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 상영 상설 극장.
1907년 서울 종로 3가에 세워졌다. 이후 1912년에 연예 공연장으로 새롭게 다듬어 문을 열었다가, 1918년에 본격적인 영화 전용관으로 개축하였다.
호시탐탐 조선을 침범하려던 일본인들이 철저하게 한반도를 식민지화하기 위한 근거지로 자신들이 많이 모이던 '남촌'에 일본식 건물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어성좌(御成座)가 그들이 지은 전용 극장이다.
이런 일본인들의 행태에 맞서서 한국인들은 상대적으로 '북촌'일대에 모여 세력을 키워 갔다. 그리고 어성좌의 기세에 눌릴세라 이 지역에서도 연달아 한국인 극장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단성사는 남성사, 연흥사 등에 뒤이어 연예장으로 쓰기 위하여 세워졌다.
초창기에는
임성구가 이끄는 연극단인 혁신단,
이세기가 만든 유일단 이 《
육혈포 강도》 《
혈의 누》 등의 신파극을 주로 공연하였다. 후에 톨스토이의 《부활》 같은 번역극 등도 공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818년에 박정현이라는 사람이 극장을 인수하여 상설 영화 극장으로 만들어 운영하게 되었고, 이 때부터 한국 영화와 외국 영화를 상영하게 되었다. 이듬해 10월 최초로 한국인이 제작한 연쇄 활동 사진극에 삽입된 필름이 상영되었으며, 우리 나라 최초의 기록영화인 《경성 전시의 경(景)》을 상영하였다. 이 영화가 상영됨과 동시에 한국 영화는 획기적인 전환기를 맞이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새로운 극장 문화가 시작된 것이다.
더불어 1924년 초에는 단성사 극장 촬영부에서 7권짜리 극영화 《장화홍련전》을 제작하였고, 이 영화는 최초로 한국인에 의한 극영화 제작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를 가진다. 영화 《장화홍련전》은 촬영·현상· 편집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에 손에 의해 기획, 제작된 작품이었다.
이후, 1926년에는 나운규의 민족 영화 《아리랑》을 단성사 에서 개봉하였는데, 이 영화는 서울 장안을 기쁨으로 들끓게 하였다. 영화 《아리랑》은 귀중한 영화 자료로서 지금까지도 나운규에 대한 찬사는 이어지고 있다. 1929년에는 극단인
조선연극사의 창립 공연이 있었다.
그 후 단성사는
조선극장·
우미관(優美館)과 더불어 북촌의 한국인을 위한 공연장으로 확실하게 자리 매김 되었다.
일본인들의 영화관인 황금좌·희락관·대정관 등에 대항하여 각종 문화 행사를 마련하며 한국인들의 단결을 과시하는 장소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영화뿐만 아니라 연극·음악회 공연· 무용 발표회 등 여러 가지 예술 활동의 무대로 식민지 시대에서의 문화적 자존심을 지켜 나갔던 것이다.
1940년 잠시 대륙극장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었다가 일제로부터 주권을 찾게 된 후 다시 단성사라는 이름으로 원상 복귀되었다. 이 때부터는 주로 악극 공연이 많이 이루어졌고, 6·25 전쟁 뒤에 몇 차례 확장 공사를 거쳐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