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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리의 여름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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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노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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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의 여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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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끌 많은 서울 ─ 분주히 떠드는 서울 ─ 더러운 냄새 많은 서울 ─ 남대문에서 기적한 소리로 이 서울을 작별하고, 북으로 향하는 열차의 한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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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동안 이러한 서울의 공기를 마시며, 이러한 서울의 물을 먹으며, 이러한 서울의 땅을 밟으면서, 티끌 속에서 떠드는 소리속에, 검은 냄새아래 딩굴고 헤매며 골치 앓던 나는, 어느 감옥을 벗어나 자유로운 몸으로 두 날개를 벌리고 푸른하늘 위로 둥실둥실 날아가는 듯한 느낌이 가득해진다. M사장이 정해주는 자리에 앉아 차내를 한번 둘러보았다. 조선인, 일본인들이 꽤 많이 올라왔다. 그들의 이마에는 진주알 같은 땀이 방울방울 어리었다. 모두들 더위에 안타까운듯이 모자로, 부채로, 수건으로 얼굴을 부치며 “에 ─ 더워 에 ─ 더워 ─”하는 말이 입에서 떠나지 않는다. M사장과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항간의 이야기에 몰두하였다. 사회라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말과 조선의 미래는 유망하다는 것이었다. 기차가 어느덧 용산역을 통과 할 즈음에 M사장은 이미 차에서 내렸다. 그가 부탁하던 두 어린애는 진남포까지 데리고 가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두 아이는 내가 감독하고 내가 보호하게 되었다. 한 아이는 13세 소년이고 또 한 아이는 12세 소녀였다. 모두 다 천진스러움이 가득한 뭇 속세의 죄악에 물들지 아니한 천사같은 아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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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같은 흰 마음, 비둘기 같은 순진한 마음 사랑과 웃음과 노래와 찬미밖에 모르는 입술, 남에게 악하고 노한 정을 주지 않는 구슬같이 파란눈, 봄바람에 겨우 입 벌리는 꽃송이 같은 뺨, 아! 이것을 소유한 그네들은 신의 ×은 ×자들이다. 나는 그애 앞에 무릎을 꿇고 존경을 표하고 싶었다. 더구나 종로 네거리로 구두 바람에 활개를 치며 건방진 안경눈, 아니꼬운 고개짓, 저 잘란듯이 휘두르며 좋지못한 길을 밟는 나만한 학생(男女[남녀])을 보던 나는 어린 소년소녀가 무한히 귀엽고 무한히 사랑스러웠다. 나도 저런 동생이나, 누이나 혹은 아들이나, 딸이나 있으면 하고 몹시도 부럽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한 손으로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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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 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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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가늘고 애정있는 말로 내 사랑의 샘을 그의 가슴에 더해주며, 한 손으로 다정하게 부채질을 하여 주었다. 그때마다 소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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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서늘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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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그는 아무 죄악의 말을 받아보지 않은 입으로 어리광을 부리며 말을 한다. 나는 더욱 그에게 해맑은 사랑이 솟아올라 흰 배꽃같은 모시치마, 파란 연기가 조금씩 도는 옥색 적삼! 이 속에 싸인 그의 몸을 힘껏 껴안아 주었다. 이때의 나의 마음은 흰 모래 위에 흐르는 옥류(玉流)같이 맑고 편안하고 아름다웠다. 이즈음 나의 추억속에 과거가 번개같이 지나며 그리운 꿈을 잠간 눈앞에 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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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2년전 이었다. 장연(長淵)의 어느곳에서 교편을 들고 여러 소녀들과 재미있게 지냈던 일이다. 더구나 바람 맑고 공기 좋은 사월의 담 아래 핀 백합화 같은 소녀 20여명을 데리고 명사십리에 갔던 일이다. 은가루 같은 흰 모래 가족! 저 편 넓은 곳에 새빨간 해당화가 활짝 피었는데, 그 위에 종달새는 종달종달 ─ 영원의 바이올린을 해맑게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황해수(黃海水)의 파란 물이 출렁출렁 웅장한 긍락(肯樂)을 짓고 있었다. 이때 무아(無我)한 소녀들과 해당화를 입에다 물고 노래하며, 뛰놀며, 뒹굴며, 별별 유희를 하던 일이 생각난다. 이렇게 생각한 즉, 나의 생애에 그와같이 아름다운 순간은 다시 없었다. 세상에 허다사업(許多事業)이 많이 있긴 하지만, 어린 소년소녀들과 함께 담소하며 놀고 뛰는 그일도 참 재미 있었다고 생각된다. 어찌 생각하면 다시 그러한 곳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도 적지 아니하다. 4~5일전 나와 함께있는 에덴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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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애에는 인천영화학교(仁川永花學校) 소녀들과 함께 놀던 그때같이 아름답고 달콤한 때는 다시 없었을 겁니다. 아이고 그 소녀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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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그만 아직도 그때의 달콤하고 따뜻하던 피가 가슴에 넘치듯이 머리를 휘휘 흔들던것 까지 생각난다. 쉬지 않고 달아나는 기차는 벌써 산역을 지나 푸른 벌판으로 달음질쳤다. 소녀에게 부채질도 해주고 사이다도 사주며 이야기도 해주던 나는 창을 열고 바깥을 내다본다. 녹음(錄音)과 방초(芳草)로 휩쌓인 작은 산머리에는 백설(白雪)같은 구름이 한가히 움직이고 있으며, 산기슭의 수목이 우거진 나무그늘 아래에는 2~3간의 적은 모옥(矛屋)이 자는 듯이 숨어있다. 그리고 철로 좌우에는 조이삭이 척척 늘어졌으며, 청옥(靑玉)의 주단을 친듯한 푸른벌판에서는 종달새 소리도 이따금씩 들린다. 은(銀)을 녹인 듯한 작은 시내에서 여러 작은 애들이 헤엄하며, 물싸움을 하며, 재미있게 노는 것이 보인다. 나는 은연중 이 풍경에 깊이 취하여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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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래간만이다. 즐거운 새소리 ─ 푸른 벌판 ─ 꿈같이 부드러운 나무 그늘 ─ 아! 이러한 자연의 품을 떠나 사람의 냄새 ─ 기와벽돌의 무거움 ─ 자동차와 인력거의 먼지바람 ─ 전차 기차의 목멘소리! 순사병정의 빨간 눈동자! 기생 부랑자의 흐리고 시꺼먼 숨×運[운]! 싸구려말구려의 뒤떠드는 아우성! 이 가운데서 정신이 멍멍하여 아무런 즐거움과 서늘함과 가벼움과 깨끗함을 맛보지 못하던 나는 어쨌던 이곳이 그립고 반갑게 생각난다. 어쩌면 세상만사를 모두 꿈으로 바꾸고, 이러한 자연 가운데 들어가 땅을 일구어 농사나 지으며, 이슬아침과 흰 빛 달밤에 시나 읽고 산보나 하며 지냈으면…… 하는 마음이 불연듯이 떠난다. 더구나 톨스토이가 야스나야 포리야나에서 자기의 애인 안나카레니나와 밭갈며 대자연의 생명과 함께 살고져 하던 그것을 생각하고는 말 할 수 없이 그리워진다. 그리고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말과, 錦[금]×案[안]을 배경으로 삼고 넓은 벌판을 앞에 둔 타고르의 자연학문을 생각하고는 자연에 대한 동경이 절정에 달한다. 그리하여 연상의 연상이 일어나고 지엽(技葉)에 지엽이 생겨, 나중에는 프랑스 어느 섬에서 어린 소년과 소녀가 자연의 생명과 함께 자라나 순결무구한 사랑으로 젊은 일생을 희고 맑게 지냈다는 산펠의 소설과 사(社)에서 육백 선생(六百先生)과 어느날 후정(後庭)의 포도그늘 아래서 안락의자에 뒹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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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일본의 武者小路實爲[무자소로실위]가 경영하는 새로운 촌의 일원이 되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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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우리 사람도 일원의 자격을 주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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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것 없이 우리 동지 몇 사람을 추대하여 가지고 반도강산 중에 제일 물도 좋고 산도 좋은 곳을 택하여 우리도 새로운 촌을 설립하고 이상적으로 살아봅시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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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던 말과 K여사와 삼청동 송림속에 들어가 다눈치오의 ‘死[사]의 승리’를 보다가 지중해안을 그린 서경일절을 보고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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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자연미의 키스가 모인 곳 인가 봅니다. 자! 선생님, 우리 장차 지중해에 커다란 집을 짓고, 고국을 떠나 그곳에 가서 금빛 물결이 뛰오르는 지중해의 낙조를 보며 영원의 생명이 꿈을 펴는 바닷가 ─ 솔 그늘에서 잠자며, 저녁 달밤에 보트로 뱃놀이하며, 아침과 황혼에 바다 옆 전원속에 깊이 빠져봅시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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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톨스토이와 타고르만 그런 재미를 보겠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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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도 대단한 동감이 올시다. 그러나 돈 ─ 이놈에 돈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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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대답하는것 까지 일일이 생각난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정신없이 바깥만 바라보며 입으로 분명치 못한 노래만 부를 때에 어느 누가 어깨를 딱 친다. 바라본 즉, 그는 이재갑군 이었다. 언론계에 당당한 웅변가로 지금 봉산 은파교회에 청함을 받아 강연하러 가는 길이었다. 나는 그를 반가히 맞아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한동안 재미있게 지껄였다. 그러나 본시 언변이 없는 나는 어느 좌석에든지 좌담으로는 상대자에게 쾌감을 주어본 적이 없으며 또는 말도 많이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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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차는 개성역에 도착하였다. 이군과 함께 하차하여 세수장(洗手場)에서 손을 씻고 다시 차에 올랐다. 그러나 이군은 이등칸이므로 다시 자기의 객실로 가고 나는 삼등실로 온 것이다. 차가 얼마동안 연착한다. 나는 개성의 외경을 바라보며 호수돈여학교에 있던 김군을 생각하고 퍽 그리움을 금치 못 하였다. 그는 나의 얼굴도 알지 못하고 사랑의정을 토(吐)하여 외롭고 쓸쓸한 ×에 슬픔이 있을때 함께 울고, 기쁨이 있을때 같이 웃자고 하였다. 나는 그의 편지를 생각, 또다시 생각하고 호수돈여학교를 방문하고픈 생각이 간절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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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도 방학하고 원산 명사십리인가 어디로 귀거하였을 터인데 그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는 섭섭한 생각이 가슴을 저민다. 그가 개성을 떠나기 약 5~6일 전에 편지한 것을 나는 어떤 사고에 분주하여 회신도 못하였는데, 그는 나를 차차보겠다고 하고는 그만 집으로 획 달아나 버렸는데, 그의 주소도 몰라 편지도 못하고 정말로 사랑하는 친구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이 약한 내 마음을 정없이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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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떠나기 시작한다. 일후(日後) 개성의 고적도 구경하고 사랑하는 벗도 방문할겸, 기어이 한번 와보리라 마음 먹었다. 이때 나는 펜을 들고 변변치 못한 詩一節[시일절]을 메모장에 기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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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개성(開城)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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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영우(靈友)가 네 품에 잠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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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이 네 가슴에 엉켰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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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죽교, 만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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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것은 옛날을 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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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꿈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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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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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다란 산 그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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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개성위에 펼쳤던 고려의 활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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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일일이 구경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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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일일이 조상(弔喪) 하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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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잘살던 번화한 옛 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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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지금도 네 가슴에 매여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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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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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을 비단 이불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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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화롭게 잘 품어주던 개성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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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움에 목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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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옛 가슴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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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지지 않는 남은 정서(情緖)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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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에 다시와서 깨치고져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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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간다. 잘 있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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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날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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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을 주머니속에 넣고, 소녀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준뒤, 차내의 모든 사람을 한번 시찰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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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 중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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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중 가장 똑똑하고, 활기차고, 냉정한 표정을 가진 사람은 모두 일본인이고, 긴 담배대에 갓을쓰고 멀건한 눈동자, 게으른 태도, 무원기(無元氣)한 표정, 싱거운 몸짓 ─ 아! 이런 사람은 말하기도 기가 막히고, 싫지만 부득불(不得不) 조선 사람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더구나 손에 책을 들고 잠깐 가는 시간일지라도 아끼느라고 종알종알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그는 일본인이요. 싱겁게 권연이나 피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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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네 집 술맛이 좋데. 아! 이 차는 무슨 조화로구나. 명월관에 가서 내가 돈 천원을 썼네, 그려. 李桂花[이계화] 그 여자 퍽 얌전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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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양으로 지껄이는 사람은 모두 동족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다. 나는 이것을 볼때에 나 부터 무식무(無識無) 자각한 사람이지만, 우리 동족을 위하여 한줄기 눈물을 금하기 어렵다. 춘원(春園)군의 작품 ‘무정(無情)’중에서 주인공 형식(亨植) 이가 무식하고 캄캄한 우리 동족의 실황을 보고, 가슴에 뒤끓는 검은 눈물을 금하기 어려워, 두 주먹을 불끈쥐고 교육! 교육! 하였다는 말이 절실히 생각 난다. 서둘러 저 무식하고 가련한 동족을 구재하려면 교육이 아니고는 어찌할 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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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사회 현실로는 교육보다 더 필요한 것이 없다. 우리 회사원 일동이 한강 뱃놀이를 갔을때에 청년 여사(女士) 4~5명이 있는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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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러분! 우리 사회에서 제일 긴급한 문제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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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내가 물었을 때 에덴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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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교육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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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말한 것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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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은 정말로 의미깊은 말이다. 오늘날 서울에 회(會)가 수백을 헤아리고 있지만, 나는 조선의 교육을 부흥시키자는 목표아래 설립된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와 같이 활동하는 회(會)는 다시 없으며, 또는 그 회(會) 같이 건전한 발전을 호소하는 회(會)는 없다고 생각해 왔다. 더구나 중국인을 볼때 도야지 꼬리같은 머리 꼬리, 때가 덕지덕지 묻은 얼굴, 아무 용맹없이 멀건한 눈동자, 어리석어 보이고 미흡해 보이는 그의 태도, 아! 근 만년의 역사가 있는 민족이, 세계 최대의 인구를 가진 민족이, 교육을 받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까닭에 저 모양이구나 하였다. 나는 한동안 이렇게 생각하다가 주머니에서 ‘소녀의 맹세’라는 책을 꺼냈다. 이 책은 내가 출발하기 전에 한설파(韓雪坡) 선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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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매우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한번 보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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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에 가져 온 것이다. 몇분 동안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 재미있게 보았다. 넓은 광야의 자연속에서 사랑에 목마른 두여인의 방황이 아롱아롱 눈에 보이는 듯 하였다. 옆에있던 어느 일본 여학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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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슨 책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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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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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빙긋이 웃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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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여학생이 읽으면 꿀맛같은 책입니다. 프랑스의 문호 S가 지은 소녀의 맹서라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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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말하였다. 그 여학생은 이 소설을 들고 읽어본다. 나는 그틈을 타서 가만히 그의 자태를 엿보았다. 정말로 흔히 보지 못한 미인이다. 나이는 20세가 될까말까한데 연금색(軟錦色) 치마에 담아한 저고리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으며, 귀염있고 곱스레한 얼굴에는, 금테 안경을 쓰고 고운 표정으로 책을 읽는 그 모양은 선녀같이 생각되었다. 그는 아마 개성역에서 차를 탄 모양인데 어디로 가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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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를 한참 바라보았다. 바라보는 동안에 나의 존재는 모두 쓸어지고 그의 생각뿐이었다. 나는 웃었다. 사람이란 이상한 존재라고. 잠깐 동안이라도 남녀가 상합(相合) 하는 때면, 그 가운데에서 이상한 불길이 일어나는 것은 정한 일인데, 음전(陰電) 양전이 보기만해도 어느덧 합해짐과 같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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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오스카 와일드의 사상도 어느 한편으로는 진리라고 생각하였다. 세상에서 누구를 막론하고 연정을 미워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를 생각하고 인간의 도덕을 위하여 경계하는 것이다. ‘항우도 여자앞에서 넘어진다.’하는 속담에도 어떤 진리가 숨어있다. 나도 바로 노골적으로 말하면 도덕이 없고 윤리가 없으며 또는 사회에서 허락하다면, 그 여자의 허리를 힘껏 껴안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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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책 잘 보십시요. 나는 저기 좀 갔다 오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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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차가 신막(新幕) 정거장에서 정차함을 이용하여 李君[이군]을 방문하였다. 과연 이등실은 깨끗하고 조용하며 서늘하기도 하며 삼등실 보다는 썩 훌륭하고 질서가 있었다. 이 다음은 이등실을 탓으면……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나는 삼등실도 아깝다고 생각하였다. 李君[이군]의 자리에 앉아 몇 마디 담화를 할때에 李君[이군]은 저편에 앉은 여자를 소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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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인사들 하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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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나는 그이가 일엽(一葉) 여사인줄도 알고, 이번 은파교회에 강연하러 가는 줄도 알았다. 더구나 서울에 있을때 어느 친구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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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엽 여사는 글을 잘 쓰네, 소설도 쓰고 시도 짓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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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말을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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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일엽은 재미있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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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탄식한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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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도 다른 이름의 일엽 여사가 있는데, 그는 일본 여류문단의 중진이었다. 그가 고생하여 문학을 연구하고 청춘의 몸으로서 애처롭게 불귀의 몸이 되어 高山林次郞[고산임차랑]으로 하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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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찌 오기를 더디하고 이다지 가기는 빨리 가는가? 슬프다. 천재의 死[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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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조상(吊喪)한것도 알며 그의 작품을 읽고 찬미를 불금(不禁)하였는데, 아! 조선의 일엽. 그는 조선의 여류 문단을 훌륭히 창조 할 명성(明星)인가? 이렇게 생각하던 나는 오늘이야 처음 그를 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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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문학가가 될 사람인지, 별로 얼굴은 어엿쁘지 않으나 그의 눈동자 속에는 인간의 이면(異面)을 똑똑히 재어 볼만한 예리한 칼이 있는 듯하며, 그의 태도에는 준수하고 천연스러운 점이 많이 보인다. 더구나 그의 의장(衣裝)을 보고는 존경의 생각을 금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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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여학생이라는 것을 보면 지성은 엽전 두어푼어치 밖에 못되는 것이, 눈은 산봉오리 같이 높아, 일어마디나 하고 영어 마디나 짓거리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줄 알고 얼굴에는 분을 되박으로 바르고, 구두를 백번씩이나 닦고, 비단 치마에, 다이야몬드 반지에, 엉덩이를 휘두루며 돌아다니는 꼴을 보고 머리를 어루만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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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진정한 우리 여성사회가 건설 되려는고? 아! 그 혼신같은 여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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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탄식을 금하지 못하였던바, 이제 여사의 검소한 복장, 곧 그의 쓸쓸한 모시치마, 담아한 베적삼. 아, 이것을 보고는 무한한 감상이 일어나며, 과연 자각있는 여자같이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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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우리들은 무엇으로 던지 근검 절약하고 경건자숙 하여야 겠다. 나는 어느 친구에게 동아일보 주간(主幹)은 목면 양복을 지어 입었다는 말을 듣고 감탄 하였으며, 어느날 회사에서 어느 여학생이 목면 치마에 나막신을 신고 거리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유운(油耘) 선생과 함께 극히 칭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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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저런 여자가 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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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이야기 한 일도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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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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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여성계를 위하여 많이 노력하십시요. 더구나 여류문단에서 많이 공헌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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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한 시간 동안이나 이야기 하다가 차가 신계(新溪) 정거장에서 멈출때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아까보던 여하생은 신계에서 하차한다. 잠시 그의 말을 듣건데 일본 神戶高等女學校[신호고등여학교]를 작년에 졸업하고 개성고등보통학교에 근무하는 자기 아버지를 따라왔으며, 지금은 신계 자기 친척집에 가는 길이라 한다. 나는 그를 보내고 가만히 우리 조선 여학생들과 비교하여 보았다. 어떤 점에서 보던지 우리 여학생 보다는 아름다운 점이 많이 보인다. 온순하고 친절하며 겸손한 태도, 그것이 보통 일본 여자의 특색이라고 하지만, 어쨌던 원채 겸손하여 항상 봄바람 같은 태도로 사람을 대하는 것에는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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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내가 이렇게 말할지라도 일본 여자를 언디까지던지 변호하는것이 아니요, 절대 칭찬하는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내말을 오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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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놈 다 된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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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논박할지도 모르며 더구나 여학생들은 자기를 공격하고 일본 여학생에게만 찬미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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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따위 놈인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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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욕할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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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누구에게 던지 배울만한 것은 배우고, 버릴만한 것은 기어이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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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자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여성은 일본 여자라고 한다. 이것은 언제 한번 지인(智人)들과 토론한바도 있으며 일본 유학생간에 있어서도 긍정하는 사람이 많다. 더구나 미국의 ‘NEW LADY'라는 잡지에 토머스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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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자중에서 가장 여성의 특점을 잘 갖춘 이는 일본 여자다. 여자라는 것은 어쨌던 가정의 화락을 보호하고, 남편의 마음을 즐겁게 함에 있으며, 온순겸애하여 사람의 마음에 사랑의 공기를 넣어 주는데 있다. 그런데 나는 작년 4월에 일본을 만유(漫遊)하여 이것을 일본 여자에게서 보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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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하였다. 과연, 그렇다. 세계 여자 중에서 이렇게 특점을 소유한 이는 일본 여자라고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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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 여학생들을 보건데 자기 눈앞에 늘 보는 일본여자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코 크고 눈이 파란 서양 여자만 본다. 그들이 뾰족한 구두를 신었으니, 종로 구두점을 모두 뒤져서라도 뾰족한 구두만을 기어이 사 신으며, 그들이 남녀 평등을 떠들때, 건방지게 남녀 평등이란 뜻도 모르고 그저 날뛰며 평등 평등 한다. 어느 신여성의 연설을 듣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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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남녀평등 입니다. 왜 여자들은 하시(下視)합니까? 아닙니다. 이후부터는 여자가 아침밥을 지었으면 저녁에는 남자가 밥을 지어야 해요. 어디 말좀 하시요. 어디 남자들 잘난것이 무엇이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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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생각건데 남녀평등이라면 밥도 같이 짓고 아이도 같이 낳아야 남녀평등인가? 그들은 좀더 깊이 알고 말하였으면 좋을듯하다. 곧 서양 여자만 보지말고 자기네 보다 40~50년 먼저 깨고 먼저 알고도 어디까지나 자기의 천직을 다하며, 여성의 특색을 잘 발휘하는 일본 여자도 좀 보았으면 하였다. 나도 역시 우리 여성의 부르짖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오 또는 남녀평등이나 부녀해방에 대하여 진정으로 동정을 표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렇게 몰상식하고 경박한 행동은 아무리 신수좋고 훌륭한 신여성이라도 제발 그만 두었으면 좋을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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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차는 사리원을 지나 황주로 향하여 간다. 이러한 생각으로 눈을감던 나는 창을열고 바깥을 바라 보았다. 구월산 높은 봉에 흰구름은 고요히 잠겼는데 마치 여왕이 머리에 장미꽃 화환을 쓰고 용상에 앉은듯하다. 더구나 연옥색 파란 하늘이 구월산을 뒤덮고 장차 자기의 품으로 안아 올리려는 듯한 그 모양은 몹시도 웅장하고 몹시도 광대해 보인다. 더구나 봉산(鳳山)의 넓은 벌판에 곡식을 보니, 농부들이 더운땀을 흘린 결과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나라 농촌도 많이 개선되어야 한다는것을 생각하였다. 더운 햇빛 아래 조그만 호미를 들고 아그작거리는 모양은 몹시도 안타까와 보인다. 어서 우리사회도 농기구를 개선하여 기계로 시원스럽게 김을 매고, 기계로 갈고, 기계로 타작도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100
넓은 벌판으로 흘러가는 은빛 시냇물, 산비탈로 소를 몰고가는 목동, 구름 속에 잠긴듯한 저편 멀리 보이는 촌락, 촌락앞에 웅장한 나무그늘, 이러한 것을 바라보며 여러가지 생각을 하는 동안에 어느덧 차는 대동강을 건너간다. 사람마다 창을열고 대동강! 하고 외친다. 그러나 그들은 무슨 의미로 대동강을 찾는지……하기는 손톱만큼의 무슨 느낌이 있는 모양이다. 진주빛 파란 물결이 저편 언덕을 얼싸안고 가만가만 소리없이 흘러간다. 그 위로 일엽선(一葉船)은 바람을 껴안고 오르락 내리락 한다. 더구나 버드나무 가지가 휘휘 늘어져 수면위에 그늘을 지우는 곳에는 파란 비단위에 묵화를 그린듯한 그 모양이 역역히 보인다.
 
101
아! 대동강!
 
102
우리 사람의 자랑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고귀한 선물이다. 우리 조상들의 얼굴이 이 물결위에 많이 비쳤고, 우리의 문명이 이 물결위에서 많이 발달하였다. 아! 그리운 대동강이여! 언제 한번 서울에 있는 T君[군]이 말하기를
 
103
“프랑스에 있는 어느 친구가 라인강을 그린 ‘에하가세’를 보내며 낙관끝에 (천하의 제일 강은 라인강 입니다. 한번 구경 오시요.)하였기에 나는 (여보, 동양에도 라인강이 있읍니다. 조선의 대동강. 아! 이 강이 라인강보다 더 좋지요. 그러지 마시고 이 조선에 있는 동양의 라인강을 구경하러 오시요.)”
 
104
하였다고 한다. 과연 우리 대동강이야말로 천하의 제일 강산이다. 이러한 강산속에 사는 우리 사람은 정말 행복하며, 이러한 강산에서 출생한 우리는 정말 위대한 민족이다.
 
105
어느덧 열차는 평양역에 도착하였다. 사람도 꽤 많은 모양이다. 평양에서 친구가 나를 고대하며 기다린다, 그가 나오지 않았으면 곧장 진남포로 가려고 하였더니, 불가불 평양에서 하루 밤을 자게 되었다. 데리고 오던 소년 소녀는 할수없이 진남포행 기차를 태워주고 천번 만번 당부하며 편안히 잘 가라고 하였다.
 
106
우리는 인력거를 불러타고 주인집으로 향해갔다. 내가 인력거를 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햇빛은 모닥불같이 내리 쬐이는데, 거부(車夫)는 땀투성이가 되어 헐떡헐떡하며 끌고간다. 더구나 병영(兵營)옆 작은 언덕을 올라갈 때에는 그의 얼굴에서 비지땀이 만락수(萬落水) 떨어지듯 뚝뚝 떨어진다. 사람이 되고 차마 볼수가 없다. 어느놈은 팔자가 좋아 타고, 어느놈은 신수기박하여 저렇게 끌며 고생할까? 나는 거(車)에서 내려 그의 만류를 뿌리치고 스스로 걸어갔다. 오늘날 노동 문제니 공산주의니 하는것도 이 의문에서는 그들의 주장도 절절히 느껴진다.
 
107
주인집에 도착하여 피로한 다리를 쉬이며 친구와함께 서울의 대홍수와 대공판 이야기로 남은 시간을 보냈다. 저녁을 먹은후 곧 자리에 누워 슬픔많고 불평 많은 애닯은 현실을 져버리고 편안하고 근심없는 세계의 사람이 되었다.
 
 
108
그리운 밤
109
오! 꿈의 님이여!
110
나를 당신의 가슴에 안아 주시요.
111
눈을 감고 현실을 떠나
112
당신의 팔목에 매달릴때
113
눈에 보이는것 ─ 희맑은 백합화 송이 뿐
114
귀에 들리는것 ─ 연묘(軟妙)한 만도린 소리 뿐
115
아! 이곳에 천국이 있음을
116
나는 알고 있읍니다.
117
꿈의 님이여!
 
 
118
하는 바이런의 시를 생각하며 꿈속에서 안식을 얻고 나는 꿈속에서 편안을 맛본다. 짐짓 눈을뜨고 현실로 돌아올때에는 언제던지 흰구름 돌던 가슴에 먹구름이 둥실둥실 떠다니고, 장미꽃 피던 가슴에 가시밭이 무성해진다. 아! 나는 늘 이러 하였다.
 
119
하루밤 잠에서 깨어 두손으로 눈을 부비면서 아침의 맑은 공기를 마시기위해 신학교 옆, 백양나무와 아카시아가 총총 들어선 나무 그늘을 찾아갔다. 명주올 같은 실안개가 숲 전체를 애워싸는 데 아직도 밤의 꿈이 남아 있는 듯 하다. 키가 적고 통통한 백양목 아래앉아 앞을 바라보았다. 숭실학교는 아침 하늘의 성자같은 자태로서 영원의 긴 숨을 쉬는듯 우뚝 서있다. 진남포로 달리는 기차의 기적소리는 첫날 신부같이 고요한 아침 공기에 한줄기의 파동을 일으킨다. 나의 가슴에는 지나간 과거의 일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한다.
 
120
5년전 이었다.
 
121
소년의 여린 가슴으로 로맨틱한 동경(憧憬)의 꿈을 가지고 이 숭실학교에 와서 공부하였던것이 생각난다. 그때야말로 천진난만한 행복의 시대였다. 인생의 넓은 세계가 있는것도, 추상몰일(秋霜歿日)의 고통이 있는것도 모르고, 가슴에 웃음의 술잔과 백합화의 향기와 봄 아침의 정기를 안고 능금향 달래…… 아! 희망의 꽃밭을 꿈꾸면서 그저 좋아하고 그저 기뻐하였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생애의 파란도 많았다.
 
122
여러가지 쓸데없는 공상을 한참하다가, 다시 주인집으로 돌아가 조반을 물리고 나의 학우로 가장 친한 K君[군]을 찾아갔다. 그가 가져온 복숭아와 향기로운 술을 기울이면서 한참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지금 생활의 감상으로 부터 사회, 개인, 세계를 멋대로 건방지게 논평도 하고, 칭찬도 하면서 참새 여울 건너듯이 맞장구도 쳤다. 그중에 이러한 얘기도 있다.
 
123
“K君[군], 평양에 와보니 조선인도 상업에 착실한 지위를 점령한것같데, 그려. 훌륭한 2~3층의 양옥도 제법 들어서고, 정말 평양인도 어디까지나 실행적인 인물이요, 향상적 인물이데…… 아! 서울 사람처럼 무력하고 연약한 사람은 없데. 그저 의복이나 잘입고 구경이나 다닐 줄 밖에 몰라”
 
124
“R군! 그렇던가? 여기 신시가(新市街) 韓君[한군]의 상점은 꽤 훌륭하다네. 작년에 일본인이 3층으로 훌륭하게 집을 건축하여 그는 조금도 지지 아니하고 여러방면으로 활동하여 일본인 이상으로 잘 건축하였다네.”
 
125
이 말을 들은 나는 무한한 느낌을 받았다. K君[군]을 작별하고 신시가(新市街)를 지나다가 아까 말하던 韓氏[한씨]의 상점을 보고는 일층 감동을 받았다. 시멘트로 건축한 3층 양옥인데 그 화려함은 서울에서도 보지 못하던 것이었다. 조선인도 저러한 집을 짓고 상점을 경영하는구나 생각할때 머리에서 광명의 샘물이 촬촬 솟아 오르는듯 하였다. 조선인아! 이 韓[한]씨같이 남에게 지지말고 항상 이기려고 하라.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잘되게 하는 근본이다. 형제여! 당신들이 상점이나, 공업이나, 과학이나, 문학이나, 종교나, 무엇이든지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악전고투하라. 그러면 우리도 남같이 잘살고 잘 지내며 문화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주인집으로 돌아왔다. 즉시 진남포로 떠나려고 하였으나 일기는 너무 덥고, 공연히 머리도 아파서 하루 편안히 쉬어 내일 떠나기로 하였다. 넓다란 방안에 홀로누워 이리데굴 저리데굴 하면서 으례히 나오는 여러가지 공상을 또 하게 되었다.
 
126
눈을 가만히 감고 지내온 반생을 그윽히 생각한다. 여러가지 후회할것도 많고 반성할것도 많다. 꾸불꾸불한 반생의 행로가 나의 생 위에 많은 인상과, 많은 자취와, 많은 역사를 가져다 주었다. 빨간 몸뚱아리로 나서 부모의 흰빛 가슴에 유년시대와 소년시대를 무사히 보냈으나, 소년기가 나를 작별할때부터 나의 생앞에 흑운암우(黑雲暗雨)가 분분하여 풀잎같은 몸으로써 고해에 유랑하며 흑운암우에 휘적시어 오늘날까지 헤매며 고생하였다. 그러나 과거는 나의 장래의 교훈이며, 이미 받은 고생은 나의 생명위에 큰지식이다.
 
127
도스토예프스키가 4년간 백화아(伯和亞)에서 징역(懲役)의 고통을 맛보지 않았더라면 세계적 대문호가 되지 못하였을 터이며 ‘카라마 조프가의 형제들’같은 대작을 세상에 펼치지 못하였으리라는 메레지우코프스키의 평론같이 과연 많이 고생하고, 많이 느끼고, 많이 생각한 사람처럼 귀한 사람은 다시 없다. 고통은 사람을 옥으로 만든다는 일본 俚諺[리언](속된 속담)과 같이 많이 고생한 사람은 그만큼 잘되고 많이 알것이다. 나의 과거에도 고생이 조금은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작년같은 해에 한번 감옥 구경도 못한것이 섭섭하다고 느껴진다. 꼬이데의 말에
 
128
“나의 사람아 한번 감옥의 밥을 먹어보라. 그 가운데에는 인생의 대학교가 있느니라”
 
129
하는것을 생각한즉 감옥에도 한번 기어이 들어가 인생의 표리를 알아 보았으면……하고 느껴진다.
 
130
이상의 내 과거는 그러하거니와 나의 장래는 또 어떠한 파란이 생기려는고? 지금 내가 밟는 길은 어느 차원으로 통하는 길인가? 아니 어느 가시밭길로 나가는 길인가 아, 어찌 되려는고? 세상에는 사람마다 모두 한가지 길을 밟고 나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그 길을 알지 못한다. 자기가 호부(虎富)로 통한 길을 밟으면서도 해당화 피는 ××로 나간다고 생각한다. 인생이란 생각하면 우습다.
 
131
톨스토이가 만년에 자기 처자와 재산 전부를 모두 버리고 남러시아로 향하여 가면서 시원치 못한 인생에서 무슨 좋은길을 얻을까하고 애쓰다가 조그만 정거장 병원에서 세상을 저버린것도 역시 이것이다.
 
132
아! 영원히 동경하는 사람의 길이여!
 
133
이러한 생각을 한참하였다. 방안에 바람은 조금도 들어오지 않고 더운 공기만 사람을 푹푹 삶아댄다. 온몸에서 땀이 비오듯 한다. 이러한 때에는 공상도 못하겠다. 부채로 한참 휘휘 부치다가 견디기 어려워 의복을 갈아입고 산보를 나갔다. 그래 평양에 왔다가 모란봉이나 부벽루를 한번 가보지 아니하고 마는 것은 어쨌던 마음에 미안한 생각이 든다. 대동문을 나서 대동강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으로 젖은 얼굴을 씻으며 부벽루를 향하여 간다. 항상 푸르고 변하지 않는 대동강은 옛적이나 오늘이나 한결같으련만 사람의 인심은 왜 이다지 격심한고? 저 대동강에 비쳤던 우리 옛날의 영화는 아! 오늘날 모두 어디로 갔는고?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지금 처지를 대동강아 비웃지 아니 하느냐?
 
134
이같은 공상아래 부벽루에 도착하였다. 여러번 구경하고 많이 탐유한 곳이기에 별로 감상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을밀대 아래 울울이 들어선 그늘속에서 우러나오는 바람의 노래, 그뭄 같은 그늘 속으로 왕래하는 유객의 그림자, 저녁 햇빛을 받은 능라도의 노을, 그래도 제일강산이라는 곳은 언제던지 조금이라도 볼 것이 있다. 모란봉 북편의 청초가 우거진 곳을 찾아가서 두다리를 길게 뻗고 가슴으로 하늘을 껴안으면서 영원의 숲속에서 같이 숨쉬고져 하였다.
 
135
톨스토이작 ‘전쟁과 평화’에서 어떤 주인공이 전투에서 가슴에 탄환을 맞고 쓰러지면서
 
136
“아! 아름다운 하늘이여. 저렇듯이 희맑고, 저렇듯이 광활한 하늘을 왜 나는 바라보지 아니 하였는고?”
 
137
하였다는 말과 조루단 박사가
 
138
“마음이 상하고 생각이 흐릴때에 고요한 곳에서 하늘을 바라보라. 그러면 고원광대(高遠廣大)한 광경과 그 유유한만(悠悠閑漫)한 ×체에 네 머리도 동화되리라.”
 
139
한 철학적인 말이 알게 모르게 떠오른다.
 
140
한없이 맑고, 한없이 크고 한없이 높은 하늘, 흰구름이 백설덩이 같이 가만가만 움직이는 것을 볼때 나의 머리속에는 여러 복잡한 생각이 다 없어지고, 그저 새하늘의 새기운이 머리에 가득 할 뿐이다. 어떤 사람이 보면 미친놈 같이 생각할것 같다. 풀속에 깊이잠겨 그저 한늘만 본다. 이것이 나에게 무엇보다도 큰 즐거움이요, 큰 안식이요, 큰 낙원이다. 언제던지 욕심많고 싸움많고, 죄악많고, 불평많은 사회를 떠나 이와같은 자연의 생명과 동화 될 때에는 항상 무한한 감동을 맞보게 된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사회로 부터 탈피하고 자연의 생명을 연구하여 그의 살고 숨쉬는 ××대로 사회를 건설했으면. 그것이 정말 바이런이 말하는 대당(大堂)이 아닌가 생각한다.
 
141
자연을 찬미하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지만 항상 맑은 공기로, 새로운 호흡으로, 연모하는 노래로, 영원히 검지 않는 흰 가슴으로, 웃고 춤추고 노래하는 이 자연을 볼때 걸핏하면 선전포고니 무엇이니하고 대포를 꽝! 놓으며, 사람을 파리같이 죽이고, 조금만 손해가 있으면 새빨간 눈으로 아니꼽게 사람을 흘겨보며, 조금만 자기의 마음에 합치하지 않으면 불법의 소리로 참혹하게 저주하며, 혹은 내물건이니 네 물건이니 하면서 날마다 재판이니 무엇이니하고 날뛰는 현실을 생각할때 가엽고 한심한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할 수만 있으면 유명한 의학자가 되어 사람의 가슴을 이 자연의 가슴같이 하였으면……하고 생각한다.
 
142
이미 해는지고 어두 컴컴한 산 봉오리를 휘어 싼다. 그리고 저편 동산에서 생긋 웃으며 올라오는 옥분같은 흰달이 새하얀 우유를 내 입술에 붓는 듯하다. 나는 손을 내밀고 휘저으면서 그 달의 묘함을 칭찬하고 바이런의 시 한편을 외웠다. 아무리 재미있는 곳이지만 오랫동안 누워 있을수가 없었다. 대동강 위에 떨어지는 금빛 월영(月影)을 구경하면서 주인집으로 돌아왔다. 때는 열시 정도. 주인은 저녁이 늦었다면서 말을 많이 한다.
 
143
밤을 무사히 지내고 아침 열시를 기다려 행장을 정리한 후 정거장으로 향하였다. 차표를 사가지고 뚜뚜하는 긴소리와 함께 진남포로 떠난다. 평양이 얼신 눈앞에 그림같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더구나 노악산 모퉁이로 지나갈 때에는 울울한 숲속에 잠긴 숭실학교 지붕이 바늘끝 같이 보일뿐이고, 그 밖에는 비취빛 같은 하늘 뿐이다. 나는 이곳을 지날때 어쩐지 섭섭한 생각이 난다.
 
144
황해도 어느 땅에서 어머니와 세월을 보내다가 장래라는 것을 생각하고 평양에 와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앞에 굴복하여 어머니가 별세하였다는 부고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5~6년전 이곳을 지나던 생각이 난다. 그때는 정말 가슴이 아프고 정신이 멍멍하였다. 사랑하는 외아들. 아! 나를 멀리 보내고 적막하게 혼자 계시다가 불운의 병으로 세상을 떠난것을 생각하면, 또는 이제부터 신세가 기박하여 저 평양 하늘을 다시 보지 못하고 시골촌에서 땅이나 파먹으리라. 이 처럼 슬픈 마음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이곳을 지날때에 평양을 다시 바라보고 목이 매어 울었다. 그러나 오늘 이곳을 다시 지나며 평양을 바라 볼때에 전일에 뛰든 가슴의 요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차는 잘도 간다. 나무그늘 사이로 또는 벌판 가운데로…… 나는 공손히 머리를 숙이고 정신빠진 놈같이 있다가, 문밖에 나와 승강구를 잡고 별 모양으로 전개되는 천태만상의 주위 풍경을 바라본다. 더구나 물위로 또는 나무 사이로 산위를 모두 거쳐서 산들산들 찾아오는 수정옷 입은 맑은 바람은 한정없이 서늘하고 시원하게 내 이마에 키스해 준다. 나는 가슴에 사이다를 담은듯 머리에 날개를 붙인듯 공연히 흥이나서 입으로
 
145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다시 꿈같구나”
 
146
하는 좋지못한 노래를 부르면서 마음껏 전원미의 풍경을 칭찬하였다. 이제 나는 평화와 안식과 자유의 유토피아로 숨어가는듯 하였다. 한시간만 지나면 진남포가 되리라 생각하나 어쨌던 이 차는 진남포로 가지 아니하고 꼭 이상적인 ‘파라다이스’로 향하는것 같이 느껴진다. 더구나 철도변 아카시아가 바람에 흔들리어 바삭바삭하며 큰 시냇가에 그림자를 지우고, 파란 나무 속에서 작은 아가씨의 노래가 들리고, 매미가 맴맴하며 백옥을 깨뜨리는 듯이 울고, 늙은 농부가 손자를 안고 그늘에서 쉬는 것을 볼때에는, 기어이 얼마 아니가서 꼭 수정세계에 ‘예루살렘’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면 그 세계는 어떨까 하였다. 파란 물결이 찰삭찰삭하는 은빛 모래가 수백리 깔린 곳이리라. 그리고 그 모래위에는 해당화가 봉긋봉긋 만발하였으며 그 옆으로는 백옥같은 ××이 질펀하며, 그리고 그곳에 사는사람은 20~30세의 청년이며 모두 키가크고 얼굴이 고우리라 생각하였다. 또한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는 싸움도 없고 죽음도 없으며, 어른도 없으며 아이도 없고, 귀한 사람도 추한 사람도 없으리라 생각하였다. 또한 그 곳의 사람은 아무 어려운 일도 아니하고 매일 음악이나 듣고, 그림이나 그리리라 생각하였다. 곧 벤곤 철학자의 ‘노바 아트란티스’와 모어의 ‘유토피아’에 표지된 세계가 되리라 하였다.
 
147
“아! 너는 지금 이러한 세계에 실려 간다. 좋다.”
 
148
하며 꼭 이런 곳으로 간다 하였다. 그러나 한참 공상을 하고 보니 곧 차가 멈추어 선다. 이제야 다시 이전 사람이 되어 차내로 들어왔다. 사람이 많이 내리고 오르고 한다. 그중 강서고분을 구경하고 오는 사람이 많다. 차가 떠난다. 어떤 신사 한 분이 내곁에 와 앉는다. 매우 기풍이 훌륭해 보인다.
 
149
얼마동안 마주보다가 나중에는 기어이 인사를 하고 말았다. 그는 서울의 어느 여중학교 교사인데 강서고분을 구경갔다가 진남포로 향하는 길이라 한다. 그는 강서고분묘 안에 있는 고대 미술품을 극력 칭찬하며
 
150
“여보, 우리 조상들은 예술에도 그렇게 훌륭하였읍디다. 이탈리아 놈들이 아무리 예술에 천재가 있고 훌륭한 미술품을 많이 제작 한다고 하지만, 우리 조상의 것 만치는 기어이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선이 웅대하고, 칼라가 심원(深遠)한것은 그 속에 고매한 우리 조상의 이상이 숨어 있음을 알겠더이다. 그런데 그렇게 훌륭하던 예술품이 이제는 분묘속에서나 찾아 보게 되었으니 기막히지 무엇이겠소. 우리 후손이 그렇게 못나고 못생길줄이야 누가 알았겠소?”
 
151
하며 그는 감개무량한듯이 노상 주먹까지 휘두르면서 말한다. 나는 그의 말에 대단히 찬동하며
 
152
“과거가 어쨌던 이제부터는 우리도 조상의 유산을 극력계승하여 조선의 혼을 부활시킵시다.”
 
153
하였다. 어언간 차는 진남포에 도착하였다. 호××사에 흰테를 두른 순사들이 야단을 친다. 더구나 조선 사람에게는 보통말도 명령 비슷하게 톡톡 쏘아 붙인다. 나는 신사복을 입은 덕분인지 다행히 당신이라는 존칭을 받았으며 겨우 무사히 나왔다. 서울에 있다는 교사되는 분은 무슨 까닭인지순사들에게 성화를 받은 모양이다. 나는 갈길이 바빠서 곧 선창으로 나아갔다. 대동환(배이름)이 막 떠나려고 한다. 곧 배위에 올라 진남포를 바라보면서 재미좋게 둥실둥실 잘 떠나 간다. 과연 기선(汽船)의 여행은 기차보다 썩 훌륭하다. 물결을 헤치고 획획 지나가는 모양! 갈매기 떼가 물속에 헤엄치는 모양, 멀리 보이는 작은 섬이 실안개 같은 수형(水炯)속에 쌓인 모양! 하늘과 바다가 연접한 수평선의 아득함! 바다위로 올라가는 바람! 이러한 것을 육지에서는 보기어려운 구경이다. 나는 멀리 보이는 섬위에 커다란 풍림(風林)을 바라보며 도데의 시일절(詩一節)을 외었다.
 
 
154
바다여! 나의 집이여!
155
무지개 같이 내뿜는 물거품
156
달 아래 흔들리는 옥빛의 웃음
157
백설옷 단장에 목욕하는 작은 갈매기
158
아! 이것은 내가 가슴에 껴안고
159
미(美)의 꿈아래 같이 잠자는
160
나의 木[목]×의 애인이로다.
 
 
161
이것을 외어 보았다. 별로 큰맛은 느끼지 못하였으나 그가 바다에 대한 동경이 아주 경이적이라 하겠다. 이것은 그가 처음 지중해를 보고 바다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지은 시(詩)라 한다. 나도 한참 바다를 바라보며 그의 궁한 경색(景色)을 칭찬하다가 저편 선실로 갔다. 거기에는 다행히 나의 지기(知己)가 있었다. 그는 인격이 훌륭하고 성격도 착실한 사람이다. 작년 까지는 경상도 마산에 가서 교편을 잡았는데 지금은 귀향하여 농촌개발에 전력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번에 서울 구경을 하려했는데, 그러나 그는 서울의 내막을 보고 매우 비관하며
 
162
“여보시요. 노군(盧君)! 나는 이제 산으로 가서 중이나 되겠소. 사회를 보아야 비관뿐이니까.”
 
163
한다.
 
164
내가 그 이유를 물어본즉 그의 대답은 이러하다.
 
165
“오늘날 사회에서 일한다는 사람을 보면 모두 야심과 명예와 허영뿐 이옵니다. 조금도 이렇게 기울어진 사회를 다시 붙들어 보자는 생각은 없고 그저 자기몸 하나만을 위하고자 합디다. 그리하여 자기에게 욕심이 차지않고, 자기에게 명예가 돌아오지 않고, 자기에게 만족이 돌아오지 아니하면 날마다 싸움이요, 회(會)마다 분쟁이니 어찌 새사회 건설을 바라겠소. 에! 기막혀서…… 오늘날 우리 사회가 그것으로 기울어 지고도 또 그것을 일삼는단 말이요.”
 
166
하며 일장 연설을 한다. 나는 그의 말에 매우 감동하여 서울에 무슨 회(會)니 무슨 대회니 하는 수많은 회(會)가 분쟁과 균열로 한가지 일도 하지 못하고 날마다 직원만 개편하느라고 야단만 하는것을 동시에 생각하며 그와 한참 맞장구를 쳤다. 석양이 서천(西天)에 떨어지면서 보기좋은 오랜지빛 비단을 물위에 깔아 놓을때 금복포(今福浦)에 하륙하였다. 곧 자전거에 몸을 싣고 달아나기 시작한다. 장연읍을 지날때에는 벌써 서쪽 하늘이 컴컴하고 동산에 달이솟는다. 그러나 고향 생각이 간절하여 정말 일각여삼추이다. 장연읍에서 하루밤 쉴까 하였으나 필경은 백리나되는 송화본(松禾本) 집에 밤이라도 가고싶다 하였다. 그리하여 밤안개가 실같이 둘러싸고 그위에 달이 비치어 정말 꿈의 나라같은 전원의 아름다운 길을 개골개골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와 풀벌레 소리를 들으면서 급히 자전거의 바뀌를 굴렸다. 때는 12시15분 ─ 반가운 고향의 산천이 나를 두손으로 맞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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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자영(盧子泳)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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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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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리의 여름길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9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