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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이경직(李景稷)
이경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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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직 (李景稷)
[1577 ~ 1640]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후손이다. 자는 상고(尙古), 호는 석문(石門), 본관은 전주. 이항복(李恒福)과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 지식지도
◈ 지식지도
이경직 (李景稷) 기호 학파 북인 서인 성리학 예학 정묘호란 대북파 진무 공신 오성과 한음 1623년 1624년 1617년 1602년 1589년 김장생 이항복 광해군 권율 김류 김자점 김집 송시열 송익필 송준길 영창 대군 이괄 이귀 이덕형 이이 이이첨 인목 왕후 인조 임해군 정여립 정인홍 임의백 이명준 이괄의 난 인조 반정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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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2) 백과
▣ 백과사전
[1577 ~ 1640]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후손이다. 자는 상고(尙古), 호는 석문(石門), 본관은 전주. 이항복(李恒福)김장생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이경직은 선조 34년(1601)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605년 식년시와 증광별시에 잇달아 합격하는 등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승문원에 소속되었다가 광해군 때 승정원·시강원·춘추관·홍문관·병조 등에서 봉직했고, 광해군 9년(1617) 여름 회답사(回答使) 오윤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618년 인목대비의 폐위 사건이 일어났을 때 조회에 불참한 일로 탄핵받아 5년간 향리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철산군(鐵山郡) 가도에 군대를 주둔하는 문제가 일어나자 조정에서 그곳을 부(府)로 승격시키고 이경직을 철산부사로 파견했는데, 자애로운 마음으로 백성을 보살펴 명군을 감화시켰다고 전해진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의주부윤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고, 1624년 이괄의 난 때 전라도절도사로서 왕을 호종했고, 그 뒤 수원부사와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지냈다. 1626년 다시 상경하여 장예원 판결사를 거쳐 병조참판으로 비변사 제조를 겸하였다. 1629년 도체찰부사(都體察副使)로 활약했고 이후 호조참판ㆍ예조참판ㆍ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모친상을 마친 뒤 1634년 도승지에 제수되나 다시 부친상을 당했고 1636년 다시 호군(護軍)에 제수되어 비변사 당상관을 겸하였다. 그 해 12월 청나라 군대가 침입하자 이조판서 최명길과 함께 모화관(慕華館)에서 청의 장수를 만났으나 그들의 의도가 강화(講和)에 있지 않음을 알고 바로 남한산성으로 왕을 뒤따라갔다. 산성에서 청과의 교섭에 있어 중국어에 능통한 그가 활약했고 도승지가 되었다.
 
1637년 봄 인조가 서울로 환궁하자 호조판서로 승진되고 다시 도승지에 서용되었고, 이듬해 지중추부사로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했다. 1639년 봄 강화유수(江華留守)에 제수되어 전후복구에 힘썼는데, 병으로 1640년 7월 임소에서 64세로 순직했다. 사후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효민(孝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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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