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1 ~ 1977] 대한민국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문인이다. 선승으로도 명성이 있었다. 출가후 받은 법명이 춘성(春城)이고, 법호는 춘성(春性)이다. 이춘성으로도 부른다. 본관은 평창(平昌)리며 별칭은 무애도인(無碍道人)이다.
강원도 출신이며 13세 때인
1903년에 출가하여 백담사에서
한용운에게 사사하였고 송만공의 문하에서도 사사하였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신흥사와
석왕사 주지, 광복 이후에는
망월사,
전등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평생을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았으며 한국 전쟁 때는 망월사를 지키기도 했고, 거침없는 육두문자 풍자로 유명하였다. 그의 풍자 중 기독교 광신도들을 조롱하여 "한번 죽었다 살아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내 좆은 골백번 죽었다가 부활했으니 내 좆을 믿으면 구천원 이상은 받지 않겠느냐."는 조롱이거나, "평생 한번 죽었다 살아난 것은 내 좆밖에 못봤다."는 조롱들과 경찰서에 끌려가서 내 고향은 우리 엄마 보지이고, 본적지는 우리 아버지 자지라는 풍자는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 그는 버스에서 "우리 주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했다."며 전도중인 맹렬 기독교신자를 향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은 아침의 내 자지밖에 없다." 라고 일갈하여 화제가 되었다.
만해
한용운과
백용성,
송만공의 제자로 일제 강점기 당시 반일 인사로 요시찰 인물이었으며 1940년대부터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한국 불교계에 욕쟁이 스님으로 유명하였다. 2002년 10월 당시 한국의 철학자 겸 사상가 김용옥이 그의 육두문자 발언을 방송에 인용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화엄경을 거꾸로 외웠을 만큼 실력을 드러내 당대 최고의 '화엄법사'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불의 음이 부처와 이별을 뜻한다며 평생 이불을 덮지 않고 잠을 잔 승려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