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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許生傳 (이광수) ◈

◇ 16. 옛나라로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0권  11권  12권  13권  14권  15권  16권 17권  18권  19권  1923.12
이광수
1
바닷가에는 오백여명 남녀가 모였습니다. 본국으로 가는 자, 새 나라에 남는 자가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서로 눈물을 흘리고, 작별하기를 아낍니다.
 
2
뱃머리에서 붉은 기가 흔들리자,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작별하는 말을 하고, 모두 배에 뛰어오릅니다. 버릿줄도 끄르고, 닻도 달고, 떠날 준비가 다 되기까지도 돌이는 허생의 앞에 끓어 엎디어 눈물을 흘리며 일어날 줄을 모릅니다. 허생은 마침대 돌이를 붙들어 일으키며,
 
3
『인제부터는 새 나라 일을 맡은 몸이니 기쁘고 슬퍼함을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은 좋지 아니한 일이다. 자 일어나 내려가는 길로 사람들을 데리고 집 짓고, 밭 갈기를 시작하여라.』
 
4
하였습니다. 이 말에 돌이는 한 번 더 일어나 허생에게 절하고, 늙은 사공에게 절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여러 사람 들에게 작별하는 인사를 하고, 배에서 내려와 버드나무에 동여 매었던 버릿줄을 당기고 있던 배는 마치 붙들었던 손을 떨치고 달아나는 듯이 물결을 일으키며 스르르 미끌어져 나아갑니다. 배들이 바닷가에서 차차 떨어져 가는 것을 보고 물에 있는 사람들은 손을 두르고 소리를 지르고 서운한 맘을 견디지 못하는 듯이 왔다갔다합니다. 바람을 거슬러 가기에 다소간 곤란하였으나 허생의 열두 배는 푸른 하늘 밑 푸른 바다 위으로 북으로 향하여 갑니다. 이렇게 가기를 십여 일이나 하여서 하루 아침에는 뱃머리에서 멀리 북쪽으로 파랗게 산머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5
『본국이다! 본국이다!』
 
6
하고 사람들은 오래 못 보던 본국 산을 보고 기뻐 뛰는데, 허생은 근심스러운 얼굴로 차차 가까워 오는 산을 바라보더니 무슨 결심을 한 듯이 붉은 기를 둘러 배를 세우게 하고 뱃사람들을 불러,
 
7
『한 배만 남기고 열 한배에 실은 돈을 모두 바다에 넣으라.』
 
8
하였습니다. 그런즉, 사람들은 모두 제 귀를 믿지 아니하는 듯이 눈이 둥그레지며,
 
9
『새 나라에서는 돈이 쓸 데가 없지마는 본국에만 돌아가면 돈 밖에 더 좋은 보배가 없는데 왜 이렇게 아까운 돈을 바닷속에 집어 넣으라고 하십니까?』
 
10
하고 허생을 향하여 간합니다. 그런즉, 허생은 고개를 흔들며,
 
11
『어서 던지라면 던지시오. 한 배의 돈만 하여도 당신네가 일생에 먹을 것은 넉넉할 것이니 어서 어서 집어넣으시오.』
 
12
하였습니다. 뉘 말이라고 거역을 하랴. 사람들은 백 냥씩 이백 냥씩 묶은 돈집을
 
13
『어야드야』
 
14
소리를 부르며, 바다에 던지기를 시작합니다.
 
15
시커먼 돈 뭉치가 햇빛에 번쩍하고는 텀벙하는 소리를 내고, 눈같은 물바래를 내며 백 길인지 천 길인지 모르는 물 속으로 잠겨 버리고 맙니다.
 
16
이 모양으로
 
17
『어기 어차』
 
18
하면, 한 덩어리씩 물에 잠기기를 시작하여 열 한 배에서 덜어지는 돈 소리 물 소리가 심히 요란한데 이러하기를 한 나절이나 하여서 겨우 열 한배의 돈짐을 거의 다 퍼버렸습니다.
 
19
허생은 짐 퍼버린 배들을 한 번 둘러보며, 땀을 씻는 사람들을 돌아보고,
 
20
『돈 만 냥에 흔들리는 조그마한 나라에 이 많은 돈이 들 어가면 또 얼마나 흔들릴까. 이 돈이 조선에 들어가면 많이 가지는 자와 적게 가지는 자가 있을 것이니, 만일 수백만 냥을 가지는 자가 있다 하면 원도 사고, 감사도 사고, 마침내는 삼정승 육판서까지도 사서 나라가 돈 있는 자의 나라가 되고 말 것이요, 마중에는 임금까지도 허리띠에 돈이 상전이 되고, 사람은 그 종이 되어 마침내는 돈만 주면 어버이는 아들딸을 팔고, 남편은 아내를 팔고 신하는 임금을 팔고, 그러다가 남에게 제 나라를 팔아 먹는 자까지 나게 될 것이다.』
 
21
하고 수없는 돈이 들어간 바닷물을 잠깐 보더니,
 
22
『자 갑시다.』
 
23
하고 배를 떠냅니다.
 
24
『어쩌면 그 아까운 돈을 바다에다 집어넣는담.』
 
25
『한 배 어치만 나를 주었으면 한 번 흥청거리고 잘 사는 걸.』
 
26
이 모양으로 사람들은 잃어버린 돈을 차마 잊지 못하여 모두 뒤를 돌아보며, 꿀떡꿀떡 침을 삼킴니다.
 
27
『저 돈이 언제나 한 번 또 세상에를 나와 볼까?』
 
28
하고 한 사람이 입맛을 다시면,
 
29
『바다가 말라야. 이 바다가 말라 버리고 육지가 되어야.』
 
30
『아이구! 어느 천년에 이 바다가 말러?』
 
31
하고 또 한 사람이 바닷물을 들여다봅니다.
 
32
『생원님 배에 있는 것만 해도 백만 냥은 될게요. 모두 은금 보화만이요, 검은 돈은 얼마 없다오...... 백만 냥은 되고 말고.』
 
33
하고 고마운 듯이 입을 벌리는 이도 있고,
 
34
『아무려나, 생원님 하는 일은 우리는 알 수 없어...... 사람은 아니야요. 신이야요.』
 
35
하고 감탄하는 이도 있습니다.
 
36
그러는 동안에 그날도 저물고, 이튿날 새벽에야 배가 어떤 산밑에 닿았습니다. 하얀 모래 장면에 파란 솔포기가 드문 드문 박히고, 인적은 없이 갈매기들만 왔다갔다 합니다. 배가 바닷가에 닿은 뒤에 허생은 사람들을 불러 세우고,
 
37
『지나간 삼년 동안 당신네는 나와 같이 퍽 고생들을 하셨소. 인제는 각각 맘대로 흩어져서 집도 사고 땅도 사고, 장가도 들고, 아들딸 낳고 즐겁게들 살으시오.』
 
38
하고 돈있는 배를 가리키며,
 
39
『이 배애 은금이 얼마 있으니 당신네들 힘껏 가지고 가시오. 한 짐씩만 지고 가면 일생 먹을 것은 넉넉할 것이요.』
 
40
하였습니다. 그런즉, 사람들은 은금 실은 배로 올라와 금으로만 골라 힘껏 짐을 짊어 놓고 허생을 대하여 여러번 절한 뒤에 모두 지어 놓았던 밥을 노나 먹고 각각 제맘대로 흩어졌습니다.
 
41
사람들이 산을 넘아 각처로 다 흩어지는 양을 보고 허생은 뱃사람 몇만 데리고 열 한 배를 바다로 끌어 내어 북풍에 잔뜩 돛을 달고, 그 속에 은금 몇 만냥 씩을 실어 내어 놓으며,
 
42
『바람 부는 대로 가고 싶은 데로 가라. 가서 돈이 없어 괴로워하는 백성에게 이 금을 주라.』
 
43
하는 종이 조각을 뱃머리에 써 붙이고 마치 아이들이 액막이를 써 연을 놓아 주는 모양으로 놓아 주었습니다.
 
44
그런즉, 그 배들은 찬 돛에 북풍을 맞아가지고 너홀너홀 물결로 오르락 내리락 제 멋대로 달아납니다.
 
45
『자 갑시다.』
 
46
하고 허생의 배는 해안을 돌아 서북으로 서북으로 향하고 갑니다.
 
47
하루는 첫눈이 부슬부슬 오는 날 다방골 변진사 집 사랑에 때묻은 옷을 입고, 헌 망건 헌 갓에 푸른 콧물을 흘리는 허생이 들어왔습니다.
 
48
『죽은 줄 알았더니 그래도 아직도 안 죽고 살아왔네.』
 
49
하고 칠년 전에 보던 변 진사 집 문객들이 수군수군합니다.
 
50
허생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변 진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51
『허생원이오니까. 이게 얼마만이오니까.』
 
52
하고 반가운 뜻을 표합니다.
 
53
『너무 오래어서 심히 미안하오이다.』
 
54
하고 변 진사가 구너하는 자리에 앉습니다. 변 지사는 허생의 꼴이 칠년 전에 돈꾸러 왔을 때보다도 더욱 초라한 모양을 보고,
 
55
『아마 장사가 뜻같이 안되신 모양입니다 그려.』
 
56
하고 불쌍히 여기는 듯하는 눈으로 허생을 치어다봅니다.
 
57
허생은 흐르는 콧물을 웃소매로 씻으며,
 
58
『그런것도 아니외다. 그 돈 만냥을 취해 주셔서 매우 긴하게 쓰고 이익도 다소간 남았소이다. 장사는 이의돈을 오랫동안 돌려 쓰고 상당한 이식은 드려야 하겠기로 약소하나마 돈 십만냥이나 가지고 왔소이다.』
 
59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변 진사는 그만 말이 막혔습니다. 이 사람이 아마 남의 돈 만 냥을 갖다가 없애 버리고, 그만 미쳐 버리지나 아니하였는가 하고 반신 반의하는 눈으로 허생 만 치어다보고 있을 즈음에 들어오나 들어온다, 섬거적에 싼 것, 궤짝에 넣은 것이 열 짐, 스무짐, 서른 짐, 한량이 없이 들어와서 수닉간에 변진사 집 마당에 큰 더미가 쌓입니다.
【 】16. 옛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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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이광수(李光洙) [저자]
 
1923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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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04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