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3 ~ 1592]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창진이고, 시호는 충장이다. 영암에서 태어났다. 젊어서부터 기질이 강개하였다. 28세의 늦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 봉사가 되었다. 훈련원은 조선 시대에 군사들에게 무술을 연습시키던 곳이었는데, 봉사는 훈련원의 가장 낮은 자리였다.
정운은 그 뒤 금갑도 수군 권관·거산 찰방이 되었다. 거산 지방의 찰방으로 있을 때, 감사가 데리고 온 수행원이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보고 수행원을 잡아다 곤장을 쳤다. 감사가 이것을 보고 좋아하지 않자 그는 벼슬을 버렸다. 그 뒤 웅천 지방의 현감이 되었는데, 그 곳에서도 감사와 뜻이 맞지 않아 벼슬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는 여러 자리에 있으면서 성격이 곧고 강직하며 항상 정의를 지켰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몇 해 동안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특히, 제주 지방의 판관으로 있을 때는 목사의 뜻에 거슬려 벼슬을 버렸다.
1591년에는 녹도 만호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원균은 전쟁을 무서워하여 도망치려 하였다.
이순신이
원균을 구원하기를 망설이자 군관인
송희립과 함께 원균을 도와 줄 것을 울면서 간절하게 호소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원균을 도와 적을 물리쳤고, 원균은 왕의 표창을 받았다.
또, 정운은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군사들과 함께 결사적으로 전쟁에 나갈 것을 주장하였다. 그 뒤 이순신의 군사들과 함께 선봉장이 되어
옥포·
당포·
한산 등의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9월에 부산 앞바다에서 왜선 500여 척과 싸웠는데, 다른 장수들은 모두 후퇴하였으나 정운은 혼자 싸워서 많은 왜군을 물리쳤다. 도망가는 왜선이 있어 쫓아가다가 왜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부산포해전)
1604년에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1796년 정조 때는 병조 판서 겸 의금부 훈련원사로 추증되었다. 영암의 충절사에 제향되었고, 흥양 쌍충사에는 이대원과 함께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