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0 ~ 1692] 조선 후기에, 예문관검열, 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서구(敍九), 호는 봉곡(鳳谷). 봉사(奉事) 송갑조(宋甲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송시영(宋時瑩)이고, 아버지는 송기태(宋基泰)이며, 어머니는 이정한(李挺漢)의 딸이다. 아버지 송기태가 송시열(宋時烈)에게 입양하였기 때문에 친할아버지는 송시영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83년(숙종 9)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을 역임하는 등 청요직에 출입하여 벼슬이 교리에 이르렀다. 시열이 죽기 5년 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해에 송시열이 박세채(朴世采)·이단하(李端夏) 등과 문답한 시사(時事)를 정리하여 『향동문답(香洞問答)』을 완성하였고, 송시열의 유소(遺疏: 대신이 죽움에 임해서 왕에게 올리는 소)를 직접 받았으며, 그 뒤 당쟁과 관련된 가정사를 『구화사실(構禍事實)』이라는 책명으로 남겼다.
【인용】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소년기에 할아버지 송시열 선생에게 글을 배웠는데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우암 선생은 그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어머니 완산 이씨가 돌아가신 후에 항상 송시열 선생 곁에서 학문에 전력하였다. 14세에 우암 선생이 입으로 구술하는 서찰과 각 집안의 문장을 거침없이 대필해서 송시열 선생은 늘 손자를 칭찬하며 흡족해 하였다 한다.
1675년(숙종 원년)
예송 논쟁으로 우암이 함경도 덕원으로 귀양 갔을 때 손자 송주석은 귀양지에 따라가서 학문을 강론했고 우암은 유배지를 장기-거제로 옮겨 위리안치당했다.
경신대출척으로 귀양 풀려 봉곡은 우암 선생을 모시고 돌아왔다.
가사문학인 송주석 선생의 「
북관곡」은 필사본으로 『은보집략(恩譜輯略)』에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은
1675년(숙종 1년)에 함경도 덕원으로 유배된 우암 송시열(宋時烈)을 함께 모시고 따라갔던, 그의 손자 송주석이 지은 유배가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