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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 갈 만한 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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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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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갈 만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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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연일 된서리 쳐서 울타리에 호박 잎이 축 늘어지고 앞산 잡목이 갑자기 단풍이 들었다. 새벽 우물에서 김이 오르니 어지간히 찬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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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는 어느덧 종적을 감추고 밤 벌레 소리도 어쩌다가 하나 둘 들린다. 소에게 덕석을 씨우게 되었다. 보리를 가노라고 모처럼 풀먹여 찌운 살이 눈에 뜨이게 까고 아침에는 소의 두 눈에 눈꼽이 콩알 만하게 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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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추위가 이르다」고 하나 햅쌀을 먹게 되었으니 추위도 좋은 때다. 아침에는 손끝이 시리지마는 낮이 되면 푸른 하늘에서 오는 맑은 볕이 살속에 푹푹 스며들도록 따뜻하여서 타작 마당에 탈곡기 밟아 돌리는 일군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솓고 저녁때가 되면 비낀 볕이 비추인 곳에 파리들이 다닥다닥 붙어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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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글 읽고 있는 방 서창을 열어도 바람이 차지 아니한 어떤 석양이다. 나는 삼각산쪽으로 떨어지는 해를 오늘은 실컷 볼 양으로 서쪽을 바라본다. 해는 아직 산에서 두 길은 더 높이 떠 있다. 낙일이 되자면 아직도 이삼십분의 동안은 있을 것이다. 그 동안에 나는 바로 내 서쪽 퇴 앞에 선 국화 떨기를 볼 여유가 있다. 수없는 꽃봉오리가 끝이 방싯 열려서 누르스름 불그스름한 꽃이 비쳐서 보인다. 그 중에 어떤 것은 이삼일 안에 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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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라야 심어만 놓고 가꾸지는 아니한 것이다. 나는 대로, 자라는 대로 내버려 두어서 제 멋대로 된 국화다. 내가 노상 이 집에 있지 아니하는 탓도 있거니와 무슨 초목에나 손질을 하기를 원치 아니하는 내 성미 때문에 이렇게 내버려진 국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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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의 일은 국화가 더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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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소리를 한다. 내 서울 집 문전에 나무가 여남은 그루 있는데 이것도 제 멋대로 맡겨 둔다. 누가 손질을 하라고 하면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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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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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가위질하기를 거절한다. 국화도 이 본 대로 내버려 둔 것이다. 게다가 닭들이 지르밟기까지 하여서 쓰러진 것 부러진 것도 있다. 다 제 운명이라고 나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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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초에 걸음을 주면 죄가 된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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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동네 처녀가 내게 말하는 것을 듣고 나는 흠칫하였다. 사람이 먹을 양식이 될 곡식에 줄 걸음을 화초에 주면 죄가 된다고 생각하는 우리 민족의 심정을 고맙게 생각한 것이다. 이 정신은 전 세계 인류에게 전할 값이 있지 아니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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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버려 둔 (아니다. 내버려 둔 것이 어디 있나. 사람이 아니하더라도 다 가꾸는 마음과 손이 있다) 산 국화, 들국화도 핀다. 산비탈에 한 뼘도 못되는 데에 딱 한송이만 피어서 푸른 하늘과 마른 풀을 배경으로 가을 바람에 흔들리는 흰 산국화! 누가 무엇이라고 하여도 국화의 왕은 이것이다. 옛날 우리 처녀들의 전판 같은 머리채에 드린 댕기에 성웅황과 함께 붙인 것이 은으로 만든 「구와」였었거니와 그 「구와판」은 곧 이 산국화였다. 산국화, 어떻게나 높고 맑은 기품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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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은 산에 놓고 볼 것이요 집 가까이 심기에는 너무나 청초하다. 밭두둑이나 묵은 장이에 탐스럽게 피어 늘어지는 들국화야말로 농촌다웁다. 향기롭고 귀여우나 산국화에서 보는 맑고 싸늘한 맛이 없다. 들국화는 어수룩하고 풍성풍성하다. 꽃을 따서 술을 담가 먹거나 베개에 넣을 만한 것은 들국화다. 이것은 소도 잘 먹거니와 어디까지든지 농촌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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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창 밖에 있는 네 떨기 국화는 우리 나라의 산이나 들에 야생하는 종류는 아닌 모양이요 오랜 동안 사람의 재배를 받아 온 국화인 듯하다. 빛이 노란 것도 있거니와 분홍, 보라, 자지도 있다. 산국화와 같은 처사도 아니요, 들국화의 농부도 아니요, 이를테면 도시의 문화인의 비길 국화가 내 뜰에 있는 국화다. 본래는 청자, 백자의 분에 담겨 귀인의 문갑 위에도 놓였을 꽃이 어쩌다가 야인의 집에 와서 생땅에 뿌리를 박고 비바람 속에 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자연의 환경에는 익지 못하여 산국화 들국화보다 저항력이 적어서 대는 가냘프고 잎도 충실하지 못하지마는 찬서리를 맞아 꽃피우는 옛 버릇만은 잊지 아니하고 있다. 이 국화는 내가 처음 이 집을 짓고 온 해에 이웃집 인숙이라는 아가씨가 저의 집 뜰에서 갈라다가 심어준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그 아가씨의 꽃공양을 받은 셈이다. 감당치 못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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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숙이는 금년에 또 모란 한 가지를 찢어다가 국화에서 서쪽 이웃에 심어 주었었다. 이것이 곧잘 뿌리가 내려서 다 늦게 잎을 펴려고 하더니 내가 한달쯤 떠나 있는 동안에 웬 일인지 없어지고 말았다. 오직 그 곁에 있는 간나만이 무성하여서 서리가 올 때까지 날마다 꽃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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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문재 어깨에 거의 닿으리 만큼 내려갔다. 십분이면 아주 떨어질 것이다. 바람은 없고 볕은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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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뜩 눈을 들어 바라보니 아유! 수없는 나는 벌레들! 모기 같은 놈, 파리같은 놈, 하루살이 같은 놈, 이따금 나비 같은 놈, 매미 같은 놈, 아유! 많기도 해라! 모두 강한 빛 속에서나 겨우 사람의 눈에 보일만한 작은 생물들이다. 그들은 한껏 날개를 벌려서 기운껏 날고 있다. 내 눈에는 그들의 머리도 몸도 구별할 수 없다. 하물며 그들의 흥분된 눈이라든가 숨찬 가슴이 보일 리가 없다. 오직 비낀 볕에 빛나는 그들의 날개 ── 날갠들 보이랴, 오직 날음이 보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 자신에 있어서는 그 몸이 작음이 아니다. 알맞고 잘난 몸이다. 그들의 머리에는 경영이 있고 가슴에는 사랑과 소망이 있다. 그 경영은 우리네 사람의 것보다 짧지 아니하고 그 사랑의 뜨거움, 소망의 무한함은 허공에 차고도 남았다. 그들은 지금 필시 사랑을 찾아 날으는 것이다. 사랑의 짝을 구하는 남녀들이 대향연, 대무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몸은 우리의 눈에는 한 점으로 밖에 아니 보이나 그들끼리에게는 기막히게 아름다운 모양도 있고 빛갈도 향기도 부드러움도 있는 것이다. 특별히 잘난 남성과 뛰어나게 어여쁜 여성도 있을 것이다. 더 잘난 짝을 골라 잡으려고, 이 사랑 저 사랑을 물리치는 이도 있을 것이요, 한 잘난 짝을 여러 여성이 다투어서 숨막히는 투쟁이 일어나서 그 중에 몇이 피를 흘리고 땅바닥에 떨어지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마는 이러한 투쟁은 사랑의 큰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깨뜨릴 정도는 아니요 도리어 그 음률의 효과를 돕는 한 적은 인터루우드가 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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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랑의 무도회장에 침입하는 자가 있다. 그것은 잠자리 등속이다. 그들은 사랑의 무도에 취하여 날뛰는 자를 삼키며 춤을 추고 돌아간다. 사랑의 춤에 시장기가 난 자들은 잠자리만이 아니라, 다른 저보다 작은 자를 잡아먹어서 요기를 하고 한층 더 큰 기운과 기쁨으로 무도를 계속한다. 그러나 이렇게 비참한 사건도 사랑의 향연을 어지르지 아니함이 마치 저마다 싸우고 죽이고 먹는 일이 전체의 파흥이 아니되도록 조심조심히, 몰래몰래하여 치우는 것과 같다. 싸움에 지는 자, 죽는 자, 먹히는 자의 슬픔과 괴로움과 분하고 원통함이 이 사랑의 음악의 하모니를, 또는 심포니를 일시 깨뜨릴 법도 하거니와 사실은 그렇지 아니하다. 왜 그런고 하면 죽는 자 먹히는 자는 소리 없이 퇴장해버리기 때문이다. 사랑의 무도에 열중한 다른 무리들은 그러한 조그마한 사고는 의식조차 못하고 그 불행한 사고가 제 몸을 다칠 때에 비로소 천지가 무너지는 듯하거니와 그것은 일순간이다. 왜그런고 하면 죽음의 고통이 온 때는 벌써 죽는 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가 사는 것을 알되 제가 죽는 것을 볼 수는 없으므로 죽음이란 우리에게는 오직 꾸며내인 군 생각이지 정말 있는 일은 아니다. 다행하게 저들 벌레들 사회에는 죽음의 무서움을 말하는 종교가, 시인, 철학자가 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오직 사는 것이 있을 뿐이요, 죽는 것이란 애초에 의식에 떠오르지부터 아니한다. 하물며, 그들에게는 단테도 없고 밀턴도 없어 죽음의 저쪽에 있는 천당이니 지옥이니 하는 것을 모른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오직 「있다」뿐이다. 「있었다」,「있겠다」는 그들이 상관하는 바가 아니다. 그들은 날개 있으니 날고, 사랑이 있으니 사랑한다. 보라, 저 짝을 얻은 한 쌍을! 그들은 서로 이끌며 서로 따라 공중 높이 또는 땅을 향하여 사랑의 보금자리로 퇴장하여버리지 않는가. 아마 그들은 오늘 안으로 어디다가 알을 낳아 붙이고 오늘 안으로 그 몸을 벗어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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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을 다하였다.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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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그들은 명목하여버리는 것이다. 그들의 알이 까서 자라서 다시 그들의 역사를 계속한다. 그 역사는 대개비나 가죽이나 종이나 또는 금속에 쓰고 새긴 것이 아니다. 그들의 역사는 모두 그들의 마음에 정확하게 적혀있는 것이다. 그들의 몸이 자랄수록 그 역사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저절로 열려서 그들의 앞길을 가르치는 것이다. 내 눈에 그렇게도 적게 보이는 그들의 속에 있는 마음은 내 속에 있는 마음이요, 동시에 이 우주 전체의 마음이다. 큼도 없고 작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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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산에서 아주 떨어지려 할 때까지 벌레들은 사랑의 무도를 계속하고 있다. 하루살이가 수수백만 마리가 뭉치가 되어서 용오르는 구름 모양으로 나선상으로 올라가는 것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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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졌다. 인제는 내 눈에는 아무 것도 아니 보인다. 그러나 아직도 미진한 향연이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가을 해 떨어진 뒤에 일어나는 싸늘한 바람에 몸들이 오싹하여서 의지를 찾아 돌아가는 이도 많겠지마는 빛 없는 황혼을 사랑의 향연의 좋은 시각으로 아는 다른 무리들이 또 무대에 등장하여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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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구월 초나흘 달이 개밥바라기와 가지런히 나 뜬다. 초생달을 터키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양으로 생물 중에도 이 빛을 가리어서 모이는 자도 있을 것이다. 밝은 데도 생명, 어두운 데도 생명, 물에도 사는 중생이 있으면 불에 사는 중생도 있다. 공중에 뜬 티끌 하나도 수수억만의 생명이 살고 사랑하고 또 싸우고 죽는 세계다. 우주는 생명의 세계요, 생명은 곧 사랑이요 기쁨이다. 다윈이나 맑스는 싸움과 미움의 한 면만을 확대해본 철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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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괜스레 일부러 불행을 만드는 일만 아니 하면 이 땅은 살아 갈만한 곳이다. 썩 좋은 세상은 못되더라도 견딜 만한 세상은 넉넉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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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힘을 들이면 먹을 것은 나오게 마련이 되어 있는 세상이다. 땅에서는 파기만 하면 샘이 솓고 땀만 뿌리면 열매가 돋아오게 마련이다. 먹고 마시면 사는 것이 아닌가. 여름이 덥거든 그늘로 들어가고 겨울이 춥거든 불을 때면 되지 않는가. 뜻뜻이 때고 두둑이 먹고 자연 경치를 바라보고 그만하면 사는 것이 아닌가. 제게 좋은 일이 없거든 남의 좋은 일을 바라보더라도 심심치는 아니할 것이다. 남의 좋은 집이나 정원을 바라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요, 남이 서로 사랑하는 양을 보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별다른 일이 없더라도 서로 얼굴을 바라보는 것 만도 살아 있는 기쁨을 느끼게 하기에 족하지 아니한가. 그런데 사람들은 괜스레 저를 볶고 남을 못 견디게 굴고 있다. 이른바 마귀가 들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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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
【원문】살아 갈 만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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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10월 0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