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7 ~ 1805] 조선 정조 때의 문인, 학자. 호는 연암(燕巖)이다.
16세 때 처음으로 처삼촌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20대에는 뛰어난 글재주를 보이기 시작했다.
1768년 서울의 백탑(白塔:지금의 파고다 공원) 부근으로 이사했다. 주변에 이덕무(李德懋)·이서구(李書九)·서상수(徐常修)·유금(柳琴)·유득공(柳得恭) 등도 모여 살았고, 박제가(朴齊家)·이희경(李喜慶) 등도 그의 집에 자주 출입했다. 당시 그를 중심으로 한 '연암 그룹'이 형성되어 많은 신진기예의 청년 인재들이 그의 문하에서 지도를 받고, 새로운 문풍(文風)·학풍(學風)을 이룩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북학파실학(北學派實學)이었다.
문학에서는 당시 이덕무·유득공·이서구·박제가가 4대시가(四大詩家)로 일컬어졌는데 모두 박지원의 제자들이었으며, 이서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얼 출신이었다.
1780년에 친족 형
박명원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함께 청나라의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그 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
열하일기》로 엮었다.
그는 《열하일기》를 통해 청나라의 문물 제도와 생활 풍습을 소개하고, 조선의 뒤떨어진 문물 제도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또 벼슬아치와 양반들의 생활을 폭로, 풍자한 소설 《
허생전》 《
양반전》 《
호질》 등을 지어 세태를 비평하기도 하였다.
50세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라 몇몇 관직을 거쳤고, 늘그막에 《
과농소초》라는 농업 연구서를 지어 정조에게 바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이 그를 스승으로 받들었으며, 세상을 떠난 뒤에 정경대부라는 벼슬이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