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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재야회록(書齋夜會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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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한(申光漢)
1
서재야회록(書齋夜會錄)
 
 
2
선비가 한 사람 있었다. 이름은 밝혀 적지 않는다. 고풍(古風)스러운 것을 좋아하고 기개가 높아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다. 집은 아주 가난하였으나 뜻은 활달하였다. 일찍이 달산촌(達山村)에다가 작은 오두막을 하나 지어 놓고 문 밖 출입을 끊고 그 곳에서 지내며, 오직 책 읽는 데에만 재미를 붙이고 살았다. 이웃조차도 그의 얼굴을 못 본 지가 여러 해 되었다. 해는 대황락(大荒落), 중추(仲秋) 보름 이틀 전, 산 속 서재(書齋)에 비가 막 개어 밤 기운이 맑고 서늘하였다. 맑은 하늘엔 은하가 흐르고 밝은 달빛 아래 이슬이 내렸다. 쓸쓸히 송옥(宋玉)이 가을을 슬피 노래했던 심정이 느껴지고 한 줄기 이백이 달을 감상했던 감흥이 일었다. 서당을 걸어 나와 뜰을 거닐며 혼자서 시를 읊었다.
 
 
3
떵떵 나무 찍는 산 속 개울 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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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그러니 솟은 서재 홀로 이웃도 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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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속엔 약 찧는 가련한 옥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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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잔 들고 누구와 달세계 이야기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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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숲속 때때로 이슬 지는 소리
8
사립은 말끔히 한 점 티끌도 없어라
9
봉루를 떠나온 지 이제 몇 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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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을 어떻게 만날까 다시 마음이 슬퍼지네.
 
 
11
이렇게 읊고 나서 몇 번이고 탄식을 하였다. 밤 공기가 썰렁하여 잠은 달아나 버리고 해묵은 오동나무를 더듬어서 기대어 앉았다. 이때 밤은 이미 삼경(三更)을 넘었고 전혀 인적이 없었다. 문득, 마소리인 듯 웃음소리인 듯, 소곤소곤하는 소리가 서실(書室) 안에서 흘러나왔다. 선비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숨을 죽이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들어보았다. 그랬더니, 과연 서실에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선비는 혹시 도둑이 들었나 생각하고 맨발로 살금살금 바싹 다가가서 살펴보았다. 이때 달빛이 창문으로 흘러들어 방안은 낮처럼 환했다. 창틈으로 가만히 엿보았다. 방 안에는 네 사람이 둘러앉아 있는데, 생김새가 다 다르고 옷차림도 모두 달랐다. 한 사람은 치의(緇衣)를 입고 현관(玄冠)을 썼는데 무게가 있고 꾸밈이 없었으며 나이가 가장 많았다. 한 사람은 반의(班衣)를 입고 탈모(脫毛)하였는데 맨머리 상투가 위로 불쑥 솟았고 기품이 날카로웠다. 한 사람은 백의(白衣)를 입고 윤건(輪巾)을 썼는데 용모가 흰 옥과 흰 눈처럼 깨끗했다. 한 사람은 흑의(黑衣)를 입고 흑모(黑帽)를 썼는데 얼굴이 검푸르고 매우 못생기고 작달막하였다. 네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12
"누가 무(無)로 몸을 삼고 생(生)을 임시로 가탁한 것으로 보고 사(祀)를 본래의 참모습으로 여길 수 있을까? 누가 동(動)과 정(靜), 흑(黑)과 백(白)이 같은 이치라는 것을 알까? 그런 자가 있으면 내가 그와 친구가 되리라."
 
13
하였다. 네 사람이 서로 쳐다보며 웃고 말하기를,
 
14
"사(私)와 여(與)와 리(梨)와 래(來) 정도라면 막역한 친구 사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
 
15
하고 무릎을 당겨 바싹 다가앉았다. 백의자(白衣者)가 말하기를,
 
16
"오늘 밤 주인이 집에 없는 것을 틈타 우리가 방을 독차지하고 즐기고 있으니, 너무 방자한 행동이 아니겠는가?"
 
17
하였다. 탈모자(脫毛者)가 머리를 저으며 말하기를,
 
18
"주인께서 세상을 등지고 외진 곳에 살면서 함께 지내는 자라곤 우리들뿐이었다. 우리가 살갗을 문질러대고 뼈를 갈아내고 머리를 적시고 등을 축축히 젖게 하면서 일을 맡아 해온 지 오래다. 그런데 나는 노둔하다는 놀림을 당했고, 자네는 경박하다는 나무람을 들었으며, 저 사람은 운명이 다하였고, 이 사람은 이가 빠져 못 쓰게 되었다. 앞으로 주인과 더불어 지낼 날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런 자리에서 한 마디 아니하기에는 저 고운 달이 너무나 아깝구나."
 
19
하였다. 그러고는 원진의 "흰 머리 늙은이 어디로 갈거나? 님 향한 붉은 마음 아직도 남았는데" 라는 시구를 외고는 수 차례 오열하였다. 좌중이 모두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백의자가 말하기를,
 
20
"한갓 남관초수(南冠楚囚)의 행실이나 본받아 둘러앉아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어떻게 회포를 달랠 수 있으리요."
 
21
하였다. 이어 탈모자에게 농담을 걸며 말하기를,
 
22
"자네는 머리가 검으면서 '흰 머리'라 하고 속이 텅 비어 마음이 없으면서(無心) '붉은 마음(丹心)'이 있다고 하니, 될 말인가?"
 
23
하였다. 탈모자가 웃으며 말하기를,
 
24
"고루하다. 구망씨(勾芒氏)는 시를 모르는구나. 이 사람이 어찌 흰 바탕에 채색을 한다는 뜻을 알겠는가?"
 
25
하였다. 흑의자(黑衣者)가 치의자(緇衣者)에게 눈짓을 하고 말하기를,
 
26
"두 사람은 입을 다물게. 절차탁마(切嗟琢磨)를 할 수 있어야 함께 시를 이야기할 수 있는 거라네."
 
27
하였다. 치의자(緇衣者)가 농담으로 말하기를,
 
28
"나는 타산지석(他山之石)이 옥(玉)을 다듬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먹을 다듬는다는 말은 못 들었네."
 
29
하였다. 흑의자가 말하기를,
 
30
"그래, 과연 옥이 아니란 말이지?"
 
31
하였다. 드디어 서로들 손을 함께 잡고 웃었다. 탈모자가 말하기를,
 
32
"시를 읊고 싶은 흥이 한 번 일어나니, 늙은 줄도 모르겠다. 단편(短篇)을 한 수 지어 세 분을 위해 읊어 보겠네."
 
33
하고는, 이어 시를 읊기를,
 
 
34
성긴 주렴 빈 휘장 낮처럼 밝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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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롱한 이슬빛에 가을 달 높이 떴네.
36
머리는 하얗지만 작은 글씨도 쓸 수 있고
37
눈은 밝아 도리어 서리 같은 터럭 헤려 하네.
 
 
38
하였다. 치의자가 이어서 읊기를,
 
 
39
금두꺼비 이슬 방울 깨끗이 맑디맑고
40
옥토끼 가을 털은 추워서 잠 못 자네.
41
시 한 구절 쓰고 나니 마음 괴로워라.
42
아직도 눈물 자국 눈썹가에 남아 있네.
 
 
43
하였다. 백의자가 말하기를,
 
44
"내가 자네를 경모하는 것은 후덕(厚德)과 중망(重望)이 있기 때문이었네. 삼가 본받고자 하였으나 되지가 않았네. 지금 자네의 시 마지막 연(聯)은 자못 부인네들의 생각과 같아 뜻이 중후하지가 못하네. 자네도 늙었는가?"
 
45
하였다. 치의자가 말하기를,
 
46
"자네 말이 맞네. 사실 늙었다고 한탄한 지가 오래네."
 
47
하였다. 백의자가 말하기를,
 
48
"또한 이어 읊어볼까?"
 
49
하고는, 낭랑하게 시를 읊기를,
 
 
50
선명한 가을 달이 흰 빛을 더하는데
51
단청을 시험하여 시 한 수 적어볼가.
52
진중한 네 벗들이 글잔치로 모였는데
53
백 년 길이 남길 자취 결국 누가 전해 줄꼬.
 
 
54
하였다. 흑의자는 과묵하여 마지못해 짓는 것처럼 하면서 한 수 지어 읊기를,
 
 
55
갈고 갈고 물들여져 도를 길이 보존하니
56
당시에 남긴 업적 진만한 자 뉘 있으리
57
세 벗을 다시 만나 굳게 친분 다졌는데
58
속세 풍진 겪은 뒤라 흰 머리 새롭더라.
 
 
59
하였다. 백의자가 말하기를,
 
60
"진(陣)의 시는 비판을 받아야겠다.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았지 광경(光景)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없으니, 고루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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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탈모가 말하기를,
 
62
"고(藁)는 견(甄)을 무시하고 진을 헐뜯으니, 고는 대단한가?"
 
63
하였다. 치의자가 한숨을 쉬며 탄식하기를,
 
64
"오늘날은 벗의 도가 없어진 지 오래로다. 막역한 친구가 된다고 해놓고 절차탁마를 꺼리다니……."
 
65
하였다. 탈모자가 곧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하였다. 모두들 크게 웃었다. 선비는 처음에 도둑인 줄로 생각했다가 도둑이 아니라 물괴(物怪)라는 것을 알고는 마음에 두려움이 없어졌다. 호기심이 생겨 그들이 하는 짓을 자세히 보려고 하였다. 치의자가 말하기를,
 
66
"시경에 '지나치게 즐기지 말고 집안 일을 생각하라. 분수에 넘치지 않으려고 훌륭한 선비들은 조심조심 하였느니 …….'라고 하지 않았던가. 조금이라도 잘못되어 누설될까 염려되네."
 
67
하였다. 세 사람은 서로 돌아보며 답이 없었다. 선비는, 그들이 이제 흩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드디어 헛기침 소리를 냈다. 그러자 갑자기 방 안이 텅 비며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선비는 즉시 물러나 축문(祝文)을 지어 읊었다.
 
68
"그대들의 숫자는 셋도 아니고 여섯도 아니고, 둘이라 하면 둘이 더 있고 다섯이라 하면 하나를 빼야자. 그대들은 나를 곤궁하게 한 자들이 아니오. 내 이미 그대들 심정을 아는데, 구태여 그대들 모습 감출 것인가. 지금 나는 그대들을 내쫓으려는 게 아니라 그대들을 윗자리로 모시려는 것이오. 이 세상과 저 세상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지성이면 필시 통할 수 있을 것이오. 네 분은 끝내 나를 버릴 수 있겠소?"
 
69
축문을 다 읽고 나서 옷깃을 여미고 기다리며 서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70
문득 서재 북쪽 창 밖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가까워졌다. 선비는 변화가 있음을 알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꼼짝 않고 있었다. 때는, 서산에 달이 지고 있었고 달 그림자가 청(廳)에 올랐다. 세 사람이 잇따라 오는데, 옷차림과 생김새가 서실 안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와서는 늘어서서 절을 하였다. 선비도 답배를 하고 묻기를,
 
71
"한 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72
하니, 대답하기를,
 
73
"관(冠)을 쓰지 않아서 뵈올 수가 없습니다."
 
74
하였다. 선비가 말하기를,
 
75
"산 속 서재에서 밤에 모이는 것이니, 예법은 따질 게 못 됩니다. 어서 나오십시오."
 
76
하였다. 탈모자가 이 말을 듣고 서재 뒤에서 머뭇머뭇 나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무례함을 사과하였다. 선비가 위로하는 답을 하고는, 그들과 마주 앉았다. 성명과 집안의 내력을 물어서 산의 요정인지 나무 도깨비인지를 분변해 보고자 하나, 그들의 뜻을 거스를까 염려되어 감히 선뜻 발설하지 못하고 먼저 자기 소개부터 하기를,
 
77
"나는 고양씨(高陽氏)의 후손입니다. 집안이 좋은 일을 많이 하여 경사가 많아 높은 벼슬을 대대로 세습해 왔습니다. 그러나 형설(螢雪)의 뜻을 간직하여 화려한 생활에 대한 생각을 끊고,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辯)의 교훈을 스승 삼고,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의 학문을 몸소 실천하며,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 사람에 부끄럽지 않고 거처함에 방귀신에게 부끄럽지 않고 잠자리에서는 이부자리에게 부끄럽지 않게 되고자 한 지가 여러 해 되었습니다. 네 분도 어찌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78
하니, 네 사람이,
 
79
"그렇습니다."
 
80
하였다.
 
81
"궁벽진 조선땅에 늦게야 태어나서 홀로 외로이 마음은 옛것을 사모할 줄만 알고 행실은 허물을 숨기지 못하여, 아홉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깊은 함정에서 겨우 빠져나왔는데, 친구들도 나를 버렸고 집안 사람들까지도 다투어 비난했습니다. 이처럼 횡액을 당했는데도 일찍이 원망한 적이 없습니다. 네 분도 어찌 그렇다 하지 않겠습니까?"
 
82
하니, 네 사람이,
 
83
"그렇습니다."
 
84
하였다.
 
85
"이제 몸은 늙어빠지고 지혜도 나지 않아 세상을 등지고 혼자 적막한 산 속에 외따로 초당을 하나 지어놓고 삽니다. 정신은 안씨(顔氏)와 사귀지만 꿈에 더 이상 주공(周公)을 뵈올 수가 없습니다. 혹 인의(仁義)를 깊이 연구하기도 하고 혹 부질없이 글장난을 하기도 하며 지냅니다. 네 분이 없었다면 누가 와서 놀아주겠습니까? 끝자리에나마 참여하여 좋은 말씀 듣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86
하니, 네 사람이 일제히 절을 하고 사양하며 말하기를,
 
87
"저희들이 하찮은 자질로 군자에게 의탁하여, 외람되이 조화(造化)의 용광로에 들어가서 감히 명검(名劍)을 만들어달라고 나서는 쇠붙이가 되었는데, 명공(名公)게서는 상서롭지 못하다고 죄주지 않으시고 또한 따라 놀 수 있도록 허락까지 하셨습니다. 평소의 생각을 다 말씀하시고 깊은 속마음도 기탄 없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보잘것없는 저희들이 분수 넘치는 여오강을 입었습니다. 하찮은 생각을 말씀 올려 우러러 명공의 귀를 더럽히고자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88
하였다. 선비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89
"참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90
하였다. 치의자가 일어나 절을 하고 앉아서 아뢰기를,
 
91
"저는 감배씨(堪杯氏)의 후손입니다. 바야흐로 순 임금께서 미미하던 때에 이름이 기(器)라는 분이 계셨는데, 순 임금과 함께 하수(河水) 가에서 질그릇을 구었습니다. 그러다가 순 임금께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시자, 드디어 도씨(陶氏)로 성을 삼았습니다. 그 일은 우전(虞典)에 실리지 않았습니다. 그 후손들이 저 저칠(沮柒) 땅으로부터 고공(古公)을 따라 도혈(陶穴)로 와서는 서토(西土)에 집짓고 살았습니다. 무왕(武王)이 주(紂)를 칠 때 태서(泰誓)에 참여하였습니다. 자손 가운데 서토를 떠나 위나라 땅에 옮겨 살던 자들은 와씨(瓦氏)로 성을 고쳤었는데, 위나라가 망하고 나서 비로소 드러났습니다. 당(唐)나라 정원(貞元) 연간에 와씨 가운데 이관(李觀)과 사귀던 분이 있었는데, 장안(長安)에 놀러 갔다가 그곳에서 객사하자, 이관이 예장(禮葬)을 지내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오늘날까지도 영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와씨는 지손(支孫)이고 견씨(甄氏)가 종손(宗孫)입니다. 저의 실제적인 조상은 견(甄)입니다. 처음 태어나던 날, 산모가 찢어지지도 터지지도 아니하고 순조롭게 아기를 낳았는데, '지(池)'라는 글자가 손바닥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로 이름을 삼았습니다. 저의 집안과 이름의 내력은 이렇습니다. 어찌 감히 숨겨 저를 알아주시는 분을 속이겠습니까? 다만 지금은 너무 늙어 쓸모없게 되어 온갖 일이 다 기와 조각처럼 깨져 버렸으니, 비록 사문(斯文)에 약간의 공로가 있기는 하나 누가 다시 알아주겠습니까? 와씨와 이관이 사귀었던 옛 정의를 되살리고 싶은데, 명공께서는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92
하였다. 선비는 그 뜻도 알지 못한 채, 다만 "예예"라고 대답만 하였다. 흑의자가 앞으로 나아와 절을 하고 말하기를,
 
93
"저는 수인씨(遂人氏)의 후손입니다. 선대에 이름이 '상(霜)'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신농(神農)과 더불어 온갖 풀들을 맛을 보아 분류하였습니다. 그 일은 본초(本草)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이름이 '오(烏)'라는 분이 계셨는데, 창힐(蒼詰)과 더불어 글자를 만들었습니다. 그 일은 사기(史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뒤로 대대로 문한(問翰)을 맡았고 인재가 대대로 끊임없이 나왔습니다. 주(周)나라 시대에 이르러서는 묵씨(墨氏)가 되었는데 노담(老聃)과 더불어 함께 주하사(柱下史)가 된 분이 있었습니다. 사책에는 그 이름이 실려 있지 않습니다. 이십대(二十代) 할아버지 적(翟)은 이마가 닳고 발꿈치까지 닳도록 일을 하여 천하를 이롭게 해서 공씨(孔氏)와 더불어 '두 스승''이라고 함께 일컬어졌습니다. 현조(玄祖)에 이르러 성을 진씨(陣氏)로 바꾸고 소나무와 잣나무 사이에 몸을 감추고 숨어지내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나를 '갈고 닦으면 쓸 만하게 될 자질이 있으니, 조상들이 남긴 훌륭한 업적을 더욱 빛낼 수 있으리라.' 여기시고 사랑하여 '옥(玉)'이란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서적을 탐독하여 꼿꼿이 앉아서 책을 읽으며 해를 넘기곤 하였는데, 늙어서는 점점 소갈병이 들었습니다. 비록 저를 알아주시는 명공께 의탁은 하나 칠신(漆身)의 보답은 해드리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감히 어진 당신에게 의지하여, 늙었다는 탄식은 하지 않겠습니다. 명공께서는 가련히 보아주십시오."
 
94
하였다. 선비는 "예예"라고 답하였다. 백의자가 공경히 절을 하고 말하기를,
 
95
"저는 구망씨(勾芒氏)의 후손입니다. 저의 옛 조상들은 풀과 나무들 사이에 모습을 감추고 부귀영달은 마음에 두지 않고 살았습니다. 세상에 나와서는 혼돈술(渾沌術)을 많이 닦아 지혜가 분명하여 본래의 근원으로 돌아가고 무위자연을 이루어 태초의 순박함으로 돌아갔습니다. 진시황(秦始皇) 때에 이르러 많은 책들을 불태워 없애고 학사(學士)들을 묻어 죽일 때에도 그 화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대저 선한 공적을 많이 쌓은 자는 그 은택이 먼 후손에게까지 미치는 법입니다. 자손들이 한(韓) 나라 때로부터 번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름이 '등(藤)'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총명하여 기억력이 좋아 경서(經書)와 역사책들을 줄줄 외어서, 무제(武帝)가 없어진 책들을 구할 때 바쳐 올린 바가 많았습니다. 석거(石渠)와 천록(天祿)이 이루어진 데에는 저의 선조들의 공로가 자못 많았습니다. 진(晉) 나라 때에 이름이 '견(繭)'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왕우군(王右軍)과 잘 지내어 천하에 평자가 대단했습니다. 당나라 때에는 소릉(昭陵)을 섬겨 인하여 순장(殉葬)을 당했는데, 세상 사람들이 매우 애석히 여겼습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때부터 섬계(剡溪)에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처음 모습을 갖추어 태어났을 때에 첫 이름을 고(藁)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혼돈(渾沌) 수업을 닦았습니다. 비록 심지(心志)를 씻어내고 정신(精神)을 씻었으나, 본래 채색을 받아들일 바탕이 아닌지라 경박하다는 참소를 받아 결국 장단지 덮개가 되었습니다. 감히 다시 거두어주시기 바랍니다. 명공은 살펴주십시오."
 
96
하였다. 선비는 "예예"라고 대답하였다. 탈모자가 손모아 절을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97
"저는 포희씨(疱羲氏)의 후손입니다. 저의 옛 조상은, 희생(犧牲)을 잡아 처음으로 하늘의 신과 땅의 신께 제사를 올릴 때에, 털을 뽑고 제물(祭物)로 썼는데, 그 공으로 모씨(毛氏)라는 성을 얻었습니다. 세상에서는, 포희씨 시대에는 털을 태우고 먹었다고 하나, 그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모씨는 대대로 역사 기록을 담당하는 관리가 되었는데, 붓을 귀 뒤에 꽂고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였고 대부분 자신이 글을 짓지는 않았습니다. 공자(孔子)가 춘추(春秋)를 지을 적에 자유(子遊)와 자하(子夏)가 도울 수가 없었는데, 모공(毛公)이 결국 연차(年次)를 정하였습니다. 당나라 한유가 '공자에게 절교를 당하였다'고 한 것은 우리 조상을 매우 모함하는 말입니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모수(毛遂)라는 분이 있었는데 주머니 속에 들어가기를 청했었고, 한(漢)나라 때에는 모장(毛長)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시전(詩傳)을 저술하였습니다. 이분들이 저희 정파(正派)인데도 한유가 자기의 문장력을 믿고 있지도 않았던 허황된 이야기를 끌어다 붙여 모씨의 종파를 어지럽혔습니다. 이른바 모영(毛穎)이라는 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순 임금께서 남쪽으로 순수(巡狩) 나가셨다가 창오(蒼梧)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두 분의 왕비께서도 따라갔었는데, 피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다가 상강(湘江)에 뛰어들어 죽었습니다. 두 왕비의 후손드이 초나라 땅에 흩어져 살다가 드디어 관씨(管氏)가 되었는데, 저의 15대조 할아버지께서 취하여 아내로 삼았습니다. 이로부터 관씨가 아니면 아내 삼지 않았으니, '필시 제(薺)나라 강씨로세'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한유가 '관성(管城)에 봉해졌다'고 한 것도 역시 잘못 전해진 것입니다. 할아버지께서 중서성(中書省)에 들어가던 해에 아버지는 지제고(知制誥)가 되었습니다. 저를 나이 젊고 기개가 날카롭다고 여기시어, 할아버지께서 이름을 지어주시고 아버지께서 자를 지어주셨는데, 이름을 예(銳)라고 하고 자를 퇴지(退之)라고 하여, 저로 하여금 이름을 돌아보고 뜻을 생각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제 늙고 둔해져 젊을 적에 품었던 뜻은 다 꺾여버렸습니다. 무덤이나 지어 주시면 영광이겠고 탑전에 올리는 시를 쓰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명공께서는 무정할 수 있겠습니까?"
 
98
하였다. 선비는 비록 "예예"라고 대답은 했으나, 네 사람의 말이 무슨 뜻인지 끝내 알 수가 없었다. 네 사람에게 말하기를,
 
99
"오늘밤 이런 만남은 사실 하늘이 도운 것입니다. 다만, 별자리도 북두성도 많이 회전하였고, 새벽달은 장차 서산에 떨어지려 하니, 느긋히 남은 회포를 다 펴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아까 방안에서 여러분들이 각각 시를 지으시던데, 그것을 계속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100
하였다. 네 사람이 말하기를,
 
101
"감히 말씀대로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102
하였다. 치의자가 시를 지었는데,
 
 
103
구름 사이 밝은 달이 아름다움 다투는데
104
온 세상에 누가 옛 견씨(甄氏)를 돌봐 줄까
105
웃지들 마라 돌 창자가 지금 모두 닳은 것을
106
눈으로 보았네 한유가 명(銘) 짓던 봄을
 
 
107
하였다. 흑의자가 시를 짓기를,
 
 
108
검은 가루 다 찧는 건 흰 토끼의 근심
109
창힐 글자 배우던 때 이 몸 태어났네
110
이마 다 닳도록 세상 구제하는 일이라도
111
양주(楊朱)에게 한 발도 양보하지 않으리
 
 
112
하였다. 탈모자가 시를 짓기를,
 
 
113
시서(詩書)를 전한 지도 세월이 오래 흘러
114
젊은 얼굴 없어지고 머리 허옇게 세었네
115
풍류롭던 옛일은 아무도 관심이 없으니
116
술 마시며 글재주 다투는 일 이제 다 틀린 일이로세.
 
 
117
하였다. 백의자가 시를 짓기를,
 
 
118
유유히 내려오던 죽백(竹帛) 모두 연기 되어 버리고
119
누덕누덕 만신창이나마 나로부터 전해졌네
120
석거각의 많은 책들 짐바리로 거둬들여
121
환한 달빛 영롱한데 섬계(剡溪) 뱃놀이 저 버렸네
 
 
122
하였다. 선비는 깊이 음미하며 세 번을 반복해 읊어보고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이어 답하기를,
 
 
123
백 년 교우를 누구와 맺을꼬 하다
124
우연히 산중에서 네 노인을 알았네
125
뒷날 다시 알 수 있게 오늘밤 이 이야기를
126
서재 책장 속에 보배로 남겨 두리라.
 
 
127
하였다. 네 사람이 사례하며 절을 하고 말하기를,
 
128
"저희들을 알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버리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129
하였다. 드디어 떠나겠다고 말하고는 어름어름 사라져 버렸다. 선비는 홀로 방안에 누워 초롱초롱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있었던 일을 곰곰히 생각해보니, 거의 알 것도 같았다. 햇빛이 이미 창을 비추고 있었다. 시중드는 아이가 이상히 여기며 와서 문안하기를,
 
130
"오늘 어찌 이렇게 늦게 일어나시는지요?"
 
131
하였다. 선비가 답하기를,
 
132
"지난 밤 달이 너무나 밝아 늦게까지 시를 읊다가 아침잠이 깊이 들었었구나. 네 어찌 그것도 모르고 와서 문안하느냐?"
 
133
하였다. 일어나서 방안의 붓, 벼루, 종이, 먹을 찾아 살펴보았다. 옛날에 보관해 두었던 벼루는 바람벽 흙덩이를 맞고 깨어져 있고, 붓 한 자루는 무늬 있는 대나무로 대롱을 만들었는데 뚜껑이 없었으며 너무 닳아 글씨를 쓸 수 없었고, 먹 한 개는 다 닳아 남은 것이 한 치도 안 되었다. 종이는, 며칠 전에 시중드는 아이가,
 
134
"이곳에 투박한 종이가 있는데 장단지를 덮겠습니다."
 
135
하여, 선비가 그렇게 하라고 했었는데, 아이를 불러 그 종이를 가져오게 하여 살펴보니 바로 깨끗하고 두꺼운 종이었다. 이에 환히 모든 것을 깨달았다. 즉시 종이로 세 물건을 싸서 담장 밑에 묻어주고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그 글에,
 
136
유세차 모년 모월 모일에 고양씨의 후손 아무개는 삼가 좋은 술과 여러 음식을 장만하여, 감배씨의 후손 견군 지(池)와 수인씨의 후손 진군 옥(玉)과 구망씨의 후손 혼돈자 고(藁)와 포희씨의 후손 모군 예(銳) 네 친구의 신령께 경건히 제사를 올리노라. 아, 하늘이 성명(性命)을 부여하심에 물칙(物則)도 함께 주셨다네. 윤리에는 오륜(五倫)이 있고 덕에는 오덕(五德)이 있네. 생각건대, 붕우(朋友)는 이오(二五) 가운데 하나, 저녁에 죽어도 괜찮으나 신의가 없으면 설 수 없네. 아득히 신의가 없어지자 대도(大道)가 이에 막혔네. 사생(死生)과 귀천(貴賤)은 구름처럼 하찮은 것. 까닭 없이 뭉치는 건 장주(莊周)가 기롱했고, 이끝이 다하자 멀어지는 건 달인(達人)이 슬퍼했네. 누가 망?를 함께 하랴. 누가 소리를 함께 하랴. 산엔 나무가 푸르고 골짜기엔 새가 지저귀네. 아, 나의 단칸방 쓸쓸한 그림자만 있었는데, 줄줄이 네 벗이 마음 통해 모였다네. 좋은 밤 환한 달빛 시를 읊고 담론했네. 속된 말은 전혀 없이 고양씨가 시작해서, 감배, 수인, 포희, 구망, 그 이야기 청아했네. 본초 만든 신농씨, 글자 만든 창힐이, 순 임금 살던 하수 물가, 고공 살던 저칠 땅, 춘추의 절필 사건, 전국시대 모수자천, 석거각과 천록각, 한제와 당황까지, 이리저리 두루 섞어 빠짐없이 거론했네. 아득아득 넓고 넓게 모든 것을 근거했네. 풍류 넘치는 이런 모임 성의 다해 이뤄졌네. 형체는 없는 데서 생겼다가 또다시 없어지고, 시간도 없는 데서 생겼다가 또 다시 없어지고, 시간도 없는 데서 생겼다가 또다시 없어지네. 백년 벗을 굳게 맺어 세상 일을 토론했네. 살아서는 막역한 벗, 죽어서도 같은 무덤. 그래도 사람인데 사물만도 못할손가. 낭낭한 석별 인사 감히 부탁을 잊으리요. 내 무엇을 상심하리, 그대들이 떠난다해도 그대들 혼 남았으면 이 글에 감응하리.
 
137
하였다. 이날 밤 꿈에 네 사람이 와서 사례하며 말하기를,
 
138
"그대는 지금부터 사십 년을 더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보답합니다."
 
139
하였다. 그 뒤 다시는 이런 변괴가 없었다고 한다.
【원문】서재야회록(書齋夜會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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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10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