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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세전 (萬歲前) ◈

◇ 만세전 9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924년 8월
염상섭
1
민주를 대면서도 하루바삐 납시사고 축원을 하고 축원을 하면서도 민주를 대던 병인은 그예 숨이 넘어가고 말았다. 김의관이나 차지가 댄 의원의 약이 맞지를 않아서 그랬던지 죽을 때가 된 뒤에 횡액에 걸려드느라고 그 의원이 불쑥 뛰어들었던지는 모르지마는, 그 약을 쓴 지 이틀 만에 죽고 말았다. 누구보다도 어머니께서 가엾어하시고 섧게 우셨다. 사람의 정이란 서로 들면 저런 것인가? 하여 보았다. 어머니 말씀마따나 시집이라고 왔어야 나하고 살아 본 동안이 날짜로 따져도 몇 달이 못 될 것이다. 내가 열셋, 당자가 열다섯에 비둘기장 같은 신랑방을 꾸몄으니까, 십 년 동안이나 시집살이를 한 셈이나 내가 열다섯 살에 일본으로 달아난 뒤로는 더구나 부부라고 말뿐이다. 섣달 그믐날에 시집온 새색시가 정월 초하룻날에 앉아서 시집온 지 이태나 되었다는 셈밖에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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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는 수 없지 않아요. 그것도 제 팔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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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서 불쌍하다고는 우시고 우시고 할 때마다, 나는 냉정히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4
죽던 날 밤중이었다. 사랑 건넌방에서 널치가 되어서 한잠이 깊이 들어 가는 판에 ‘여보게 여보게’ 하며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떠보니까, 큰집 형이 얼굴이 해쓱하고 두 눈이 똥그래져서 아무 말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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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게, 어서 일어나 안에 좀 들어가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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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앞에 섰었다. 나는 ‘인젠 그른 게로구나!’ 하며 옷을 걸치고 따라나섰다. 저편 방에서 주무시던 아버님도 창황히 나오셨다. 안으로 들어가서 건넌방을 들여다보니 온 집안 식구가 조그만 방에 그득히 들어섰다. 어머니는 염주를 돌려 가며 나무아미타불을 중얼중얼 외시며 자리를 비켜 주시고 병인의 얼굴 앞으로 가라고 손짓을 하셨다. 아무도 입을 벌리는 사람은 없이 무슨 장숙(莊肅)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로부터 시작되려는 보지 못하던 일을 구경이나 하듯이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우중우중 늘어섰다. 나는 하라는 대로 병인 앞으로 가서 앉으면서 그저 숨을 쉬나? 하고 손을 코에다가 대어 보니까 따뜻한 김이 살짝 힘없이 끼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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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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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아버님도 잠깐 문을 열고 들여다보시는 기척이었다. 병인의 목은 점점 재어지게 발랑거린다. 감았던 눈을 실만큼 떠서 옆에 앉은 내게로 향하더니, 별안간 반짝 뜨며 한참 노려보다가 다시 감는다. 나는 머리끝이 쭈뼛하고 가슴이 선뜩하였다. 나를 원망하는 것이나 아닌가 하며 정이 떨어졌다. 누운 사람은 당장 숨이 콕 막히는 것 같더니 방긋이 벌린 입가에 이번에는 생긋 하는 웃음빛이 보이는 것을 보고 나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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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머님이 이르시는 대로 지금 데워서 들여온 숭늉 같은 미음을 한술 떠서 열린 둥 만 둥한 입술에 흘려 넣었다. 병인은 또 한번 눈을 힘없이 뜨더니 곧 다시 감는다. 또 한 술 떠서 넣었다. 병인은 한 숟가락 반의 미음이 흘러들어가던 입을 반쯤이나 벌리더니, 가죽만 남은 턱을 쳐들면서 입에 문 것을 삼키려는 듯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두어 번이나 연거푸 안간힘을 쓴다. 목에서는 담이나 걸린 듯이 가랑가랑하는 소리가 모기 소리만큼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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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람들은 눈을 한층더 크게 뜨며 고개를 앞으로 내미는 듯하고 들여다보았다. 어머님은 여전히 염불을 부르시면서 베개 위로 넘어가려는 머리를 쳐들어 놓으셨다. 베개를 만지시던 어머님의 손이 떨어지자 깔딱 하는 소리가 겨우 들릴 만치 숨소리도 없는 환한 방에 구석구석이 잔잔하게 파동을 치며 문틈으로 흘러나갔다. 이것이 모든 것이었다. 이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나는 이상할 뿐이었다. 대관절 이것이 죽음이라는 것인가 하며 눈을 꼭 감은 하얀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앉았었다. 가엾은지 슬픈지 아무 생각도 머리에 떠오르지는 않았으나, 나를 쳐다보던 그 눈! 방긋한 화평스러운 그 입이 머릿속에서 오락가락하는 일편에, 내 손으로 미음을 떠넣어 준 것만이 무슨 큰일이나 한 것같이 유쾌하였다. 어머님은 윗입술을 쓰다듬어서 입을 닫게 하여 주시고 가만히 들여다보시더니, 염주를 들고 눈물을 뚝뚝 흘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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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벌떡 일어나서 사랑으로 나왔다. 책상머리에 기대어 담배를 피워 물고 앉았으려니까 큰집 형님이 데리고 온 양의(洋醫)가 허둥지둥 들어왔다. 마침 아는 의사이기에 들어와서 녹여 가라고 하였더니,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부정이나 타는 듯이 뺑소니를 쳐 가버린다. 사망진단서니 뭐니 성이 가신 일이나 맡을까 보아서 그런지, 의사도 주검이란 싫어서 그런지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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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어둔 뒤에 김천 형님 내외가 딸까지 데리고 올라온 뒤에는 나도 모든 것을 쓸어 맡기고 사랑에 나와서 담배만 피우며 가만히 누웠었다. 미음 한 술 떠넣어 주려 나왔던가 생각하면 공연히 온 것 같았다. 그러나 시체를 청주까지 끌고 내려간다는 데에는 절대로 반대하였다. 오일장이니 어쩌니 떠벌리는 것도 극력 반대를 하여 삼 일 만에 공동묘지에 파묻게 하였다. 처가 편에서 온 사람들은 실쭉해하기도 하고 내가 죽은 것을 시원히나 아는 줄 알고 야속해하는 눈치였으나, 나는 내 고집대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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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초상중에 또 한 가지 나의 고통은 눈물이 아니 나오는 울음을 울라는 것이었다. 이것도 처가붙이끼리라든지 집안식구들까지 뒷공론을 하는 모양이나, 파묻고 들어올 때까지 나는 눈물 한 방울을 흘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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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가 사납거던 계집으로 태어날 거야. 어쩌면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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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과부댁 누이가 마루에서 나더러 들어 보라는 듯이 한마디 하니까, 김천 형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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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네란 다 그렇지. 두구 보시구려. 달이 가시기도 전에 여학생을 끌어들이실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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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소곤거리는 것을 나는 안방에서 혼자 밥을 먹으며 들었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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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내년 봄이면 졸업이지? 인젠 어떻게 할 셈이냐? 곧 나와서 무어라두 붙들 모양이냐? 더 연구를 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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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 지낸 지 이틀 만에 사랑에서 아침을 같이 먹다가, 조용한 틈을 타서 형님은 불쑥 이런 소리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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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되어 가는 대로 하죠. 하지만 무어든지 내 일은 내게 맡겨 두시는 게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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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우선 한마디 해놓고 나의 계획을 대강 말하였다. 그리하여 자식은 요행히 잘 자라면 김천 형님이 데려가거나, 만일 김천 형님이 아들을 낳게 되면 큰집 형님이 데려가는 대신에, 내 앞으로 오는 것이 다소간 있을 것이니, 그 반분은 양육비와 교육비로 제공하되 장성할 때까지 김천 형님이 보관하기로 김천 형님과만 내약을 하여 두었다. 간단한 일이지마는 이렇게 수편하게 끝이 나니까, 한시름 잊은 것 같고 새삼스럽게 자유로운 천지에 뛰어나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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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청명한 겨울날이 계속하더니 오늘은 또 무에 좀 오려는지, 암상스런 계집이 눈살을 잔뜩 찌푸린 것처럼 잿빛 구름이 축 처지고 하얗게 얼어붙은 땅이 오후가 되어도 대그락거리었다. 사랑은 무거운 침묵과 깊은 잠에 잠긴 것같이 무서운 증이 날 만큼 잠잠하다. 김의관은 자기가 칭원이나 들을까 보아서 제풀에 미안하여 그러는지, 그저께 발인 때 잠깐 눈에 띈 뒤로는 보이지를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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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충한 사랑방에 온종일 혼자 가만히 드러누웠으려니까 무슨 무거운 돌멩이나 납덩어리로 가슴을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상처를 하였다 해서 별안간 섭섭하거나 설운 생각이 나서 그런 것도 아니요, 아이들이 없어서 조용한 집안이 초상 뒤에 한층더 쓸쓸하여진 것 같아서 그런 것도 아니다. 혹시는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상은 떠들썩하며 무슨 새로운 희망에 타오르는 것 같건마는, 조선만은 잠잠히 쥐죽은 듯이 들어엎디어서 그저 파먹기나 하며 버둥버둥 자빠져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무슨 무거운 뚜껑이 꽉 덮여 있는 것 같아서 답답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또다시 생각하면 아내가 죽어 가는 꼴을 마주 앉아 보았으니만치 어느 때까지 그것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고 지난 일이 곰곰 생각이 나서, 가엾은 추회(追懷)가 새삼스럽게 머리에 떠올라서 기분이 무거운 것도 사실이었다. 살아 있을 때에는 죽거나 말거나 될 대로 되라고 냉담하였지마는, 파묻고 들어와 보니 역시 한구석이 허전한 것 같고 지난 일이 뉘우쳐지는 것도 있는 것이었다. 아내가 살아 있을 때에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가엾은 생각이, 동정하는 마음이 유연히 마음속에 괴어 오르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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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잇, 하여튼 한시바삐 빠져 달아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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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친과 형님이 들어오시면 오늘 저녁차로라도 떠나 버릴 작정으로 건넌방으로 건너가서 가방 속을 정리하고 앉았으려니까, 어느 틈에 왔던지 안에서 병화댁과 을라가 인사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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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섭섭하시구 언짢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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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라는 위문이라느니보다도 젊은 남편의 상처란 그저 그런 거라는 듯이 생긋 웃으며 다시 장가갈 치하를 하는 듯한 어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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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이야 가엾지만, 생자필멸이니 하는 수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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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금방 비로소 죽은 아내가 가엾다는 생각을 하고 난 끝이라 도리어 정중히 이렇게 대거리를 하며, 사랑에 올라올 리는 없지마는 인사로 올라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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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두 섭섭하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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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라는 이런 소리를 하며 말똥히 나의 기색을 살피려는 눈치다. ‘그래두 섭섭’이란, 인사답지 않은 인사지마는, 나는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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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떠나십니까? 이번엔 꼭 같이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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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를 온 것이 아니라 동행하자고 맞추러 온 것 같은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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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이라두 떠날까 하는데 함께 나서시겠나요? 동행을 해주시면 심심치도 않고 매우 좋기야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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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실없이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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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게 서두르실 게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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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라가 놀라는 소리를 하려니까 한걸음 뒤처져 안에서 나온 병화가 다가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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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오늘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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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알은체를 하다가, 오늘 떠나든 말든 자기 집으로 가서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발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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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려면 오늘 떠나시게 되겠에요? 아무것도 없지만 잠깐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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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화댁도 옆에서 권한다. 자기네끼리 오늘 나를 찾아 인사도 하고 위로삼아 저녁 대접을 하려고 의논이 된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한가로운 기분이 나지를 않았다. 또 그것이 병화 내외로서는 을라에 대한 자기네끼리의 입장을 명백히 하려는 기회를 만들려는 뜻인지도 모르겠고, 을라는 을라대로 딴생각이 있는지 모르나, 나는 그런 것이 도리어 성가신 생각이 났다. 하여간 이 사람들의 이러한 눈치로만도 나는 작년 이래로 지나치게 오해였던 것이 풀린 것은 기쁘고 마음이 거뜬하여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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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끝에서 실랑이를 하다가 이 사람들을 돌려보낸 뒤에 나는 짐을 다시 싸기 시작하였다. 서류를 정리하다가 가방 속에서 나온 정자의 편지를 다시 한번 펴보았다. 이것은 초상중에 온 것을 대강 보고 집어넣어 두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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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誇張) 없는 말씀으로, 저는 이제야 겨우 악몽에서 깨어나서 흐리터분하고 어리둥절하던 제정신이 반짝 든 듯싶습니다. 오랜 방황에서 이제야 제 길을 찾아든 것도 같습니다. 그렇다고 무슨 신앙을 붙든 것도 아니요, 생활의 도표(道標)를 별안간 잡은 것은 아닙니다마는, 언젠가 말씀처럼 고민은 역시 제 길, 저 살 길을 열어 주고야 말았는가 합니다. 반년 동안 레스토랑의 경험은 컴컴하고 끈적끈적한 생활이었습니다마는 그래도 저는 그 생활 속에서 새 길을 찾았는가 싶습니다. 인간 수양, 세간 수양이 조금은 되었는가 합니다. 만일 내가 지금 지향(志向)하는 길로 나갈 수 있다면 M헌에서의 반년 동안 얻은 문견이 무슨 보토가 될지도 모르겠지요. 그러나 그보다도 그 동안에 당신을 만나 뵈었다는 것은 저의 일생에 잊지 못할 새로운 기록이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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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의 편지는 저번 내가 부친 엽서의 답장이나, 매우 희망과 감격에 찬 기분으로 씌었다. 동경역에서 헤어질 때 경도로 갈 듯하다더니 역시 설〔正初〕전으로 M헌을 하직하고, 경도 고모 집으로 갈 작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고모 집에를 가면 소원대로 이번 신학년부터는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 여자부에 입학할 예정이라 한다. 아마 저의 본집과도 양해가 되어 학비도 나오게 되고, 제 자국에 다시 들어설 눈치인지 모르겠다. 저의 집이 경도, 대판에서 뱃길〔船路〕로 대여섯 시간이면 건너서는 사국(四國) 고송(高松)이라는 데에서 해물상을 한다는 말은 들었지마는, 경도에 가서 동지사대학에 들어갈 준비를 할 터이라는 말을 듣고 보니, 나는 동경서 떠나 올 제 목도리를 사다가 함부로 허리춤에 찔러 주고 온 것을 생각하고, 혼자 속으로 찔끔하는 생각이 들며 혼자 얼굴이 뜨뜻해 왔다. 물론 보통 카페 걸로 여긴 것은 아니지마는 좀 너무 함부로 한 것 같아야 열적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저의 집이 얼마나 잘살거나 그것야 알 바 아니지마는 대학까지 가려는 생각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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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오뇌로 쌓아 올라가는 것인가 봅니다. 아니 번민, 오뇌로 쌓아 올라가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인가 합니다. 왜 이 말씀을 하는고 하니, 당신이 너무나 인생 문제와 사회 문제에 대하여 자기의 불만불평보다는 더 큰 것을 위하여 애쓰시는 것이 가엾어 그럽니다. 민족의 운명에 대해서 번민하시고 오뇌하시기 때문에―---또 저는 거기에 경의를 느끼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그런 속된 말로가 아니라 괴로움을 알아야 사람은 거듭나는가 합니다. 일본의 남자들은 너무나 괴로움을 모릅니다. 역시 대륙적이라 할지? 괴로움을 꾹 참고 딱 버티고 섰는 거기에 깊이 있는 생활이 있는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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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도 씌어 있다. 다감하고 예민한 계집애가 연애에 실패하고 집안에서는 쫓겨나고 하니까 보통 여자와는 다르겠지마는, 어떻게 생각하면 자기 나라 남성―---일본 남성에게 반기를 들고 내게로 오겠다는 사연인가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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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에는 동경으로 가는 길에 부디 경도로 전보를 미리 치고 자기에게 들러 달라고 고모 집 번지수까지 씌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만나면 전과는 달라서 퍽 여러 가지 이야기할 것도 많을 것 같지마는 한편으로는 어색도 하고 겁도 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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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만나면 어떤 얼굴로 만날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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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상상을 하여 보고는 큰 기대도 있고 큰 흥미도 있으리라고 궁리가 많았다. 갑갑하고 화가 나는 김에, 어서 가서 정자나 만나면 이 무거운 기분이 조금은 나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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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을 꾸려 놓고 어머님께 오늘 밤차로 떠나겠다고 여쭈러 안으로 들어가니까, 출입하였던 큰형님이 뒤미처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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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가 오늘 저녁으루 떠나겠다는구나! 내 이런 주책없는 애가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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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으로서 생각하면은 딸자식이 죽은 것과는 다르다 하여도 둘째며느리를 열다섯부터 앞에서 키운 정이 있으니, 집이 한구석 텅 빈 것 같은데 아들마저 초상을 치르자마자 훌쩍 가버리겠다니 어이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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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안간 이것은 무슨 소리냐? 가자면 나부터 가야지. 네가 왜 먼저 서두르느냐? 나는 아이들을 놀려 놓고 온 터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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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큰형님은 역정을 낸다. 나는 이 말에 찔끔하였다. 사실 경우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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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너무 기분주의야. 어쨌든 나는 내일 떠나야 하겠지만, 방학 동안은 좀 들어앉었으렴. 어머니께서 섭섭해 안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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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떠나는 것을 무기 연기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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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어 나간 건넌방에는 안에서들 들어가 자기를 싫어하는 모양이기에 내가 자기로 하였거니와, 형님이 떠난 뒤로는 더구나 혼자 드러누워서 이생각 저생각에 전전반측(輾轉反側)하며 잠을 못 이루는 날이 많았다. 곰곰 생각하면 날이 갈수록 죽은 사람에게 역시 미안한 생각이 간절하였다. 더 산대야 하나 날 자식을 두셋 더 낳았을 것밖에 별수야 없겠지마는 좀더 따뜻이 해주었더면 하는 후회도 난다. 그러나 생각하면 이런 뉘우침도 결국에는 자기가 당장 고적하고 아쉬우니까 그런가 보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 애인이라도 있다면 이생각 저생각 없이 뛰어 달아났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 어린것을 기를 걱정은 없다 하여도 조만간―---삼사 삭 후에 졸업하고 나오면 역시 혼자는 어려우니 장가는 들어야 할 것이나 누구를 고를까? 마음에 맞는 사람이 있기로 누가 선뜻 와줄까? 이런 걱정도 머리에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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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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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코웃음을 쳤다. 정자? 더구나 안 될 말이다. 공부를 시작한다는 것은 말 말고라도 인제 겨우 부모의 노염도 풀려 가는 눈치인데, 또다시 나 같은 사람과 문제가 새판으로 생긴다면 피차에 비극을 되풀이할 것이다. 그것은 고사하고 정자 같은 사람은 우리집에 들어와서 살 수 없는 일이요, 장래를 생각하거나 민족적 감정으로나 문제도 아니 된다. 이것저것 실제 문제를 생각하면 그래도 아내가 더 살아 주었더면 내 몸 하나는 편하였던걸 하는 생각도 든다. 죽으면 죽으라지 또 계집이 없을까 하는 방자한 생각이 뉘우쳐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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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하여간에 정자의 열심으로 써 보내 준 편지에 어느 때까지 모른 척하고 내버려두기도 안되어서 이튿날 이런 답장을 써 부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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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순조로이 해결되어 가고 학교에 들어가시게 되었다 하오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습니다. 과거 반년간의 쓰라린 체험이 오늘의 신생(新生)을 위한 커다란 준비시기이셨던 것을 생각하면, 그 동안 나의 행동이 부끄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마는, 한편으로는 내 생애에 있어서도, 다만 젊은 한때의 유흥기분만에 그치지 아니하였던 것을 감사하며 기뻐합니다. 그러나 뒷날에 달콤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할 뿐이라면 이렇게 섭섭한 일도 없고, 당신은 또 자기를 모욕하였다고 노하실지도 모르나, 언제까지 그런 기쁨과 행복에 잠겨 있도록 이 몸을 안온하고 자유롭게 내버려두지 않으니 어찌하겠습니까. 나도 스스로를 구하지 않으면 아니 될 책임을 느끼고, 또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야 할 의무를 깨달아야 할 때가 닥쳐오는가 싶습니다. 지금 내 주위는 마치 공동묘지 같습니다. 생활력을 잃은 백의(白衣)의 백성과, 백주에 횡행하는 이매망량(魑魅魍魎) 같은 존재가 뒤덮은 이 무덤 속에 들어앉은 나로서 어찌 ‘꽃의 서울’에 호흡하고 춤추기를 바라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이 하나나 내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고 용기와 희망을 돋우어 주는 것은 없으니, 이러다가는 이 약한 나에게 찾아올 것은 질식밖에 없을 것이외다. 그러나 그것은 장미꽃송이 속에 파묻히어 향기에 도취한 행복한 질식이 아니라, 대기(大氣)에서 절연된 무덤 속에서 화석(化石)되어 가는 구더기의 몸부림치는 질식입니다. 우선 이 질식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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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교 선생님이 사벨(환도)을 차고 교단에 오르는 나라가 있는 것을 보셨습니까? 나는 그런 나라의 백성이외다. 고민하고 오뇌하는 사람을 존경하시고 편을 들어 주신다는 그 말씀은 반갑고 고맙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내성(內省)하는 고민이요 오뇌가 아니라, 발길과 채찍 밑에 부대끼면서도 숨이 죽어 엎디어 있는 거세(去勢)된 존재에게도 존경과 동정을 느끼시나요? 하도 못생겼으면 가엾다가도 화가 나고 미운증이 나는 법입넨다. 혹은 연민의 정이 있을지 모르나, 연민은 아무것도 구하는 길은 못 됩니다…… 이제 구주(歐洲)의 천지는 그 참혹한 살육의 피비린내가 걷히고 휴전조약이 성립되었다 하지 않습니까. 부질없는 총칼을 거두고 제법 인류의 신생(新生)을 생각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소학교 교원의 허리에서 그 장난감칼을 떼어 놓을 날은 언제일지? 숨이 막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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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학의 도(徒)는 자유롭고 진실된 생활을 찾아가고, 이것을 세우는 것이 그 본령인가 합니다. 우리의 교유, 우리의 우정이 이것으로 맺어지지 않는다면 거짓말입니다. 이 나라 백성의, 그리고 당신의 동포의, 진실된 생활을 찾아 나가는 자각과 발분을 위하여 싸우는 신념 없이는 우리의 우정도 헛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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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형님이 떠날 제 초상에 쓰고 남은 것이라고, 동경 갈 노자와 함께 책값이며 용돈으로 내놓고 간 삼백 원 속에서 백 원을 이 편지와 함께 부쳐 주었다. 혹시는 다른 의미나 있는 줄로 오해할 것이 성가시기도 하나, 동경에서 떠날 제 선사받은 것도 있으려니와, 정자의 새출발을 축하하는 의미라고 한마디 쓰고, 다소 부조가 될까 하여 보낸 것이다. 실상은 동경 가는 길에 들르지 않겠다는 결심을 다시 하였기 때문에, 아주 이것으로 마감을 하여 버리고, 나도 이 기회에 가뜬한 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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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열흘 더 있다가 졸업 논문도 있고 아무래도 학교 일이 걱정이 되어서 떠나고 말았다. 정거장에는 큰집 형님, 병화 내외, 을라 들이 나왔다. 을라는 입도 벌리지 않고 오도카니 섰고, 병화 내외도 플랫폼의 보꾹에 매달린 시계만 쳐다보며 선하품을 하고 섰었다. 그러나 병화의 얼굴에는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모든 오해를 풀고, 인제는 안심하였다는 듯이 화평한 기색이 도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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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떠나려 할 제 큰집 형님은 승강대에 섰는 나에게로 가까이 다가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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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봄에 나오면 어떻게 속현(續絃)할 도리를 차려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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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난데없는 소리를 하기에, 나는,
69
“겨우 무덤 속에서 빠져나가는데요? 따뜻한 봄이나 만나서 별장이나 하나 장만하고 거드럭거릴 때가 되거든요……!”
70
하며 웃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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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류) 닫기 없음 ]] \i (오류) 닫기 없음 ]] ig(『만세전』, 수선사,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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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전(萬歲前) [제목]
 
염상섭(廉想涉) [저자]
 
1924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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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성 작품 (쪽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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