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금수강산의 이름이 있는 대동강 연안이 선생의 고향이요, 출생지요, 만년(晩年)의 잠시간 칩거지(蟄居地)다.
4
안씨의 세거지(世居地)는 평양 동촌(東村)이니 대동강 동안(東岸) 낙랑(樂浪) 고분(古墳) 남연이요, 선생이 출생하기는 대동강 하류에 있는 여러 섬 중의 하나인 도롱섬이다. 이는 그 부친이 농토를 구하여 동촌으로부터 도롱섬으로 이거 한 까닭이요, 그후에 그 백씨는 다시 강서군 동진면 고일리로 이사하기 때문에 선생의 적이 강서로 된 것이다.
5
선생의 이름은 창호(昌浩), 호는 도산(島山), 서력 一八七八[일팔칠구]년 무인 년 십一[일] 월 십一[일] 일에 위에 말한 도롱섬 일 농가(農家)의 차남(次男)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고향에 있는 사숙(私塾)에서 공부하는데, 그 천성의 명민함이 이미 드러나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6
일청전쟁의 갑오년은 무인생인 도산이 십七[칠]세 되던 해였다. 그는 평양에서 일본군과 청군이 접전하는 양을 보고 또 전쟁의 자취를 보았다. 평양의 주민은 헤어지고 고적과 가옥은 파괴되었다.
7
총각 안창호는 어찌하여 일본과 청국이 우리 국토 내에 군대를 끌고 들어 와서 전쟁을 하게 되었나 생각하였다. 그의 소년 시대의 동지요, 수년 연상인 필대은(畢大殷)과 이 문제를 토의하노라고 야심토록 담론하였다. 그래서 도산은 한 결론을 얻었다.
8
『타국이 마음대로 우리 강토에 들어 와서 설레는 것은 우리 나라에 힘이 없는 까닭이다.』라고.
9
다음 해가 을미년, 일청전쟁에 청국이 일본에게 패하여 마관 조약(馬關條約)에서 조선의 독립이 두 나라로부터 승인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청국의 태종(太宗)의 조선 침입, 조선 인종(仁宗)의 남한산성(南漢山城)항복 이래 二[이]백 수십 년간 청국이 조선에 대하여서 가졌던 종주권(宗主權)을 승전자 일본의 요구에 의하여 포기한 것이다. 이리하여 조선은 국호를 고쳐서 대한이라하고, 대군주(大君主)를 고쳐 대황제(大皇帝)라 하고, 동서 열강과 외교관을 교환하고, 겉으로는 독립국의 체면을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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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황제와 그 근신(近臣)은 무엇에 주력하였는가. 궁전(宮廷)의 예의를 황제식으로 고치고, 목조(穆祖)에서 태조(太祖)까지 四[사]대를 황제로 추숭(追崇)하고 등등 체재를 정비하기에 골몰했다. 경갈(罄渴)한 국고(國庫)는 매관 매 작(賣官賣爵)으로 충용(充用)하는 한(漢) 조착(晁錯)의 논법을 썼으니, 방백(方伯) 수령(守令)을 비싼 값으로 사가지고 간 사람들은 적어도 본전의 몇 배를 벌 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그들은 남원 부사 변학도(卞學道)의 방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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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독립이 왔기 때문에 국보(國步)는 더욱 간난하고 민생은 더욱 도탄에 괴로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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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은 없고 이름만 있는 대한의 독립이었다. 총각 안창호도 이러한 무력한 국토를 노리는 자가 있는 것을 간파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전패한 청국은 차치하고 러시아와 일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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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슬라브 민족의 뒤떨어진 운명을 만회하려고 표트르대제 이래도 분기 하였다. 다른 민족들이 모두 바닷가, 기후·풍토가 좋은 지역을 차지하여 안락과 부강을 누릴 때에 슬라브족은 무슨 연고인지 아무도 살기를 원치 아니하는 동토(凍土)·흑토(黑土)·적도(赤土)의 밤과 낮이나 차고 더운 것이 고루지 못한 세계의 뒷골목에서 칩거(蟄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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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브 민족이 이 불운한 처지를 벗어나는 길은 서쪽으로 대서양과 지중해로 진출하는 것이 제일의 길, 남으로 인도양이 제이의 길, 동으로 태평양이 제삼의 길이었다. 그중에서 제일의 길은 당시 영·불·독(英·佛·獨)의 세 강국이 있어서 도저히 범접할 희망이 없고, 제이의 길인 인도양 길은 영국의 세력 범위 내요, 오직 하나만만한 데가 제삼의 길인 태평양 길이었다. 이에 러시아는 노(老) 청 제국(淸帝國)을 압박하여 네르친스크 조약에 흑룡강 이북의 땅을 할양(割讓)케 하고, 만주의 모든 권익을 승인케 하며, 조선을 엿보는 것이였다. 러시아가 역사적으로 주의의 초점을 삼는 지점이 둘이 있으니, 그것은 곧 지중해 로 나아가는 다다넬스 해협과 태평양 상의 기지로 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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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각 안창호는 새로 독립을 얻은 조국이 북으로는 러시아의 수연(垂涎)의 대상이 되고, 동으로는 일본의 대륙 진출의 기지로서의 대상이 된 것을 알았다. 일본이 청국에 대한 승전의 결과로 조선의 독립을 주요한 요구로 한 것은, 우선 조선을 청국의 농중(籠中)에서 꺼내어 놓고 서서히 자가 농중에 넣을 공작을 하려는 혼담인 것은 삼척동자라도 추측할 수 있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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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조선이 할 일은 급급히 서둘러서 러시아와 일본이 덤비기 전에 국력을 충실히 해서 독립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그러하거늘 묘당(廟堂)의 의(議)는 이에 나아갈 줄을 모르고 혹은 러시아에 아첨하고, 혹은 일본에 친하여 일시 구안(苟安)을 찾거나 자가 자파의 세력 부식에만 급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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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러시아와 일본의 악독한 어금니를 피할 방책으로 이이제이(以夷制夷), 즉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어하는 구투(舊套)를 쓴 것이 광무제의 영·미·불·독,(英·美·佛·獨)등 여러 강국을 끌어 들여 호시탐탐한 러시아 일본 두 나라를 견제하는 것이었다. 외국인 고문을 채용한 것이 이것이다. 이로 하여서 한성(漢城)은 여러 강국의 외교 쟁패의 음모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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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미국에 오랫동안 망명하였던 서 재필(徐載弼)이 미국 시민 자격으로 저 선 정부의 고문이 되어서 한성에 돌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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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은 갑신정변에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등과 같이 거사하다가 실패하여서 미국으로 망명하매 그의 삼족은 모조리 잡혀 죽임을 당하였고, 그 자신 역시 사형을 받을 죄인이었다. 광무제가 바로 김옥균들의 손으로 경우궁(景祐宮)에 파천(播遷)되었던 이요, 청군에 의부(依附)한 민씨 일파의 구세력에게 돌라붙어 김옥균 이하를 내어버린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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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은 망명 신세로 조국을 떠난지 십수년 만에 조국의 독립 완성, 모든 정치를 새롭게 하자는(庶政一新) 웅자한 계획과 열정을 품고 고국에 돌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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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라의 독립과 부강이 국민의 각성과 단결에 있음을 역설하여 이 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 등 동지를 규합하여서 독립협회를 조직하고,《獨立新聞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사대(事大)의 유물(遺物)인 모화관(慕華館)을 독립관이라고 개칭하여, 거기서 조선에서는 처음 인연설회를 연속 개최하여 세계의 대세와 정치를 잘하고 못하는 것과 국가의 나아갈 길을 논하고, 일변으로 서재필 자신이 광무제와 당시의 코 높은 관리들을 혹은 계몽하고 혹은 힐책하여 나라의 운명이 알을 포개어 놓은 것처럼 위태함을 경고하였다. 독립협회는 범위를 확대하여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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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총각 안창호는 동지 필대은 등과 함께 평양에서 궐기하여 쾌재정(快哉亭)에 만민공동회 발기회를 열고 그 자리에서 감사 조민희(趙民熙)를 앞에 놓고 수백 명 집회 중에 일대 연설을 하여 조민희로 하여금 감탄을 금하지 못하게 하고 안창호의 명성이 관서 일대에 진동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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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힘이 독립의 기초요, 생명인 것을 통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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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도덕 있는 국민이 되고 지식 있는 국민이 되고 단합하는 국민이 되어서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남에게 멸시를 아니 받도록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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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중에 덕 있고 지 있고 애국심 있는 개인이 많이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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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나 자신이 그러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내가 덕 있고 지 있고 애국심 있는 ─ 즉 힘있는 사람이 되면 우리 나라는 그만한 힘을 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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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나 자신이 힘이 없이 없이 남을 힘있게 할 수 없음은 마치 내가 의술을 배우지 아니하고 남의 병을 고치려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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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이렇게 결심하였다. 이러한 사고 방법은 도산이 평생에 쓰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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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도산은 이씨 부인과 약혼 중에 있었으나 혼인은 공부하고 돌아 온 뒤에 할 터이니 그때를 기다리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다른 데로 출가시키라, 십년 전에는 돌아올 기약이 없다고 이씨 집에 선언하고는 미국으로 향하는 길에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시국을 관망하면서 정동 미국 선교사의 사숙 (培材[배재]의 母體[모체])에서 얼마 동안 공부하다가 만민공동회가 구세력의 사주(使嗾)를 받은 보부상파(褓負商派)의 습격을 받고 정부의 큰 탄압을 받아 부서지고, 서재필은 미국으로 물러가고, 윤치호(尹致昊)는 중국으로 빠져 나 가고, 이 승만은 감옥에 갇히게 된 이듬해인 기해년, 二[이]십二[이]세 때에 인천서 미국선을 편승하고 미주로 향하였으니, 이때에 이씨 부인은 죽을 데를 가더라고 같이 간다 하여 편발(編髮)로 도산을 따라 와서 바로 배 타기 직전 인천에서 초례(醮禮)를 행하고 남편 도산의 뒤를 따랐다.
2. 第二章[제이장] 美州遊學時代[미주유학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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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僑胞[교포]의 組織[조직]과 訓練[훈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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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이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북미에 상륙한 때는 二[이]십二[이]세의 청년이었다. 그의 목적은 학업에 있었으나 당시에 미국에 이민한 한국 동포들의 현상은 도저히 그로 하여금 학창에 전념할 틈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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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우에 상륙한지 얼마 아니 된 어떤 날 도산은 길가에서 한인 두 사람이 상투를 마주 잡고 싸우는 광경을 미국인들이 재미있게 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도산은 뛰어 들어가 그들의 싸움을 말리고 그 싸우는 연고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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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이 근방에 흩어져 사는 중국 교민들에게 인삼행상을 하는 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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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는 아직 가게를 벌이고 정당한 상업을 경영하는 한인은 없고 대부분이 인 삼 장수와 노동자였다. 도산이 길가에서 싸움을 말린 두 동포의 싸움의 이유는 협정한 판매 지역을 범하였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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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 샌프란시코우에 재류하는 동포를 두루 찾아 그 생활 상태를 조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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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 당당한 독립 국민의 자격이 『 없다. 이들이 이러하기 때문에 미국인들이 우리 민족을 보기를 미개인이라 하고 독립 국민의 자격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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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여러 날 고민한 끝에 공부한다는 목적을 버리고 우선 미주 재류 동포가 문명한 국민다운 생활을 하도록, 그리하여서 보기에 한국인은 문명한 민족이다, 넉넉히 독립국가를 경영할 만한 소질도, 실력도 있는 국민이라고 볼 수 있는 정도까지 끌어 올리기에 노력하리라고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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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이 뜻을 동지로 동행한 이 강(李剛)·김성무(金成武)·정재관(鄭在寬)등에게 통하였다. 그들도 동감이라 하며 우리 四[사]인은 이 목적을 달하기까지에는 이 사업을 중지하지 말자고 약속하고, 또 도산의 생활비는 다른 三 [삼]인이 벌어 대일 테니 도산은 동포 지도에 전력하라고 도산을 격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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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더욱 감격하여서 미국에 있는 동포의 생활 향상을 위하여 분골쇄신(粉骨碎身)하기로 스스로 맹세하고 그날부터 일을 시작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그가 몸을 바쳐서 민족 운동을 한 첫날이었다. 빛나는 정치 운동이나 혁명 운동이 아니라 만리 타국에 유리하여 와 있는 불과 몇 백명의 무식한 동포의 계몽을 위 하여 청운(靑雲)의 웅지(雄志)를 버리고 나서는 二[이]십二[이]세의 청년 안창호를 상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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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날부터 재류 동포의 호별 방문을 시작하여 그들의 생활 상태를 시찰하였다. 첫째로 그의 눈에 뜨인 것은 동포들이 거주하는 거처가 불결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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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방이나 셋집을 물론하고 장식이 없고 소제가 불충분하여서 밖에서 얼른 보아도 어느 것이 한인이 사는 집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첫째, 한인이 거처하는 집으로 눈에 뜨이는 것은 유리창이 더럽고 문장(門帳)이 없는 것이었다. 서양인의 창에는 반드시 그것이 있었다. 둘째로 눈에 뜨이는 것은, 문 앞이 더러울 뿐더러 오는 손님을 기쁘게 하는 화초가 없는 것이요, 세째로는, 실내가 불결하고 정돈되지 아니하고 또한 미화되지 아니한 것이었다. 그리고 여러 집을 찾아 다닌 결과로 발견된 것은, 집에서 불쾌한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이 냄새로 하여 서 인접한 서양인이 살 수가 없어서 집을 떠나는 일도 있었다. 그 다음에 이웃 사람이 싫어하는 것은, 고성 담화(高聲談話)와 훤화(諠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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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도산은 몸소 한집 한집 청소 운동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동포들이 도산의 하는 일을 의심도 하고 거절도 하였으나 차차 신임하여서도산을 환영하였 다 그는 손수 비로 쓸고 . , 훔치고, 창을 닦고 또 헝겊과 철사를 사다가 창에다가 얌전하게 커어튼을 만들어 치고, 문전에 화분을 놓거나 꽃씨를 뿌리고 주방과 변소까지도 깨끗이 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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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소제 인부가 되어서 이 모양으로 동포의 숙소를 청결히 하고 미화하였다. 이것은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동포의 생활을 일변케 하였다. 그것은 다만 거처의 외양만이 일변한 것이 아니요, 그 정신 생활에까지 변화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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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관(衣冠)을 정제(整齊)히 하면 중심(中心)이 필칙(必飭)」한다는 말과 같이 더럽고 산란한 환경에 기거하는 것과 정결하고 정돈한 데 있는 것과는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이 다른 것이었다. 동포들은 어느새에 면도를 자주 하고, 칼라와 의복을 때 아니 묻게 하게 되고, 담화도 이웃에 방해가 아니 되도록 나지막한 소리로 하게 되고, 이웃 사람이 싫어하는 냄새나 음성이나 모양을 아니 보이려고 애를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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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코놈들한테 왜 눌리느냐. 그놈들이야 무에라든지 내 멋대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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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뽐내던 몇 동포도 그런 것이 아니라 서로 이웃을 위하는 것이 문명인의 도리요, 또 여기서 한 한인이 미국인에게 불쾌한 생각을 주면 이는 전 미국인으로 하여금 우리 민족 전체를 불쾌하게 생각하게 하는 것인 줄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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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양으로 하는 동안에 도산은 동포들의 신뢰를 받아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의논하러 오고, 또 도산을 집에 청하여서 식사도 대접하였다. 도산은 이러한 신뢰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묵묵히 소제 인부와 심부름군의 노역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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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의 신뢰를 얻게 되매 도산이 처음으로 동포간에 제의한 것은 인삼 행상의 구역을 공평하게 정하되 일 개월씩 서로 구역을 교환하는 것과, 인삼의 가격을 협정하여서 서로 경쟁하여 값을 떨어뜨리게 하는 폐단이 없게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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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이 모양으로 점차 동포에게 협동과 준법(遵法)의 훈련을 하여서 될 수 있으면 인산 행상들을 단합하여 계(契)를 만들어 매입과 매출을 한 큰 조직에서 함으로 신용과 이익의 안전을 보장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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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는 노동력의 공급에 관한 것이니, 한인의 노동력을 통합·공급하는 기관을 만들어서 거기서 미국인의 노동력 주문을 받고 한인의 노동력 공급을 함으로 노동자들의 최저 임금을 보장하고 또 실직이 없게 하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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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서도 도산은 그의 평생의 사업 원리를 직용하였으니, 그것은(一 [일])점진적으로 민중의 자각을 기다려서 하는것, (二[이]) 민중 자신 중에서 지도자를 발견하여 그로 하여금 민심을 결합케 하고 결코 도산 자신이 지도자의 자리에 사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세우고 《共立新報[공립 신보]》을 발간하고 다시 확대하여 미주국민회가 되고 《新韓民報[신한민보]》라는 신문이 될 때에도 도산은 늘 배후에 있었다. 그가 국민회장이 된 일이 있 으나 그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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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이 이 모양으로 독특한 민족 운동을 시작한 지 일년쯤 하여 이 운동의 효과가 미국인에게 반영된 결과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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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그의 씨명을 잊었거니와, 샌프란시스코우의 자본가의 하나요, 가옥을 많이 가지고 있는 모 미국인이 그의 집에 세로 들어 있는 한국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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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네 나라에서 위대한 지도자가 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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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물었다. 무엇을 보고 그러느냐 한즉 그 미국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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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네 한인들의 생활이 일변하였소. 위대한 지도자 없이는 이리 될 수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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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므로, 한국인들은 안창호라는 사람이 와서 지난 일년 동안 우리를 지도하였다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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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것이요. 나 그이 한 번 만나고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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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도산이 그와 면회하였다. 그는 도산이 백발을 흩날리는 노인이 아니요, 새 파란 젊은이인 것을 보고 더욱 놀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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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미국인의 집 주인은 도산을 극구 칭양하고 도산의 공적에 감사하는 뜻을 표 하기 위하여 자기 가옥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집세를 매년 일 개월을 감하겠다는 것을 선언하고, 또 도산이 한국인을 지도하기에 사용할 회관 하나를 무료로 제공할 것을 자청하였다. 이리하여 얻은 집이 한국인의 최초의 회관이요, 예수교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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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공립협회가 조직되고 순국문으로 《共立新報[공립신보]》가 발간되고, 샌프란시스코우뿐만 아니라 캘리포오니아주 여러 도시에 흩어 있는 한국인을 조직하고, 나아가서는 하와이, 맥시코에 있는 동포까지도 합하여 대한인 국민회(大韓人國民會·Korean National Association)를 형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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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는 그 출발로 보아, 또 조직자요 지도자인 도산의 의도와 인격으로 보아 단순한 교민 단체만이 아니었다. 그것을 일종의 민족 수양운동이요, 독립을 위한 혁명 운동이요, 민주주의 정치를 실습하는 정치 운동이었다. 그러 나 그뿐이 아니었다. 대한인 국민회는 재미동포의 보호 기관이요, 취직 알선 기관이요, 노동 조합이요, 권업 기관(勸業機關)이요, 문화 향상 기관이었다. 이제 그 실제 활동의 한두 예를 들어서 그 본래의 성격과 공적을 살펴 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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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오니아주 행정청에서 한인에 대한 것은 국민회에 자문하였고, 또 한인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은 이 회를 통하여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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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새로 입국하는 한인은 여권이 없거나 법정 휴대금이 없는 경우에라도 국민회에서 이민국에 보증하면 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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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주들이 노동력이 필요할 때에는 국민회를 통하여서 한인 노동력을 구하였고 국민회는 응모하는 동포의, 보증인이 되었으며, 사업주와 동포간의 이해 충 동리 있을 때에는 국민회가 나서서 동포의 이익을 보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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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회는 동포에게 매년 五[오] 달라의 국민 의무금을 징수하고 각 지방 대의원과 총회장의 선거를 투표로 하여서 민주 정치의 훈련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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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으로부터서 여행자나 유학생이 을 때에는 이들의 편의를 위하여 주선하였다. 동포 상호간의 쟁의가 있을 때에는 그것을 미국 법정에 끌고 가지 아니하고 재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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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개선을 지도·장려하여서 국민의 명예를 보전·발양하도록, 외인의 비웃음을 받지 아니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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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차 세계대전이 휴전이 되자 곧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안창호 명의의 신임 장으로 이승만 박사를 와싱턴으로 파견하여 독립 운동을 개시하였으니, 이것은 상해에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이 김규식(金奎植) 박사를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한 것과 아울러 한국 독립 운동의 중요한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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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의 성금을 모아 이승만 박사의 와싱턴 위원부의 경비를 부담하고, 또 상해 임시정부의 경비의 절반과 중경 체재중의 임정 요인의 생활비를 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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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차 대전 끝에는 재미 한족연합회(在美韓族聯合會)를 조직하여 대표자 십 五[오]인을 본국에 파송하여 독립운동에 합력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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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는 실로 四[사]십여 년의 역사를 가진 민족 운동 단체로서, 그 수명으로나 공적으로나 우리 민족사에 대서특서할 위업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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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회는 제일차 대전 전까지에는 시베리아에도 원동(遠東)지부가 있어서 바로 제일차 대전이 터지던 여름에도 치따에서 원동 각지 국민회 대의원회가 열려 三 [삼]일간 회의를 계속하였다. 그때에 출석 인원은 五[오]십 명이 넘었거니와, 멀리 크라스노야르스크, 옴스크 지방에서까지 대의원이 와 있었다. 치따에는 이 강(李剛)이 중심이 되어 있었고, 기관지로 《正敎報[정교보]》를 발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전이 일어난 뒤에 러시아 영토 안의 국민회 운동은 소멸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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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이 북미주 동포를 조직하여 놓았을 때에 일아 전쟁이 끝이 나고 조국의 운명이 그당시 우리 신문지상에 예투(例套)로 쓰는 문자로「누란급업」(累卵岌)이었다. 이에 도산은 북미 동포의 재촉으로 일본은 경유하여 고국에 돌아 왔으니, 이른바 을사 신조약이 이미 한국의 자주 독립권의 일부를 박탈하여 일본의 한국 병탄이 오늘인가 내일인가 한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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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末風雲[한말 풍운]과 民族運動[민족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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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오츠머스 조약에서 중재자인 미국 대통령 데오도어·루우스벨트씨는 일본의 한국과 만주에 대한 특수 권익이란 것을 인정하여 버렸다. 영국도 이것을 승인하였다. 러시아가 한국의 북위 三[삼]십 九[구]도선 이북을 일본과 자기 나라사이의 중간 지대로 하여 서로 주병(駐兵)하거나 기지를 세우지 말자던 일본과의 조약의 권리를 상실한 것은 물론이어니와, 용암포(龍岩浦)를 러시아의 기지로 한국에 강요한 것은 마산포(馬山浦)의 강요와 아울러 일본을 격발하여 일아전쟁을 일으킨 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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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환국하는 길에 동경에서 유학생 중의 저명한 인물들과 만났다. 그때에 동경에는 태극학회(太極學會)라는 유학생 단체가 있었다. 유학생 단체라고는 하나 일종의 애국적 정당이어서, 그 회합에서는 국가의 운명과 시국에 대한 대책을 토론하였고 《太極學報[태극학보]》를 발행하여 널리 국내 동포에게 정치적 계몽 운동을 하고 있었다. 이 《太極學報[태극학보]》가 당시 우리 나라에서는 손에 꼽히는 애국적·정치적인 잡지였다. 얼마 후에 대한유학생회라는 것이 생겼다. 도산은 이 태국학회외 간부를 방문하였고, 그가 주최한 학생회에서 일장의 강연회를 행하였으니, 이것은 크게 청중에게 우리 나라에 큰 인물이 났다 하는 감격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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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도산이 처음 고국을 떠난 지 八[팔]년 후로 三[삼]십세의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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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동경에서 첫 명성을 높인 것도 한 원인이 되어서 서울에 들어오는 길로 전 사회의 주목을 끌었다. 그의 당당한 풍채라든지, 웅장한 음성이라든지, 열성 있는 인격이라든지는 얼마 아니 되어 유근(柳瑾)·박은식(朴殷植)·장지연(張志淵) 등 언론계의 지도자와 유길준(兪吉濬) 등 관계(官界)의 선각자와 이갑(李甲)·이동휘(李東輝)·노백린(盧伯麟)등 청년 장교요지사들이며,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전덕기(全德基)·최광옥(崔光玉)·이승훈(李昇薰)·유동열(柳東說)·유동주(柳東 作)·김구(金九) 등과 동지의의를 맺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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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도산의 연설은 유명하였다. 도산의 연설이 있다면 회장이 터지도록 만원이 되었다. 그의 신 지식과 애국·우국의 극진한 정성과 웅변은 청중을 감동시키지 아니하고는 마지 아니하였다. 그는 거의 연일 연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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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동포에게 호소하는 주지는 일관하였으니, 곧 지금 세계가 민족 경쟁 시대라, 독립한 국가가 없고는 민족이 서지 못하고 개인이 있지 못한다는 것과, 국민의 각원이 각성하여 큰 힘을 내지 아니하고는 조국의 독립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과, 큰 힘을 내는 길은 국민 각 개인이 각자 분발·수양하여 도덕적으로 거짓 없고 참된 인격이 되고, 지식적으로 기술적으로 유능한 인재가 되고 그러 한 개인들이 국가 천년의 대계를 위하여 견고한 단결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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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세계의 대세를 설하고 한국의 국제적 지위가 어떻게 미약하고 위태하여 흥망이 목첩에 있음을 경고하고, 그런데 정부 당국자가 어떻게 부패하고 국민이 어떻게 무기력함을 한탄하고, 나아가서 우리 민족의 결함을 척결(剔抉)하기에 사정이 없었다. 지금에 깨달아 스스로 고치고 스스로 힘쓰지 아니하면 망국을 뉘 있어 막으랴라고 눈물과 소리가 섞이어 흐를 때는 만장이 느껴 울었다. 그러나 그는 뒤이어서 우리 민족의 본연의 우미성과 선인의 공적을 칭양하여, 우 리가 하려고만 하면 반드시 우리나라를 태산반석(泰山磐石) 위에 세우고 문화와 부강이 구비한 조국을 이룰 수 있다는 것으로 만장 청중으로 하여금 서슴치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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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양으로 도산의 귀국은 국내에 청신한 기운을 일으켰다. 특히 주목할 것은 그의 민족 운동 이론의 체계였다. 다만 우국·애국의 열만이 아니라 구국제세(濟世)의 냉철한 이지적인 계획과 필성 필승(必成必勝)의 신념이었다. 도산의 사념과 신념은 당시의 사상계에 방향을 주고 길을 주었으니, 곧 각 개인의 자아 수양과 애국 동지의 굳은 단결로 교육과 산업 진흥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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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식자간의 여론 통일에 노력하였으나, 당시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급진론자가 많았다. 그때에 급진론이라면, 당장에 정권을 손에 넣어서 서정(庶政)을 혁신하고 국가의 총력을 기울여서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니, 이 급진론은 도산이 그 중심 인물이 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도산은 이 급진이 성공 못할 것을 역설하고, 오직 동지의 결합훈련과 교육과 산업으로 국력·민력을 배양하는 것만이 유일한 진로라고 단정하고 주장하였다. 그러면 급진론자는 「국가의 존망이 목첩에 달린 이때에 국력, 민력의 배양을 말하는 것은 백년하청(百年河淸)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도산의 정로 점진론(正路漸進論)을 불만히 생각하였다. 그러나 도산은 힘없는 혁명이 불가능함을 말하였다. 갑신 정변의 김옥균 일파의 독립당 운동도 그러하였고 정유년의 서재필·이승만의 독립당 운동도 그러하였다. 번번히 「시급」을 말하고 「백년하청」을 탄하여서 「있는 대로 아무렇게나」로 거사하여서는 번번히 실패하지 아니하였는가. 「갑신년부터 단 결과 교육 산업주의로 국력 배양 운동을 하였던들 벌써 二[이]십여 년의 적 축(積蓄)이 아니겠는가. 정유년부터 실력 운동을 하였어도 벌써 십년 생취(十年生 聚), 십년 교훈이 아니었겠는가. 오늘부터 이 일을 시작하면 십년 후에는 국가를 지탱할 큰 힘이 모이고 쌓이지 아니하겠는가. 이 힘의 준비야말로 독립 목적 달성의 유일무이한 첩경(捷徑)이라」고 도산은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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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이 급진론자를 경계하는 또한 큰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조정에 뿌리 박은 수구파 세력과 이등박문(伊藤博文)을 대표로 하는 일본 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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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론의 주장과 같이 신인들이 정권을 잡는 길은, 하나는 수구파(守舊派)와 합작하는 일이요, 또 하나는 일본의 후원을 받는 길이었다. 갑신의 김옥균이나 갑오의 박영효나 다 일본의 후원으로 수구파를 소탕하고 정권을 잡으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외력을 빈다는 것이 원체 대의에 어그러질 뿐더러 비록 외국의 위력으로 일시 반대파를 억압한다 하더라도 억압된 반대파가 반드시 매국적 조건으로 그 외력과 다시 결합하여 신파에게 보복할 것이다. 하물며 이미 충군 애국(忠君愛國)의 정신을 멸여(蔑如)한 양반 관료랴. 그러므로 일본의 후원을 비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라고 도산은 역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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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최석하(崔錫夏)가 이등박문과 자주 만나서 한국 정치의 혁신 공작을 하고 있었고, 그는 안창호 내각을 출현케 하는 것이 한국의 혁신을 위하여 가장 양책임을 이등에게 진언하였다. 동시에도산에게 대하여서도 이등의 진의가 결코 한국의 병탄에 있지 아니하고 일본과 한국과 청국과의 삼국 정립 친선(三國鼎立親善)이야말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을 막는 유일한 방책이라는 이등의 정견을 도산에게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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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도 도산을 만나고 싶다는 의향을 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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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등은 한국의 조정에 인물이 없음을 잘 알고 또 반복 무상(反覆無常)하 여 신뢰할 수 없음을 아므로 민간지사 계급과 접근하여 이들 중에서 심복을 구 하기를 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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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이등 회견은 마침내 실현되었다. 이 일이 있게한 것은 이 갑, 최석하의 권유도 원인이 되거니와, 도산도 이등을 만나 그 인물과 정견을 알아보자는 필요와 욕망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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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과 회견하였던 도산의 후일의 기억은 대강 이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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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은 일본의 동양 제패의 야심을 교묘한 말로 표시하였다. 자기의 평생의 이상이 셋이 있으니, 하나는 일본을 열강과 각축할 만한 현대 국가를 만드는 것 이요, 둘째는 한국을 그렇게 하는 것이요, 셋째는 청국을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또 일본에 대하여서는 이미 거의 목적을 달하였으나 일본만으로 도저히 서양 세력이 아시아에 침입하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으매, 한국과 청국이 일본 만한 역량을 가진 국가가 되도록 하여서 선린(善隣)이 되어야 한다고. 그러므로 자기는 지금 한국의 재건에 전심력을 경주하고 있거니와, 이것이 완성되거든 자기는 청국으로 가겠노라고. 이렇게 말하고 이등이 넌지시 도산의 손을 잡으며 그대와 나와 같이 이 대업을 경영하지 아니하려느냐고 공명을 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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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등은 도산더러 자기가 청국에 갈 때에는 그대도 같이 가자고. 그래서 삼국의 정치가가 힘을 합하여 동양의 영원한 평화를 확립하자고. 이렇게 심히 음흉하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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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하여 도산은 삼국의 정립 친선이 동양 평화의 기초라는 데는 동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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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대가 그대의 조국 일본을 헌신한 것은 치하한다. 또 한국을 귀국과 같이 사랑하여 도우려는 호의에 대하여서는 깊이 감사한다. 그러나 그대가 한국을 가장 잘 돕는 법이 있으니, 그대는 그 법을 아는가 하고 도산은 이등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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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은 정색하고 그것이 무엇이냐고 반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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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일본을 잘 만든 것이 일본인인 그대인 모양으로 한국은 한국 사람으로 하여금 헌신케 하라. 만일 명치유신(明治維新)을 미국이 와서 시켰다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명치 유신은 안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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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최후에, 도산은 일본이 한국 사람이나 청국 사람에게 인심을 잃는 것은 큰 불행이다. 그것은 일본의 불행이요, 등시에 세 나라 전체의 불행이다. 이것은 그대가 열심히 막으려는 서쪽 세력이 동쪽으로 쳐들어오는 유인이 될 것이다. 일본의 압박 밑에 있는 한인은 도움을 영국,미국이나 러시아에 구할 것이 아닌가. 일본의 강성을 기뻐하지 아니하는 여러 강국은 한국인의 요구를 들어 줄 것이다. 이리하여 일본은 여러 강국의 적이 되고 동양 여러 민족의 적이 될 것을 두려워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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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다시, 그대가 만일 사이 좋은 이웃 나라의 손님으로 한양(漢陽)에 왔다면 나는 매일 그대를 방문하여 대 선배로, 선생님으로 섬기겠노라. 그러나 그대 가 한국을 다스리러 온 외국인이매 나는 그대를 방문하기를 꺼리고 그대를 친근하기를 꺼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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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립을 제삼 제사 보장하고 일청,일아 양 전쟁후도 한국의 독립을 위함이라던 일본에 대하여 한인은 얼마나 감사하고 신뢰하였던가. 그러나 전승의 일본이 몸소 한국의 독립을 없이할 때에 한국인은 얼마나 일본을 원수로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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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양국의 이 현상이 계속되는 동안 한인이 일본에 협력할 것을 바라지 말 라. 또 그대가 청국을 부축하여 도울 것을 말하나, 그것은 한국의 독립을 회복한 뒤에 하라. 청국 四[사]억 민중은 일본이 한국에 대하여서 보호 관계를 맺은 일로 하여 결코 일본을 신뢰하지 아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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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상당히 흥분한 연설 구조로 여기까지 말하고, 끝으로, 「이 삼국을 위하여 불행힌 사태를 그대와 같은 대 정치가의 손으로 해결하기를 바라노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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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이등과의 면회에서 더욱 목하의 정처 운동이 무의미·무효과함을 알았 다. 심히 삼가는 이등의 말에서 도산은 두 가지를 발견하였다. 하나는 일본이 한국에 대하여 이것을 내어놓을 수 없다는 굳은 의도요, 또 하나는 현재 국내의 정치가로서는 역량에 있어서 이등과 겨를 사람을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 등은 그 탁월한 식견과 수완 위에 전승 일본의 무력이라는 배경을 가지지 아니 하였는가. 이 이등과 협력한다는 것은 곧 그의 약낭(藥囊)에 들어 가는 것과 같 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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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이 갑·최석하 등이 등을 이용하자는 정객들에게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일 뿐더러 까딱하면 이등에게 역이용을 받아서 일진회(一進會)의 복철(覆轍)을 밟을 우려가 있다는 것을 정중히 경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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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도산은 자기가 미국서부터 품고 온 계획대로 실행하기로 결의하고 신민회와 청년학우회의 조직에 착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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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선 기본되는 동지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기본되는 동지를 구하는 데는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하나는 믿을 만한 사람이요, 하나는 각도에서 골고루 인물을 구하는 것이니, 이것은 본래 여러 가지로 불쾌한 악습이 된 지방색이란 것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구한 동지가 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전덕기(全德基)·이동휘(李東輝)·최광옥(崔光玉)·이승훈(李昇薰)·안태국(安泰國)·김동원(金東元)·이덕환(李德煥)·김구(金九)·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유동주(流動株)·양기탁(梁起鐸)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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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동지를 기초로 신민회를 조직하니, 그 목적은 (一[일]) 국민에게 민족 의식과 독립 사상을 고취할 것, (二[이]) 동지를 발견하고 단합하여 국민 운동 의 역량을 축적할 것, (三[삼]) 교육 기관을 각지에 설치하여 청소년의 교육을 진흥할 것, (四[사]) 각종 상공업 기관을 만들어 단체의 재정과 국민의 부력을 증진할 것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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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는 비밀 결사로서 각도에 한 사람씩 책임자가 있고 그 밑에는 군 책임자 가 있어서 종으로 연락하고, 횡으로는 서로 동지가 누구인지를 잘 모르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입회 절차는 심히 엄중하여서 「믿을사람」,「애국 헌신할 결의 있는 사람」,「단결의 신의에 복정할 사람」등의 자격으로 인물을 골라서 입회를 시키는 것이요, 지원자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회가 조직된 지 몇 해가 지내어도 그 가족 친지까지도 그가 신민회원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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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을 엄수하는 것」을 신민회원은 공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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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가 있다는 소문이 나고 일본 경찰이 이것을 탐색하게 된 것은 합병 후였던 것으로 보아서 이 단결이 어떻게 비밀을 엄수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소위 사내 총독 암살 음모 사건(寺內總督暗殺陰謀事件)으로 七[칠]백여 명의 혐의 자가 경무총감부 명석 원이랑(明石元二郞)의 명령으로 검거될 적에야 비로소 세상은 신민회라는 것과 누가 그 회원이라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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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는 중부와 남부에는 발달이 안 되고 경기 이북, 그중에도 황·평양서에 서 가장 많이 회원을 획득하였으니, 그것은 그때에 신 사상이 기독교회와 함께 경기 이북에 발달이 되고 충청 이남에는 아직 깜깜하였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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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는 그 자체는 비밀 결사였으나 사업은 공개하였다. 그 사업으로 가장 드러난 것은 평향 대성 학교, 평양 마산동 자기 회사, 평양·경성·대구의 태극서관과 여관등이었다(평양 대성 학교는 당시의 유지 김진후씨가 그땟돈 二[이]만원을 회사하여 설립했다.) 대성 학교는 각도에 세울 계획이었으나 평양 대성 학교는 그 제일 교요, 표본 교였다. 평양 학교를 실험적으로 모범적으로 완성하여서 그 모형대로 각도에 대성 학교를 세우고, 그 대성 학교서 교육한 인재로 도내 각군에 대성 학교와 같은 정신의 초등 학교를 지도하게 하자는 것이니, 그러므로 당시의 평양 대성 학교는(一[일])민족 운동의 인재, (二[이]) 국민 교육의 사부(師傅)를 양성하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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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평양 대성 학교의 무명한 직원으로서 교장을 대리하는 것 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도산이 무엇에나 자신이 표면에 안 나서고 선두에 안 나서는 사업 방침에서 나온 것이어서 실지로는 도산이 대성 학교의 교주요 교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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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이 대성 학교에 전심력을 경주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다만 생도 만을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교원들을 동지의 의로 굳게 결속하였다. 그의 인격의 감화력이 어떻게 위대한 것은 잠시라도 대성 학교의 생도이던 사람은 평소에 도산을 앙모하게 된 것과, 어떤 사람이든지 대성 학교의 교원으로 들어오면 수 주일 내에 도산화한 사실로 보아서 추측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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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 학교의 생도는 창립 일주년이 되기도 전에 평양 신민의 경애를 받게 되 고, 휴가에 각각 향리에 돌아 가면 그 생도들은 대 선생의 훈도(薰陶)를 받은 선비의 품격이 있다. 하여 부로(父老)와 동배에게 놀람과 존경을 받았다. 이러하기 때문에 멀리 함북과 경남에서까지 책보를 끼고 대성 학교의 문을 두드렸고, 각지에 신설되는 학교들은 대성 학교를 표본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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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생도의 정신 훈육을 몸소 담당하고 교무는 그때 유일한 고등 사범학교 출신인 장응진(張應震)씨가 말아서 하였다.
130
도산의 교육 방침은 건전한 인격을 가진 애국심 있는 국민의 양성에 있었다.
131
도산이 주장하는 건전한 인격이란 무엇인가. 성실로 중심을 삼았다. 거짓말이 없고 속이는 행실이 없는 것이다. 생도의 가장 큰 죄는 거짓말, 속이는 일이었 다. 이에 대하여서는 추호의 가차(價借)도 없었다.
133
이것이 도산이 생도들에게 하는 최대의 요구였다. 약속을 지키는 것, 집합하는 시간을 지키는 것이 모두 성실 공부요, 약속을 어그리는 것, 시간을 아니 지키는 것은 허위의 실천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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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학 시간 五[오]분 전에 교실에 착석할 것― 이것이 엄격히 이행되었다. 동창회나 강연회나 정각이 되면 개회를 선언함이 없이 자동적으로 개회가 되었다.
135
그처럼 시간 엄수에 훈련의 요목으로 역점을 두었다.
136
학과 시간에는 학과만 생각하는 것이 성실이었다. 다른 생각, 다른 일을 하는 것은 허위였다. 대성 학교 학과 시간에는 생도들은 목석을 깎은 사람들과 같이 고요하고 그들의 눈은 선생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강연회에 출석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벌제위명(伐齊爲名)이 조국을 쇠퇴케 한 원수라고 도산은 말했다.
137
동(動)할 때에 동에 전 심력을 기울이고, 정(靜)할 때에 정에 그리하여라. 흐리멍덩하고 뜨뜻미지근한 것으로 애국자는 못된다는 것이었다.
138
『대신이 이름만 대신이요 다른 일을 하므로 우리나라가 이 모양이 되었다.』
139
도산은 이렇게 훈계하였다. 허위로 쇠한 국세를 회복하는 길은 오직 성실이 있 을 뿐이다. 제자(諸子)가 만인의 신뢰를 받는 사람이 됨으로 우리 민족이 만국에 신뢰받는 민족이 되게 하라. 이밖에 우리 나라를 갱생시키고 영광 있게 할 길이 없다고 효유(曉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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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으로라도 거짓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
141
하고, 도산은 기회 있을 때마다 학도에게 타일렀다. 도산은 교내에 까다로운 규칙을 세우지 아니하였다. 법이 번(繁)하면 지키기 어려운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번 정한 법은 엄수하고 여행케 하였다. 준법(遵法)이야말로 국민 생활의 제일 의 조건이요, 의무다. 이미 법일진댄 지키는 데 대소와 경중이 없고, 상하와 귀천이 없다. 학교의 규칙이나 회의 규약이나 기숙사의 전례나 모두 법이다 단체 생활은 곧 법의 생활이다. 국가란 법의 위에 선 것이다. 법이 해이(解弛)하면 단체는 해이한다. 그러므로 도산은 학생들이 회를 조직할 때에는 입법을 신중히 하여서 지킬 수 있는 정도를 넘기지 말 것을 가르쳤다. 열심 있는 나더지에 가 번(苛繁)한 법을 만드는 것이 오래 가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지적하였 다. 그 대신에 회원 중에 법을 범하는 자가 있거든 단호히 법에 정한 벌에 치할 것이요, 결코 용대(容貸) 있거나 사정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고 냉혹하게 말하였 다. 법은 냉혹한 것이다. 법과 애정을 혼동하는 곳에서 기강(紀綱)이 해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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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에게 하정을 씀으로 전체의 법이 위신을 잃고, 법이 위신을 잃으면 그 단체가 해이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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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도산이 우리 민족이 경법 준법(敬法遵法)의 덕이 보족함을 느낀 데서 온 대증요법(對症療法)이었다. 이씨 조선의 끝말에 소위 세도라는 것이 생기고, 매관 육작(賣官毓爵)이 생겨 악법 오리(惡法汚吏)가 횡행하매 국민은 법을 미워 하고 법을 벗어날 것만 생각하여서 경법,준법 관념이 희박하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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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반면에 도산은 학도들을 사랑하였고 모든 긴장을 풀고 유쾌하게 담소 오락하는 시간을 정기적으로 돌 것을 잊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좌석에서 도산 자신도 노래하고 우습광스러운 흉내도 내어서 남을 웃겼다. 학생들도 파겁(破 怯)을 하여서 어엿하게 나서서 제 장기대로 할 것을 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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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학도들에게 노래를 부르기를 권고·장려하였다. 자기도 많은 노래를 지 어서 학생들로 하여금 부르게 하였다. 자연의 경치와 음악·미술을 사랑하는 것 이 인격을 수련하고 품성을 도야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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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이 대성 학교를 완성치 못하고 제일회 졸업도 보지 못한 채 망명의 길을 떠났거니와, 그 짧은 기간에 청년에게 미친 감화는 말할 수 없이 컸다. 남강(南 崗) 이 승훈(李昇薰)이 오산 학교를 세운 것도, 함북에 경성 중학(鏡城中學)이 선 것도, 그 밖에 크고 작은 무수한 사립학교들이 서북 지방에 울흥(蔚興)한 데는 도상과 대성 학교의 공이 대단히 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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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 이승훈은 상인이었다. 그는 선천 오 치은(吳致殷) 집 자본으로 평양에서 인천 등지에 상업을 경영하여 거상이 되었다. 그는 재산을 얻었으나 문벌이 낮은 것을 한탄하여서 금력으로 양반집과 혼인을 하고, 자손을 위하여 경서(經署)를 준비하고, 고향에서당을 설립하여 아무리 하여서라도 그 자손으로 하여금 상놈이라는 천대를 면하고 양반 행세를 하게 하기를 결심하였다. 그는 자기 집 이 양반이 되려면 이문 일족(李門一族)이 함께 양반이 되어야 한다고 하여 흩어 져 있는 일가를 고향인 정주군 오산면 용동(定州郡五山面龍洞)으로 모아서 천한 직업을 버리고 농사짓는 데 종사하고, 자제를 교육하도록 마련하고 남강 자신의 주택과 이문의 서당을 건축 중에 있었다. 남강이 보기에 양반촌에는 사랑문을 열어 놓고 양객(養客)하는 집과 현송지성(絃誦之聲)이 끊이지 아니하는 서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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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때에 남강은 평양에서 도산의 연설은 들었다. 「나라가 없고서 일가와 일신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를 받을 때에 나 혼자만 영광을 누리 수가 없 소」하는 구절을 듣고 그는 도산과 면회하여 도산의 민족론·교육론을 듣고는 죽일로 상투를 자르고 고향으로 돌아 와서 자기 주택과 서재의 공사를 중지하고 그 재목과 기와를 오산 학교에 썼으니, 이것이 오산 학교의 기원이다. 마산동 자기 회사(磁器會社)는 이 승훈이 사장이 되어서 물건 만들기를 시작하였다. 평양은 고려 자기의 발상지다. 고려인은 평양 부근의 석탄을 이용하여 고열(高熱) 을 발하기에 성공하였던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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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는 한국이 거의 일본의 독점 시장이 되어서 일본인들은 일본 제품을 지고 홍수같이 반도로 밀려 들어왔다. 도산을 한국의 경제적 파탄을 막을 길이 자작 자급 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중에도 공업의 진홍은 한국의 생명선이라고 보았다. 그는 신민회의 동지에게 조국을 살리는 것이 다만 정치만이 아니라 경제력이라는 거을 역설하였다. 도산은 대중에 대한 수다한 연설에도 산업을 진흥함이 곧 애국이요, 구국(救國)이라는 것을 말하고 경제적 침략이야말로 군사적 침략보다도 더욱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인식케 하려고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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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부자 친구도 소중히 여겼다. 그것은 부자가 학교도 세우고 산업도 일으킬 실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선천의 오 치은은 도산과 협력한 부자 친구 중에 하나였다. 그때에는 아직 회사라는 것이 드물었다. 다수인의 자본을 모아서 대 자본을 만들어서 대규모의 상공업을 경영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마산동 자기 회사는 아마도 민간 최초의 주식회사였을 것이다. 부자는 제 자본을 가지고 제가 경영하거나, 신임하는 어느 한 사람에게 자본을 주어서 경영하는 것 밖에 몰랐다. 이것은 기업 지식이 없는 것도 원인이어니와 신용이 박약한 까닭이었다. 도산은 우리 나라의 산업을 진흥함에도 가짓말 말기 운동, 신의 지키기 운동이 기본이 됨을 절실히 느꼈다. 다행히 이승훈이 평양 상계에서 신용으로 성공한 사 람이기 때문에 마산동 자기 회사가 성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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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평양 대성 학교를 완성하여 그 성가(聲價)와 실적을 보임으로 전국에 교육의 모범이 되어 학교 설립의 자극이 되게 하려고 한 모양으로, 마산동 자기 회사를 성공케 하여 전국에 산업 운동을 일으키는 본보기를 삼으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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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본보기」라는 것을 심히 중요시하였다. 이론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은 실천되어서 한「본보기」를 이루기 전에는 널리 퍼질 방책이 생기지 못한다고 도산은 보았다. 학교 교육에 대한 천 마디 말보다도 본보기 학교 하나를 이루어 놓는 것이 요긴하니, 그리 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모방하려 하는 것이다. 새로운 이론을 내는 것도 천재적 독창력을 요하거니와, 어떤 이론을 응용하여 구체적으 로 실행하는 것도 천재적인 비범한 인물을 요하는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훌륭한 이론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현실화하는 힘을 가진 인물이 아니 나기 때문에 이론이 이론대로 묵어 버리고 마는 예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한번 본보기가 생기면 그것을 모방하기는 성력(誠力)만 있는 인물이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도산은 본보기 첫 사업을 중요시한 것이었다. 평양 대성 학교를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좋은 학교로 만들어 놓기만 하면 우리나라에는 그와 같은 학교가 많이 생길 수가 있고, 마산동 자기 회사가 좋은 물건도 만들고, 이익을 내기만 하면 전국에 그러한 회사가 많이 생기리라고 믿었다. 도산은 인격 수련에 대하여서도 이 본보기라는 「 」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중에 하나 거짓 없는 사람이 생기면 거짓 없는 많은 사람이 생길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도산은 항상 말하기를,
153
『나 하나를 건진 인격을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154
라고 하였다. 나 하나만은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느냐. 내 말을 들을 수 있는 나를 먼저 새사람을 만들어 놓아라 그러하면 내가 잠자코 있어도 나를 보고 남이 본을 받으리라― 이러한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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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서관은 서적을 발행하고 보급하는 것이 원체 목적임은 말할 것도 없다.
156
도산은 출판 사업을 평생에 중요시하였다. 어떤 사상과 지식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서 널리, 길게 전하는 것이 도서(圖書)니 우리 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보급·향상하려면 출판 사업이 요긴하다. 그러나 그보다 이상으로 태극서관의 사명을 중대하게 하는 것은 민중에게 건전한 출판물을 제공함이었다. 민중의 저급한 기호(嗜好)에 투(投)하여 그 품격을 타락케 하는 서적을 퍼뜨린다든가, 또는 국민을 잘못 인도하는 사상을 침투시키는 그러한 출판물은 회복하기 어려운 해독을 주는 것이니. 출판 사업은 마땅히 영리적 이해 타산을 초월하여 국가 민족을 위하는 높은 견지에서 할 것이라 하는 것이 도산의 출판 사업관이었다.
157
『책사(冊肆)도 학교다. 책은 교사다. 책사는 더 무서운 학교요, 책은 더 무서운 교사다.』
158
도산은 이러한 견지에서 태극서관이 우리 민족에게 건전하고 필요한 서적을 공급하는 모범 기관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우선 평양과 경성(京城)과 대구에 태극서관을 세운 것이니 이 사업의 중심 인물은 안 태국(安泰國)이었다.
159
태극서관이 장차 인쇄소를 가지고 저술부·편집부 등을 두어서 각종 정기 간행물과 도서를 출판할 계획을 가졌음은 물론이었다.
160
서적과 출판물을 민족 문화 향상, 민력 발휘의 근원으로 중요시하는 도산은 자연히 문사라는 것을 대단히 존중하였다. 그는 좋은 문사가 민족의 힘의 중요한 구실을 가졌다고 믿었다. 그가 후에 조직한 수양 단체를 흥사단(興士團)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유길준(兪吉濬)의 홍사단을 전습하는 동시에 「士[사]」를 양성하는 단체라는 뜻이었다. 「士[사]」라는 것은 천하 국가를 위하여 살고 일신의 이해 고락·생사 영욕(生死榮辱)을 초월한 사람을 일컬음이니,「士[사]」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어, 하나는 문사요, 하나는 무사라, 국가는 이 양사에 의하여 수호되고 발전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161
그러나 도산이 생각하는「士[사]」는 우리가 종래에 생각하던 사류(士類)와는 달랐다 종래의 사류라는 것을. 학문과 문무로만 업을 삼는 일종의 계급적 존재지만, 도산에 의하건댄 농(農)이나 공(工)이나 상(商)이나 선공후사(先公後私)하여 나라의 이익과 백성의 복을 염두에 두는 자면 다 사류였다. 그가 신민회원으로 모으고자 하는 것이 이러한 사류였다.
162
그러나 순수한 사류는 문사와 무사였다. 그들은 선공후사(先公後私)로서만 만족하지 아니하고 지공무사(至公無私)를 행의 목표로 삼는 자이기 때문이다. 문 사는 일관필(一貫筆)로, 무사는 일정검(一仗劒)으로 위국효사(爲國效死)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163
당시 우리나라 문사로 신문이나 잡지에 집필한 명사로는 《皇城新聞[황성신문]》에 유근(柳瑾)과 박은식(朴殷植)·장지연(張志淵),《大韓每日申報[대한매일신보]》에 양기탁(梁起鐸)과 신채호(申采浩) 등이 가장 저명하였다.《帝國新聞[제국신문]》에는 최영년(崔永秊)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한문학의 선비로서 박여 암 지원(朴燕巖地源)의〈熱河日記[열하일기]〉, 유길준의 〈西遊見聞[서유견문]〉, 청국 양계초(梁啓超)의〈飮氷室文集[음빙실문집]〉에서 세계 대세와 신 사상을 흡수한 이들로서 독립주의의 정치론은 주르 집권 계급인 원로 관로(元老官療) 양반배를 공격하였다.
164
최광옥은 아직 청년이었으나 기독교인으로 조행이 심히 깨끗하고 애국 지사요, 또 국어를 연구하여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문법을 저작하였으며, 글의 재주도, 말의 재주도 있었고 도산의 민족 향상 사상과 방책에 전폭적으로 공명하였다. 도산의 생각에 최광옥으로써 청년학우회의 인격자의 모법을 삼으려 하였다.
165
청년학우회야말로 신민회나 대성 학교 이상으로 도산이 심력을 경주한 사업이 요, 또 민족 향상의 가장 중요한 길이라고 보는 방편이었다.
166
신민회에도 수양의 일면이 있었다. 구습을 고치고 새로운 국민성을 조성한다는 의도와 노력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성 인물의 자아 혁신이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三[삼]십세 이상이 된, 게다가 일류 명사로들 자처하는 인사들이 사정 없이 냉혹하고 날카롭게 자기를 양심의 법정에 피고로 내세워서 반성하고 비판하여 어린아이처럼 겸허한 재출발을 도모하는 것은 여간한 현인 구자 아니고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 성인의 안중에는 이해관과 사업욕이 앞을 서기 때문에 자아 혁신의 도덕적 수련이 깊은 흥미를 끌지 못한다. 하물며 반성 자수(反省自修)의 기풍이 소잔(銷殘)한 우리 나라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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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진정한 민족 향상은 각 사람의, 그중에서도 지도자층의 각 사람의 자기 개조가 아니고는 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역사상으로 보더라도 한 번 쇠하기 시작한 민족은 부흥의 벼루로 거슬러 오름이 없이 멸망의 구렁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었다. 도산의 눈에는 국가의 정치적 독립 여부 이상으로 민족의 홍망이 보였던 것이다. 민력·민기(民力民氣)가 흥왕하면 국가의 독립과 창성(昌盛)은 필연적으로, 자동적으로 따라 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현재 상태로는 비약의 사망이 묘연(渺然)하였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민족 혁신 운동이 시급하였다.
168
이를테면, 우리 민족을 도덕적으로나 지식적으로나 경제 능력으로나 영국민만 한 정도에 끌어 올려야 우리 나라가 영국만한 나라가 된다는 것이니, 민족의 역량은 요만한 채로 국가의 영광은 저만하자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169
그러므로 아무리 하여서라도, 그야말로 무슨 짓을 하여서라도 우리 민족의 픔 격과 역량의 향상을 도모하여야 하겠고, 그도 급속히 하여야 한다고 도산은 보았다.
170
신민회도 이 때문에 생긴 것이어니와, 그보다도 기본이 되는 것은, 아직 구습에 물 안 들고 대지(大志)와 열정이 그대로 있는 청년, 그중에 학도들을 결합하여서 일대 수양운동, 즉 민족 향상 운동을 일으키려고 하여서 조직된 것이 청년학우회였다. 청년학우회는 합병 전해인기유년에 발기되었다.
171
그 주의·정신은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사대 정신으로 인격을 수양하고, 단체 생활의 훈련을 힘쓰며, 한가지 이상의 전문 학술이나 기예를 반드시 학습하고, 평생에 매일 덕(德)·체(體)·지(智) 삼육에 관한 행사를 하여서 건전한 인격자간 되기를 기하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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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는 통감 정치(統監政治)도 벌써 수년이 지나서 일본의 경찰망이 한국인의 언행을 무시로 감시하고 조금이라도 배일적인 색채가 보이면 탄압하던 때라 모든 단체가 다 그 경제망에 걸리지 아니하도록 전선긍긍하던 때요, 또 무슨 집회나 경사나 한국인이 하는 것은 다 내부 대신의 허가를 얻어야 할 때였다.
173
청년학우회는 정치적 성질을 띤 것이 아니라고 하여서 내부 대신의 허가를 받 았다.
174
사실상 청년학우회는 정말로 비정치적 결사일 뿐더러 또 정치적이어서는 아니 된다고 도산은 역설하였으나 당국은 물론이요 동지들 중에까지 이 결사의 비정 치성을 아니 믿고 그것은 한 카무플라즈라고 생각하였다. 그때에 국내는 일본에 대한 의구(疑懼)로 국가의 운명에 대한 의식이 심히 민감하였기 때문에 무슨 행동이나 정치성을 아니 띠기가 어려웠고, 또 도산이 아무리 자기는 정치에 관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사실상 평양 대성 학교에 칩거하여 외계와 접촉이 없는 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당국이나 온 나라 사람이 다 그를 정치가요 혁명가로 주목하였다. 도산은 이 청년학우회 운동과 대성 학교에 지장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대중을 향한 연설도, 서울 오는 것도 피하고 있었다.
175
도산은 민족 향상 운동은 도덕 운종이지 정치 운동이 아니라고 절연(截然)히 구분하였다. 그것은 다만 당시 일본의 누르는 밑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나라가 완전히 독립권을 회복한 뒤에라도 민족 운동은 정치성을 띠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도산의 이 의견은 민족 운동을 위하여 중요성을 가진 것이다.
176
그가 민족 항상 운동이 정치적이어서는 아니 된다는 이유는 내적인 것과 외적 인 두 가지로 가를 수가 있다. 내 적인란 것은 민족 향상 운동자가 정치적 야심을 가지게 되면 그 운동을 정치에 이용할 걱정이 있고, 또 도덕적 민족 향상의 가치를 정치보다 아래로 떨어뜨릴 근심이 있다. 민족 향상 운동은 정치보다도 무 엇보다도 소중한 것이다. 우리 민족으로서는 이 민족 향상 운동이 아니고는 심하면 멸망하고, 적어도 금일의 빈천의 경지를 탈출할 수가 없다. 아무러한 정치라도 향상되지 아니한 민족으로 좋은 국가를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망국하던 민족이 그대로 홍국하는 민족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쓰러진 집을 썩은 재목으로 새 집을 세우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민족 향상 운동은 인(因)이요. 정치는 과(果)다. 민족 향상 운동은 구원(久遠)한 것이요, 정치 운동은 일시적인 것이다. 정치가 민족 향상 운동을 원조하고 촉진할 수는 있어도 정치가 곧 민족 향상 운동을 못되는 것이니, 민족 향상 운동은 정치가가 권세도 할 것이 아니라 도덕가가, 지사가. 오직 헌신적인, 종교적인 노력으로만 되는 것이다.
177
도산은 조국이 부강한 국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다른 동지들과 다름이 없 었다. 오직 한 가지 다른 점은, 다른 동지들은 이 민족을 그냥 가지고 혁명 운동만으로 또는 정치 운동만으로 당장에 그 부강한 조국을 이루자는 데 대하여, 도산은 민족의 품격과 역량을 향상하는 것이 혁명이나 정치에게도 어머니다 되 나니, 부강한 조국에 급속히 도달하는 길에는 향상 운동의 관문을 통과하지 아 니하는 지름길은 없다고 확신하였다. 이러하기 때문에 민족의 영원한 생명과 그 성쇠 흥망을 염두에 두는 도산에게는 정치의 일시적 오르내림보다도 민족의 항구적 운명이 관심되었다. 이것이 내적으로 민족 향상 운동이 정치성을 띠어서는 아니 된다는 이유였다.
178
그 외적 이유란 이러하다. 원래 정치적 세력이란 언제나 소장(消長)이 있는 것 이다. 정권은 갑(甲)파에서 을(乙)파로 이동되는 것이니 정권에 붙어 의지하는 자는 물론이어니와 거기 관련을 가진 자도 그 세력과 소장(消長)을 함께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구하여야 할 사업은 정치적 권세의 권외에 초연(超然)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179
그런데 청년학우회는 민족 향상 운동의 근원이 될 사업이기 때문에 그 생명은 민족 향상 운동의 근원이 될 사업이기 때문에 그 생명은 민족의 생명과 길기를 같이 하여야 할 성질의 것이었다. 이 단결 속에서 수련된 인물이 정치가도 되 고 군인도 문사도 실업가도 , ,, 되려니와, 이 수양 기관 자체에는 정치성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었다. 도산은 이 원칙을 후일 흥사단의 조직에도 적용하였음은 물론이다.
180
다른 생각이 다 그러한 것같이, 이 생각도 도산의 독창임은 물론이어니와 역사 상으로 보더라도 불교나 예수교가 정권과 관련하기 때문에 국가에는 폐해가 되 고, 그 자체에는 타락된 예는 매거(枚擧)키 어려울 만하다.
181
아무려나 민족의 질을 변하여 의식적으로, 목적적으로 향상하여서 민족을 구하 자는 도산의 이 운동이 우리 나라에서만 초유의 일이 아니라 실로 세계사상에 유례가 없는 일이니, 굳이 그와 비슷한 예를 말한다면 옛날 프러시아의 수덕단(修德團·Tugend Bund)일 것이다.
182
옛날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가 그의 조국인 아테네를 구하려고 청년과 문답의 방법으로 궤변을 타파하고 진과 선을 주장하기로 일생을 바쳐 그것이 소크라테스의 지행할일(知行合一)의 철학을 이루었으나, 그는 단결이라는 방편을 사용하 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곧 그 운동의 죽음이 되어서 조국 구제의 목적을 달치 못하고 말았다. 소크라테스는 결코 철학을 지으려고 철학을 한 것이 아니요,. 그의 조국을 구하려는 노력이 철학이 된 이었다. 도산은 이러한 큰 포부로 민족의 영원한 번창과 영광을 염원하면서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청년학구회 운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183
경성·개성·대구·평양·오산·의주 등 중학교가 있는 지역에 청년학우회가 생겼다. 중앙에는 연합회를 둘 계획이었다. 그러나 합병의 비운이 다닥뜨려 모든 결사와 신문이 해산을 당하매 청년학우회도 발기위원회인 채로 해산되고 말았다. 이것은 수년 후에 북미에서 다시 도산의 손으로 흥사단이 되어서 계승되었고, 국내에서는 수양 동우회라는 명칭으로 십수년 계속하다가, 연전(年前) 일본 남차랑(南次郞) 총독 시대에 동우회 사건으로 일망 타진되어 사십여 명이 四[사]년간 미결에 신음하는 통에 해산 명령을 받았고 도산도 이 사건으로 입옥 중에 병사하였다. 흥사단과 도산의 죽음에 관하여서는 다른 장에서 말할 때가 있을 것이다.
185
― 失國前後[실 국전후]의 劇的 事案[극적 사안] ―
186
일본의 한국에 대한 병탄의 의도는 기(機)를 따라 명백하여지고 그 압력은 날로 심하여졌다.
187
一九○七[일구공칠]년 해아 평화 회의(海牙平和會議)에 광무 황제가 이 상설(李相卨), 이준(李儁), 이위종(李偉鍾)등 밀사를 보내어서 일본의 한국에 대 한 보호권 설정은 일본 측의 무력의 협박에 의한 것이요, 한국 황제의 의사가 아니라는 것을 루우스벨트 미국 대통령이하 각국 대표간에 선전하고 회의 참가를 요구하다가 거절되어 이 준이 할복 자살한, 소위 밀사 사건을 이유로 일본 외무대신임 훈(林薰)이 직접 서울에 와서 광무 황제가 황태자에게 양위를 강요함이 되고, 인하여 징병령 실시까지라는 핑계로 한국의 군대를 해산한 것은 합병에 다음가는 비극의 절정이었다.
188
서울에는 해산당한 군대와 민중의 시위 반항이 일어나 이미 일본의 수중에 들어 간 한국의 경찰과 일본 군대의 탄압으로 수일간 피가 흘렀고, 각지에는 의병이 봉기하여서 일군에게 진정될 때까지에는 삼만 명이나 전사하였다.
189
그러나 조정에는 인물이 없을 뿐더러 벌써 이른바 칠적(七賊)이라는 친일파가 발호하여 송병준(宋秉畯) 같은 자는 광무 황제에게 일본으로 가서 사죄를 하고 장곡천(長谷川) 일본군 사령관 앞에 친히 가서 사죄하라고 권하였고, 이 병무(李秉武), 조 중응(趙重應) 같은 자는 황제 앞에서 혹은 칼을 빼기도 하고 혹은 전화선을 끊음으로 임금을 협박하여 일본의 요구에 응종케 하였다. 이완용(李完用)이 친일파의 괴순이 성격도 점차로 탄로하였다.
190
김 윤식(金允植)·민영소(閔泳昭)등 원로라는 자들도 일본의 위엄에 눌러 다 만 문을 닫고 밖에 나오지 않거나 병이라 칭하고 입을 봉하고 입을 봉하는 것이 로 일을 삼았고, 혹시 어전에 불리어 책임 있는 태도를 표시하지 아니치 못할 경우에는 「불가불가」(不可不可)식 궤변을 썼다.
191
이것은 모원로가 보호 조약에 대한 필답으로 「불가하다, 불가하다」하는 강한 반대의 의사로도 해석되고 불가불 가하다는 부득이라는 의사로도 해석되기 때문이다.
192
일본 사신이 황제에게 의사를 물으면 황제는 대신과 원로에게 미루고, 대신과 원로들에게 물으면 황제에게 미루어 버렸다. 아무도 책임을 지려는 자가 없었다. 일본에게 미움을 받기도 무섭고 국민에게 누명을 쓰기도 무서웠다. 어찌어찌 교묘하게 일신 일가의 위엄을 벗어나자 하는 것이 그들이 심사였다.
193
그러면 민간 지사들은 어떠한가. 그들에게는 큰 단결도 없고 다른 힘도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개인 개인으로 도끼를 메고 상소(上疏)를 하거나 순국적 자살을 하는 일이었다. 과연 이러한 일을 하는 이는 많았다. 그것이 국민의 애국적 도의심을 자극할 수는 있어도 그것으로 대세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밖에 할 수 있는 일은 당로 대관을 암살하는 것이었다. 군대 해산에 동의 한 군부 대신 이 병무(李秉武)는 자기 집 침실에서 암살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군대 해산을 막을 수는 물론 없었다. 기유년, 즉 一九〇九[일구 공구]년 가을에 안중근(安重根)은 나라의 원수 이등박문(伊藤博文)을 하르빈 정거장 앞에서 쏘아 죽이어 세계를 용동(聳動)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만 대세의 움직임을 전환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안중근 자신의 한 일로 보아서 분명하다. 그는 의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서 국내에 쳐들어 왔었다.
194
만일 二[이]천만이 응하기만 하면 이것으로 정면 대항을 하자는 것이었다. 불행히 二[이]천 국민은 거기 응할 준비도 역량도 없어서 안중근은 일병에게 패하여 겨우 두 명의 수종자를 데리고 도망하였다. 이에 그는 대거 항전의 시기가 아님을 한탄하고 단신 항전을 결행한 것이었다.
195
一九〇七[일구공칠]년, 즉 정미 칠조약 이후 한국에는 해산 전 한국 군대보다도 수배나 되는 일본군이 국내 각지에 수비대라 하여 배치되고, 헌병과 경찰이 물 부어 샐 틈 없이 경계망을 펴 놓았다. 그야말로 꼼짝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6
이론 기관도 엄중한 겸열을 받아서 오직 영국인 배설(裵設)의 《大韓每日申報 [대한매일신보]》와 《英文[영문] 서울 프레스》만이 자유로웠다.
197
국가의 앞 길은 암담하고 의병의 비극은 산비(酸費)하였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한탄하면서 오직 술이 취하여 노래를 부름으로 비분강개(悲憤慷慨)의 심회를 발산하였다.
198
『 석탄 백탄 타는 데는 연기나 펄펄 나건만 요내 간장 타는 데는 연기도 불길도 아니 난다.』
199
하는 것이 당시 청년 지사들이 사랑해 부르던 사발가였거니와, 이 노래는 그때 애국자의 심경을 잘 표현하였다고 할 것이다.
200
이등박문이 한인의 손에 죽었다는 것을 이용하여, 또 군벌에게는 적이던 이등박문이 없음을 좋이 여겨 군벌 거두 계태랑(桂太郞) 일본 수상은, 육군 대신이요 역시 군벌 거두인 사내 정의(寺內正毅)를 한국 통간으로, 산현유붕(山縣有朋)의 아들 산현이 삼랑(山縣伊三郞)을 부통감으로, 육군 소장 명석원이랑(明石元二郞)을 경무총감으로 하여 한국에 파견하니, 이것이 바로 경술년 七[칠]월이었다. 볼 줄 아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최후적 강압 정책의 준비인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201
명석 원이랑은 서울에 부임하여 도착하는 즉시로 일변 한국의 명사를 초연하여 그 의향을 타진하고, 다수의 밀정을 놓아서 민간 유지들의 행동을 염탐하였다.
202
그리하여서 친일파·배일파의 명부를 작성하여서 七[칠]월 하순경에 벌써 민간 유지의 헌병대 검속이 시작되었으니, 안창호는 개성 헌병대에, 이 갑·이동 위·유동열 등은 용산 헌병대에 유치되었다. 명석의 판단으로는 서북인, 그중에서도 군대 출신이요 안창호. 일파라고 지목되는 자를 탄압함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었다.
203
이 기회에 이동휘에 관하여 한 마디 할 필요가 있다. 이동휘는 함남 단천 사람으로, 군대 헤산 당시 육군 참령(陸軍參領)으로 강화 진위대(江華鎭衛隊) 대 대장이었다. 군대가 해산된 후 그는 개성을 벽두로 각지로 유세하여 학교 설립을 권장하여 二,三[이,삼]년 내에 백여 학교를 세웠다. 웅변은 아니나 그의 열변은 연설로나 좌담으로나 사람을 움직임이 컸고, 안창호와는 아우 형님으로 서로 부르며, 이 갑과는 문경지교(刎頸之交)였다. 그가 경무총감부에 잡혔을 때에 심문관에게,
204
『너희가 같은 동양인으로 우리 한국에서 이러한 불법부도(不法不道)를 행하면 너희 일본인의 잔등에 맞는 서양인의 채찍 자국에서 구더기를 파내는 것을 내 눈으로 볼테다.』
205
하고 호령한 것이 오늘날 와서 보면 꼭 맞는 예언이 된 것도 신기한 일이다.
206
도산이 개성 헌병대에 수금되었을 때에는 남녀 학생들이 밤에 헌병대 주위에서 애국가, 기타 도산이 지은 창가를 부르고, 혹은 전화로 도산에게 창가를 불러 드려 준 여학생도 있었다.
207
이때에 밖에서 운동한 것이 최석하(崔錫厦)였다. 최석하는 동경 명치 대학 법과 출신으로, 일본말에 능하고 또 일아 전쟁에는 학생으로서 통역으로 종군한 일이 있으며 외교적 재능이 있어서 이등 통감 시대 이래로 일본측과 교섭하여 오던 경력이 있었다.
208
사내는 최석하에게, 일본의 본의는 한국의 독립을 존중하여 사이좋은 이웃을 만드는 데 있지마는 한국 황제와 정부가 매양 일본과의 언약을 저버리고 제삼국에 대하여 음모를 일삼으며 또 한국의 내정도 정대로 개선이 아니 되니, 이 대로 가면 필시 제삼국의 간섭을 끌어 들여 화가 일본과 동양에 미칠 것을 염려 하므로 일본으로서는 중대한 결의를 아니할 수 없거니와, 만일 한인이 자진하여 일본에 대한 모든 조약의 신의를 이행한다면 그런 다행이 없으니 안창호 내각을 조직하여 일본과 협력케 함이 어떠하냐 하였다. 이에 최석하는 자기가 그대로 힘쓸 터이니 각 헌병대에 구금된 안창호, 기타를 즉시 석방하기를 청했다.
209
사내는 곧 명석원이랑에게 안창호 등의 석방을 명하였다.
210
추측컨댄, 안창호등을 헌병대에 구금하여 거처를 자유롭게 하고 외부와의 전화 연락까지 허용하도록 우대한 데는 사내측에서는 예정한 계획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일본으로서는 합병의 단행은 상당한 모험이었다. 비록 일영 동맹의 갱신(更新)이 있었다 하나 그것이 영국의 러시아에 대한 견제(牽制)인 것을 모를 리가 없고, 또 러시아가 비록 일본에게 패하였으나 혁명란이 일어나 로마노프 제국이 무너질 듯하던 것이 의외에 다시 안정이 되어서 그의 호시탐탐한 태평양 진출의 숙원을 실현하려고 동할는지도 모르는 것이며, 겸하여 한국의 합병이 중국의 민심에 미쳐 일본을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생각을 격발(激發)할 것도 모를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할 수만 있으면 합병이라는 대죄 대악(大罪大惡)을 범함이 없이 그 실속만을 체우려 함이 이등박문의 소위 은화파(穩和派)의 의향이었던 것이다. 합병을 목적으로 왔을 사내가 지사에게 한번 교섭을 건네어 보는 심사가 여기 있었을 것이다.
211
최석하는 원동(苑洞)이 갑의 집에 도산, 기타 주요 인물을 모으고 사내의 의향을 통하였다. 그러고 밤이 깊도록 이 문제를 토의하였다.
212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자는 의론이 많았다. 최석하는 일본의 진의(眞意)가 반드시 한국을 합병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니 지금 잘 하면 일본과 충돌되지 아 니하고도 국맥(國脈)을 보전할 수 다는 것을 역설하여 일본측의 최초요 최후의 제안인가 싶은 민간 지사와 손잡자는 의도를 거절할 것이 아니라 하여 도산의 결의를 재촉하고, 이 갑은 최 석하와는 다른 견지에서 역시 호기물실(好機勿失) 을 주장하였다. 이 갑의 견지라 하는 것을 다름이 아니었다. 어떻게 잡든지 한 번 정권을 손에 잡기만 하면 무단정책(武斷政策)을 써서 일사천리로 수구파를 복멸하고 서정(庶政)을 혁신하여서 일본으로 하여금 간섭할 구실을 찾지 못하게 하면서 급속히 나라의 힘을 배양하여 일본의 겸제(箝制)를 벗어나기로 하자는 것이었다.
213
이러한 의논에 대하여 도산은 시종 침묵을 지키고 다만 경청하고 숙려(熟廬)하는 양을 보였다. 최후에도산은 입을 열어서 일본의 제안에 응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단정적으로 반대하고 서서히 그 이유를 말하였다.
214
첫째로, 이번 사내가 통감이 되어서 온 것은 일본으로서는 한국에 대하여 이미 최후의 결심을 하고 앞에 남은 것은 오직 그 실현 방책뿐이다. 가장 언정 이순(言正理順)하게 가장 세계의 비난을 적게 받고 한국 병탄의 목적을 달하자는 것이다.
215
그런데 일본이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을사와 정미의 조약 때처럼 이 번 병합이 폭력으로 강압으로 된 것이라고 비난받을 일이다. 이 비난을 면하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병합을 한국의 민의라고 내세우기에 이용할 만한 핑계를 만드는 것이다. 이제 민간 지사에게 정권을 주다는 것은 백성의 원망의 과녁이 된 귀족 계급― 일본의 허수아비라는 친일파의 속에서 말고, 애국지사라 하여 국민의 존경과 신뢰를 받는 민간인 정권으로 그 손에서 주권의 양여(讓與)를 받자는 혼담(魂膽)이니 우리가 이제 정권을 받는 것은 그 술책 속에 빠지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216
일본은 비록 권모로 하는 일이라 (權謀)하더라도 정권을 손에 가진 우리가 꾿꾿 하게, 강경하게 자주 독립을 견지하여 한사코 항거하면 좋지 아니하냐 하는 이론에 대하여 도산은 고개를 흔들었다. 일본의 손으로 주는 정권을 받은 우리가 손에 촌철(寸鐵)이 없이 무엇으로 일본의 의사를 항거하는 정책을 행하랴. 그러 므로 한번 우리가 정권을 받는 날은 우리는 일본의 수족이 되는 길 밖에 없느리라는 것이었다.
217
도산은 또 말하였다. 설사 백보를 양보하여 민당 정부가 생겨서 어떤 기간 혁신 정책을 쓸 것을 일본이 방임한다 하더라도 자기 주머니 속 물건으로 알아 오던 정권을 잃은 귀족 관료는 필시 일본에게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일본에게 아부하여 정권 획득 운동을 할 것이다. 그리되면 일본은 싼 값으로 판다는 물주를 고맙게 여겨 민간 정권을 배제할 것이 아닌가. 만일 우리가 음모로써 음모를 대하고, 아부로써 아부를 항(抗)한다 하면 우리 민간 지사라는 것도 결국 이완용·손병준배와 가릴 것 없는 무리가 되어 버리지 아니하는가.
218
그러면 국가의 흥망이 경각에 달린 이때에 우리 무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다 만 수수방관(袖手傍觀)할 것인가. 하고 깊은 밤중에 앉은 좌석에는 비분한 살기 가 있었다. 도산의 이론에 수긍은 하면서도 최후 일전(最後一戰)의 호기를 놓치는 듯한 생각이 누구에게나 있는 동시에 기울어지는 나라를 버틸 길이 없는 안타까움이 북받쳐 올랐다. 도산은 최후의 단안을 내렸다. 우리 애국자에게 남은 길이 오직 하나가 있다. 그것은 눈물을 머금고 힘을 길러 장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우리가 망국의 비운을 당한 것은 우리에게 힘이 없은 까닭이니, 힘이 없어 잃은 것을 힘이 없는 대로 찾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219
국내에 있을 수 있는 자는 국내에서, 국내에 있을 수 없는 자는 해외에서 수양·단결·교육·산업으로 민력을 배양하는 것이 조국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도산은 낙루하였다. 만좌가 느껴 울었다.
220
이리하여 망명할 일이 결정되었다. 우선 사내에게 대하여서는 며칠 동안 고려할 여유를 청한 뒤에 안창호·이갑·이 동년·이시영·유동열·이동휘·이종호·신체호·조성환 등이 망명할 준비를 하였다. 안창호·이갑은 구미에서 동포 지도와대 외교섭하는 일을 맡고, 이동녕은 러시아의 연해주, 이동휘는 북간도, 이 시영, 최석하는 서간도, 조성환은 북경, 이 모양으로 각각 해외에 가서 활동할 구역을 분담하고, 국내에 남아 있을 이로는, 서울에 전덕기, 평양에 안태국, 평북에 이승훈, 황해도에 김 구, 이 모양으로 떼어 맡고, 이종호는 해외로 나가서 하는 모든 사업의 자본을 대기로 하였다. 이종호는 이용익(李容翊)의 장손으로 보성학교, 보성관 등 교육·출판사업을 경영하고 그때에 상해의 덕화은행(德華銀行)에 그 조부가 하여 놓은 거액의 예금이 있었다.
222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와 서·북간도에는 이미 수십만으로 헤아릴 동포가 거주하고 있었거니와 을사·정미 이래로 망명 겸한 재산 있고 지식 있는 인사의 이 주로 급격히 늘어 갔다. 이 동포들을 지도 계발하여 문화와 산업을 향상시키는 것으로 독립 운동의 한 날개를 삼자는 것이다.
223
조성환은 북경에 있어서 일변 중국 인사와 교제를 맺고, 일변 국내로부터 남녀 유학생을 북경에 보내어 학문을 하면서 중국 유학생들과 친우가 되어서 장래에 대비하자는 것이니, 대개 한국 독립 문제는 중국의 협력을 얻음으로만 해결 될 수 있을 뿐더러 아시아 대륙 침략의 일본의 제국주의를 막는다는 점에서도 한국과 중국과의 동지적 친교와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중국 인사에게 인식시키자고도산도 그의 동지도 생각하였던 것이었다.
224
도산은 우리의 독립이 오직 우리 민족의 자력에 있음을 확신하고 또 힘써 말하였거니와, 국제 관계의 중요성을 결코 간과(看過)하지 아니하였다. 도산의 염두(念頭)에 있는 한국의 우방으로는, 첫째로 중국, 둘째로 미국이었다. 이 갑·이동휘 등은 러시아를 중요시하였으나 도산은 러시아를 위험시하였다. 그것은 러시아가 증왕에 한국에 대하여 군사 기지를 강요한 과거도 과거려니와, 러시아의 전통적인 태평양 진출책의 기지로 가장 요긴하고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목표가 된 것이 한반도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세력이 꺾이는 날이 있다면 그때에 일본을 대신하여 한반도를 수중에 넣으려 할 자는 중국도 아니요, 미국 도 아니요, 러시아라고 도산은 보았다. 러시아가 지중해도 진출하는 길에 대한 토이기, 인도양에 대한 페르시아(지금의 이란), 아프가니스탄과 아울러 한국은 표트르 대제 이래로 외교와 군사의 목표였었다. 그러므로 당장 일본에 대하여 이해가 일치된다는 목전의 편이로 러시아에 지나치게 접근한다는 것은 한국을 위하여 후환을 남길 걱정이 있다는 것이 도산의 의견이었다. 정치가의 짧은 소견이 매양 일시적인 이해에 현혹하여 뒷날의 큰 환란을 불러 들인다는 것을 도 산은 항상 경계하고,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정책도 이러한 관점으로 보아서 반드시 일본을 위하여 큰 후환의 원인이 될 것을 이등박문에게도 설파하였다.
225
도산은 오직 중국과 미국만이 한국에 대하여 탐욕(貪慾) 없는 친구가 될 나라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동휘·이시영·조성환 같은 유력자를 중국에 머물게 하는 것을 주장하고, 도산 자신은 재미 동포와 미국에 올 유학생과 미국 국민과의 친교를 위하여 일할 것을 맡고, 이 갑은 그의 지론(持論)인 친로·친독론도 있고 해서 유럽에 머무를 예정이요, 이 조호는 상해나 청도에 있어서 재정과 연락을 맡기로 되었던 것이다.
226
이 모양으로 조각 회의가 변하여 망명과 국내·해외 신민회 운동, 즉 독립 운동의 부서 분담의 비장하나마 건설적인 회의가 되었던 것이다.
227
중의(衆議)는 일결(一決)하였다. 이에 도산은 거국가(去國歌)라는 슬픈 노래 한곡조를 남기고 마포에서 작은 배를 타고 장연(長淵)에 이르러 거기서 청인의 소금 배를 타고 청도로 향하였고, 다른 동지들도 저마다 변장 밀행으로 국경을 탈출하여 청도에서 상봉하기로 하였다. 이것이 경술년 합병되기 수주일 전이었다. 도산의 거국가는 구 후 여러 해를 두고 전국에 유행되었다. 그 노래는 이러 하였다.
228
一[일],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잠시 뜻을 얻었노라 까불대는 이 시운이 나의 등을 내밀어서 너를 떠나 가게 하니 간다 한들 영 갈소냐 나의 사랑 한반도야.
229
二[이],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가 지금 너와 작별한 후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널 때도 있을지오 시베리아 만주 들로 다닐 때도 있을지라 나의 몸은 부평같이 어느 곳에 가 있든지 너를 생각할 터이니 저도 나를 생각하라 나의 사랑 한반도야 三[삼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지금 이별할 때에는 빈 주먹만 들고 가나 이후 성곡하는 날엔 기를 들고 올 것이니 악풍 폭우 심한 이때 부대부대 잘 있거라 훗날 다시 만나 보자 나의 사랑 한반도야.
230
이 노래는 진실로 작자의 뼈를 깎아 붓을 삼고 가슴을 찔러 피로 먹을 삼아서 조국의 강산과 동포에게 보내는 하소연이요 부탁이었다.
231
그는 조국의 일시의 치욕을 단념하였다. 그러나 반드시 그 영광을 회복할 것을 확신하였다. 그는 이 노래 둘째 절 그대로 태평양과 대서양을 몇 번이나 건넜고 시베리아·만주로 다녔다. 그리고 이 노래에 약속한 대로 그의 몸은 부평같이 어느 곳에 가 있든지 나라를 생각하고 사랑하고 그것을 위하여서 일하였다.
232
수없는 청년 남녀가 혹은 둘에서, 혹은 산에서 일본 경찰의 귀를 피하여 가며 이 노래를 부르고는 울었다.
233
그뿐 아니라 이 노래를 읊조리면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작자의 뒤를 따랐다.
234
도산이 지은 노래는 여러 십편이 있거니와,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와 이 거국가와 또 흥사단가가 가장 잘된 작품이다. 흥사단가는 이러하다.
235
조상 나라 빛내랴고충의 남녀 일어나서무실역행 깃발 밑에 늠늠하게 모여 드네 부모국아 걱정 마라 무실역행정신으로 굳게 뭉친 흥사단이 네 영광을 빛내리라.
236
도산이 나라를 떠난 뒤 八[팔]월 二[이]십 九[구]일에 대한 제국이 일본에게 병합한 바 되어서 四[사]천여 년 국맥이 일시 끊어지고 말았다.
237
그때에 할레 혜성(彗星)의 꼬리가 지구를 감아서 세상이 멸망한다는 뜬 소문이 있었고, 또 八[팔]월 하순에 들어서는 짙은 안개가 사방에 가득차서 그렇지 아 니하여도 인심이 흉흉하던 즈음에, 「대한 제국 대황제는 그 국토와 인민을 완전 또 영구히 대일본 제국 대황제에게 양도」운운의 최후 조서 등사물이 전국 각 철도 정거장, 사람 많이 모여 있는 지점에 일제히 나붙었다.
238
학교에서는 한밤, 혹은 새벽에 학생을 비상 소집하여 통곡하는 예를 행하고 죽기로써 광복할 것을 맹세하였다. 민족 운동의 주요 인물은 혹은 망명의 길을 떠나고 혹은 경찰서와 헌병대에 감금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는 벌써 한국의 군대는 해산되고, 경찰과 통신 기관은 을사와 정미에 벌써 일본의 손에 들어가 고, 민간의 무기라고는 칼을 제하고는 모조리 압수된 뒤라 마치 쭉지를 묶이고 발톱을 잘린 수리와 같아서 오직 가슴이 터질 뿐이요, 뭄을 놀려서 반항할 길이 없었다. 우리 나라는 독립이 마관 조약으로 승인된지 십 五[오]년, 대한 제국이라 칭한지 십三[삼]년, 일본이 을사의 한일 협정으로 침략을 개시한지 五[오]년 에, 부끄럽게도 맥없이도 소멸되고 말았다. 「힘」이 없었던 것이다.
239
그러나 합병 조약이란 무력의 협박 밑에서 쓰여진 한 조각의 서면이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양심의 승인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가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 한국을 병합한 것은 일본의 역사에 가장 큰 죄악이었다. 그는 혈통으로는 같은 근원이요, 문화로는 스승이요, 지리적으로는 이웃인 우리나라에 대하여 마치 문명국이 야만 미개한 지역에 대함과 같은 죄악을 범하였다.
240
천리로 보아 일본은 조만간 이 죄악에 대한 보복을 받을 운명에 있다. 그러나 사욕에 눈이 어두워 천리를 보지 못하는 일본은 더한 죄악으로 이미 저지른 죄악의 소득을 확보하고 소화하려 하였다. 그것이 합병 후 三[삼]십六[육]년간 일본이 한국에 있어 한 모든 어리석은 노력이요 죄악의 관영(貫盈)이 된 것이었다.
241
일본의 한국 합병은 그의 자살적인 행위였다. 첫째로는 일본이 한민족의 원부(怨府)가 되고, 둘째로는 四[사]억만 중국 민족의 의구과 증오의 적이 되었다.
242
러시아와 미국과의 불화를 산 것도 그 근본 원인은 일본의 그릇된 한국에 대한 정책이었다. 만일 일본이 한국에 대한 이 큰 과오, 큰 죄악이 아니었던들 만주 사변도 없었을 것이요, 국제연맹 탈퇴로 세계에서 고립되는 불행도 없었을 것이 요, 소위「지나 사변」,「대동아 전쟁」으로 오늘의 수치를 당함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화는 일본을 통하여 인과율이 추호도 어긋나지 아니함을 우리에게 보이신 것이다.
243
그러나 남에게 오는 인과만 보고 우리 자신의 인과에 눈을 가리워서는 아니 된다. 우리가 四[사]십 년간 일본에게 받은 고초가 또한 우리의 죄 값임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도산은 망국의 책임을 국민 각자가 질 것이라는 말로 이 뜻을 표현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244
『조국을 망하게 한 것은 이완용만이 아니다. 나도 그 책임자다. 내가 곧 그 책임자다.』
245
우리는 망국의 책임을 일본에게 돌리고, 이완용에게 돌리고, 양반 계급에게 돌리고, 조상에게 돌리고, 유림에게 돌리고, 민족 운동자에게 돌린다. 그리고 그 책임 아니질 자는 오직 나 하나뿐인 것같이 장담한다. 그러나 우리민족 각 사람이 힘있는 국민이었을진댄 일본이 어찌 담비며 이 완용이 어찌 매국 조약에 도장을 찍을 수가 있으랴. 그러므로 우리는 이 완용을 책하는 죄로 우리 자신을 죄(罪)하여야 한다.
246
『우리 민족이 저마다 내가 망국의 책임자인 동시에 또한 나라를 다시 찾을 책임자라고 자각할 때가 우리 나라에 광복의 새 생맥이 돌 때요.』
247
도산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므로 도산은 일찍 무슨 일이 잘못된 데 대하여 남을 원망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생각하기를 그가 원망하고 책망할 수 있는 사람이 오직 하나 있으니 그것은 곧 저라고 보았다.
248
청도에서 망국의 슬픈 소식을 들은 도산은 통곡하였으나 실망하지 아니하였다.
250
『광복이 내가 하기에 있다. 내가 하면 된다.』
252
국내의 최후 회합에서 약속하였던 대로 몇 동지가 청도에 회합하여서 이른바 청도 회의를 열었다. 유동열(柳東說)·이갑(李甲)·신채호(申采浩)·이종호(李鍾浩)·김지간(金志侃)·조성환(曺成煥)·이강(李剛)·박영로(朴泳魯)·김희선(金羲善)등이었다. 그러나 이 회의의 결과는 도산이 바라던 바와 같지는 못하였다. 의론이 합치 아니 되는 점은 급진(急進)과 점진(漸進)에 관하여서니 이것은 차후로도 줄곧 양립한 대로 기미 삼일 운동에 이르렀다.
253
급진이라 함은 서북간도와 러시아령에 있는 동포의 재력과 인력은 규합하여 당장에 일본에 대한 무력적 독립운동을 일으키자는 것으로 이동휘가 이 주장의 대표자요, 점진론이란 것은 실력없는 거사를 하면 달걀로써 돌을 때리는 것이라 성공할 희망이 없을 뿐더러 (一[이]) 재외동포의 경제력과 인명을 소모하고, (二[이]) 국내 동포에 대한 적의 경계와 압박이 더욱 엄중하여 문화와 경제적 향상이 저지될 것이니 우선 서북간도, 러시아령, 미주등에 재류하는 동포의 산업을 진흥시키고 교육을 보급시켜서 좋은 기회가 돌아 오면 큰 힘을 내일 수 있도록 준비 공작을 하자는 것이니 이것은 물을 것도 없이 도산의 주장이었다.
254
『나라가 망한 이때에 산업은 다 무엇이고 교육은 다 무엇이냐, 둘이 모이면 둘이 나가 죽고 셋이 모이면 셋이 나가 죽어서 싸울 것이라.』
255
고 이동휘는 자기설을 굽히지 아니하였다.
256
도산은 회담을 길게 끌어서 동지들이 망국의 격분에서 생긴 정신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려고 혹은 관광(觀光), 혹은 주연(酒宴),이 모양으로 일정을 연장하였으나,
258
하고 모두 청도를 떠나서 각자의 길을 걸으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도산으로 서는 그 이상 더 동지들을 설복할 힘이 없었다. 만일 이종호가 도산의 뜻을 좇아 그의 사재를 기울여서 도산의 경륜대로의 시설을 하기에 동의하였다면 일의 방향이 약간 변할 듯도 하였으나 이종호도 도산의 실력양성론보다 즉전즉결론 (卽戰卽決論)에 기울어지고 말았다.
259
양 주장의 결렬을 조화하려고 애쓴 것은 성격상, 경력상 이 갑이었다. 이 갑은 서울에 있을 때부터도 언제나 조화의 임무와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노력도 과를 얻지 못하여 청도 회합은 분렬의 결과로 끝을 막고 도산과 이 갑은 러시아 수도 페테르스부르크를 향하여 떠나고, 다른 이들도 다 각기 목적 하는 곳으로 향하였다.
260
도산은 러시아 수도에서 이 갑과 작별하고 백림에 잠간 머물러 영국 수도를 거쳐서 미국으로 갔다.
261
도산이 백림에 두류하던 독일 사람의 집 가족이 도산을 심히 후대하여 정거장에서 작병할 때는 그 주인 모녀가 꽃다발을 주고 도산을 안고 뺨을 맞추어서 친족과 같은 예로 석별하였다. 그때 독일은 신흥국으로서 카이젤 빌헬름 三[삼] 세 전성기로 그가 제일차 구주 애전을 일으키기 四[]사년 전이었다. 도산은 신흥 독일의 백성의 기운과 교육을 주의하여 보았다. 일인 일기(一人一技), 만인 개업(萬人皆業), 근검(勤儉), 정제(整薺), 애국등 당시 독일 국민의 노력 생활은 도산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게다가 백림 주인집의 도타운 우정을 받은 도산은 독일국민의 복을 빌면서 국경을 나섰다.
262
뉴욕에 상륙하여 캘리포니아로 돌아 가는 도산은 감개 무량하였다. 나라 있어서 떠났던 집에를 나라를 잃고 돌아 오는 몸이었다. 그나 그뿐인가. 나라를 잃고 망명하는 그는 국경을 넘을 때 여행권 사증이 있을 적마다 국적이 문제가 되었다. 한국 신민이라는 옛날 여행권은 가끔 말썽을 일으켰다. 더군다나 일본과는 동맹국이던 영국에서는 「일본 신민」이라고 선언하기를 요구하였으나 정치 망명가라는 것으로 무사히 통과되었다. 이로부터 도산은 미국에서 발행한
263
“Without Pass Port"(무여행권)라는 여행권으로 여행하게 되었다. 그것은 국적 없는 백성이라는 뜻이다.
5. 第五章[제오장] 美洲活動時代[미주활동시대]
265
―살아 있는 太極旗[태극기]와 愛國歌[애국가]―
266
도산은 미국 로스앤젤리스의 집에 五[오]년만에 돌아 왔다. 거기는 부인과 二 [이]남 一[일]녀가 있었고 여러 친우와 동지가 있어서 반갑게 맞았다. 그러나 나라를 붙들러 갔다가 잃고 돌아 온 도산에게 기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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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이 본국에 돌아간 뒤에도산의 부인은 삯빨래로 생활비를 벌어서 자녀를 길렀다. 도산 부인은 집 사람과 생업을 돌아 보지 않는 남편을 좋아할 수 없었다. 남 모양으로 돈을 벌면서 집에 있어 주기를 바랐다.
268
도산은 곧 토목 공사의 인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체력으로는 이러한 근육 노동을 오래 계속할 수가 없어서 서양인 주택의 소제 인부가 되었다. 이것은 총 채로 떨고 비로 쓸고 걸레로 훔치면 되는 일이었다. 「하우스윅」이라는 것이다.
269
도산 내외가 저축한 돈이 천불쯤 되었을 때에도산은 심히 불행한 기별을 들었다. 그것은 추정 이 갑(秋汀李[추정리])이 러시아 서울에서 시작한 엄지 손가락의 신경마비가 전신불수로 화하여 미국에 오려다가 뉴욕에서 상륙 거절을 당하고 시베리아로 돌아가 병으로 눕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정의 사람인 도산은 병석에 누운 지우(志友)를 위하여 울었다. 도산은 이 갑과 민족 운동의 이론에 있 어서는 반드시 일치하지는 아니하였다. 이 갑은 급진론자요, 목적을 위하여서는 수단을 가리지 아니하는 전략적 행위도 때를 따라서는 사양하지 아니하였다. 이 갑은 몸이 작으나 그의 몸은 전부담(膽)이며 호쾌(豪快)한 성격이었다. 그는 민영준(閔泳畯)에게서 받아 내인 거액의 재물을 애국 운동에 흩어 버리고 말았고, 또 그는 미녀를 끼고 화월(花月)에 취하는 풍류(風流)도 있었으며 필요하면 살육도 한 수단이라고 하였다. 이런 것은 다 도산과는 맞지 아니하였다. 그러므 로 이 갑이 청년학우회에 관계하고 싶은 의사를 보일 때에도산은,
271
하고 언하(言下)에 거절하였다 도산은 청년학우회는 도덕적으로 일점 비난할 수 없는 인격자들이 되게 하고 싶었다. 청년학우회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이 도 덕으로 세계에 으뜸이요, 모본이 되는 국민이 되게 하는 것이 그의 이상이었다.
272
적더라도 우리 민족이 거짓 없는 국민, 사랑하는 국민 뭉치는 국민, 부지런한 국민만은 되게 하고 싶었고 또 그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273
도산의 이러한 사상에 대하여 추정은 비록 경의는 표하지마는 「도산다운 고달 (高達)한 이상」이라고 미소하는 실제 정치를 하였으면 얼마나 좋으랴 하고 추정은 도산의 고집을 아까와하였다.
274
이 모양으로 도산과 추정은 반드시 성미가 맞는 것은 아니었으나 저를 잊고 나라에 바치는 점을 서로 알고 서로 사랑하여서 이것이 굳은 우정의 변치 아니할 바탕이 된 것이었다.
275
도산은 그의 부인과 의논하여 저축한 돈 천불을 이 갑의 치료비로 보내었다.
276
여기 동의한 부인도 어지간한 사람이다. 또 도산의 성품으로 보아서 그 부인의 동의 없이 부권(夫權)을 행사하지는 아니하였을 것이니 내외간의 교섭 곡절을 남이 알 수는 없으나 부인이 승낙한 것만은 사실이다.
277
도산이 보낸 금 일천불을 받은 추정이 소리를 내고 물었다. 함은 추정 자신의 술회여니와 울 만도 한 일이었다.
278
그러나 추정은 또 이만한 우정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었다. 그가 한성 정계에서 활동하던 五[오]년간에 그의 재산은 동지의 공유 재산인 관(觀)이 있었다.
279
어떤 친구가 옷이 없다면 돈을 주고, 여비가 없다면 돈을 주었다. 그는 맛있는 음식을 대하면 벗을 생각하고, 불행한 벗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의 도움이 먼저 있었다. 그는 도산 보다는 연치로나 사회적 지위로 나선배면서도 언제나 도산을 추존하고 자기는 도산보다 늘 일보 뒤에 섰다. 당시 한성 정계의 중심 인물인 실력을 가지면서도 그는 매양 그늘에 돌았다. 「아까운 애국자를 잃었다」 하는 것은 도산만이 한탄이 아니었다. 그는 군대 해산 직전까지 참령으로 육군 대신 부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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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추정 이 갑의 쾌유(快癒)를 빌면서 얼마 동안 노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미국 재류 동포들은 도산을 가만 둘 수 없었다. 도산은 국민회 총회장의 임을 맡게 되었다.
281
국민회에 관해서는 이 책 제二[이]장에 대략 말하였거니와 이 기회에 좀 더 말할 필요가 있으니 그것은 미국에 있는 대한인 국민회를 다만 일개 교민 단체로 볼 성질의 것이 아니요 실로 우리 민족 운동의 주요한 세력으로 우리 역사에 대서 특서될 것이기 때문이다. 경술 합병 당시에 미국 (하와이를 포함)에 재류하는 동포는 국민회의 이름으로 대회를 모아 합병 부인의 결의를 하고 이것은 일본 황제를 포함한 각국 원수에게 통고하여 영국으로부터는 동정한다는 회답까지 받았으며, 그 이래로 三[십]십 六[육]년 간 관공사를 물론하고 「Korean」이라고 통하여 왔고 일찍 일본 신민이라고 칭한 일이 없어서 미국 정부에서도 재류 동포에게 관한 공문서는 일본 대사관이나 영사관을 통하지 아니하고 대한 국민회를 통하여서 하였고, 이번 미국과 일본과의 전쟁 중에도 재류 동포는 국민회를 중심으로 한 재미 한족연합회의 주장으로 재산 동결 기타 적국인으로서의 대우를 면하였다. 게다가 제일차 대전 후 국민회는 이 승만 박사를 워싱톤으로 파견하였으며, 제이차의 임시정부의 경비를 부담하고, 구미 위원부를 설치하고 이승만 박사를 위원장으로 하여 그 경비를 부담하였으며 八·一五[팔·일오] 이후에는 십 五[오]명의 대표를 본국에 파견하여 건국 사업을 돕게 하였다. 한 말로 말하면 미국 국민회가 끊어진 반만 년 종사를 三[삼]십 六[육]년 보존한 셈이다. 미국에 한인이 처음으로 입국한 것이 누구인지는 모르거니와 거기 머물러 산 사람으로는 갑신정변의 서재필이 아닌가 한다. 서재필은 김옥균·박영효 등과 같이 망명하여 김·박은 일본에 머무르고 서재필은 미국으로 가서 입적하였다. 그의 삼족이 멸하매 그는 미국 여자에게 장가들었다. 서재필이 본국에 돌아와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신문을 국민으로 창간하고 영은문(迎恩門=延 詬門[연후문])터에 독립문을 짓고 태극기와 「독립문」이라는 국문액을 새기고 모화관(慕華館=母岳院[모악원]의 音相似[음상사]로 事大的[사대적]으로 樂[락] 한 것)을 독립관으로 현판을 고쳐 걸고 연설회장을 만든 것, 모처럼 계획한 서정 일신(庶政一新)의 대업이 당시 귀족 수구파의 반동으로 깨뜨려진 것 등은 정 유 무술년 간의 일이거니와 두 번째 망명 후의 서재필은 의약업에 종사하여 다소 재산을 적축하였다가 기미 삼일운동 시에 이 승만과 함께 국민회를 대표하여 활동하는 중에 소비하고 육십 노인이 다시 의학을 공부하여 의업으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282
한인이 대량으로 미국에 입국한 것은 一九○三[일구공삼]년 즉갑진년간(甲辰年間)의 북아메리카 개발회사의 이민이니 이것은 하와이의 농지 개척을 위하여 한 인을 노동자로 데려 간 것이었다. 그들은 혹은 계약 기간 전 탈주와 혹은 계약 만료 후의 고용해제로, 하와이를 주로 하여 캘리포니아주와 멀리 멕시코, 큐바에까지 퍼져서 머물러 살게 되었으니 그 수는 二[이]천명 가량이었다. 이들이야말로 재미 한족 사회의 건설 기본원이었다.
283
이보다 먼저 북미에 흘러 들어 간 소수의 동포가 있으니 그것은 인삼 장사이었다. 그때에는 화와이를 중국인들이 신금산(新金山)이라 하고 샌프란시스코를 구 금산(舊金山)이라 하여 많은 중국인이 벌써 건너가 있었다. 이들은 남양과 호주를 거쳐서 흘러 들어 온 것이었다. 그런데 중국인이 가는 데는 반드기 소수의 한국인이 따라 가니 그것은 인삼 장수였다.
284
중국인, 특히 남방인은 고래로 인삼, 그중에도 홍삼을 귀중히 여기고 애용하였 으며 고려 인삼이라면 천금을 아끼지 않고 다투어 샀다. 이러한 관계로 강남은 물론이어니와 남양까지도 화교가 가는 곳에는 「고려인」이 따르는 것이니 대개 고려인은 중국인이 우리 민족을 부르는 명칭이다.
285
그래서 개발 회사 이민이 있기 전에 샌프란시스코 일대에는 우리 동포가 수백 인 거주하고 있었다. 도산이 샌프란시스코 거리에서 목격한 상투를 맞잡은 동포는 이네들이었다.
286
하와이로 실러 갔던 개발 회사 이민의 우리 동포들이 하나 둘 미국 본토로 들어 가게 되어 캘리포니아에 한국인이 날로 늘었다.
287
일구공육 년 一九○六[ ] 즉 정미년 보호 조약이 늑정(勒定)되매 하와이에서는 목사 김성권(金成權)등의 발기로 하와이 통일 발기회라는 것이 생겼다. 여기에 통일이라고 말을 쓴 이유가 있다. 당시 하와이에는 동포가 집단적으로 일하는 농장이 三[삼]십 六[육]개소가 있었으니 농장마다 그 농장주의 지시로 일종의 단체가 있었다. 통일이라 함은 이 三[삼]십 六[육]개 단체를 통일한다는 뜻이었다.
288
이때 샌프란시스코에는 제 二[이]장에 말한 공립협회 외에 대동보국회(大東報國會)가 있었다. 공립협회에는 회장에 정재관(鄭在寬), 《共立新報[공립신보]》 주필에 최정익(崔正益)이요, 대동보국회는 장경(張慶)이 회장이었다.
289
이 모양으로 하와이와 북미(재미 동포는 하와이와 북미라고 부른다. 북미는 미국을 지칭하는 명사로 쓰여진다) 에 연락 없이 동포의 단체가 생겨 있었다.
290
그러던 즈음에 一九○七[일구공칠]년 미국 사람 스티븐슨이 일본에 유리하고 한국에 불리한 말을 하였다는 것을 분개하여 전명운(田明雲), 장인환(張仁煥) 양 동포가 그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살한 사건이 일어나매 하와이의 합성협회(合成協會 =통일발기회의 결과로 조직된 단체)에서는 전장 양의사 후원을 위한 의연금을 고립협회로 보내었다. 이것이 하와이·북미 양지 동포 단체의 연락의 개시였다.
291
一九○九[일구공구]년에 북미의 공립과 대동이 합하고 또 하와이합성 협회와도 합하여 국민회 총회가 되고 북미·멕시코우·화와이·원동(러시아 영토)의 네 개 지방회가 되어도산이 총회장이 되었다.
292
국민회를 조직하던 사람들의 의도로 보면, 외국에 있는 한족 전체를 망라한 국민회를 만들려 한 것이니 만주에도 국민 지방회를 세우려 함은 물론이었다.
293
도산은 국민회 총회장으로 선거되었다. 도산의 목표는 회원의 품격을 높여 교 거(僑居)하는 나라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고 근검 서축을 장려하여 회원 각원이 독립하고 풍족한 생계를 가지게 하며, 단체적으로 거류국 관민의 신회를 얻어 동포의 권익을 보호할 뿐더러 그리함으로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인을 간섭하는 구실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294
재류민 대부분은 본국에서부터 무식한 이요 또 단체 생활에 훈련이 없어서 국민회의 정책에 협력하느니보다도 그것을 귀찮게 생각하는 이가 처음에는 적지 아니하였다. 또 그 약점을 타서 국민회에 반대하고 이를 이간시키는 선동자도 없지 아니하였다. 더구나 본국으로부터서 새로 건너 오는 지식 계급인 중에 그러한 사람이 가끔 있었다. 그것은 자기가 권세를 가지려는 야심으로서였다. 그러나 도산의 신망은 점점 더하였다. 도산은 첫째로 회원의 부담을 일정하게 하 는 제도를 썼다. 그것은 一[일]년에 五[오]불의 국민 의무금이라는 것만을 회원에게 징수하여 수입지출을 분명하게 하였다. 종래는 의연금이란 명칭으로 수시로 무제한으로 거두었다. 도산은 이것은 첫째로는 회원에게 불안과 불쾌의 감을 주고, 둘째로는 동포의 부력을 쌓는 것을 저해하는 것이라 하여서 의연금이라는 것을 폐지하였다. 그러므로 회원은 누구나 一[일]년에 五[오]불만 바치면 고만 이었다.
295
이 의무금의 수입으로 도산은 一[일]년의 예산을 세웠다. 수입의 길이 없는 지출은 도산은 절대로 아니하는 정책을 세웠다. 「힘자라는 데만큼」이란 것이었다. 시급한 일이라 하여서 내게 하는 것은 민심을 떠나게 하고 민력을 피폐케 하 는 것이라고 하였다. 민족 사업은 장원한 일이니 민중을 흥분시켜서 일시적 효과를 거두는 것은 민중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도산은 생각하였다.
296
다음에, 국민회는 회원의 권익이 침해되거나 기타의 곤란이 있을 때에는 회의 전력을 그 일점에 기울였다. 가령 회원의 소송 사건, 대고용주 쟁의 사건(對雇 傭主爭議事件), 외국 사람에게 업수임을 받은 일 같은 데 대하여 서는 전력을 기울여서 싸우되 합법적으로 하여서 소기의 결과를 보지 아니하고서는 말지 아 니하였다. 그러나 잘못과 그릇됨이 우리 편에 있을 때엔 서슴치 않고 충심으로 사과하였다. 이치에 맞지 않는 역성은 민족의 위신을 보전하는 소이가 아니었다.
297
생활 개선에 대하여서는 도산이 처음 미국에 왔을 때 하던 모양으로 거처의 청결을 강조하였다. 「이웃 서인보다 더 깨끗하게」할 것을 권면하였다 (서인이라고 하는 것은 서양인이란 뜻이다).
298
예의답게 할 것도 장려하였다. 결코 거짓말을 말고 특별히 서양인과의 교섭과 거래에 「예스」와「노우」를 분명히 하고 한번 언약한 것이면 이해를 불계하고 신용을 지킬 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하였다.
299
『한국인의 상점에서는 안심하고 물건을 살 수 있다.』
300
『한국인의 노동자는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다.』
301
『한국인의 언약이라면 믿을 수 있다.』
302
이 세 가지 신용만 얻으면 우리는 돈도 벌 수 있고 남에게 대접도 받을 수 있 을 뿐더러 우리 민족 전체의 명예를 재류 국민에게 인상(印象)시킬 수 있다고 도산은 확신하고 동포에게 충고하였다.
303
회원들은 이 지도를 잘 받았다. 동포의 거주는 정결하여지고 몸가짐은 점잖아 지고 신용은 높아졌다. 사업주들은 국민회가 공급하는 노동자를 신임하였다. 이렇게 회와 회원의 신용이 증대함을 따라서 관헌들도회를 신임하게 되어서 한국인에게 전달될 국가의 의사는 국민회를 통하여서 하게 되고, 심지어 한국인간의 범죄 사고까지도 국민회에 일임하거나 경찰에서 심리하더라도 국민회에 고문하 여 그 의사를 존중하였다. 여행권이 불비하거나 휴대금이 부족한 한국인도 국민 회의 보증이 있으면 미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국민회는 대사관, 영사관과 같았고 국민회로 인하여 재미 한국인은 일본 신민 대우에서 벗어나서 한국 국민으로 대우를 계속하여 온 것이었다.
304
그런데 이러한 힘은 미국 관변에 대한 「운동」에서 온 것이 아니요,. 우리 동포 자신이 국민회의 지도 밑에 자수자득한 신용과 명예의 결과였다. 우리 민족 이 한번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라는 신용을 얻으면 세계 어디를 가도 행하지 못할 데가 없다는 도산의 신념이 사실화한 것이었다.
305
이것은 미국에서뿐이 아니었다. 멕시코우에서도 그러하고 시베리아에서도 그러 하였다.
306
도산은 멕시코우에 재류하는 동포의 초청으로 멕시코우에도 갔다. 이곳 국민회 지방회도 그 나라 관민의 신용과 존경을 받았다.
307
원동지회는 이 강의 손으로 처음에 본부를 해삼위에 두었었으니, 거기는 권업회(勸業會)라는 것이 김입(金立)·윤해(尹海) 등의 손으로 조직되어 국민회에서 분리하고 본부는 자바이칼 주 치 따로 이전하였다.
308
시베리아 각지에 산재한 동포들은 그 지장마다 국민회를 조직하여 一[일]년에 한번씩 치따에서 대의원회(代議員會)를 열고 또 기관지로 《正敎報[정교보]》라는 월간 잡지를 발행하였다.
309
여기서도 국민회는 러시아 관민의 신임을 얻어서 「한국 국민」이라는 여행권을 사용하고 일본 신민과 대우를 면하였으며, 따라서 일본 관헌의 절제를 전연 받음이 없었다. 여기서 국민회의 중심 인물로 마지막까지 힘쓴 이는 이 강이었다.
310
그러나 一九一四[일구일사]년 제일차 구주 대전이 일어나며 러시아는 총동원령이 내려서 국민회의 활동은 정지되고 말았다.
312
― 臨時政府[임시정부]大獨立黨[대독립당]까지―
313
一九一九[일구일구]년 구주대전이 휴전에 이르렀다.
314
샌프란시스코우에 있는 국민회 중앙 총회는 이승만에게 파리 평화 회의에 참석할 것을 청하여 대한인국민회 중앙 총회장의 신임장을 가지고 우선 와싱턴으로 갔다.
315
이때에 국민회 내부에는 이승만에게 대한 불만이 있었으니, 그것은 이 박사가 하와이 국민회를 중앙 총회로부터 분리시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앙 총회 회장인 안창호는 이승만 박사가 적임이란 것을 역설하여 내부의 불만을 눌렀다.
316
이승만은 와싱턴에 갔으나 구주에 가는 여행권을 얻지 못하였다. 마침 상해에 있는 신한청년단에서 김규식을 파리에 파견하였기 때문에 그가 우리 민족 대표로 활약하였고 이승만은 구미 위원부장으로 와싱턴에서 외교와 선전의 일을 하기로 되었다.
317
그리고 안창호 자신은 국민회의 특파로 원동을 향하여서 미국을 떠났다. 이때는 아직도 三[삼]월 一[일]일의 독립 선언이 있기 전이었으나 국민회로서는 구주 대전 휴전 후의 민족 운동에 대처하기 위하여 도산을 원동으로 파송한 것이었다.
318
도산은 선중에서 三[삼]월 一[일]일 국내의 독립 선언 보도를 접하였다. 그리고는 홍콩을 거쳐서 상해로 왔다. 도산이 상해에 도착한 것이 四[사]월 상순즉 四[사]월 십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조직 발표된 직후였다. 그 정부는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원수로 삼고, 안창호·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김규식(金奎植)·신규식(申奎植) 등을 각 부총장으로 하였고, 여운형(呂運亨)·신익희(申翼熙)·윤현진(尹顯振)·이춘숙(李春塾)등 소장파를 차장으로 한 것이다.
319
이 기회에 상해에 있던 신한청년단의 활동에 관하여 일언할 필요가 있다.
320
합병 직후 신규식·김규식·신채호·조용은(趙鏞殷=紊昴[문묘])·문일평(文一平)·홍명희(洪命憙)·정 인보(鄭寅普) 등 지사들이 상해에 망명하여 있었다. 그때에 신규식은 동지회라는 것을 조직하고 있어 상해 한국인계에 주인격이었다.
321
그후 한 송계(韓松溪)·선우혁(鮮于爀)·장덕수(張德秀)·김철(金徹)등이 상해로 모여서 신한청년단이라는 것을 조직하고 구주 대전이 휴전되매김철을 국내로 보내어 천도교에서 三[삼]만원을 얻어다가 김규식을 파리로 파견하는 동시에 여운형을 러시아령으로, 장덕수·선우혁을 국내로 보내고, 또 서·북간도·북경·미주·하와이 등지에도 글을 보내어 이 기회에 내외 일제히 독립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322
동경 유학생들이 기미 二[이]월 八[팔]일에 동격 청년회관에 모여서 독립을 선언한 것이 상해에 전하자 신한청년단에서도 불란서 조계에 사무소를 내고 선전 과 연락 사무를 시작하였다. 三[삼]월 一[일]일 독립 선언의 제일보가 상해에 도달한 것이 그로부터 약 一[일]주일 후였으니, 파리 회의와 민주, 하와이의 국민회 등 재외 동포 각 단체와 주요한 지도자들에게 삼일 운동의 제일보를 낸 것이 삼 三[ ]월 십일 이었다. 이 일을 한 것이 신한청년단이었다.
323
또 신한청년단에서는 상해에 있는 영문·한문 등 각 신문사·통신사에 삼일 운동과 계속하여 일어나는 모든 기사를 제공하였고 동시에 민족 운동 여러 지도자가 상해에 회집하도록 초청하였다. 그러는 즈음에 윤현진·신익희·조완구(趙琬九)·이춘숙 등이 본국으로부터 오고, 혹은 동경으로부터서 왔다.
324
신한청년단은 오직 지도자들을 일당에 모아 놓는 임무만을 다하고는 자기의 존재를 감추고 말았다. 임시 정부와 임시 의정원을 조직하는 회장과 사무소를 마련하고 각지로서 모여 온 지도자를 여러 번 초청하여서 시국을 수습할 것을 요청하는 인사를 하고는 신한청년단은 자진하여 소멸한 것이다. 이것은 아마 운동 사상에 회한한 전례일 것이다.
325
임시 정부가 조직된 뒤에 신한청년단은 그가 三,四[삼,사]개월간, 특히 최근 一[일]개월에 시설하였던 모든 즙기(汁器)끼지 다 임시 정부에 바쳤다.
326
이러한 때에 도산이 상해에 온 것이었다.
327
도산은 상해에 오는 길로 신병으로 하여 홍십자 병원에 입원하였다.
328
유현진·신익희 등 차장측들은 연일 도산을 방문하여서 내무총장으로 취임하여 국무총리를 대리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도산은 듣지 아니하였다. 그때도산이 간청하는 사람들에게 한 대답은 이러하였다.
329
파리 평화 회의와 월슨의 민족 자결의 원칙은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의 호기가 아님은 아니다. 그러나 첫째로 우리 민족에게는 일본을 물리칠 실력이 미비하고, 둘째로 일본은 이번 전쟁에 연합국의 일원이기 때문에 조선 민족은 민족 자결의 원칙의 적용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본의 통치를 배척하고 자주 독립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세계에 표시하는 데 그칠 것이요. 독립의 목적을 이번에 달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도산 자신이 이번에 원동에 온 목적은 독립운동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요다음 기회에는 정말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실력을 기르는 운동을 하러 온 것이었다. 그 구체안으로 말하면, 남북 만주와 러시아령에 있는 동포를 조직하여 산업과 교육을 장려하여 부력과 문화력을 늘이는 일이었다. 만일 재외 동포의 부력과 문화가 향상되면 그것이 곧 독립의 실력인 동시에 재내 동포를 자극하여 따라서 부력과 문화력을 증진하게 될 것이니 진실로 우리 민족에게 부력과 문화력 곧 있을진댄 언제나 기회있는 대로 독립이 될 수 있는 것이다.
330
도산의 의견의 중점은 실력이요, 그와 반하여 다수 민족 운동자가 노리는 것은 기회였다.「이번 기회에는 」하고 기회만을 엿보는 것은 실력이 구비한 자가 하는 일이니, 실력 있는 자에게는 언제나 기회가 오는 것이지마는 실력없는 자에게는 아무러한 호기도 기회가 아니된다 하는 것이 도산의 주장이었다.
331
그러나 차장측의 소장파는 도산을 가만 두지 아니하였다. 그들이 도산을 설복하려는 논점은 이러하였다.
332
첫째로 지금 국내에서는 동포가 독립을 위하여 날로 피를 흘리고 투옥되지 않 는가. 이것을 손을 묶고 방관할 수 있는가. 둘째로는 동포에게 실력 양성을 역설하더라도 임시 정부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더욱 힘있지 아니한다. 이에 대하여 도산은 그 첫 논점에는 깊이 감동되었노라고 후에도 말하였다.
333
이러하는 동안에 二[이]십여 일이나 지났다. 도산은 그래도 처음 뜻을 굽히지 아니하고 자기는 만주에 들어가 동포들 속에서 교육과 산업 운동에 몸은 바칠 것이라고 말하였다.
334
이때 도산은 한가지 새로운 책무(責務)를 느꼈으니, 그것은 도산이 각지에서 형세를 관망하고 있는 거두 돋지들을 상해에 모으는 일이었다. 그들은 한 집에 모아만 놓더라도 도산은 한 짐을 벗어 놓는 것으로 생각하였거니와, 만일 다행히 그 동지들이 신민회 시대의 정의(情誼)를 회복하여서 대독립당이라는 단일 조직 속에서 협력할 수 있게 된다 하면 그런 경사가 없을 것이다. 도산이 독립 을 위한 민족 단일 진영을 주장한 것은 신민회에서도 그러하였다. 그러고 도산 이 자신이 그 진영에 중심이 되기를 피하여서 신민회에나 청년학우회에나 다른 사람을 중심 인물로 추대하고 자기는 무명한 그늘의 사람이 되기로 일관하여 온 것도 자기의 존재로 말미암아 통일이 저해될 것을 두려워한 때문이었다.
335
도산은 우리 나라 인심이 당파적으로 갈리는 경향이 많은 것을 잘 알았다. 그러므로 전 민족적인 단결에 중심 인물이 되기에 합당하려면 현재의 정세로는 한 시골 사람이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하였다. 밝히 말하면 그 중심 인물이 될 사람은, 첫째로 기호인(畿湖人)이요. 둘째로 양반이라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유길준(兪吉濬)을 민족 운동의 중심 인물로 추대하려고 애쓴 것이 이 때문이었다.
336
만일 도산 자신이 기호인 이라면 아무 꺼림 없이 소신을 수행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미묘한 사정은 일을 하여 본 사람이라야 아는 것이다. 도산의 필생(筆生)의 신우(信友)요 애우(愛友)요 동지인 송종익(宋鍾翊)은 경상도 사람이어니와, 그는 일찍 도산을 향하여,
337
『 선생은 왜 기호 양반 가문에 안 태어나고 평안도 놈으로 태어났소?』
338
하고 농담이 아니라 탄식한 일이 있었다.
339
위에도 말한 바와 같이, 도산이 신민회의 조직에 있어서나 홍사단의 조직에 팔도 사람 각 一[일]명으로 발기인을 삼은 것이나 다 이 미묘한 감정을 고려한 것이었다.
340
도산은 그의 출마를 수십일을 두고 간청하는 소장 동지들에게 대하여 두 가지 조건을 제출하였다 하나는 . 각지에 있는 거두들을 상해로 모으는 일이요, 둘은 그들의 모임을 기다려 임시 정부의 국무총리 대리를 도산이 사면하고 다른 이에게 원하자는 것이었다.
341
독립 운동이 이처럼 벌어져도 모이지 않은 거두들에게 대하여 굳세게 불만을 가졌던 소장파들은 도산이 제안한 제일 조건에 반대하였다. 아직도 임시 정부가 있는 상해로 모이지 아니하는 것은 그 거두들에게 성의가 없거나 딴 뜻이 있거나 한 것이니 그들을 억지로 모아 놓는다고 하여도 결국 의견의 불일치와 파생이 있을 뿐이니, 도산이 중심이 되어서 소장파 내각으로 일을 진행하자는 것이었다.
342
그러나 도산은 말하였다. 첫째는 의리에 있어서 평생을 애국지사로 바친 선배를 무시하는 것이 불가하고, 둘째로는 사체에 있어서 이 모든 지도자들이 임시 정부에 협력함이 아니면 민족의 총의를 망라하였다는 시실도 명분도 서지 아니 하므로 적으면 임시 정부의 위신이 감손하고, 크면 수다히 임시 정부가 각지에 발생하여서 그야말로 민족 운동이 분열될 염려가 있으니 각지에 산재한 거두들을 일당에 모이게 하는 것은 독립 운동의 절대 조건인 동시에 도산 취임의 절대 조건인 것을 역설하였다.
343
이에 소장파도 도산의 의견에 찬성하여 모든 것을 도산의 지도대로 할 것을 굳게 언약하고 이에 비로소 도산은 임시 정부에 내무부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344
도산은 한 번 취임한 이상 일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는 첫째로 미주 국민회로부터 二[이]만 五[오]천불을 갖다가 불란서 조제 하비로에 정청(政廳)을 차리고 매일 규칙적으로 정무를 보았다. 거두들은 아직 모이지 아니하였으므로 소장파 차장들이 총장을 대리하였다. 최창식(崔昌植)이 비서장, 신익희가 내무차장, 윤현진이 재무차장, 김구가 경무국장, 이 모양이었다.
345
정청은 매일 아침 사무 개시 전에 전원이 조회를 하여 국기를 게양하고,
346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산사람 대한으로 길이보전하세.』
347
하는 애국가를 합창하였다. 도산은 그 웅장한 음성으로 힘을 다하여서 애국가를 불렀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점잔을 빼던 사람들도 아이들과 같은 열심히 부르게 되었다.
349
『이 기상과 이 마음으로 임군을 섬기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351
『이 기상과 이 마음으로 충서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353
원래 이 노래의 사방 부르는 가사는 도산의 작이어니와, 이 노래가 널리 불려져서 국가를 대신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355
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도 하지 아니하였다.
356
정청을 정제하는 의에 큰일은 《獨立新聞[독립신문]》발행과 민족운동 거두를 일당에 모으는 일이었다.
357
《獨立新聞[독립신문]》은 어렵지 않게 발간되었다. 조동호(趙東祜)의 고심으로 국문 자모도 되고, 미주 국민회의 송금으로 자금도 조달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거두들의 회합이었다.
358
도산은 혹은 사람을 특파하고, 혹은 편지를 보내어 꾸준하게 거두들을 초청하였다. 七[칠]월까지에 이동휘를 최종으로 하여 이동녕·이시영·신규식·조성환·김동삼(金東三)등이 상해에 모였다. 러시아령의 최재형(崔비지깨)은 오지 아니하였고, 좀 더 늦게는 박용만(朴容萬)이 하와이로부터 오고, 이승만 도 왔다. 그러나 그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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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두들이 모이기를 기다려서 도산이 계획한 것은, 첫째는 내각의 개조요, 둘째는 독립 운동 발략의 결정이었다. 내각의 개조는 왜 문제가 되었느냐 하면, 상해에서 발표된 임시 정부 이외에 구후에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한 것, 이동휘를 집정관 총재로 한 것, 이러한 두 정부의 명부가 미국 통신사를 통하여서 세간에 유포된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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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도산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고,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고 기타 각 원을 소위 한성 정부 제도 대로 함으로 분열을 방지하고 통일을 도모하자고 발 의하였다. 이 안에 의하면, 내무총장이 이동녕, 노동국 총판에 안창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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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도산의 이 안엔 대하여 가장 격렬하에 반대한 것은 임시 정부의 소장파 차장들이었다 왜 그러고. 하면, 이 안은 필경 이승만과 이동휘를 위하여서 임시 정부를 희생하는 결과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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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하여 도산은 약 三[삼]주일간 소장파를 각개로 설복하였다. 독립 운동 벽두에 전선이 삼분한다 하면 수치가 아니냐, 통일을 위하여서는 모든 것을 불고하자 하는 것이 거의 주장이었다. 그때에도산은 목이 쉬도록 연일 연야 거두와 소장파를 설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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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이 천연하기 때문에 거두들은 각기 돌아 가겠다고 분개하였다. 본국으로부터 망명하여 온 청년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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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선배가 모였다가 독립 운동에 관하여 아무 결말도 못 짓고 흩어진다면 우리들은 가만히 있지 아니하겠소. 작정 없이는 한걸음도 상해를 못 떠나리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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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거두들을 위협한 이도 있었으니, 그 중심 인물은 한위건(韓偉建)·백남칠(白南七)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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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의 이 위협이 도산이 시킨 것이라고 오해한 거두가 있음은 물론이었으나 도산은 그런 방편을 쓰기에는 너무도 정직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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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의 성의는 마침내 노소에 통하여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동휘를 국무총일로 정부를 개조하여 三[삼]정부 연립의 불행을 제거하고 독립 전선통일에 우선 형식상으로 성공하였다. 이렇게 되매 각 거두들은 뿔뿔이 돌아간다는 고집을 버리고 상해에 머무르게 되어 자주 국무 회의를 열 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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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의 계획으로 이제 남은 것은 독립 운동 방략(獨立運動方略)을 제정하는 것 이었다. 도산의 이 발의가 국무회의에서 채택되어 각 총장과 차장과 기타 민간 중요 인물에게 일 개월 한하고 독립 운동 방략의 사안을 제출하기로 결의한 것이 그해 九[구]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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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이 독립운동 방략 제정을 주장하는 이유는 이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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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운동으로 독립이 실현이 된다면 문제될 것도 없거니와, 불행히 그렇지 못하다면 뒤를 잇는 사람들이 계승하고 답습할 주의, 강령과 실천할 계획을 뒤에 남겨서 언제까지든지 독립의 목적을 달하는 날가지 일관한 주의 방침하에 독립 운동을 계속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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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지나간 십년간의 독립 운동이 각 사람 각 지방에서 뿔뿔이 진행되었으므로 다만 좋은 결과를 거두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어떤 일이 있으면 상극·상쇄하는 불상사까지 일어난 것을 깊이 반성하여서 앞으로는 그러한 일이 반복되어 민족을 분열하고 민력을 소모하는 일이 없게 하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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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없는 「 ,. 계획 없는 운동―즉흥적(卽興的)운동」이 우리 민족의 과거의 결점이요 습관이라고 도산은 말하였다. 기록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잃어 버리는 손해를 받고 있다고 도산은 한탄하였다. 그가 상해에서 「독립운동 사료 편찬 위원회」(獨立運動史料編簒委員會)를 세워서 십여 인의 위원으로 하여금 합병 이래의 일본 폭정과 민족 운동의 역사 재료를 편찬하게 한 것도 이 주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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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운동 방략은 원고지 약 백 이십매였는데, 자세한 해설은 약하고 한 개 조목 한 개 조목으로 기록된 것이었다. 그 대강은 임시 정부 유지 방법, 국내에 향한 운동방법, 건국 방략, 이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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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대한 민국 임시 정부에 관하여서는 독립 운동이 아무리 오래 끌더라도 이것을 독립이 실현되는 날까지 유지하여야 한다. 그리하는 방법은, 척째로 재외 동포를 통일 단결하여서 그들의 정신적 지지와 재정적 지지를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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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임시 정부 유지에 대한 대강이다. 그 실제 방법으로는 북간도·서간도· 러시아령·미주·하와이의 五[오]지역의 동포를 조직하는 것이 제 一[일] 단, 이 五[오]지역의 조직체를 연합 통일하는 것이 제 二[이]단이니 알아 듣기 쉽게 말하면 독립 운동 기간 중에는 이 五[오]지역을 대한 민국의 영토로 보고 거기 거주하는 동포를 국민 전체로 보아서 그들이 납세로 재정적 기초를 삼고 동시에 그들에게 교육과 산업의 발전을 주어 문화력과 경제력을 증진함으로 행정의 목 표를 삼자는 것이다. 이리함으로 三[삼]백만재의 동포는 귀의할 바를 얻어 문화력과 부력을 증진하면서 매년 매인 一, 二[일,이]십원의 납세로 능히 임시 정부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니, 이렇게 하면 독립 운동이 얼마를 끌더라도 임시 정부 유지가 어렵지 아니할 뿐더러 五[오]지역 동포의 문화와 부가 향상하면 할수록 정부의 활동 능력이 증대될 것이다. 그런데 사실상 五[오]지역 재류 동포는 벌써부터 각각 조직이 있었고 그 지도자가 곧 임시 정부의 각원들이니, 현재 상해에 모여 있는 민족 운동의 수령들만 일심하여서 분공 합작(分工合作)하면 이것은 충분히 될수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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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 이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앞서 말한 五[오]지역에는 수도라고 할 만한 중심 지구를 택하여 그것을 정신·정치·교육·산업의 중심을 삼고, 될 수 있으면 이 五[오]지역 재류 동포 전체의 수도라 할 만한 곳을 중국의 적당한 지역에 설치하여 문화뿐 아니라 농·공·상·금융의 중심지를 삼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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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독립의 실현이 지연되는 경우에는 재외 동포가 유리민이 될 우려가 있 는 것을 예방하는 동시에, 각국에 흩어져 있어 조국의 보호가 없는 동포로 하여금 정치적 경제적·정신적 원호를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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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 한족의 교육에 관하여는 도산은 서·북간도의 어떤 지방과 같이 전연 교육기관이 없는 데는 우리 자녀를 위한 학교를 세울 수밖에 없지만, 미주나 하 와이나 중국에도 개화지나 재류국의 교육 기관이 있는 데서는 그 교육 기관을 이용할 것이지 공연히 동포의 부담을 과중하게 하여서 우리 자신의 학교를 세울 필요가 없고, 다만 우리의 국어와 국사를 가르치는 기숙사를 설비하고 또는 본국으로서 나오는 청년을 위하여 재류국 대학에 입학할 준비 교육 기관을 세우면 고만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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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산업 정책에 대하여는 거주국의 정책에 순응 협력하면서 우리 민족의 부력을 증진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만주에 있어서는 중국의 요구가 농산물의 증산에있고 또 우리 민족의 장기(長技)가 농작에 있으니 재류 동포의 경지 획득을 용이케 하고 낮은 변리로 농상 자금을 얻은 편이를 강구하고 농사 개량을 지도하며 농산물 판매를 유리하게 하고 또는 농산·축산물의 가공 공업을 진흥시켜서 농민의 생활을 안전하고 윤택하게 하되 중국 정부와 교섭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집단 부락을 형성하여 도덕·지식·생활, 기타의 문화를 향상하면 재 류국 당국과 국민의 호감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우리 민족이 이렇게 발전함으로 농산물이 증가하고 납세액이 증가하고 농촌과 도시가 문화적으로 되어서 재류국원주민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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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양으로 십년 생취(十年生聚), 십년 교훈(十年校訓)을 함으로 재외 한족은 격세(隔世)의 감이 있도록 발전될 것이 아닌가. 이것은 우리 독립당이 三[삼]백 만이 된다는 뜻인 동시에 제 외국에 대하여서는 우리 민족이 문화국민·독립 국민이 될 자격과 능력을 실지로 보이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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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이번에 새삼스럽게 나온 의견이 아니라, 도산이 국내에서도 신민회를 통하여 주장하던 바요, 또 십년 전 망명할 때에도 청도 회의에서도 주장한 바였다. 그러나 경술년 합병으로부터 기미년 삼일운동에 이르는 십 년간 「나가자, 죽자」식으로 민력 배양이 등한시만 되었을 뿐 아니라, 무관 학교를 세운다(하와 이의 「산 너머」와 만주의 白米山[백미산]), 독립군을 수없이 조직한다 하여 민력은 더욱 소모되었다. 도산은 지나간 십년 간의 복철(覆轍)을 밟지 말고 이번 독립운동 개시를 기회로 「자가자, 죽자」대신에 「나갈 준비를 하고 죽을 수 있는 준비를 하자」는 것을 상해에 모인 영수 일치(領袖一致)의 의사로 동포에게 표시하자는 것이 도산의 열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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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자기의 신념을 자기 개인의 명의로 발표하기를 원치 아니하였다. 세월이 오래 걸리더라도 그것을 여러 동지 전체의 이름으로 발표되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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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오직 도산의 겸손만이 이유가 아니요, 발표된 남의 의견에 찬동하기를 싫어하는 우리네의 심리를 고려함이었다. 이것은 애국가의 작자가 자기임을 표시 아니하는 것과 같은 심리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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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독립 운동 방략도 실상은 자기가 작자이면서 이것을 스스로도 말한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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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 말한 것이 그 실은 독립 운동 방략의 요점이었다. 근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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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약술할 국내 연통제(聯通制)와 국제 선전 방략은 가장 직절(直節)한 듯 하면서도 그 실은 二[이]차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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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통제라는 것은 국내 각도 각군에 임시 정부의 연락원을 두는 것이니, 이것은 임시 정부의 의사와 행사를 국민에게 널리 알리는 제도였다. 그 요령은 각군에 군감일인을 비밀히 택하여 그로 하여금 군내 각 면 각 리의 주요인물에게 의사를 소통케 한다는 것이었다. 국내 동포가 일본의 보도 제한 하에 다만 임시 정부의 동향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세계 정세를 모르니 이 연통제를 통하여 국민에게 바른 인식을 주는 동시에 항시 서로 연락함으로 일단 일이 있는 때에는 일영지 하(一令之下)에 전 국민이 동원할 수 있는 준비를 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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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임시 정부와 국내의 전 국민과 연결하는 조직을 二[이]차적이라고 하는 뜻은 다름이 아니다. 첫째로 일본의 경찰 하에 이 조직이 방방 곡곡에 보급되기가 어렵고, 둘째로 설사 일시 보급이 되더라도 오래 계속하기가 어려울 것이며 다수의 희생자를 내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불원한 장래에 제이차 삼일 운동과 같은 전 국민적인 운동이 일어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아니하면 이것은 다만 일시적인 훈련에 불과하기가 십중 팔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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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렇다고 이 연통제를 아니 실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강화 회의의 결과로 국제 연맹이란 것이 새로 생기고 민족 자결의 원칙에 의하 여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 등 신흥 국가가 연달아 일어나게 되매 이러한 세계 정세도 여실하게 국민에게 알리고 싶었고, 또 독립운동의 방략도 주지케 하고 싶었으며, 또 혹시나 근간에 무슨 기회가 있어도 하는 희망적 관측도 없지 아니 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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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할 말이어니와, 이 연통제만은 수령들이 흥미를 끌어서 많이 진전되었 으니, 이종욱(李鍾郁)사(師)같은 이는 국내에 잠입하여 경기 이남에 연토제를 실시하다가 중형을 받은 공로자였다. 《獨立新聞[독립신문]》또 이 연통제망을 통하여 국내 넓은 지역에 배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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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연통제망을 조직하는 데도 많은 인물이 필요하였다. 첫째로 그는 그 지역에서 신임받는 인물이라야 하겠고, 둘째로는 중형을 각오해야 하겠고, 셋째로는 적의 경찰망을 숨어 다닐 만한 기민이 있어야 하겠고, 넷째로는 적의 경찰에 붙들리더라도 입을 봉할 용기가 있어야 하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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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통제 관계자의 희생을 방지하기 위햐여는 어느 군의 군감은 옆 군의 군감이 누구인 줄을 모르고, 이 모양으로 서로 직계 상급 간부 밖에는 모르게 되어 있었으며 만일 군감 기타의 , , 인원에 사망·검거, 기타의 고장이 생길 때에는 자동적을 그 승계자가 있도록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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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신뢰할 만한 인재가 많았던들 연통제는 더 큰 효과를 거두었을 것이지마는 불행히도 이러한 혁명가적 인재를 구하기가 어려웠었고, 또 임시 정부 부내에서까지 연통제는 비밀히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어 놓고 널리 인재를 구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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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국내에 대한 정책으로는, 동지를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적의 행정 경찰 지관에 들어 가게 하는 것과, 이 모양으로 일본에 협력을 가장하는 동지를 택할 것도 있었고, 매년 一,二[일,이]차 폭탄이나 소규모의 시위 운동 같은 것으로 국내 동호의 독립의식을 일깨울 것 등이 있었다. 이 일을 위하여서는 상해에 폭탄 제조 기술을 전습하는 처소도 있었고, 결사적인 동지의 결속도 있었으니, 이 일은 주로 김구가 중심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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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선전에 대하여서는 국제 연맹 소재지인 제네바에 대사를 주재시켜서 끊임 없이 한민족의 독립 의사와 일본의 폭정과 야심을 폭로할 것을 주로 삼고, 미국과 중국과 소련에 대하여서도 임시 정부의 신임장을 가진 대사를 주재시켜서 적절한 선전과 외교 행동을 할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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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에 관하여서는 제일착으로 제네바에 사절을 보내기로 하여 인선까지도 되었었으나 경비로 인하여 천연되다가 독립 운동 제이년인 경신년 가을에 혼춘(琿春)에 일어난 일본군의 한족 학살 사건에 대한 대일 선전론으로 하여 독립운동 방략 전체가 휴지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다음에 말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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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 이상의 내용을 가진 독립운동 방략이 민국 二[이]년 一[일]월의 국무 회의에서 축조 심의한 결과 만장 일치로 가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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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로 임시 정부는 준거(準據)할 정책과 일과(日課)할 사무가 많아져서 활기를 띠게 되었다. 국내 연통제의 실시 재외 五[오]지역의 단결 사료 편찬 등 사무가 날로 진행되었다. 이종욱 사(師)등은 연통제 실시를 위하여 국내로 잠입하고 안동현 봉천 등지에는 교통부의 연락부가 생기고, 국내에도 요처 연락부가 생겼다. 북간도를 위하여는 안 태국이, 서간도를 위하여는 백영엽(白永燁) 이 각각 조직과 연락의 사명을 띠고 출발하기로 되었는데, 안태국을 특히 북간 도로 파견하게 된 것은 이유가 있다. 북간도는 가장 재류 동포가 많은 지역일 뿐만 아니라 가장 당파 싸움이 많은 곳이었다. 따라서 통일을 위하여 가장 난처한 곳은 하와이를 제하고는 북간도였던 것이다. 이 군웅 할거(群雄割據)하는 북간도에 가서 군웅을 조화할 인물은 오직 동오 안태국(東吾安泰國)뿐이라고 여러 영수의 의견이 일치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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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력이 있는 인물, 이것은 다수인이 하는 사업에서는 중요한 존재이다. 인물 중에는 투쟁다가 있고 모략가가 있고 조화가가 있다. 투쟁가와 모략가만 있으면 세상은 살풍경이 되고 신경쇠약만이 되고 만다. 조화하는 인물이 있고서야 비로 서 협화가 생기는 것이다. 조화가는 표면에 이름이 나지 아니하나 그 중요성은 벽돌집의 양희와 같다. 그런데 이 조화를 능히 하는 인물은 구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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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누구에게나 신임을 받고 친애를 받으면서도 싸우는 쌍방의 심경을 통찰하는 명철이 있어야 하니, 단적으로 말하면, 쌍방 이상의 덕과 지를 겸비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물을 가진 나라는 천행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안태국은 당시에는 이러한 인물이었다. 「동오」라 하면 누구의 마음이나 따뜻하여 지고 윤택하여졌다. 그는 신민회 사건으로 악형을 당하고 또 六[육]년 옥고에 안면이 찌그러지고 초췌하였으나, 그가 가는 좌석에는 화기가 돌았다. 그는 침묵하여 말이 적은 사람으로 전연 호식과 모략이 없었고 오직 겸허와 충성이 있었다. 어려운 중에서도 어려운 북간도 통일 문제를 해결한 뒤에는 러시아령이나 하와이에도 갔을 것이요, 그가 가기만 하면 반드시 화합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데 불행히도 동오는 북간도로 향하여 출발할 기일 직전에 병들어 도산의 헌신적 인 간호가 있었으나 二[이]년 五[오]월에 마침내 별세하고 말았다. 그의 유해가정안사로(靜安寺路)의 외국인공동 묘지에 묻히던 날, 생해에 있던 모든 영수들은 물론이어니와, 거의 거류민 전부가 회장(會葬)하여 느껴 울어서 영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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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렇게 많이 울어 보낸 영결은 드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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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오의 죽음은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큰 손실이라고 도산은 통곡하였다. 도산은 성나거나 슬퍼하지 아니하는 사람이언마는 동오를 위하여서는 아낌 없이 울었다. 도산은 우리 운동에 이러한 인물의 필요를 누구보다도 깊이 느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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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감정이란 것은 우리나라 사람이 가는 곳마다 있었다. 상해에서도 기호파 라, 서북파라, 교남파라 하는 감정의 암류가 없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동오만은 평양 태생이언마는 기호인은 기호인과 같이 보고, 교남인은 교남인과 다름 없이 통정하였다. 그는 전연 내라는 것과 사사로운 것이 없는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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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서도파의 두목이란 말을 간 곳마다 들었다. 그러나 사실상 상해에 가장 개인적으로 다산을 애모한 사람 중에는 경상도 사람인 윤현진과 전라도 사람인 나용균이 있었고, 도산을 배척한 사람 중에는 다수의 평안도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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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사람을 처음 대할 때에 그의 고향을 묻는 일이 없었건마는 그를 서도 지방 열이 있는 자라고 참무(讒誣)하는 이가 있는 것은 불행한 일이었다. 미주에 있어서도 국민회와 흥사단에서 가장 도산의 심복이 된 이는 송종익이어니와, 그는 대구 사람이요, 또 평생에 도산을 사랑하여 《新韓民報[신한민보]》의 주필이 된 홍언(洪焉)은 경기도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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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오의 죽음으로 통일 대업에 큰 지장이 생긴 것은 대치할 길이 없는 일이어니와, 독립운동 방략은 착착 실천의 궤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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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도 국무총리로 시무하였고, 다른 두령들도 유쾌하게 협력하여 가는 모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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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이제는 국무총리 대리도 아니요, 내무총장도 아니었다. 노동국 총판이 된 그는 책상 하나를 차지할 필요도 없어서 야인(野人)이 되고 말았다. 도산은 자기의 이 자유로운 처지를 기뻐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임시 정부로서는 한낱말석각료로 절반은 정부 밖에 있는 자격으로 여러 동지 영수들의 새에 서서 알선할 수도 있었고 또 연통제라든지, 상해 주재 외국 영사와의 교제(이것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아니할 수 없었다)라든지, 이러한 잡무를 맡아 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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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九二一[일구이일]년에 도산은 미국의원단과 회견하라는 임시정부 대표의 사명을 띠고 백영엽과 황진남(黃鎭南)을 통역으로 대동하고 북경에 왔다. 백영엽은 남경에서 신학을 배워 목사의 자격이 있고 중국어에 능하고 애국심과 정이 감이 강하여 평소에 도산의 신임을 받는 한 사람이요 흥사단의 다우였다. 후에 백영엽은 서간도 방면 동포를 지도할 임무를 도산에게서 받아 가지고 만주에 들어 갔다가 일본 관헌에게 체포를 당하여 복역하고 출옥하자마자 곧 또 봉천으로 가서 교회 일을 보았으니, 그의 사명을 잊지 아니한 것이었다. 황진남은 도산의 친우의 아들로서 어려서 북미에 가서 미국에서 교육을 받아 영어에 능하여 서 캘리포오니아 대학 재학중임에도 불구하고 도산이 기미년에 상해에 올 때에 수원으로 대동한 사람으로, 도산이 상해에 있는 동안 통역을 맡아 하여서 도산의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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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북경 육국 반점(六國飯店)에서 미국 의원단과 회견할 기회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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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엽의 추억에 의하면, 그들 사이에는 이러한 담화가 있었다. 도산이 의원 대표단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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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의원들은 의외의 질문에 접하여다 하는 듯이 자기네끼리 서로 돌아 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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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나쁜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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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도산은 고개를 끄덕하며, 과연 그러하오 정치가 좋지 『 . 못하기 때문이요. 그러나 현재의 중국의 정치가 좋지 못한 것이 무엇 때문이라고 보시오?』
422
『글쎄요, 우리는 단기 여행자니까. 당신은 중국 혁명후의 정치가 좋지 못한 이유가 어데 있다고 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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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후의 중국 정부와 지사들은 좋은 정치를 하려고 애를 쓰나 밖에서 그것을 방해하는 자가 있소. 중국이 힘있는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아니하는 나라가 있기 때문이요.』
426
도산의 이 말에 미 의원단은 수긍하였다.
428
『아직 독립국가인 중국도 이러하거든, 아주 제 정치력을 잃어 버린 우리 한국 이야 어떠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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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소, 알았소. 아세아를 구할 길이 무엇인지를 알았소. 고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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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도산과 악수하였다. 백영엽은 이날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암암하고 귀에 쟁쟁하다고 한다. 바로 이즈음의 일이었다. 모씨가 북경에서도산을 만났을 때에 하루는 도산이 서산 구경을 가자고 하였다. 도산은 친구가 자기를 찾아 오면, 극진한 정성으로 그를 대우하되 돈과 시간을 아낌이 없었다.
432
두 사람은 인력거를 타고 서직문(西直門)을 나서서 만수산으로 향하였다. 북경 시내 가로상에서도산을 힐끗 보고는 옆골목으로 피하는 몇 사람을 보았다. 도산은 일일이 그들을 향하여서 손을 들었다. 저편이야 받거나 말거나 이편에서는 인사를 한다는 도산의 예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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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나중에 모씨에게 일일이 그들의 이름을 말하였다. 그리고 탄식하였다.
434
만리 타향에서 고국 동포를 만나면 서로 피하는 것이 우리 동포라 하고 도산은 길게 탄식하였다. 그들은 대개 도산에게 한두 번 신세를 진 사람이언마는 지금은 도산의 반대파로 저처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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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산을 볼 욕심은 없다는 모씨의 말에 도산은 바로 와불사(臥佛寺)로 가서 유명한 백송(白松)과 천지(泉地)와 대리석 와불(臥佛)을 보여 주고 옥천산(玉泉山)도 그냥 지나서서산에 이탁(李鐸)을 찾았다. 이 탁은 신민회적부터의 동지요, 만주에서의 독립 운동에 일생을 마친 지사다. 그는 또 상해에 왔을 때에 흥사단에 입단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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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밑 작은 주막거리의 더 작을 수 없는 중국 가옥에 이 탁은 중국복을 입고 있었다 그 부인과 딸도 . 중국인으로 차리고 있었다. 지사의 빈궁한 망명 생활이었다. 이 탁은 도산과 모씨를 맞아 들여서 호국수와 배갈로 점심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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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키가 크고 뚱뚱하고 눈이 가늘고 얼굴이 검고 말이 적고 외양이 심히 온후하였다. 그러나 도산의 평에 의하면, 그는 일신이 도시의(義)요, 담(譚)이었다. 그는 동지를 지극히 경애하고 무슨 일에나 저를 내세우는 일이 없었다. 그가 유자(孺者)의 가정에서 생장한 것은 그의 독실(篤實)하고 예절답고 근엄한 태도로도 알 수 있었다. 도산은 매양 돌아 간 동오 안태국과 아울러 동우 이 탁을 찬양하였다. 장차 홍사단의 감독으로 청년 수양의 전형이 될 인물이라고까지 격상하였다. 그러나 불행히 그는 만주에서 병사하였다. 동우의 부보(訃報)를 들은 도산은 동오적과 같이 애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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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에는 웅희령(熊希齡)의 향산(香山) 모범촌이 있다고 하나 날도 저물고 또 동우를 만난 것으로 만족하여서 저녁 녘에 돌아 올 길을 잡았다. 해전(海甸)에서는 죽림 김 승만(竹林 金承萬)의 은거를 찾았다. 죽림은 예수교의 장로로, 역시 신민회의 동지요, 도산의 지우였다.
441
도산은 그후에 오래 북경에 머물렀다. 영환공우(瀛寰公寓)라는 셋방 빌리는 집에 일 숙박 二[이]십 五[오]전을 내고 있었다.
442
도산이 어디 있으나 그렇지마는 북경에 있을 때에 많은 사람이 찾아 왔다. 늙은이도 있고 젊은이도 있었으나 젊은이가 더욱 많았다. 도산은 누구가 찾아 오거나 만나보고, 만나면은화하고 공손하게 또 친절하에 접대하였다. 찾아온 사람이 무슨 문제로 가르침을 청하기 전에는 도산은 결코 훈계하거나 충고하는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무리 어리석은 말이라도 끝까지 다 들었고, 남이 말 하는 중동을 꺾는 일이 없었다. 도산은 모든 사람의 개성을 존중하였다. 누구나 의 처지에 대하여 동정하였다. 결코 누구에게 핀잔을 주는 일이 없었다. 비록 어린 사라이라도 하고자 하는 말을 다할 기회를 주었다. 남이 하는 말에 대하여서 그는 경청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다가 남이 하는 말을 다 들은 뒤에 도 산 자신의 의견을 말하였다. 그때에는 성의를 다하여 진실한 의견을 말하였고 조금도 저편의 뜻을 받아 들여 비위를 맞추는 일은 없었다. 안될 일은 안된다고 하고, 아니 믿는 말은 아니 믿노라고 바로 말하였다. 「글쎄」같은 어름어름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말을 도산은 쓰는 일이 없었다. 그의 말은 언제나 분명하게 긍정이거나 부정이었다. 「그렇소」거나 「아니요」였다. 「글쎄」는 없었다.
443
도산을 찾아 왔던 사람은 반드시 무엇을 얻어 가지고 갔다. 충고도 훈계도 없었건만 회화 중에 언제인 줄 모르게 돋는 자에게 무슨 소득을 주어서, 한번도 산을 만나고 나면 뒤에 잊히지 아니하는 무엇이 남았다. 그것은 그의 모든 말이 정확한 지식과 움직임이지 않는 신념과 또 한마디 한 마디가 애국 애인의 진정에서 나오는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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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 남개 대학(天津南開大學)에서 그 총장 장 백령(張伯岺) 박사와 회견한 일이 있었거니와, 장 박사는 그 후 조선 사람을 대하면 그대의 나라에 안 모라는 좋은 지도자가 있으니 부럽다고, 도산의 인격과 식견을 찬양하였다.
445
도산은 결코 누구를 이용하는 일을 아니하였다. 도산 이 북경에 있을 때에 모 씨가 도산을 위하여 거액의 금전을 구하여 주마고 말하였다. 그 모씨는 대단히 도산을 숭배하는 사람이요, 도산에게 자금만 있으면 나라 일이 잘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또 실상 그는 수단이 놀라와서 몇 만 몇 십만의 돈은 수월하게 만들기도 하는 위인이었다. 그러나 도산은 그가 정당한 일을 하는 인물이 아 니요, 일종의 협잡군인 줄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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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일은 신성한 일이요, 신성한 일을 신성치 못한 재물이나 수단으로 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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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하기 때문에 도산은 어떤 재물의 출처를 적실히 알기 전에는 그 재물을 받지 아니하였다. 도산이 레에닌 정부의 돈을 받기를 반대한 것도 이 때문이요, 또 독립 운동 당시에 도산이 부자를 협박하거나 꾀어서 돈을 내게하는 일을 종 시 반대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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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의 신념에 의하면, 민족 운동을 하는 자가 도덕적으로 시비를 들어서는 아 니 된다. 동포가 백만 대금을 의심 없이 맡길 만하고 과년의 처녀를 안심하고 의탁시킬 인물이라야 비로소 동포의 신임을 받고 또 모범이 될 것이다.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때에 티끌만큼이라도 부정하거나 불순한 동기나 순단이나 재물이 섞여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었다.
450
도산은 중국말고 문필에 능한 유기석(柳碁石)을 데리고 길림(吉林)으로 갔다.
451
그가 길림으로 간 목적은 대독립당 강화하였다. 도산의 의향으로는, 길림에 만주 지역 내의 중요한 독립 운동자와 될 수 있으면 국내에서도 몇사람 오게 하여 한 자리에 같이 모여서 독립 운동의 금후방침을 토의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병인년 一[일]월 二[이]십 七[칠]일 길림 최명식(崔明植)의 집에서 김동삼(金東三)·오동진(吳東振)·최명식 등 만주의 거두 二[이]백여 명이 회합하여 회의를 진해하는 도중에 중국 경관과 일본 경관이 돌연히 회장을 포위하고 도산 이하 회의 중의 모든 지사를 포박하여 길림 경찰청에 구금하였다. 일본 영사관에서는 이것을 공산당의집회라고 중국 관헌에게 무고한 것이었다. 중국 명사 중에도산의 신분을 증명하는 사람이 있어 곧 일본 관헌에게 넘기지는 아니하고 약 이십 일간 유치되엇다가 二[ ] 중앙 정부에서 명령도 있어서 일동이 석방되었다. 도산이 길림에 독립 운동의 거두를 모은다고 첩보가 일본 관헌의 귀에 들어 가서 조선 총독부에서는 경시(輕視)이 하 많은 경관을 길림으로 파송하여 도산 이하를 일망 타진하려던 것이었다. 도산은 그후에도 수개월 길림에 머물렀었다.
452
도산이 길림에 모인 동지들에게 권고하여 말한 것은, 첫째로 통의부(統義府)·정의부(正義府)·의군부(義軍府)등 여러 기관을 통일할 것, 둘째로 운동이 방향을 적은 무력 저항(武力抵抗)에서 대규모 독립 전쟁의 준비로 전환할 것, 그러 하기 위하여 아직은 우리의 조아(爪牙)를 감추고 재류 수백만 동포의 부력과 문화력을 증진할 것 등이었다. 그러나 이미 파벌이 생긴 지 오래고 당쟁이 성습하여서 일조 일석에 통일이 되기는 어려웠으나 이것이 미구에 조선 혁명당으로 전 만주가 통일될 기운을 조성하였다.
453
도산은 그해 봄 땅이 풀리기를 기다려서 경박호(鏡拍湖)부근을 답사하였다. 그는 경박호의 풍경을 탄상하고 그 부근의 땅의 맛과 물의 맛이 다 살기 좋은 곳이라고 보아서 흙의 간색과 암석이 표본을 몇 가지 채취하여 가지고 길림으로 돌아 왔다.
454
도산은 길림에서 북경 남경을 거쳐서 상해로 돌아왔다. 북미의 국민회와 홍사단이 도산이 오랫동안 떠나 있는 것과 삼일 독립 운동에 낙망한 것으로 사기가 저상하여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서도산을 기다리고, 또 도산의 편으로 보더라 도 대독립당의 견지에서나 해이 이상촌 건설의 계획으로 보거나 북미의 여러 동지와 직접 만나 볼 필요도 있어서 도산은 마닐라를 거쳐서 미국으로 갔다. 후에도산은 필리핀을 본 감상을 이렇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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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마닐라 항구에 들어 가니 경관이나 해관 관리나 모두 필리핀 사람이요, 미국 사람은 승객뿐이었다. 재판사나 검사가 다 필리핀 사람들이었다. 미국사람이 있는 것은 오직 총독부뿐인 것같이 보였다. 필리핀은 국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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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양으로 도산은 미국의 필리핀을 통치하는 모양을 말하고 필리핀 민족에 관하여는 향락적이요, 사치하고 나타하여서 독자적으로 분투하는 기상이 적은 듯하였으나, 이것은 기후 풍토의 영향에도 관계되겠지마는 결국은 국민의 자각 이 부족함이 주된 이유였을 것이라고 유감의 뜻을 보였다.
457
미국으로 가서 약 一[일]년 간 국민회와 홍사단을 위하여서 쉴새 없이 도산은 노력하였다. 첫째로 도산이 재류 동포에게 역설한 것은, 독립 운동은 장원한 것 이니 이번의 실패로 낙심하지 말라는 것과, 더욱더욱 분투 노력하여 각각 부력 을 증진하고 인격을 수양하며 미국인에게 호감을 주도록 하는 것이 당면의 독립 운동이라는 것과, 국민회의 빛난 역사를 지켜서 결코 결코 분열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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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는 벌써 미국에도 공산주의 사상도 생기고 또 언제나 우리 민족이 가는 곳에는 불행하게도 반드시 따라 가는 파벌 당쟁의 퍠단이 하나 둘만 아니라 셋, 넷 여럿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 혹은 지금까지 미국에 있던 자가, 또는 새로 본국으로부터 나온 자가 저마다 두목이 되려고 하여서 소군 소당(小群小黨)을 만들어서 국민의 통일을 교란하였다. 무엇을 위한 파쟁인지 알 수 없는 파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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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도산이 미국에 돌아오매 북미 동포는 도산을 믿고 도산의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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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 다시는 북미를 떠나지 마시오. 선생님이 떠나시면 또 우리 동포들의 마음이 떨어지고 헷갈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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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동포의 눈물겨운 진정이었다. 홍사단에는 더욱 어려운 문제가 일어났 다. 그것은 「이 마당에 수양은 다 무엇이냐. 있는 힘을 다해서 곧 독립 운동을 시작하자」하는 일파가 일어난 것이었다.
462
삼일 운동이 일어나도 흥사단은 단으로서는 나서지 아니하였다. 단우들이 개인으로 나섰다. 도산을 비롯하여 미국에서나 상해에서나 다수의 흥사단우가 요인으로서 독립 운동에 힘을 썼다. 그러나 흥사단으로서는 그 비정치성을 끝까지 지킨 것이었다. 그래서 흥사단의 기본 적립금과 준비 적립금에는 손을 대지 아 니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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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사단의 참 주지를 깨닫지 못한 단우의 일부는 이것을 불만히 여겼다. 그들은 정치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할 것이라고 주장하여서 자칭 신파라 하고, 흥사단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다수를 완고한 수구파라 하였다. 그들의 생각에 수양이란 유치한 청소년이나 몽매한 무식장이들이 할 일이요, 자기네 모양으로 대학을 나온 고급 지식층에는 관계 없는 일이라 하였다. 그들은 인격 수양의 필요를 감득치 못한 것이었다.
464
도산은 그들에게 대하여 일찍 상해에서 장문의 서한을 보낸 일이 있었다. 그 서한의 내용은 우리 민족의 유일한 목적은 완전한 독립 국가를 건설하여 이것을 빛나게 유지 발전함이니, 이 밖에 다른 목적이 있을 수없다 하고, 그러하기 위 하여서 우리는 건전한 인격을 수양하고 신성한 단결을 조정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고는 저것이 있을 수 없다는 인과 관계를 역설하고, 그러므로 우리 흥사단의 인격·단결·수양 운동이 곧 유일 무이한 독립 운동이요, 또 모든 정치 운동의 몸체라고 하였다.
465
「수양 즉 독립」이라는 도산의 근본 사상은 이 서한에서 가장 분명하게 역설되었다. 이 서한이 一九三七[일구삼칠]년 동우희 사건 검거 중에 발견되어서 동 우회 유죄의 가장 큰 증거물이 되었던 것이다.
466
도산은 독립 국가의 건설을 즐기어서 가옥 건축에 비겼다. 이 비유에는 두 가지 뜻이 있었다. 하나는 기초 공사와 상부 건축의 비유로서, 기초를 잘 다지지 아니한 건축은 오래 못 간다는 것으로, 여기 기초라는 것은 수양된 국민, 즉 국민의 자격을 구비한 국민을 이름이요, 상부 건축이라는 것은 모든 정치적 시설과 행위였다. 구한국이란 계국이 무너진 것이 기초가 부패하고 약한 때문이니 새 나라를 무너진 기초 그대로의 위에 건설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홍사단 약법의 목적에 「우리 민족 전도 대업(前途大業)의 기초를 준비함으로 목적함」한 이 「기초」란 그것을 이름이다. 우리 민족이 도덕적으로는 거짓과 속임이 없어서 안으로는 동족끼리, 밖으로는 열강과 딴 민족에게 신임을 받을 만하고, 지식적으로 국가의 정치경제·산업·교육·학술 각 부문을 담당할 만한 능력을 갖추도록 많은 개인이 수양되고, 또 그것만으로는 아니 되니 이러한 유력한 개인들이 신성하게 뭉쳐서 민족의 중심이 될 단결을 이룬 뒤에라야 완전한 독립이 될 수 있고 또 그 독립이 풍우에 흔들리지 아니하는 반석 위에 영원히 설 수 있다는 것이다.
467
건축에 대한 도사의 비유의 둘째 뜻은 건축과 재목에 관하여서였다. 집을 지으 려면 설계와 장색(匠色)이 필요하거니와, 그보다 더욱 요긴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곧 재목이다. 재목이 없이 아무리 설계를 잘하고 장색이 팔을 부르걷고 덤비더라도 쓸데 없는 것이다. 우선 재목을 구하여야 한다. 있는 재목을 구할 것 이 없으면 씨를 심어 조림(造林)을 하여야 한다.
468
「방금 급한데 그것을 언제?」라고? 재목은 없더라도 우선 짓자고? 이것은 안 될 말이다. 오직 공론에 불과하다. 만일 백년을 자란 뒤에야 비로소 재목이 된 다 하면 오늘 심은 나무는 백년 후에는 재목이 될 것이다.
470
하고 오늘도 아니 심으면 백년 후에도 재목은 없을 것이다. 영 아니 심으면 천 년 후에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집은 못 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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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흥사단은 조림이다. 국가를 건설하고 운용하기에 필요항 재목을 준비하는 데가 곧 흥사단이다. 여기는 어떤 유력자가 하나 있어서, 즉 대 선생이나 대세력 가가 하나 있어서 인재를 양성하는 데가 아니라, 수양의 필요를 깨달은 동지들 이 모여서 한 약법을 작정하고 거기 비추어서 서로 수양하고 서로 연마하는 기관이다. 여기는 주인도 없고 중심 인물도 없다. 단우 저마다 주인이요, 중심 인물이다. 그중에 유덕(有德)한 사람을 중망(衆望)에 의하여 중심 인물로 할 수도 있겠지마는 그것은 오직 모범으로 세우는 것이지 그에게 권력을 주는 것이 아니다. 흥사단을 다스리는 것은 오직 흥사단의 약법과 거기 의하여 선거된 임원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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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흥사단의 주지(主旨)를 재미 동지에게 다시 설명하고 강조하였다. 언제 도산이 떠나더라도 그 때문에 단의 동요가 있지 않도록 동지가 서로 다스리는 정신을 역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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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국민회와 흥사단이 다 안돈된 양으로 도산은 다시 미국을 떠나서 상해로 왔다. 도산이 그때 그 부인과 자녀와 한 작별은 마침내 영결(永訣)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번 미국에 왔던 기회에 막내 삼남을 얻었으나 평생에 부자(父子)대면이 없고 말았다.
474
송종익(宋鐘翊)은 도산이 마지막 미국에 가 있는 동안에 가정 생활에 대하여서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었다.
475
도산 내외는 결코 금실(琴瑟)이 좋은 사이는 아니었다. 도산 부인은 도산이 가 사를 돌보지 아니하는 것을 원망하였다. 세상이 보기에 도산은 높은 지도자이었 으나 부인이 보기에는 결코 좋은 남편은 아니었다.
476
마지막 미국에 체재하는 동안 도산은 그 부인을 위하기에 많이 애를 썼다. 부인의 옷도 사 주고 또 동부인하여서 다니기도 하였다.
477
도산은 그 부인을 가엾이 생각하였다. 빈한한살림에 자녀를 혼자 맡아 길렀고, 가정의 낙은 볼 기회가 극히 적었다. 지사(志士)의 아내란 다 그러한 것이 지마는 아내가 그 남편의 사업을 알아 보지 못할 때에는 그것은 불평이요, 비극일 수 밖엔 없었다. 그러나 도산 부인은 남편을 떠난 가난한살림살이에 오륙 남매를 그쪽이 길러내었으니 그는 현부인임에 틀림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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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대독립당과 이상촌과 흥사단 원동 지부의 발전의 계획과 수만금의 동지 의 출자(出資)를 안고 상해로 돌아왔다. 그러나 도산의 뜻을 펼 기회는 막혀 버렸다. 이른바 만주 사변이 일어나서 비단 만주뿐이랴, 관내(關內)에 까지도 일본의 세력이 뻗고, 곧 이어서 일본은 상해에까지도 출병하게 되니 도산의 계획은 베풀 곳이 없었다.
7. 第七章[제칠장] 被四殉國時代[피사 순국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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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民族精神 [민족정신]의 守護者 [수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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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九三一[일구삼일]년 四[사] 월 二[이] 십九[구] 일, 의사 윤 봉길(尹奉吉)에서 일본군 최고 지휘관 백천의 측(白川義則) 대장 등을 폭살하는 사건이 생기매 일본 관헌은 조계(租界)관헌에 교섭하여 한국인대 수색을 행할 새도산은 불행히 체포되어 경성(京城)으로 압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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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마침 도산의 아는 사람의 아들인 어떤 소년의 생일이었다. 도산은 폭탄 사건 발생을 미리 알지 못하고 그 소년에게 생일이 되면 선물을 선물을 준다고 약속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선물을 가지고 그 아는 이의 집을 찾았다. 거기서 잡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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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상해에 있는 일본 영사관 경찰서에 약 三[삼]주일간 유치되었다가 五 [오]월 하순에 배로 인천에 상륙하였다. 당일 인천 부두에는 신문 기자·사진반·친지 등이 많이 출영하였으나 수명의 사법 경관의 옹위(擁衛)를 받은 도산은 거무스름한 스프링을 입고 자갈색 중절모를 쓰고 포승만은 없이 경계 엄중한 속으로 묵묵히 걸어 자동차에 올라 곧 경성으로 향하였다. 신문사 사진반의 건판은 전부 압수를 당하였다.
484
도산은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유치되어 취조를 받았다. 치안 유지법 위반(治安維持法違反)이 그 죄명이었다.
485
도산이 일본 경찰에 체포된 기사가 생해의 신문에 나매「정치범을 잡혀 보내느냐」고 중국 인사들이 항의하였으나 쓸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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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든 도산은 一[일]개월여의 취조를 받고 송국되어서 서 대문 감옥으로 넘어 갔다. 도산이 감옥으로 가는 날 새벽에 재판소 뜰에는 남녀 동지와 친지등 백명 가까운 사람이 모였다. 이때에는 이러한 자리에 오는 것도 위험한 일이었다. 이 일 하나만으로도 경찰의 요시찰인 명부에 오를 만하기 때 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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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일심(一審)에서 四[사]년의 형을 받았으나 상소권을 포기하고 복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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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재판중의 모든 비용은 김성수(金性洙) 등 친우가 몰래 대었고, 서대문 감옥재감 중인 그의 옛 친구요, 동지인 이강(李堈) 부처가 일부러 감옥 옆에 집을 잡고 살면서 조석을 들였다. 도산은 약 一[일]년 후에 대전 감옥으로 이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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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이 형기 四[사]개월을 남기고 가출옥이 된 것은 一九三五[일구삼오]년 봄이었다. 대전 복역 중에 도산은 소화 불량증이 심하여졌다. 그는 그물을 뜨고 대그릇을 결었다. 날마다 자기의 감방을 깨끗이 소제하기로 유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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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년 출생인 도산이 상해에서 잡힌 것이 五[오]십四[사]세, 대전 감옥에서 나온 것이 五[오]십八[팔]세, 서대문 감옥에 들어 갔다가 병으로 경성 대학병원에 나온 것이 六[팔]심세, 다음해 四[사]월에 그 병원에서 별세한 것이 무인년 환갑인 六[육]십세, 다음해 四[사]월에 그 병원에서 별세한 것이 무인년 환갑인 六[육]십 一[일]세, 향년(享年)이 만 五[오]십 九[구]세 五[오]개월이었다. 최후로 본국의 산천을 비교적 자유로 바라보기만 二[이]개년이었다. 도산 이 대전 감옥에서 나온 때는 추웠다. 상해에서부터 도산의 사랑과 신임을 받던 유상규 의사(劉相奎醫師)는 자기가 강사로 시무하고 있는 경성 의학 전문 병원에 병실을 잡고 도산을 그리로 영접하려 하였으나 웬 일인지 도산은 그 호의를 받지 아니하고 삼각정(三角町) 김병찬(金炳贊)의 여관에 투숙하였다. 출옥 당시에 그의 용모는 못 알아 볼이만큼 부었고 또 그 때문인지 전연 무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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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이 들어 있는 여관은 도산을 찾는 사람으로 현관에 신이 그득하였고 또 시골서 도산을 만나로 오는 사람으로 객실은 만원이었다. 《東亞日報[동아일보]》,《朝鮮日報[조선일보]》등 민간지가 있었으나 당시 경찰 법규상 가까스로 도산의 동정을 조그맣게 보도할 뿐이었지마는 도산 출옥의 보도는 전국에 전하였다. 신민회 시대 이래의 도산의 친지와 동지는 물론이어니와, 평소에 만나 본 일이 없는 사람도 경찰의 주목을 꺼리면서도산을 여관에 찾았다. 하루에도 五, 六[오,육]십 명, 어떤 날은 백여 명의 내객이 있었으나 도산은 일일이 접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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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관헌은 도산이 많은 사람을 접하는 것을 싫어하여 불근신(不謹愼)이라고 자주 경고하였다. 그들은 도산의 친근자에 대하여 도산이 먼저 경무국장을 만나 고 총독과 정무총감을 만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도산은,
493
『나는 일 없는 사람이니, 당국자와 면회할 필요가 없다.』는 말로 늘 거절하였다. 이것이 첫째로 일본 관헌의 감정을 상하게 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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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서울을 떠나 사백(舍伯) 치호(致鎬)의 집을 방문하고 잠시 용강 온천(龍岡溫泉)에서 정양하였으나 그리로 매일 다수의 방문객이 있어서 경찰은 그곳 여관에 투숙하는 객을 검문하여 도산을 찾아 온 사람이라면 무슨 트집을 잡아서 주재소로 호출하여 밤 깊도록 힐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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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강 온천에서 한 三[삼]십리 되는 곳에 있는 김씨의 집에서도산을 하루 저녁 초대한 일이 있었다. 도산과 수명의 친지는 세대의 자동차에 나누어 타고 김씨 가 사는 동리를 찾았다. 때는 석양녘, 어떻게 알았는지 길가에는 십수명씩 도산의 통과를 기다리는 무리가 많아서, 도산 일행이 탄 차는 십수차 정거하지 아 니치 못하였다. 군중 중에는 노인도 부녀들도 있었서 도산이 차에서 내리면 그 앞에 와서 절하고 눈물을 떨어뜨리는 이도 있었다. 도산이 다시 차에 올라서 멀 리 지나갈 때까지 그들은 꼼짝도 아니하고 도산의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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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김씨의 집에 닿을 때에는 수백 명의 촌민이 모여서 환영하려 하였으나, 주 재소 경관에게 해산을 당하여 집집에 쫓겨 들어가서 숨어서 담 너머로 도산의 얼굴을 한번 얻어 보려 하였다. 어떤 담 너모로는 수십 명의 머리로 조롱조롱 넘 겨다 보고 있어서 일본 경관의 질책(叱責)을 받았다.
497
그날 밤과 그 이튿날 김씨 집을 떠날 때까지 도산은 김씨 집 가족 이외에 어느 부락인과도 말 건네기를 금한다고, 이것은 평안남도 경찰국의 엄령(嚴令)이라고 일본인 순사부장이 도산을 찾아 와서 전하였다. 도산은 아무 말이 없었다.
498
도산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시찰하고 다음에 평안 북도를 돌았다. 간 데마다다 동포는 정성으로 이 민족적 위인을 환영하였으나, 일본 관헌은 도산이 민중에게 환영받는 것이 싫었다. 조선의 민심이 조선인에게로 돌아 가는 것을 막는 것이 합병 이후의 전통 정책이었던 것이다. 한국민족을 하여금 한국의 역사를 잊게 하고 조상을 잊게 하고 그 대신에 일본의 역사를 잊게하고 조상을 잊게 하고 그 대신에 일본의 역사를 제 역사로, 일본의 조상을 제 조상으로 하도록 조선인이 되기를 바란 것이었다. 실로 과부(夸父)의 망상이었다.
499
도산이 국내 순회 중에 일본 관헌은 여러 가지 제한을 더하였다. 첫째로는 도산의 말을 듣는 회식을 금하였다. 정주(定州)에서 약 五[오]십 명이 회식할 준비를 한 때에 이 二[이]십 명 이상 금지령이 내리기 때문에 식사를 두 곳에 나누어서 하는 희극이 있었다. 선천에서는 二[이]십인의 제한을 지키는 회식에까지도 경찰관이 입회(立會)가 아니라 좌회(座會)하였다. 신은주에서만은 도지사의 특별 허가로 백여 인의 환영 만찬과 일석의 강연을 허락하였다. 새성 인사들은 지혜로와서 각 가정에서 四,五[사,오]인씩 회식하기를 매일 삼차 수차로 一[일]주 일이나 계속하였다.
500
도산은 동포에게 폐가 되는 것을 근심하여 국내 순회를 중지하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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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강서 대보산(大寶山) 송태(松苔)에 집 한 채를 짓고 거기 숨어 버렸다.
502
그 집은 도산이 농가 건축의 한 개의 모범 시안(模範試案)으로 심혈을 경주하여 서 설계하였고, 친히 공사를 감독하였으나 목수 이장(泥匠)들이 잘 알아 듣지도 못하고 또 말을 듣지 아니하여서 퍽 고심하였다.
503
도산이 송태에 숨어 있을 때에도 일본 관헌은 늘 도산을 괴롭게 하였다. 거의 매일 경관이 올 뿐더러 도산을 찾아 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검문하였다. 그래서 도산의 얼굴을 한번 보려는 평양, 기타로서 오는 청년들은 일요일이나 휴일을 타서 대보산 등산을 핑계로 큰길을 피하여서 송태를 찾았다. 그 청년들은 더러는 도산을 찾아서 말을 붙이기도 하고, 더러는 안목을 꺼려서 도산이 땅을 파거나 돌을 줍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거나, 또는 묵묵히 거들고 가버렸다. 부인네들 도 십인 二[이]십인 작반하여 음식을 차려 가지고 송태를 찾아 와서도산을 위 로하였다. 이리하여서 평양 강서간의 버스에는 어느 편이고 송태에 오는 손이 아니 내리는 때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렇게 송태를 찾는 사람은 도산에게서 반드시 무엇을 얻어 가지고 갔다.
504
일본 관헌이 이것을 모를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신사참배(神社參拜) 문제로 평양서 교회와 숭실 학교에 존폐문제가 발생되었을 적에 도지사 상내 언책(上內 彦策)은 사람을 보내어서 도산이 조선을 떠나서 미국으로 가지를 권하고 적어도 평안 남도를 떠나기를 권하였던 것이다.
505
그러나 도산은, 나는 본국을 『떠날 생각도 없고 또 대보산을 떠날 생각도 없다.』
507
이른바 「지나 사변」이 나던 一九三七[일구삼칠]년 五[오]월 초에 모씨는 동우 회의 금후의 태도에 관한 도산의 지시를 들으려고 송태로 갔다. 그때는 남차랑(南次郞)이 총독으로 와서 국체명징(國體明徵)이란 것을 내어 걸고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하여 이 정책에 응하지 아니하는 조선인에 대하여는 단호 탄압을 가한다는 것을, 혹은 유고(諭告)로, 혹은 지사·경찰 부장·사법관 회의에서 누구 이성언하고, 예수교에 대하여서는 신사 참배, 선교사 배척을 강요하고, 기타 재등 문화 정책(齋籐文化政策)으로 허용되었던 약간의 언론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에 대하여서도 근본적으로 정책을 고쳐서 일체 민족주의적·자유주의적 경향을 말살하는 강압 공작에 착수하였다. 이때에 동우회가 문제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인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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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수양동우회는 정치적이 아닌 인격 수양 단체로 재등 총독 시대에 일본 관헌의 양해를 얻었던 것이다. 그후 동후회는 일체 정치적 행동에 참가하지 아 니하였다. 신간회(新幹會) 결성 당시에도 동우회의 태도에 대하여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인격 수양이야말로 우리 민족에 있어서는 만사의 기초라 하는 견지에서 신간회가 가입을 거절하고 그 대신 동우회원 개인으로서의 정치 단체 참가하는 관계 없다 하여 조병옥(趙炳玉) 등이 개인의 자격으로 신간회에 참가하였던 것이다.
509
동우회가 만족주의자의 단결이라 하는 데 대하여서는 일본 관헌도 묵인하고 있 었다. 또 회우의 거의 전부가 배일적이요, 독립을 희망하고, 또 독립 운동에 참가하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면 어찌하여서 일본 관헌이 동우회를 허가 하였던가, 그 이유는 이러하였다.
510
첫째로, 남차랑(南次朗)이 총독으로 오기까지는 일본은 조선인을 한 민족 단위로 생각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東亞日報[동아일보]》가 「조선 민족의 표현 기관」이라 하는 사시(社是)를 공공연히 언명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또 신간회의 조직을 허락한 것 등이다. 남차랑이 오기까지는 조선 민족은 조선어를 배우는 것을 학교 제도에서도 허락하였고, 따라서 조선 민족이 조선 고유의 문화를 유지하는 것도 인정하였다. 일본은 조선 민족을 일본 민족으로 화하려는 어리석은 일을 아직 시작하지 아니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동우회가 민족 정신을 보유하는 것을 해괴하게 생각할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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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 당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책의 중축을 삼은 것은 조선 내의 치안 유지였다. 삼일운동 직후의 조선 민심을 일본은 휴화산(休火山)으로 보았다. 때때로 일어나는 폭탄 사건은 일본 관헌의 신경을 과민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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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주권을 행위로써 반항하지 아니하는 한에는 비록 민족주의자요 또 독립 운동을, 몸소하던 자라도 잠자코 있기만 하면 다행으로 여겼다. 그리고 서서히 조선이 일본에서 분리될 수 없도록 각종의 정치·경제 공작을 하려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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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서 《東亞日報[동아일보]》, 기타의 민족주의적 일간 신문이 묵인되는 모양으로 동우회도 두어 두고 하는 양을 보았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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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국체명징」(國體明徵)이라는 간판을 걸고 등장한 남차랑은 위에 말한 것과 같이 종래의 정책을 근본적으로 둘러엎고 한국 민족의 일본화를 단적으로 강제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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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차랑은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신사 참배, 국어 상용(國語常用)이라는 것을 여행(勵行)시켰다. 예수교 신자나, 불교 신자나, 천주교 신자나 다 신사를 참배하는 것으로 존재(存在)의 제일 자격으로 삼았다. 이것을 거절하는 자는 단호히 용대(容貸)하지 않았다. 평양의 목사 주기철(朱基徹)은 신사 참배 불응으로 마침내 옥사하여 순교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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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상용」이라는 것은 관공서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 사람끼리의 공식 회합에도 한국어를 쓰기를 금하고 일본말을 쓰게 하는 것이다. 일본말을 알 만 한 한국 사람끼리 한국말을 썼다 하여 관리나 교원이 면직을 당하였고, 초등학 교 아동이 한국말을 쓰는 것은 큰 죄이어서 이 때문에 타살당한 자조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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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학 제명은 항다반사(恒茶飯事)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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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물에는 한국의 역사는 물론이요 민족적 위인에 언급한 것은 삭제를 당하였다. 그 말기에 있어서는 퇴계(退溪)와 율곡(栗谷) 같은 학자의 사진까지도 학교에서 철거를 명하였다. 그들은 한국의 반만년 역사를 아주 말살하고 경술 합병 시에 비로소 생긴 민족과 같이 취급하려 하였다. 초등·중등·학교에서는 조선어가 전페되었다. 동우회가 총검거를 당한 것이 소위 지나 사변이 발생되던 一九三七[일구삼칠]년 七[칠]일보다 一[일]개월 앞선 六[육]월 七[칠]일이 거니 와. 그해 三,四[삼,사]월부터 벌써 경찰이 동우회를 건드리는 징조가 보였으니, (一[일]) 모씨에게 문학 회장이 되기를 청한 것, (二[이]) 김 윤경(金允經)에게 심전 개발 강연(心田開發講演)을 청한 것 등이었다. 이 두 가지는 물론 다 거절 되었다. 이 거절이 동우회의 비법력 태도를 표시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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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위기 일발의 경우에 모씨가 대보산에 도산을 찾았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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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소화 불량으로 안색이 매우 초췌(憔悴)하였으나 미완성의 정원을 혼자 고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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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녹음에 꾀꼬리, 기타 새들이 울었다.「이조성 중오일장」(異鳥聲中午日長)의 경(景)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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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모씨의 남차랑 정책, 동우회 사정, 기타 시사에 대한 보고를 듣고 아무 대답이 없이 다만 모씨를 하루 더 하루 더 하고 만류할 뿐이었다. 이는 도산이 생각하는 표다. 一[일]주일 간 모씨가 송태에 묵은 동안에 평양, 기타에서 六, 七[육,칠]동지가 도산을 찾아 시국답을 하고 사업의 장래를 논의하였으나, 도산은 많이 말하지 아니하고 듣고만 있는 때가 많았다. 깊은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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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 저녁에 도산은 몇 사람의 찾아 온 동지와 함께 송대 앞고개턱 잔디 판에 앉아서 밤 경치를 보고 있었다. 이날의 하늘은 실로 장관이었다. 금성과 상현(上弦) 달고 목성이 간격을 맞추어 한 줄에 빗기고 스코오피온의 가운데 별이 불덩어리와 같이 빛났다. 화성도 붉은 빛을 발하면서 뒤를 따랐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내었는지 모르거니와. 세상에 큰일이 생길 것 같다는 화제가 나왔다. 만 차랑의 강압 정책에 조선 민심이 동요된다는 말도 났다. 밤이 이슥하도록 말들을 하였으나 도산은 침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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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도산은 모씨에게 자기가 五[오]월 二[이]십일경에 상경할 터이니 이사회(理事會)를 원만히 모이도록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525
이사회 소집에 관하여서 난관이 생겼다. 그것은 집회허가에 곤야여서 종로서에 서는, (一[일])소집 통지서를 일본문으로 쓸 것, (二[이]) 집회의 용어를 일본 말로 할 것을 조건으로 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동우회 이사장은 일본말에 능통 치 못하는 이사가 있는 것을 이유로 한국어 사용을 허락하기를 요구하였으나,
526
『너희 회 이사들이면 영어까지도 능통하는 사람들이 아니냐.』
527
하고 성을 내었다. 이에 이사회 소집을 단념하였다.
528
五[오]월 二[이]십일에 상경하마던 도산은 유월 초가 되어도 오지 아니하였다.
529
뒤에 들은즉 설사로 위석(委席)하였다사 유월 중순에 잡혀 왔다고 한다. 동우회 관계자는 종로서 유치장과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나뉘어 있었다.
530
경성 지방 법원 검사가 종로 경찰서로 출장하여 도산을 문초하였다.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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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동우회에 관하여서나 기타에 관하여서는 잘못한 일이 없다. 또 세상에 나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점에 대하여서는 아무 말도 하기를 원치 아니한다.』
538
『너는 독립 운동을 계속할 생각이냐?』
539
하고 다시 묻는 데 대하여서는 도산은,
540
『그렇다. 나는 밥을 먹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잠을 자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서 하여 왔다. 이것은 나의 몸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 다.』
542
『너는 조선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544
『대한의 독립은 반드시 된다고 믿는다.』
546
『대한 민족 전체가 대한의 독립을 믿으니 대한의 독립이 될 것이요, 세계의 공의(公議)가 대한의 독립을 명하니 대한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다.』
549
『나는 일본의 실력을 잘 안다. 지금 아세아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진 나라 다. 나는 일본이 무력만한 도덕력을 겸하여 가지기를 동양인의 명예를 위하여서 원한다.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550
이웃인 대한 나라를 유린(蹂躪)하는 것을 결코 일본의 이익이 아니 될 것이다.
551
원한 품은 二[이]천만을 억지로 국민 중에 포함하는 것보다 우정 있는 二[이]천만을 이웃 국민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복일 것이다. 그러므로 대한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복리까지도 위하는 것이다.』
553
도산 등 四[사]십四[사]명은 一九三七[일구삼칠]년 七[칠]월에 수차에 나누어 송국 수감하였고, 그 나머지 八[팔] 십여 명의 회우는 기소 유예로 석방하였으나,
554
『동우회는 홍사단과 동일한 것으로서 조선의 독립을 목표로 한 단체였다.』
555
하는 답변을 강요하여서 기소된 피고들의 방증을 삼았고, 조선 총독부에서는 상해에까지 손을 뻗쳐서 상해에 있는 홍사단 원동 지부로 하여금 홍사단이 독립 운동 단체임을 자인하고 자진 해산한다는 성명서를 발하게 하였다. 이 사건은 검거·공판·판결에 이르기까지 일체 신문 보도를 금지하였다. 민족 운동의 최 후 사건으로 도산과 많은 지명의 인사를 포함하니만큼 인심에 줄 영향을 꺼렸던 것이다.
556
이 사건 관계자 중에는 악형을 받은 사람도 많아서, 최윤호(崔允鎬)가 보석 중 사망하였고, 김성업(金性業)은 종신지질(終身之疾)을 얻었다. 그러나 도산은 악형을 가하기에는 너무도 쇠약하였었다.
557
도산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병이 중하여져서 그해 십 二[이]월 말에 경성 대학 병원으로 보석이 되어 익년 三[삼]월에 별세하였다. 도산은 대전 감옥 이래의 숙환인 소화 불량으로 몸이 쇠약한 데다가 페환이 급성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558
도산이 경성 대학 병원에 입원하여 있는 중에 방문하는 이도 많을 수 없었다.
559
도산의 방문하는 것은 감옥에 들어갈 각오를 요하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도산의 동지와 친지의 다수는 감옥에 있었다.
560
도산 입원의 소식을 듣고 미국 동지들이 치료비를 송금하여 왔다. 엄중한 경계를 무릅쓰고 도산을 병실에 위문하고, 혹은 식료품을, 혹은 급전을 두고 가는 독지(篤志)도 있었다.
561
도산의 병상에 임종까지 붙어 있던 이는 그의 생질 김 순원(金順元)과 또 청년 박 정호(朴定鎬)와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경찰의 미움을 받아 가면서도산의 병실에 매일 출입하여 비밀히 외계와 연락하는 일을 한 것은 오모(吳某)였다.
562
오씨는 이번 동우회 사건에 기소 유예로 석방된 이로서도산을 아직도 찾아 다닌다 하여 경찰에서 여러 번 다시 잡아 넣는다는 위협을 받았다.
563
조각가 이 국전(李國銓)이 도산의 데드마스크를 떴으나 그것은 빼앗기고, 이 국전과 그의 선생 김복진(金復鎭)은 경찰의 추포(追捕)를 당하였으나 하룻밤의 유치와 후욕(詬辱)만으로 면하였다.
564
나중에 들은 말을 종합하면, 도산은 최후의 날인 三[삼]월 九[구]일에도 어디 조용한 집을 하나 얻어 가지고 거기서 정양하기를 원하여서 오는 사람에게 집 말을 하였다. 그 후 얼마 아니하여 도산은 무의식 상태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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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인아 목인아, 네가 큰 죄를 지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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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웅장한 음성으로 복도에까지 울리도록 몇 번 외쳤다. 그리고는 아무 유언도 없이 자정이 넘어서 운명하였다. 머리맡에는 생질 김 순원이 있었다. 김 순원은 이듬해에 보전(普專) 학생으로서 사상 사건으로 검거되어 이태만에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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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는 시체실로 옮겼다. 도사의 친형 치호아친 매 김성탁(金聖鐸) 목사 부인과 질녀 맥결(麥結)등이 오고, 평양서는 도산의 평생의 친우요 동지인 오윤선(吳胤善) 조만식(曺晩植)·김지간(金志侃)등이 왔다. 장례에 관하여서는 경찰의 간섭이 심하고 또 주장할 사람이 없어서 二.三[이,삼]일 장지를 결정치 못하 다가 마침내 동대문 밖 망우리 묘지(忘憂里墓地)로 정하고 二[이]십인 이내에 한하여 장지까지 가기를 허락한다는 경찰의 명령으로 극히 적막하게 장송하였다. 묘지 들어가는 데는 그 뒤 수주일이나 양주 경찰서원이 파수하여 묘지에 들어가는 사람을 수하(誰何)하였고, 그 후에도 一[일]년 간이나 묘직(墓直)에게도산의 분묘를 묻는 사람이면 주소 씨명을 적게 하여서 경찰이 모르게 도산의 산소를 찾는 이는 정로로 가지 아니하고 길 아닌 데로 산을 올라야 하였다.
568
도산이 돌아 가매, 미국 그 유족에게는 전보로 부고를 보내고 아무도 오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569
이것이 도산의 六[]육십 一[일] 세 되는 봄이었다. 그해 음력 시월이면 환갑이었다.
570
도산을 애국자로 청년의 지도자로 육십 평생을 마치었다. 그가 집안 사람을 위 하여 생업으로 한 것은 전후 일년 반 가령이었으니, 반년 간은 미국 캘리포오니 아주 리버사이드에서 과수원 관개 공사(灌漑 工事)에 토목 인부로 노동하였고 약 一[일]년 은 로스앤젤리스 어떤 미국인 여관에서 가옥 소제 인부로 있었다. 도산이 국민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이여관 소제인의 직을 떠날 때에 그 주인은,
571
『그대가 一[일]년간 내 집 일을 참 잘 보아 주었으니 무슨 소원 하나를 말하면 그대로 하여 주마.』고 할 때에도산은,
572
『나 있던 일자리에 한국인을 두어 주는 것이 소원이요.』
573
하여 그 여관에서는 그로부터 지금까지 그 자리에 한국인을 둔다고 한다.
574
도산은 오직 대한 나라를 사랑하다 죽었다. 그가 대한 나라의 기초로 가장 정력을 다하던 흥사단 사건으로 옥사하였다. 고래로 이처럼 한 일에 전 생애를 완전히 바친 사람이 있을까.
575
얼른 보면 도산의 일생은 실패의 일생이었다. 그러나 그의 안중에 성공도 실패 도 노(勞)도 공(功)도 없었다. 오직 애국 애족의 일념에 말려도 말지 못하여 한 일생의 노고(勞苦)였다.
576
그러나 그의 일생은 과연 실패의 일생이었던가. 그는 과연 노이무공(勞而無功) 하였던가. 그는 우리 민족에게 참된 애국심을 심어 주고 민족의 진로를 밝히 보여 주었다. 그리고 몸으로써 애국자의 생활의 본을 보여 주었다. 그의 생활은 과연 실패의 일생일까. 그는 과연 노이무고(勞而無功)일까. 一[일]세기를 두고 보면 다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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