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 국립 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비격진천뢰" 강좌를 듣고 자료를 정리해 봅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조총이라는 신무기에 놀라서 조선군이 혼비백산했다고 배웠다. 조선은 한양이 함락되는 등 임진왜란 개전 초기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꾸준히 개발한 각종 화약무기를 적극 활용하여 반격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특히 조선군이 시한폭탄인 비격진천뢰를 처음으로 사용한 경주성 탈환 전투에서 왜군을 수십 명을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상의 창의력이 빛나는 무기였다.
▼ 비격진천뢰(실물과 CT 촬영)
1.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의 뜻
폭발할 때 하늘을 진동하는 소리를 낸다 하여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날飛 칠擊 벼락震 하늘天 우뢰雷)라는 이름이 붙었다.
2. 제작자
1592년(선조 25) 병기(兵器) 제조 등을 관장하는 군기시(軍器寺) 화포장(火砲匠)이었던 이장손(李長孫)이 발명한 화약 무기로 임진왜란 때부터 조선 말까지 사용하였다.
3. 시한폭탄(時限爆彈)
당시 포탄은 화포에서 발사되어 적의 성(城)이나 성문(城門)을 공격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비격진천뢰는 오늘날과 같이 신관(信管, 발화) 장치가 있어 목표물까지 날아가 폭발하면서 천둥· 번개와 같은 굉음과 섬광, 그리고 수많은 파편(삼각형 형태의 쇳조각)을 쏟아내는 폭탄이었다. 시간을 조절해서 폭발하므로 일종의 시한폭탄이다.
4. 구조
비격진천뢰의 구조는 조선 후기 병기서(兵器書)인 『융원필비(戎垣必備,1813년 저술)』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몸체는 쇳물을 부어 만드는 주조(鑄造)이고, 형태는 둥근 공 모양으로 속에 화약, 철조각 등을 집어넣는다. 개철구(盖鐵口, 열고 닫을 수 있고 두드려 만든 단조鍛造)를 열고 내부에 화약과 빙철(憑鐵, 마름쇠인 철편)을 채운 다음, 가운데에 발화장치인 죽통을 넣는다. 죽통 안에는 목곡(木谷,나선형 나무막대)이라는 것이 있어 여기에 도화선을 감는데, 감는 횟수(10~15회)에 따라 폭발 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 이 독특한 발화장치는 다른 화기(火器)에서 볼 수 없는 비격진천뢰만의 특징이다. 진천뢰(震天雷)를 대완 포구(大碗砲口)로 발사하면 5백∼6백 보를 날아가 떨어진다고 "선조실록"에 적혀있다. 비격진천뢰의 몸체는 잘 깨어지는 주조(鑄造, 거푸집에 쇳물을 넣어 만듦)로 만들고, 개철부는 얇은 뚜껑을 보다 질기고 강하게 단조(鍛造, 두드려 만듦)로 만든 이유는 폭발 때 뚜껑이 먼저 부서지는 것을 방지하고, 본체가 쪼개지면서 쇳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한다.
5. 고창 무장읍성 출토 비격진천뢰 자료 요약
2018년에 전북 고창 무장읍성에서 출토한 비격진천뢰는 11점으로, 기존의 남아있던 비격진천뢰 5점 보다 많으며, 특히 개철부가 있는 상태로 발견되어 보다 많은 정보를 얻었다.
◆ 몸통(몸체)
• 유물의 전체적인 크기는 박리·박락된 부분과 바닥 융기부의 여부에 따라 약간의 차이 있음 • 대체로 몸체 높이 18∼19㎝, 몸체 지름 20㎝ 내외로 『융원필비』 의 중비진천뢰와 유사한 크기이고 두께는 1.8∼4.9㎝, 무게는 14.8∼16.1㎏ 정도
◆ 개철부
• 길이 6.3~7.5cm, 너비 4.5~5cm, 깊이 4.4~6.1cm • 개철부 뚜껑에 심지 구멍 2개
◆ 모형도
몸통은 잘 깨어지는 주조(鑄造), 뚜껑 개찰부는단단한 단조(鍛造)로 만듦
◆ 화약 삽입 과정
◆ 개철구 밀폐
6. 화포(완구)에서 발사하는 비격진천뢰
비격진천뢰의 발사 방법은 완구(碗口)라는 화포에 장착한 후, 비격진천뢰에 있는 도화선에 먼저 불을 붙이고, 이후에 완구의 도화선에 불을 붙여 발사한다. 혹시나 도화선 불이 꺼질 경우를 대비하여, 완구에 두 개의 도화선 구멍을 뚫었다. 비격진천뢰를 발사하는 완구는 크기에 따라 대·중·소완구로 구분되며, 비격진천뢰가 없는 경우에는 돌을 둥글게 다듬어 만든 단석(아래 그림의 ②)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7. 비격진천뢰 사용 기록
비격진천뢰에 대한 임진왜란 때 기록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징비록(懲毖錄)』, 『향병일기(鄕兵日記)』, 『정한위략(征韓偉略)』 등의 사료(史料)에서 확인할 수 있다.
류성룡(柳成龍,1542~1607)의 『징비록』에는 ‘비격진천뢰를 성안에 대고 쏘니 객사 마당에 떨어졌다. 왜군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서로 모여들어 구경했다. 조금 있다가 폭탄이 저절로 터져 천지를 진동하는 듯한 폭음이 나면서 철편이 무수히 흩어지니, 여기에 맞아 바로 죽은 자가 수십여 명이요, 직접 맞지 않았어도 놀라서 쓰러지는 자가 많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김해(金垓,1555~1593)의 『향병일기』에는 ‘왜적을 토벌하는 방책으로 비격진천뢰를 능가하는 것이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비격진천뢰가 얼마나 위력적인 무기였는지 잘 알 수 있다.-
일본 에도(江戶)시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본의 입장에서 서술한 『정한위략(征韓偉略)』 에 “적진에서 괴물체가 날아와 땅에 떨어져 우리 군사들이 빙둘러 서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폭발했다”고 기록했다.
1592년 9월 1일 경상 좌병사 박진(1560~1597)이 비격진천뢰를 경주 성안으로 발사했다. 왜적은 떨어진 비격진천뢰를 앞다퉈 구경하다가 포탄이 터졌다. 소리가 진동했고, 별처럼 퍼진 쇳조각에 맞은 20여 명에 즉사했다. 놀란 왜군이 이튿날 경주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선조수정실록-
▼ 1798년 경주읍 그림
★ https://www.youtube.com/watch?v=OWafbD79Ix4
마무리
1. 임진왜란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시한폭탄이라는 비격진천뢰 신무기를 개발한 것은 엄청난 일이다. 2. 비격진천뢰는 임진왜란 이후 개발해 19세기까지 창고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크게 개량은 안 한 것 같다. 3. 비격진천뢰 자료가 부족하다 보니 문헌과 발견된 실물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추정할 뿐이라 보다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4. 세계는 약육강식으로 국가의 힘(경제, 군사, 외교, 인구)이 없으면 나라는 사라지고 만다. K 방산의 명성이 높아져 좋지만 핵을 가지고 있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 우방국들을 믿되, 결국은 스스로 자주국방을 해야 한다는 의지를 갖고, 전쟁은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하므로 유비무환의 태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 사진-
출처 : 국립 중앙(진주) 박물관, 국가 유산청,호남문화재연구원,국립문화재연구소,구글,네이버,조선일보,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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