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1596년(병신) 1월 1일의 바로 앞에 한 장으로 다섯 줄에 걸쳐 적혀 있는 글이다.)
2
도양장(고흥군 도양면)의 농사일에 부리는 소가 7 마리인데, 보성 림정로(臨廷老) 1 마리, 박사명(朴士明) 1 마리를 바치지 않았다.
3
정명열(丁鳴悅)은 바로 길다란 서화첩(長帖)을 받아 갔다. 이는 정경달(丁景達)의 아들이다.
4
갑사 송한(宋漢). 1월 3일에 배 위에서 이번에는 환도 4 자루, 왜놈칼 2 자루를 만들었다. 아들 회가 가지고 가던 중에 (이 뒤에 없음)
6
1월 초1일 (무진) 맑다. [양력 1월 29일]
7
밤 한 시쯤에 어머니 앞에 들어가 뵈었다. 저녁나절에 남양 아저씨와 신 사과(五衛의 正6品의 군사직이며 副司直의 다음 벼슬)가 와서 이야기했다.
8
저녁에 어머니께 하직하고 본영으로 돌아왔다. 마음이 하도 어지러워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했다.
9
1월 초2일 (기사) 맑다. [양력 1월 30일]
10
일찍 나가 병기를 점검했다. 이 날은 나라제삿날(明宗 仁順王后 沈氏의 祭祀)이다.
11
부장(部將) 이계(李繼)가 비변사의 공문을 가지고 왔다.
12
1월 초3일 (경오) 맑다. [양력 1월 31일]
13
새벽에 바다로 내려가니 아우 여필과 여러 조카들이 모두 배 위에 타 있었다. 날이 밝을 무렵에 출항하여 서로 작별하였다.
14
오정에 곡포(남해군 이동면 화계리) 바다 가운데에 이르니, 샛바람이 약간 불었다.
15
상주포(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앞바다에 이르니 바람이 잤다. 노를 재촉하였더니, 자정에 사량에 이르러 잤다.
16
1월 4일 (신미) 맑다. [양력 2월 1일]
17
밤 두시쯤에 첫 나발을 불었다. 먼동이 틀 때에 출항하는데 이 여염이 와서 봤다. 진중의 소식을 물으니, 모두 이전대로라고 했 다.
18
오후 네시쯤에 가랑비가 세차게 뿌렸다. 걸망포(巨望浦)에 이르니, 경상수사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나와 기다렸다.
19
우후는 먼저 배 위로 왔으나, 몹시 취하여 인사불성이여서 곧 그 배로 갔다고 했다.
20
송한련(宋漢連) ∙ 송한(宋漢) 등이 말하기를,
21
"청어(靑魚) 천 여 마리를 잡아다 대강 늘었는데, 내가 나간 동안에 천팔백 여 마리를 잡았다"
23
비가 많이 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장수들이 어두울 무렵에 떠났는데, 길이 질어서 자빠진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24
기효근(奇孝謹)과 김축(金軸)이 휴가를 받아 갔다.
25
1월 5일 (임신)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2월 2일]
26
먼동이 틀 때에 우후와 방답첨사 ∙ 사도첨사가 와서 문안했다. 나는 서둘러 세수하고 방밖으로 나가 그들을 불러들여 지난 일을 물었다.
27
저녁나절에 첨사 성윤문(成允文) ∙ 우후 이정충(李廷忠) ∙ 웅천현감 이운룡(李雲龍) ∙ 거제현령 안위(安衛) ∙ 안골포만호 우수(禹壽) ∙ 옥포만호 이담(李曇)이 왔다가 캄캄해진 뒤에 돌아갔다.
28
이몽상(李夢象)도 경상수사 권준(權俊)의 심부름으로 와서 문안하고 돌아갔다.
29
1월 6일 (계유) 비가 내렸다. [양력 2월 3일]
30
오수(吳壽)는 청어(靑魚) 천삼백열 마리를, 박춘양(朴春陽)은 칠 백여든 일곱 마리를 바쳤는데, 하천수(河天壽)가 받아다가 말렸다. 황득중(黃得中)은 이백두 두름을 바쳤다.
32
사도첨사가 술을 가지고 왔다. 군량 오백 여 섬을 마련해 놓았다고 했다.
33
1월 7일 (갑술) 맑다. [양력 2월 4일]
34
이른 아침에 이영남(李英男)과 좋아 지내는 여인이 와서 말하기를,
35
"권숙(權澁)이 제 욕심을 채우려고 하기에 피해 왔는데, 다른 곳으로 가겠다"
36
고 했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 권준(權俊) ∙ 우후 ∙ 사도첨사 ∙ 방답첨사가 오고 권숙(權澁)도 왔다.
37
낮 두 시쯤에 견내량의 복병장과 삼천포권관이 달려와서
38
"투항한 왜놈 다섯 명이 애산(厓山)에서 왔다"
39
고 하므로 안골포만호 우수(禹壽) ∙ 공태원(孔太元)을 뽑아 보냈다.
40
날씨가 몹시 춥고 하늬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41
1월 8일 (을해) 맑다. [양력 2월 5일]
42
입춘인 데도 날씨가 몹시 추워 마치 한겨울 처럼 매섭다.
43
아침에 우우후와 방답을 불러 약밥을 같이 먹었다.
44
일찍 투항한 왜놈 다섯 명이 들어왔다. 그래서 그 온 까닭을 물으니,
45
"저희네 장수가 성질이 모질고 일을 또 많이 시키므로 도망하여 와서 투항하는 것이라"
46
고 했다. 그들이 가진 크고 작은 칼을 거두어 수루 위에 감추어 뒀다. 그러나 실은 부산에 있던 왜놈이 아니고 가덕도의 심안돈(沈安屯:島津義弘)의 부하라는 것이다.
47
1월 9일 (병자) 흐리고, 추워서 살을 에는 것 같다. [양력 2월 6일]
48
오수(吳水)가 청어(靑魚) 삼백예순 마리를 잡은 것을 하천수(河天壽)가 싣고 갔다.
50
저물 무렵에 경상수사가 와서 방어대책을 논의했다.
51
하늬바람이 불어 종일 배가 바다로 나가지 못햇다.
52
1월 10일 (정축) 맑으나 하늬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2월 7일]
53
이른 아침에 적이 다시 나올지를 점쳤더니, 수레에 바퀴가 없는 것과 같다고 했다. 다시 점쳤더니, 임금을 보고 모두들 기뻐하는 것과 같다는 좋은 괘였다.
54
식사를 한 뒤에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우우후가 어란포에서 와서 봤다. 사도첨사도 왔다.
55
체찰사가 여러가지 물건을 나누어 주도록 세 위장에게 분부하였다.
56
웅천현감 ∙ 곡포권관 ∙ 삼천포권관 ∙ 적량만호가 아울러 와서 봤다.
57
1월 11일 (무인) 맑다. [양력 2월 8일]
58
하늬바람이 밤새도록 세게 불어 한겨울보다 갑절이나 더 춥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59
저녁나절에 거제현령이 와서 봤다. 그도 수사의 옳지 못한 일을 낱낱이 말했다.
61
1월 12일 (기묘) 맑으나, 하늬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2월 9일]
63
밤 두시쯤의 꿈에, 어느 한 곳에 이르러 영의정과 같이 한시간이 넘게 이야기하다가 의관을 다 벗어 놓고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을 서로 털어 놓다가 끝내는 가슴에 메인 것까지 쏟아 놓았다.
64
한참을 지나니 비바람 이 억세게 퍼부었는데도 흩어지지 않았다.
65
조용히 이야기하는 동안 서쪽의 적이 급히 들어오고 남쪽의 적도 덤비게 된다면, 임금이 어디로 가시겠는가 하고 걱정만 되뇌이며 할 말을 알지 못했다. 일찍 듣건대, 영의정이 담천으로 몸이 몹시 편찮다고 했는데, 나았는지 모르겠다.
66
글자점을 던져 보았더니, 바람이 물결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고 했고, 또 오늘 중에 길흉이 어떤지를 점쳤더니,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은 것과 같다고 했다. 이 괘는 매우 좋다.
67
엊저녁에 종 금을 본영으로 보냈는데 바람이 몹시 사납게 불어 염려가 된다.
68
저녁나절에 나가서 각처의 공문을 처리하여 보냈다.
69
낙안이 들어왔다. 웅천현감이 보고한 내용에,
70
"왜적선 열네 척이 와서 거제 금이포(金伊浦)에 정박해 있다."
71
고 하였다. 그래서 경상수사에게 삼도의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가 보게 했다.
72
1월 13일 (경진) 맑다. [양력 2월 10일]
73
아침에 경상수사가 와서 보고하고 배를 타고 견내량으로 갔다.
74
저녁나절에 대청으로 나가 공문을 처리하여 보냈다. 체찰사에게 올리는 공문을 내보냈다.
75
성균관의 종은, 선비들이 성균관의 학문을 다시 세운다는 글을 가지고 온 자인데 아뢰고 돌아갔다.
76
이 날 바람이 자고 날씨가 따사했다. 이 날 저녁에 달빛은 낮과 같고, 바람 한 점 없다. 홀로 앉아 있으니, 마음이 어지러워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신홍수(申弘壽)를 불러 휘파람을 불게 했다. 밤 열시쯤에 잠들었다.
77
1월 14일 (신사)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2월 11일]
78
저녁나절에야 바람이 자며 날씨는 따뜻한 것 같다.
79
흥양현감이 들어왔다. 정사립(鄭思立) ∙ 김대복(金大福)이 들어왔다. 조기(趙琦) ∙ 김숙(金 )도 같이 왔다.
80
이 날 그 편에 연안옥(延安玉)의 외조모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다. 밤 늦도록 이야기했다.
81
1월 15일 (임오) 맑고 따뜻하다. [양력 2월 12일]
82
밤 세시에 망궐례를 행했다. 아침에 낙안 ∙ 흥양을 불러 같이 일찍 밥을 먹었다.
83
저녁나절 대청으로 나가 공문을 써 나누어 보냈다. 이어서 투항해온 왜놈에게 술과 음식을 먹였다.
84
낙안과 흥양의 전선 ∙ 병기 ∙ 부속물 및 사부와 격군들을 점고하니 낙안의 것이 가장 엉성하다고 했다.
85
이 날 저녁에 달빛이 몹시 맑으니 풍년이 듦직하다.
86
1월 16일 (계미) 맑다. [양력 2월 13일]
87
서리가 눈처럼 내렸다.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를 봤다.
88
가장 늦게 경상수사 ∙ 우우후 등이 와서 봤다. 웅천쳔감도 와서 취하여 돌아갔다.
89
1월 17일 (갑신) 맑다. [양력 2월 14일]
90
방답첨사가 휴가를 받고서 변존서(卞存緖) ∙ 조카 분(芬) ∙ 김숙(金 ) 등과 같은 배로 나갔다.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
91
오정에 나가 공무를 봤다. 우후를 불러 활을 쏠 적에 성윤문(成允文)과 변익성(邊翼星)이 와서 보고는 같이 활을 쏘고서 돌아갔다.
92
어둘 무렵 강대수(姜大壽) 등이 편지를 가지고 들어왔는데,
93
"종 금(金)이 16일에 본영에 이르렀다."
94
고 했다. 종 경(京)은 돌아와서 말하기를
95
"아들 회(薈)가 오늘 은진으로 돌아간다."
97
1월 18일 (을유) 맑다. [양력 2월 15일]
99
저녁나절에 곤양군수(이수일) ∙ 사천현감(기직남)이 왔다.
100
동래현감(정광좌)가 달려와서 보고하는데,
101
"왜놈들이 많이 반역하는 눈치가 보이고, 유격 심유경(沈惟敬)이 행장(小西行長)과 함께 1월 16일에 먼저 일본으로 갔다."
103
1월 19일 (병술) 맑다. [양력 2월 16일]
104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를 봤다. 사도첨사와 여도만호가 왔다. 우후 ∙ 곤양군수도 왔다. 경상수사가 왔다. 우우후를 불러 왔다.
105
곤양군수가 술을 차려서 내므로 조용히 이야기했다.
106
부산에 들여 넣은 사람 네 명이 와서 전하기를,
107
"심유경(沈惟敬)과 소서행장(小西行長) ∙ 현소(玄蘇) ∙ 정성(寺澤正成) ∙ 소서비(小西飛 :內藤如安)와 함께 1월 16일 새벽에 바다를 건너갔다"
108
는 소식이다. 그래서 양식 서 말을 주어 보냈다.
109
이 날 저녁에 박자방(朴自邦)이 서 순찰사가 진에 온다는 말과 여러 가지 물건을 가지러 본영으로 갔다.
111
1월 20일 (정해)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2월 17일]
112
몸이 몹시 피곤하여 낮잠을 반 시간을 잤다. 오후 두시쯤에 메주 쑤는 것을 마치고 굴뚝에 넣었다.
116
1월 21일 (무자) 맑다. [양력 2월 18일]
117
아침에 나가 공무를 봤다. 체찰사에게 보낼 순천 공문을 작성했다.
118
밥을 먹은 뒤에 미조항첨사 및 흥양현감이 와서 보기에 술을 먹여 보냈다. 미조항첨사는 휴가를 신청했다.
119
저녁나절에 대청으로 나가니 사도첨사 ∙ 여도만호 ∙ 사천현감 ∙ 광양현감 ∙ 곡포권관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곤양군수도 왔다.
121
1월 22일 (기축) 맑다. [양력 2월 19일]
122
몹시 춥고 바람도 몹시 험하여 종일 나가지 않았다.
123
저녁나절에 경상우후가 와서 그의 수사(권준)의 경솔한 짓을 전했다.
124
이 날 밤은 바람이 차고도 매우니 아이들이 들어오기가 고생스러울 것이 걱정된다.
125
1월 23일 (경인) 맑다. [양력 2월 20일]
126
작은 형님의 제삿날이라 나가지 않았다. 마음이 몹시 어지럽다.
127
아침에 헐벗은 군사 열일곱 명에게 옷을 주었다. 또 옷 한 벌을 주었다. 종일 바람이 험했다.
128
저녁에 가덕에서 나온 김인복(金仁福)이 와서 현신하므로 적의 정세를 물어 보았다.
129
밤 열시쯤에 아들 면(葂) ∙ 조카 완(莞) 및 최대성(崔大晟) ∙ 신여윤(申汝潤) ∙ 박자방(朴自芳)이 본영에서 와서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편지를 받아 보니 기쁘기 그지 없다.
130
종 경(京)도 왔다. 종 금(金)은 애수(愛壽) 및 금곡에 사는 종 한성(漢城) ∙ 공석(孔石) 등과 같이 왔다.
131
한밤에야 잠들었다. 눈이 두 치나 내렸다. 근래에 없던 일이라고 한다. 이 날 밤 몸이 몹시 불편하다.
132
1월 24일 (신묘) 맑다. [양력 2월 21일]
133
된바람이 세게 불어 눈보라를 치며 모래까지 휘날리니 사람이 감 히 걸어 다닐 수가 없고 배도 운항할 수가 없었다.
135
"어제 왜놈 한 명이 복병한 곳에 와 서 투항하며 들어오기를 빌었다"
137
저녁나절에 우우후 및 사도첨사가 와서 봤다.
138
1월 25일 (임진) 맑다. [양력 2월 22일]
139
1월 26일 (계사) 맑으나 바람이 고르지 못했다. [양력 2월 23일]
141
1월 27일 (갑오) 맑고 따사하다. [양력 2월 24일]
142
아침밥을 먹은 뒤에 나가 공무를 봤다. 장흥(배흥립)의 죄를 심의 한 뒤에 흥양과 같이 이야기했다.
143
저녁나절에 경상우도 순찰사(서성)가 들어왔다. 그래서 오후 네시쯤에 우수사의 진으로 가서 보고, 한밤에 돌아왔다.
144
사도의 진무(鎭撫)가 화약을 훔쳤다가 붙잡혔다.
145
1월 28일 (을미) 맑다. [양력 2월 25일]
146
늦게 나가 공무를 봤다. 오정 때에 순찰사가 왔다. 활을 쏘고 같이 이야기했다. 순찰사가 나하고 활쏘기를 맞서서 겨루다가 일곱 푼을 졌는데 섭섭한 빛이 없지 않았다. 혼자 웃었다. 군관 세 사람도 다 졌다. 밤이 든 뒤에 취하여 돌아갔다.
147
1월 29일 (병신)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2월 26일]
148
일찍 식사를 한 뒤에 경상도 진으로 가서 순찰사와 같이 조용히 이야기했다. 오후에 활을 쏘았는데, 순찰사가 아홉 푼을 졌다. 김대복(金大福)이 홀로 즐겁게 활을 쏘았다. 피리 소리를 듣다가 한밤 자정에야 헤어져 진으로 돌아왔다.
149
저물 무렵에 사도에서 화약 훔친 자가 도주하였다.
150
1월 30일 (정유) 비오다가 저녁나절에야 개었다. [양력 2월 27일]
151
나가서 공무를 보고 군관이 활을 쏘았다.
152
천성보만호(윤홍년) ∙ 여도만호(김인영) ∙ 적량만호(고여우)가 와서 보고서 돌아갔다.
153
이 날 저녁에 청주의 이희남(李喜男)이 종 네 명과 준복(俊福)이 들어왔다.
155
2월 초1일 (무술)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양력 2월 28일]
156
여러 장수들과 함께 활을 쏘았다. 권숙(權澁)이 이곳에 왔다가 취해서 갔다.
157
2월 초2일 (기해) 맑고 따뜻하다. [양력 2월 29일]
158
울(蔚)과 조기(趙琦)가 같은 배로 나갔다. 우후도 갔다.
159
저녁에 사도첨사가 와서 어사의 장계에 따라 파면되었다고 전했다. 그래서 곧 장계를 초잡았다.
160
2월 초3일 (경자) 맑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3월 1일]
161
혼자 앉아서 자식의 떠난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지 않다.
162
아침에 장계를 수정했다.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그 편에 적량만호 고여우(高汝友)가 장담년(張聃年)에게 소송을 당하여 순찰사가 장계를 올려 파면시키려 한다는 글을 보았다.
163
어둘 무렵 어란만 호가 견내량 복병한 곳에서 보고하기를,
164
"부산의 왜놈 세 명이 성주에서 투항해 온 사람들을 데리고 복병한 곳에 이르러 장사하겠다 한다."
165
고 하였다. 그래서 곧 장흥부사에게 전령하여 내일 새벽에 가서 타일러 보라고 시켰다.
166
이런 왜적들이 어찌 장사를 하고자 하겠는가. 우리의 허실의 정형(定形)을 엿보려는 것이다.
167
2월 초4일 (신축) 맑다. [양력 3월 2일]
168
아침에 장계를 봉하여 사도 사람 진무성(陳武晟)에게 부쳤다. 영의정과 신식(申湜) 두 집에 문안 편지도 부쳤다.
169
저녁나절에 흥양현감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오후에 활 열 순을 쏘았다. 여도만호 ∙ 거제현령 ∙ 당포만호 ∙ 옥포만호도 왔다.
170
저녁에 장흥부사가 복병한 곳에서 돌아와 왜놈들이 도로 들어갔다고 전했다.
171
2월 초5일 (임인)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나절에야 개었다. [양력 3월 3일]
172
사도첨사 ∙ 장흥부사가 일찍 왔다. 그래서 같이 아침밥을 먹었다. 권숙(權澁)이 와서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종이 ∙ 먹 두 개와 대검(佩刀)을 주어 보냈다.
173
저녁나절에 삼도의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위로하는 음식을 먹이고, 겸하여 활을 쏘고 풍악을 잡히다가 취하여 헤어졌다.
174
웅천현감(이운룡)이 손인갑(孫仁甲)의 애인을 데리고 왔다. 그래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가야금을 몇 곡조 들었다.
175
저녁에 김기실(金己實)이 순천에서 돌아왔다. 그 편에 안부를 물었더니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기쁘고도 다행이다.
176
우수사의 편지가 왔는데 기한을 늦추자고 하니 우습고도 한탄스럽다.
177
2월 초6일 (계묘) 흐렸다. [양력 3월 4일]
178
새벽에 자귀쟁이(耳匠木手) 열 명을 거제로 보내어 배를 만드는 일을 시켰다. 이 날 침방에 천장 흙이 떨어진 곳이 있어서 수리 했다.
179
사도첨사 김완(金浣)은 조도어사의 장계로써 파면되었다는 기별이 또 이르렀다. 본디의 포구(골사도)로 내어 보냈다.
180
순천별감 유(兪)와 군관 장응진(張應軫) 등을 처벌하고 곧 수루로 들어갔다.
181
송한련(宋漢連)이 숭어를 잡아서 왔기에 여도 ∙ 낙안 ∙ 흥양을 불러 같이 찢어 먹었다.
182
적량 고여우(高汝友)가 큰 매를 가지고 왔으나 오른쪽 발가락이 다 얼어서 무지러졌으니 어찌하랴!
184
2월 초7일 (갑진) 아침에 흐리다가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3월 5일]
185
몸이 좋지 않다. 저녁나절에 나가 군사들에게 음식을 먹였다.
186
장흥부사 ∙ 우후 ∙ 낙안군수 ∙ 흥양현감을 불러 이야기하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헤어졌다.
187
2월 초8일 (을사) 맑다. [양력 3월 6일]
188
이른 아침에 녹도만호가 와서 봤다. 아침에 벚나무 껍질을 마름질했다.
189
저녁나절에 손인갑의 애인이 들어와 한참을 있었다.
190
오철(吳轍) ∙ 현응원을 불러 군사에 대한 일을 물었다.
191
저녁에 군량에 대한 장부를 만들었다. 흥양현감이 둔전의 벼 삼백쉰두 섬을 바쳤다.
192
하늬바람이 세게 불어 배를 다니게 할 수가 없었다.
193
류황을 내보내려 했는데 떠나지 못했다.
194
2월 초9일 (병오) 맑다. [양력 3월 7일]
195
하늬바람이 세게 불어 배가 다니지 못했다.
196
저녁나절에 경상수사 권준(權俊)이 와서 이야기하고 활 열 순을 쏘았다.
197
저녁에 바람이 잤다. 견내량과 부산의 왜적선 두 척이 나왔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웅천현감 및우후를 탐색하러 보냈다.
198
2월 10일 (정미) 맑고 따사했다. [양력 3월 8일]
199
이 날 일찌기 박춘양(朴春陽)이 대를 실어 왔다.
200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를 보고 태구생의 죄를 다스렸다.
202
아침에 웅천 ∙ 우우후가 견내량에서 돌아와서, 왜놈들이 겁에 질려 두려워하는 모양을 보고했다.
203
어두울 무렵 창녕사람이 술을 가져왔다.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204
2월 11일 (무신) 맑다. [양력 3월 9일]
205
아침에 체찰사에게 공문을 만들어 보냈다. 보성의 계향유사(군량보급 책임자) 림찬(林瓚)이 소금 쉰 섬을 실어 갔다.
206
임달영(任達英)이 논산(論山)에서 돌아왔다. 논산(論山)의 편지와 박종백(朴宗伯) ∙ 김응수(金應綏)의 편지도 가지고 왔다.
207
장흥부사와 우우후가 왔다. 또 낙안군수와 흥양현감을 불러 활을 쏘았다.
208
막 해떨어질 무렵 영등포만호가 그 소실을 데리고 술을 들고 와서 권했다. 나이 젊은 계집도 왔는데 놔두고 돌아갔다. 땀을 흘렸다.
209
2월 12일 (기유) 맑다. [양력 3월 10일]
210
일찌기 창녕사람이 웅천 별장으로 돌아갔다.
211
아침에 살대(箭竹) 쉰 개를 경상수사에게 보냈다.
212
저녁나절에 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활을 쏘았다. 장흥부사 ∙ 흥양현감도 같이 쏘다가 어둘 무렵에 헤어졌다.
214
2월 13일 (경술) 맑다. [양력 3월 11일]
216
강진현감(이극신)이 기일 어긴 죄를 처벌했다. 가리포첨사는 보고하고 늦게 왔으므로 타일러 내보냈다. 영암군수(박홍장)를 파면시킬 장계를 초잡았다.
217
저녁에 어란포만호가 돌아갔다. 임달영(任達英)도 돌아갔다.
218
제주목사(이경록)에게 청어(靑魚) ∙ 대구(大口) ∙ 화살대(箭竹) ∙ 곶감(乾柿) ∙ 삼색부채를 봉하여 보냈다.
219
2월 14일 (신해) 맑다. [양력 3월 12일]
220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를 보고 장계 초잡은 것을 수정했다. 동복(同福)의 계향유사 김덕린(金德麟)이 와서 인사했다.
221
경상수사가 쑥떡과 초 한 쌍을 보내 왔다. 새로 지은 곳집에 지붕을 이었다.
222
낙안군수 ∙ 녹도만호 등을 불러서 떡을 먹었다. 조금 있으니 강진현감이 와서 인사하므로 위로하고 술을 먹였다.
223
저녁에 물을 부엌가로 끌여들이는데 물 긷는 수고를 편하게 했다.
224
이 날 밤 바다의 달빛은 대낮 같고 물결은 비단결 같은데 홀로 높은 수루에 기대어 있으니 마음이 무척 어지럽다. 밤이 깊어서야 잠 자리에 들었다.
225
흥양의 계향유사 송상문(宋象文)이 와서 쌀과 벼를 합해 일곱 섬을 바쳤다.
226
2월 15일 (임자) [양력 3월 13일]
227
새벽에 망궐례를 하려 했으나, 비가 몹시 내려 마당이 젖었기 때문에 거행하지 않았다.
228
어두울 무렵 전라우도의 투항해 온 왜 놈과 경상도의 투항해 온 왜놈이 같이 짜고 도망갈 꾀를 낸다고 들었다. 그래서 전령을 내어 알렸다.
229
아침에 화살대를 가려내어 큰 살대 백열한 개와 그 다음 대 백쉰 네 개를 옥지(玉只)에게 주었다.
231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를 보는데, 웅천현감 ∙ 거제현령 ∙ 당포만호 ∙ 옥포만호 ∙ 우우후 ∙ 경상우후가 아울러 와서 보고 돌아갔다.
232
순천 둔전에서 거둔 벼를 내가 직접 보는 앞에서 받아들이게 했다.
233
동복의 계향유사 김덕린(金德麟) ∙ 흥양의 계향유사 송상문(宋象文) 등이 돌아갔다.
234
저녁에 사슴 한 마리, 노루 두 마리를 사냥하여 왔다.
235
이 날 밤 달빛은 대낮 같고 물결은 비단결 같아 자려 해도 잠잘 수가 없었다. 아랫사람들은 밤새도록 술마시고 노래했다.
236
2월 16일 (계축) 맑다. [양력 3월 14일]
238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를 봤다. 장흥부사 ∙ 우우후 ∙ 가리포첨사가 와서 같이 활을 쏘았다. 군관들은 지난날 승부내기에서 진 편이 한턱 내었는데 몹시 취하여 헤어졌다.
239
이 날 밤은 너무 취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앉았다 누었다 하다가 새벽이 되었다. 봄철 노곤한 기운이 벌써 이렇구나.
240
2월 17일 (갑인) 흐렸다. [양력 3월 15일]
241
나라제삿날(世宗 祭祀)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242
식사를 한 뒤에 아들 면(葂)이 본영으로 갔다.
243
박춘양(朴春陽)과 오수(吳水)가 조기 잡는 곳으로 갔다가 어제의 취기가 아직도 심하니 불안했다.
244
저녁에 흥양현감이 와서 이야기하다가 저녁 식사를 같이 했다.
245
미조항첨사 성윤문(成允文)의 문안 편지가 왔는데,
246
"방금 관찰사(方伯)의 공문을 받고 진주성(晉城)으로 부임하게 되어 나아가 인사드리지 못한다. 자기 대신으로 황언실이 되었다"
248
웅천현감의 답장이 왔다. "임금의 유서(諭書)는 아직 받지 못했다"고 했다.
249
이 날 어두울 무렵에 하늬바람이 세게 불어 밤새도록 그치지 않는다. 아들이 떠나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다. 아픈 가슴을 말할 수 없다.
250
봄철 기운이 사람을 괴롭혀 몹시 노곤하다.
251
2월 18일 (을묘) 맑다. [양력 3월 16일]
252
식사를 한 뒤에 나가 공무를 봤다. 하늬바람이 세게 불었다.
253
저녁 나절에 체찰사의 비밀 공문이 세 통 왔다. 그 하나는 제주목에 게 계속하여 후원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영등포만호 조계종(趙繼宗)을 심문하는 일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도 전선(戰船)을 아직은 독촉하여 모으지 말라는 것이었다.
254
저녁에 김국(金國)이 서울에서 들어와서 비밀 공문 두 통과 역서(曆書) 한 건을 가지고 왔다. 승정원의 기별도 왔다.
255
황득중(黃得中)은 쇠를 싣고 와서 바쳤다.
256
절(節)이 술을 가지고 왔다. 땀이 온몸을 적셨다.
257
2월 19일 (병진) 맑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3월 17일]
258
아들 면(葂)이 잘 갔는지 못 갔는지 몰라서 밤새도록 무척 걱정했다.
259
이 날 저녁 소문에 낙안의 군량선이 바람에 막혀 사량에 대었다가 바람이 자야 떠날 것이라고 했다.
260
이 날 새벽에 경상도의 진(陣)에 남아 있는 투항한 왜놈을 이곳에 있는 왜놈 난에몬(亂汝文 : 南汝文) 등을 시켜 묶어 와서 목을 베게 했다.
261
경상수사 권준(權俊)이 왔다. 장흥부사 ∙ 웅천현감 ∙ 낙안군수 ∙ 흥양현감 ∙ 우우후 ∙ 사천현감 등과 같이 부안에서 온 술을 끝까지 다마셔 없앴다.
262
황득중(黃得中)이 가져온 총통 만들 쇠를 저울로 달아서 보관했다.
263
2월 20일 (정사) 맑다. [양력 3월 18일]
264
일찌기 조계종(趙繼宗)이 현풍수군 손풍련(孫風連)에게서 소송을 당했으므로 서로 마주하여 공술하려고 여기에 왔다가 돌아갔다.
265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를 보고 공문을 적어 나누어 보냈다.
266
손만세(孫萬世)가 사사로이 입대(入隊)에 관한 공문을 만들었기에 그 죄를 처벌했다.
267
오후에 활 열 순을 쏘았다. 낙안군수 ∙ 녹도만 호가 같이 왔다.
268
비가 올 것만 같다. 새벽에 기운이 노곤했다.
269
2월 21일 (무오) [양력 3월 19일]
270
궂은비가 새벽부터 세차게 오더니 저녁나절에야 그쳤다. 그래서 나가지 않고 혼자 앉아 있었다.
271
2월 22일 (기미) 맑고 바람이 없다. [양력 3월 20일]
272
일찌기 식사를 하고 나가 앉아 있으니, 웅천현감 ∙ 흥양현감이 와서 봤다. 흥양현감은 몸이 불편하여 먼저 돌아갔다.
273
우우후 ∙ 장흥부사 ∙ 낙안군수 ∙ 남도포만호 ∙ 가리포첨사 ∙ 여도만호 ∙ 녹도만호가 와서 활을 쏘았다. 나도 활을 쏘았다. 손현평(孫絃平)도 와서 몹시 취하여 헤어졌다.
274
이 날 밤 땀을 흘렸다. 봄철 기운이 사람을 노곤하게 한다.
275
강소작지(姜所作只)가 그물을 가지러 본영으로 갔다. 충청수사가 화살대를 와서 바쳤다.
276
2월 23일 (경신) 맑다. [양력 3월 21일]
278
둔전의 벼를 다시 되어 세 곳간에 백예순일곱 섬을 쌓았다. 없어진 것이 마흔여덟 섬이다.
279
저녁나절에 거제현령 ∙ 고성현감 ∙ 하동현감 ∙ 강진현감 ∙ 회령포만호가 와서 봤다. 하천수(河天水) ∙ 이진(李進)도 왔다.
281
2월 24일 (신유) 맑다. [양력 3월 22일]
282
일찍 식사를 하고 나가 앉아서, 둔전의 벼를 다시 되는 것을 감독했다.
285
둔전의 벼를 다시 된 수량 백일흔 섬을 곳간에 넣었다. 없어진 것이 서른 섬이다.
286
낙안군수(선의경)가 갈렸다는 기별이 왔다.
288
배를 본영으로 보낼려 할 적에 비바람 때문에 그만뒀다.
289
밤내내 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오래도록 노곤하다.
290
2월 25일 (임술) 비가 오다가 오정 때에 개었다. [양력 3월 23일]
292
저녁나절에 우수사가 왔다. 나주판관도 왔다.
294
"수군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관 찰사가 방해하기 때문이다"
295
고 하였다. 이진(李璡)이 둔전으로 돌아갔다. 춘절(春節) ∙ 춘복(春福) ∙ 사화(士花)가 본영으로 돌아갔다.
296
2월 26일 (계해) 아침에 맑았는데 저물 무렵에는 비가 왔다. [양력 3월 24일]
297
저녁나절에 대청으로 나갔다. 여도만호 ∙ 흥양현감이 와서 영리들이 백성을 점점 움켜잡는 폐단을 말했다. 극히 해괴한 일이다.
298
양정언(梁廷彦)과 영리 강기경(姜起敬) ∙ 이득종(李得宗) ∙ 박취(朴就) 등을 중죄로 다스리고 곧 경상 ∙ 전라수사가 있는 영리를 잡아들 이라고 전령을 내렸다.
300
조금있으니, 견내량 복병이 달려와서 보고하기를,
301
"왜적선 한 척이 견내량을 거쳐 들어와 해평장에 이를 적에 머물지 못하게 했다"
302
고 하였다. 둔전에서 거둬들인 벼 이백 서른 섬을 고쳐 일백아흔여덟 섬으로 바로 잡아 서른두 섬이 줄었다고 했다. 낙안에게 이별 술을 대접해 보냈다.
303
2월 27일 (갑자) 흐리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양력 3월 25일]
304
이 날 녹도만호 등과 함께 활을 쏘았다. 흥양현감이 휴가를 받아 돌아갔다.
305
둔전에서 거둬들인 벼 이백스무 섬을 고쳐서 바로 잡으니 줄은 것이 여러 섬이었다.
306
2월 28일 (을축) 맑다. [양력 3월 26일]
308
저녁나절에 나가 앉아 있으니 장흥부사와 체찰사의 군관이 이곳에 이르렀는데, 장흥부사는 종사관이 발행 한 전령으로 자기를 잡아러 온 일 때문에 왔다고 했다. 또 전라도 수군 안에서 우도의 수군이 전라좌 ∙ 우도를 왔다 갔다 하면서 제주와 진도를 성원한다고 했다.
309
우습다. 조정에서 꾀하는 정책이 이럴 수가 있나! 체찰사가 꾀를 내는 것이 이렇게도 알맹이가 없단 말인가! 나라의 일이 이러하 니 어찌할꼬!
310
어찌할꼬! 저녁에 거제현령을 불러 와서 일을 물어보고 나서 돌려 보냈다.
311
2월 29일 (병인) 맑다. [양력 3월 27일]
312
아침에 공문 초잡은 것을 수정했다. 식사를 한 뒤에 나가 앉아 있으니, 우수사 및 경상수사 ∙ 장흥부사 ∙ 체찰사의 군관이 왔다. 경상우도 순찰사의 군관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
313
2월 30일 (정묘) 맑다. [양력 3월 28일]
314
아침에 정사립(鄭思立)으로 하여금 보고문을 써서 체찰사에게 보냈다. 장흥부사도 체찰사에게 갔다.
316
"벌써 바람이 따뜻해졌으니 협동작전할 계획이 시급하여 소속 부하를 거느리고 본도(전라우도)로 가고자 한다"
317
는 것이었다. 그 마음 가짐이 몹시도 해괴하여 그의 군관 및 도훈도에게 곤장 일흔 대를 때렸다.
318
저녁에 송희립(宋希立) ∙ 노윤발(盧潤發) ∙ 이원룡(李元龍) 등이 들어왔다. 희립은 또 술을 가지고 왔다.
319
몸이 몹시 불편하여 밤새도록 식은 땀을 흘렸다.
321
3월 초1일 (무진) 맑다. [양력 3월 29일]
322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아침에 경상수사가 와서 이야기하고 돌아갔다.
323
저녁나절에 해남현감 류형(柳珩) ∙ 임치첨사 홍견(洪堅) ∙ 목포만호 방수경(方守慶)에게 기일을 어긴 죄로 처벌했다. 해남현감은 새로 부임해 왔으므로 곤장을 치지는 않았다.
324
3월 초2일 (기사) 맑다. [양력 3월 30일]
325
아침에 장계 초잡은 것을 수정했다. 보성군수가 들어왔다.
326
몸이 몹시 불편하여 공무를 보지 않았다. 몸이 노곤하고 땀이 배니, 이건 병이 날 원인이다.
327
3월 3일 (경오) 맑다. [양력 3월 31일]
329
저녁나절에 반관해(潘觀海)가 왔다. 정사립(鄭思立) 등을 시켜 장계를 썼다.
330
이 날은 명절(삼짇날)이라 방답첨사 ∙ 여도만호 ∙ 녹도만호 및 남도포만호 등을 불러 술과 떡을 먹였다.
331
일찌기 송희립(宋希立)을 우수사에게 보내어 뉘우치는 뜻을 전하니, 은근하게 대답하더라고 했다.
333
3월 4일 (신미) 맑다. [양력 4월 1일]
335
느지막이 보성군수 안홍국을 기일을 어긴 죄로 처벌했다.
336
오정 때에 출항하여 곧바로 소근포 끝으로 돌아 경상우수사가 있는 곳에 이르니, 좌수사 이운룡(李雲龍)도 왔다. 조용히 이야기하고서 그대로 자리도(佐里島:진해시 웅천동) 바다 가운데서 같이 잤다.
338
3월 5일 (임신) 맑다가 구름이 끼었다. [양력 4월 2일]
339
새벽 세 시에 출항하여 해가 뜰 무렵에 견내량의 우수사가 복병 한 곳에 이르니, 마침 아침먹을 때였다. 그래서 밥을 먹고 난 뒤에 서로 보고서 다시 잘못된 것을 말하니 우수사(이억기)는 사과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일로 술을 마련하여 잔뜩 취하여 돌아왔다. 그 길에 이정충(李廷忠)의 장막으로 들어가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취하여 엎어지는 줄도 깨닫지 못했다.
340
비가 많이 쏟아지므로 먼저 배로 내려가니, 우수사는 취하여 누워서 정신을 못차리므로 말을 못하고 왔다. 우습다.
341
배에 이르니, 회 ∙ 해 ∙ 면 ∙ 울(蔚) 및 수원(壽元) 등이 함께 와 있었다. 비를 맞으며 진 안으로 돌아오니, 김혼(金渾)도 왔다. 같이 이야기하다가 자정이 되어 잤다.
342
계집종 덕금(德今) ∙ 한대(漢代) ∙ 효대(孝代)와 은진(恩津)의 계집종이 왔다.
343
3월 6일 (계유)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4월 3일]
344
새벽에 한대(漢代)를 불러 까닭을 물었다. 아침에 몸이 불편했다.
345
식사를 한 뒤에 하동현감(신진) ∙ 고성현령(조응도) ∙ 함평현감(손경지) ∙ 해남현감(류형)이 아뢰고 돌아갔다. 남도포만호(강응표)도 돌아갔는데, 기일을 5월 10일로 정했다.
346
우우후와 강진현감(이극신)에게는 8일이 지난 뒤에 나가도록 일렀다.
347
함평현감(손경지) ∙ 남해현감(박대남) ∙ 다경포만호(윤승남) 등이 칼을 썼다.
350
3월 7일 (갑술) 맑다. [양력 4월 4일]
352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를 봤다. 가리포첨사 ∙ 여도만호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354
녹도만호가 노루 두마리를 (사냥해 왔다.)
355
3월 8일 (을해) 맑다. [양력 4월 5일]
356
아침에 안골포만호(우수) ∙ 가리포첨사(이응표)가 각각으로 큰 사슴 한 마리씩을 보내 왔다. 가리포첨사도 보내 왔다.
357
식사를 한 뒤에 나가 앉아 있으니, 우수사 ∙ 경상수사 ∙ 좌수사 ∙ 가리포첨사 ∙ 방답첨사 ∙ 평산포만호 ∙ 여도만호 ∙ 우우후 ∙ 경상우후 ∙ 강진 현감 등이 와서 같이 종일 몹시 취하여서 헤어졌다.
359
3월 9일 (병자) 아침에 맑다가 저물 때에 비가 내렸다. [양력 4월 6일]
360
우우후 및 강진현감이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술을 먹였더니 몹시 취했다. 우우후는 취하여 쓰러져 돌아가지 못했다.
361
저녁에 좌수사가 왔기에 작별의 술잔을 나누었더니 취하여 대청에서 엎어져 잤다.
362
개(介? 계집종의 이름인 듯)와 같이 잤다.
363
3월 10일 (정축) 비가 내렸다. [양력 4월 7일]
364
아침에 다시 좌수사를 청했더니 와서 작별의 술잔을 나누니 온종 일 무척 취하여 나가지 못했다.
366
3월 11일 (무인) 흐렸다. [양력 4월 8일]
367
해 ∙ 회 ∙ 완(莞) 및 수원(壽元)은 계집종 세 사람과 더불어 나갔다.
368
이 날 저녁에 방답첨사(張麟)가 성낼 일도 아닌데 공연히 성을 내어 상선(上船)의 물긷는 기전자(田子)에게 곤장을 쳤다니, 참으로 놀랄 일이다. 곧 군관과 이방(吏房)을 불러 군관에게는 스무 대, 이방(吏房)에게는 쉰 대를 매로 볼기쳤다.
369
저녁나절에 구 천성보만호가 하직하고 돌아가고, 새 천성보만호는 체찰사의 공문으로 병사에게 잡혀 갔다.
370
나주판관도 왔기에 술을 먹여서 보냈다.
371
3월 12일 (기묘) 맑다. [양력 4월 9일]
372
아침 밥을 먹은 뒤에 몸이 노곤하여 잠깐 잠을 잤더니 처음으로 피로가 가신 듯하다.
373
경상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여도 만호 ∙ 금갑도만호 ∙ 나주판관도 왔다. 군관들이 술을 내었다.
374
저녁에 소국진(蘇國秦)이 체찰사에게서 돌아왔는데, 그 회답에 우도의 수군을 합하여 본도로 보내라는 것은 본의가 아니라고 하였다. 우습다. 그 편에 들으니 원흉(원균)은 곤장 마흔 대를, 장흥 부사는 스무 대를 맞았다고 했다.
375
3월 13일 (경진)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4월 10일]
376
저녁에 견내량 복병이 달려와 아뢰기를,
378
고 했다. 그래서 여도만호 ∙ 금갑도만호 등을 뽑아 보냈다.
379
봄비가 오는 가운데 몸이 노곤하여 누워서 앓았다.
380
3월 14일 (신사) 궂은비가 걷히지 않는다. [양력 4월 11일]
382
"견내량 근처의 거제땅 세포(사등면 성포리)에 왜적선 다섯 척과 고성땅에 다섯 척이 정박하여 뭍에 내렸다"
383
고 한다. 그래서 삼도의 여러 장수들에게 배 다섯 척을 더 뽑아 보내도록 전령했다.
384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를 보 고 각 처에 공문을 처리하여 보냈다.
385
아침에 군량 회계하는 것을 마쳤다. 방답첨사 ∙ 녹도만호가 와서 봤다. 체찰사에게 공문을 보낼려고 서류를 만들었다.
386
봄철 노곤함이 이에 이르니 밤새도록 땀이 흘렀다.
387
3월 15일 (임오) 맑다. [양력 4월 12일]
388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가리포첨사 ∙ 방답첨사 ∙ 녹도만호가 와 서 참례했는데, 우수사와 다른 사람은 오지 않았다.
389
저녁나절에 경상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함께 술에 취하여 가면서 덕(德)과 아랫방에서 수군거렸다고 했다.
390
이 날 저물 무렵 바다에 달빛이 어슴푸레 밝았다. 몸이 노곤하여 축 갈아 앉는다. 밤새도록 식은 땀이 흘렀다.
391
한밤에 비가 몹시 왔다. 낮에는 노곤하여 머리를 빗었는데 덧없이 땀이 흘렀다.
392
3월 16일 (계미) 비가 퍼붓듯이 내리며 종일 그치지 않았다. [양력 4월 13일]
393
오전 여덟 시쯤에 시마바람이 세게 불어 지붕이 뒤집힌 곳이 많고 문과 창이 깨지고 창호지도 찢어져 비가 방안으로 새어 들어 와서 사람이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395
저녁에 군관을 불러 와서 술을 먹였다.
396
한밤 한 시쯤에 비가 잠깐 그쳤다. 흐르는 땀이 어제와 마찬가지다.
397
3월 17일 (갑신) 종일 가랑비가 내리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양력 4월 14일]
398
저녁나절에 나주판관이 와서 봤다. 그래서 취하게 하여 보냈다. 어둘 무렵에 박자방(朴自邦)이 들어왔다.
399
이 날 밤에 식은 땀이 등에까지 흘러 두겹 옷이 흠뻑 다 젖고, 자는 이부자리도 젖었다. 몸이 불편하다.
400
3월 18일 (을유) 맑다. [양력 4월 15일]
401
샛바람이 종일 불고 날씨는 몹시 싸늘했다.
402
저녁나절에 나가 앉아서 솟장을 처리해 주었다. 방답첨사 ∙ 금갑도만호 ∙ 회령포만호 ∙ 옥포만호 등이 와서 봤다. 활 열 순을 쏘았다.
403
이날 밤 바다의 달빛이 어슴푸레 비치고 밤기운이 몹시 차다. 자려해도 잠을 이룰 수 없어 앉았다 누었다 하기도 불편하고 다시 몸이 불편해졌다.
404
3월 19일 (병술) 맑다. [양력 4월 16일]
405
샛바람이 세게 불고 날씨는 몹시도 싸늘했다. 아침에 새로 만든 가야금에 줄을 매었다.
406
저녁나절에 보성군수가 부침하는 것을 살펴볼 일로 휴가를 받았다. 김혼(金渾)이 같은 배로 나갔다. 종 경(京)도 같이 돌아갔다.
407
정량(丁良)은 볼일이 있어 여기 왔다가 돌아갔다.
408
저녁에 가리포첨사 ∙ 나주반자가 와서 봤다. 술을 취하도록 먹여서 보냈다.
409
어두울 무렵부터 바람이 몹시 사나왔다.
410
3월 20일 (정해) 종일 바람불고 비가 내렸다. [양력 4월 17일]
411
바람이 사납게 불고 비가 와서 종일 나가지 않았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바람막이를 두 개를 만들어서 걸었다.
412
밤새도록 비가 왔다. 땀이 옷과 이불을 적셨다.
413
3월 21일 (무자) 종일 큰 비가 내렸다. [양력 4월 18일]
414
초저녁에 도와리를 만나 구토를 한 시간이나 했는데, 자정이 되니 조금 가라앉았다.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앉았다 누웠다 하며 괜스레 일을 저지르는 것 같아 한스럽기 그지없다.
415
이 날은 너무 심심해서 군관 송희립(宋希立) ∙ 김대복(金大福) ∙ 오철(吳轍) 등을 불러 종정도(從政圖)를 내기했다.
416
바람막이 세 개를 만들어 걸었는데, 이언량(李彦良)과 김응겸(金應謙)이 감독했다.
417
한 밤이 지나서 비가 잠깐 그쳤다. 밤 세시에 이지러진 달빛이 비치어 방 밖으로 나가 거닐었다. 그래도 몸은 몹시 노곤했다.
418
3월 22일 (기축) 맑다. [양력 4월 19일]
419
아침에 종 금이(今)를 시켜서 머리를 빗게 했다.
420
저녁나절에 우수사는 경상수사와 같이 와서 보므로 술을 먹여 보냈다. 그 편에 들으니 작은 고래가 섬위로 떠밀려와서 죽었다고 했다. 그래서 박자방(朴自邦)을 보냈다.
421
이 날 어두울 무렵에 땀이 예사롭지않게 흘렀다.
422
3월 23일 (경인) 맑다. [양력 4월 20일]
423
새벽에 정사립(鄭思立)이 와서 물고기 기름을 많이 짜서 가져 왔다고 했다.
424
새벽 세시에 몸이 불편하여 금이(今)를 불러 머리를 긁게 했다.
425
저녁나절에 나가 앉아서 각 곳의 공문을 처리하여 나누어 주었다. 활 열 순을 쏘았다.
426
조방장 김완(金浣) 및 충청수군의 배 여덟 척이 들어오고 우후도 왔다.
427
종 금이(今)가 편지를 가져 왔는데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했다.
428
초저녁이 지나 영등포만호가 그의 어린 계집을 데리고 술을 가져 왔다고 했다. 나는 거들떠 보지 않았다. 밤 열시쯤이 지나서 되돌아갔다.
430
한밤에 잠이 들었다. 땀이 흘러 옷을 적셨다. 그래서 옷을 갈아 입고 잤다.
431
3월 24일 (신묘) 맑다. [양력 4월 21일]
432
아침에 미역을 따러 나갔다. 헌 활집은 베로 만든 게 여덟 장, 솜 으로 만든 게 두 장인데, 활집 한 장은 고쳐서 만들려고 감을 내어 주었다.
433
아침 식사를 한 뒤에 나가 앉아서, 마량첨사 김응황(金應潢) ∙ 파지도권관 송세응(宋世應) ∙ 결성현감 손안국(孫安國) 등을 처벌했다.
434
저녁나절에 우후가 가져온 술을 방답첨사 ∙ 평산포만호 ∙ 여도만호 ∙ 녹도만호 ∙ 목포만호 등과 같이 마셨다.
435
나주판관 어운급(魚雲伋)에게는 4월 15일로 기한으로 휴가를 주었다.
436
몸이 몹시 노곤하여 흐르는 땀이 예사롭지 않다. 이 날도 비가 올것 같다.
437
3월 25일 (임진)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양력 4월 22일]
438
종일 퍼부어 잠시도 비가 끊이지 않았다. 수루에 기대어 저녁까지 보내니 마음이 언짢았다. 머리를 한참동안 빗었다. 낮에 땀이 옷을 적셨다. 밤에는 두겹 옷이 젖고 방 구들막까지 젖었다.
439
3월 26일 (계사) 맑고 마파람이 불었다. [양력 4월 23일]
440
저녁나절에 나가 앉아 있으니, 조방장 및 방답첨사 ∙ 녹도만호가 와서 활을 쏘았다.
441
경상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체찰사의 전령이 왔는데,
442
"전일(12일)에 우도의 수군을 돌려 보내라고 한 것은 회계(回啓)를 잘못 본 탓이다."
444
3월 27일 (갑오) 맑다. 마파람이 불었다. [양력 4월 24일]
445
저녁나절에 나가 활을 쏘았다. 우후 ∙ 방답첨사도 왔다. 충청도 마량첨사 ∙ 임치첨사 ∙ 결성현감 ∙ 파지도권관이 함께 왔다. 술을 먹여서 보냈다.
446
저녁에 신 사과와 아우 여필이 들어왔다. 그 편에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는 말을 들으니 기쁘고 다행하기 이를 데 없다.
447
3월 28일 (을미) 궂은비가 몹시 내리며 종일 개지 않았다. [양력 4월 25일]
448
나가 앉아서 공문을 만들어 나누어 보냈다.
449
충청도 뱃사람들이 다시 울짱을 설치하여 방비했다.
450
3월 29일 (병신) 궂은비가 걷히지 않았다. [양력 4월 26일]
451
저녁나절에 부찰사(한효순)의 통지문이 먼저 이곳에 왔는데, 성주에서 진으로 온다고 했다.
453
4월 초1일 (정유) 비가 많이 내렸다. [양력 4월 27일]
454
신사과와 함께 이야기했다. 종일 비가 내렸다.
455
4월 초2일 (무술) 저녁나절에 개었다. [양력 4월 28일]
456
저물녘에 경상수사가 부찰사를 마중하는 일로 나갔다. 신사과는 같은 배로 갔다. 이 날 밤 몸이 몹시 불편했다.
457
4월 초3일 (기해) 맑고 마파람에 종일 불었다. [양력 4월 29일]
458
어제 저녁에 견내량 복병이 긴급보고한 내용에,
459
"왜놈 네 명이 부산에서 장사하며 이익을 늘리려 나왔다가 바람에 표류되었다."
460
고 했다. 그래서 새벽에 녹도만호 송여종(宋汝宗)을 보내어 그렇게 된 까닭을 묻고 빼내오려고 보냈는데 그 정형(情跡)을 살펴 보니, 정탐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을 목을 베었다.
461
우수사에게 가 볼려고 하다가 몸이 불편하여 못 갔다.
462
4월 초4일 (경자) 흐렸다. [양력 4월 30일]
463
아침에 오철(吳轍)이 나갔다. 종 금이(金伊)도 같이 갔다.
464
아침에 체찰사의 공문에 도장을 찍어 벽에 붙였다. 여러 장수가 표신을 고쳤다.
465
우수사에게 가 보고는 취하여 이야기하고서 돌아왔다.
467
초저녁이 지나서 저녁밥을 먹었다. 속이 덥고 땀이 났다. 밤 열시쯤에 잠깐 비가 그쳤다.
468
4월 초5일 (신축) 맑다. [양력 5월 1일]
470
4월 초6일 (임인)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5월 2일]
471
부찰사가 활쏘기를 시험했다. 저녁에 나는 우수사 등과 들어가 앉아서 군사들에게 같이 마주하여 음식을 먹였다.
472
4월 7일 (계묘) 맑다. [양력 5월 3일]
473
부찰사가 나가 앉아서 상을 나누어 주었다.
477
부찰사가 입봉(立峯)에 올라갔다. 점심을 먹은 뒤에 두 수사와 더불어 같이 이야기했다.
478
4월 8일 (갑진)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5월 4일]
479
저녁나절에 들어가 마주 앉아 부찰사와 같이 마주하여 술을 마시니 몹시 취하였다.
481
4월 9일 (을사) 맑다. [양력 5월 5일]
482
이른 아침에 부찰사가 나갔다. 그래서 배를 타고 포구로 나가 같이 배에서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483
4월 10일 (병오) 맑다. [양력 5월 6일]
484
아침에 들으니 암행어사가 들어온다고 했다. 그래서 수사 이하 포구로 나가 암행어사를 기다렸다.
485
조붕(趙鵬)이 와서 봤다. 그 모습을 보니 학질을 오래 앓아 주린 모습이 무척 야위었다. 참으로 딱했다.
486
저녁나절에 암행어사가 들어 와서 같이 내려가 앉아서이야기했다. 촛불을 밝혀주고 헤어졌다.
487
4월 11일 (정미) 맑다. [양력 5월 7일]
488
아침을 먹고 어사와 같이 마주하여 조용히 이야기했다.
489
저녁나절에 장병들에게 음식을 먹였다. 활 열 순을 쏘았다.
490
4월 12일 (무신) 맑다. [양력 5월 8일]
491
아침을 먹고 난 뒤에 어사가 밥을 지어 군사들에게 먹이게 한 뒤에 활 열 순을 쏘고 종일 이야기했다.
492
4월 13일 (기유) 맑다. [양력 5월 9일]
493
아침을 먹고 어사와 함께 마주해 있다가 느지막이 포구로 나갔더니, 마파람이 세게 불어 출항하지 못했다. 선인암(仙仁岩)으로 가서 종일 이야기하고 저물어질 때 서로 헤어졌다. 저물어서야 거망포(巨網初)에 이르렀는데 잘 갔는지 모르겠다.
494
4월 14일 (경술) 흐렸다가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5월 10일]
495
아침을 먹고 나가 앉아서 홍주판관(朴崙) ∙ 당진만호(趙孝悅)가 교서에 숙배한 뒤에 충청우후 원유남(元裕男)에게 곤장 마흔 대를 쳤다. 당진포만호도 같은 벌을 받았다.
496
4월 15일 (신해) 맑다. [양력 5월 11일]
497
단오절의 진상품을 봉해서 곽언수(郭彦守)에게 받아다 내보냈다.
498
영의정(류성룡) ∙ 영부사 정탁(鄭琢) ∙ 판서 김명원(金命元) ∙ 지사 윤자신(尹自新) ∙ 조사척 ∙ 신식(申湜) ∙ 남이공(南以恭)에게 편지를 썼다.
499
4월 16일 (임자) 맑다. [양력 5월 12일]
500
아침을 먹고나서 나가 앉아서, 난에몬 등을 불러다가 불지른 왜놈 세 놈이 누구누구인지를 물어본 뒤에 붙들어다가 죽여버렸다.
501
우수사 ∙ 경상수사도 같이 앉아서 아우 여필이 가져온 술로 취했다. 가리포첨사 ∙ 방답첨사가 같이 마셨는데, 밤이 되어서야 헤어졌다.
502
이 날 밤 바다에는 달빛이 차겁게 비치고 잔 물결 한 점 일지 않았다. 다시 땀을 흘렸다.
503
4월 17일 (계축) 맑다. [양력 5월 13일]
504
아침밥을 먹고 나서 아우 여필 및 아들 면(葂)이 종을 데리고 돌아갔다.
505
저녁나절에 각 공문을 처리하여 나누어 주었다.
506
이 날 저녁에 울(蔚)이 안위(安衛)에게 가서 보고 왔다.
507
4월 18일 (갑인) 맑다. [양력 5월 14일]
508
식사하기 전에 각 고을과 포구에 공문 및 솟장을 처리해 주었다. 체찰사에게 갈 공문을 내보냈다.
509
저녁나절에 충청우후 ∙ 경상우후 ∙ 방답첨사 ∙ 조방장 김완(金浣)과 더불어 활 스무 순을 쏘았다.
510
마도(馬島)의 군관이 복병한 곳에서 투항해 온 왜놈 한 명을 잡아 왔다.
511
4월 19일 (을묘) 맑다. [양력 5월 15일]
512
습열(濕熱: 습기로 일어나는 열)로 침 스무여 곳을 맞았다. 몸에 번열(煩熱:열이 나고 가슴이 답답함:열이 나고 가슴이 답답함:열이 나고 가슴이 답답함 (오류) 닫기 없음 ;\')이 나는 것 같아 종일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513
어두울 무렵 영등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종 목년(木年)과 금화(今花) ∙ 풍진(風振) 등이 와서 인사했다.
514
이 날 아침에 난에몬(南汝文) 편에 풍신수길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뛸 것처럼 기쁘지만 믿을 수는 없다.
515
이 말은 진작부터 퍼졌었지만 아직은 확실한 기별이 온 것은 아니다.
516
4월 20일 (병진) 맑다. [양력 5월 16일]
517
경상수사가 와서 내일 만나자고 청했다. 활 열 순을 쏘고 헤어졌다.
518
4월 21일 (정사) 맑다. [양력 5월 17일]
519
아침밥을 먹은 뒤에 경상도의 진으로 가는 길에 우수사의 진에 들러 같이 갔다. 경상수사를 맞아 주며 종일 활을 쏘았다. 잔뜩 취해서 돌아왔다.
520
조방장 신호(申浩)는 병으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522
4월 22일 (무오) 맑다. [양력 5월 18일]
523
아침밥을 먹은 뒤에 나가 앉아 있으니, 부산 허낸만(許乃隱萬)이 보낸 편지(告目)에 이르기를,
524
"명나라 사신(이종성)이 달아 나고 부사(副使:楊方亨)는 여전히 왜놈의 진영에 있는데, 4월 초8일에 달아난 까닭을 상부에 아뢰었다"
527
"노천기(盧天紀)가 술을 먹고 주책없이 굴다가 본영 진무 황인수(黃仁壽) ∙ 성복(成卜) 등에게서 욕을 먹었다"
528
고 했다. 그래서 곤장 서른 대를 때렸다. 활 열 순을 쏘았다.
529
4월 23일 (기미) 흐렸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양력 5월 19일]
530
아침에 첨지 김경록(金景祿)이 들어왔다. 일찍 아침밥을 먹고 나가 앉아 같이 술을 마셨다.
531
저녁나절에 군사들 중에서 힘센 자들을 뽑아 씨름을 시켰더니, 성복(成卜)이란 자가 판을 독차지 하였다. 그래서 상으로 쌀 말을 주었다. 활 열 순을 쏘았다.
532
충청우후 원유남(元裕男) ∙ 마량첨사(金應潢) ∙ 당진만호(趙孝悅) ∙ 홍주판관(朴崙) ∙ 결성현감(孫安國) ∙ 파지도권관(宋世應) ∙ 옥포만호(李曇) 등과 같이 쏘았다.
534
4월 24일 (경신) 맑다. [양력 5월 20일]
535
식사를 한 뒤에 목욕을 하고 나와 여러 장수들과 함께 이야기했다.
536
4월 25일 (신유) 맑다. [양력 5월 21일]
537
마파람이 세게 불었다. 일찌기 목욕하러 들어갔다가 한참 있었다.
538
저녁에 우수사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또 목욕탕에 들어갔는데 물이 너무 뜨거워 오래 있지 못하고 도로 나왔다.
539
4월 26일 (임술) 맑다. [양력 5월 22일]
540
아침에 체찰사의 군관이 경상도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 밥을 먹은 뒤에 목욕했다.
541
저녁나절에 경상수사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체찰사의 군관 오(吳)도왔다.
542
김양간(金良看)이 소를 싣고 올 일로 본영으로 갔다.
543
4월 27일 (계해) 맑다. [양력 5월 23일]
544
저녁에 한 번 목욕했다. 체찰사의 공문 회답이 왔다.
545
4월 28일 (갑자) 맑다. [양력 5월 24일]
547
여러 장수들이 모두 와서 봤다. 경상수사는 뜸뜨느라고 오지 않았다.
548
4월 29일 (을축) 맑다. [양력 5월 25일]
550
투항해온 왜놈 사고에몬(沙古汝文)을 난에몬(南汝文)에게 시켜 목을 베었다.
551
4월 30일 (병인) 맑다. [양력 5월 26일]
553
우수사가 와서 봤다. 충청우후가 봐서 보고 돌아갔다.
554
저녁나절에 부산의 허낸만(許乃隱萬)의 편지(告目)가 왔는데, 소서행장(小西行長)이 군사를 철수할 뜻이 있는 것 같다.
555
김경록(金景祿)이 돌아갔다. 어머니께서 무사하다는 편지가 왔다.
557
5월 초1일 (정묘)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5월 27일]
558
경상수사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한 번 목욕했다.
559
5월 2일 (무진) 맑다. [양력 5월 28일]
561
총통 두 자루를 부어 만들었다. 조방장 김완(金浣) 및 조계종(趙繼宗)이 와서 봤다.
562
우수사가 김인복(金仁福)의 목을 베어 효시했다.
564
5월 3일 (기사) 맑다. [양력 5월 29일]
565
가뭄이 너무 심하다. 근심되고 괴로운 맘을 어찌 다 말하랴! 공무를 보지 않았다.
566
경상우후가 와서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저물어서 들어왔다.
568
5월 4일 (경오) 맑다. [양력 5월 30일]
569
이 날은 어머니 생신인데 헌수하는 술 한 잔도 올려 드리지 못하여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나가지 않았다.
570
오후에 우수사가 사무보는 집에서 불이 나서 다 탔다.
571
이 날 저녁에 문충공(文村公)이 부요(富饒)에서 왔다.
572
조종(趙琮)의 편지를 가져 왔는데, 조정(趙玎)이 4월 초하루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슬프고도 애달프다.
573
우후가 앞산마루에서 여귀(제사 못받은 귀신)에게 제사지냈다.
574
5월 5일 (신미) 맑다. [양력 5월 31일]
575
이 날 새벽에 여귀에게 제사를 지냈다.
576
일찌기 아침밥을 먹고 나가 앉아 있고, 회령포만호가 교서에 숙배한 뒤에 여러 장수들이 와서 모였다. 그대로 들어가 앉아서 위로하고 술을 네 순 배를 돌렸다. 경상수사가 술이 거나하게 취했으므로 씨름을 시켰더니, 낙안군수 림계형(林季亨)이 으뜸이다.
577
밤이 깊도록 이들로 하여금 즐겁게 마시고 뛰놀게 한 것은 내 스스로에게 즐겁고자 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생한 장병들의 노고를 풀어 주고자 한 것이었다.
578
5월 6일 (임신) 아침에 흐렸다가 저녁나절에 큰 비가 왔다. [양력 6월 1일]
579
농민의 소망을 흡족하게 채워주니 기쁘고 다행한 마음을 이루 말 할 수 없다.
580
비가 오기 전에 활 대여섯 순을 쏘았다. 비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581
땅거미질 무렵 총통 만들 때에 쓰는 숯을 쌓아두는 창고에 불이 일어나 홀랑 다 타버렸다. 이는 감독관(監 官) 놈들이 삼가지 않은 탓이다. 새로 받아들인 숯에 묵은 불이 있는지 살피지 않아 이런 재난을 보게 된 것이다. 참으로 한탄스럽다.
582
울(蔚)과 김대복(金大福)이 같은 배로 나갔다. 비가 엄청 나게 쏟아져 잘 갔는지 못 갔는지 모르겠다. 밤새도록 앉아서 걱정했다.
583
5월 7일 (계유) 비가 내렸다. 저녁나절에 개었다. [양력 6월 2일]
584
이 날 걱정한 것은 울(蔚)이 가다가 잘 도착했는지 아닌지였다. 앉아서 밤새도록 걱정하고 있을 적에 사람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기에 열고서 물어보니, 이영남(李英男)이 들어왔다. 불러 들여 조용히 지난 일을 이야기했다.
585
5월 8일 (갑술) 맑다. [양력 6얼 3일]
586
아침에 이영남(李英男)과 함께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봤다.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활 열 순을 쏘았다.
587
몸이 몹시 불편하여 두 번이나 구토했다.
588
이 날 영산 이중(李中)의 무덤을 파낸다는 말을 들었다.
589
저녁에 조카 완(莞)이 들어왔다. 김효성(金孝誠)도 왔다. 비인현감(신경징)이 들어왔다.
590
5월 9일 (을해) 맑다. [양력 6월 4일]
591
몸이 몹시 불편하다. 이영남과 함께 서관(西關: 황해도와 평안도)의 일을 이야기했다.
592
초저녁에 비가 뿌리더니 새벽까지 왔다. 부안 전선에서 불이 났으나, 심하게 타지 않았다니 다행이다.
593
5월 10일 (병자) 맑다. [양력 6월 5일]
594
나라제삿날(太宗의 祭祀)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몸도 불편하여 종일 끙끙 앓았다.
595
5월 11일 (정축) 맑다. [양력 6월 6일]
596
새벽에 앉아서 이정(李正)과 함께 이야기했다. 식사를 한 뒤에 나가 공무를 봤다.
597
비인현감 신경징(申景澄)에게 기일을 어긴 죄로 곤장 스무 대를 쳤다. 또 순천 격군과 감관 조명(趙銘)의 죄를 곤장쳤다.
598
몸이 불편하여 일찍 들어와 끙끙 앓았다.
599
거제현령 ∙ 영등포만호는 이영남(李英男)과 같이 잤다.
600
5월 12일 (무인) 맑다. [양력 6월 7일]
601
이영남(李英男)이 돌아갔다. 몸이 불편하여 종일 신음했다.
602
김해 부사(白士霖)의 긴급보고가 왔는데
603
"부산에서 왜놈에게 붙었던 김필동(金弼同)의 편지(告目)도 온 것에도 풍신수길이 비록 정 사(正使)는 없다지만 부사(副使)가 그대로 있으니, 곧 화친하고 군사를 철수하려고 한다"
605
5월 13일 (기묘) 맑다. [양력 6월 8일]
606
부산의 허낸만(許乃隱萬)의 편지(告目)가 왔는데,
607
"가등청정이란 놈이 벌써 초10일에 그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갔고, 각 진의 왜놈들도 장차 철수해 갈 것이요, 부산의 왜놈은 명나라 사신을 모시고 바다를 건너 가려고 아직 그대로 머물고 있다"
608
고 했다. 이 날 활 아홉 순을 쏘았다.
609
5월 14일 (경진) 맑다. [양력 6월 9일]
610
김해부사 김사림(白士霖)의 긴급 보고 내용에도 허낸만(許乃隱 萬)의 편지(告目)와 같다. 그래서 순천부사에게 통보하여 그로 하여금 차례로 통보하게 했다.
611
활 열 순을 쏘았다. 결성현감 손안국(孫安國)이 나갔다.
612
5월 15일 (신사) 맑다. [양력 6월 10일]
613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우수사는 오지 않았다.
614
식사를 한 뒤에 나가서 앉아 있다가 들으니 한산도 뒷산 마루로 달려 올라가 다섯 섬과 대마도를 바라보았다고 했다. 그래서 혼자 말을 타고 올라가서 이를 보니 과연 다섯 섬과 대마도가 보였다.
615
저녁나절에 작은 개울가로 돌아왔다. 조방장 ∙ 거제현령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날이 저물어서야 진으로 돌아왔다.
616
어두워서 따뜻한 물에 목욕하고서 잤다. 밤바다에 달은 밝고 바람 한 점 없다.
617
5월 16일 (임오) 맑다. [양력 6월 11일]
618
아침에 송한련(宋漢連)의 형제가 물고기를 잡아 왔다.
619
충청우후(원유남) ∙ 홍주판관(박륜) ∙ 비인현감(신경징) ∙ 파지도권관(송세응) 등이 왔다. 우수사(이억기)도 와서 보고 돌아갔다.
620
이날 밤 비가 많이 올 것 같더니 한밤에 비가 왔다. 이 날 밤 정화수(井花水)를 마시고 싶었다.
621
5월 17일 (계미)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6월 12일]
622
농사에 아주 흡족하다. 점을 쳐보니, 풍년이 들것 같다.
623
저녁나절에 영등만호 조계종(趙繼宗)이 들어와 봤다.
625
5월 18일 (갑신) 비가 잠깐 개긴 했으나, 바다의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양력 6월 13일]
626
체찰사의 공문이 들어왔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나가 앉았다가 활을 쏘았다.
627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와서 어머 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했다. 그러나 진지를 전보다 줄어들었다고 하니 걱정되어 눈물이 난다. 봄철 누비옷을 가지고왔다.
628
5월 19일 (을유) 맑다. [양력 6월 14일]
629
방답첨사(장린)가 모친상(母喪)을 입었다는 말을 듣고 우후를 가장(假將)으로 정하여 보냈다.
630
활을 열 순을 쏘았다. 땀이 온 몸을 적셨다.
631
5월 20일 (병술) 맑고 바람도 없다. [양력 6월 15일]
633
저녁나절에 나가니 웅천현감 김충민(金忠敏)이 와서 봤다. 양식이 떨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벼 두 휘(스무말)을 체지(영수증)로 써 주었다.
635
5월 21일 (정해) 맑다. [양력 6월 16일]
636
나가 앉았다가 우후 등과 함께 활을 쏘았다.
637
5월 22일 (무자) 맑다. [양력 6월 17일]
638
충청우후 원유남(元裕男) ∙ 좌우후 이몽구(李夢龜) ∙ 홍주판관 박륜(朴崙) 등과 함께 활을 쏘았다.
639
홍우(洪祐)가 장계를 가지고 감사(監司)에게 갔다.
640
5월 23일 (기축)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6월 18일]
641
충청우후 등과 함께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642
아침에 미조항첨사 장의현(張義賢)이 교서에 숙배한 뒤에 장흥으로 부임했다. 춘절(春節)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643
이 날 밤 열시쯤에 땀이 예사롭지 않게 흘렀다. 이 날 저녁 새 수루의 지붕을 다 잇지 못했다.
644
5월 24일 (경인) 아침에 찌푸린 걸 보니 비가 많이 올 것 같다. [양력 6월 19일]
645
나라제삿날(文宗의 祭祀)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저녁에 나가 활 열 순을 쏘았다.
646
부산 허낸만(許乃隱萬)의 편지(告目)가 들어왔다.
647
"좌도의 각 진의 왜놈들이 몽땅 철수하고, 다만 부산에만 머물러 있다"
649
명나라 수석 사신이 갈려서 새로 정해진 사람이 온다는 기별이 22일 부사에게 왔다고 한다. 허낸만(許乃隱萬)은 술쌀 열 말, 소금 열 말을 주고서 맘껏 정보를 잘 탐지하라고 했다.
650
어두워서 비가 오더니 밤새도록 퍼부었다.
651
박옥(朴玉) ∙ 옥지(玉只) ∙ 무재(武才) 등이 화살대 백쉰 개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652
5월 25일 (신묘)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6월 20일]
653
홀로 다락 위에 앉아 있으니, 온 갖 생각이 다 일어난다. 우리나라 역사를 읽어 보니 개탄할 생각이 많이 난다.
654
무재(武才) 등에 게 흰 굽으로 활을 바룬 것이 천 개, 흰 굽 그대로 인 것 팔백일흔 개
655
5월 26일 (임진) 짙은 안개가 걷히지 않는다. [양력 6월 21일]
656
마파람이 세게 불었다. 저녁나절에 나가 안장 있다가 충청우후 및 우후 등과 함께 활을 쏠 적에 경상수사도 와서 같이 활 열 순을 쏘았다.
657
이 날 어두울 무렵 날씨가 찌는 듯했다. 땀이 줄줄 흘렀다.
658
5월 27일 (계사) 가랑비 종일 그치지 않았다. [양력 6월 22일]
659
충청우후 ∙ 좌우후가 이곳에 와서 종정도를 내기했다.
660
이 날 어두 울 무렵에도 찌는 듯하여 답답했다. 땀이 온 몸을 적셨다.
661
5월 28일 (갑오) 궂은비가 걷히지 않았다. [양력 6월 23일]
662
전라감사(홍세공)가 파면되어 갈렸다고 한 말을 들었다. 가등청정(加藤淸正)이 부산으로 도로 왔다고 한다. 모두 믿을 수 없다.
663
5월 29일 (을미) 궂은비가 저녁 내 내렸다. [양력 6월 24일]
664
장모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665
고성현령 ∙ 거제현령이 와서 보고는 돌아갔다.
666
5월 30일 (병신) 흐렸다. [양력 6월 25일]
667
곽언수(郭彦守)가 들어왔다. 영의정(류성룡) 및 상장군 ∙ 우참찬 판부사정탁 ∙ 지사 윤자신(尹自新) ∙ 조사척 ∙ 신식(申湜) ∙ 남이공(南以恭)의 편지가 왔다.
668
저녁나절에 우수사에게 가서 보고 종일 무척 즐기다가 돌아왔다.
670
6월 초1일 (정유) 종일 궂은비 내렸다. [양력 6월 26일]
671
저녁나절에 충청우후(원유남) 및 본영우후(이몽구) ∙ (홍주판관) 박륜(朴崙) ∙ (비인현감) 신경징(申景澄)을 불러 와서 술 마시며 이야기했다.
672
윤련(尹連)이 자기 포구로 간다고 했다. 그래서 도양장의 콩 씨앗이 모자라거든 김덕록(金德祿)에게서 콩 씨앗을 가져 가라고 체지(영수증)을 써 주었다.
673
남해현령이 도임장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674
6월 초2일 (무술) 비가 그치지 않았다. [양력 6월 27일]
675
아침에 우후가 방답첨사에게 갔다. 비인현감 신경징(申景澄)이 나갔다.
676
이 날 아랫도리 속옷을 벗겨서 아래에다 넣었다.
677
저녁나절에 나가 앉았다가 활 열 순을 쏘았다. 편지를 써서 본영으로 보냈다.
678
6월 초3일 (기해) 흐렸다. [양력 6월 28일]
679
아침에 제포만호 성천유(成天裕)가 교서에 숙배했다.
680
김량간(金良看)이 농사짓는 소를 싣고 나갔다.
681
새벽 꿈에 어린 아이가 태어난 지 겨우 대여섯 달인데 몸소 안았다가 도로 내려 놓았다.
683
6월 4일 (경자) 맑다. [양력 6월 29일]
684
식사를 한 뒤에 나가 앉았는데, 가리포첨사 ∙ 임치첨사 ∙ 목포만호 ∙ 남도포만호 ∙ 충청우후 및 홍주판관 등이 왔다. 활 일곱 순을 쏘았다. 우수사가 와서 다시 과녁을 그리고 활 열두 순을 쏘았다. 술에 취하여 헤어졌다.
685
6월 5일 (신축) 흐렸다. [양력 6월 30일]
686
아침에 박옥(朴玉) ∙ 무재(武才) ∙ 옥지(玉只) 등이 연습용 화살 백쉰 개를 만들어 바쳤다. 나가 앉았다가 활 열 순을 쏘았다.
687
경상우도 감사의 군관이 편지를 가져 왔는데, 감사는 혼사가 있어 서울로 올라 갔다고 했다.
688
6월 6일 (임인) 맑다. [양력 7월 1일]
689
사도(四道)의 여러 장수들이 모두 모여 활을 쏘고 술과 음식을 먹였다. 또 활쏘기 내기를 하여 승부를 가리고서 헤어졌다.
690
6월 7일 (계묘)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양력 7월 2일]
691
저녁나절에 나가 충청우후 등과 함께 활 열 순을 쏘았다.
693
6월 8일 (갑진) 맑다. [양력 7월 3일]
695
남도포만호의 본포 첩이 허씨 집으로 뛰어 들어가서 강짜 싸움을 했다고 한다.
696
6월 9일 (을사) 맑다. [양력 7월 4일]
697
일찍 나가 충청우후 ∙ 당진만호 ∙ 여도만호 ∙ 녹도만호 등이 활을 쏠 때에 경상수사가 와서 같이 활 스무 순을 쏘았다. 경상 수사가 잘 맞혔다.
698
이 날 일찌기 종 금이(金伊)가 본영으로 갔다. 옥지(玉只)도 갔다.
699
이 날 어두울 무렵 몹시 열이 나고 땀이 예사롭지않게 흘렀다.
700
6월 초10일 (병오) 비가 종일 쏟아지듯이 내렸다. [양력 7월 5일]
701
오정 때에 부산에서 편지가 와서 바치는데, 평의지(平義智)가 초9일에 대마도로 들어갔다고 했다.
702
6월 11일 (정미) 비오다가 저녁나절에 맑게 개었다. [양력 7월 6일]
704
6월 12일 (무신) 맑다. [양력 7월 7일]
705
심한 더위가 찌는 것 같다. 충청우후 등을 불러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707
6월 13일 (기유) 맑으며, 몹시 더웠다. [<양력 7월 8일]
708
경상수사가 술을 가지고 왔다.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경상수사가 잘 맞혔는데 김대복(金大福)이 으뜸이었다.
709
6월 14일 (경술) 맑다. [양력 7월 9일]
711
아침에 아들 회와 이수원(李壽元)이 같이 왔다.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했다.
712
6월 15일 (신해) 맑다. [양력 7월 10일]
713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우수사 ∙ 가리포첨사 ∙ 나주판관 등은 배탈이 났는지 병으로 말미를 청했다.
714
저녁나절에 나가 앉았다가 충청우후 ∙ 우후 ∙ 조방장 김완(金浣) 등 여러 장수들을 불러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715
이 날 일찌기 부산 허낸만(許乃隱萬)이 와서 왜놈의 정보를 전하기에 군량을 주어서 돌려 보냈다.
716
6월 16일 (임자) 맑다. [양력 7월 11일]
717
저녁나절에 경상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나가 앉았다가 활 열 순을 쏘았다.
718
저녁에 김붕만(金鵬萬) ∙ 배승련(裵承鍊) 등이 자리를 사가지고 진에 왔다.
719
6월 17일 (계축) 맑다. [양력 7월 12일]
720
저녁나절에 우수사가 왔다. 활 열다섯 순을 쏘고 헤어졌다. 수사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721
충청수사는 그 아버지의 제삿날이라 아뢰고 거망포(巨網浦: 걸망포)로 갔다.
722
6월 18일 (갑인) 맑다. [양력 7월 13일]
723
저녁나절에 나가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724
6월 19일 (을묘) 맑다. [양력 7월 14일]
726
저녁나절에 나가 앉았다가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이설(李渫)에게서 황정록(黃廷祿)의 형편없는 말과 발포 보리밭에서 스무여섯 섬이 났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727
6월 20일 (병진) 맑다. [양력 7월 15일]
728
어제 아침 곡포권관 장후완(蔣後琓)이 교서에 숙배한 뒤에 평산포만호에게 진작 진에 도착하지 않은 까닭을 문책할 적에, 기일을 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50여 일이나 물리게 된 것이라고 답했다. 그 해괴하기 짝이 없어 곤장 서른 대를 쳤다.
729
바로 이 날 오정에 남해현령이 들어와서 숙배한 뒤에 이야기하고서 활을 쏘았다. 충청우후도 왔다. 열다섯 순을 쏘고 안으로 들어가 남해현감 박대남(朴大男)와 자세히 이야기하다가 밤이 깊어 서야 헤어졌다.
730
임달영(任達英)도 왔는데, 소를 무역한 발기(견적서)와 제주목사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731
6월 21일 (정사) [양력 7월 16일]
732
내일이 제삿날이므로 공무를 보지 않았다. 아침에 남해현령을 불러 같이 아침 식사를 하고서 남해현령은 경상수사에게 갔다가 저녁에 되돌아와서 이야기했다.
733
6월 22일 (무오) 맑다. [양력 7월 17일]
734
할머니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남해현령과 종일 이야기했다.
735
6월 23일 (기미) 밤 두시쯤부터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7월 18일]
737
저녁나절에 남해현령은 경상수사에게 갔다. 조 방장 및 충청우후 ∙ 여도만호 ∙ 사도첨사 등을 불러 술과 고기를 먹였다. 곤양군수 이극일(李克一)도 와서 봤다.
738
저녁에 남해현감이 경상수사에게서 왔다. 술에 취하여 인사불성이다. 하동현감도 왔는데 본현으로 도로 보냈다.
739
6월 24일 (경신) 초복이다. 맑다. [양력 7월 19일]
740
아침에 나가 충청우후와 함께 활 열 다섯 순을 쏘았다. 경상수사도 와서 같이 쏘았다. 남해현감은 자기 고을로 돌아갔다.
741
투항해 온 왜놈 야에몬(也汝文) 등이 그의 또래 신시로(信是老: 信次郞)를 죽이자고 청했다. 그래서 죽이라고 명령했다.
742
남원의 김굉이 군량을 축낸 데 대해 증빙자료를 얻으러 여기 왔다.
743
6월 25일 (신유) 맑다. [양력 7월 20일]
744
일찍 나가서 서류를 처리해 보내고서 조방장 및 충청우후 ∙ 임치첨사 ∙ 목포만호 ∙ 마량첨사 ∙ 녹도만호 ∙ 당포만호 ∙ 회령포만호 ∙ 파지도권관 등이 왔다.
745
철전(鐵箭) 다섯 순, 편전(片箭) 세 순, 활 다섯 순을 쏘았다.
747
이 날 어두울 무렵에 몹시 더워 땀을 흘렸다.
748
6월 26일 (임술) 바람이 세게 불고 잠시 비왔다. [양력 7월 21일]
749
저녁나절에 나가 앉았다가, 철전(鐵箭) 및 편전(片箭)을 각 다섯 순씩 쏘았다.
750
왜놈 난에몬(亂汝文) 등이 말하는 자귀쟁이(耳匠木手)의 아내에게 곤장을 쳤다.
751
이 날 낮에 망아지 두 필에 떨어진 편자 네 개를 갈아 박았다.
752
6월 27일 (계해) 맑다. [양력 7월 22일]
753
나가 앉았다가, 조방장 김완(金浣) ∙ 충청우후 ∙ 가리포첨사 ∙ 당진포만호 ∙ 안골포만호 등과 함께 철전(鐵箭) 다섯 순, 편전(片箭) 세 순, 활 일곱 순을 쏘았다.
754
이 날 저녁에 송술(宋述)을 가두었다.
755
6월 28일 (갑자) 맑다. [양력 7월 23일]
756
명종의 나라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757
아침에 고성현령이 달려 와서 보고하기를,
758
"순찰사의 행차가 어제 벌써 사천에 이르렀다"
759
고 했다. 그러니 오늘은 응당 소비포에 이를 것이다.
761
6월 29일 (을축)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나절에는 개었다. [양력 7월 24일]
763
저녁나절에 나가 앉아서 공무를 본 뒤에 조방장 ∙ 충청우후 ∙ 나주통판과 함께 철전(鐵箭) ∙ 편전(片箭) ∙ 활(帿)을 아울러 열여덟 순을 쏘았다.
764
무더위가 찌는 듯하다. 초저녁에 땀이 줄줄 흘렀다.
765
남해현감의 편지가 왔다. 야에몬(也汝文)은 돌아갔다.
767
7월 초1일 (병인) 맑다. [양력 7월 25일]
768
인종의 나라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769
경상우순찰사(서성)가 진에 이르렀으나, 이 날은 서로 만나지 않았다. 그의 군관 라굉이 그의 장수의 말을 전하러 이곳에 왔다.
770
7월 초2일 (정묘) 맑다. [양력 7월 26일]
771
아침밥을 일찍 먹은 뒤에 경상순찰사영의 진으로 가서 순찰사와 함께 같이 이야기했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 새 정자로 올라가 앉았다. 편을 갈라 활을 쏘았는데, 경상순찰사 편이 진 것이 백예순 두 점(劃)이다. 종일 몹시 즐거웠다. 등잔불을 밝히고서 돌아왔다.
772
7월 초3일 (무진) 맑다. [양력 7월 27일]
773
아침밥을 일찍 먹은 뒤에 순찰사와 도사(都事)가 이 영에 와서 활을 쏘았다. 순찰사 편이 또 진 것이 아흔여섯 점이다.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775
7월 4일 (기사) 맑다. [양력 7월 28일]
776
아침밥을 일찍 먹은 뒤에 경상도 영으로 가서 순찰사와 서로 만 나 이야기했다. 조금 있다가 배로 내려가 같이 타고 포구로 나가 니, 여러 배들이 밖으로 줄지어 있었다. 종일 이야기하고 선암(仙巖) 앞바다에 이르러 닻을 걷고 출항하여 나뉘어 가면서 바라 보며서로 읍했다. 그 길로 우수사 ∙ 경상수사와 함께 같은 배로 들어왔다.
777
7월 5일 (경오) 맑다. [양력 7월 29일]
778
저녁나절에 나가 활을 쏘았다. 충청우후도 와서 같이 쏘았다.
779
7월 6일 (신미) 맑다. [양력 7월 30일]
780
일찍 나가 각 처의 공문을 처리하여 나누어 주었다.
781
저물 무렵에 거제현령 ∙ 웅천현감 ∙ 삼천포권관이 와서 봤다. 이곤변(李鯤變)의 편지도 왔다. 그 사연 속에는 입석(立石)의 잘못을 많이 말했다. 우습다.
782
7월 7일 (임신) 맑다. [양력 7월 31일]
783
경상우수사 및 우수사와 여러 장수들이 아울러 와서 잠깐 활 세 쾌(貫)를 쏘았다.
785
활장이 지이(智伊) ∙ 춘복(春卜)이 저녁에 본영으로 돌아갔다.
786
7월 8일 (계유) 맑다. [양력 8월 1일]
787
충청우후와 함께 활 열 순을 쏘았다. 체찰사의 비밀 표험(標驗?)을 받으러 갔다고 한다.
788
7월 9일 (갑술) 맑다. [양력 8월 2일]
789
아침에 체찰사에게 갈 여러 공문에 관인을 찍어서 이전(李田)이 받아 갔다.
790
저녁나절에 경상수사가 이곳에 와서 통신사가 탈 배에 풍석(風席: 돛만드는 돗자리)이 마련하기 어렵다고 여러번 말했다. 빌려 쓰고자 하는 뜻이 그 말하는 속에 보였다.
791
박자방(朴自邦)을 물을 끌어들일 대나무와 서울가는 사람이 요구하는 부채만들 대나무를 얻어 올 일로 남해로 보냈다. 오후에 활 열 순을 쏘았다.
792
7월 10일 (을해) 맑다. [양력 8월 3일]
793
새벽 꿈에, 어떤 사람이 멀리 화살을 쏘았고, 어떤 사람은 갓을 발로 차서 부수었다. 스스로 이것을 점쳐 보니, 멀리 활쏘는 것은 적들이 멀리 도망하는 것이요, 삭을 차서 부누는 것은 갓은 머리 위에 있는데 발길에 차 보이는 것으로서 이는 적의 괴수를 모조 리 잡아 없앨 징조라 하겠다.
795
"첨지 황신이 이제 명나라 사신을 따라가는 정사(正使)가 되고, 권황 이부사(副使)가 되어 가까운 시일에 바다를 건너 갈 것이니, 타고 갈 배 세 척을 정비하여 부산에다 대어 놓아라."
797
경상우후가 여기 와서 흰 무늬 돗자리 백쉰 닢을 빌려 갔다.
798
충청우후 ∙ 사량만호 ∙ 지세포만호 ∙ 옥포만호 ∙ 홍주판관 ∙ 전적도만호 고여우(高汝友) 등이 와서 봤다.
800
"춘원도(통영시 광도면)의 왜선 한 척이 도착하여 정박하였다."
801
고 했다. 그래서 여러 장수들을 뽑아 보내어 샅샅이 찾아내라고 전령했다.
802
7월 11일 (병자) 맑다. [양력 8월 4일]
803
아침에 체찰사에게 행정선(通文船) 일로 공문을 써 관인을 찍어보냈다.
804
저녁나절에 경상수사가 와서 바다를 건너 갈 격군과 뒤 따라 갈 것을 의논했다. 바다를 건너갈 양식이 스무세 섬인데, 새로 찧으니 스무한 섬이라 두 섬 한 말이 줄었다.
805
나가 앉았다가 몸소 활 세 쾌를 쏘는 것을 보았다.
806
7월 12일 (정축) 새벽에 비가 잠시 뿌리다가 곧 그치고 무지개가 한참이나 서 있었다. [양력 8월 5일]
807
저녁나절에 경상우후 이의득(李義得)이와서 뜸 열다섯 번을 빌려 갔다.
808
부산으로 실어 보낼 군량 흰쌀 스무 섬 ∙ 중쌀(中米) 마흔 섬을 차사원 변익성(邊翼星)과 수사(水使)의 군관 정존극(鄭存極)이 받아갔다.
809
조방장이 오고, 충청우후도 와서 활을 쏘았다.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한 남치온(南致溫)도 왔다.
810
7월 13일 (무인) 맑다. [양력 8월 6일]
811
명나라 사신을 따라 갈 우리나라 사신들이 탈 배 세 척을 정비하여 낮 열 시쯤에 떠나 보냈다.
812
저녁나절에 활 열세 순을 쏘았다. 어두울 무렵 항복해온 왜놈들이 광대놀이를 차렸다. 장수된 사람으로서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을 수는 없지만, 붙좇은 왜놈들이 놀이를 간절히 바라기에 못하게 하지 않았다.
813
7월 14일 (기묘) 새벽에 비가 뿌렸다. [양력 8월 7일]
814
이 날도 벌써 보름날이다. 저녁에 고성현령 조응도(趙凝道)가 와서 이야기했다.
815
7월 15일 (경진) 새벽에 비가 뿌렸다. [양력 8월 8일]
816
망궐례를 행하지 못했다. 저녁나절에 활짝 개었다.
817
경상수사 ∙ 전라우수사가 함께 모여 활을 쏘고서 헤어졌다.
818
7월 16일 (신사) 새벽에 비오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양력 8월 9일]
820
이 날 충청도 홍주 격군으로 신평에 사는 사삿집 종 엇복(於叱卜)이 도망가다 붙잡혔으므로 목베어 내다 걸었다. 하동현감 ∙ 사천현감이 왔다.
822
이 날 어두울 무렵 바닷달이 너무도 밝아서 혼자 수루 위에 기대었다. 밤 열 시쯤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823
7월 17일 (임오) 새벽에 비가 뿌렸다가 곧 그쳤다. [양력 8월 10일]
824
충청도 홍산에서 큰 도둑들이 일어나서 홍산현감 윤영현(尹英賢)이 잡히고, 서천군수 박진국(朴振國)도 잡혀갔다고 한다. 바깥 도둑도 없애지 못한 이 마당에 나라 안의 도둑들이 이러하니, 참으로 놀랍고도 놀라운 일이다.
825
남치온(南致溫) 및 고성현령 ∙ 사천 현감이 나갔다.
826
7월 18일 (계미) 맑다. [양력 8월 11일]
827
각 곳에 공문을 처리하여 나누어 보냈다.
828
충청우후 및 홍주 반자가 충청도 도둑들의 일을 듣고 와서 아뢰었다.
829
저녁에 투항해 온 왜놈 레나기(戀隱己) ∙ 야이(汝耳) ∙ 야몬(汝文) 등이 난야몬(南汝文)을 해치려고 흉모를 꾸미고 있다고 하였다.
830
7월 19일 (갑신) 맑으나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8월 12일]
831
난야몬(南汝文)이 레나기(戀隱己) ∙ 야이(汝耳) ∙ 야몬(汝文) 등을 목베었다.
832
우수사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경상우후 이의득(李義得) 및 충청우후(원유남) ∙ 다경포만호 윤승남(尹承男)이 왔다.
833
7월 20일 (을유) 맑다. [양력 8월 13일]
835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다.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니 기쁘고 다행이다.
836
그 편에 충청도 토적(이몽학)이 이시발(李時發)(巡按御史)의 포수에게 총맞아 즉사했다고 한다. 다행이다.
837
7월 21일 (병술) 맑다. [양력 8월 14일]
838
저녁나절에 나가 앉아 있으니, 거제현령 ∙ 나주판관 ∙ 홍주판관과 옥포만호 ∙ 웅천현감 ∙ 당진포만호가 왔다. 옥포에는 배 만드는데 쓸 양식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체찰사에 관계된 군량 스무 말을 주고, 웅천 ∙ 당진포에는 배 만들 쇠 열다섯 근을 함께 주었다.
839
이 날 아들 회가 방자 수(壽)에게 곤장쳤다고 했다. 그래서 아들을 붙들어다가 뜰 아래에서 잘 타일렀다.
841
통신사가 청하는 표범 가죽을 가지고 올려고 배를 본영으로 보냈다.
842
7월 22일 (정해)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8월 15일]
843
종일 나가지 않았다. 홀로 수루 위에 앉아 있었다.
844
종 효대(孝代) ∙ 팽수(彭壽)가 나가서 흥양의 군량선을 탔다.
846
"충청도 도둑들이 홍산에서 일어난 것을 곧 죽였다고 하는데, 홍주 등 세 고을이 포위를 당했다가 간신히 면했다"
848
한밤에 비가 많이 왔다. 낙안의 교대할 배가 들어왔다.
849
7월 23일 (무자) 큰 비가 내렸다. [양력 8월 16일]
850
오전 열 시쯤에 맑았다가 이따금 쏟아졌다.
851
저녁나절에 홍주판관 박륜(朴崙)이 휴가를 얻어서 나갔다.
852
7월 24일 (기축) 맑다. [양력 8월 17일]
853
현덕왕후(顯德王后:文宗의 王后 權氏의 祭祀) 나라제삿날이다. 이 날 우물을 고쳐 파는데로 갔다.
854
경상수사도 왔다. 거제현령 ∙ 금갑도만호 ∙ 다경포만호가 뒤따라 왔다. 샘줄기가 깊이 들어가 있고 물의 근원도 길다.
855
점심을 먹은 뒤에 돌아와 활 세 쾌(貫)를 쏘았다.
856
어두울 무렵 곽언수(郭彦守)가 표범가죽을 가지고 들어왔다.
857
이 날 밤 마음이 답답하여 잠이 오지 않았다. 인기척은 고요하여 앉았다 누웠다 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들었다.
858
7월 25일 (경인) 맑다. [양력 8월 18일]
859
아침에 공리(工吏)가 사냥한 것을 헤아리니 뿔이 열 개라 창고에 넣게 했다. 표범 가죽 및 꽃돗자리를 통신사에게 보냈다.
860
7월 26일 (신묘) 맑다. [양력 8월 19일]
861
이전(李筌)이 체찰사에게서 와서 표험(標驗) 세 벌을 가지고 왔다. 하나는 경상수사에게 보내고, 하나는 전라우수사에게 보냈다.
862
의금부의 나장이 윤승남(尹承男)(다경포만호)을 잡아 갈 일로 내려왔다.
863
7월 27일 (임진) 맑다. [양력 8월 20일]
864
저녁나절에 활터로 달려가서 길 닦는 일을 녹도만호에게 일러 주었다.
866
다경포만호 윤승남(尹承男)이 잡혀 갔다.
867
7월 28일 (계사) 맑다. [양력 8월 21일]
868
종 무학(武鶴) ∙ 무화(武花) ∙ 박수매(朴壽每) ∙ 우롬금(于老音金) 등이 스무엿새 날에 여기 왔다가 오늘 돌아갔다.
869
저녁나절에 충청우후와 더불어 활 세 쾌를 같이 쏘았다. 철전 서른여섯 푼, 편전 예순 푼, 보통 화살 스무여섯 푼 모두 백스무 세 푼(계산 착오인 듯. 합이 백스무둘임)이었다.
870
종 경이 많이 앓았다고 한다.무척 걱정이 된다. 고향 아산으로 한가위 제물을 보낼 때에 홍 ∙ 윤 ∙ 이 등 네 군데에 편지를 부쳤다.
871
밤 열시쯤에 꿈속에서까지 땀을 흘렸다.
872
7월 29일 (갑오) 맑다. [양력 8월 22일]
873
경상수사 및 우후가 와서 봤다. 충청우후도 아울러 와서 활 세 쾌를 쏘았는데, 내가 쏘던 활은 고자가 들떠서 곧 수리하라고 하였다.
874
체찰사에게서 과거보는 자리를 설치한다는 공문이 와 닿았다.
875
저녁에 점장이의 집을 맡아 지키던 아이가 세간을 몽땅 훔쳐 달아나버렸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876
7월 30일 (을미) 맑다. [양력 8월 23일]
877
새벽에 갈몰(葛沒)이 들어왔다. 밤 꿈에 영의정과 같이 조용히 이야기했다.
878
아침에 이진(李珍)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춘화(春花) 등도 돌아갔다.
879
김대인(金大仁)은 담제( 祭)를 지낸다고 휴가를 받아갔다.
880
저녁나절에 조방장이 와서 활을 쏘았다.
881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왔다.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한다.
882
임금의 분부가 두 통이 내려 오고 싸움에 쓸 말과 면의 말도 들어왔다.
883
지이(智伊)와 무재(武才)가 함께 왔다.)
885
8월 초1일 (병신) 맑다. [양력 8월 24일]
886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충청우후 ∙ 금갑도만호 ∙ 목포만호 ∙ 사도 첨사 ∙ 녹도만호가 와서 참례했다.
887
저녁나절에 파지도권관 송세응(宋世應)이 돌아갔다.
888
오후에 활터로 가서 말을 달리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889
부산에 갔던 곽언수(郭彦守)가 돌아와서 통신사의 회답 편지를 전했다.
890
어두울 무렵 비올 징후가 많았다. 그래서비오기 전에 장만할 것들을 시켜놨다.
891
8월 초2일 (정유) 아침에 비가 몹시 왔다. [양력 8월 25일]
892
지이(智伊) 등에게 새로 만든 활을 폈다가 굽혔다가 하게 했다.
893
저녁나절에 광풍이 세게 일어 빗줄기는 삼대 같아서 대청 마루에 걸어 둔 바람막이가 날라가 방 마루 바람막이에 부딪쳐 한꺼번에 두 바람막이가 깨어져 조가조각 나버렸다. 아까웠다.
894
8월 초3일 (무술) 맑다가 이따금 비가 뿌렸다. [양력 8월 26일]
895
지이(智伊)에게 새로 만든 활을 펴게 했다. 조방장 ∙ 충청우후가 와서 보기에 그대로 나가 활을 쏘았다. 아들들이 육냥궁(六兩弓)을 쏘았다.
896
이 날 저녁나절에 송희립(宋希立)과 아들들이 이름이 적힌 황득중(黃得中) ∙ 김응겸(金應謙)의 통행을 허락하는 증명서를 써서 주게 했다.
897
초저녁에 비가 오다가 밤 두 시쯤에야 그쳤다.
898
8월 초4일 (기해) 맑다. [양력 8월 27일]
899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들 회 ∙ 면 ∙ 조카 완(莞) 등이 아내의 생일술을 올리려고 나갔다. 정선도 나갔다. 정사립(鄭思立)이 휴가를 받아서 갔다.
900
저녁나절에 수루에 앉아서 아이들을 보내는 것을 보느라고 술잔이 시어지는 줄도 몰랐다.
901
저녁나절에 대청으로 나가 활 두어 순을 쏘았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활 쏘는 것을 멈추고 안으로 들어갔다.
902
몸은 얼어 터지는듯 떨려 곧 옷을 두껍게 입고 땀을 냈다. 저물 무렵 경상수사가 와서 문병하고 갔다. 밤에는 낮보다 갑절이나 아팠다. 끙끙 앓으며 밤을 지냈다.
903
8월 초5일 (경자) 맑다. [양력 8월 28일]
904
몸이 불편하여 나가지 않고 앉아 있었다. 이의득(李義得) 가리포첨사가 와서 봤다.
905
8월 초6일 (신축)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8월 29일]
906
아침에 조방장 김완(金浣) ∙ 충청우후 ∙ 경상우후 등이 문병을 왔다. 당포만호는 그 어머니의 병환이 심하다고 와서 알렸다. 경상수사 및 우수사 등이 와서 봤다. 조방장 배흥립(裵興立)이 들어왔다. 날이 저물어서 돌아갔다.
908
8월 초7일 (임인) 비오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양력 8월 30일]
909
몸이 불편하여 공무를 보지 않았다. 서울에 편지를 썼다.
910
이 날 밤 땀이 위 ∙ 아래 두 옷을 적셨다.
911
8월 초8일 (계묘)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8월 31일]
912
박담동(朴淡同)이 서울로 올라가는데 혼수를 승지 서성(徐 )에게 보냈다.
913
저녁나절에 강희로(姜熙老)가 이곳에 와서 남해현령의 병이 차즘 나아진다고 했다. 그와 함께 밤이 되도록 이야기했다.
914
중 의능(宜能)이 날삼(生麻) 백스무 근을 가져와서 바쳤다.
915
8월 9일 (갑진)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9월 1일]
916
아침에 중 수인(守仁)에게서 날삼(生麻) 삼백서른 근을 받아들였다.
917
하동현감이 종이를 다시 두드려 만든다고 도련지 스무 권, 주지 서른두 권, 장지 서른한 권을 김응겸(金應謙) ∙ 곽언수(郭彦守) 등에게 주어 보냈다.
918
마량첨사 김응황(金應璜)이 직무평가에서 하등급(居下)을 맞고 나갔다.
919
저녁나절에 나가 앉아서 공문을 처리하여 나누어 주었다. 활 열 순을 쏘았다.
920
몸이 몹시 불편하다. 밤 열 시쯤 되니 땀이 흘렀다.
921
8월 초10일 (을사) 맑다. [양력 9월 2일]
922
아침에 충청우후가 문병을 왔다가 그대로 조방장과 함께 같이 아침식사를 했다.
923
아침에 송한련(宋漢連)에게 날삼(生麻) 마흔 근을 그물을 만들도록 주어서 보냈다.
924
몸이 몹시 불편하여 한참동안 이나 베개를 베고 누워 있었다.
925
저녁나절에 두 조방장 및 충청우후를 불러다가 상화(床花)를 만는데 이를 같이 했다.
926
저녁에 체 찰사에게 보낼 공문에 관인을 찍었다.
927
어두워지니 달빛은 비단같고, 나그네 회포는 만갈래여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밤 열 시쯤에 방에 들어갔다.
928
8월 11일 (병오) 맑으나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9월 3일]
929
아침에 체찰사에게 갈 여러 공문에 관인을 찍어 내보냈다.
930
조방장 배흥립(裵興立)과 함께 같이 아침 식사를 하고 저녁나절에 그와 같이 활터(射場)에 가서 말달리는 것을 구경하고서 저물 무렵에 영으로 돌아왔다.
931
초저녁에 거제현령이 달려와서 보고한 내용에,
932
"왜적서 한 척이 등산(登山: 마산시 합포구 진동면)에서 송미포(松未浦:거제시 장목면 송진포)로 들어온다."
933
고 했다. 밤 열 시쯤에 또 보고하기를,
935
고 했다. 배를 정하여내어 보낼 즈음에 또 보고하여 말하기를,
937
고 했다. 그래서 복병장이 찾아서 잡았다.
938
8월 12일 (정미) 맑다. [양력 9월 4일]
939
샛바람이 세게 불어 동쪽으로 가는 배는 도저히 오갈 수가 없었다.
940
오랫동안 어머니의 안부를 알지를 못했으니, 몹시도 답답하다.
943
8월 13일 (무신) 맑다가 흐리며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9월 5일]
946
아침에 우(禹)씨가 곤장에 맞아 죽었다는 말을 듣고 장사지낼 물건을 약간 보냈다.
947
8월 14일 (기유)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9월 6일]
948
샛바람이 계속 불어 벼가 상했다고 한다. 조방장 배흥립(裵興立)과 충청우후와 같이 이야기를 중지시켰는데 땀나지는 않았다.
949
8월 15일 (경술) 새벽에 비가 내렸다. [양력 9월 7일]
951
저녁나절에 우수사 ∙ 경상수사 및 두 조방장과 충청우후 ∙ 경상우후 ∙ 가리포첨사 ∙ 평산포만호 등 열아홉 명의 여러 장수들이 모여서 이야기했다.
952
비가 종일 그치지 않았다. 초저녁이 지나니 마파람이 불면서 비가 많이 왔다. 밤 두 시 쯤까지 세 번이나 땀을 흘렸다.
953
8월 16일 (신해) 잠깐 맑다가 마파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9월 8일]
955
몸이 불편하여 종일 누워 끙끙 앓았다.
956
저녁에 체찰사가 진주성(晉城)에 왔다는 공문이 왔다.
957
다시 비 갠 뒤의 달빛이 너무 밝아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밤 열 시쯤에 누워서 가랑비가 또 내리다가 잠시후에 그치는 걸 봤다. 땀이 흘렀다.
958
8월 17일 (임자) 맑고 흐림이 서로 섞여서 개기도 하고 비가 오기도 했다. [양력 9월 9일]
959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충청우후 ∙ 거제현령이 아울러 와서 봤다. 이 날 샛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960
체찰사 앞으로 사람을 찾으러 내보내었다.
961
8월 18일 (계축) 비가 오락가락 했다. [양력 9월 10일]
962
한밤 자정에 죄인에게 특사를 내리는 조칙문을 가지고 온 차사원 구례현감(이원춘)이 들어왔다.
964
8월 19일 (갑인) 흐리다가 맑다가 했다. [양력 9월 11일]
965
새벽에 우수사와 여러 장수들과 함께 죄인에게 특사내리는 조칙문에 숙배하고 그대로 그들과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967
송의련(宋義連)이 본영에서 아들 울(蔚)의 편지를 가지고 들어왔는데,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했다. 다행이다.
968
저녁나절에 거제현령과 금갑도만호가 이곳에 와서 이야기했다.
970
어두울 무렵 자귀쟁이(耳匠) 옥지(玉只)가 재목에 치어서 중상을 입었다고 보고 받았다.
971
8월 20일 (을묘) 샛바람이 세게 불다. [양력 9월 12일]
972
새벽에 전선(戰船)을 만들 재목을 끌어내리는 일로 우도군사 삼 백 명, 경상도군사 백 명, 충청도군사 삼백 명, 전라좌도군사 삼 백아흔 명을 송희립(宋希立)이 거느리고 갔다.
973
늦은 아침에 조카 봉 ∙ 해와 아들 회 ∙ 면 ∙ 조카 완(莞)과 최대성(崔大晟) ∙ 윤덕종(尹德種) ∙ 정선 등이 들어왔다.
974
8월 21일 (병진) 맑다. [양력 9월 13일]
975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에 가서 아들들에게 화살 쏘는 연습 과 말달리며 활을 쏘는 것을 시켰다.
976
조방장 배흥립(裵興立) ∙ 조 방장 김완(金浣)과 충청우후가 아울러 왔다. 같이 점심을 먹고 저물어서 돌아갔다.
977
8월 22일 (정사) 맑다. [양력 9월 14일]
978
외조모의 제삿날이라 나가지 않았다.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979
8월 23일 (무오) 맑다. [양력 9월 15일]
980
활터에 가 보았다. 경상수사도 와서 같이 보았다.
981
8월 24일 (기미) 맑다. [양력 9월 16일]
982
8월 25일 (경신) 맑다. [양력 9월 17일]
983
우수사 ∙ 경상수사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984
8월 26일 (신유) 맑다. [양력 9월 18일]
985
새벽에 출항하여 사천에 이르러 머물러 잤다. 충청우후와 함께 종일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986
8월 27일 (임술) 맑다. [양력 9월 19일]
987
일찍 길을 떠나 사천현에 이르렀다. 점심을 먹은 뒤에 그대로 진주성(晉城)으로 가서 체찰사(이원익)를 뵙고 종일 의논했다. 저물 무렵에 진주목사(나정언)의 처소로 돌아와서 잤다. 김응서도 왔다가 곧 돌아갔다.
988
이 날 어두울 무렵 이용제(李用濟)가 들어왔는데, 역적 도당의 편지를 지녔었다.
989
8월 28일 (계해) 맑다. [양력 9월 20일]
990
이른 아침에 체찰사 앞으로 가서 종일 여쭙고 의논하여 결정하고, 초저녁이 지나서 진주목사의 처소로 돌아왔다. 진주목사와 함 께 밤이 깊도록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992
8월 29일 (갑자) 맑다. [양력 9월 21일]
993
일찍 떠나 사천현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은 뒤에 그대로 가서 선소리(사천시 용남면 선진리)에 이르렀다.
994
고성현령(조응도)도 왔다. 삼천포권관과 이곤변(李鯤變)이 술을 가지고 뒤따라 도착했다. 밤들도록 같이 이야기하고 구라량(仇羅梁)에서 잤다.
996
윤8월 초1일 (을축) 맑다. [양력 9월 22일]
998
이른 아침에 비망(飛望) 밑에 이르러 이곤변(李鯤變) 등과 함께 같이 아침식사를 하고 서로 헤어졌다.
999
저물어서 진중에 이르니, 우수사 ∙ 경상수사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수사와는 서로 만나서 이야기했다.
1000
윤8월 2일 (병인) 맑다. [양력 9월 23일]
1002
저녁나절에 경상수사 ∙ 우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경상수사와 함께 활터 정자 마루로 갔다.
1003
윤8월 3일 (정묘) 맑다. [양력 9월 24일]
1004
윤8월 4일 (무진) 비가 내렸다. [양력 9월 25일]
1006
윤8월 5일 (기사) 맑다. [양력 9월 26일]
1007
활터 마루에 가서 아이들(아들들을 말함)이 말달리고 활쏘는 것을 구경했다.
1008
하천수(河天壽)가 체찰사 앞으로 갔다.
1009
윤8월 6일 (경오) 맑다. [양력 9월 27일]
1010
아침밥을 먹은 뒤에 경상수사 및 우수사와 함께 활터 마루로 가서 말달리고 활쏘는 것을 구경하고 저물어서 돌아왔다.
1013
윤8월 7일 (신미) 맑다. [양력 9월 28일]
1014
아침에 아산의 종놈 상시(向是)가 들어왔다. 가을보리는 소출이 마흔석 섬이고, 봄보리는 서른다섯 섬이며, 물고기로 바꾼 쌀은 모두 열두 섬 네 말인데, 또 일곱 섬 열 말이 나고, 또 네 섬이 났다고 했다.
1015
이 날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를 보고 솟장을 처리하여 나누어 주었다.
1016
윤8월 8일 (임신) 맑다. [양력 9월 29일]
1017
식사를 한 뒤에 활터 마루로 가서 말달리고 활쏘는 것을 구경했다.
1018
광양현감 ∙ 고성현령이 시험관으로서 들어왔다. 하천수(河天壽)가 진주에서 왔다.
1019
수하에 부리는 병졸 림정로(林廷老)가 휴가를 받아 나갔다.
1021
윤8월 9일 (계유) 맑다. [양력 9월 30일]
1022
아침에 광양현감이 교서(敎書)에 숙배했다.
1023
조카 봉(菶) ∙ 아들 회(薈) 및 김대복(金大福)이 교지(官敎)에 숙배하고서 그대로 이들과 함께 이야기했다.
1024
이 날 밤에 우수사 ∙ 경상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1025
윤8월 10일 (갑술) 맑다. [양력 10월 1일]
1026
이 날 새벽에 과거 초시(初試)를 보였다.
1027
저녁나절에 면(葂)이 쏜 것은 모두 쉰다섯 보이고, 봉()이 쏜 것은 모두 서른다섯 보이고, 해(荄)가 쏜 것은 모두 서른 보이고, 회(薈)가 쏜 것은 모두 서른다섯 보이고, 완(莞)이 쏜 것은 스무다섯 보라고 했다. 진무성(陳武晟)이 쏜 것은 모두 쉰다섯 보여서 합격하였다.
1028
어두울 무렵 우수사 ∙ 경상수사 ∙ 조방장 배흥립(裵興立)이 같이 와서 밤 열 시쯤에 헤어져 돌아갔다.
1029
윤8월 11일 (을해) 맑다. [양력 10월 2일]
1030
체찰사를 기다릴 일로 출항하여 당포에 이르니, 초저녁에 체찰사 에게 문안갔던 사람이 돌아와서, "14일에 떠난다."고 하였다.
1031
윤8월 12일 (병자) 맑다. [양력 10월 3일]
1032
종일 노를 바삐 저어 밤 열 시쯤에 어머니 앞에 이르니, 흰머리 카락이 에부수수하신데, 나를 보고는 놀라 일어나셨다.
1033
기력은 숨이 곧 끊어질 듯하여 아침 저녁을 보전하시기 어렵겠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밤새도록 위안하며 기쁘게 해 드리면서 그 마음을 풀어 드렸다.
1034
윤8월 13일 (정축) 맑다. [양력 10월 4일]
1035
아침 식사를 곁에서 모시고 드시게 하니 대단히 기뻐하시는 빛이다. 저녁나절에 하직인사를 여쭙고 본영으로 왔다.
1036
오후 여섯 시 쯤 작은 배를 타고 밤새도록 노를 바삐 저었다.
1037
윤8월 14일 (무인) 맑다. [양력 10월 5일]
1038
새벽에 두치(豆恥:하동읍 두곡리)에 이르니, 체찰사와 부찰사가 어제 벌써 도착하여 잤다고 한다. 뒤미처 점검하는 곳으로 가서 소촌찰방을 만나고 일찍 광양현에 이르렀다.
1039
지나온 지역이 한결 같이 쑥대밭이 다 되어 그 참상은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었다. 임시로나마 전선 정비하는 것을 면제해 주어 군사와 백성들의 마음을 풀어 주어야겠다.
1040
윤8월 15일 (기묘) 맑다. [양력 10월 6일]
1041
일찍 떠나 순천에 이르니 체찰사 일행이 순천부 청사에 들어갔다 고 했다. 그래서 나는 정사준(鄭思竣)의 집에서 묵었다. 순찰사도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1042
저녁에 아들들이 참시관이 되었다고 들었다.
1043
윤8월 16일 (경진) 맑다. [양력 10월 7일]
1045
윤8월 17일 (신사) 맑다. [양력 10월 8일]
1046
저녁나절에 낙안으로 향하여 그 군에 이르니 이호문(李好問) ∙ 이지남(李智男) 등이 와서 보고 고치기가 어려운 폐단이 오로지 수군에 있다고 진술했다.
1047
종사관 김용(金涌)가 서울로 올라갔다.
1048
윤8월 18일 (임오) 맑다. [양력 10월 9일]
1049
일찍 떠나 양강역(陽江驛)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나서 산성(고흥군 남양면 대곡리)으로 올라가 멀리 바라보며 각 포구와 여러 섬들을 손가락으로 짚어 주었다. 그 길로 흥양(고흥읍)으로 향했다.
1050
저물 무렵에 흥양현에 이르러 향소청(鄕所廳)에서 잤다.
1051
어두워서 이지화(李知和)가 제 물건을 뽐내려고 거문고를 가지고 왔다. 영(英)도 와서 보고 밤새도록 이야기했다.
1052
윤8월 19일 (계미) 맑다. [양력 10월 10일]
1053
떠나서 녹도(고흥군 도양면 녹도)로 가는 길에 도양(도덕면 도덕리)의 둔전을 살펴 보았다. 체찰사는 매우 기뻐하는 빛이 많았다. 녹도에서 잤다.
1054
윤8월 20일 (갑신) 맑다. [양력 10월 11일]
1055
일찍 떠나 배를 타고 체찰사와 부찰사와 함께 같이 앉아 종일 군사 일을 이야기했다.
1056
저녁나절에 백사정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에 그 길로 장흥부에 이르렀다.
1057
나는 관청의 동헌에서 잤다. 김응남(金應男)이 와서 봤다.
1058
윤8월 21일 (을유) 맑다. [양력 10월 12일]
1059
그대로 머물러 자는데 정경달(丁景達)이 와서 봤다.
1060
윤8월 22일 (병술) 맑다. [양력 10월 13일]
1061
저녁나절에 병영(해남군 병영면 성남리 병영)에 몸을 던져 원균과 서로 만나 보고 밤이 깊도록 이야기했다.
1062
윤8월 23일 (정해) 맑다. [양력 10월 14일]
1063
윤8월 24일 (무자) [양력 10월 15일]
1064
나는 부찰사(한효순)와 같이 가리포(완도군 완도읍 군내리)로 갔더니, 우우후 이정충(李廷忠)도 먼저 와 있었다.
1065
남쪽 망대(남망봉 해발 150m)로 같이 올라가니, 좌우에는 적들이 다니는 길과 여러 섬들을 역력히 헤아릴 수 있었다.
1066
참으로 한 도(一道)의 요충지이다. 그러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롭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이진(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으로 옮겨 합치기로 했다.
1067
병영에 이르러서는 원균의 흉한 행동을 적지 않았다.
1068
윤8월 25일 (기축) [양력 10월 16일]
1069
일찍 떠나 이진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에 곧 해남으로 갔다. 도중에 김경록(金景祿)이 술을 차고 와서 봤다. 어느 결에 날이 저물어 횃불을 밝히고 가니, 밤 열 시께에야 해남현에 이르렀다.
1070
윤8월 26일 (경인) 맑다. [양력 10월 17일]
1071
일찍 떠나 우수영(해남군 문내면)에 이르렀다. 나는 곧 태평정(太平亭)에서 자고서 우후와 함께 이야기했다.
1072
윤8월 27일 (신묘) 맑다. [양력 10월 18일]
1073
체찰사가 진도에서 영(우수영)으로 들어왔다.
1074
윤8월 28일 (임진) 비가 조금 내렸다. [양력 10월 19일]
1076
윤8월 29일 (계사) 비가 조금 내렸다. [양력 10월 20일]
1077
이른 아침에 남여역(男女驛: 해남군 황산면 남리리)에 이르렀다. 점심을 먹은 뒤에 해남현에 이르렀다. 소국진(蘇國秦)을 본영(전라좌수영)으로 보냈다.
1079
9월 초1일 (갑오) 비가 뿌렸다. [양력 10월 21일]
1081
일찍 떠나 석제원(강진군 성전면 성전리)에 이르렀다. 점심을 먹은 뒤에 영암에 이르러 향사당(鄕舍堂)에서 잤다.
1082
정랑 조팽년(趙彭年)이 와서 봤다. 최숙남(崔淑男)도 와서 봤다.
1083
9월 초2일 (을미) 맑다. [양력 10월 22일]
1085
9월 3일 (병신) 맑다. [양력 10월 23일]
1086
아침에 떠나 나주의 신원에 이르렀다. 점심을 먹고 나서 나주판관을 불러다가 고을의 일들을 물었다.
1087
저물 무렵에 나주에 이르렀다. 별관의 종 억만(億萬)이 와서 신원(新院)에서 알현했다.
1088
9월 4일 (정유) 맑다. [양력 10월 24일]
1089
나주에서 머물렀다. 어두울 무렵 목사(李福男)가 술을 가지고 와서 권했다. 일추(一秋)도 술잔을 가져 왔다.
1090
이 날 아침에 체찰사와 함께 문묘에 절했다.
1091
9월 5일 (무술) 맑다. [양력 10월 25일]
1093
9월 6일 (기해) 맑다. [양력 10월 26일]
1094
먼저 무안의 일로 가겠다고 체찰사에게 보고하고 일을 떠났다. 고막원(古莫院: 나주시 다시면 고막리)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1095
나주감목관 나덕준(羅德駿)이 뒤쫓아와서 서로 만났다. 이야기 하는 중에 강개한 일이 많았다. 그래서 그와 함께 오랬동안 이야기하다가 저물어서 무안에 이르러 잤다.
1096
9월 7일 (경자) 맑다. [양력 10월 27일]
1097
감목관 나덕준(羅駿) 및 무안현감(남언상) 함께 민폐에 관한 이야기했다. 한참 있다가 정대청(鄭大淸)이 들어왔다고 했다. 그래서 그를 청하여 앉아 이야기했다.
1098
저녁나절에 떠나 다경포(무안군 운남면 성내리)에 이르러, 영광군수와 함께 밤 열 시쯤이나 되게 이야기했다.
1099
9월 8일 (신축) 맑다. [양력 10월 28일]
1100
나라제삿날(世祖의 祭祀)인데도 오늘 새벽에 조반(早飯)에 고기를 올려 놓았다. 그래서 나는 먹지도 않고 도로 내놓았다.
1101
아침밥을 먹은 뒤에 길을 나서서 감목관에 이르니 감목관과 영광군수는 같이 있었다. 국화 떨기 가운데로 들어가서 술 두어 잔을 마셨다.
1102
저물어서 동산원(東山院: 무안군 현경면 옹산원;瓮山院)에 이르러 말을 먹였다. 말을 재촉하여 임치진(해제면 임수리)에 이르니, 이공헌(李公獻)의 딸 여덟 살짜리 아이와 그 사촌의 계집종 수경(水卿)이 같이 와서 알현했다. 이공헌(李公獻)을 곰곰히 생각하니 참혹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다.
1103
수경(水卿)은 곧 이염(李琰)의 집에서 내다 버렸는데, (이공헌이) 얻어다가 기른 아이이다.
1104
9월 9일 (임인) 맑다. [양력 10월 29일]
1105
일찍 일어나서 임치첨사 홍견(洪堅)을 불러 방비책을 물었다.
1106
아침 식사를 한 뒤에 뒷성(後城)으로 올라가 형세를 살펴보고 동산원으로 돌아왔다. 점심을 먹은 뒤에 함평현에 이르렀다.
1107
도중에 한여경(韓汝璟)을 만났으나, 말위에서는 만나 보기가 어려우므로 타일러서 함평으로 들어갔다.
1108
함평현감은 경차관을 마중하러 나갔다고 했다. 김억창(金億昌)도 같이 함평에 왔다.
1109
9월 10일 (계묘) 맑다. [양력 10월 30일]
1110
몸도 노곤하고 말도 힘들 것 같아서 함평에 머물러 잤다.
1111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에 무안의 정대청이 와서 함께 이야기했다. 고을 유생도 많이 들어와 폐단된 일을 진술했다.
1112
저녁에 도사(都事)가 들어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밤 열 시쯤에 헤어져 나갔다.
1113
9월 11일 (갑진) 맑다. [양력 10월 31일]
1114
아침식사를 하고나서 영광으로 갔다. 도중에 신경덕(辛慶德)을 만나 잠깐 이야기하고 영광에 이르니, 영광군수가 교서에 숙배한 뒤에 들어와 같이 이야기했다. 이 때 산월(山月)도 와서 보고 술마시며 이야기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누명을 벗길 수 없었다.
1115
9월 12일 (을사) 바람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양력 11월 1일]
1116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십리쯤 되는 냇가에 이르니, 이광보(李光輔)와 한여경(韓汝璟)이 술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안세희(安世熙)도 왔다.
1117
저물 무렵에 무장(茂長)에 이르렀다. 여진(女眞)과 잤다.
1118
9월 13일 (병오) 맑다. [양력 11월 2일]
1119
이중익(李仲翼) 및 이광축(李光軸)도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이중익(李仲翼)이 말을 많이 하다가 막히어서 급하게 되니 옷을 벗고서 그에게 관여하며 종일 이야기했다.
1120
9월 14일 (정미) 맑다. [양력 11월 3일]
1121
하루 더 묵었다. 여진(女眞)과 두번 관계했다.
1122
9월 15일 (무신) 맑다. [양력 11월 4일]
1123
체찰사가 현(무장현)에 이르렀다고 하므로 들러가 절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1125
9월 16일 (기유) 맑다. [양력 11월 5일]
1126
체찰사 일행이 고창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에 장성에 이르러서야 잤다.
1127
9월 17일 (경술) 맑다. [양력 11월 6일]
1128
체찰사와 부찰사는 입암산성(立巖山城: 정주시 입암면 임암산 해발 655m)으로 가고, 나는 혼자 진원현(장성군 진원면 석전리 진원)에 이르러 진원현감과 같이 이야기했다. 종사관도 왔다.
1129
저물어서 관청 안으로 들어가니 두 조카딸이 나와 앉아 있었다. 오랫동안 못보았던 감회를 풀고 도로 작은 정자로 나가 진원현감 및 여러 조카들과 밤들도록 같이 이야기했다.
1130
9월 18일 (신해) 비가 조금 내렸다. [양력 11월 7일]
1131
식사를 한 뒤에 광주에 이르러 광주목사(최철견)와 이야기했다.
1132
비가 많이 오더니, 한밤에는 달빛이 대낮 같았다. 밤 두 시쯤에 비바람이 세게 일었다. 영의정
1133
9월 19일 (임자) 바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양력 11월 8일]
1134
아침에 행적(行迪)이 와서 봤다. 진원(珍原)에 있는 종사관의 편지와 윤간(尹侃) ∙ 봉(菶) ∙ 해(荄)의 문안 편지도 왔다.
1135
이 날 아침 광주목사(최철견)가 와서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이어서 술이 나와 밥을 먹지 않아서 취해버렸다. 광주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몹시 취했다.
1136
오후에 능성현령(李繼令)이 들어와서 곳 간을 봉하고 광주목사를 체찰사가 파면시켰다고 했다.
1137
최철견의 딸 최귀지(崔貴之)가 와서 잤다.
1138
9월 20일 (계축) 비가 많이 내렸다. [양력 11월 9일]
1139
아침에 각가지 사무보는 색리들의 죄를 논란했다.
1140
저녁나절에 광주목사를 보고 길을 떠나려 할 즈음에 명나라 사람 두 명이 이야기 하자고 청하므로 술을 먹였다.
1141
길을 떠났으나 종일 비가 내려 멀리 갈 수가 없어 화순에 이르러 잤다.
1142
9월 21일 (갑인) 개다가 비오다가 했다. [양력 11월 10일]
1143
일찍 능성(화순군 능주면)에 이르러 최경루(最景樓)에 올라가 연주산(連珠山)을 바라보았다. 이 고을 원이 술을 청했다. 그래서 잠깐 취하고서 헤어졌다.
1144
9월 22일 (을묘) 맑다. [양력 11월 11일]
1145
아침에 각가지의 죄를 논란했다. 저녁나절에 나가 이양원(화순군 이양면 이양리)에 이르니, 해운판관(海運判官)이 먼저 와 있었다. 내가 가는 것을 보고 이야기하고자 청하므로 그와 함께 이야기했다.
1146
저물어서 보성군에 이르니 몸이 몹시 고단하여 잤다.
1147
9월 23일 (병진) 맑다. [양력 11월 12일]
1148
머물렀다. 나라제삿날(太祖의 神懿王后 韓氏 祭祀)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1149
9월 24일 (정사) 맑다. [양력 11월 13일]
1150
일찍 떠나 병사 선거이(宣居怡)의 집에 이르니, 선거이의 병이 매우 중태였다. 염려된다. 저물어서 낙안에 이르러 잤다.
1151
9월 25일 (무오) 맑다. [양력 11월 14일]
1152
색리 및 선중립(宣仲立)의 죄를 논란했다. 순천에 이르러 순천 부사와 함께 같이 이야기했다.
1153
9월 26일 (기미) 맑다. [양력 11월 15일]
1154
일이 있어 더 머물렀다. 저녁에 순천부의 사람들이 소고기와 술을 차려 놓고 나오기를 청했다. 굳이 사양했으나 부사(府使)의 간청으로 잠깐 나가 마시고서 헤어졌다.
1155
9월 27일 (경신) 맑다. [양력 11월 16일]
1157
9월 28일 (신유) 맑다. [양력 11월 17일]
1158
남양 아저씨의 생신이라 본영으로 왔다.
1159
9월 29일 (임술) 맑다. [양력 11월 18일]
1160
아침밥을 먹은 뒤에 동헌으로 나가 공문에 관인을 찍었다. 종일 앉아서 사무를 봤다.
1161
9월 30일 (계해) 맑다. [양력 11월 19일]
1162
옷 담아 둔 농을 꺼내어 둘은 곰내로 보내고, 하나만 본영(여수)에 남겨 두었다.
1163
저녁에 선유사(宣諭使)의 군관 신탁(申省)이 와서 군사들을 위하여 위로연을 베풀 날짜를 말하였다.
1165
10월 초1일 (갑자) 비가 오고 바람이 세게 불다. [양력 11월 20일]
1166
새벽에 망궐례를 행하고 식사를 한 뒤에 어머니를 뵈러 가는 길에 신 사과(司果)가 임시로 살고있는 집에 들어가서 몹시 취하여서 돌아왔다.
1167
10월 초2일 (을축)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11월 21일]
1168
배를 다니게 할 수가 없었다. 청어 잡은 배가 들어왔다.
1169
10월 3일 (병인) 맑다. [양력 11월 22일]
1170
배를 돌려 어머니를 모시고 일행과 더불어 배를 타고 본영(여수)으로 돌아와 종일토록 즐거이 뫼시었다.
1171
이 날도 다 갔는데, 흥양현감이 술을 가지고 왔다.
1172
10월 4일 (정묘) 맑다. [양력 11월 23일]
1173
식사를 한 뒤에 객사 동헌에 앉았다가 일어나 종일 공무를 봤다.
1174
저녁에 남해현령이 오면서 그 첩을 데리고 왔다.
1175
10월 5일 (무진) 흐렸다. [양력 11월 24일]
1176
남양 아저씨 집안에 제사라 일찍 부르기에 갔다가 왔다. 남해 현령과 함께 이야기했다.
1178
순천부사는 석보창(여천시 석창)에서 잤다.
1179
10월 6일 (기사) 바람 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양력 11월 25일]
1180
이 날은 잔치를 차리지 못하고 이튿날로 물리었다. 저녁나절에 흥양현감 ∙ 순천부사가 들어왔다.
1181
10월 7일 (경오) 맑고 따사했다. [양력 11월 26일]
1182
일찍 수연을 베풀고 종일토록 즐기니 참으로 다행이다. 남해현감은 그 선대의 제삿날이어서 먼저 돌아갔다.
1183
10월 8일 (신미) 맑다. [양력 11월 27일]
1184
어머니께서 몸이 편안하시다니 참으로 다행이다. 순천부사와 작별의 잔을 나누고 보냈다.
1185
10월 9일 (임신) 맑다. [양력 11월 28일]
1187
종일 어머니를 모셨다. 내일 진중(한산도?)으로 들어갈 일로 어머니께서는 많이 서운한 빛이었다.
1188
10월 10일 (계유) 맑다. [양력 11월 29일]
1190
한밤 한 시쯤에 뒷방으로 갔다가 밤 두 시쯤에 수루의 방으로 돌아왔다. 정오에 아뢰고 나갔다.
1191
오후 두 시쯤에 배를 타고 바람따라 돛을 달고 항해하면서 밤새도록 노를 재촉하여 왔다.
1192
10월 11일 (갑술) 맑다. [양력 11월 30일]
1193
(** 1596년(병신) 10월 11일 뒷 장에 7장에 걸쳐 나와 있는 자료이다.)
1194
10월 초9일 진무성(陳武晟)이 청어 4300 두름을 싣고 왔다.
1195
1596년(병신) 9월 29일 을미(임진년 기간에 9월 29일의 간지가 을미인 날이 없음)에 대를 베어서 다시 계산하니 91부가 창고안에 들어 있었다.
1196
1596년(병신) 5월 23일에 상품의 큰 대 30개, 다음 대 60개, 중치 대 60개 모두 150개를 박옥 ∙ 옥지 ∙ 무재 등이 받아다 만들어 바쳤다. 계납할 물건 안에 기름 먹인 종이 비옷 100자, 기름 먹인 종이 20자, 만장할 종이 100자, 보통 종이 15권, 흰종이 2권.
1197
1596년(병신) 3월 초6일에는 육냥궁(六兩弓) 6장에서 뽕나무로 만 든 활 6장에서 1장은 울궁(蔚弓)이고 세궁(細弓)이 2장이다.
1198
1596년(병신) 9월(日은 月의 오기인 듯) 30일(日이 없음) 온전한 것 안에서 공히 109이고 쓸만한 것이 50으로 모두 3통 29이다.
1199
>>> 2월 26일 큰대, 중치 대로 상품이 57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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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를 잡아서 양식을 대는 데, 임달영(任達英)은 제주의 농사짓는 소를, 송한련(宋漢連) ∙ 갑사 송한(宋漢) ∙ 송성(宋晟) ∙ 이종호(李宗浩) ∙ 황득중(黃得中) ∙ 오수(吳壽) ∙ 박춘양(朴春陽) ∙ 류세충(柳世忠) ∙ 강소작지(姜所作只) ∙ 강구지(姜仇之)에게 아울러 포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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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향유사로 곡식바치는 참봉(종9품) 조응복(曺應福) ∙ 벼슬하지 않은 선비 하응문(河應文) ∙ 류기룡(柳起龍)이 같이 힘을 썼고, 정(正) 김덕린(金德麟), 대구훈 정 김계신(金繼信), 창신도 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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