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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오코왼의 후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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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2
이효석
1
라오코왼의 후예
 
 
2
무덥고 답답한 것은 오히려 참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몰려드는 파리떼야말로 역물이다.
 
3
편집 시간을 앞두고 수선스럽고 어지럽고 초조한 편집실의 오후를 파리떼는 제 세상인 듯 들끓고 있다. 얼굴과 손을 간지르다가는 목탄지 위에다 불결한 배설을 하고 날아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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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잡한 방안이 천재의 있을 환경이 못 되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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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가 마란은 시간이 촉박하였음에도 그날 소설에 들어갈 삽화를 아직도 그리지 못한 채 파리와의 싸움에 정신이 없다. 천재로 자처하는 그에게 휘답답한 편집실은 버릇없기 짝없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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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를 괴롭히는 이놈의 추물─이놈의 미물─이놈의 속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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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채 밑에서 한 마리 두 마리 꺼꾸러져 책상 위에 볼 동안에 적은 시체의 무더기가 늘어간다. 마란이 중얼거리는 어투에는 비단 파리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은근히 편집실 안에 웅성거리는 천재 아닌 뭇 미물들을 조롱하는 마음도 있다. 국장을 비롯해 과장 부장 주임 기자 사무원 급사 등 흡사 파리떼만큼이나 흔한 속물들도 마란의 비위에는 파리떼와 고를 배 없는 평범하고 용렬하고 하잘것없는 존재로밖에는 비취이지 않는다. ─조물주는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도 흔한 미물들을 파리떼와 인간들을 만들었누. 이 흔한 미물들이 죄다 조물주의 똑같은 총애를 바랄 권리가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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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다가 문득 어깨를 으쓱 솟구고 입술을 쫑긋 휘인 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자기 자신을 무엇인가, 똑같은 한 사람의 미물이 아닌가, 미물인 까닭에 아직도 그날의 삽화도 못 그리고 고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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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깨달음은 전혀 망상임을 뉘우치면서 자기와 주위와는 여전히 엄격하게 구별되어 있음을 그의 천재적인 직관과 자부심이 고집스럽게 주장했다. 삽화를 못 그린 것은 천재적인 고민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무더운 기압 속에서 볶이우면서 파리떼와 싸우며 초조와 번민 속에 사로잡혀 있음은 천재로 비약하려는 직전의 일순간이 아니던가. 무엇을 어떻게 그렸으면 좋을는지를 몰라 졸지에 막힌 것이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목탄지 위에 붓끝이 머무른 채 손가락이 탄식하고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에서 두 눈이 형형이 빛났다. 파리 사냥에 정신을 옮기고 또 반시간을 지내는 동안에 편집시간은 자꾸 임박해 오건만 한 획도 운필을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요새 와서 여러 번째의 버릇이었다. 꽉 막힌 답답한 창안에서 답보하기 시작한 예술이 쉽사리 길을 찾지 못하고 그 안타까운 괴롬을 표현할 도리를 몰라 메마른 영감과 동기 속에서 뼈를 갈면서 꼽박 꼽박 밤낮을 여위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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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풀이나 하듯 파리채를 휘두르는 동안에 애꿎은 시체만 책상 위에 늘어가고 목탄지는 어느 때까지나 백지의 순결을 지키고 있을 즈음 힘차게 쳐든 파리채에 요번에는 커다란 미물이 걸렸다. 등뒤로 돌아오던 급사가 파리채로 보기 좋게 면상을 얻어맞고 그 별안간의 봉변에 재수없다는 듯이 눈자위가 돌면서 퉁명스럽게 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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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선생님 망령이신가요. 저까지 잡으실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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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파리보다 낫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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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정대는 한마디가 어린 마음을 노엽히고야 말았다. 급사는 정색하면서 자기 맡은 의무로 어른을 윽박으러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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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소리 말구 얼른 그림이나 주세요. 몇 시나 됐나 시계를 좀 쳐다보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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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여러 해 동안의 신문사 생활로 편집 시간의 엄격하고 가혹함과 그것이 기사를 담당한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초조하게 바수는가를 누구보다도 잘 터득하고 있었다. 자기가 던진 독촉의 한마디가 사모하는 화가의 가슴속에 준 효과를 마치 그의 멱살이나 잡은 듯이도 통쾌하게 여기면서 소년은 더욱 지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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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부에선 판을 다 짜놓구 지금은 선생의 삽화만을 기다리는 중예요. 소설은 있어두 그림이 가야죠. 창 빠진 것같이 그 자리만 허옇게 해서 찍을 수두 없는 노릇이구. 직공들의 사정두 좀 살피구 일분이 바쁘게 신문을 기다리는 수백만 독자의 심중두 생각해 주세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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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옇게 해서 찍으렴. 너까지 날 귀찮게 구니. 신문이 내겐 원수구 시간이 내겐 지옥이다. 책을 베끼듯 그렇게 술술 되는 그림이 아니야. 너두 파리두 신문두 내겐 죄다 원수야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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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괴롬을 못 이겨 마란은 기어코 화를 내 버렸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면서 파리채로 금시 급사를 후려갈길 시늉이다. 급사는 그제서는 제 일이 바빠서 사정이나 하듯 겸양하면서 손을 모고 빌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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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하시구 어서 그려주세요. 붓을 들구 종이 위에다 단숨에 냉큼 그려 주세요. 아무래도 좋으니 구불구불 몇 줄만 그려 주세요. 시간은 없구 큰일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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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겐 아무래두 좋아두 내겐 좋지 않어. 이 답답한 속에서 그림이 되다니. 예술이 그렇게 수월한 것이드냐. 오늘은 그림이 없다. 인쇄부에 가서 그렇게 일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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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그리세요. 삽화를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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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달 밖엔. 천재를 괴롭히는 이 미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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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조르는 거지같이 소매에 매어 달리는 급사를 뿌리치고 마란은 편집실을 횅하니 내뺀다. 뒷문을 나서 복도를 걸어 급스럽게 뒤뜰에 내려서는 꼴이란 지옥을 벗어나려는 뜻인 듯도 하다. 해방된 플로메스같이 땅을 저벅저벅 밟으며 호흡을 깊게 하면서 활개를 펴보나 초조한 심사에는 문밖도 답답하다. 하늘이 얕고 공기가 무거웁다. 해를 머금은 검은 구름같이 속이 달고 화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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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백화점의 경기구도 뜨지 않고 도회의 허공은 그리다가 버린 수채화같이 흐리멍덩하게 풀어져 있다. 빛과 그림자의 구별을 가지지 못한 건축들은 아름다운 입체감을 잃어버리고 단조한 평면 속에서 표정도 감정도 없이 하품만 하고 있다. 삼라만상이 괴롭고 따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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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 뒤 문간에 사람들이 둘러싸고 선 것은 아마도 또 무슨 장사치리라. 약장수도 오고 붓장수도 왔다. 어떤 때에는 인삼장수가 와서 메마른 이끼 속에 도라지같이 꼬치꼬치 꼬인 풀뿌리를 헤치면서 사람들을 모았고 때로는 자라장수가 나타나서 산 자라의 옆구리를 찔러 선지를 내서 입술에 묻히면서 부족중에는 직효라고 선전하는 것이었다. 뒤 문간에는 언제나 이렇게 온전하지 못한 객꾼만이 모여드는 법인 모양이다. 오늘은 또 무슨 장사치인구 하고 마란은 가까이 가서 사람들 틈으로 엿보다가 뜨끔해서 소스라치면서 뒷걸음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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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나무궤를 안고 선 것은 땅꾼이었다. 궤 속에 한 뭉치가 되어 굼실굼실 늘이고 누운 것은 독사의 한 떼. 삼단같이 흩어지고 서리어서 고개들을 곧추 들고 철망 속에서 혀를 널름거리는 꼴은 흡사 세상을 저주하려는 것인 듯 보는 눈에 능굴지고 께름칙한 독을 껴얹는다. 이놈의 미물은 대체 무슨 인연으로 아담 때부터 사람의 원수가 되었누. 사람들은 그 흉칙한 꼴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둘레둘레 그것을 둘러싸고 보고 섰음은 또 무슨 까닭일꾸. 뭇시선 앞에서 자랑스럽게 그 한놈의 목을 손가락으로 올켜 쥐고 널름거리는 혀를 뽑아 보이는 땅꾼의 심청머리도 또한 알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자식이 아니요 뱀의 종족이란 말인가. 그렇게 대담하고 추잡하고 야만스런 그 녀석은.
 
27
“이놈의 미물두 결국 내게 영감을 주지는 못하누나. 내 예술을 싹트게 하지는 못하누나. 우리 조상의 원수는 내게두 필경은 원수밖에는 못되누나.”
 
28
마란은 외면하고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그 미물을 아름답게 노래한 옛 시인을 생각했다 아롱거리는 . 등어리를 햇빛에 반짝이면서 풀 속으로 굼시르르 사라지는 뱀의 모양을 찬미한 시인의 심청머리는 또 대체 어떤 것이었던구. 그 능굴진 추물의 모양이 시의 세상에서는 아름다울는지 몰라도 그림 속에서 빛날 리는 만무해. 푸르고 붉은 늘메기의 색채라면 또 몰라도 단조로운 회색만의 독사의 꼴이 그림이 될 수는 만만 없는 노릇이야. 아무리 천재기로서니 현대화에 있어서 그 추물을 취급할 수는 없구 말구…….
 
29
중얼거리면서 마란은 등뒤에 점점 뱀의 세상을 멀리했다. 신문사의 돌벽과 흐린 하늘이 앞에 가로놓여 마음은 더욱 초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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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가 그려야 할 소설의 삽화라는 것은 괴로워하는 현대 남녀의 자태였다. 남녀는 피차의 연애만으로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앞에는 시대가 놓였고 역사가 물결치고 겹겹의 파도가 휩쓸려 와서는 송두리채 육신을 뽑아 가려는 것이었다. 그 위에 두 사람에게는 길러도 길러도 진할 줄 모르는 안타까운 애욕의 오뇌가 그치지 않는다. 여자는 기어코 주인공 앞에서 흑이나 백이냐 좌냐 우냐 함께 길을 떠나겠느냐 싫으냐─의 코 다짐을 하건만 사내는 아직도 결단을 못하고 육신을 틀면서 번민한다.
 
31
그 한 회분의 소설에 있어서 마란은 대면하는 남녀의 풍경을 그릴까 여자의 나체를 그릴까 망설이다가 남자의 얼굴을 그리기로 작정했다. 괴로워하는 얼굴의 표정을 가장 효과적으로 그려서 소설 전체의 표정을 상징하려는 것이었다. 그 계획에 기뻐하면서 붓을 든 것이 종시 뜻대로 이루어지지를 않았다. 자기 자신도 필경은 주인공과 다름없는 현대인의 한 사람이요 괴롬도 같은 것이니 하고 거울을 놓고 자기의 얼굴을 그려 보려고 애썼으나 도무지 운필의 동기가 서지를 않았다. 이마의 주름살을 그려보아도 어울리지 않고 찌그러진 볼의 선을 그어 보아도 자연스럽지 못하고 다구지게 물고 있는 두 이를 보이려고 하니 그림으로서의 기품이 없어지면서 속되고 천해졌다. 이다지도 내게 천분이 없었던가, 지금까지의 자신은 다 어디로 갔는구 하고 반나절이 지나도록 삽화 한 장을 이루지 못한 채 번민 속에서 바시랑거릴 뿐이었다. 무서운 날이었다.
 
32
화가 마란에게는 진정 천분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이 몇 해 동안의 그의 업적은 놀라웠고 화단에서의 지위도 지금에는 벌써 선배들을 물리치고 확호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나체를 그릴 때에는 도랑을 연상시키는 힘찬 선과 미끈한 터치로서 신선한 감각을 노렸으나 원래 그가 사숙하고 있는 선배는 고호인지라 인물화에는 그의 영향이 뚜렷했고 비평가들도 그것을 지적했다 고호의 . 모방자라는 것이 자랑이면 자랑이었지 조금도 부끄럼이 안 되리만치 그는 이를 누구보다도 높게 평가하고 흠모해온다. 고호가 그린 농민의 얼굴같이 개성적이요 성격적인 훌륭한 예술을 남겨 보겠다는 것이 마란의 꼭 하나의 원이었다. 신문사에서 삽화쟁이로 입에 풀칠은 하고 있을망정 예술가로서의 야심은 누구에게도 밑지지 않았다. 그러게 한 장의 삽화에도 예술의 기품을 담으려고 전력을 다 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요새 와서는 예술의 지향에 금이 가고 방법에 대한 회의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제작의 감흥이 불현듯이 줄어 갔다. 전과 같이 아무런 대상이나가 반드시 충동을 주는 것이 못되고 주위에 웅성거리고 있는 허다한 괴롬을 표현하기에는 또한 기력이 부쳤다. 결국 자기도 같은 괴롬 속에 빠져 있음을 안 것이요 괴롬 속에서는 괴롬을 표현하기가 난사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날 소설의 주인공의 표정이 곧 자기의 표정인 까닭에 붓을 대기가 어려웠고 그 자기의 표정이라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인지 자기로서 오히려 선과 주름을 가릴 수 없었다. 영감의 근원은 메마르고 무딘 감동 위에는 먼지가 보얗게 앉게 되었다.
 
33
초조와 괴롬이 그날같이 큰 때는 없었다. 새로운 생명을 뱃속에 간직한 산모의 괴롬도 그러한 것일까. 피곤한 신경으로 반나절을 부대끼다나니 이제는 육신도 마음도 권태 속에 잠겨 객관을 바라보는 눈에는 광채가 없었다. 얕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두 손을 뒤통수에 깍지끼니 제물에 입이 벌어지며 하품이 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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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까짓 뱀이 다 무어야. 그 따위 미물이 내 예술을 살린다. 천만에, 천부당만부당이지. 내 예술이 그렇게 허름하게 탄생할 줄 아냐. 현대의 고호는 호락호락 붓을 안 든다구 여쭈어라.”
 
35
중얼거리면서 마란이 별안간 걸음을 빨리 한 것은 행여나 급사가 쫓아나와 자기의 뒤를 따르고 있지나 않을까 생각한 까닭이다. 지금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조그만 미물 급사의 독촉이었다. 될 수만 있다면 그 하루를 그대로 살며시 급사의 독촉에서 편집의 의무에서 빠져서 모르는 곳에 숨어 있고 싶었다. 예술을 강잉히 뺏으려는 자는 모두 악마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36
“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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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급사가 금시 뒷덜미를 치지나 않을까 겁을 먹으면서 돌아다보지도 않고 휭하니 걸음을 빨리하는 꼴이 자기 스스로도 속으로는 가관으로 여겨졌다. 흡사 꿈속에서 아귀에게 쫓기우는 시늉과도 같았던 까닭이다. 언제까지나 그렇게 쫓기어야 할 것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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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악.”
 
39
별안간 들리는 날카로운 고함은 쫓아오는 급사의 아웅 소리는 아닌 모양이었다. 너무도 오도깝스런 외마디였던 까닭에 마란은 모르는 결에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40
“아이구.”
 
41
두 번째 고함에 마음을 다구지게 먹었던 마란도 뒤를 안 돌아다보는 수가 없었다. 돌아다보고 안 놀라는 수도 없었다.
 
42
쫓아오는 줄로만 알았던 급사의─목소리는커녕 자태도 안보이고 고함은 멀리 뱀을 둘러싸고 섰던 군중 속에서 난 것이었다. 아마도 비상한 일이 일어난 모양, 단정하게 섰던 사람의 테두리가 어지럽게 헤트러졌고 그 속에서 독사의 궤짝을 떨어트린 땅꾼은 설설 뱀을 돌면서 기괴한 춤을 추는 것이다.
 
43
“아이구머니 아니구머니.”
 
44
팔을 흔들며 쩔쩔매는 폼이 심상한 춤은 아니었다. 기쁠 때에 추는 춤이 괴로울 때에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일까. 물끄러미 땅꾼의 양을 바라보다가 마란은 무서운 생각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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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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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스럽게 가까이 달려갔다가 짜증 뜨끔해 몸서리를 치고 섰다. 참혹한 꼴을 보았다. 땅꾼은 독사에게 손을 물리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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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위태하더니. ─독을 가진 물건은 어느 때나 사람을 해하구야 말어.”
 
48
“주인을 물다니 불측한 즘생 같으니.”
 
49
사람들은 지껄이면서 땅꾼의 고민하는 양을 물끄러미들 바라볼 뿐 팔다리를 하나씩 거들어 그의 괴롬을 덜어주는 도리는 없었다. 기쁨은 함께 나눌 수 있어도 괴롬 속에는 한몫 참례할 수 없는 노릇이다. 어떻게 하면 그 자리를 건질 수 있을는지 지혜도 생각도 없이 사람들은 완전히 바보들이었다.
 
50
떨어진 궤짝 속에서는 독사들이 그물 사이로 혀를 널름거리는 것이 희생된 주인을 측은히 여김인지 저주함인지 미물의 뜻을 헤아릴 수 없다. 주인을 문 놈은 어떤 놈인구, 필연코 복수의 쾌감에 잠겨 있으려니 하고 마란은 그놈을 찾아내려고 두리번거리나 그놈이 그놈이어서 분간할 수가 없다. 그놈으로서 보면 사람의 모양 또한 그럴까.
 
51
“아이구머니, 사람 살리우.”
 
52
신음소리에 마란은 뱀에서 시선을 돌려 다시 땅꾼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을 보았다. ─무서운 얼굴을 보았다. 모르는 결에 주춤하고 몸이 가다듦을 느꼈다. 수선만을 떨고 똑바로 못 보았던 그의 표정을 비로소 보고 우뢰나 맞은 듯 육신이 울린 것이다.
 
53
괴롬의 얼굴이란 이런 것인가. 아픔의 표정이란 이런 것인가. 눈이 까지고 볼이 틀어지고 눈썹이 휘이고 이가 갈리고─이것이 고통의 극치인 것인가.
 
54
“흐음. 이것이로구나.”
 
55
꿈에서나 깨어난 듯이 마란은 홀연히 깨달으면서 깊게 탄식했다. 위대한 새로운 발견이었다. 반생 동안에 처음 얻은 경험이요. 받은 감동이었다.
 
56
“바로 이것이로구나.”
 
57
시이저가 애급을 정복했을 때에 외쳤다는 “왔다 보았다 이겼다”의 감동도 그러한 것이었던지 참으로 “이겼다”는 고함과도 흡사했다. 놀람은 어느결엔지 기쁨과 만족으로 변했다.
 
58
“반날 동안 반생 동안 찾든 것을 이제 얻었구나. 비로소 내 예술을 얻었구나. 이것을 그리자. 이 얼굴을 그리자.”
 
59
영감의 샘이 금시 하늘에서 그의 몸으로 옮아 온 듯 두 눈이 형형이 빛나고 머리카락이 곧추섰다. 흥분으로 말미암아 와들와들 떨리고 어깨가 실룩거려 육신의 중심을 잡을 수가 없다. 내리기 시작한 신장대 모양이다. 거울을 놓고 얼굴을 찡그려 보아도 얻지 못했던 괴롬의 영감을 땅꾼의 얼굴에서 찾았다. 이제야말로 운필의 동기를 확적히 잡았다. 초조와 괴롬은 흩어지고 만족과 법열이 얼굴에 서리어 갔다.
 
60
“오늘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삽화를 그리리라. 일생일대의 걸작을
 
61
그리리라. 라오코왼의 조각 이상의 예술을 만드리라. 발칙한 급사의 독촉을 그림으로 물리치리라. 거만한 편집장의 입을 놀람으로 막아버리리라”
 
62
손에는 어느결엔지 사생첩이 들려 있었고 새로운 페이지 위에 땅꾼의 얼굴이 한 획 두 획 윤곽을 이루어갔다. 트로이의 라오코왼은 적군의 휼계를 간파한 까닭에 뱀에게 물렸건만 땅꾼은 뱀을 팔려다가 뱀에게 물렸다. 수천 년 전의 괴롬이 오늘에 재생되어 마란의 예술을 도울 줄 뉘 알았으랴. 마란의 그림이 라오코왼 군상의 조각에 못 미치리라고 누가 말하랴.
 
63
“이제서야 내 거울 속을 똑바로 보았구나. 소설의 주인공의 표정을, 내 표정을 똑바로 보았구나. 땅꾼이여. 라오코왼의 후손이여. 잠시 내 모델이 되라. 내 그대의 괴롬을 후세에 전하리니 나를 믿으라.”
 
64
세기의 고통은 무상의 기쁨으로 변해 지금 마란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제작에 열중시켰다 . 사람들도 비로소 영문을 알고 마란에게로 주의를 보내왔고 땅꾼도 그의 열정에 감동되어 잠시 몸을 움직이지 않고 정숙하게 그를 향하는 것이었다.
 
65
요번에야말로 짜장 그림 독촉을 나왔던 급사도 말을 잊고 그의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모든 것이 일순 걸작의 탄생을 위해 엄숙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원문】라오코왼의 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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