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조선시대에 성리학 또는 유교 이념에 반대하는 사람 또는 사상을 비난, 공격하는 용어였다. 사문(斯文)은 유학(儒學)을 가리킨다.
한국에는 고려말에 사문난적이라는 단어가 등장했으며
성리학이 국시가 되면서 반역자에 준하는 역적 취급을 받았다.
성리학이 교조화된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서는 상대방 붕당의 당인들을 매장시키는 악의적인 용어로 활용되었다.
송시열을 비난했던
윤선도가 사문난적으로 몰려서 매장되었고, 주자학의 절대성을 부정한
윤휴는 비난을 받았다.주자학을 부정하여 사형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보다는 역모에 휩쓸려 죽었다.송시열도 주자의 한계를 인정했지만 그걸로 사형당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남인의 영수이자 송시열의 정적인
허목은 주자학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학문도 진리일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 하여 사후 사문난적으로 몰렸으며,
윤선거는 제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 송준길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 역적이라는 과격한 상소를 올렸다가 사후 1680년(숙종 6년) 경신환국으로 관작이 추탈되고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스승 송시열과 회니시비로 절교하고 소론의 영수가 된
윤증 역시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후에 이경석의 묘비를 쓰면서 송시열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박세당은 그의 저서 중 송시열을 비판한 내용이 언급된 책 사변록이 출간되자마자 사문난적으로 몰려 매장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