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의 은(殷)나라·주(周)나라 때 및 춘추(春秋) 시대에 중국의 중서부의 산시성〔陝西省〕과 동부의 산시성〔山西省〕부근에 살던
서융(西戎)의 한 부족.
서융은 고대의 중국인(한인)들이 이민족을 지칭한 말로 동쪽의 이(夷), 서쪽의 융(戎), 남쪽의 만(蠻), 북쪽의 적(狄) 등이 있으며, 이들을 4방의 이민족이라 불렀다. 이·융·만·적은 모두 오랑캐라는 뜻이다.
견융은 견봉(犬封)·견이(犬夷)·곤이(昆夷)라고도 하였다. 《시경》이나 《서경》 또는 금문(金文)에 나오는 염윤·험윤· 훈국과 같은 부족이며, 또 은나라 때 세력을 떨친 귀방과도 같은 부족이라는 말이 있다.
견융은
주나라와 관계가 깊었는데, 주나라의 문왕(文王)은 서융의 패자(覇者)로서 주나라 왕조의 기초를 쌓았다. 그러나 목왕(穆王)이 견융 을 쳐서 태원(太原)으로 쫓은 이래 주나라는 견융의 잦은 침략에 시달려야 했다. 주나라 말기에 유왕(幽王)이 왕위에 올라 정치가 문란해지자 기원전 771년 견융은 신후(申侯)와 힘을 합하여 주나라를 공격하였다. 주나라 11대 선왕 때는 침공에 실패하였으나 그의 아들인 유왕 때는 성공하여 유왕을 죽였다. 이 때문에 주나라의 왕실은 동쪽으로 옮겨 허난성〔河南省〕에 나라의 수도를 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이전을 서주라 하고 이후를 동주라 하는데, 견융에 의하여 서주가 멸망한 것이다. 그 뒤 견융은 징수이〔涇水〕·웨이수이〔渭水〕로 나아가서 동주를 위협하다가 진(秦)의 양공(襄公)과 문공 (文公)에 의하여 멸망해서 그 지배 아래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 가운데 일부는 춘추 시대에도 세력을 떨쳤으나 전국(戰國) 시대에 들어와 진(秦)과 흉노(匈奴)의 힘에 눌려 쇠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