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1 ~ 1721]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서예가. 본관은 안동이며, 호는 수암·한수재이고, 시호는 문순이다. 서울에서 태어났다.
1660년(현종 1) 19세의 나이에 진사가 되었다.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을 스승으로 받들어 열심히 학문에 임하였으며, 송시열의 제자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당시에는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1년 복상 주장이 우세하였으나 1659년(효종 10)에 있었던 자의 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가 다시 논란이 되었다. 이는 효종이 인조의 둘째 아들이라는 것과 왕이 되어 왕통을 계승하였으니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대립이 되어 상복을 입는 기간에 대한 주장이 1년과 3년으로 나누어지게 되었고, 이것이 붕당으로까지 이어졌다.
송시열은 덕원부에 유배되는 한편, 죽은 뒤에 그가 살아 있을 때 지녔던 관직과 작위를 빼앗기게 되었다.
이에 남인들이 세력을 얻게 되자, 혼탁해진 관직에 나가는 것을 단념하고 맑은 바람의 산 속에서 세상을 등지고 살면서 학문에 힘썼으며, 제자들을 모아 유학을 강의· 해석하고 이를 토론하면서 정·주(程朱)의 서적을 교정하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 대출척으로
서인이 세력을 잡았으나, 이들은 곧
노론과
소론으로 갈렸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세력을 얻게 되면서,
송시열이 다시 제주도에서 소환되어 정읍 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나게 되자, 스승의 의복과 서적 등을 유품으로 받았다.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괴산 화양동에 만동묘를 세워 임진왜란때 군대를 파견하였던 명나라의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고, 숙종의 뜻을 받들어 대보단을 세웠다.
숙종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 우의정· 좌의정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이이를 조종(祖宗)으로 하여
송시열에게 계승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지도자로서, 이이가 주장하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였다.
그의 제자인
한원진과
이간이 인물성 편재 문제(人物性偏在問題)로 논쟁하자, "인성(사람의 성품)이 물성(물건의 성질)과 다른 것은 기(氣)의 국(局)이며, 인리(모든 사람의 이치)가 곧 물리(모든 물건의 이치)인 것은 이(理)의 통(通)이다."라고 하여, 전통적 기호학파의 학설인 이이의 이통기국 이론(理通氣局理論)을 예로 들어 한원진의 학설을 지지함으로써 논쟁은 더욱 확대되었고 기호학파는 마침내 둘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뛰어난 제자들로는 강문팔학사로 불리는
한원진·
이간·
이이근·
채지홍·
현상벽·
윤봉구·
성만징·
최징후 등이 있다.
충주의
누암 서원, 청풍의
황강 서원, 정읍의
고암 서원, 성주의
노강 서원, 보은의
산앙사, 예산의
집성사, 송화의
영당 등에 배향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기백이태연표》 《형참권극화표》 《부사과이숙표》 등이 전해지고 있으며, 저서로는 《한수재집》 《삼서집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