽으로 20리에 제물포가 있고, 동쪽으로 60리에 서울이 있다.(自仁川官門十里地名 峴 西距濟物浦二十里 東北距 京城六十里)”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이 장승을 1883년 박물관에 기증한 사람은 독일제국 외교관 ‘막스 아우구스트 스키피오 폰 브란트(Maximilian Augest Scipio von Brandt, 1835~1920)’이다.
 
 
▲ 독일과 네덜란드 박물관에 소장된 조선 장승(출처:황준구)
 
 
‘베를린민족학박물관’은 프로이센의 민족학자 아돌프 바스티안(Adolf Bastian, 1826~1905)이 설립을 주도하여 순수한 학문성(연구)을 추구하며 1873년에 초대 관장으로 부임하여 1905년까지 재임하면서 약 40만 점의 컬렉션을 보유해 독일 민족학의 토대를 마련했다.
 
당시 독일의 대도시 뮌헨(1868), 라이프치히(1874), 드레스덴(1875), 브레멘(1876) 등은 경쟁적으로 민족학박물관을 건립했다. 통일된 독일제국은 비스마르크가 퇴임하고 나서 1890년부터는 세계정치(Weltpolitik)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식민경쟁에 뛰어들었다.
 
 
▲ 국외한국문화유산 현황(출처:국가유산청)
 
 
필자는 개화기 시절 많은 사람이 오가는 길목에 서서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산하(山河)를 굳게 지키던 장승이 어떻게 배에 실려 베를린까지 가게 되었는지 기가 막힌 사연을 따라가 보았다. 문화유산청 국립문화재연구소 발표에 의하면 독일의 한국 문화재는 2018년 9월 조사로 10.940점이 소장되었음을 확인되었다.
 
조선의 개화기 때 인천과 부산을 거쳐 들어온 상인, 선교사, 무역상들은 사람들을 매수하여 돈을 주고 장승, 나무, 돌, 민화, 의상, 식기 등 문화재들은 닥치는 대로 수집해 가져갔다.
 
본 글을 작성하면서 대구교육대학교 이용일 교수가 학술저널 2013년 11월 《역사와 문화》 제26호에 기고한 〈베를린민족학박물과 식민적 코스모폴리타니즘〉 논문과 장승연구가 황준구 선생 등 여러 선학(先學)의 글을 읽고 참조했다.
 
 
▲ 독일제국 외교관 폰 브란트(사진:위키백과)
 
 
브란트는 프로이센 장군이며 군사 작가인 ‘하인리히 폰 브란트’의 아들로 태어나 베를린 프랑스 대학에 다녔다. 그는 프로이센 장교가 된 후 1859~1861년 빌헬름 왕자가 주도하는 동아시아로 향하는 에울렌부르크(Eulenburg) 원정에 참여하였다. 에울렌부르크 백작이 이끄는 외교사절단의 목적은 중국, 일본, 시암(泰國)과 외교 및 무역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원정대의 항해에는 3척의 전함과 함대를 지원하는 상선 1척 엘베(Elbe) 호가 참여했다. 그러나 항해 길은 무척 험난하여 경순양함 프라우엔롭(The Frauenlob) 호는 1860년 9월 5일 요코하마 해상에서 태풍을 만나 실종되어 5명의 장교와 42명의 승무원을 모두 잃고 두 척의 배만 간신히 에도만에 정박했다.
 
막부와의 협상은 여러 달 계속되었다. 막부와 협상하던 중에 1861년 1월 15일 밤 사쓰마 가문의 사무라이에게 습격을 받아 통역관 헤이스켄이 칼에 치명상을 입어 미국 공사관으로 달려가 치료하였으나 그날 밤에 절명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1861년 1월 24일 도쿠가와 막부와 프로이센 간의 무역 조약의 서명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원정대는 9월에 청 제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이전의 유럽 강대국이 맺었던 조약과 유사하게 맺어졌다. 원정대에는 의사, 화가, 무관, 비행사령관, 칼 에두아르트 호이스너 해군 중장, 라인홀트 폰 베르너(1825~1909) 제독, 지리학자인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1833~1905) 등 많이 사람이 참여했다.
 
 
▲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의 실크로드(사진:위키피디아)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은 원정을 마친 후 1868년부터 1872년까지 7차례 중국을 탐사하며 ‘실크로드’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외교관 폰 브란트는 도쿠가와 막부에서 프로이센의 집정관 겸 총영사를 지냈고, 2년 후에 요코하마의 프로이센 영사가 되었다. 브란트는 유럽의 외교관들과 독일 정책을 조율하면서 자신을 주장을 강하게 표현했다. 그는 종종 야심 찬 식민지 프로젝트의 개요를 제시했다. 브란트의 일본 내 활동을 기록된 문서를 보면 그는 독일 자산을 재배하기 시작했고, 칼 코펜이라는 독일 하사의 성공을 알게 된 후 신흥 일본 그룹의 군사 고문으로 파견했다.
 
코펜은 와카야마에서 사무라이 무리를 현대 군대로 변모시킨 명성을 쌓았다. 브란트는 1860년대에 일본에서 동료 외교관인 더크 드 그레프 반 폴스브룩, 타운센드 해리스, 러더퍼드 알콕, 구스타브 뒤센 드 벨쿠르 왕자와 함께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했다. 그는 일본 내 독일 정책의 초점을 성공적으로 전환하여 일본 내 입지를 확고히 했다.
 
브란트는 일본 북부에 있는 에조(홋카이도)에 독일 식민지 전초 기지를 세우려는 야망 속에 비밀 계획을 수립했으나, 메이지 천황이 일본을 통합하여 일본 내 독일 상업 및 문화적 입지 확대를 적극 추진했다.
 
1870년 늦봄, 브란트는 독일 콜벳 헤르타(German Corvette Hertha) 호를 타고 일본 전역과 쓰시마 섬을 여행하며 잠재적인 탄광을 조사했다. 그는 탄광 조사를 모두 마치고는 콜러 선장에게 조선과의 우호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 부산으로 항해할 것을 명령했다. 1870년 6월 1일, 헤르타 호는 부산항을 방문했다. 이는 부산을 방문한 최초의 서양 증기선이었다. 헤르타 호가 동래 항구에 입항하자, 조선 관리들은 생전 처음 본 검은 배를 보고는 서양의 악마라고 욕하며 빨리 나가라고 요청했다.
 
 
▲ 독일 콜벳 헤르타호(German Corvette Hertha)(사진:위키백과)
 
 
외교관 브란트는 통역사 나카노 쿄타로를 통해 독일 난파선 생존자 보호에 관한 협정을 협상하러 조선에 왔다는 사실을 말하며 동래부사 정현덕(1810~1883)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동래부사는 폰 브란트에게 배를 돌려 즉시 떠나라고 요구했다. 브란트는 다음 날 떠나기로 동래부사와 약속하고 출항 전에 부산 지역을 둘러볼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배에서 내려 크레이머 목사와 일본 정착촌을 구경하였다. 동행한 그레이머 목사는 정착촌이 아주 매혹적이라고 회고록에 적었다.
 
 
▲ 동래읍성(사진:부산 복천박물관)
 
 
동래부사 정현덕은 1867년 6월부터 1874년 1월까지 7년간 재직하면서 동래읍성을 수축하고, 금정산성의 동문과 서문을 재건하고, 만년대에 외영(外營)을 설치하고 군사훈련과 무예교육을 실시해 자주국방에 힘썼다. 읍성 수축에 1만 냥을 내놓아 모범을 보였다. 정현덕은 대원군이 크게 신임하는 사람으로 일본과의 협상에 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몇 년 전 조선에서 일어난 독일계 유태인이 저지른 남영군 묘 도굴 사건을 잘 알고 있었다. 1878년 후임으로 온 윤치화가 동래무예학교를 건립했다. 최학삼 교수는 동래부사 정현덕이 군사훈련을 시작하여 뿌리를 내린 동래무예학교가 최초의 근대학교라고 보았다.
 
프로이센(Pruisen) 상인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 1832~1903)는 함부르크의 금융자산가 집안에서 태어나 여행을 좋아하고 인종학자(Ethnologe)를 자칭했다. 그는 1851년 19살 때 홍콩으로 건너와 상하이에서 무역업을 시작했다. 그는 독학으로 중국 지식과 견문을 넓혀나가며 회사를 키웠다. 1859년에는 개항한 일본을 둘러보고 조선의 통상 개방 추진을 희망하며 무역을 통해 부를 쌓으려고 하였다.
 
고종 3년(1866) 음력 2월과 6월에 조선과 통상 교섭에 나섰다. 오페르트는 1866년 2월 12일 영국 상선 로나 호를 타고 해미현 서면 조금진(調琴津, 당진시 대호지면)에 도착했을 때 해미(海美) 현감과 수비대장 일행을 배에 초대하였다. 오페르트는 선상에서 영국의 스코트가 개량한 연통식 레코드로 음악 재생장치를 선보이고 선물했다. 선박 기관사가 바이올린을 켜서 서양 음악을 들려주었다.
 
오페르트는 여행기에서 조선에서 들은 징과 피리, 현금을 소개하고 가창의 특성과 자신이 선물로 가져온 뮤지컬 박스를 시연하고 그에 대한 반응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그는 조선인들이 서양 음악의 감상법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손풍금 소리에 매료되어 음악에 맞추어 춤추고 노래했다고 기록했다. 조선 사람들은 춤을 출 때 항상 노래를 함께 부르며 음악을 매우 즐겁게 듣는다고 적었다.
 
성신여대 김정섭 교수는 2023년에 《글로벌문화콘텐츠》 제55호에 기고한 논문을 통해 오페르트가 왕가의 무덤을 도굴한 패륜적 인물이지만, 음악 1곡씩 녹음과 재생되는 오르골(自鳴琴)을 국내에 전해 문화교류사 차원에서 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이 만남이 서양 근대 대중음악의 첫 전파 사례라고 보았다.
 
무역상 오페르트는 두 차례 조선을 방문하면서 통상 교섭이 성공하면 일확천금을 얻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조선 정부가 협상에 응하지 않자 실망했다. 1867년 자신의 회사가 파산하자 일확천금의 꿈을 다시 생각했다.
 
오페르트가 조선을 다시 방문하여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고 생각한 것은 천주교 박해에 흥분한 페롱 신부의 제안도 있지만, 조선의 장례식이 매우 호화롭고 매장할 때 부장품을 많이 묻었다는 것을 기록한 프랑스 파리의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장 밥티스트 뒤 알드( Jean Baptiste Du Halde, 1674~1743)’ 신부가 쓴 《조선 왕국》 책을 읽은 영향 때문이었다.
 
 
▲ 프로이센 상인 오페르트(출처:유대백과사전)
 
 
장 밥티스트 뒤 알드 신부는 중국학에 대한 최고의 권위자이며 역사학자로 27명의 예수회 선교사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1735년 파리에서 《서술》을 출간했다. 책의 원고가 방대하여 4권으로 제작되었다. 1680~1690년대 중국의 천주교인은 약 30만 명 정도로 선교사 64명이 활동하며 성당은 200개 이상이 있어 중국인의 생활상, 왕조사, 신부들의 육로 여정, 중국인의 형벌, 도자기, 경전과 의학서, 이민족 보고서를 통해 청나라 실정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유럽인들은 《서술》을 통해 만주, 몽골, 서장(西藏), 신강, 조선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서술》 권 4에는 레지 신부가 서술한 조선왕조의 지리 개관과 지방행정, 생산물을 적고, 조선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했다. 장 밥티스트 뒤 알디 신부의 《조선 왕국》은 1741년 영국에서 영어로 발간해 조선의 기록을 전혀 모르던 시절에 서양인들에게 조선의 실상을 알려주는 주요한 문서가 되었다.
 
페롱 신부는 1867년 5월에 조선으로 들어가려는 모종의 계획을 구상했다, 신부는 1868년 양력 3월에 파리 신학교 지도자에게 서한을 보내 조선 침투 구상을 간단히 보고하였다.
 
오페르트는 1868년 《조선 왕국》 책을 들고 상하이 미국 영사관에 근무했던 모험가 젠킨스(Jenkins. F)에게 접근하여 조선의 장례 문화를 소상하게 알려주고 설득해 항해 자금을 제공하게 했다. 그리고 병인사옥 때 조선에서 탈출한 페롱 신부와 만나 보좌관 겸 통역을 맡기기로 하고 뮐러(Moeller) 선장과 협의했다. 길 안내는 페롱 신부와 천주교도 최선일, 최인서, 이영중이 맡았다.
 
 
▲ 강원도 안변 석왕사 하원주장군(사진:국가유산청)
 
 
조선은 놀랍도록 장승의 나라였다.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 1891~1968)은 1919년 동경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선배가 불러 28살 때 조선총독부 촉탁 직원으로 채용되어 조선에 건너온다. 그는 1930년대 함경남도 안변군 석왕사를 방문하고 하원주장군(下元周將軍)을 촬영했다. 그리고 1941년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조선의 민속신앙, 풍수, 종교, 귀신, 부락제(部落祭) 등을 조사하였다. 석왕사 장승 사진을 보면서 옛날을 회상한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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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