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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은 강릉(江陵) 사람으로 난 지 여덟 달에 글을 알고 세 살 적에 능히 글을 짓고 다섯 살에 용학(庸學)을 통하여 신동이란 이름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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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문종(世宗 文宗)이 계속 승하하시고 단종(端宗)이 어리신 몸으로 위를 내놓으시니 시습의 나이 스물한 살이라 그때 삼각산(三角山) 중에서 글 읽다가 그 소식을 듣고 크게 울며 책을 불사르고 이어 도망하여 몸을 숨기고 자주 그 호(號)를 변하여 설령(雪嶺) 청한자(淸寒子) 벽산청은(碧山淸隱) 동봉(東峯) 등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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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됨이 체수는 적고 호매영발(豪邁英發)한 위에 곧아서 사람의 과실을 용서 치 않고 항상 시속에 분개하여 산천을 두루 다니며 자연을 향하여 만 반 통회(痛懷)를 호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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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가에 앉아 시(時)를 써서는 흐르는 물 위에 남몰래 띄워버리고 혹은 삼간 소나무에 시를 쓰고는 큰 음성으로 읊고 통곡한 후에 그 자리를 떠나며 그 시를 다시 깎아버리며 이렇게 미쳐놀기를 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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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때는 나무로써 농부의 형상을 만들어 머리맡에 세우고 하루 종일을 쳐다본 뒤에 태워버리고 소리를 놓아 울기도 하며 또한 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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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탄식하며 평생을 산으로만 돌아다니며 수석(水石)과 같이울고 풍로(風露)와 같이 살다가 59세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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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시에 자기의 화상을 그리어 스스로 제(題)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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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형상이 작고 네 말이 미련하니 마땅히 너를 개천 가운데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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