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이원역혼(異域寃魂) ◈
카탈로그   본문  
1926.11
최서해
1
異域寃魂 [이원역혼]
 
 
2
원수의 밤은 또 닥쳐왔다. 땅거미 들기 시작하면서 별들은 눈을 떴다.
 
3
남편이 있을 때에도 그놈의 유가가 밭머리나 개울가에서 조용히 만나면 수상스런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태산 같은 남편이 곁에 있으니 무섭고 걱정은 되면서도 마음 한편이 든든하였지만 지금은 든든한 마음은 다 사라지고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이 온 마음을 차지하였다.
 
4
그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로 밤마다 혼자 자지 못하였다. 크고 의따른 집에서 쥐만 바싹해도 머리끝이 쭈뼛하는데 지주되는 중국 사람 유가의 행동이 수상스러워서 체증이 내리지 않았다. 그 때문에 밤마다 개울 건너 있는 봉길의 할아버지가 방에서 잤다. 봉길의 할아버지는 그와 한 고향에서 들어왔고 또 그의 죽은 남편 형선의 아버지와 막연한 친구였다. 그처럼 친한 영감이 방에서 자건마는 그의 가슴은 남편이 곁에 누웠을 때처럼 누굴하지 않았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을 보고 놀란다는 셈으로 봉길의 할아버지까지 의심이 버썩 들어가서 가만가만히 기어가서 문틈으로 고요히 자는 영감의 동정을 살피고는 한숨을 화── 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5
그런 대로 매일 일찍이나 왔으면 좋으련만 처음보다는 떠졌다. 처음에는 해만 떨어지면 늙은 영감(봉길의 할아버지)이 기단 대를 물고 민상투 바람으로 방에 와서 드러눕더니 이제는 늦어서 오는 때가 많았다. 때가 농가의 바쁜 가을이니 그렇기도 하겠지만 기다리는 그에게는 야속스럽게 생각되었다.
 
6
“에구 어째서 지금도 안 오는가?”
 
7
그는 남편의 영좌에 올릴 상식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면서 혼자 뇌었다. 아직은 그리 늦지 않았건만 저녁편 일이 머릿속에 번개처럼 언뜻하자 다른 때보다 더욱 우악스럽게 조르는 험상스런 유가의 낯이 눈앞에 언뜻 떠올라서 섧고 원통한 가운데도 무시무시한 생각이 치미는 까닭이었다.
 
8
상식상을 들고 컴컴한 방에 들어선 그는 영좌 앞에 상을 놓고 창문을 열었다. 밖에도 황혼빛이 내려서 으스름하나 하늘이 맑아서 방안은 아까보다 훤하여졌다. 벌써 달이 오르려는가? 개울 건너 높은 산봉우리 끝에 달빛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반딧불이 어스름한 마당에 일자를 그으면서 지나갔다. 여울 소리, 벌레 소리, 마당가 조밭을 스쳐오는 바람 소리가 처량히 들렸다.
 
9
그는 상에서 밥그릇, 국그릇, 반찬 접시, 수저를 영좌에 올려 놓았다. 우시시한 조밥에 숟가락을 박아 논 그는 영좌 앞에 시름 없이 주저앉아서 두 손으로 낯을 가렸다. 그의 두 어깨는 고요히 물결을 치더니 목메인 느낌이 입속으로 흘러나왔다. 그는 우는가?
 
10
점점 솟는 달빛은 건너편 봉우리를 절반이나 물들였건마는 집뒤에 산이 있어서 이편은 아직도 그늘이다. 방안은 한층 으슥하였다. 그으름에 까맣게 된 거미줄이 넌들넌들한 천정과 먼지와 빈대피가 얼룩얼룩하던 벽은 수묵을 끼얹은 듯이 으슥한 빛에 조화가 되었다. 비둘기 집같이 벽에 달아 놓은 영좌와 그 아래 주저 앉은 그의 희슥한 그림자만은 윤곽이 희미하다.
 
11
벌레 소리, 바람 소리, 여울 소리는 의연히 요란하였다.
 
12
고요히 천천히 물결치던 그의 어깨는 점점 몹시 오르내리고 흑흑 하던 느낌은 목메인 울음으로 변하였다. 그는 모든 것을 잊었다. 상식을 물릴 생각, 봉길 할아버지를 기다리던 생각,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 몰랐다. 그저 설움이 복받쳤다. 자기의 몸과 마음은 끝없는 끝없는 푸른 설움 속에 싸여서 아득한 속으로 들어가는 듯하였다. 그는 영좌 앞에서 우는 때마다 이러하였다. 가슴 열릴 때가 없었고 눈물 마른 때가 없었다. 서러우나 괴로우나 그는 남편의 영좌 앞에 다리를 뻗고 앉아서 울었다. 그밖에 위로거리가 없었다.
 
13
그는 가물에 곡식을 일구고 홍수에 밭을 이룬 뒤로 겨죽과 토스래(삼으로 짠 것) 옷으로 겨우 목숨을 이어 가다가 너무도 기한을 못 이겨서 그 남편 형선이와 같이 재작년 봄에 이 간도로 왔다. 간도에 와서도 이날 이때까지 중국 사람의 소작인으로 별별 구박을 다 받으면서 겨우 목숨을 이어왔다. 다른 구박보담도 지주되는 중국 사람 유가는 홀아비인데 그 녀석이 늘 고요한 데서 만나면 두 눈이 스르르 흐리고 누런 이빨을 드러내어서 벙긋 웃으면서 수상히 달라붙는 꼴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유가에게 불쾌한 소리 한 마디 못 하고 억지로 좋은 낯을 보이면서 슬슬 피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 유가에게서 밭을 얻어 부치고 양식을 꾸어 먹는 판이니 쫓겨나는 때면 굶을 것이다. 넓으나넓은 천지에 두 청춘을 용납시키기 그처럼 어려웠다. 그가 그렇게 유가를 슬슬 피하게 된 뒤로 유가의 태도는 한껏 횡포하였다. 김을 잘못 맨다는 둥 빚을 어서 갚으라는 둥 하여 일없는 생트집을 잡았다. 그 트집은 그에게만 미칠 뿐 아니라 남편 형선이에까지 앙화가 미치었다. 그는 그때부터 은근히 가슴이 찢겼다. 자기 때문에 애꿎은 남편까지 그놈에게 쪼들리는 것을 생각하면 자기 한 몸이 없어져 버리고도 싶었다. 그런 눈치를 남편이 알면 더욱 심사가 상할까 보아서 입 밖에 내지도 않았거니와 얼굴빛도 변해 보인 적이 없었다. 그놈에게 남편이 몹시 쪼들릴 때면 슬그머니 몸을 허하여 남편의 몸이나 편케 할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굳세인 그의 정조 철학은 그것을 허락지 않았다. 더구나 남편의 눈을 속이는 것은 자기의 고기가 찢겨도 할 수 없었다. 모진 목숨이 끊기는 어렵고 남편에게 말하기도 안됐고, 유가를 대항하면 할수록 무도한 압박은 나날이 심하고……. 그는 민민한 정회를 풀 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태산같이 믿던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4
남편이 죽은 뒤로는 유가의 태도가 한껏 자유로와서 낮에도 동무 없이 밭으로 못 나갔다. 어서 바삐 떠나든지 그렇지 않으면 물 건너 촌에 가서 집을 얻어 가지고 살아 볼까 하고 애를 썼으나 유가는 허락지 않았다. 가을에 추수를 하여 꾸어 먹은 양식을 갚고 자기 땅에서 떠나라는 것이 유가의 조건이었다. 유가의 집은 그의 집에서 삼 마장쯤 떨어져서 저 아래 산 모퉁이에 있었다.
 
15
그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면 의지가지 없는 자기 신세가 개밥에 도토리 같기도 하고 많은 앞길이 캄캄하였다. 실낱 같은 목숨이 어디서 어떻게 될는지 몰랐다. 고국이 그리웠다. 굶으나 먹으나 낯익은 고향에서 살고 싶었으나 그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고국이 어디 붙었는지 길이 어떻게 났는지 드러내 놓아도 못 찾아갈 것이다. 백두산 앞에는 자기를 낳아서 길러 준 조선이 있거니 생각할 뿐이다. 그것도,
 
16
“저게 백두산이오. 저 앞은 죄선[朝鮮]이오.”
 
17
하고 죽은 남편이 집 뒤 산밭에서 김맬 때 가르쳐 준 기억이 남아 있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고국으로 간다 한들 무슨 재미있으랴? 천애만리에 남편을 묻고 차마 발길이 돌아질까? 그는 오늘 저녁에 뒷산 밭에서 김을 매다가 남편의 말을 생각하고 백두산 머리에 넘는 구름을 보면서 섧게 울었다. 그런데 유가가 뒤에 와서 허리를 안았다. 그는 등골에 배암이 오르는 듯이 몸서리를 치면서 몸을 뿌리쳤다. 유가는 좀처럼 놓지 않았다. 그때 마침 저편에서 인적이 있어서 유가는 슬쩍 가 버렸다. 아까까지도 그놈의 그림자가 그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18
이제 영좌 앞에 앉으니 그 모든 설움이 한꺼번에 치밀었다. 그는 목을 놓아 울었다. 영좌 앞에서 몸부림을 하면서 울었다. 연기가 팽팽 돌고 무딘 칼로 찍찍 찢는 듯하던 가슴과 목구멍이 시원히 풀리는 듯하며 뜨거운 눈물이 빠지는 족족 뜨거운 마음을 눅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둑한 영좌에서 부드러운 사내의 손이 나와서 슬그머니 안아 주는 것 같다. 모든 것은 한 공상. 남편은 적적한 숲속 흙에 묻히었거니 하는 생각이 가슴을 뜨끔거리게 하여 그저그저 울었다.
 
19
동산 위에 솟는 보름달은 건너편 마을에 흐르고 이편 마당까지 범하였다. 추근히 내리는 이슬에 후줄근한 풀과 곡식대들은 물 같은 달빛 아래 싸늘히 빛났다.
 
20
철철철 순스럽게 나오는 울음 같기도 하고 꺽꿀렁 꽐꽐 목메인 곡소리 같은 여울 소리와 애끈한 단소와 호적을 어울타는 듯한 벌레 소리는 의연히 우지짖는다.
 
21
달빛이 지붕에 흐르고 마당에 비추임을 따라서 방안은 다시 훤하여졌다.
 
 
22
몸부림을 치면서 통곡하던 그는 등뒤에서 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머리를 돌렸다. 허연 그림자가 문을 우뚝히 막아 섰다. 그는 가슴이 꿍 내려 앉았다. 그것이 그의 눈에는 광대뼈만 불쑥한 유가로 보였음이었다. 그는 어쩔줄 몰랐다.
 
23
“웟전(웬) 울음을 그리두 우는가?”
 
24
봉길의 할아버지는 문을 대하여 마당에 선 대로 하늘을 보았다. 그것이 봉길의 할아버지라는 생각이 들자 그의 긴장되었던 신경은 후루루 풀렸으나 가슴은 여전히 두군거리고 사지는 절맥된 것처럼 기운이 쭉 빠졌다.
 
25
“에구 클아매(할아버지)오. 흥.”
 
26
그는 넋없는 웃음을 웃었다. 사람은 몹시 놀란 끝에 의미 없는 듯도 하고 또는 자기의 약한 것을 비웃는 듯도 하게 혼 빠진 웃음을 잘 웃는다.
 
27
“허허 그리두 심례를 해서 돼겠네!”
 
28
봉길의 할아버지는 위로를 하면서 지붕에 흐르는 달을 쳐다본다. 주름이 잡힌 늙은 낯에 흐르는 달빛은 너무도 싸늘히 보였다.
 
29
“에구 클아배(할아버지)! 휴…… 나는 어찌 살겠소?”
 
30
영좌에서 밥그릇을 상에 내려놓던 그는 찬 서리 아래의 외로운 갈대 같은 자기 신세를 한탄하였다.
 
31
“어찌 살아? 그래그래 사는 게지? 어서 설어 말게. 그래두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32
영감은 허리가 아픈가? 마루에 올라서면서 허리를 툭툭 친다.
 
33
“에구 하누님도 무정두 한게! 내나 잡아가지 남의 삼대 독자를 흑…….”
 
34
그는 말끝을 흐리머리하면서 코를 들이마셨다. 또 설움이 북받쳤다. 그의 남편 형선이는 삼대 독자이었다. 그는 남편이 병들어 누웠을 때 늘 기도를 올렸다.
 
35
“그저 산신님과 하누님은 굽어살피사 자식두 없는 우리 주인을── 삼대 독자신 우리 남편을 저를 대신 잡아가시더라도 우리 주인은 돕아(도와) 주시사 대쉬〔代數〕를 끊게 말아 주십사…….”
 
36
하고 그는 새벽마다 진지를 지어가지고 뒷산에 가서 빌었다. 그러나 결국 자기는── 죽기를 원하던 자기는 살고 바라고바라던 남편의 목숨은 끊쳤다. 남편을 구하려고 자기 목숨을 바쳐 가면서 원한 것은 그의 진정이었다.
 
37
“어쩌겠는가? 할 쉬 없지비……. 자네두 봤지만 내가 살겠네? ……내가 어떤 아들을 이 몹쓸 땅에 목구녕이 보듸청으로 그래두 살자구 이 몹쓸 따〔地〕에 왔다가 그 흥으적(마적)늠의 칼에 죽었으니……. 그러구두 이래 살아 있으니…….”
 
38
집안에 들어앉아서 담배를 빨던 영감은 한숨을 휘 쉬면서 밖을 내다본다. 그의 눈에는 그때의 참혹한 광경이 떠오르는지 으스름 속에 으슥히 보이는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모든 것이 보이지 말아라 하는 듯이 눈을 감았다 떴다. 참말이지 재작년에 봉길의 아버지(영감의 아들)가 아편 농사를 짓다가 마적에게 칼맞아 죽은 뒤로 그 영감의 머리는 더 세었다.
 
39
“에구 클아배 나는 그저 죽었으믄 싶으오! ……이런 팔재〔八字〕를 타고 어째 났던지 살고 싶은 맘은 조곰도 없소…….”
 
40
그는 설겆이를 다 하고 문앞에 앉아서 힘없이 말하면서 아랫배를 슬그머니 만졌다. 뱃속은 비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목숨을 이어 왔다. 남편이 병중에 있을 때 기운 없이 슬쩍 지내간 것이 드디어 그의 뱃속에 새 생명을 박았다. 그가 이날 이때까지 목숨을 질질 끌고 온 것은 그 때문이었다. 죽은 남편의 한 점 혈육을 고이고이 길러서 남편의 대수를 끊지 말자는 것이 그의 일단 정성이었다. 그리고 유가에게 쪼들리면서도 멀리 도망질 못하는 것은 남편의 무덤 때문이었다. 죽으면 여기서 죽어서 남편의 옆에 묻혀야지 남편의 무덤을 외로이 버려 두고는 갈 수 없었다.
 
41
“그게 그리 쉬운가? 죽는 게 쉽잖은 걸!”
 
42
영감의 소리는 달관한 철인의 훈계같이 울렸다.
 
43
한참은 고요하였다.
 
44
마당 앞 밭을 우수수 스쳐오는 바람은 집안에 수 불어 들었다.
 
45
“클아배 이저는 자기오!”
 
46
고요히 앉았던 그는 방에 앉은 영감을 보면서 열어 놓은 문들을 닫아 걸었다.
 
47
“응 자지……. 으흠…… 응…….”
 
48
영감도 문을 닫고 드러누웠다.
 
49
“클아배 문으 단단히 거오.”
 
50
그는 방 사이에 있는 문을 닫고 입은 채로 구들에 드러누우면서 단속하였다.
 
51
“허허 우리네 집에 무슨 도둑놈이 오겠네!”
 
52
속도 모르는 영감은 허허 웃어 버렸다.
 
53
사방은 고요하였다. 달은 어느새 하늘 복판에 올랐는지? 물같이 맑은 빛이 창문 아래 가를 범하기 시작하였다. 방안은 밝아 가는 새벽같이 환하였다. 앞뒤에서 또루룩 찔찔 쌕쌕 하는 이름모를 벌레 소리와 앞개울의 여울 소리는 한껏 높이 들린다.
 
54
그는 진종일 괴로운 일과 시진한 울음 끝에 기운이 풀려서 드러누우면 잠이 올 것 같이 사지가 노곤하였는데 정작 눕고 보니 오라는 잠은 오지 않고 이 생각 저 생각에 두 눈은 말똥말똥하여졌다. 그는 눈을 감았다. 남편의 앓던 모양이 떠오르고 임종할 때 모양이 보였다.
 
55
“여보!”
 
56
베개를 의지하고 괴롭게 누웠던 남편은 목에 끓어오르는 담을 겨우 억제하면서 그를 부르더니 다시 흑흑 우는 그의 손을 잡으면서,
 
57
“여보 어째 우오? 우지 마오……. 응…….”
 
58
하고 억지로 괴롭게 웃어 보였다. 숨이 거진 끊기면서도 남편은 그에게,
 
59
“내가 죽거든 부디 본국으로 돌아가오! 내가 조곰도 원망을 안 할 것이니 다른 남편을 얻어서 부디부디 아들 딸 낳고 잘 사오……. 네? 응흐…… 응…… 나는 실루 당신께 못 할 짓을 너무도 했소! 이 호지땅에 데리구와서까지 고생을 시키구……. 휴…… 이담에 다시 환생하거든 만나서나…….”
 
60
하고 꺾 숨이 끊쳤다. 이 모든 것이 눈앞에 떠오를 때 그는 팔을 내밀어서 남편을 꽉 안으면서 눈을 떴다. 그러나 두 팔에 안긴 것은 자기의 가슴이오, 눈에 보이는 것은 창문이었다. 과연 남편은 죽었는가? 마치 멀리 다니러 간 것도 같았다. 그러나 임종의 광경이 또 떠오르고 차디찬 흙속에 묻던 기억은 남편이 살았다는 것을 긍정치 않았다. 그는 돌아누우면서 모든 것을 안 보고 생각지 않으려고 눈을 꼭 감았다. 이제는 베개가 배기고 온몸에 번열이 탁 나면서 눈까풀이 천근처럼 무거워서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또 눈을 번쩍 떴다.
 
61
어느새 창문에는 달이 절반 넘어 비치었다. 레스 끝 같은 처마 그림자에 구렁이처럼 달린 것은 새끼가 드리운 것인가? 바람 소리 나는 때마다 흔들거렸다. 바람이 스르르 스치어서 조와 기장 밭에서 곡식 이삭이 흔들린다. 그 이삭과 이삭이 머리를 치는 소리에는 아쉰 생각이 더 떠올랐다. 곡식은 익는다. 자연은 언제나 자연이다. 사람은 죽거나 설어하거나 자연은 조금도 주저치 않고 제 걸음을 걷는다. 남편과 같이 갈고 뿌린 씨가 어느새 자라서 익었다. 오오 남편은 어디로 갔는가? 저 익은 곡식은 나 혼자 먹는가? 생각하니 가슴이 뿌지지 하면서 눈물이 핑그르 돌았다. 그는 방울방울 흘러내려 베개를 뜨겁게 적시는 눈물을 씻으려고도 하지 않고 창문을 물끄러미 보았다. 눈물 어린 눈에 비친 달창〔月窓〕은 우수 달 아래 호수 물같이 창망하여 가도 없고 끝도 없는 신비의 세계 같았다. 자기의 몸과 정신도 거기 싸여서 춥지도 덥지도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어떤 세계로 끝없이 끝없이 싸여드는 것 같았다. 거기는 아무것도 없었다. 슬픔도 기쁨도 괴로움도── 모든 감각은 스러졌다. 꿈속 같았다. 두 눈에서 샘같이 쏟아지던 눈물이 그쳤다. 두 눈은 점점 말랐다. 그러나 그의 시각은 모든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아까는 눈물에 어리어서도 희미하게나마 보이던 창문의 달빛이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무엇이── 방망이만한 검은 것이 꿈틀꿈틀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의 두 눈은 그 그림자를 점점 노렸다. 노리던 두 눈동자가 코〔鼻〕를 중심으로 모아 들어서 모들 떠진 때에는 그 그림자가 수없이 많아지고 커지더니 그놈이 죽 퍼졌다가는 모아 들고 모아 들었다가는 퍼졌다. 그것이 꿈틀거리면서 위로 아래로 앞으로 뒤로 양 옆으로 퍼질 때면 징글징글하고 무시무시한 구렁이 같고 그것이 확 모여든 때면 험상한 얼굴이 돼보였다. 이렇게 되자 한참 자기의 존재까지 잊었던 그의 의식은 점점 무엇을 의식케 되었다. 그의 눈은 한껏 커지고 입술은 경련적으로 씰룩하면서 낯빛이 푸르렀다.
 
62
불쑥한 광대뼈, 벌건 눈, 누──런 이빨……. 생각이 이에 미치자 그는,
 
63
“으응.”
 
64
부르르 떨면서 벌떡 일어섰다. 벌떡 일어선 그는 두 눈에 불이 번쩍하자 갑자기 천지가 아뜩하여 그 자리에 쓰러졌다.
 
65
“으흠…… 응…….”
 
66
그가 쓰러지는 소리를 잠결에 들었는지 방에서 자던 봉길의 할아버지는 골던 코를 뚝 그치고 기침을 하더니 다시 코를 드믄드믄 골았다.
 
67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린 그는 쓰러진 채 사면을 돌아보았다. 창문에는 여전히 달빛이 흐르고 방안은 여전히 훤하였다. 모든 것은 착각이었다. 그의 눈에 엇보인 것은 창문에 비췬 처마끝 새끼 그림자였다. 그는 그런 줄 몰랐다. 그는 그저 무서운 꿈을 깬 것 같았다. 새삼스럽게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방안의 모든 그림자는 흉악한 눈 같고 입같이 느껴졌다.
 
68
그는 다시 잠을 들려고 눈을 감았다.
 
 
69
애쓰고 애써서 겨우 잠이 들락말락하였던 그는 무슨 소리에 소스라쳐 깨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거니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공연히 울렁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하면서 누운 채 조심스럽게 또 한번 방안을 돌아보았다.
 
70
창에는 달빛이 아까보담 더 밝게 넘치었다. 이제는 처마 그림자도 스러졌다. 뚫어진 창구멍으로 굵게 흘러드는 달빛이 그가 누운 웃목 자리 앞에까지 떨어진 것을 보아서는 밤도 새벽이 가까왔다. 집안은 환하여 바늘귀라도 뀔 것 같다. 그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소리래야 여전한 벌레 소리와 여울 소리뿐이었다. 자주 불던 바람 소리도 지금은 들리지 않았다.
 
71
그는 그만 눈을 감았다가 그래도 하는 생각과 무시무시한 마음에 본능적으로 또 눈을 떠서 방안을 돌아보았다. 무서운 증세가 점점 고조되어서 숨도 크게 쉬고 싶지 않았다. 방에서 자는 봉길의 할아버지의 코고는 소리는 지금은 들리지 않았다. 초저녁에는 귀찮았던 코고는 소리가 지금와서는 그리웠다. 그 소리나마 났으면 그래도 사람의 소리인지라 의지가 될 것 같은데 그것조차 없으니 곁이 몹시 허성허성하고 또 그 영감이 죽지나 않았나 하는 얼토당토않은 마음까지 치밀었다. 그런 생각이 치미니 눈앞에 이마가 넓적하고 눈이 쑥 들어간 봉길 할아버지의 죽음이 보이는 것 같아서 더욱 무서웠다. 그의 신경은 극도로 긴장되었다. 어둑한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무서운 손과 눈이 움직이고 노리는 것도 같고 죽은 사람의 이야기, 도적놈의 이야기, 귀신 이야기, 도깨비 이야기 하여 기억 속에 남았던 모든 흉하고 무서운 이야기는 다 줄달음으로 떠올라서 참을 수 없었다. 알지 못할 큰 변이 닥치는 때에 사람의 영감은 미리 무서워지는 것이다.
 
72
“클아…….”
 
73
하고 그는 윗방에서 자는 클아배(할아버지)를 부르다가 그만 뚝 끊쳤다. 곤히 자는 늙은이를 깨우기 미안한 까닭이었다. 이런 때 남편이 곁에 있었으면 얼마나 든든하며 또 천번 만번을 깨운들 무어라 하리? 남편이 살았을 때에는 뒷간까지 데려다 주던 일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과부의 설움을 또 치밀었다.
 
74
“……”
 
75
무슨 이상한 소리에 그는 다시 귀를 기울였다. 암만 해도 어디 무에 있는 것 같다. 부시럭하는 소리는 자취 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 소리 같기도 한데 알 수 없다. 그러면 그것이 들린둥만둥하고 사라져 버렸는가? 그는 귀를 기울인 채 달빛이 너무도 시려서 찢어질 듯한 창문을 주의하여 보았다. 툭툭 하고 귀밑 동맥 치는 소리가 들리도록 고요하였다. 이윽해서였다──.
 
76
“부시럭.”
 
77
하는 자취 소리와 같이 창에 꺼먼── 사람의 머리── 그림자가 얼른 붙었다 떨어졌다.
 
78
“옳다…….”
 
79
가슴이 꿍 구르면서 사지의 피가 쭈루룩 끓어서 떡 엉키어 붙는 듯한 그의 머리에는 그것이 무엇이라는 느낌이 직각적으로 번쩍하였다.
 
80
“클아배! 봉길너 클아배!(봉길네 할아버지)!”
 
81
부르는 그의 소리는 부르르 떨렸다. 힘이 없었다. 혼나간 소리였다.
 
82
“에구 클아배!”
 
83
그는 땅에 스며들 듯이 쪼그리고 앉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84
“응으…… 응…… 으흠…… 어째 그리네?”
 
85
선잠 깬 영감의 소리는 느릿하였다.
 
86
“무시기 밖에 왔는 게오!”
 
87
“오기는 무시기 와? 어서 자세. 내 있는데 무시기 와? 으흠.”
 
88
역시 영감은 느릿느릿 대답하고 나서 건가래를 뱃심 좋게 떼었다.
 
89
“아니오. 정말 무시기 왔소…….”
 
90
그의 소리는 울 듯 울 듯 하였다.
 
91
“무시기 왔다구……. 엑…… 어서 자세.”
 
92
영감은 귀찮은 듯이 웅얼거렸다. 그 소리에 그는 더 무어라 하지 못했다. 혼자 조바심을 하였다. 공중에 얼른한 솔개를 본 병아리인들 이에서 더하며 사자 앞에 놓인 강아지인들 이에서 더하랴? 사람이 방에서 잔데야 그도 쓸 데 없구나! 한참이나 혼자 애를 쓰는데 창문이 어둑해지면서 이번에는 사람의 전신 그림자가 턱 가리었다. 그는 문고리를 번쩍 잡아당긴다.
 
93
“흥 에구……클아배! 에구 저거.”
 
94
울음 절반으로 고함을 치는 그의 눈──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창문을 보는 그의 눈은 벌써 반이나 뒤집히었다.
 
95
“무시기 어쨌다구 그러는가?”
 
96
하고 영감은 귀찮은 듯이 방 사이에 있는 문을 열었다. 이때 문 밖에서 어르대던 그림자는 문을 잡아채고 집안에 들어섰다. 그 바람에 문 걸쇠가 쩔렁 빠져서 내려졌다.
 
97
그것은 유가── 지주 중국인이었다. 그의 직각은 맞았다.
 
98
“이에 웬 놈…….”
 
99
하고 일어서던 영감(봉길의 할아버지)의 머리는 번쩍하는 유가의 도끼에 두 조각이 났다.
 
100
“끅…… 으윽…….”
 
101
슬픈 소리를 지르면서 문턱에 쓰러지는 영감의 머리에서는 뜨거운 피가 콸콸 흘렀다. 그것을 본 그는 자기도 알 수 없는 힘에 지배되어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그러나 마루 아래 내려서기 전에 유가의 굳세인 손에 잡혔다. 유가는 부르르 떨면서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102
“이놈아 이 오랑캐야!”
 
103
그는 두려운 마음이 변하여 악이 되었다. 목구멍까지 악이 바싹 치밀어서 유가를 씹어먹고 싶었다. 그러나 유가는 그의 허리를 안아서 방으로 들이끌었다.
 
104
“이놈아 죽여라! 오랑캐야!”
 
105
그는 들어가지 않으려고 땅에 펄썩 주저앉아서 흙마루를 발로 버티면서 악을 썼다. 유가는 그가 땅에 쓰러져서 몸부림하는 것을 보더니 벙긋하면서 그의 위에 몸을 실었다. 그에게 몸을 싣고 신고하던 유가는,
 
106
“아야…… 아…….”
 
107
하고 뼈가 저리도록 고함을 치면서 뛰어나갔다.
 
108
“응…… 이놈 오랑캐야…… 코 떨어진 게 그리 아푸냐? 아직도 멀었다! 너늠의 원수를 갚자면!”
 
109
그는 물어뗀 유가의 코를 질근질근 씹었다. 코를 떼인 유가는 두 손으로 코를 움켜 쥐고 고민하더니 휙 돌아서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오는 그의 손에는 영감의 머리를 쪼개던 도끼가 들렸다. 유가의 손을 따라 내려지는 도끼는 그의 허리를 백였다.
 
110
“응윽…… 죽여라! 죽여라…… 오랑캐야! 내 죽는 것은 원통찮다마는 우리 남편의 혈육이 없어지는 게 원통쿠나! 에구 우리 주인(남편)을! 응윽 끅…….”
 
111
두 동강난 그는 마지막 부르짖고 숨이 끊겼다. 유가의 그림자는 사라졌다. 찬 땅에 흐르는 뜨거운 피는 싸늘한 달빛 속에 흰 김을 뿜으면서 엉키어 버렸다.
 
112
사면은 고요하였다. 아직도 새벽이 못 되었다. 서천에 기우는 달은 목메인 여울 소리 우지짖는 벌레 소리와 같이 외롭고 의지 없는 원통한 혼들을 조상하는 듯하였다. 그처럼 모든 소리와 빛은 처량하였다.
【원문】이원역혼(異域寃魂)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소설〕
▪ 분류 : 근/현대 소설
▪ 최근 3개월 조회수 : 16
- 전체 순위 : 2927 위 (3 등급)
- 분류 순위 : 403 위 / 881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2) 고국
• (1) 백금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이원역혼 [제목]
 
  최서해(崔曙海) [저자]
 
  동광(東光) [출처]
 
  1926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소설 카탈로그   본문   한글 
◈ 이원역혼(異域寃魂)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3년 03월 0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