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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기적 프로예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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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3
권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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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기적 프로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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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계급의 예술이란 어떠한 것이냐? 즉 계급예술의 본질이란 어떠한 것이냐? 다시 말하면 어떠한 내용과 형식을 가진 예술이 무산계급의 예술이냐? 이 문제에 대하여서는 조선의 계급문학 운동이 발생한 이래로 문단 제가의 논의가 자못 분운(紛紜)하여 왔다. 필자도 이에 대하여 수 삼차 우견을 발표한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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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계급예술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려 하는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중대시하지 않은 좌경 분자들의 착각적 논법 같은 것은 별문제로 치고라도, 사도(斯途)에서 분투하는 즉, 계급예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며 이것의 기반을 확립하기에 노력을 다하는 좌경 문인들 사이에도 오히려 갑론을설이 통일을 얻지 못하고 사이비적 이도(異途)에서 각각 방황하는 관이 없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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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은 결코 비관할 상태는 아니다. 무엇이나 다 마찬가지로 아직 그 발생 시일이 천박하니 만치 확고한 정견이 서지 못할 것은 사실이요, 따라서 논의가 잡다한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 자꾸자꾸 얼마든지 토의하며 논란하여 나아가는 사이에 자연히 그 정체가 대중의 앞에 발현될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 또한 여기에서 우견(愚見)의 일단을 논술함도 스스로 무의미한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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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계급의 본질이란 어떠한 것이냐?’ 이 문제를 생각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계급문화의 본질이란 어떠한 것이냐?’ 이것을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왜 그러냐하면 「부르주아」문화를 떠나서 「부르주아」예술을 논할 수 없는 만치 「프롤레타리아」의 문화를 떠나서 또한 「프롤레타리아」의 예술을 논할 수 없는 까닭이다. 즉, 다시 말하면 예술이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물론하고 그 시대 그 사회의 한 부분에 불과한 만큼 그 문화적 작용 여하에 의하여 예술도 변천하는 것이니(형식과 내용이 함께) 오늘날 「프롤레타리아」의 문화란 어떠한 것이냐? 이것을 선명히 하는 여하에 의하여 「프롤레타리아」의 예술의 본체는 자연적으로 설명될 것인 까닭이다. 즉, 다시 말하면 예술이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물론하고 그 시대 그 사회의 한 부분에 불과한 만큼 그 문화적 작용 여하에 의하여 예술도 변천하는 것이니(형식과 내용이 함께) 오늘날 「프롤레타리아」의 문화란 어떠한 것이냐? 이것을 선명히 하는 여하에 의하여 「프롤레타리아」의 예술의 본체는 자연적으로 설명될 것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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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의 문화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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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기 ―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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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기 ―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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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기 ― 전 인류의 문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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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대별한 세 시기 중에서 제3기의 문화는 그것이 계급을 타파한 이후의 문화 즉, 전 인류의 해방을 완성한 이후의 문화니 만치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프롤레타리아」의 문화는 아닌 것이다. 그 자의와 마찬가지로 전 인류의 복리를 위한 공존공영의 문화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의 문화적 가치와 그 의의를 설명하기 위하여서는 제3기보다는 제3기의 도달을 근본 목표로 하는 준비기 또는 과정기인 제1기, 제2기 즉, ××전기와 후기가 요론의 적중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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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상한 구별이 필자의 독단일는지 모르나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프롤레타리아」사회로 변천하는 과정에 있어서 전기와 후기를 분하여 「프롤레타리아」의 문화적 작용이 일률로 같지 않은 것은 맑스의 「꼬 - 타 강령비평」과 러시아의 공산당 강령만을 비교해 보아도 명료히 지각할 사실이다. 전자에 있어서는 「프롤레타리아」는 국가적 세력을 교육으로부터 배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나 후자에 있어서는 공산주의 사상의 선전을 원조하기 위하여 국가는 일체의 기관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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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한번 더 쉽게 말하면 전기에 있어서는 자본주의의 문화를 부정 또는 배척하기 위한 대항운동이요, 후기에 있어서는 「프롤레타리아」의 ××를 완성하는 정돈행위다. 즉 전자는 ××적이요 후자는 교화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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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트칼트·인터내셔널」의 운동 같은 것은 전기에 해당하는 「프롤레타리아」의 전투적, ××적 문화운동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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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오늘날 조선에 있어서는 「프롤레타리아」의 지위는 어떠한가? 즉 전기에 속하는가 후기에 속하는가? 더 말할 것 없이 전기 중에서도 아주 초기에 속한 것은 유치를 막론하고 공인하는 사실이다. 이것은 조선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문화 세력이 의연히 구(舊) 진용을 보존하고 있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전 세계적으로 「프롤레타리아」의 문화적 운동은 이것이 전기에 속한 것이 사실이다. (러시아는 차한(此限)에 부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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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더 말할 것 없이 전기적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오늘날 「프롤레타리아」는 일체의 행동을 계급투쟁 일점에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즉 「부르주아지」문화에 대한 「프롤레타리아」문화의 대항 운동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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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트칼트」운동은 ××주의의 실제적 발전에 불외한다. 이 운동은 필연적으로 「로맨틱ㆍ무 - 멘트」의 성질을 띠고 있다. 왜 그러냐 하면 그것은 기성문화의 완성운동은 아니다. 어떠한 비약적 의미에서라도 그것은 기성문화의 연장 또는 부분적 개조운동도 아니다. 그것은 전연한 새 것을 수립하는 운동인 동시에 구(舊) 사회의 일체의 것을 ××하는 ××적 운동인 까닭이다.”라고 평림(平林) 씨는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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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루나찰스키는 그의 저 『노동자의 독립교육』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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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으로 해방을 하려고 싸우는 「프롤레타리아」의 문화는 ― 전기 ― 투쟁에 기(基)한 계급적 문화다. 그것은 「로맨틱」이다. 그리고 그 내용이 강렬한 까닭에 형식의 정돈은 없다. 그것은 그 폭풍적 비극적 내용을 일정적으로 완전한 형식을 갖추기까지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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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발달 계급에 달한 계급 및 국민문화는 그것이 고전적이다. 그러하나 자기를 표현하려고 싸우는 계급은 「로맨틱」이다. 그리고 이 「로맨티시즘」은 「스쓰름 운트, 트랭크」의 전형적 특색을 갖춘 것이다. 쇠퇴기에 이른 계급은 이것과는 별종의 즉, 유울적(幽鬱的)ㆍ환멸적ㆍ퇴폐적인 「로맨티시즘」의 형태를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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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양씨의 관찰에서 우리는 어디까지든지 ××전기의 「프롤레타리아」의 일체 행동은 전투적이요 폭풍적이요 ××적이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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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신흥계급의 문화는 언제나 늘 기성 계급문화에 대항하며 도전하여 온 것은 우리의 과거사가 증명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 「르네상스」시대, 18세기 말엽으로부터 19세기로 바뀌는 시대 ― 이 시기에 처한 즉, ××전기의 「프롤레타리아」의 문화는 낭만적이요 폭풍적이며 비극적이요 ××적이다. 기성 문화의 부정으로부터 일어나는 근본적 ××문화의 운동이다. 그것은 부분적 문화의 부정으로부터 일어나는 근본적 ××문화의 운동이다. 즉, 그것은 부분적 개조운동이 아닌 까닭이다. 부분적 개조라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현 사회의 제도를 그대로 두고서 어떠한 부분만을 개조하여 보겠다는 것은 병근(病根)을 불치하고서 환자의 원기를 회복하려하는 치의(痴醫)나 다름이 없는 우둔한 생각이다. 독류(獨流)의 연원을 그대로 두고서 하류의 맑기를 도모하는 것과 같은 망상이다. 사회의 개조는 일반적 개조가 아니면 안 된다. 일부국적(一部局的) 개조가 아니요, 제도 그 물건의 근본적 개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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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 일반적 개조운동은 현 제도 즉 「부르주아」의 일체의 것을 부정하는 의미에서 일어나는 것인 만큼 결코 기성문화주의와 타협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요 적극적 대항운동만이 필요한 것이니 이것은 오로지 오늘날 사회의 각 방면에서 착취와 ××을 받는 피지배자 즉, 「프롤레타리아」의 자력에 의한 ××적 행동에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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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술한 개의에 의하여 무산계급의 예술이란 어떠한 의의와 임무를 가진 것인가를 비록 불충분하나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프롤레타리아」의 예술 운동은 이상에 대별한 3개 문화기 중에 제3기의 것도 아니요, 제2기의 것도 아니다. 제3기ㆍ제2기의 도달을 근본 목표로 한 제1기 즉, ××전기의 「프롤레타리아」문화운동의 일 부대에 속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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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술한 바와 같이 「프롤레타리아」의 문화적 작용과 그 의의를 시간적 구분이 없이 일률로 정의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의 예술도 이것을 일언으로 그 본질적 가치를 단언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시기에 따라 ― 전기와 후기 ― 각각 그 작용이 다른 까닭이다. 그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전기의 「프롤레타리아」문화운동은 진정한 「프롤레타리아」문화의 수립을 목적으로 한 준비운동에 그칠 뿐이요, 곧 「프롤레타리아」문화 자체의 완성운동은 아닌 것이다. 당초에도 말하였거니와 「프롤레타리아」문화의 3시기 중에 제3기의 문화가 「프롤레타리아」의 독재적 문화가 아닌 동시에 제1기의 「프롤레타리아」문화도 또한 정확한 의미의 「프롤레타리아」의 문화는 아닌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없는 곳에 「프롤레타리아」를 소유한 예술 내지 문화가 있을 수 없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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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누구는 “무산자는 계급적으로 조성되기 전에는 본질상 무산계급의 예술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니 그것은 경제상으로 비소유 계급은 정신적으로도 비소유 계급이요, 정치상으로 피지배계급은 정신상 지식상으로도 피지배계급인 까닭이다.”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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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전기에 처한 우리로서 진정한 의미의 「프롤레타리아」의 예술적 문화적 본질을 운위하는 것은 전연 무가치한 일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은 마치 태아의 관상을 논하는 것과 같은 우치(愚癡)한 짓이 아니면 개념의 유희다. 무엇보다도 태아가 건상상태로 출산되기를 바라며 이것을 위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우리의 임무는 오로지 산파역을 다 함께 그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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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망 롤랑은 그의 저 『민중예술론』 결말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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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군은 평민 예술을 욕구하는가? 그렇거든 먼저 평민을 가지는 데에서부터 비롯하라. 그 예술을 오락할 수 있는 자유적 정신을 가지고 있는 평민을, 그리고 용사(容赦)없는 노동과 빈궁에 짓밟히지 않는 여가 있는 평민을, 모든 미신과 우당 혹 좌상의 광신에 미혹하지 않는 평민을, 스스로서의 주인공이 되는 그리고 목하 싸우고 있는 이 투쟁의 승리자인 평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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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가 오늘날 가질 예술은 어떠한 예술인가? 또 어떠한 예술이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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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협의적으로 예술을 위한 예술권, 내전(內戰)에 국한된 예술이어서는 안 된다. 전 무산계급의 ××를 위한 광의의 예술이어야만 한다. 이에서 우리는 새삼스레 도전예술, 선전예술이라는 말을 강조 안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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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모든 우수한 문학은 다 저널리즘이다. 저널리즘은 최고의 문학이다.” 이와 같은 의미의 박론(駁論)을 써서 막스 놀루 박사의 『퇴폐』를 공격하였다. 쑈 - 전의 말에 의하면 선전 문학이야말로 곧 최고의 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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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드칼트」의 제1 목적은 ― ××전기 ― 전투문화의 탄생 발전에 공헌하지 않은 일체의 것을 배척하며 ××하는 데에 있다”고 누구는 말하였다. 물론 예술에 있어서도 이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집단적 생활을 압박하는 권위 ― 「부르주아」의 문화제도 ― 를 배척하며 ××하기 위한 반항, 이것이야말로 우리들의 명료한 태도인 동시에 우리들의 장실(葬失)된 생명을 찾는 유일한 무기인 것이다. 이 반항의 수단으로는 ××가 있을 뿐이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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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술한 바와 같이 ××전기의 「프롤레타리아」예술은 전투 일점에 순화 집중하는 도전예술, 선전예술이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하면 반동파 예술군(우경분자)들은 사도예술이라든가 또는 예술 아니라고까지도 비웃으며 욕하리라. 물론 사도예술이나 신흥예술이 구예술로 부터 이단예술․사도예술이라는 비난과 조소를 받는 것은 과거의 예술사가 이미 논한 바 같이 우리는 어떠한 비난을 그네들에게 듣더라도 그네들의 입장으로서는 이것이 무리한 주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선의로 해석하여서 그네들의 자유에 맡기어 둘 따름이다. 새삼스럽게 분개할 졸렬한 우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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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벌에게 자본주의 사회 이외에 다른 새 사회가 가능한 것을 들리어주기 곤란할 만큼 「부르주아」예술가에게 「부르주아」예술 이외의 예술이 또 있다는 것을 알아듣도록 설명하기는 자못 곤란 이상의 곤란한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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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든 시대를 통하여 하소연 하려하는 예술은 결국 어떠한 시대에도 하소연할 힘이 없는 것이요, 모든 인류에게 감동을 주려하는 예술은 결국 한 사람에게도 충실한 감동을 줄 수 없는 것이다. 도적놈에게 도적놈의 도덕이 따로 있고 평민에게는 평민의 도덕이 따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개의 도덕관은 각각 딴 길을 밟고 있는 만큼 서로 조화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이것을 일률로 정의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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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엄연한 계급적 사실을 앞에 놓고서 상대계급의 공통한 이론을 도득(圖得)하려 하는 예술은 결코 어떠한 계급의 이론이나 사상도 대표하지 못하는 즉, 향훈과 생명이 없는 조화와 같은 예술이 되고 말 것이라는 이 사실만은 예술의 좌당 우당을 따로 논할 것 없이 함께 감명(鑑銘)하여 두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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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오늘날 「프롤레타리아」의 예술은 무산민중에게는 희망을 줄 것이나 특권계급에게는 전율 밖에 줄 것이 없는 것이니 저들에게는 이것이 곧 사도예술인 까닭이다. 저들 특권계급에 대한 민중의 항의이니 만큼 비예술인 까닭이다. 그러하나 계급적으로 서로 이해가 다르니 만큼 그 표준 행진곡이 또한 다름에야 어찌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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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여기에서 오늘날 「프롤레타리아」의 예술 문제는 국한된 예술 문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요 곧 한걸음 나아가서 전 무산민중의 문제라는 이유가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순수 예술학적 문제가 되기 전에 보다 더 광의적인 사회적 시설 문제인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전기의 「프롤레타리아」예술 문제는 일반적 사회 개조의 직접 문제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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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삼 반복하거니와 전기의 「프롤레타리아」의 예술은 명료한 전투 예술이요 선전 예술이다. 기성 예술 ― 문화를 부정하는 부정 예술이다. 구(舊) 사회는 그의 일체 부속물과 함께 무산민중을 압박하여왔다. 그러므로 구 사회의 일체의 것을 우리는 여지없이 그 사회와 함께 부정하며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 같이 논하면 그야말로 인류 문명의 파괴주의라고 말할 분이 계실는지도 모르나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가치 있는 물건이며 그것은 그 폐허로부터 자연히 소생을 할 것이니 이것은 러시아가 잘 반증하고 있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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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조선(祖先)이 남긴 가치 있는 예술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기성문화와 함께 파괴의 용로에 집어던지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의 문화에 대한 추호의 미련이라도 남아 있을 때에 우리는 벌써 ××전선의 전위대에 나설 용감한 투사의 자격을 잃는 것이다.”라고 ××는 말하였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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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도 말한 바와 같이 오늘날 「프롤레타리아」의 예술 문제는 국한된 예술해부학적 문제가 아닌 것은 물론이거니와 제2기 즉 ××후기의 문제도 아니요 더욱이 제3기의 문제도 아니다. 오로지 제1기 즉 투쟁기에 한한 예술적 문제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프롤레타리아」의 예술을 출산하기 위한 준비문제는 될지언정 「프롤레타리아」예술의 본질적 문제는 아니다. 곧 사회적 시설 문제다. 근본적 부정으로부터 일어나는 일반적 개조 문제다. 여기에서 나는 더 한번 오늘날 우리의 예술은 부정예술·선전예술·도전예술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을 역설하여 둔다. 그리고 루나찰스키의 말을 빌어서 그 내용이 강렬하니만큼 정제한 형식을 따로 가질 수 없다는 말을 부언하여 둔다. 피를 대함에는 피로써 할 뿐이다. 오로지 피에 타는 행동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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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말하면 물론 수긍하지 않는 동지도 있으리라. 개중에는 ‘선전을 위한 문학’을 부정하여 이것을 일종의 기계론에 부치고 말 동지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투쟁적 사실을 당면한 계급문화의 본질적 사명을 몰각한 오견(誤見)이다. 그는 말하기를 선전적이라 하면 탐미파·낭만주의·자연주의·인도주의를 따로 말할 것 없이 어느 것이나 자기네의 사상 감정을 선전하지 않는 문학이 없다고 한다. 그야 이와 같은 억설을 고집하려 하면 어느 것이 하나 투쟁문학 아닌 것이 없을 것이며 또 계급문학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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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프롤레타리아」의 문학과 전자가 다른 것은 전자는 예술적 내용을 제 일의로 함에 반하여 후자 즉 「프로」문학은 사상적 내용을 제 일의로 하는 점이다. 즉 전자는 예술적 충동에서 출산되는 것이나 후자는 목적의식론적 견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전자는 소위 작자의 자연적 심경의 투영일지나 후자는 작가의 사회적 임무가 강제적 실천행동이다. 전자는 자동적이나 후자는 능동적이다.
 
49
또 흔히 「프롤레타리아」의 문학은 「부르주아」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문학으로서의 문학 즉 표현, 기교, 형식 등을 구비한 문학이 아니면 안 된다고들 주장을 한다. 나도 물론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문제는 ××후기 즉 ××주의의 사회가 실현된 다음에나 할 소리요 결코 오늘날에 앉아서는 적당치 못한 말이니 만큼 시기상조론인 것을 안 말할 수가 없다. 이상에도 말하였거니와 이와 같은 공론은 태아의 관상론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계급이 없는 곳에 계급문학이 홀로 출산될 수 없는 까닭이다.
 
50
소수의 자각 분자를 제외하고는 오늘날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은 그 대부분이 「프롤레타리아」의식에 지배를 받고 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제일보는 계급적 단결이 있을 뿐이니 「프롤레타리아」의 예술가는 마땅히 이에 가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이것을 방해하는 일체의 것에 도전을 하는 타면으로 대중적 계급적 단결을 전위에 나서서 군호(軍號)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에서 또 늘 한번 오늘 「프롤레타리아」의 예술은 곧 전투적이요 선전적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을 반복하자.
 
51
어쨌든 무산계급의 예술의 「프로그램」앞에는 어떠한 예술론이나 미학설도 아무러한 능력을 갖지 못한다. 남아 있는 것은 다만 역사적 사명을 다하는 임무 이것뿐이다.
 
52
물론 이 사명을 다한 「프롤레타리아」는 전일과 그 지위가 전도될 것이다. 즉 피지배 계급으로부터 지배계급이 될 것이니 이때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무산계급의 예술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소위 예술로서의 필요적 조건을 구비한 형식과 내용이 조화된 예술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한 계급을 더 올라서서는 전 인류의 공존공락할 지상의 예술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53
그러나 금일은 ××후기의 금일이 아니라 ××전기의 금일인 것을 즉, 형식을 말하고 질서를 말하고 정돈을 말할 금일이 아니라 구 사회의 일체의 것을 부정으로부터 출발하는 금일인 것을 우리는 염두에서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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