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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음의 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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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8
이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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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의 향기
 
 
2
장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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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다 좋은 것이요, 길바닥에 밟히우는 하찮은 한 송이라도 버리기 어려운 것이지만 강잉히 꼭 한 가지만을 고르라면 장미를 취할까. 모양이며 빛깔이며 향기며, 장미는 뭇 꽃을 대표할만하다. 장미의 상징이 공통되고 단일함도 그 까닭일 듯하다. 장미의 호화로운 특징은 누구에게나 직각적이요 선명하다. 번스가 노래한 장미도 르노아르가 그린 장미도 그 속뜻과 상징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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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의 집 뜰에 봄부터 줄기장미가 놀랍게 서린 것을 부러워 여겼더니 기어코 두어 주일 병석에 눕게 되어 그 장미를 여러 차례나 선사로 받게 되었다. “아침 일찍이 뜰에 나가 보니 이렇게 크고 고운 게 피었기에 혼자서 보기가 아까워 몇 가지 보냅니다. 귀엽게 보아 주세요”하는 글발과 함께 분홍과 주황과 연지빛의 각각 탐스러운 송이송이를 베어서 아이를 시켜서 보내 왔다. 무슨 선사인들 꽃만큼 좋으랴. 연지빛 송이를 바라보며 나른한 기력에도 정신이 새로워짐을 느꼈다. 꽃을 볼 때와 음악을 들을 때같이 사람이 산 보람을 느끼는 때는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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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찾으니 뜰 안 군데군데에 줄기줄기 피어오른 만타(萬朶)의 화려함이 이루 방안에서 병에 꽂은 몇 송이를 바라볼 때의 운치가 아니다. 장미는 호화로운 잔칫상이다. 자연의 커다란 사치다. 욱욱한 향기가 숲 속에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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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냄새는 늘 무슨 냄새 같을꼬 생각하면서 송이를 코끝에 시험해보니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과실 냄새 같음에는 의견이 일치되나 무슨 과실이라고는 아무도 대번에 단정하지 못한다. 한참이나 후에야 나는 비로소 그것이 별것 아닌 서양 배(梨)의 냄새인 것을 큰 발견이나 한 듯이 외쳤다. 장미 냄새는 궤 속에서 잘 무른 라 프랑스나 바아트렛의 냄새다. 누렇게 익은 서양 배의 냄새 ⎯ 그것은 동양의 냄새는 아니다. 장미의 냄새는 바로 구라파의 냄새인 것이다. 동양의 아무 냄새도 그 같은 것은 없다. 장미는 바로 그곳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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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를 보내는 예의도 또한 그런 것일까. 붉은 장미를 보내거나 흰 장미를 보낼 때 바로 보내는 이의 정감의 표현이라는 것일까. 이방의 풍속의 여하는 모르나 장미의 선물은 바아트렛의 냄새와 같이 웬일인지 이국적인 것으로 느껴짐이 사실이다.
 
8
장미가 뭇 꽃 중에서 으뜸 가듯이 장미의 선물은 보다 더 반갑고 좋다. 향기와 함께 그 상징이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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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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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주되 몸을 허락하지 않는 사랑이 있고, 몸은 수월하게 바치되 마음은 종시 헤치지 않는 사랑이 있다. 이것은 반드시 모순이 아닌 것이며 사랑에는 확실히 이 두 가지 타입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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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몸을 함께 바치고 신령과 육체가 일치됨이 참된 사랑이라는 것은 벌써 하나의 상식이요, 따라서 사료(思料)의 대상으로는 진부하게 되었다. 몸은 수월하게 바치되 마음을 허락지 않는 것은 사랑이라고는 할 수 없을는지 모른다. 정감과 심리의 전제가 없는 단순한 육체의 용인은 일종의 작희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안가(安價)한 교역인 까닭이다. 마음을 얻지 못할 때 그것은 육체를 얻지 못했을 때 이상으로 섭섭하고 안타까운 것이다. 차라리 마음을 얻으면 얻었지 육체의 만족이란 무엇 하는 것이랴. 그것은 항상 서글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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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솔곳이 바치면서도 몸은 마지막까지 지키는 곳에 길어도 다하지 않는 사랑의 진미가 있을 법하다. 마음은 이미 피차의 것인 것이나 서로의 사정에 의해 몸만은 어쩌는 수 없이 타부인 경우 ⎯그같이 파세틱하고 애달프고 아름다운 경우는 없다. 내향적인 열정을 고이고이 기르면서 절제와 극기로 부단히 몸을 매질해 가는 자태에는 일종 종교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비상한 교양과 지의 연마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남자의 편에서 볼 때 그런 여인은 참으로 사랑에 값가고 존경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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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테는 베르테르에게 눈물을 머금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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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년 동안 당신을 사모해 오면서 하루 한시도 잊은 적이 없어요. 당신은 제게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어요. 지금 제게 사랑이 있어도 없는 것이요, 앞으로 새 사랑이 생길 리도 만무해요. 일종의 숙명인 것도 같아요. 자나깨나 그저 당신의 모양이 눈앞에 선하고 생각할수록 가슴이 뻐개지는 것 같아요. 몸부림을 친들 시원할까요, 이렇게 꼬치꼬치 야위어 가면서요. 누가 사랑을 즐겁고 행복스런 것이라고 했던지요. 사랑은 이렇게 괴롭고 쓰린 것을요. 후세에 다시 태어나 또 이런 사랑을 하게 된다면 전 물론 안 태어나고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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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의 부부생활을 기피하고 지내온 지도 벌써 여러 해째예요. 마음으로 딴 것을 생각하면서야 남편에겐들 어찌 몸을 바치겠어요. 죽으려곤들 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겠어요 . 시원스럽게 죽었으면 모든 것을 잊어버릴 것 같아서요. 그러나 죽지 못하는 한 죽을 때까지 당신을 못 잊겠어요. 죽을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의 환영을 마음속에 부둥켜안고 갈 테예요. 그러는 수밖엔 어쩌는 수 없어요. 그것이 작정된 얄궂은 길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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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소리도 안하려다가도 이렇게 때때로 마음속을 토하곤 해요. 쓸데없는 말을 하면 다 무엇 하겠어요. 모두 거짓말로 생각해 주세요. 당신을 사랑하긴 누가 사랑해요. 다 거짓말예요. 거짓말예요. 아, 쓰라려, 가슴이 오장육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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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알뜰한 마음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그 얼마나 행복스런 것일까. 불행하면서도 얼마나 행복스러울까. 육체의 문제는 벌써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마음의 따뜻함이 체온을 잊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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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역시 몸보다 윗길인 것일까. 뭐니뭐니해도 정신이 역시 더 높고 귀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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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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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스물 다섯 해 동안 사모하고 찾아다니다가 스물 다섯 해만에 찾아낸 날 기쁨과 흥분의 절정에서 드디어 목숨을 다해 버렸다는 소설을 읽고 나는 울어 버렸다. 괴테나 로망롤랑의 소설을 읽은 이상의 감동이었다.
 
21
“이것이 사랑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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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격하고 탄식하면서 눈물이 쉽사리 마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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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에서도 이름 높은 영국의 귀족부인이 젊은 로서아의 사관을 사랑했다. 대전 전에 일을 보러 로서아를 방문했던 것이 거기에서 우연히 사관을 만나게 되어 첫눈에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구혼했다가 거절을 당하매 다시 후일이 있음을 생각하고 일단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 대전이 터졌다. 전쟁이 지난 후 다시 로서아를 찾았을 적에는 사관도 싸움에 휩쓸려 종무소식 ⎯ 이때부터 부인에게는 순례의 길이 시작된다. 종적도 모르거니와 생사의 소식조차 모르는 애인을 찾아 삼 대륙을 건너고 산과 물과 사막을 넘고 지나면서 십여 년의 세월을 허비한다. 그 정성에 하늘도 감동한 것일까. 기어코 사랑하는 사관을 찾아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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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어떤 거리에서 호텔의 소제부로 영락한 그의 자태를 발견하고 한시도 잊을 리가 없었던 마음의 눈으로 즉시 그임을 알아냈다. 감격과 흥분과 눈물과! 이번에는 기어코 결혼의 승낙을 받고 ⎯ 흥분은 너무 컸다. 돌연히 몸을 떨고 침대에 누운 채 ⎯ 격동 끝에 그대로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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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사랑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사랑이라고 할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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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을 날이 없는 열정과 거룩한 희생과 순교자적인 지조 ⎯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싶다.
 
27
땅 위의 것이 아닐 듯싶다. 사람이 어떻게 태어나면 그런 정성을 바칠 수 있고 사람이 어떻게 태어나면 그런 헌신적인 사랑에 값가는 것일까. 사랑을 바치는 이도 성자이지만 사랑을 받는 이도 사람이 아니라 이상의 타신(他身)이요, 영감의 근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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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테아 부인은 이 세상의 사람은 아니다. 적어도 오늘의 여인은 아닌 것이다. 지구의 구석구석을 찾아도 이런 여인이 있을 법하지는 않다. 경박한 습속 속에서 이런 성자를 찾으려 함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29
하물며 이런 사랑을 꿈꾸는 것은 더없이 어리석은 짓일 법하다. 그러나 다만 꿈꾸어 보는 것만도 얼마나 기꺼운 일이랴. 피가 솟고 눈물겨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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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것조차 어리석은 짓이라면 백보를 물러서 소설로라도 한번 써보고 싶다. 다른 드로테아 부인을 또 한 사람 창조해 보고 싶은 것이다. 이 정도의 꿈이라면 용인되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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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광 1941. 8
【원문】녹음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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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효석(李孝石) [저자]
 
  조광(朝光) [출처]
 
  1941년 [발표]
 
  수필(隨筆)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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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11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