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0 ~ 1458]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호는 묵둔재(默遁齋)이며 본관은 안동(安東).
고조부는 정의대부 판예빈시사 김근중(金斤重), 증조부는 중현대부 전농정(典農正) 김득우(金得雨), 조부는 예조정랑 봉례랑(奉禮郞)
김혁(金革)이며,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지내고 안동 풍산현 소산리(素山里=금산촌)로 낙향한
김삼근(金三近)의 맏아들이다. 도승지 사간원대사간 성균관대사성 사헌부대사헌을 역임한 정헌공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은 그의 동생이다.
생애
세종때 음보(蔭補)로 관직에 나가 직장(直長), 주부(注簿)를 거쳐 1455년 겸주부(兼主簿)때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녹훈 되었다. 그 후 조산대부(朝散大夫) 한성부 판관(漢城府 判官)을 역임하였다. 1458년(세조4년)에 사망하였고 묘소는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역골 건좌(乾坐)에 있다. 묘표(墓表)는 후손 이조참판(吏曹參判) 김응순(金應淳)이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였을 때 고쳐 세우고 썼다. 배위(配位)의 묘소는 판관부군(判官府君=김계권)의 조후(兆後) 건좌(乾坐)에 있고 묘표가 있다. 그는 장자인 학조대사(道號는 등곡또는황악산인,세조~연산군때의 國師) 영형(永衡)를 위시하여 영전(永銓:사헌부감찰), 영균(永鈞:진사 봉사), 영추(永錘:문과 수원부사), 영수(永銖:사헌부장령)를 두었는데, 막내인 영수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였다.
배위 영인(令人) 예천권씨(醴泉權氏)는 1409년(태종9년) 2월 22일 태어나 1496년(연산군2년) 겨울 88세로 사망하였다. 친정아버지는 이조판서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제평공(齊平公) 권맹손(權孟孫:1390-1456)이고, 할아버지는 성주목사(星州牧使) 권상(權詳)이며, 증조는 영해부사(寧海府使) 권군보(權君保)이다. 외조는 종성부사(鐘城府使) 남적(南績)으로 본(本)은 의령(宜寧)이다. 또한 처외조 남씨(南氏)의 족보(族譜)를 상고(詳考)하건대, 제평공(齊平公) 권맹손은 곧 의정부좌찬성 증영의정 남을경(南乙敬)의 손녀사위이고, 찬성(贊成) 남적(南績)은 곧 남을경의 아들이며, 남적은 태조때 영의정을 지낸 충경공(忠景公) 남재(南在:1351-1419)의 종형제(從兄弟)이다. 슬하(膝下)에 5남6녀를 두니, 1남은 국사(國師) 등곡(燈谷) 학조대사(學祖大師) 영형(永衡)이고, 2남은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영전(永銓)이며, 3남은 진사(進士) 봉사(奉事) 영균(永鈞), 4남은 문과(文科) 수원부사(水原府使) 영추(永錘), 5남은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 영수(永銖)이다. 1녀는 아버지가 현감(縣監)인 유유(柳牖)로 진주인(晉州人), 2녀는 현감(縣監) 이장생(李長生)으로 성주인(星州人), 3녀는 주부(主簿) 정훈로(鄭勳老)로 청주인(淸州人), 4녀는 현령(縣令) 한영(韓穎)으로 평산인(平山人), 5녀는 봉사(奉事) 김윤만(金允萬), 6녀는 화천군(花川君) 병조판서 좌참찬 권함(權瑊,1423-1487)으로 안동인(安東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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