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5 ~ 1854] 관념론을 펼친 독일의 철학자. 뷔르텐베르크 지방의 레온베르크에서 태어났다.
1790년 15세 때
튀빙겐 대학에 들어가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였고, 자신보다 5세가 많은
F. 횔덜린,
G.W.F. 헤겔과 친하게 지냈다.
피히테의 철학을 쉽게 이해하여, 1793년에 《철학의 원리로서의 자아에 관하여》 등을 발표하였다.
1798년에 발표한 《세계의 영혼에 관해서》 등에서 독자적 철학을 구축하는 데 첫걸음인 자연 철학을 펼쳤다. 이것이
피히테와
괴테 등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얻어, 23세의 젊은 나이에 예나 대학의 초빙 교수가 되었다.
1800년 이 곳에서 공식적으로 발간한 《초월론적 관념론의 체계》에서 그는 자연 철학을 체계적으로 보완했다. 그 이듬해에 체계와 자연 철학을 합친 뒤, 《나의 철학 체계의 서술》이라는 책을 써서 독자적인 철학 체계인 동일 철학을 발표하여 절정기를 맞았다.
1803년 친구 W. 슐레겔의 부인 카롤리네와 결혼함으로써 문제가 생긴 셸링은, 낭만파와 결부한 화려한 무대 예나 를 떠나 뷔르츠부르크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이듬해 《철학과 종교》를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1806년 뮌헨으로 옮겨 와 학사원 회원이 되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셸링 의 철학은 짙은 신비의 그림자를 띠기 시작하여, 후기 사상으로 이행한다.
1807년 헤겔이 자신이 쓴 《정신 현상학》을 통하여 그의 철학을 신랄하게 비판하자, 그 동안 헤겔 과 맺었던 친분을 끊어 버렸다. 1809년 《인간적 자유의 본질》을 발표했으며, 1820년부터 에를랑겐 대학의 교수로 지내다가, 1827년 뮌헨 대학이 생기자 그 대학의 교수로 취임하고, 같은 해 학사원 원장이 되었다. 1940년 헤겔 이 죽자 베를린 대학에 초빙되어 오래 전부터 자신이 생각해 온 적극 철학을 강의했다.
셸링의 초기 사상인 자연 철학 이 그의 철학을 일관되게 하는 중심 역할을 했다. 그에 따르면 자연이란 결코 근대 자연 과학이 정의하고 있는 것처럼 기계적인 작용과 반작용이 지배하는 물질의 세계 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나 영감을 말하는 것이며, 눈으로 볼 수 있는 정신 그 자체이다.
자연 과학은 이 풍요로운 생명이 있는 대자연을 중력과 빛이라는 두 원리로 된 무한한 절대자의 계시로서 비로소 파악되는 것이다.
초기 사상 의 정점을 이루는 동일 철학 또한 새로이 파악된 절대자를 기초로 하고 펼쳐지는 자연 철학이다. 다시 말해서 동일 철학은 절대자를 동일률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이성으로 간주하고, 빛을 인식의 원리로 규정하고, 중력을 존재의 원리로 규정함으로써 대자연이 확고한 절대자, 또는 이성 의 자기 인식이라는 사실을 밝혀 냈다.
후기 사상에서는 그 때까지도 인간도 자연과 같은 존재라고 규정한 초기의 사상에서 벗어나, 그 동안 양자 사이에서 생긴 거리감을 주제로 삼았다. 인간이란 신적 질서라고 할 수 있는 자연 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곧 자유 그 자체이다.
여기에 자연 철학이 크리스트교에서의 구제사(救濟史)를 포섭함으로써 적극 철학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적극 철학이란,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을 한 것은 물론, 모두가 신 자체인 체계에 있어서, 왜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악이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을 계기로 하여, 존재한다고 하는 것 자체에 어떠한 근거가 있나를 묻는 학문이다.
셸링은 현대의 실존 철학을 이미 파악한 이 적극 철학을 《신화 의 계시 철학》에서 거시적인 안목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점차 유미주의적인 낭만적 색채를 띠고, 나중에는 종교적·신비주의적 방향으로 변질되어 갔다.
이 밖에 주요 저서로는 1809년에 발표한 《인간적 자유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고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