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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 [탁류]와 안희남의 단편 - 세태 · 풍속 묘사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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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5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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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태·풍속 묘사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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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 『탁류』와 안회남의 단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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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인식론적으로 파악하여 그것을 하나의 인식수단으로 설정하는 문예학적 입장에 있어서는 과학적 인신이 모랄라이즈되고 휴머나이즈된 것, 다시 말하면 개념이나 과학적 정신이 도덕적으로 표상화된 것을 가리켜 문학의 본질이라고 부른다. 과학이 그의 분석의 기능을 다하여 수행한 바 인식의 목적은 인계(引繼)하고 그것을 주체화시켜 일신상의 진리로 과제를 새롭게 함으로써 궁극의 표상화에까지 도달하였을 때 문학은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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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학적(문단적) 방언에 의하면 ‘모랄’이라면 대체로 심정의 문제, 심리의 문제에 속한 것으로 되기 쉽고, 그것을 그대로 ‘도덕’이라고 표현하면 도학자적으로는 흔히 수신의 과목이나 도덕률로서 파악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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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우리가 이곳에서 ‘모랄’ 혹은 ‘도덕’을 문학적 개념으로 새로이 설정 할 때 이러한 지방어의 편협한 구속에서 완전히 몸을 털어야 할 것은 나의 누차 말해온 바이다. 도덕, ‘모랄’이란 완전히 주체화되어 일신상의 근육으로 감각화된 사상이나 세계관의 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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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모랄’은 풍속 세태 속에서 나타나고 복장과 취미에까지 나타나야 할 것이다. 인정, 인륜, 도덕, 사상이 가장 감각적으로 물적으로 표현된 것이 풍속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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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의 입장에 의하면 문학적 ‘모랄’은 반드시 과학적 합리성을 그의 핵심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면 안되었다. 실험과 실증과 실천을 거쳐서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과학적 개념의 합리적 핵심,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그것을 진정한 ‘모랄’이라고는 부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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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이상과 같은 것을 생각한 뒤에 채만식 씨의 「탁류」에는 승재와 계봉이를 통하여 작자가 확실히 이러한 고도의 모랄을 현현하려고 노력한 것이 사실이며, 다시 씨의 「제향(祭饗)날」이나 혹은 최근 『동아일보』에 실린 단편 「치숙」등에서나 「탁류」나 「천하태평춘」과는 일종의 대척적(對蹠的) 태도에서 소설을 생각하고 있는 듯하여 나의 흥미는 여러모로 배가됨을 누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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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류」의 성실한 독자는 누구나 감수하였겠지마는 이 장편의 가장 아름다운 곳은 고태수와 초봉의 결혼 전까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까지 「탁류」는 아직 계속되고 있다. 완결도 되지 않은 작품을 평하여 작자나 독자에게 미안하나 마지막이 어찌되었던 간에 나의 보는 바는 변할 것 같지 않다). 초봉이가 결혼을 하고 고태수가 탑싹부리 영감에게 김씨와 함께 뭉둥이찜을 맞고 죽어 뻐드러지는 날, 이 소설은 확실히 준령을 넘어버린 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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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렇게 한 개의 소설이 상반에서 하반으로 발전함에 따라 점점 그의 예술성의 고도의 난숙을 보여야 할 때에 이것이 반대로 그 감흥의 위훅을 재래(齎來)하여 독자의 흥미를 감쇄시키고 있다면 대체 그 원인은 어디있는 것일까. 나는 한 사람의 신문소설의 독자의 입장에서 스토리를 지니고 나가던 하나의 골격이 부러져서 그 뒤부터는 그날 그날을 끌고 나가는 커다란 흥미의 간선(幹線)이 없어진 때문이라고 말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소설의 단순한 신문소설적 독자가 아니었다. 이리하여 나는 좀더 성의있는 성찰을 이 문제에 대하여 가져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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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얼리트스가 가지는 로만에 대한 이상적 원망(願望)은 무엇일까? 그것은 여러 가지 말로써 표현할 수 있음에 불구하고 역시 이렇게 개괄해봄이 본질적이 아닐까. 과학이 가진 이론의 합리적 핵심 - 바꾸어 말하면 이론적 모랄이 심리를 통하여 윤리를 통하여 성격을 통하여 풍속에까지 뚜렷하게 나타나기를, 다시 말하면 작가가 이론적으로 파악하고 인식한 결과 얻은 사상이 뼈다귀째로가 아니고 활짝 풀어져서 독자에게 어는 것이라고 잡아낼 수 없을 만큼 충분히 감성화되어 풍속에까지 침윤된 것으로 표상화되기를 우리들은 항상 희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실로 주체화가 이 외의 별다른 것이 아니었고 다시 과학적 방법과 예술적 방법의 상호침투나 세계관과 창작방법의 성찰이 이것을 토구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엥겔스가 경향소설에 대해서 말한 바 예술작품 가운데서 작가의 의도나 사상이 명백하게 나타나지 않으면 않을수록 더욱 아름답다는 의미의 말을 연상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이론적 모랄이 완전히 감성화하여 풍속에까지 풀어져 나오기를 희망한 말 이외의 별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코 모랄에는 이론적 핵심이 없어도 좋다든가 또는 없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사상이 주체화되기를, 다시 말하면 세계관이 일신화한 것으로 되기를, 또다시 바꾸어 말하면 이론적 모랄과 풍속이 완전히 융합되기를 희망한 것뿐이다. 과거의 위대한 문학은 모두가 이러한 것들이었다. 예술적 척도는 이리하여 훌륭한 기준으로 된다. 왜냐하면 세계관 위에 예의 논자들과 같이 절대의 우월권을 주어 버리면 “프로문학은 괴테보다도 위대하다”는 엉터리없는 자긍(自矜)이 용허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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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고찰을 가지고 채만식 씨의 「탁류」를 대하면 결혼식 이전까지의 세태묘사의 아름다움은 실로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 이론적 모랄이 풍속과 융합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며, 하반에서 그의 예술성이 점차로 감퇴된 것은 저조에 빠진 세태 풍속의 지나친 과잉에 비하여 이론적 모랄이 영자(影子)를 감추어 그것이야말로 글자 그대로의 「탁류」가 범람한 탓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 뒤 ‘식욕의 방법론’에서 승재를 재등장시켰으나 좀처럼 어울리지 않아 확실히 이 승재라는 인물은 빌러온 의붓자식 같이 주름살을 펴지 못하는 반편이 감이 있었다. 승재의 세계는 상반(上半)이었지 하반이 아니었던 것이다. 「천하태평춘」은 불행히 한 회분밖에 보지 못하여 단언키는 힘들어도 결코 전자 「탁류」를 따르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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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씨의 장편을 보던 눈으로 「제향날」이나 「치숙」이를 대하면 이곳에는 아닌게 아니라 시정의 습속, 세태가 없고 고도의 이론적 모랄이 앞장을 선 감이 있다. 이 두 작품에서는 이것이 작은 단편들임에 불구하고 실로 아슬아슬한 재주를 부리며 정치적 관심을 최전면에 내세웠다. 후자는 역설의 묘미를 추구하여 상당히 흥미 있는 결과를 내고 있다. 비교적 생경한 맛이 덜한 편이나 「제향날」은 힐끗 보면 재치 있게 꾸민 옛날의 프로 문학같은 느낌을 준다. 이곳에는 생활, 세태, 풍속이 없고 개념적으로 인식된 정치적 사건이 생경한 채로 무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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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나는 이곳에서도 과학이 문학과 교섭하는 국면을 아름답게 주체화하기 위하여 부절(不絶)히 노력하고 애타하는 현대작가의 성격을 규시(窺視)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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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안회남 씨의 근작 「그날 밤에 생긴 일」을 『조광』4월호에서 읽고서 나는 상술한 바와는 다른 상극의 성격을 발견하고 그것으로부터 널리 다른 예술형태에까지 생각을 뻗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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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영화예술의 발전과정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흥미 있는 관찰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과거 8, 9년 전 발성영화 난숙시대에 그곳에 태반 완미(完美)에 가까운 형식과 내용의 일치를 발견하여 감탄을 마지않는 적이 있었다. 영화라는 시각의 예술이 장구한 시일 동안의 모색의 결과, 자기 독특의 세계를 발견하였을 때 우리는 예술적 분위기에 젖어서 그것을 마음놓고 향락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발성이 세상에 나와서 영화예술의 형식을 착란해 버릴 때 누구나 영화는 예술적으로 타락해 버린다는 느낌을 가졌었다. 그러나 이것은 낡은 것을 깨뜨려버리기 위한 불가피의 파탄시절 - 하나의 과도기이었던 것을 지금은 누구나 의심치 않는다. 수일 전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를 본 이로서 그의 예술가로서의 높은 프라이드에 다시금 감탄한 이는 물론 적지 않을 줄 아나, 동시에 영화예술은 확실히 무성시대를 떠나버렸다는 적막한 생각을 품은 이도 적지 않을 줄 생각한다. 채플린의 ‘미믹’이 아름답고 원숙하면 할수록 그것은 일층 쓸쓸하였다. 이리하여 하나의 혼란기를 넘어서 토키는 지금 정돈기에 들어와 움직일 수 없는 예술적 지반을 잡았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작금의 양심 있는 예술가, 예를 들면 제 패데, 쟝 르노와르, 줄리앙 듀비에 등의 작품이 천여성상(千餘星霜)의 역사를 가지고 독자를 세련시킨 심리묘사나 성격구조의 영역을 향하여 용감히 육박한다 할 때 일찍이 르네 크렐이 『자유를 아등(我等)에게나』나 『서행(西行)하는 유령』에서 도달한 통일된 형식적 아름다움을 꿰뚫고 위태한 걸음걸이를 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우리가 간과하여서는 아니 될 하나의 과도적 현상이다. 아등의 우인(友人)중 루비강이 연(演)하는 바 탕탕이 지붕에서 굴러떨어질 때 또는 ‘최하층’의 남작의 그 몸에 붓는 연기에 취하면서도 끝끝내 스스로 장래를 볼 수 없는 일종의 불안, 이런 것을 나는 이상과 같이 해석하고 스스로 장래를 꿈꾸며 영화예술의 미래를 낙관한다. 이러한 느낌은 국산영화의 양심적인 것에 있어서 일층 더 심하니 최근에 본 『지열』같은것은 마음이 놓이지를 않아 한번 땀을 흘리면서야 볼 수 있었다. 『대선』식 넌센스물을 마음놓고 오락하는 우리들이 한번 삼호십랑(三好十郞)의 각색물이나 문예창작의 영화화물에서 그렇게 불안하고 또한 커트마다 결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전혀 이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영화적으로 시각을 통하여 처리될 것이 이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영화적으로 시각을 통하여 처리될 것이 무수히 한두 마디의 대화에 의하여 쉽사리 집어친 것을 찾아낼 수 있고 개중에는 ‘히꼬로꾸 대소(大笑)함’같이 각색을 연극식으로 두개의 세트 안에 몰아넣어 버린 것까지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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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틀어 하나의 도달한 계단에서 새로운 단계에의 비약을 꾀할 때 그곳에는 커다란 혼란과 파탄을 마치 어린아이들의 홍역같이 모녀하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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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회남 씨는 오랫동안 씨가 도달한 경지에서 새로운 세계의 개척을 위하여 일시의 침체기에 빠졌던 작가같이 나에겐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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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그날 밤에 생긴 일」을 보면 씨는 확실히 사소설과 신변소설에서 새문학세계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러나 씨의 완전히 딴 세계에 작가의 눈을 돌린 데도 불구하고 의연히 씨의 붓이 일인치이을 놓지 못하는 것은 어인일인가? 역시 이들의 생활을 꿰뚫고 들어갈 만한 기백이나 패기가 준비되어 있지 않는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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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 신변의 모랄이 일인칭이나 설화체를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문학을 자기 일신상의 진리로써 파악한 것이 아니라 문학을 사사(私事) 혹은 주아주의적(主我主義的) 망상에서 이해한 결과다.(물론 일인칭 전체가 글렀다든가 좋다든가가 이곳에서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사나 신변을 떠나서 넓은 현실세계로 작가가 눈을 돌릴 때 일인칭이나 설화체는 부족하다. 그것은 시정의 모랄이 아니라 고도의 과학적 핵심을 갖는 모랄을 가지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안회남 씨의 이 다음 작(作)은 여러가지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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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寅[무인] 3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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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제62호, 1938년 5월]
【원문】채만식 [탁류]와 안희남의 단편 - 세태 · 풍속 묘사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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