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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문문학의 일년간 (193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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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12월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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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문학의 일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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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해 본 바에 큰 틀림이 없다면 기묘(己卯) 1년간 우리의 앞에 발표된 소설문학의 총 수효는 장, 중, 단편을 합쳐서 240여 편의 다수에 이르러 있다. 결코 적은 수량이 아니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이것은 문학사 있은 이래의 처음 보는 다량생산이다. 신문에서도 연작장편 외에 단편 창작을 위하여 적지 않은 스페이스를 제공하였으나 역시 이러한 풍년을 가져오게 한 결정적인 원인이 된 것은 우수한 문예잡지의 출현이었다. 『문장』과, 후반기에 들어서 창간호를 낸 『인문평론』의 공적이래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문예잡지가 총수의 반 이상을 발표해 주었고, 그 나머지는 취미오락잡지, 혹은 특수잡지, 신문 등이 이의 발표기관이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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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특징은 그 수량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질로 보아도 결코 열지 않은 작품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 중에서도 중견작가의 활동은 중견의 명칭에 과히 어그러지지 않을 만한 노력과 업적을 남겼다고 말할 수 있다. 장편 한 개씩을 쓰면서도 단편, 중편 4, 5편씩은 모두 써놓았다. 쓸려고 생각하면서도 출판조건에 제약되어 쓰지 못했던 것, 시험해 보려고 생각하면서도 불여의(不如意)하였던 것, 개척해 보려고 애쓰면서도 그 기회를 얻지 못했던 것이 마음껏 실험되었다는 감상이 통계를 통하여 느낄 수 있는 총평자의 기쁨의 하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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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소설이 완전히 중견의 손에 옮아왔다는 것과, 종래, 신문연재에만 의탁하였던 장편소설이 전작(全作)장편의 출현에 의하여 새로운 개척의 길을 열었다는 것과 단면 70매를 넘어서는 게재가 불가능하던 창작이 300매 전재를 유유히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 등이 중견작가의 이상과 여(如)한 활동을 가져오게 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망각하여서는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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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슬럼프에 빠져있던 작가들이 금년 들어서 각각 제 길을 개척하려는 자극과 심리를 준비하였다는 것이 정신적 요인이 되어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대는 산문의 시대니 운운하여 이것을 설명하려는 자는 그러므로 피상(皮相)과 추상(抽象)임을 면(免)키 어려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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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년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작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태준 씨가 『동아일보』에 「딸 삼형제」를 연재한 외에도 세 편의 단편을 썼고, 박태원 씨도 『조광(朝光)』에 연재중인 「미녀도(美女圖)」와 매신(每新)의 「명랑한 전망」(?) 외에 300매의 「골목안」과 단편 두 개를 발표하였고, 이무영 씨도 하반기에 직(職)을 던지고 농촌으로 돌아가더니 동아(東亞)에「세기의 딸」을 연재하는 외에 묵중한 단편 세 개를 내놓았다. 「강아지」「산촌(山村)」등으로 작년간에 적적했던 한설야 씨도 동아에 「마음의 향촌(鄕村)」을 연재하는 한편 다섯 개의 주목할만한 문제작 외에 『야담(野談)』에 중편 「귀향」, 다시 국어문주간지(國語文週刊誌) 『국민신보』에 「대륙」을 연재하여 호평을 사는 등, 맹렬한 활동을 하였고, 이효석 씨 역시 전작(全作)채로 「화분(花粉)」을 내놓은 외에 단편 네 개, 유진오 씨도 전작장편 「민요」를 탈고 (未刊[미간])하면서 세 편의 단편, 안회남 씨도 『여성』에 「애인」을 연재하면서 7편의 창작을 보여주었다. 이밖에 이기영 씨의 정력도 여전하여 조선일보에 「대지의 아들」, 『삼천리』에 「청년」, 『조선문학』에 「진통기(陣痛期)」를 연재하는 외에 다섯 개의 단편을, 그리고 채만식 씨는 매신(每新)에 「금(金)의 정열(情熱)」을 쓰면서 7편의 단편을 각각 선물하였다. 여기에 만약 필자까지를 한축 끼워본다면 「대하(大河)」와 신문장편 외에 300매 짜리 두 편, 신작단편 여섯 편, 구고개편(舊稿改編)이 네 편 등 질은 어찌되었건 양껏 썼다는 느낌은 없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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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도 송영, 이석훈, 엄흥섭, 장덕조, 최정희의 제씨가 모두 응분의 활동을 보여주어서 중견작가의 활동은 비상한 바 있었는데, 이광수, 김동인, 전영택, 현진건 등 제씨의 작품행동과 최명익, 박노갑, 정비석, 정인택, 김동리, 현덕, 김영수, 이근영, 계용묵 등 제씨의 발랄(潑剌)한 제작(制作)까지 어울려서 드디어 2백 수십 여 편이라는 양적 기록을 작성함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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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상술한 수량이 얼마나 소설문학의 질을 향상시켰는가, 또는 새로운 시험과 개척이 어떠한 수확을 거두었는가, 극히 개괄적인 점검을 시(試)하려고 하는 바이나, 지면의 성질상 평론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소개한다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다. 또한 필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2백 수십 여 편중에는 읽지 못한 것도 많다. 중견의 세계는 전부터 지실(知悉)하고 주목해 오는 관계뿐만 아니라, 역시 산문문학의 중심이라는 점에서 이를 가운데로 하여 이야기를 진전시켜 봄이 의당하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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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설야 씨의 세계는 확실히 이동하였다. 이러한 나의 지적을 씨는 불만히 생각하는 모양이었으나, 엄연한 사실은 그대로 부인될 수 없다. 「산촌(山村)」과 금년간의 세계가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이유 없는 고집자(固執者)임을 면키 어렵다. 한씨도 이것을 다른 장소에서는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씨는 이것을 심경소설(心境小說)의 새로운 개척이라고 말하고 있다. (『조광』7월 호) 물론 이것은 사전(辭典)의 오해다. 심경소설의 발생근거나 그 상모(相貌)로 보아, 씨가 자신의 세계를 이러한 명칭으로 부르는 것은 부당하고, 씨의 세계가 사회에서 가정 안으로, 사회인으로부터 생활인으로 이동되었다고 봄이 온당하다. 이것은 작가로서는 경홀(輕忽)히 취급할 수 없는 커다란 전환이었다. 사회에서 가정 안으로, 생활인으로 복귀했을 때에 거기에서 새로이 발견된 것은 무엇이었는가? 가장으로서의 처자에 대한 감축되었던 애정의 대두, 이 가운데 완전히 침잠(沈潛)해 버릴 수 없는 주인공의 고독감. - 그러나 이 고독감은 드디어 울념(鬱念)으로 변하여 속세와 시정(市井)에 대한 반발과 경멸로 된다. 중편 「귀향」에서 싹을 보인 이러한 정신적 가치가 「보복」「이녕(泥濘」의 과정을 거쳐 「술집」과 「종두(種痘)」에 이르면 그것은 저윽이 피곤해지고 장편 「마음의 향촌(鄕村)」에 이르러선 그것은 하등의 가치도 아닌 것으로 되어버렸다. 「술집」의 마지막 장면이나 「이녕(泥濘」의 족제비 사건이나 그런 신경질적인 반발이 오래 계속될 까닭도 없을 것이오, 그것을 반복시켜 보는 것으로 만족을 느껴서도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종두(種痘)」에 이르면 부부간의 반목이나 그의 거리설정은 쓸데없는 작자의 고의로 되어버렸다. 작자가 반목을 시켜도 두 부부는 그럴 필요도 그런 감정도 느끼고 있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품 모두(冒頭)에서 메주나 담배 등을 가지고 작자가 두 사람의 성격의 차이니 무엇이니 하고 애써서 펼쳐 보인 것이 중턱을 넘어서면 공연한 소리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장편에 이르면 완전한 무의미로 변한다. 작자의 고충은 일(一)기녀(妓女)에게 비상한 사살을 주입하여 그로 하여금 요리점에 모여드는 시정(市井)의 속중배(俗衆輩)를 비웃게 하는 것인데, 이러한 조롱이나 조소가 어떠한 정신적 가치가 있는 것일까? 기생(조소하는 자)도 속세의 행운아(조소를 당하는 자)도 한가지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과를 습득할 뿐일 것이다. 일찍이 나는 「이녕」을 읽고 “사실을 건드리는 과정으로부터 한 등 올라가서 사실을 재구성함에 의하여 창조적 문학은 생겨날 수 있으리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뒤에 씨의 글을 보면 이 말을 오해한 모양 같았으나 그때의 나의 조언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하고(何故)냐 하면 리얼리스트에게 있어서는 조소하는 정신이나 반발하는 신경질보다도 속세 전부를 포용하여 그것을 재구성하려는 정신이 훨씬 정상적 모랄인 것이다. 속세에 반발하고 그것을 조롱하여서, 속세의 법칙과 속인의 전형이 묘출(描出)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한 등 올라서는데 의하여 조롱하는 자가 아니라 조롱 당하는 장본인을 인간성에 있어서 창조해내는 것이 리얼리즘의 본도(本道)임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타방(他方), 이러한 과정을 치르는 가운데 씨는 기술적으로 상당한 시험을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띤다. 사회에서 속세로 눈을 돌리며 설화체(說話體)에 유의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겠으나 작품을 많은 에피소드로써 꾸미려는 것도 전에는 볼 수 없던 일이었다. 하여튼 금년의 시험을 토대해서 열려지는 새 방향에 대하여 주목하는 것이 씨를 위하여 의당(宜當)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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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오 씨도 작년부터 세계를 바꾸어 본 작가의 한 사람이다. 「이혼(離婚)」「가을」「나비」는 모두 직선적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어떤 부처(夫妻)」「치정(痴情)」에 연속되는 세계다. 「가을」은 혹시 「수술(手術)」이나 그 전날의 「김강사와 T교수」와 맥(脈)을 통(通)하는 작품일는지도 모르나 「나비」는 씨의 ‘시정(市井)에의 편력(遍歷)’을 의언(宜言)한 뒤 「어떤 부처」나 「치정(痴情)」등을 제작하던 관념이 훨씬 성숙되어서 이루어진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남편을 가진 생활인, 젊은 여급(女給)의 모랄이 전작(前作)에 있어서는 생경(生硬)한 채 남아있던 것이 「나비」에 이르러 소설다운 형상을 거쳐서 나타났다. 모랄은 성숙될수록 언제나 알맹이가 풀어져서, 눈에 띄지 않게 작품 전체를 관류(灌流)하는 법이라는 걸이 기회에 강조하여도 좋다. 지드의 서적을 끌어다 붙여서 표현하려고 애쓰던 모랄의 알맹이가 관념이 성숙해진 뒤엔 작품 밑으로 가라앉고 마는 것이다. 후자만이 소설의 모랄이다. 그러나 「가을」이나 혹은 「나비」가 아직 산보(散步)의 계단에 있다는 것은 주의할 만하다. 작품의 구성도 매한가지 산보다. 전자는 교양인의 정신적 산보요, 후자는 직업여성의 연애심리의 산보다. 전자가 시대의 전환기에 일어난 제 사실(諸事實)을 구경하면서도 그것에 혹(惑)되지 않으려는 것은 교양을 지주로 하고 있는 때문이고, 여급(女給)이 5, 6명의 사나이와 연애심리를 향락하는 생활상 산보를 감행하면서 최후의 일선을 넘지 않는 것은 그에게 아직도 정조(貞操)에 대한 관념이 지주로써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두개의 지주가 시정(市井)에의 편력에서 씨가 세태소설에 빠지지 않으려는 모랄의 거점이 되어 있다. 조급한 비평가들처럼 해뜩해뜩 눈에 띄는 가치에만 치중하려고는 하지 않으나, 산보의 과정을 치른 뒤에야 역시 본격적인 세계는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씨의 전작 장편 「민요」의 상재(上梓)와 모보(某報)와 약속이 되었다는 신문장편을 기대하여 마지않는다. 「나비」에서 씨의 산문가적 기술이 훨씬 능숙해졌다는 것도 괄목할 만하다. 그것이 설화체의 도입을 꾀하려는 노력으로 보여질 때, 그것은 씨를 위하여 좋은 것으로도 또는 위험한 것으로도 간주된다는 것을 특기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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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 씨에 있어서는 세태소설로부터 자기를 구출하려는 사업이 금년에 있어서도 꾸준히 계속되어 왔다. 작년도에 제작된 「치숙(痴叔)」이나 「소망(少妄)」「이런 처지(處地)」등은 세태소설로부터의 탈출작업을 풍자정신에 의하여 행하였다는 기억을 남겨주는 작품들이다. 세태에 침잠(沈潛)하면서 풍자정신을 살리려고 한 노력은 금년에 들러서는 다소의 변화를 보여서, 하나는 정신적으로 좀더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비교적 순결한 방향과 하나는 아주 그것이 고리고 악취미적인 것으로만 까라져버린 방향으로 이렇게 두 개로 갈라지지 않았는가 하는 느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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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개의 세계의 분열은 벌써 씨(氏)의 최초의 성공한 장편 「탁류」에서도 배태(胚胎)되어 있던 것이었으나, 금년에는 그것이 확실히 갈라져 버린 것 같다. 악취미에다 몸을 맡겨버린 것으로 「남식(南植)이」가 대표적이고 「이런 남매」가 역시 다분히 그것을 가지고 있다. 한편 건강한 정신적 주관(이것이 채씨에게 있어서는 모랄이 되어 있다)을 강조해 보는 경향이 될수록 진지한 탐색을 꾀하려고 애쓴 것은 씨에게 있어서는 확실한 일보 전진이었으나, 그것은 또한 최상의 건강한 부분에서도 니힐리즘을 숨기고 있는 것이 특색이었다. 「패배자의 무덤」과 「모색(摸索)」에서는 새로운 생명의 희망에 의하여 허무를 배제하려는 노력과(前者), 속물을 배격해 버리려는 건강한 처녀의 양식(良識)의 강조(後者)가 있어서 그것이 그다지 눈에 띄지는 않으나 작품의 뒤에서 작자를 유혹하고 있는 것은 역시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니힐리즘의 사상이 아닌가. 오죽 믿을 것이 없으면 핏덩어리 같은 아이에게서 긍정을 발견하려 애쓸 것이랴! 한편 「모색(摸索)」의 주인공도 결국 모색해 본 결과 아무 것도 남지는 않았다. 읍회의원(邑會議員)을 경멸할 수 있는 것만이 플러스였다. 「정자나무 있는 삽화」에서는 이것은 더욱 우심(尤甚)해지지 않았을까? 적고 희귀하게 맑은 「반점(班點)」이나, 소박한 선량한 인간성을 창조하려던 「흥보씨」에게 있어서도 이것은 피할 길이 없었다. 「금(金)의 정열(情熱)」은 미처 읽어보지 못했으나 어쩐지 거기에도 금(金)의 정열(情熱)이 개인 뒤엔 역시 같은 세계가 오는 것이 아닌가 막연히 상상되어진다. 이리하여 채씨는 세태세계로부터 자신을 구해내는 정신적 작업(作業)이 니힐리즘과 부딪쳐서, 금년 1년간은 그것을 극복하려는 고투로써 보낸 감(感)이 없지 않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씨의 설화체는 더욱 용장(冗長)해지는 느낌을 주고 있는데 한번 기술적인 모험을 각오하고 요설(饒舌)을 버려보면 어떨까? 오히려 정신적 구출작업은 손쉽게 제 세계를 발견하게 될는지도 알 수 없다. 씨가 만약 본격적인 리얼리즘에서 자신의 문학을 추진시키려면 반드시 한번은 이 난관을 통과하여야 될 것으로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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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세태묘사에서 득의(得意)의 필봉(筆鋒)을 휘두르는 박태원 씨는 본시(本是)부터 채씨와 같은 정신적 구출작업은 있지 않았었다. 「천변풍경(川邊風景)」이후 「수풍금(手風琴)」이나 「성군(星群)」등에서 감상성과 인정미(人情味) 등의 침해(侵害)를 받았던 것은 오래 전 일이나 그뒤 씨는 「우맹(愚氓)」으로밖에 가지 않았었다. 「우맹」은 「천변풍경」등에 있던 인정미, 의협심, 감상성 등의 속적(俗的) 요소가 신문소설이라는 기회에 상당히 발호(跋扈)를 했었는데, 이것을 통하여 박씨는 별반 새 경지를 개척했거나 발견한 것은 아닌 상 싶다. 그러므로 금년 들어와서는 역시 「천변풍경」의 옛 세계로 다시 돌아왔다. 애써 「골목안」가운데서 발전적인 새 계기를 찾아내자면 없지도 않겠지만 그러나 「천변풍경」과의 큰 차이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고, 따라서 세태소설로부터 자기의 문학을 구별지어 보려는 노력이나 고민 같은 것도 없는 것으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최노인(崔老人)」「음우(陰雨)」나 「미녀도」도 비등한 세계였다. 앞으로 다시 박씨에게 어려운 시기가 올는지, 같은 세계에 만족하여 기쁨을 가지고 제작에 종사할 수 있을는지, 박씨에게는 이 두 개의 어느 길을 어떻게 걷는다는 것이 중요한 작가적 기점이 될 것 같아서 앞으로의 새로운 한 해의 작품행동이 주목을 끌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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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세계가 움직이지 않은 작가로는 안회남 씨도 축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온실(溫室)」과 「수심(愁心)」은 물론 7, 8년래의 씨의 심경세계인데, 「기계(機械)」「투계(鬪鷄)」등도 작년의 「그날밤에 생긴 일」에서 시작하였던 씨의 새 세계가 그대로 리리칼한 맛만 남기고 머무른 느낌이 없지 않다. 같은 제면공장(製綿工場)이다. 물론 우리는 재료가 같다고 씨를 나무라지는 않는다. 심경소설에서 자기를 뽑아낼 양으로 안씨는 남몰래 제면공장(製綿工場)에 들어가서 노동을 경험한 이다. 이렇게 해서 얻어온 체험을 3, 4개의 단편에서 되풀이한다고 움직이지 않는 작가라고 나무랄 자유는 우리에겐 없다. 변변치도 않은 연애를 한 번 치르고 일생을 울궈먹는 친구도 있다. 요(要)는 한 작품 한 작품을 거쳐나가는 동안 현실탐구의 노력이 얼마나한 성과를 맺었는가, 또는 사회로 돌리는 눈의 투시력이 얼마나 깊어졌는가 하는데 있는 것이다. 이러한 눈과 이러한 세계가 움직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작품의 짜임 짜임은 원숙하고 시미(詩味)도 깊어졌는데 그 반면에 사회에 대한 관찰 같은 것은 별반 변하지 않았다. 「번민(煩悶)하는 쟌룩씨」는 심리에 기교를 좀 가미해서 작품으론 역시 소성(小成)했다. 「겸허」도 째이지 않은 작품은 아니다. 심경소설의 그림자가 김유정을 꼭 붙들어서 결국 그것 뿐으로 한계성 있는 성공을 보인 작품이다. 그런데 일방(一方) 심경소설의 굴레를 벗겨준 「계절」이나 「애인」에선 작품으로서는 대단한 결함을 폭로하였다. 넓은 현실로 눈을 돌리려 하면서도 심경소설의 굴레를 씌워서 겨우 작품으로만은 소성(小成)하고, 심경적 재료라도 심경소설의 굴레만 벗겨 놓으면 작품은 딴 사람의 것처럼 파탄(破綻)한다. 이 딜레마는 안씨에게 있어서는 심각한 근원적인 것으로 아무래도 사지(死地)에 임하는 듯한 고투가 한번은 있어야 할 것 같다. 심경소설의 체취를 깨끗이 청소해 버릴 고투, 그것이 있은 뒤에야 딜레마는 없어질 것도 같다. 여태껏 그것으로 하여 자기의 성공을 보장한, 실의(失意)의 인(人)의 고독감, 애수 등을 용의주도(用意周到)하게 작품의 지주로써 남겨 가지면서 눈을 보다 넓은 현실 가운데로 돌려보려고 애쓰는 작가에 이태준 씨가 있다. 이씨는 작년 일년에 「패강랭(浿江冷)」한 편만을 내놓고 피곤했다는 평언(評言)을 받으면서도 묵묵히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지 않는 작가다. 「영월 영감(寧越令監)」은 과도기적인 작품이었다. 비결로써는 역시, 애수를 담은 비극을 숨겨두고도 눈은 현실 가운데로 돌려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주체와 객체가 융합이 되지 않아서 비극도 애수도 밍밍하였다. 「아련(阿蓮)」은 그 뒤를 계승하는 작품은 아니고, 그대로 현실로 돌렸던 관심을 털어 버리고, 적은 것으로 성공하려는 생각 밑에 쓰여진 것이었다. 읽고 나면 정신적 불만은 금(禁)키 어렵다. 그러므로 양자(兩者)가 적당히 융합이 되면서, 역시 비멸(秘蔑)의 애수를 강조하여 훨씬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것은 「농군(農軍)」일 것이다. 이 작품은 연전(年前) 씨가 만주 이민을 돌아보고서 얻은 제재에서의 유일의 작품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애수도 그것이 문학적 진실에 철(撤)하려면 역시 사회적 밑밭이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사회적 관심의 무용(無用)을 되풀이하는 이씨의 숭앙자에게, 교훈으로 던져줄 수 있는 호개(好個)의 예이다. 일방(一方) 씨의 소위 ‘단거리(短距離) 문장’이 산문문장의 극치라고 말하는 평가(評家)가 있던 것 같은데 이런 단견(短見)은 공연한 아첨일 따름이다. 산문문학은 무엇보다 장편소설이다. 씨의 문장이 「딸 삼형제」에서 어떠한 결과를 보이고 있는지 한번 신중히 검토해 보는 성실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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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씨도 단편의 능수(能手)라는 평판이 있다. 그러나 「산정(山精)」은 마지막의 악취미가 없어야 깨끗할 수 있을 작품이었고, 「향수」는 그대로 스위트·홈의 수채화일 따름이다. 이런 것을 그려서도 단편이 째이기만 하면 비평가는 성공한 단편이라고 추장(推獎)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씨에게는 「일표(一票)의 공능(功能)」같은 속세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적인 일면도 있고 영웅의 운명을 , 노래하는 「황제」같은 작품의 세계도 있다. 이것을 두고 언뜻 보면 씨의 거점이야말로 애매하기 짝이 없다. 그대로 교양 있는 취미인일 따름인 것 같다. 교양이 있으니 속세에 대해서 비판적일 때도 있으나, 또 교양과 취미로 하여 나파륜(奈巴崙)의 임종을 그려보고 싶은 낭만주의도 누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씨는 딜레땅뜨 같다. 그러나 사실상에 있어서도 상술한 작품들은 일종의 여기(餘技)인 것이다. 그 이유로는 이씨가 십여 년을 틈 있을 때마다 설정해 보는 「화분(花粉)」의 테마를 지적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사람은 흔히 이씨에 있어서 「노령 근해(露領近海)」의 계보를 존중하는 버릇이 있어서 그것이 오래간만에 「부록(附錄)」「해바라기」「소라」등으로 나타나면 쌍수를 들어 찬양을 마지않는다. 그러나 이것도 씨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교양의 한계를 넘는 것이 아니다. 일종의 불란서류의 심정상 모랄일 따름이다. 이리하여 나는 이씨의 중심세계가 역시 「화분(花粉)」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만약 사람들이 말하듯이 「노령 근해」의 계보가 씨의 본질세계의 밑밭이가 되어 있는 것이라면 최초의 씨의 전작장편 가운데 그 요소가 혼합되어 있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화분(花粉)」에는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자웅(雌雄)의 꽃술을 가리지 않고 어지럽게 나르는 화분(花粉)의 세계 - 이것을 그리는 것이 「화분(花粉)」의 의도였다. 옷을 벗기고 사회적인 제제약(諸制約)을 벗겨버렸을 때 사람은 어떠한 진실을 보여 줄는 지도 알 수 없다. 이리하여 “까딱하다가는 밥이 놓친 진실을 화분(花粉)의 진실이 집어 줄는지도 모른다”고 씨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까딱하다가는’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여기에 있어서 우리는 한가지 결과를 생각할 수 있다. 성(性) 그 자체에 의탁하여 끝까지 그것을 본능에 있어서 추궁한 결과, 기성 일체의 거부와 새로운 모랄의 탄생. 기성(旣成)된 습관과 윤리 일체를 벗기고 나체채로 내세우는 이상 이러한 모랄의 새로운 탄생은 희구되어 당연하다. 그러나 나의 독후감에 의하면 이것이 중도에 그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딜레땅뜨 이상으로 성(性)을 강렬한 모랄에 있어서 파헤쳐 보려는 뱃심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이씨는 본질적으로 로렌스가 될 수는 없는 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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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청된 지면이 초과되었으므로 건성건성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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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프를 벗어나서 맹렬히 달음질치려는 의기(意氣)에 불타고 있는 작가에 이무영 씨가 있다. 「추수기(秋收記)」는 상반기 초두(初頭)의 작품이고 씨가 반농반필(半農半筆)의 이상을 세우고 직(職)을 사(辭)한 뒤에 쓴 것으론 「제1과 제1장」과 「도전」이 있다. 하나는 신문기자의 직을 버리고 농촌에서 갱생 하려는 (更生) 작가의 생활의 첫 기록, 또 하나는 교육가의 직을 가지고 있는 이의 회의와 양심을 피력한 작품 - 그러나 두 사람의 귀농과 귀어(歸漁)의 이론적 거점이 상식을 가진 독단이어서 씨의 비상한 의기에도 그다지 공감이 따르질 않았다. 농촌에 돌아간 사람의 기개만이지 실상 농촌 생활과 싸우고 있는 이의 체험기 같지는 않았다. 오는 일년이 귀농 이후의 이무영 씨에게서 진실에 철(撤)한 작품이 나올 수 있으리라는 것을 생각케 하기에 그치는 작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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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一方) 상식의 세계에서 아직도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내지 못하고 고투를 하고있는 작가에는 이기영 씨와 송영 씨, 이석훈 씨가 있다. 이기영 씨는 「수석(燧石)」이나 「묘목(苗木)」「소부(少婦)」등에서 새로운 센스는 획득되지 않은 채 있는 것같다. 역시 「대지(大地)의 아들」에 기대를 가짐이 당연한 예의처럼 생각되었다. 이석훈 씨는 「라일락 시절」「만추(晩秋)」「만춘보(晩春譜)」등을 남겼으나 별로 새로운 플러스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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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 씨도 「금화(金貨)」외에 「문서(文書)」「윤씨 일가(尹氏一家)」 「여승(女僧)」등을 내었으나 완전히 슬럼프에서 헤어나지는 못한 것같다. 엄흥섭 씨는 쓰는 것도 많지 못하였다. 『매신(每新)』의 「행복(幸福)」 외엔 「여명(黎明)」이 한 편뿐, 그러나 이것으론 씨의 앞날을 엿보기가 대단 곤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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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작가(婦人作家)로는 장덕조, 최정희 양씨(兩氏)가 활약했으나 아직 중견의 수준에 올랐다고 말하기 힘드는 작품이었다. 앞으로의 정진에 기대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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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 이외의 기성층 작가로는 이광수 씨와 김동인 씨, 전영택 씨 등이 활약하였다. 이씨가 「사랑」후편 외에 「무명(無明)」「육장기(鬻庄記))」 「꿈」등을 발표하였고 김씨는 「정열(情熱)은 병(病)인가?」를 연재하다가 중단한 외에 「김연실전(金姸實傳)」「선구녀(先驅女)」를 썼고, 전씨는 「첫미움」「남매」등을 썼다. 이상 제씨(諸氏)는 겨우 기성의 이름이나 유지하던가 혹은 이미 쌓아 놓은 탑을 스스로 무너 버리던가 하는 정도의 활동을 남겼을 뿐으로 대가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사람들의 세계의 허망됨을 폭로하는 데 그쳤었다. 왕왕히 우매한 두뇌들은 소설수법의 원숙에 휩쓸려서 그 정신적 가치를 투시(透視)치 못하는 폐단이 없지 않은데 「무명(無明)」의 과대평가는 이에서 원인된 결과라 보아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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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로서 당연히 기대를 가져야 할 분으로 신진신인(新進新人) 제씨(諸氏)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기성이 가지지 않은 새로운 가치를 선물할 수 있으리라는 정신적 욕구임을 망각하여서는 아니 된다. 새로운 세대로서의 정신적 가치 - 우리가 바라는 것은 정(正)히 이것이다. 그러나 최명익 씨의 「폐어인(肺魚人)」「심문(心紋)」이 보여준 소설의 심리주의적 실험이 새로운 가치(價値)로서 인정될 수 있는 것일까? 소설의 고전적 형태에 반항하는 것이 하나의 시험으로서 의의 없음이 아니다. 일찍이 『단층(斷層)』동인에게 우리는 이러한 시험의 성과를 기대하였다. 최씨가 역량있는 작가라는 것은 확정적인 것이나 심리주의의 일단을 붙들고 새로운 실험을 하는 것의 한계성은 인정하고 있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서구에 있어서도 프로이트의 방법은 소설의 본도(本道)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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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동리 씨의 불투명한 민속적 취미는 최씨의 시험 이하로 소설문학의 새 가치가 되지는 못한다. 김씨의 재능이 과소히 평가되는 것은 전혀 이 때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황토기(黃土記)」「찔레꽃」「완미설(玩美設)」「두꺼비」등이 씨의 금년도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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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갑 씨가 이에 못지 않게 여러 가지 시험을 하고있다. 문체에까지 씨는 많은 고심을 하여 새로운 것을 기여하려고 애쓰고 있다. 「거울」「명숙이」「창공(蒼空)」「춘안(春顔)」「노다지」「추풍인(秋風引)」등 작품 중에서 마지막 것이 가장 역작(力作)이다. 여기에 쓰인 문체가 산문으로서 부적당하다는 것은 소설로서 당연히 써야 할 장면의 설정이 모피(謀避) 된 것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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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택 씨와 김영수 씨가 각각 4, 5편씩의 작품을 썼다. 정비석 씨, 계용묵 씨, 이근영 씨, 현덕 씨 등도 많이 활약하였으나 모두 지면관계로 상설(詳說)치 못한다. 그러나 씨등(氏等)의 세계에 새로운 플러스가 가해지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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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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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평론』제3호, 1939년 12월)
【원문】산문문학의 일년간 (19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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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천(金南天)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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